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v.media.daum.net/v/20170804140337029?rcmd=rn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의 작심 토로
7월6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안동일 변호사(77)가 쓴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보기 드물게 보수와 진보 진영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등이, 진보 쪽에서는 함세웅 신부와 박석무 전 의원 등이 연단에 번갈아 올랐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통하는 안 변호사는 1979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중정 부장)과 두 부하의 국선 변호인이었다. 당시 공판조서, 변호인 접견 기록, 수사 기록 등 170일간 재판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를 만났다.
책을 펴낸 동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된 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이제는 시대 교체다”라고 했는데 공감이 갔다. 그 시대 교체를 사실은 10·26 때 했어야 한다. 10·26 당시 김재규 중정 부장의 거사 명분이 민주 회복과 적폐 청산이었다. 내가 겪은 170일간의 재판 기록을 책으로 펴내 10·26의 진실을 밝히는 디딤돌로 삼고 싶었다.
김 부장의 거사 명분을 적폐 청산이라고 보는 까닭은?
김 부장은 10·26 거사 명분을 ‘자유민주주의 회복’ ‘공화당 18년 정권에서 누적된 쓰레기를 치우는 설거지’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적폐 청산이라 할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이 책을 불편해하지 않나?
“국선 변호인으로서 김재규를 변론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책을 내고 추모까지 해야겠느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옥중에 있고 재판받는 이때 하필 이런 책을 내느냐” “너 좌빨 아니냐”라 힐난하고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기록자다. 팩트 체크에는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
김재규 부장의 국선 변론을 맡게 된 계기는?
군법무관시험 1기 출신으로 당시 군법무관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지명된 것 같다. 처음 김재규 부장과 부하 세 사람(박흥주·이기주·유성옥)의 국선 변호를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법정에 가보니까 김 부장에게는 30여 명의 사선 변호인단이 붙었고, 박흥주 대령에게도 변호사가 따로 있어서 처음에는 나머지 부하 두 사람만 변론하며 법정을 지켰다. 1심 재판 중간에 김 부장이 사선 변호를 거부하는 바람에 내가 현장에서 다시 선임됐다.
김재규 부장에 대한 첫인상은?
처음엔 나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대로 ‘패륜아’ ‘정권욕에 눈이 멀어 주군을 살해한 파렴치범’이 아닌가 생각했다. 접견을 하다 보니 진정성이 느껴졌다. 민주 회복을 위해 오랫동안 온건한 방법으로 박 전 대통령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다가 한계에 부딪혔고, 더 큰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그의 주장에 믿음이 갔다. 그때부터 이 사람을 적극 대변해줘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변론했다.
10·26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김재규 부장은 3군단장 때 유신헌법을 보고는 “이건 박정희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이지 민주주의 헌법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제거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3군단장 사령관실 울타리가 밖에서 안으로 못 들어오게 쳐져 있었는데, 거꾸로 안에서 바깥으로 못 나가게 바꿨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부대 시찰 올 때 연금을 시키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후 건설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에 권총 담을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유사시에 거사를 하려고 준비했다고 한다. 실제 임명장 받을 때 찍힌 사진에 권총으로 불룩한 바지 주머니가 보여서 이것도 법정에 증거로 냈다.
나중에 만들어낸 거짓 주장일 수도 있는데 뒷받침할 증거라도 있었나?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직접 쓴 휘호다. 1979년 3월부터 10·26 거사 전까지 붓글씨로 써서 집에 보관해온 휘호 6개를 증거로 냈다. ‘자유민주주의’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위대의(爲大義)’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등 10·26 전 자기 심경을 담은 붓글씨들이었다. 또 육사를 졸업한 막내 동생이 소대장으로 임관할 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도 불의에 맞서는 내용이 들어 있다.
유신체제의 첨병인 중앙정보부장 직책과 자유민주주의 회복 주장은 모순되지 않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야당을 상대로 정치공작을 했다는 점을 김 부장도 시인했다. 중앙정보부(중정)에서 우수한 인재를 많이 거느리고 국내 정보뿐 아니라 국제 정보를 다루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박 전 대통령에게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 온건론을 건의하면 ‘중정이 그렇게 약해빠져서 어떡하느냐’고 야단맞고, “야당 국회의원들 딱딱 입건해서 잡아넣어야지, (비위) 정보만 쥐고 있으면 뭐하냐”고 혼나고. 그 이유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옆에서 박 전 대통령을 부추기는 점도 작용했다고 하더라.
ⓒ시사IN포토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10·26 사건에 대해 재심을 검토 중이다.10월26일에 거사한 이유는?
결정적인 건, 부마사태가 일어나자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빗대 ‘300만명 죽어도 까딱없는데 그거 하나 진압 못하느냐’고 차지철과 박 전 대통령이 강경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부장은 그 지시대로 강경 진압책을 쓰면 부마사태가 전국 대도시를 비롯해 서울까지 확산된다고 보았다. 수많은 국민이 희생될 게 불 보듯 뻔한데, 그 희생을 막을 방법은 박 전 대통령을 제거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함께 사형당한 부하 다섯 명에 대한 인상은?
김재규 부장이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 부하들을 보고 알았다. 부하들은 보안 때문에 사전에 10·26 거사 언질을 받지 못했다. 어찌 보면 영문도 모른 채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부하들인데, 모두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똑같이 부장님 지시에 따르겠다”고 하더라. 또 사형을 앞두고 “평소에 부장님을 더 충실히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 죄송하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며, 김재규 부장이 얼마나 신망이 높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시 김 부장의 법정 기록(항소 이유서)에 박근혜(영애)와 최태민 목사의 관계가 언급되었는데?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녀 등 가족 관계와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 얘기는 항소 이유서를 쓰면서 ‘10·26 혁명’의 간접적인 동기로 집어넣었다. 당시 강신옥 변호사가 박선호 의전과장을 변호하면서 채홍사 얘길 들었다. 강 변호사가 나에게 대신 확인해달라 부탁했다. 내가 김 부장에게 이른바 ‘박정희 여자관계’를 물었더니 “안 변호사, 남자의 허리띠 아래는 말 안 하는 겁니다. 그만 물으세요”라고 하더라.
왜 그랬다고 보는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 마지막 의리랄까 충정이랄까 그런 마음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같다. 본인 얘기대로, 유신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한 사람만 제거하면 끝나는 것이지 다른 감정은 없다는 의미 같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10·26을 ‘내란 목적 살인’이라고 몰아갔는데?
집권 목적, 즉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없었다. 법률적으로 내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사건이다. 내란은 폭동이 있어야 한다. 부하들과 모의해 언제,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맡으라는 그런 모의도 없었는데, 부하들에게까지 내란목적 살인죄를 적용했다.
10·26 재판을 어떻게 평가하나?
그때 재판은 합수부가 강압에 의해 자기들의 집권 시나리오 일부로 여기고 간섭했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
구체적으로 신군부가 어떻게 압박했나?
대법정 옆방에 있는 법무감실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당시 합수부에는 검사, 판사들이 다 파견 나와 있었다. 들어가 보니까 한 10명이 쭉 앉아 있었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하루 종일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는 곳이었다. 보안사 장군이 딱 버티고 앉아서 내게 훈계하더라. “국선 변호사가 눈치 없이 재판을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 너 손 좀 봐줘야겠다”라고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 방에선 재판부와 검찰관에게 일일이 쪽지를 넣어 재판을 보안사 입맛대로 끌어나가고 있었다. 보안사에서 나를 연행하려 했는데 합수부에 파견된 판사가 막아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 판사가 보안사 장군에게 “안동일 변호사한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한다. 재판정에 외신 기자들도 많이 와 있는데, 안 변호사가 변론을 열심히 해야 공정한 재판이라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겠는가”라고 만류해서 내가 화를 면했다고 귀띔해줬다.
그 정도라면 10·26 판결에 대해 재심이 필요하지 않나?
지금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재심을 검토 중이다. 법리적으로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기존 재심 사건들과 달리 이 사건은 일단 사람들이 죽었다. 살인은 틀림없지만 내란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저항권 여부가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당시 유신의 압제를 탈피하려고 국민을 대신해 저항했다는 측면에서 저항권 이론이 어느 정도 성립될 수 있을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재심을 추진하는 이들을 최대한 법리적으로 도우려 한다.
신군부가 10·26의 진실을 덮기도 했지만, 김영삼·김대중 등 당시 유력 정치인도 김재규 부장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는데?
그 당시 YS(김영삼)나 DJ(김대중)는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저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10·26 평가는 고사하고 김재규 부장 구명에 관해서도 외면했다. 물론 그 후 둘 다 신군부에게 고초를 겪었다. 구명운동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나 천주교에서 주도했다.
출판기념회 때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참석해 축사를 했다.
사실 나오기 굉장히 꺼려했을 자리인데 이회창 선배를 어떻게 끌어냈느냐고 다들 묻더라(웃음). 이 전 총리도 10·26 사건 대법원 판결 당시 내란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 여섯 명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사직당한 것을 보고 사법부 역사의 오욕이라고 여겼다 하더라. 그때 가장 혹독하게 고초를 겪은 분이 양병호 대법관이었다. 이회창 전 총리만이 아니라 법조인이라면 10·26 사건은 사법 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재판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당시 양병호·민문기·임항준·서윤홍·김윤행·정태원 등 대법원 판사 6명은 김재규 부장을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으며,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행위가 국헌 문란 목적의 살인행위는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
끝으로 10·26 사건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는?
10·26 사건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났어도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이 너무 많다.
흔히 일제 35년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박정희 정권 18년과 전두환·노태우 정권 12년 등 30년 군사정권 유산도 청산하지 못했다.
YS도 유신 세력과 함께한 3당 합당, DJ도
유신 세력 JP와의 연합정권이라서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그 뒤 노무현 정부에서도 군사정권의 적폐 청산은 이뤄내지 못했다.
그 숙제가 이제 문재인 정부로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10·26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재평가하는 일은 결코 빠뜨릴 수 없다.
http://v.media.daum.net/v/20170920125755959
5·18 당시 베일에 싸인 야전공병단 행적..행불자 소재 단서될까
입력 2017.09.20.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 나선 5월 단체가 육군 야전공병단(이하 야공단) 행적에 주목하고 있다.
1980년 항쟁이 끝나고 암매장 추정 현장에서 굴착기를 봤다는 시민 제보가 나오고 있지만,
중장비를 운용한 야공단 작전기록은 공개된 적 없기 때문이다.
재단이 야공단 작전기록을 찾아 나선 이유는 5·18 당시 전남 화순 너릿재 인근 암매장 추정 현장에서 굴착기를 봤다는 시민 제보가 잇달았기 때문이다.
5월 단체 "야공단 행적은 미궁으로 남은 고속버스 사건과도 연관"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 나선 5월 단체가 육군 야전공병단(이하 야공단) 행적에 주목하고 있다.
1980년 항쟁이 끝나고 암매장 추정 현장에서 굴착기를 봤다는 시민 제보가 나오고 있지만, 중장비를 운용한 야공단 작전기록은 공개된 적 없기 때문이다.
[5·18기념재단 제공=연합뉴스]5·18기념재단은 5월 행방불명자 암매장지 발굴을 위해 1980년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야공단에 대한 기록을 찾고 있다고 20일 밝혔다.
재단이 기존에 확보한 다른 군 자료에 따르면 광주에는 야공단 병력 872명이 배치됐다.
야공단은 5·18 당시 광주 외곽 경계와 파손된 도심 복구 등을 수행했다고만 알려졌다.
이들 병력은 3·7·11공수여단처럼 민간인 살상행위에 가담하지 않아 다른 20여개 부대와 마찬가지로 5·18 진상규명 과정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재단이 야공단 작전기록을 찾아 나선 이유는 5·18 당시 전남 화순 너릿재 인근 암매장 추정 현장에서 굴착기를 봤다는 시민 제보가 잇달았기 때문이다.
최근 재단이 접수한 제보는 굴착기 5대를 동원해 군인들이 자루를 묻고 있었고, 사람 머리가 밖으로 나온 자루도 있었다는 등 내용이 구체적이다
5·18 민주유공자유족회는 1995년 무렵에도 다른 시민으로부터 유사한 제보를 받았다.
1995년 제보는 굴착기 숫자만 다를 뿐 상황과 장소가 최근 내용과 흡사하다.
유족회는 종일 또는 여러 날에 걸쳐 중장비가 증원됐다고 추정하며 제보들이 믿을만하다고 판단했다.
너릿재 주변은 주남마을 미니버스 사건 등 도심에서 임시 퇴각한 11공수 병력이 민간인 집단 학살을 자행한 지역이다.
주남마을 학살은 광주에서 전남 화순으로 향하던 17인승 소형버스에 가해진 무차별 사격으로 10명이 숨진 비극적인 사건인데 목격자들이 전하는 시신 수가 10구에서 27구까지 제각각이다.
재단은 시신이 나오지 않은 채 잊혔던 주남마을 인근 고속버스 사건이 너릿재 암매장과 무관하지 않다며 야공단 기록 확보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이 일어났던 날 육군 20사단 병력은 11공수와 임무 교대하고 주변을 정찰하다가 혈흔이 낭자한 채 소총탄피가 수북이 쌓인 고속버스 한 대를 발견했다.
목격자는커녕 탑승자조차 알려지지 않아 사건은 미궁으로 남았는데, 유족회는 계엄군이 미니버스와 고속버스에서 숨진 이들을 한데 모았을 때 시신 27구가 목격된 것으로 추정했다.
[5·18기념재단 제공=연합뉴스]야공단 행적이 베일에 싸인 배경은 7공수가 6월 중순까지 광주에 머물렀고, 11공수는 서울로 떠났다가 일반인 또는 보병 복장으로 광주에 돌아왔다는 증언과도 연관 지어 추론할 수 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민간인을 학살한 공수부대원이 증거인멸 차원에서 임시매장했던 시신을 발굴했다는 것은 기록과 증언을 통해 입증됐지만 이후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시신을 처리한 병력은 따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양래 5·18재단 상임이사는 "시민 제보와 군 기록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섬세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상임이사는 "군이 주남마을 근처에서 살해한 시민 시신을 광주나 화순으로 옮겨왔겠느냐"며 "대규모 암매장 현장에는 중장비를 투입했다는 게 합리적인 의심이다"고 덧붙였다
http://v.media.daum.net/v/20170926204509085?rcmd=rn
정치
<앵커>
5·18 헬기 사격의 진실을 찾아가는 연속 보도 이어가겠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가장 많은 날은 5월 21일입니다. 이날 광주에 투입된 무장헬기 500MD 운용 부대는 직제상 육군항공여단 소속이었지만 실제 작전 배치된 수도경비사령부의 지휘 통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경사령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장훈경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육군 1항공여단 502대대 출신으로 제대 1년 뒤인 80년 5월 21일, 광주에서 헬기 500MD의 기총 사격 장면을 목격했다는 최형국 씨입니다.
최 씨는 목격한 헬기에서 502대대라는 걸 알리는 노란 비표를 봤다고 말합니다.
[최형국/502대대 출신 : 서울 상공을 비행해야 하고, 청와대 뒤로 파견 나가는 부대니까 (노란) 표시를 해요, 502대대만 했어요. 좌우간 헬기 사격을 한 건 502대대라는 게 분명해요.]
당시 광주에 출동했던 502대대 소속 조종사도 비표에 대해 같은 말을 합니다.
[광주 출동 502대대 조종사 : 지상에서 봤을 때 꼬리 쪽에 붙어 있는 노란 딱지를 보면 502대대 소속으로서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임무 수행을 하는…그걸 식별할 수 있도록.]
헬기 조종사의 말대로 502대대의 작전 지휘 통제권은 청와대 경비 임무를 맡은 수도경비사령부에 있었습니다.
당시 수경사령관은 노태우 씨였습니다.
노태우 씨는 5월 21일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던 국방부 장관 주재 회의 석상에 전두환 씨와 함께 있었다는 보안사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그날, 5월 21일 헬기 기총 사격을 봤다는 여러 증언들이 맞다면 발포 명령 계통에서 노태우 씨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군 1항공여단 지휘관들은 여단의 헬기들이 무장 상태로 광주에 간 것은 5월 22일이 처음이라며 5월 21일 헬기 사격을 봤다는 증언들을 부인해 왔습니다.
전두환 씨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헬기 사격이나 발포 명령은 자신들의 지휘 체계와는 무관하다며 아예 상관 없는 일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전두환 (2003년 2월 인터뷰) : 군대라는 건 지휘 계통에 의해 딱 움직이는 거요. 나는 계엄사령관 부하요. (지휘 체계 이원화는) 군에 대해서 전혀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국방부 5·18 특조위는 오늘(26일) 목격자 최형국 씨를 만났고 당시 502대대 조종사들도 차례로 만나 신군부 세력이 실제 헬기 사격을 지시했는지 살펴볼 예정입니다.
(영상취재 : 조창현, 영상편집 : 김종우)
http://zum.com/?af=ay#!/v=2&tab=home&p=0&cm=newsbox&news=0432017102841122454
김성준의시사전망대]
“악덕 청량리 포주 출신 조폭 두목, 이번엔 처벌될까?”
* 대담 : SBS 김관진 기자
■방송 :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FM 103.5 MHz 18:05 ~ 20:00)
■진행 : SBS 김성준 앵커
■방송일시 : 2017년 10월 27일 (금)
■대담 : SBS 김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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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와해 된 조직원들 규합해 만든 ‘신청량리파’
- 상인들에게 상납 강요… 10년간 조직폭력 범죄 처벌 안 받아
- 하위 조직원들만 단순 폭행, 상해, 살인 등으로 가벼운 처벌
- 피해자들, 협박 때문에 수사기관에 제대로 진술도 못 해
- 신청량리파 두목, 재개발 사업에서 뒷돈 받은 것 탄로 나 구속
▷ 김성준/진행자:
청량리 588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서울 전농동에 있던 대표적인 집창촌 가운데 한 곳인데. 지금은 여기가 한창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규모도 굉장합니다. 1조 2천억 원 사업 규모인데. 65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이 4개 동이 들어가고요. 42층짜리 백화점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업에 조폭들이 개입해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겁니다. 이 조폭들이 그동안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수사나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SBS 보도국 김관진 기자가 나와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SBS 김관진 기자:
안녕하십니까.
▷ 김성준/진행자:
조폭인데 조폭으로 처벌된 적이 없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 SBS 김관진 기자:
일단 본격적인 설명을 드리기에 앞서서 이 조폭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지역은 청량리 588로 불리던 집창촌이 있는 자리인데요. 이 자리에서 포주를 하던 김 모 씨가 10여 년 전에 재결성한 폭력조직이 지금 청량리파입니다. 아주 정확하게는 신청량리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요.
▷ 김성준/진행자:
신(新) 청량리파. 원래 청량리파의 분파 같은 모양이죠?
▶ SBS 김관진 기자:
예. 원래는 이 지역에서 김 씨가 악독하기로 이름난 포주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노점상으로 이 지역에 처음 들어와서 포주가 되었는데요. 이 지역에는 원래 토착 폭력조직이 있었습니다. 윤 모 씨가 두목으로 활동한 일명 까불이파라는 조직이 있었는데요. 이게 1999년에 검찰이 대대적인 단속을 하면서 윤 씨를 포함해서 조직원 대부분이 실형 선고를 받고 사실상 와해가 됐습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이 바로 김 씨였는데요. 이 사람이 오갈 데 없는 조직원들을 규합해서 만든 것이 지금의 폭력조직입니다. 나중에는 까불이파의 두목으로 있던 윤 씨를 형님으로 모시면서 이 동네 상인들에게 상납을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사실상 조직폭력 범죄로 처벌 받은 적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면 조폭으로서 처벌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 김성준/진행자:
형사처벌을 받은 적은 없는데 소위 조직폭력 범죄 혐의가 아니었다. 이 말이죠?
▶ SBS 김관진 기자:
예. 관련법에 따르면 조폭 두목은 최대 사형, 간부급 조직원은 최대 무기징역 처벌까지도 가능한데. 이런 처벌은 폭력조직을 결성하기만 해도 바로 적용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부분으로 처벌된 적이 없다는 것은 결국 이들이 폭력조직으로서 인정을 제대로 받지 않아왔다는 건데.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해가 선뜻 되지 않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 김성준/진행자:
쉽게 말해서 조직폭력이 조직을 형성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갈취를 했으면 당연히 조직폭력 혐의로 처벌을 받아야 될 것이고. 그게 아니고 조직을 결성하지 않고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면 처벌을 안 받을 것이고. 그건 아주 명백한 일 아닙니까?
▶ SBS 김관진 기자: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계속 추가 취재를 하고 있는데요. 지금 현재까지는 그 하위 조직원들만 단순하게 폭행, 상해, 살인 등의 혐의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만 받아왔습니다. 이 조직을 결성해서 어떻게 활동했는지가 확인이 되면 두목인 김 씨와 간부급 조직원들도 처벌이 가능한데. 이러한 부분이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까 그동안 법망을 피해왔던 것이 사실인데요. 처벌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게 지난 2013년입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이 조직원들 80명 가운데서 50명에게 자백 진술을 받았는데 끝내는 기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폭 수사는 반드시 검찰 지휘를 받게 돼있는데. 당시 담당 검사가 이 청량리파는 조폭의 잔당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기소하기를 거부했다고 당시 수사 담당 경찰이 얘기했습니다.
▷ 김성준/진행자:
그런데 잔당이든 본당이든 법에 정한 조직폭력 행위를 했으면 조직폭력으로 처벌받는 것이지 잔당이라고 처벌 안 한다는 것은 좀 납득이 안 가는데. 이게 무슨 검찰과 조폭간의 유착 의혹이 나오는 겁니까?
▶ SBS 김관진 기자:
지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취재가 필요한데. 현재 유착이 됐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고요. 어쨌든 지금 청량리파에 대해서 수사하고 있는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기본적으로 수사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에 유착 얘기는 좀 많이 간 것 같습니다.
▷ 김성준/진행자:
피해자들을 직접 취재하면서 만나봤을텐데. 피해자들의 진술은 어떻든가요?
▶ SBS 김관진 기자:
여전히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그 두목 김 씨가 구속되기 전에는 훨씬 이 두려움이 컸고요. 구속이 되고 난 후에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인데. 가까이서 봐왔지만 한 번도 이 사람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한다고 이 피해자들에게 연락을 따로 해서 언제 출석을 해서 조사를 받자고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두목 김 씨가 따로 연락을 해서 잠깐 보자.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현장에 나가보면 소위 병풍이라고 얘기하는데요. 부하조직원들을 세워놓고 그 상태에서 수사기관에서 제대로 답변을 안 하면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하는 식의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가서도 결국 조직폭력배가 아니라 동네에서 잘 아는 형님이라는 진술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 김성준/진행자:
동네 형님. 참. 그런데 일단 피해자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습니까?
▶ SBS 김관진 기자:
기본적으로 제가 만났던 피해자들 중에서는 폭행은 상습적으로 이뤄져 왔고요. 예를 들면 산에 끌려가서 야구방망이로 집단폭행을 당했다거나 심지어 산에 끌려가서 영화 보면 조직폭력배들이 구덩이를 파서 묻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피해를 당했던 분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흉기에 찔렸는데 생명 위협까지 느낀 사람도 있었습니다.
▷ 김성준/진행자:
이제까지는 한 번도 이렇게 조직폭력과 관련된 수사나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그 무시무시한 두목이 기소된 겁니까?
▶ SBS 김관진 기자:
두목 김 씨가 구속된 게 지난 8월입니다. 서울북부지검에 구속됐는데요. 말씀하셨다시피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운영하는 폭력조직과 관련한 범죄 수사로는 한 번도 구속된 적이 없었는데. 엉뚱하게도 이 지역 재개발 사업 비리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김 씨가 10여 년 전부터 이 폭력조직을 운영하면서 사실상 그 사업을 진행하는 시행사를 차려서 재개발 사업에 깊숙이 관여했었는데. 이 시행사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철거용역업체에게 뒷돈으로 20억 정도 받은 게 탄로가 나서 지금 구속이 된 상태입니다.
▷ 김성준/진행자:
그렇군요. 그러면 검찰은 앞으로 어떻게 수사를 할 계획이라고 합니까?
▶ SBS 김관진 기자:
검찰 수사 방향은 지금 크게 두 가지입니다. 재개발 사업 비리와 관련된 수사가 있고요. 조직범죄 관련 수사가 있습니다. 재개발 사업 비리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수사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관련 계좌를 약 3천 개 정도 분석했는데. 문제가 되는 자금 흐름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사업을 진행하는 시행사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그 시행사와 관련해서 폭력조직이 연결됐다는 참고인 진술을 확보한 상태고요. 이 시행사의 주요 임원 자리에 간부급 조직원들을 앉혀서 사실상 그 시행사를 운영하고 관리해왔다는 부분을 검찰이 어느 정도 확인한 상태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만간 수사 결론이 날 것으로 보입니다. 조직범죄 수사의 경우에는 한동안 들여다봐야 한다는 입장이더라고요. 일반인들의 시선에서는 사실 조폭이면 바로 수사도 진행할 수 있고 기소가 되면 처벌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조폭 범죄가 재판에 갔을 때 입증하는데 사실상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검찰에서는 얘기하더라고요.
▷ 김성준/진행자: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여튼 어떤 방향이든 간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무슨 청량리 황제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이런 조폭 짓을 하고 다녔다는 것은. 조폭이 말이죠. 제일 나쁜 게 정말 어렵고 약한 사람들 등쳐서 자기들 배불리는 게 가장 나쁜 짓입니다. 앞으로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 SBS 김관진 기자:
네. 감사합니다.
http://v.media.daum.net/v/20180509050635986
[단독] "5·18때 군인들에 집단 성폭행당한 여고생, 결국 승려 됐다"
입력 2018.05.09. 05:06 수정 2018.05.09. 07:26 댓글 3132개
1980년 5·18 당시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10대 여고생이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을 앓다가 여승이 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군인들에 의한 집단 성폭행에 대한 증언과 증거자료가 나옴에 따라 계엄군과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의 성폭행·고문 사실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예명 이세상·65)씨는 8일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ㅇ씨의 사연을 사진과 함께 <한겨레>에 공개했다.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피해자 오빠 "청문회에 나가 한 풀어달라" 요청
"그렇게까지 했겠느냐"는 반대로 당시 공개 못해
[한겨레]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예명·이세상·65)씨가 1989년 2월 20일 전남 나주 남평 한 식당에서 여승이 된 ㅇ씨를 만나 5·18민주화운동 때 겪은 사연을 듣고 있다. 이지현씨 제공1980년 5·18 당시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10대 여고생이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을 앓다가 여승이 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군인들에 의한 집단 성폭행에 대한 증언과 증거자료가 나옴에 따라 계엄군과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수사관들의 성폭행·고문 사실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5·18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지현(예명 이세상·65)씨는 8일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당한 ㅇ씨의 사연을 사진과 함께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날 아침 <한겨레>가 보도한 ‘지울 수 없는 5월…60여일 고문 뒤 석방 전날 성폭행’ 기사를 보고 연락해온 것이었다.
이씨는 1989년 2월20일 ㅇ씨 고향의 한 식당에서 ㅇ씨를 만났다. ㅇ씨는 ㄱ여고 1학년이었던 1980년 5월19일 집으로 걸어 돌아가다가 군인 5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1989년 국회 5·18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ㅇ씨의 오빠가 증인으로 출석하려던 이씨를 찾아와 “청문회에서 동생의 사연을 공개해 동생과 어머니의 한을 풀어달라”고 부탁하면서 ㅇ씨를 만나게 됐다.
이씨가 ㅇ씨에게 “5·18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느냐”고 묻자, ㅇ씨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옆에서 오빠가 “공수부대 여러 명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자, ㅇ씨는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ㅇ씨 오빠는 이씨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뒤 동생이 미쳐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절로 보내서 여승이 되었다”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ㅇ씨의 이야기는 1991년 5월 여성연구회가 펴낸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이라는 책에도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성폭행을 당한 ㅇ양은 뒤 혼자 웃어대거나 동네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기도 하는 등 불안 공포증을 보였다. 점차 상태가 악화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기도 했던 ㅇ양은 1987년 3개월여 동안 나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광주사태 관련자 부상 정도 판정위원회’의 추천으로 진료를 받기도 했다”고 쓰여 있다. 그 뒤 ㅇ씨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씨의 증언과 사진으로 승려가 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씨는 당시 잔혹한 범죄의 희생물이 된 ㅇ씨의 사연을 청문회에 나가 공개하기로 하고 여승이 된 ㅇ씨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이씨는 “그 때 청문회에 나가서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와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이 웃고 있는 사진과 함께 군인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해 여승이 된 ㅇ씨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ㅇ씨의 사연은 국회 청문회 때 공개되지 못했다. 이씨는 “당시 5·18단체 관계자들조차 ‘아무리 흉악한 놈들이라도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느냐’며 내 말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지현(예명 이세상·65)씨가 1989년 2월 ㅇ씨를 만나 사진을 찍은 뒤 국회 광주청문회용으로 만들었다가 공개하지 못한 자료. 당시 이씨는 ㅇ씨의 뒷모습과 광주 민간인 학살 책임자들의 부인(이순자, 김옥숙)이 웃고 있는 사진을 나란히 붙여 전단을 만들었다. 이지현씨 제공수많은 사람들이 폭도로 몰려 숨졌던 당시 상황 속에서 성폭행 피해자들은 ㅇ씨 외에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청문회나 5.18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지 않은 여성들의 피해 사례에 대해서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씨는 “민간인 학살 책임을 가리는 것과 함께 무엇보다 그동안 숨겨졌던 여성에 대한 국가 폭력의 진상이 낱낱이 규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에게 한쪽 눈을 잃고 5·18 진상규명 투쟁에 나섰다가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그는 2012년부터 5·18 가족사와 현대사의 아픔을 담은 <애꾸눈 광대-어머님 전상서>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문화를 통해 5·18의 진상을 규명해보겠다는 생각이다.
http://v.media.daum.net/v/20170830205020107
"계엄군, 8대뿐이던 '코브라 헬기' 5대
광주 투입 요청"
http://www.nocutnews.co.kr/news/4823598
늘 약자 곁에서 카메라 들던
그의 유언은 "미안해"였다
인권운동가 박래군 소장이 전하는 고 박종필 감독의 '유언'
고 박종필 감독(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화면 갈무리)
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 곁에서 늘 카메라를 들었던 영상활동가 박종필 감독이 지난 28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9세. 30일(일) 저녁 6시부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박 감독을 추모하는 행사 '삶으로 만나는 박종필'이 열려 마지막 순간까지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선체조사 작업을 기록했던 고인을 기린다. 앞서 인권운동가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이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유언'이라는 글에는, 투병의 끝자락에 서 있던 고인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누리꾼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박래군 소장은 "강릉의 한 허름한 병원의 2층 병실에 그가 있었다. 평소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뼈만 앙상하게 드러났다. 말라도 너무 말랐다. 기아에 시달리는 난민도 이렇지는 않을 듯했다. 그리고 온몸에 황달기가 퍼져서 노란 물감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병상 침대를 세워서 거기에 기대어 앉았다. 병실에 들어가니 뼈만 남은 얼굴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웃으니 겨우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눈물부터 나려고 했다. 이런 모습이 뭐냐고 말하고 싶었다. 목울대를 뜨겁게 달구며 울음이 올라오려고 했다. 애써 울음을 목울대 아래로 누르면서 그의 뼈만 남은 왼손을 잡았다. 냉기가 전해져 왔다."
박 소장은 "'형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해,' (나의 이 말에)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며 "말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제가요, 어설프게 운동을… 깝치고 다녔어요. 젊을 때요,' 그렇게 그는 말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택시운전을 했어요….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이 싫었어요…. 아버지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였는데, 그림을 때려쳤어요.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미술을 했어요…. 민중미술을 했어요. 빈곤한 사람을 그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는 추계예술대에서 미대를 다녔고, 판화를 했다고 한다. '그게 이어져서 IMF 터지고… 노숙인들 찾아갔죠. 1년 동안 같이 살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때 그 형님 다 죽었어요…. 20대 말 30대에 많이 흔들렸어요. 그때 박경석(장애인 인권운동가·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교장 선생님을 만났어요…. 경석이 형한테… 많이 배웠어요. 장애인 운동은 내게 너무 소중해요….' 한참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큼 힘이 들어 보였다. '힘들면 천천히 해도 돼. 누울래?' 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들릴 때 경석이 형과 래군이 형 보면서 흔들리지 말고 가자고 했어요…. 형 고마워요.' 얘가 나한테 고맙다고 한다."
◇ "간암 말기였어요… 세월호 가족들이 모르길 바랐어요…
내가 너무 미안해요"
박 소장은 "어떻게 나한테,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소식도 모르고 이제야 너무 늦게 찾아온 내게 고맙다고 한다. 미치겠다"며 글을 이었다.
"그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청각장애인 생활시설) 에바다 투쟁할 때 형한테 야단맞았잖아요…. '끝나지 않는 에바다'라고 해서.' 그리고는 웃는다. 에바다 투쟁은 7년 반을 끌었다. 사회복지시설 싸움은 질기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싸움이다. 그 싸움의 한복판에 있을 때 그가 만든 영상 제목을 두고 나는 그를 타박하고는 했다. 한 번은 에바다 농아원 앞에서 피케팅을 할 때 한 학생이 똥물을 뿌렸고, 나와 박경석 교장은 그 똥물을 뒤집어썼다. 그때 그는 근처 건물 옥상에서 이 장면을 찍었다. 덕분에 그때의 사진이 남아 있다. 그는 수돗가에서 얼굴의 똥물을 닦아줬다."
"왜 진작 알리지 않았냐? 좀 말해주지"라는 물음에 박 감독은 "제가요… 원래 간경화가 있었는데요… 목포에서 일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쉬었는데… 병원 가서 진단하니까… 간암 말기였어요.… 세월호 가족들이… 모르길 바랐어요. 세월호 일하다가 과로해서… 그랬다면 안 되잖아요. 너무 미안해서요. 내가 너무 미안해요"라 답했다고 박 소장은 전했다.
"'네가 왜 미안해. 그런 생각 마라.' 목젖이 너무 뜨거워져서 겨우 이 말만 반복했다. 왜 네가 미안하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 자리를 황급히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서 겨우 진정을 한 다음에 다시 들어가니 장애인 활동가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형을 기다렸나 봐. 말을 해보라고 해도 안하고 웃기만 하더니 형한테는 말을 많이 하네.' 예전에 인권영화제 했던 후배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급히 서울에 올라와야 할 일이 있었다. 시간을 보니 이미 늦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형이 서울에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이만 올라가야 해. 내일 다시 올게. 내일 꼭 보자.' 그러면서 악수를 하고 일어나려니 팔을 벌리고 안아달란다. 그를 안으니 앙상한 뼈만 남은 몸이 실감나게 느껴져 왔다. 순간, 얘가 며칠 못 살겠구나, 그런 생각이 훅 스쳐갔다. '대표님한테 형이 유언을 남겼네요.' 416연대의 배처장이 말했지만, 그가 말하기 전부터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몇 번씩 끊어서 큰 숨을 쉬어서 제어했다. 강릉에서 서울로 오는 고속도로에 장맛비가 퍼부었다. 그때 비라도 그리 내리지 않았으면 가슴이 폭발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음날 (박 감독은) 오전에 병실을 찾아온, 가깝게 지내던 이들을 만나서 너무 울었단다. 고 김관홍 잠수사 얘기가 결정적이었나 보았다. 그는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영상을 만들었다. 오전에 전화가 울렸다. 그를 간병하던 다큐인의 활동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다급하게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말했다. '형이 기진해서 말을 못해요. 오셔도 만나실 수 없어요.' '그래 알았어요. 깨어나면 꼭 물어봐줘요. 어제 내일 꼭 내려간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리고 오후에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이 안 내려오셔도 된대요. 래군이 형은 챙겨야 할 사람도 많고 바쁘니까 안 오셔도 된대요.' 녀석은 마지막까지 나를 챙겨주고 있었다. 그날 내려가지 못했고, 그 뒤에도 내려가지 못했고, 그가 혹시 다 못한 말도 듣지 못했다."
박 소장은 "임종이 가까웠다고 해서 금요일 오후에 차를 달려서 내려가고 있었다. 416연대 안대표를 싣고 가야 해서 그 방향을 향해서 차를 달려 동호대교를 넘고 있었는데 아는 후배한테서 문자가 왔다"고 적었다.
"'종필씨 막 잠들었다.' 만약 그 차에 나 혼자만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차를 돌려야 하는데 강일동까지 기어이 차를 몰고 갔다. 그날 밤 서울대병원 안치실에 도착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이제 그와 헤어져야 한다. 그의 이름은 박종필. 그는 만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통을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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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ocutnews.co.kr/news/4823598#csidxbcb47c1434d67feb4a2ace4e4931b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