불교와 힌두교에서 윤회(輪廻) 차이 / 법륜 스님
윤회(輪廻)라는 말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인도 전통사회에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용어예요.
브라만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거나
소 되고 말 되는 것을 ‘윤회’라고 표현했다면,
부처님은 우리의 마음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윤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다시는 괴로움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는 ‘해탈’을 벗어나 '열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곳을 ‘천상’이라고 말하고, 즐거움은 없고 괴로움만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천상과 지옥을 돌고 도는 윤회를 한다고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뜻으로 윤회를 말하지 않았어요.
마음이 즐거운 것이 천상이고, 마음이 괴로운 것이 지옥인데,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고, 괴로움도 영원하지 않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계속 돌고 돈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윤회하는 걸까요?
이 윤회의 뿌리는 바로 ‘욕망’입니다.
내 욕망이 이뤄지면 기분이 좋고,
내 욕망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기분 좋음을 행으로 삼고,
기분 나쁨을 불행으로 삼으니까
행과 불행이 계속 되풀이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분리시켜서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반드시
그 뒤에 괴로움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서 행복하면
헤어질 때는 괴로움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고,
만남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만남의 기쁨이 지속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좋음이 몇 십 년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젊을 때 어떤 남자가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면
정말 행복한 것 같지만,
늙어서도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감옥입니다.
내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할 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지 않을 때
관심을 가져주면 괴로움이 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이렇게 늘 바뀌는 것을
붓다는 ‘윤회’라고 말한 겁니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이 없어져요.
그러면 동시에 즐거움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놓지 못해서
괴로움도 함께 가지고 다녀요.
그래서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괴로움을 없애려면 즐거움도 놓아 버려야 해요.
그게 ‘해탈’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수행을 하면
실현 가능하고, 증명할 수가 있어요.
도달은 못해도 경험해 볼 수 있고,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소가 되고,
말이 되는 것은 증명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종교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어요.
믿음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주관의 문제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 구나.’
이렇게 인정하면 될 일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과 힌두교를 섞어서
이해하려니까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는 겁니다.
불교는 불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힌두교적 믿음과 사상을 갖고 불교를 공부하는
이런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이
초기 대승불교의 문제의식입니다.
‘자아’라는 것이 따로 없고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입니다.
그런데 자아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은
이번에는 또 ‘그 다섯 가지 요소 각각은
독립적인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색에도 독립된 실체가 없고,
수상행식에도 독립된 실체가 없다’라고
다시 설명을 한 겁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색(色)이라 할 것도 없고,
수(受)라고 할 것도 없고,
상(想)이라 할 것도 없고,
행(行)이라 할 것도 없고,
식(識)이라 할 것도 없다.’
이걸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공중무색 무수상행식(空中無色 無受想行識)’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저한테 ‘윤회를 안 할 바에야
왜 좋은 일을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윤회를 한다고 하니까 겁이 나서 좋은 일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얼마나 비주체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지옥 간다는 협박과
천당 간다는 유혹에 의해서 성립하는
종교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유혹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지옥을 가든 천당을 가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남을 헤치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지금 나한테 더 좋다는 것을 압니다.
물에 사람을 빠트리는 게 기분이 좋아요?
물에 떠내려 온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기분이 좋아요?”
“건져주는 것이요.”
“진리는 지금 바로 작용하는 겁니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좋습니다.
남에게 구걸하는 것보다는
남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자신에게 만족스러워요.”
“감사합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왜 윤회하느냐는
질문은 충분히 할 만한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때의 윤회는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말 되고 할 때의 윤회를 생각해서 생긴
의문입니다.
그런 윤회는 증명할 수가 없어요.
붓다가 말한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출처 : 법륜 스님 <즉문즉설>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
힌두교(Hinduism)에서 ‘힌두(Hindū)’라는 말은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어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란 말과 동일한 어원을 갖는다.
때문에 힌두교를 인도교라고도 한다. 고대 브라만교(婆羅門敎, Brahmanism)가 힌두교의 전신이다.
B.C. 1,500년 무렵 인도 아리안족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강 유역 펀자브지방에 진입하고, 더욱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4성제도(Caste)를 세우고, 브라만교를 발전시키며, 브라만문화를 확립했다.
그때부터 B.C. 500년 무렵에 이르는 동안 <리그베다(Rg-veda, 찬가/讚歌)>를 비롯한 방대한 근본성전 <베다(veda)>를 편찬했다.
그 내용은 복잡하고 다양해 자연신숭배, 종교의례, 주술은 물론, 높은 철학적 사변까지 담고 있다.
이 종교의 본질은 다신교이며, <리그베다>에서 발단하는 우주 유일한 근본원리를 탐구하는 <우파니샤드(upanisad)>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우주 유일의 근본원리로서 브라흐만(梵/brahman)과 개인 존재의 본체인 아트만(我/ātman)이 상정됐으며, 결국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표명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힌두교는 B.C. 3세기 무렵부터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해서 인도 토착적인 여러 요소를 흡수하면서 이룩됐는데, 이 힌두교와 구별하기 위해 힌두교의 전신을 서양학자들이 브라만교라 이름 붙였다.
이처럼 브라만교는 힌두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어서, 넓은 뜻으로 힌두교라고 하면 브라만교도 포함된다. 오늘날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힌두교 신자이다.
힌두교는 브라만교로부터 신관(神觀)과 신화(神話)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신을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한다. 특히 트리무르티(Trimūrti, 삼위일체)가 일신교적 색체를 강하게 풍긴다.
즉, 우주창조신 브라흐마(Brahmā, 梵天), 유지신(維持神) 비슈누(Vishnu), 파괴신 시바(Shiva)의 세 신을 일체로 해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았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했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된다.
시바파는 수행자의 고행과 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이러한 힌두교와 불교는 발생지역(인도)이 같다. 지역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수행방식, 주요 교의(敎義) 등이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면이 많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힌두교의 일부 내용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후기에 갈수록 불교와 힌두교는 닮은 점이 많아진다.
----힌두교와 불교의 다른 점----
헌데 이와 같이 비슷한 측면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불교가 힌두교의 전신인 브라만교에 반발해서 성립했으므로 핵심적인 가르침에 있어서는 다르고, 극과 극의 면도 없지 않아, 힌두교와 불교는 그 경계가 분명하다.
그리고 힌두교는 고대 브라만교를 계승한 오랜 역사와 인도라는 지역적 특성, 그리고 지배, 통치체제 등 이러한 특수 환경을 기초해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라는 세 신(神)을 트리무르티(Trimūrti)라 해서 삼신일체라는 교리를 내세우고 있다.
아울러 우주를 생명성과 신성을 가진 대우주로 보고, 사람은 소우주로 봐서, 대우주와 소우주의 만남, 그리고 합일을 해탈이라고 해서 여기서도 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잡다한 인종의 차별화와 계급제도(카스트)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지배구조를 수립하고 있다.
그리고 힌두교는 오래된 인도의 토속적인 민간신앙이라 하겠고,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몸소 체험한, 인간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苦)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리고 힌두교엔 최고신 브라흐마ㆍ비슈누ㆍ시바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신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원하면 신이 감응한다고 하지만, 힌두교에 있어서는 아무리 깊은 신행을 해도 결코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고, 다만 신의 종이 되는 것이지만, 불교는 신행에 의해 해탈할 수 있다.
해탈이란 곧 성불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는 부처님의 종이 되는 게 아니고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인도라는 토양에서 공통의 환경 하에 자란 각기 서로 다른 두 나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함을 전제로 해서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검토해야 하겠다.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는 궁극적 실체를 인정하느냐하지 않느냐로 판단해 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육파철학(六派哲學)으로 대표되는 힌두사상은 모두 실체를 인정한다.
그러나 불교는 궁극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불교의 입장을 무아(無我)라 한다.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궁극적 실체가 없음(주석서에서는 nissaara라고 함)을 뜻한다.
무아라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불교에서는 현실을 조건발생[緣, paccaya]으로 설명한다. 존재란 많은 조건들(상좌부에서는 24연을, 설일체유부에서는 6인-4연-5과를, 유식에서는 10인-4연-5과를 말함)의 상호관계 속에서 찰나생ㆍ찰나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相續, santati] 것일 뿐이지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불교적 인생론이나 존재론을 이해하는 데는 이 찰나와 상속이라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물론 불교에서는 존재의 기본 단위로 법(dhamma)을 설정하지만 법은 실체가 아니다. 법이란 것도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소위 말하는 세 아찰나(亞刹那)로 구성된 흐름일 뿐이다.
물론 후대로 오면서 불교에서도, 특히 중국에서 아주 많은 불교교파가 생기면서,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이 많아졌다. 그리고 역시 인도철학도 다양해지면서, 힌두와 불교를 구분하기기 쉽지 않게 된 점도 있다. 그럴수록 원론적인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다른 점을 짚어보자.
① 힌두교엔 우주의 신(神)으로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라는 3신을 모시고, 이 삼신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는데, 이를 트리무르티(Trimūrti)라 한다. 그 외에도 30만이라는 많은 신이 있을 만큼 일신교 지향의 다신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신을 내세우지 않고, 사람인 석가모니불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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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힌두교에서는 창조주(브라흐마)를 인정하지만 불교는 연기설을 내세우며 창조주를 부정한다.
붓다는 깨달음과 구제의 도사(導師)이지 천지창조를 한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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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힌두교는 카스트제도에서 보듯이 다분히 숙명론적이다.
그러나 불교는 숙명론이 아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즉, 수행과 정진, 보시 등을 통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브라만의 카스트제도를 불교는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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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불교경전은 교조적이지 않다. 또한 붓다도 교조적 위치에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의 세계관은 붓다의 피조물이 아니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은 브라흐마나 여호아, 알라의 말씀(성경, 코란)과는 유(類)가 다르고, 그 내용은 절대적 믿음에 근거해 이해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불경은 믿음과 이해에 기초해 조성된 것이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맹신이 아니라 이해에 기초한 확신(勝解, adhimokṣa)이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는 신의 피조물이라 하고, 경전은 교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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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힌두교와 불교(대승불교) 모두 윤회를 인정한다. 다만 그 윤회의 주체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즉, 힌두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atman)을 내세우지만 불교에서는 업(業)에 따를 뿐,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를 부정한다.
불교수행자들은 다만 연기를 깨달아 번뇌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윤회를 벗어나려고 수행한다. 힌두교는 내생을 중요시하고 불교는 현생을 중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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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불교는 ‘나(自我)’에 대해 뚜렷하게 규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아(無我)와 무자성(無自性)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다만 ‘나’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연과 연기법에 따라 일시적으로 태어나고, 그리고 변하고 소멸해간다고 한다.
그러나 힌두교는 ‘나’의 실체를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것이 ‘진아(眞我, Atm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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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불교의 핵심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하며(무상ㆍ무아ㆍ공), 일체만유는 상의상관관계로 서로 연결돼 존재(연기)한다는 것인데, 이에 반해 힌두교에서는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존재(브라만과 아트만)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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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불교는 「무상ㆍ고ㆍ무아」라는 트랙에 충실하지만, 힌두교는 그것을 하나의 가변적 단계로 보는 듯하다.
힌두교가 노골적으로 「무상ㆍ고ㆍ무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불교에서 무아가 해체적으로 딱히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無)에 기반하고
있는데 비해, 힌두교는 ‘나는 있다’는 존재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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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불교는 평등과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고, 시ㆍ공간에 있어서 ‘지금 여기’에 주목하는 반면에 힌두교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거기, 저곳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핍박 받는 피지배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방편으로 현재의 고통을 체념하게 하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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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힌두교는 타력과 기도를 주장하고, 불교는 자력과 수행을 강조한다. 둘 다 참선수행을 하고 있지만 불교는 고유의 위빠사나 수행이 존재하며, 참선은 마음을 밝히기 위해서 하고, 힌두교의 경우에는 신과의 합일을 통해 마음을 밝히기 위해서 참선수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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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힌두교와 불교에서 해탈의 개념이 다르다.
힌두교에서는 이 세상은 신의 마음, 신의 꿈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따라서 힌두교는 창조주인 브라흐마를 인정하면서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존재(아트만)가 창조주인 브라흐마와 합일된다고 본다[범아일여(梵我一如)]. 그리하여 신과의 합일로 신의 세계(브라흐마 로카)에 가서 사는 것이 해탈이라고 본다.
불교는 스스로의 수행으로 꿈을 깨고,
대자유의 세계로 가는 것이 해탈이고, 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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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석가모니께서는 몸도 물질일 뿐이고 마음이나 정신 등 그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참 나’고 가짜 나고 ‘나’ 자체가 없다고 하셨다. 조건에 의해서 끝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변하는 것일 뿐, 어떤 인격체 같은 ‘참 나’가 있어서 이 몸이 죽고 나면 그 ’참 나‘가 지옥에 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난다는 등의 연속성 자체를 부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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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힌두교는 창시자가 없다. 그러나 불교는 교조 붓다(깨달은 자)에 의해 창시됐으며, 제자들이 붓다의 교훈을 경전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다만 후대에 가서 어리석은 중생들에 의해서 붓다가 숭배 대상이 되고, 기도의 대상이 됐으며, 법당에서 최고신 역할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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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철학적으로 힌두교는 존재론적 사고인데 비해 불교는 인식론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12연기, 사성제, 8정도, 무아사상이 흰두교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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⑮ 힌두교의 경우 고행을 인정하지만 불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고행을 인정하지 않고 금지시켰다. 불교에서 성불을 위해 고행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힌두교는 고행을 통해 업을 씻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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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많은 점에 있어서 힌두교와 불교는 차이점이 있다.
특히 힌두교는 장조주를 인정하지만 불교는 연기설로 대신하며 창조주를 부정한다. 어떻게 이 우주가 한 사람(혹은 신)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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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와서 보라!”고 하신 부처님의 당당한 말씀처럼 불교에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교의는 없다.
혹시 부파불교시대 부파간의 경쟁과 자파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리고 밀교에 의해 일부 비과학적인 힌두사상 내지는 환상적인 신화가 도입된 측면이 있다. 허나 그것은 단연코 부처님 사상은 아니다. 후세의 중생들에 의해 부가되고 창조된 것이다.
부처님 사상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교의는 없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냐 증명될 수 없는 것이냐, 이것이 불교와 타 종교 교의와의 분명한 경계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비슷한 점----
헌데 붓다가 지배층의 종교인 브라만교의 불합리함에 반발해 불교를 창시했으나 그 제자들은 붓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힌두의 품으로 돌아가서 힌두사상을 받아들이고 힌두화 함으로써 인도의 불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불교보다 더 오래 됐고 더 포괄적이고 더 현실적인 힌두교가 있고, 불교가 힌두화해서 불교와 힌두의 차이점이 희미해지면서 인도 불교는 종말을 고했다.
그래서 인도불교의 쇠퇴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의 하나가 ‘불교의 힌두화’이다. 불교가 힌두화함으로써 불교적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 불교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이다.
대승의 보살과 신들은, 재가자에게 필요해 보이는 힌두교의 신들을 이름만 달리해 불교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러다가 보니, 서민들은 다를 것 없는 자기 집 근처의 힌두 신전에 있는 신을 찾아가면서, 불교는 더욱 쇠잔의 길로 접어들자, 지각 있는 대승승려들은 달마처럼 동쪽으로 가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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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인도의 뿌네대학에 다니면서 힌두교를 굳게 믿는 교수들 밑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그들은 서슴없이 불교와 힌두교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왜 불교가 힌두교와 같은가라고 물으면 그들이 답하는 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사상(여래장, 불성)이 같다는 것이다.
우리(불교인)가 아무리 그들과 같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은 여전히 불교와 힌두교는 같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오해를 받을만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계속 변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오해받지 않을 붓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허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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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① 힌두교와 불교는 모두 열반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다. 그래서 윤회, 열반의 개념이 거의 같다.
이는 불교가 힌두교의 열반, 해탈, 윤회전생(輪廻轉生)의 교리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회의 원인, 윤회의 주체에 대한 생각은 서로 차이가 있다.
② 해탈(解脫)은 일체의 번뇌를 벗어난 최고의 경지와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나 편안한 심경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다만 힌두교와 불교는 해탈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혼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계속 수행하고 윤회전생을 해 제사장급에 이르면 해탈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범부중생도 수행에 따라서 해탈이 가능하다고 한다.
③ 힌두교와 불교 모두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고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다른 길임을 인정한다.
④ 각종 제사의식과 참선수행법(사마타 수행)을 행하는 것이 많이 닮았다.
⑤ 진언(眞言), 만트라, 각종 다라니 등의 수행도 비슷하다.
⑥ 힌두교의 삼위일체설 ― 트리무르티(Trimūrti)를 불교가 차입해서 삼신사상(법신ㆍ보신ㆍ화신)을 발전시켰으므로 이 부분이 서로 비슷하다.
⑦ 힌두교에서도 붓다(고타마 싯달타)는 존재한다. 힌두교에서 부처를 비슈니 신의 9번째 화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불교가 그들의 한 분파라고 한다.
⑧ 신앙의 대상에게 기도하고 복을 구하는 것이 같다.
⑨ 두 종교 모두 화장(火葬)을 한다.
⑩ 두 종교 모두 악(惡)의 개념을 인정하지만 악마가 있다고 보지는 않고, 악을 마음의 어두운 부분으로 본다.
⑪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각종 불⋅보살들은 힌두교의 신들이다. 인도에서 후대에 불교라는 이름 속에 편입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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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종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골격자체가 비슷하다. 그리하여 세계 힌두교협회에서는 동북아시아의 대승불자들을 힌두교도에 포함해서 집계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근본 교의는 전혀 다름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