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게시판
충격적인 미국 상황 kbs가 국민 기만 했다는 증거글..
고대 경영대[다들 아시다시피 현 대통령이 졸업한 곳이죠;]를 잠시 휴학하고
뉴욕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뉴욕에서 생활한지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겁니다.
개인의 주관적 생각임을 미리 양해드립니다.
제가 본 미국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처음 방을 구하러 다닐 때, 집집마다 세탁기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미국은 빨래방이 많이 발달했지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보시면 주인공들이 빨래방에 가서
동전 넣고 세탁기를 돌리는 모습도 나오지요.
세탁기 한번 돌리는데 30분 정도로, 작은 크기부터 $1.50, $2.50, $3.50 하는데,
맨하튼 시내는 $1씩 더 비쌌습니다. 그리고 건조기는 6분에 15cent라서
제대로 말리려면 최소 $1~$2은 넣고 돌려야 합니다.
저는 개인한명이고 여자라 빨래를 자주해서 한번하는 빨래 양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4인가족이 사는 집이라면 한달에 빨래하는 데 드는 돈만 몇만원 들거라 생각됩니다.
무거운 빨래들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옮기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도 짜증나서
대체 왜 얘네는 집집마다 세탁기가 없나하고 물어봤더니,
수도세랑 전기세가 워낙 비싼데 세탁기가 물이랑 전기를 워낙 많이 잡아 먹으니까
집에 세탁기를 놓는 집은 돈많은 집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한국엔 집집마다 다 있는데.
무선인터넷은 한달에 $40씩 나오고, 룸메이트랑 계정 공유해서 쓰는데
속도가 느려터져 죽습니다. 그리고 자꾸 끊깁니다.ㅠ
클럽박스 다운받으면 퀵으로 해놔도 최고속도가 30바이트도 안나옵니다 -_-;;;;
그것도 꾸준히 받아지기라도 하면 다행이지요.;ㅠ
분명히 인터넷은 되는데 클박 퀵다운 속도 0바이트라고 뜨는 경우가 태반입니다.=3
실시간 스트리밍 동영상은 꿈도 못꿉니다.
김연아 선수의 3분 공연을 15분~20분이상 들여야 띄엄띄엄 봅니다........ㅠ
이젠 그냥 해탈했습니다.....
뉴욕은 미국에서 최고의 도시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미국 사람들도 뉴욕에 오고 싶어서 난리라고 합니다.
제가 미국 올때 캐나다에서 환승했는데, 캐나다 학생들이 우루루 뉴욕행 비행기에 타더군요.
그리고 미국 JFK공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환호성을 질러서 깜짝 놀랬답니다.
[속으로 촌놈들....하고 생각했지만요;; ㅋ]
이 정도로 온 미국 사람들, 전 세계 사람들의 선망이 되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우선 지하철. 미친듯이 더럽습니다. 뉴욕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래되면 공사를 해서 깨끗하고 좋게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미국 정부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닐테고.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공사한답시고 길 막아 놓고 지연되고
비오면 물새고 쥐 돌아다니고 낙서 가득하고 이상한 냄새 나고 핸드폰 안 터집니다.
청결하게 하고, 낙서 지우고, 핸드폰 터지게 선 깔고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와서 우리나라 지하철이 그렇게 좋은 건 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하철, 다음 올 열차가 어느 역에 있는지, 얼마쯤 왔는지 전광판으로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열차 내에서는 안내방송 계속 해주고, 전광판으로 다음역 표시해주고 정말 편리합니다.
미국 현지인들도 차장의 안내방송이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짜증난다고 불평합니다.
모든 선은 Local[모든 역에서 섭니다]과 Express[주요 역에서만 섭니다]로 나뉘는데,
잘못 탔다간 갈아타야되고 되돌아 가야되고해서 시간버리기 일쑤입니다.
분명 열차는 Local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Express고,
Express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Local이고,
심지어는 앞의 칸은 Local 표시, 뒷칸은 Express 표시고.. 난리도 아닙니다.;;
열차 표시만 보고선, 잘 들리지도 않는 방송 안 들었다가는 낭패봅니다.
버스도 마찬가지구요. 서울 버스, 역마다 일일이 방송 나옵니다. 전광판도 있습니다.
여긴 전광판이고 방송이고 없습니다. 있어도 제대로 작동하는 게 많지 않습니다;;;
목빠져라 창밖을 쳐다보면서 어디쯤 왔나 계속 확인해야 됩니다.
자리 못잡고 서 있으면 확인도 힘듭니다.
가끔 버스운전사들이 알려주는데 혼잡하면 그나마도 잘 안 들립니다.ㅠ
[물론, 제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못 알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인터넷 뱅킹 안 됩니다. 인터넷 뱅킹 되는 곳은 같은 은행끼리만 된다고 합니다.
ATM에서 조차도 타행송금 안됩니다.........;
우리나라 식일거라 생각했다가 완전 낭패봤죠........
여기 아직도 Check씁니다. 영화같은데서 많이 나오죠.
개인수표(check)묶음 들고 다니면서 금액 적고 싸인해서 제출하는 거요.
영화로 볼땐 멋있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었습니다.;;;
check을 쓰면 불편한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돈이 즉시 지급되지 않습니다.
그 check을 은행에 가져가야 돈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당연한 얘기지만, 생각없이 check발행했다가는 금방 파산됩니다;
돈이 그때그때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잔액 확인도 불분명하죠.
더 황당한 건 ATM으로 입금할 때....
우리나라에선 ATM에 현금 넣으면 좌라라락 해서 기계가 돈 세고 즉시 입금되어
통장에 찌찍~.하고 액수 찍힙니다. 입금 즉시 통장에 있는 돈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입금용 종이봉투에 돈을 넣습니다.
밀봉하고 겉에다 계좌번호, 액수, 이름, 서명합니다.
봉투 통째로 ATM에 집어넣습니다.
다음날 아침 직원이 ATM기계 열어 봉투들을 수거합니다.
수거한 봉투들을 창구 직원들이 일일이 컴퓨터로 입력합니다.
전 정말 황당했습니다.;
그야말로 편지봉투에 돈 넣어서 '얼마얼마 넣었으니 어디어디 은행에 갖다주세요~'
하고 우체통에 넣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한국 유학생들이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한국식으로 ATM에 현금 그대로 집어 넣었다가..
그냥 찾지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 그 돈은?...수거하는 사람이 꿀꺽 한거죠-_-;]
한국 가정에서 전기세 얼마나오는 지 잘 모릅니다. 주부가 아니라서;
미국 와서, 집집마다 차이가 있지만, 정말 정말 아껴쓰는데도
방 두개 짜리 한 집에 한달에 최소~최소~~150불씩 나옵니다.
저희 전기세 너무 무서워서; 꼭 필요할 때만 최소한으로 전기씁니다.
전자레인지 안쓸땐 꼭 코드 뽑고 다니고 제 방엔 TV도 없습니다.
저희 집엔 한국 일반 가정집에 많이 있는
세탁기, 김치냉장고, 오디오, 전기장판, DVD, 전화기 등등 없습니다.
코드 다 뽑고 다니고 불 다 끄고 다니고 학생들이라 밖에 늦게까지 놀고 하느라
밤에 불키고 있을 시간이 일반 가정집보다 훨씬 적습니다.
그런데도 최소 150에 200불 정도 나오니까..
맨하탄은 세금도 더 비쌉니다; 저희집은 맨하탄은 아니고 퀸즈거든요.
[뉴욕은 맨하탄, 퀸즈, 브루클린,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인 가족 일반 가정집에서 전기세 얼마나올지는..
단순 계산해봐도 방 4개짜리 집에 한달 최소!! 300불~400불 나온다는 얘깁니다. -0-;;;;;;;;;;
그러니 우리나라 전기, 수도세 기존보다 최소 3~4배 오른다고 하는 겁니다.
한번 올리고 나서 점차 계속 오르겠죠. [미국 수준으로? -_-;;;;;;;;;;;;;;;;;]
그리고 미국은 민영의료보험입니다.
의료보험료도 미친듯이 비싼데 보장해주는 병도 얼마 안되서
미국 국민의 상당수가 의료보험에 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기로 한번 진찰 받으면 10만원 이상 깨집니다.
한국에서 1000~2000원 하는 약들을 만원 이상씩 팝니다.
저 렌즈를 끼는데 어느날 눈이 너무 아파서 안경점에 갔습니다.
잠깐 눈 좀 봐줄 수 있냐고 했더니, 그건 의료분야에 속하는 거라서
잠깐 검사해주는데에도 75불이 든다는 겁니다;
한국 안경점에선 그냥 봐주는 데도 있고, 안과에가서 진찰하는데도
기껏해야 3000원 정도입니다. 미친듯이 아팠지만.. 도저히 75불을 낼 수 없더라구요.ㅠ
꾹 참고 집에 들어와서 지식인 검색했더니
각막에 스크래치가 좀 심해서 그런 거란걸 알게되었죠.
렌즈 빼고 안경끼면서 그냥 냅두면 자연치료되는 거랍니다. 여기엔 약도 없고.
진짜 여러분이 우려하시는대로..
여긴 아파도 병원가는 게 두렵습니다. 아프지 말아야 됩니다.
엠뷸런스 한번 부르면 1000불 그냥 넘어갑니다.
우리나라 현 의료보험은 '당연지정제'[현 대통령이 폐지하려는 것이죠]로,
모든 병원들은 국민건강보험[나라에서 운영]이라는 보험만 계약해야하며,
모든 국민또한 이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네이버 치시면 금방 나오니까 생략하고,
결론은 당연지정제 폐지가 필수적으로 국민건강보험 폐지를 초래하고,
그로 인한 여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실제 미국에서 일어나는 예들을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A라는 회사의 민영 의료보험에 비싼돈을 주고 가입했습니다.
임신을 해서 진통이 왔습니다.
엠뷸런스는 비싸서 못 부르고 남편이 자가운전해서 가까운 병원 응급실을 찾아 갔더니
A회사랑은 계약이 안되어 있어 보험 혜택을 하나도 못받는 다고 합니다.
급하게 알아봐서 A회사보험이 적용되는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아기 낳았더니 몇백만원입니다. 입원하면 입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일을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이 잘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손가락 접합수술 몇십만원이면 합니다. 미국에서는 몇백만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술비를, 일상생활에 얼마나 밀접한가에 관련하여 책정합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힘듭니다. 그래서 싸게 책정합니다. 생계와 밀접하기 때문이죠.
반면, 미용을 위한 성형수술과 같은 경우는 수술비가 비싸고 보험적용이 안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수술이 얼마나 어려운가,
수술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재료값이나 도구, 기계값이] 얼마나 비싼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손가락 접합의 경우에는 수술이 어렵기 때문에 비싸게 책정된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일 수록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선생님[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선생님 친구가 병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너무 비싸서 수술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부시가 쿠바를 악의 축이라고 몰아붙여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죠.-_-]
미국 사람들은 쿠바에 가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친구는 수술비가 싸다는 소식을 듣고 쿠바로 밀입국하여 갔는데
몇십달러 들지 않고 수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공호흡기도 사용하고[미국은 비싼가 봅니다] 입원도 하고,
쿠바 사람들도 너무 착하고 친절하고 그렇게 천국같은 곳이 없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얘기를 듣는데 우리나라가 쿠바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장난 공중전화기가 수도없이 방치되어 있고,
전화를 걸고 문자를 쓰면 받는 사람도 똑같이 돈이 나가고,
월 스트릿에서 2만명이 일시 해고되고[경제 상황이 그 만큼 안 좋습니다.],
집 안에서 쇼파에 앉아 있는데 쥐가 발을 툭툭 치고 다니고[맨하튼 사는 친구네;]
그나마 손가락만한 바퀴벌레는 친구고[저희 집 ㅠㅠ]
밤마다 마약하다 죽은 사람[뉴욕온지 2개월째되던 친구,
지하철 열차안에서 잠깐 졸았다 눈 떠보니 앞에 마약먹고 죽은 여자가..;],
길거리엔 미친사람들[버스나 지하철 타면 중얼중얼 헛소리하는 사람들 꼭 봅니다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 도로에서 인파를 향해 물건 마구 집어던지는 미친 놈때문에
사람들 비명지르며 도망가고;], 구걸하는 사람[서울 만큼 많아요],
강도[뉴욕 온 지 4개월 째되는 친구, 담배 달래서 꺼내주는 데 고갤 들얼보니 눈앞에 권총이;;
다행이 있는 돈 다 주고 목숨은 건졌다네요;]
밤마다 칼맞아 죽은 사람들, 총 맞아 죽은 사람들....
....심심치 않게 은행 털린 모습도 봅니다.
위생, 치안, 비싼 집값, 비싼 생활비, 비싼 등록금...
솔직히 뉴욕, 별 매력을 못 느끼겠습니다.
미국이 세계최강 선진국인 이유...
달러를 맘껏 찍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것과,
전쟁으로 군수물품 팔아먹으며 돈 벌었다는 것과, [이라크전쟁은 좀 말아먹었다지만;]
넓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들[잡탕이긴 하지만],
세계적인[으로 알려져 있는] 대학들, 지네 나라로 유학오는 사람들로 부터 버는 돈,
Sex and the city 등으로 미국과 뉴욕에 대한 환상을 마구 심어주고
그런 환상을 갖고 오는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버는 돈,
토플 시험 내주고 버는 돈, 등등..
이런 것들 외에.. 잘 모르겠네요.
누가 알면 좀 가르쳐 주세요.
유학생들, 미친듯이 공부해서 얻을 거 얻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 돌아가는 게 최고다.
이런 얘기도 합니다.
한국 유학생들, 교포들 많이 만나봤습니다.
뉴욕 살기 좋다는 사람 전 아직까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서울 살다 갔더니 오히려 더 불편하기만 합니다.
물론, 미국 현지 명품, 화장품, 메이커,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훨씬 싸지요.
하지만 그게 밥 먹여 줍니까?
문화생활 좋습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각종 세계적인 미술관, 박물관,
화려한 클럽, 술집, BAR...
하지만 문화생활도 여유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일반 식당에서 한번 식사 하는데 더치페이해도 개인당 20불씩 냅니다.
음식 가격에 세금 8.79%, 팁 15~20% 더 해야 해서 가뜩이나 더 비싼 저녁식사(dinner)는
맘 먹고 가야됩니다. [물론, 돈 있으면 살기 좋죠. 어디든지.]
뉴욕. 잠깐 며칠 관광오기엔 좋죠.
그러나 내 삶의 터전으로 하기에는...
별로 살고 싶지 않은 동네라고 생각 드네요...
[물론, 좋아 죽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미국에 오기 전엔 FTA, 미친소 등의 문제가 벌어질 거라곤 꿈에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30개월 이상의 소를 수입하겠다는 한미FTA 계획을 체결하기 전에 미리 고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부시농장에 갔다가 급 체결했다고 하진 않겠지요.
그렇다면 계약 체결전에 사전 준비가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이는 국민에게 알렸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즉위하자마자 일을 벌인 것으로 보아, 선거시절부터 계획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약으로, 한미FTA체결이라는 내용과 구체적 사항을 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현 대통령이, 어쩌다가 생각없이 소고기 수입 계약을 체결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선거유세시절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국민이 미친소를 수입하고, 수도세, 전기세, 석유값 등을 올리고,
억지로라도 대운하 추진하고[그럴거면 왜 그만두는 척 했는지-_-] 할 것을 알았더라면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을 거라 예상되네요. 대국민 사기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지만, 왜 우리나라가 미국을 따라가려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하려면, 좋은 것을 따라해야죠.
미국에서도 지탄받는 제도들을, 미국이 하니까 다 좋은 거라고 앞뒤 재지도 않고,
또는 기득권층의 이윤에 따라 해야 되겠습니까?
미국소, 전혀 안전하지 않습니다.
검증받은 소들은 미국 내에서 소비합니다.
누가 질 좋은 안전한 소고기를 값싸게 팝니까?
너도나도 비싸게 주고라도 안전한 고기 사먹으려 하는 판에.
미국 부시 대통령 대목장 지주 출신입니다.
부시 표와 선거 자금이 다 이 목장들에서 나왔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광우병 위험 때문에 '다신 소고기 안 사먹겠다'고 방송에서 말했다가
이 대목장 지주들한테 고소 당했습니다.
그러자 오프라가 '그럼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라, 검사하게 해주면 믿고 먹겠다,
그러지도 않고 고소 취하하지도 않으면 별수없이 나도 법적 대응하겠다.' 고 강하게 나오자
고소 취하해 버렸습니다. 죽어도 자기네들 소 검사는 못 시키겠다 이거죠.
이대로 계약이 체결되면,
우리나라도 들어오는 건 30개월 이상의 소인건 불보듯 뻔한 일이라는 걸 다들 아실겁니다.
낙농업 하시는 분이 설명해 주시더군요.
암소가 태어나서 12개월 뒤부터 임신이 가능합니다. 임신기간은 10개월정도 된다고 합니다.
새끼 한마리(암송아지)를 낳았다고 칩시다. 이미 암소는 20개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를 키우는 데에도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 소를 여기서 죽이면 암 송아지가 자라서 새끼를 낳기까지 또 20개월 이상 기다려야 됩니다.
텀이 20개월이 넘습니다. 너무 깁니다. 낭비 입니다.
때문에 첫 송아지를 낳자마자 두번째 송아지를 임신 시킵니다.
그러면 이제 텀은 1년으로 줄어듭니다.
이 때문에 암 송아지들은 새끼 두마리 씩만 남아도 30개월을 훌쩍 넘습니다.
물론 이 암소들이 암송아지만 낳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숫소는 일찍 도축시키고 암소는 최소 두마리씩 낳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꾸 30개월 이상된 암소들이 늘어갑니다.
30개월 이상 된 소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개,고양이 사료로 쓰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공업용으로 쓰이는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부분은 갈아서 사료로 만들어 먹였습니다.
계속 광우병에 걸립니다. 쓰러진 소 전기충격기 써서 걷게 하고 도축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한국에 제 값에 돈 받고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30개월 이상된 소들만 보내겠죠.
그래서 미국은 '모든 부위 포함, 30개월 이상 소 포함' 구문을 집어 넣은 겁니다.
그 구문을 집어 넣은 이상 법적으로 아무 하자 없으므로 30개월 이상 소들만 보낼 겁니다.
정말 잠도 안오고 답답합니다.
먼 땅에서 시차 13시간 되는 곳에서,
이명박 때문에 잠도 못자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제가 한국에 있는 분들보다 더 안전할 겁니다.
광우병사태 때문에 부모님이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전화해서 소고기 절대 먹지 말랬더니 '끓어먹으면 괜찮다던데?'하시더이다..
메일로 [저희 부모님은 메일 사용할 줄 아십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쉽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광우병 발생 원인, 변형 프리온이 뭔지, 광우병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들,
미국 소가 왜 위험한지, 어째서 요리해도 위험한지 등등..
그랬더니 이제야 왜 난리인지 알게되었다고 하시더군요.
[메일 쓰면서 눈물이 나더군요..
내가 왜.. 아직 호강시켜 드리지도 못한 부모님들의 미래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의 미래와,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잃을까봐..걱정해야 하는지..
그냥 소소한 걱정거리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
가장 걱정되는 것은 어르신들 입니다.
말로 싸우려고만 하지 말고, 차근차근 되도록 쉽게, 글로라도 적어 보여드리세요.
부모님들, 완전 꽉 막힌분들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는 데, 그 정성으로 진실을 보여드리면,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어르신들의 힘도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영국에서 한국 유학생이 길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친소 먹고 왔나고, 우리한테 병 퍼트리려고 그러냐고,
침 뱉고 욕했다고 합니다.
울컥, 가슴이 아팠습니다.
영국은 광우병 발생국이며, 최대 사상자 발생국이기 때문에 굉장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여기 미국은?
이곳도 한국 못지 않게 언론이 더럽습니다.
선생님[미국인]이 그러더군요. 신문? 뉴스? 다 거짓말이다. [A lot of bull shit.]
영국과 천지차이입니다.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어서 그런가, 광우병 소식 거의 없고 쉬쉬합니다.
검사? 제대로 안합니다. 샘플링해서 대충 조금 검사 하고 괜찮다고 우깁니다.
교육 못받은 사람도 너무 많고, 이민자들, 밀입국자들 너무 많고,
인터넷도 제대로 쓰는 가정 많지 않고, 정보가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 잘 모릅니다. [한국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상위 1%로 먹고 사는 나랍니다.
상위 1%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자꾸 미국을 닮아가려는 한국이 두렵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펌]충격적인 미국 상황 (레몬테라스*인테리어/리폼/홈패션/diy/패브릭홈데코**) |작성자 나댜
글 수 1,338
충격적인 미국 상황 kbs가 국민 기만 했다는 증거글..
고대 경영대[다들 아시다시피 현 대통령이 졸업한 곳이죠;]를 잠시 휴학하고
뉴욕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뉴욕에서 생활한지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겁니다.
개인의 주관적 생각임을 미리 양해드립니다.
제가 본 미국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처음 방을 구하러 다닐 때, 집집마다 세탁기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미국은 빨래방이 많이 발달했지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보시면 주인공들이 빨래방에 가서
동전 넣고 세탁기를 돌리는 모습도 나오지요.
세탁기 한번 돌리는데 30분 정도로, 작은 크기부터 $1.50, $2.50, $3.50 하는데,
맨하튼 시내는 $1씩 더 비쌌습니다. 그리고 건조기는 6분에 15cent라서
제대로 말리려면 최소 $1~$2은 넣고 돌려야 합니다.
저는 개인한명이고 여자라 빨래를 자주해서 한번하는 빨래 양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4인가족이 사는 집이라면 한달에 빨래하는 데 드는 돈만 몇만원 들거라 생각됩니다.
무거운 빨래들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옮기고 기다리고 하는 시간도 짜증나서
대체 왜 얘네는 집집마다 세탁기가 없나하고 물어봤더니,
수도세랑 전기세가 워낙 비싼데 세탁기가 물이랑 전기를 워낙 많이 잡아 먹으니까
집에 세탁기를 놓는 집은 돈많은 집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한국엔 집집마다 다 있는데.
무선인터넷은 한달에 $40씩 나오고, 룸메이트랑 계정 공유해서 쓰는데
속도가 느려터져 죽습니다. 그리고 자꾸 끊깁니다.ㅠ
클럽박스 다운받으면 퀵으로 해놔도 최고속도가 30바이트도 안나옵니다 -_-;;;;
그것도 꾸준히 받아지기라도 하면 다행이지요.;ㅠ
분명히 인터넷은 되는데 클박 퀵다운 속도 0바이트라고 뜨는 경우가 태반입니다.=3
실시간 스트리밍 동영상은 꿈도 못꿉니다.
김연아 선수의 3분 공연을 15분~20분이상 들여야 띄엄띄엄 봅니다........ㅠ
이젠 그냥 해탈했습니다.....
뉴욕은 미국에서 최고의 도시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미국 사람들도 뉴욕에 오고 싶어서 난리라고 합니다.
제가 미국 올때 캐나다에서 환승했는데, 캐나다 학생들이 우루루 뉴욕행 비행기에 타더군요.
그리고 미국 JFK공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환호성을 질러서 깜짝 놀랬답니다.
[속으로 촌놈들....하고 생각했지만요;; ㅋ]
이 정도로 온 미국 사람들, 전 세계 사람들의 선망이 되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우선 지하철. 미친듯이 더럽습니다. 뉴욕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래되면 공사를 해서 깨끗하고 좋게 바꾸면 되지 않습니까?
미국 정부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닐테고.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공사한답시고 길 막아 놓고 지연되고
비오면 물새고 쥐 돌아다니고 낙서 가득하고 이상한 냄새 나고 핸드폰 안 터집니다.
청결하게 하고, 낙서 지우고, 핸드폰 터지게 선 깔고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와서 우리나라 지하철이 그렇게 좋은 건 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하철, 다음 올 열차가 어느 역에 있는지, 얼마쯤 왔는지 전광판으로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열차 내에서는 안내방송 계속 해주고, 전광판으로 다음역 표시해주고 정말 편리합니다.
미국 현지인들도 차장의 안내방송이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짜증난다고 불평합니다.
모든 선은 Local[모든 역에서 섭니다]과 Express[주요 역에서만 섭니다]로 나뉘는데,
잘못 탔다간 갈아타야되고 되돌아 가야되고해서 시간버리기 일쑤입니다.
분명 열차는 Local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Express고,
Express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Local이고,
심지어는 앞의 칸은 Local 표시, 뒷칸은 Express 표시고.. 난리도 아닙니다.;;
열차 표시만 보고선, 잘 들리지도 않는 방송 안 들었다가는 낭패봅니다.
버스도 마찬가지구요. 서울 버스, 역마다 일일이 방송 나옵니다. 전광판도 있습니다.
여긴 전광판이고 방송이고 없습니다. 있어도 제대로 작동하는 게 많지 않습니다;;;
목빠져라 창밖을 쳐다보면서 어디쯤 왔나 계속 확인해야 됩니다.
자리 못잡고 서 있으면 확인도 힘듭니다.
가끔 버스운전사들이 알려주는데 혼잡하면 그나마도 잘 안 들립니다.ㅠ
[물론, 제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못 알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인터넷 뱅킹 안 됩니다. 인터넷 뱅킹 되는 곳은 같은 은행끼리만 된다고 합니다.
ATM에서 조차도 타행송금 안됩니다.........;
우리나라 식일거라 생각했다가 완전 낭패봤죠........
여기 아직도 Check씁니다. 영화같은데서 많이 나오죠.
개인수표(check)묶음 들고 다니면서 금액 적고 싸인해서 제출하는 거요.
영화로 볼땐 멋있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었습니다.;;;
check을 쓰면 불편한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돈이 즉시 지급되지 않습니다.
그 check을 은행에 가져가야 돈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당연한 얘기지만, 생각없이 check발행했다가는 금방 파산됩니다;
돈이 그때그때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잔액 확인도 불분명하죠.
더 황당한 건 ATM으로 입금할 때....
우리나라에선 ATM에 현금 넣으면 좌라라락 해서 기계가 돈 세고 즉시 입금되어
통장에 찌찍~.하고 액수 찍힙니다. 입금 즉시 통장에 있는 돈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입금용 종이봉투에 돈을 넣습니다.
밀봉하고 겉에다 계좌번호, 액수, 이름, 서명합니다.
봉투 통째로 ATM에 집어넣습니다.
다음날 아침 직원이 ATM기계 열어 봉투들을 수거합니다.
수거한 봉투들을 창구 직원들이 일일이 컴퓨터로 입력합니다.
전 정말 황당했습니다.;
그야말로 편지봉투에 돈 넣어서 '얼마얼마 넣었으니 어디어디 은행에 갖다주세요~'
하고 우체통에 넣는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한국 유학생들이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한국식으로 ATM에 현금 그대로 집어 넣었다가..
그냥 찾지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 그 돈은?...수거하는 사람이 꿀꺽 한거죠-_-;]
한국 가정에서 전기세 얼마나오는 지 잘 모릅니다. 주부가 아니라서;
미국 와서, 집집마다 차이가 있지만, 정말 정말 아껴쓰는데도
방 두개 짜리 한 집에 한달에 최소~최소~~150불씩 나옵니다.
저희 전기세 너무 무서워서; 꼭 필요할 때만 최소한으로 전기씁니다.
전자레인지 안쓸땐 꼭 코드 뽑고 다니고 제 방엔 TV도 없습니다.
저희 집엔 한국 일반 가정집에 많이 있는
세탁기, 김치냉장고, 오디오, 전기장판, DVD, 전화기 등등 없습니다.
코드 다 뽑고 다니고 불 다 끄고 다니고 학생들이라 밖에 늦게까지 놀고 하느라
밤에 불키고 있을 시간이 일반 가정집보다 훨씬 적습니다.
그런데도 최소 150에 200불 정도 나오니까..
맨하탄은 세금도 더 비쌉니다; 저희집은 맨하탄은 아니고 퀸즈거든요.
[뉴욕은 맨하탄, 퀸즈, 브루클린,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인 가족 일반 가정집에서 전기세 얼마나올지는..
단순 계산해봐도 방 4개짜리 집에 한달 최소!! 300불~400불 나온다는 얘깁니다. -0-;;;;;;;;;;
그러니 우리나라 전기, 수도세 기존보다 최소 3~4배 오른다고 하는 겁니다.
한번 올리고 나서 점차 계속 오르겠죠. [미국 수준으로? -_-;;;;;;;;;;;;;;;;;]
그리고 미국은 민영의료보험입니다.
의료보험료도 미친듯이 비싼데 보장해주는 병도 얼마 안되서
미국 국민의 상당수가 의료보험에 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감기로 한번 진찰 받으면 10만원 이상 깨집니다.
한국에서 1000~2000원 하는 약들을 만원 이상씩 팝니다.
저 렌즈를 끼는데 어느날 눈이 너무 아파서 안경점에 갔습니다.
잠깐 눈 좀 봐줄 수 있냐고 했더니, 그건 의료분야에 속하는 거라서
잠깐 검사해주는데에도 75불이 든다는 겁니다;
한국 안경점에선 그냥 봐주는 데도 있고, 안과에가서 진찰하는데도
기껏해야 3000원 정도입니다. 미친듯이 아팠지만.. 도저히 75불을 낼 수 없더라구요.ㅠ
꾹 참고 집에 들어와서 지식인 검색했더니
각막에 스크래치가 좀 심해서 그런 거란걸 알게되었죠.
렌즈 빼고 안경끼면서 그냥 냅두면 자연치료되는 거랍니다. 여기엔 약도 없고.
진짜 여러분이 우려하시는대로..
여긴 아파도 병원가는 게 두렵습니다. 아프지 말아야 됩니다.
엠뷸런스 한번 부르면 1000불 그냥 넘어갑니다.
우리나라 현 의료보험은 '당연지정제'[현 대통령이 폐지하려는 것이죠]로,
모든 병원들은 국민건강보험[나라에서 운영]이라는 보험만 계약해야하며,
모든 국민또한 이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네이버 치시면 금방 나오니까 생략하고,
결론은 당연지정제 폐지가 필수적으로 국민건강보험 폐지를 초래하고,
그로 인한 여파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실제 미국에서 일어나는 예들을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A라는 회사의 민영 의료보험에 비싼돈을 주고 가입했습니다.
임신을 해서 진통이 왔습니다.
엠뷸런스는 비싸서 못 부르고 남편이 자가운전해서 가까운 병원 응급실을 찾아 갔더니
A회사랑은 계약이 안되어 있어 보험 혜택을 하나도 못받는 다고 합니다.
급하게 알아봐서 A회사보험이 적용되는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아기 낳았더니 몇백만원입니다. 입원하면 입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일을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이 잘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손가락 접합수술 몇십만원이면 합니다. 미국에서는 몇백만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술비를, 일상생활에 얼마나 밀접한가에 관련하여 책정합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힘듭니다. 그래서 싸게 책정합니다. 생계와 밀접하기 때문이죠.
반면, 미용을 위한 성형수술과 같은 경우는 수술비가 비싸고 보험적용이 안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수술이 얼마나 어려운가,
수술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재료값이나 도구, 기계값이] 얼마나 비싼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손가락 접합의 경우에는 수술이 어렵기 때문에 비싸게 책정된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일 수록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선생님[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선생님 친구가 병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너무 비싸서 수술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부시가 쿠바를 악의 축이라고 몰아붙여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죠.-_-]
미국 사람들은 쿠바에 가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친구는 수술비가 싸다는 소식을 듣고 쿠바로 밀입국하여 갔는데
몇십달러 들지 않고 수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공호흡기도 사용하고[미국은 비싼가 봅니다] 입원도 하고,
쿠바 사람들도 너무 착하고 친절하고 그렇게 천국같은 곳이 없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얘기를 듣는데 우리나라가 쿠바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장난 공중전화기가 수도없이 방치되어 있고,
전화를 걸고 문자를 쓰면 받는 사람도 똑같이 돈이 나가고,
월 스트릿에서 2만명이 일시 해고되고[경제 상황이 그 만큼 안 좋습니다.],
집 안에서 쇼파에 앉아 있는데 쥐가 발을 툭툭 치고 다니고[맨하튼 사는 친구네;]
그나마 손가락만한 바퀴벌레는 친구고[저희 집 ㅠㅠ]
밤마다 마약하다 죽은 사람[뉴욕온지 2개월째되던 친구,
지하철 열차안에서 잠깐 졸았다 눈 떠보니 앞에 마약먹고 죽은 여자가..;],
길거리엔 미친사람들[버스나 지하철 타면 중얼중얼 헛소리하는 사람들 꼭 봅니다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앞 도로에서 인파를 향해 물건 마구 집어던지는 미친 놈때문에
사람들 비명지르며 도망가고;], 구걸하는 사람[서울 만큼 많아요],
강도[뉴욕 온 지 4개월 째되는 친구, 담배 달래서 꺼내주는 데 고갤 들얼보니 눈앞에 권총이;;
다행이 있는 돈 다 주고 목숨은 건졌다네요;]
밤마다 칼맞아 죽은 사람들, 총 맞아 죽은 사람들....
....심심치 않게 은행 털린 모습도 봅니다.
위생, 치안, 비싼 집값, 비싼 생활비, 비싼 등록금...
솔직히 뉴욕, 별 매력을 못 느끼겠습니다.
미국이 세계최강 선진국인 이유...
달러를 맘껏 찍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것과,
전쟁으로 군수물품 팔아먹으며 돈 벌었다는 것과, [이라크전쟁은 좀 말아먹었다지만;]
넓은 땅덩어리에 많은 사람들[잡탕이긴 하지만],
세계적인[으로 알려져 있는] 대학들, 지네 나라로 유학오는 사람들로 부터 버는 돈,
Sex and the city 등으로 미국과 뉴욕에 대한 환상을 마구 심어주고
그런 환상을 갖고 오는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버는 돈,
토플 시험 내주고 버는 돈, 등등..
이런 것들 외에.. 잘 모르겠네요.
누가 알면 좀 가르쳐 주세요.
유학생들, 미친듯이 공부해서 얻을 거 얻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 돌아가는 게 최고다.
이런 얘기도 합니다.
한국 유학생들, 교포들 많이 만나봤습니다.
뉴욕 살기 좋다는 사람 전 아직까지 한 명도 못 봤습니다.
서울 살다 갔더니 오히려 더 불편하기만 합니다.
물론, 미국 현지 명품, 화장품, 메이커,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훨씬 싸지요.
하지만 그게 밥 먹여 줍니까?
문화생활 좋습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각종 세계적인 미술관, 박물관,
화려한 클럽, 술집, BAR...
하지만 문화생활도 여유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일반 식당에서 한번 식사 하는데 더치페이해도 개인당 20불씩 냅니다.
음식 가격에 세금 8.79%, 팁 15~20% 더 해야 해서 가뜩이나 더 비싼 저녁식사(dinner)는
맘 먹고 가야됩니다. [물론, 돈 있으면 살기 좋죠. 어디든지.]
뉴욕. 잠깐 며칠 관광오기엔 좋죠.
그러나 내 삶의 터전으로 하기에는...
별로 살고 싶지 않은 동네라고 생각 드네요...
[물론, 좋아 죽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미국에 오기 전엔 FTA, 미친소 등의 문제가 벌어질 거라곤 꿈에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30개월 이상의 소를 수입하겠다는 한미FTA 계획을 체결하기 전에 미리 고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부시농장에 갔다가 급 체결했다고 하진 않겠지요.
그렇다면 계약 체결전에 사전 준비가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이는 국민에게 알렸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즉위하자마자 일을 벌인 것으로 보아, 선거시절부터 계획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공약으로, 한미FTA체결이라는 내용과 구체적 사항을 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현 대통령이, 어쩌다가 생각없이 소고기 수입 계약을 체결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선거유세시절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국민이 미친소를 수입하고, 수도세, 전기세, 석유값 등을 올리고,
억지로라도 대운하 추진하고[그럴거면 왜 그만두는 척 했는지-_-] 할 것을 알았더라면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을 거라 예상되네요. 대국민 사기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지만, 왜 우리나라가 미국을 따라가려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하려면, 좋은 것을 따라해야죠.
미국에서도 지탄받는 제도들을, 미국이 하니까 다 좋은 거라고 앞뒤 재지도 않고,
또는 기득권층의 이윤에 따라 해야 되겠습니까?
미국소, 전혀 안전하지 않습니다.
검증받은 소들은 미국 내에서 소비합니다.
누가 질 좋은 안전한 소고기를 값싸게 팝니까?
너도나도 비싸게 주고라도 안전한 고기 사먹으려 하는 판에.
미국 부시 대통령 대목장 지주 출신입니다.
부시 표와 선거 자금이 다 이 목장들에서 나왔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광우병 위험 때문에 '다신 소고기 안 사먹겠다'고 방송에서 말했다가
이 대목장 지주들한테 고소 당했습니다.
그러자 오프라가 '그럼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라, 검사하게 해주면 믿고 먹겠다,
그러지도 않고 고소 취하하지도 않으면 별수없이 나도 법적 대응하겠다.' 고 강하게 나오자
고소 취하해 버렸습니다. 죽어도 자기네들 소 검사는 못 시키겠다 이거죠.
이대로 계약이 체결되면,
우리나라도 들어오는 건 30개월 이상의 소인건 불보듯 뻔한 일이라는 걸 다들 아실겁니다.
낙농업 하시는 분이 설명해 주시더군요.
암소가 태어나서 12개월 뒤부터 임신이 가능합니다. 임신기간은 10개월정도 된다고 합니다.
새끼 한마리(암송아지)를 낳았다고 칩시다. 이미 암소는 20개월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를 키우는 데에도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 소를 여기서 죽이면 암 송아지가 자라서 새끼를 낳기까지 또 20개월 이상 기다려야 됩니다.
텀이 20개월이 넘습니다. 너무 깁니다. 낭비 입니다.
때문에 첫 송아지를 낳자마자 두번째 송아지를 임신 시킵니다.
그러면 이제 텀은 1년으로 줄어듭니다.
이 때문에 암 송아지들은 새끼 두마리 씩만 남아도 30개월을 훌쩍 넘습니다.
물론 이 암소들이 암송아지만 낳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숫소는 일찍 도축시키고 암소는 최소 두마리씩 낳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꾸 30개월 이상된 암소들이 늘어갑니다.
30개월 이상 된 소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개,고양이 사료로 쓰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공업용으로 쓰이는 부분을 제외하고 남은 부분은 갈아서 사료로 만들어 먹였습니다.
계속 광우병에 걸립니다. 쓰러진 소 전기충격기 써서 걷게 하고 도축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한국에 제 값에 돈 받고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30개월 이상된 소들만 보내겠죠.
그래서 미국은 '모든 부위 포함, 30개월 이상 소 포함' 구문을 집어 넣은 겁니다.
그 구문을 집어 넣은 이상 법적으로 아무 하자 없으므로 30개월 이상 소들만 보낼 겁니다.
정말 잠도 안오고 답답합니다.
먼 땅에서 시차 13시간 되는 곳에서,
이명박 때문에 잠도 못자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제가 한국에 있는 분들보다 더 안전할 겁니다.
광우병사태 때문에 부모님이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전화해서 소고기 절대 먹지 말랬더니 '끓어먹으면 괜찮다던데?'하시더이다..
메일로 [저희 부모님은 메일 사용할 줄 아십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쉽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광우병 발생 원인, 변형 프리온이 뭔지, 광우병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견들,
미국 소가 왜 위험한지, 어째서 요리해도 위험한지 등등..
그랬더니 이제야 왜 난리인지 알게되었다고 하시더군요.
[메일 쓰면서 눈물이 나더군요..
내가 왜.. 아직 호강시켜 드리지도 못한 부모님들의 미래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의 미래와,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잃을까봐..걱정해야 하는지..
그냥 소소한 걱정거리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
가장 걱정되는 것은 어르신들 입니다.
말로 싸우려고만 하지 말고, 차근차근 되도록 쉽게, 글로라도 적어 보여드리세요.
부모님들, 완전 꽉 막힌분들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걱정하는 데, 그 정성으로 진실을 보여드리면,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어르신들의 힘도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영국에서 한국 유학생이 길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친소 먹고 왔나고, 우리한테 병 퍼트리려고 그러냐고,
침 뱉고 욕했다고 합니다.
울컥, 가슴이 아팠습니다.
영국은 광우병 발생국이며, 최대 사상자 발생국이기 때문에 굉장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여기 미국은?
이곳도 한국 못지 않게 언론이 더럽습니다.
선생님[미국인]이 그러더군요. 신문? 뉴스? 다 거짓말이다. [A lot of bull shit.]
영국과 천지차이입니다.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어서 그런가, 광우병 소식 거의 없고 쉬쉬합니다.
검사? 제대로 안합니다. 샘플링해서 대충 조금 검사 하고 괜찮다고 우깁니다.
교육 못받은 사람도 너무 많고, 이민자들, 밀입국자들 너무 많고,
인터넷도 제대로 쓰는 가정 많지 않고, 정보가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 잘 모릅니다. [한국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상위 1%로 먹고 사는 나랍니다.
상위 1%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인 것 같습니다.
자꾸 미국을 닮아가려는 한국이 두렵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펌]충격적인 미국 상황 (레몬테라스*인테리어/리폼/홈패션/diy/패브릭홈데코**) |작성자 나댜
2008.06.02 05:55:08 (*.218.188.231)
.
무기는 북한제나 소련제가 훨씬 값싸고 성능이 좋은 걸로 알고 있고
미국은 약소국 등쳐먹은 나라 같네요.
황 우석 박사의 기술은 어떻고
정운찬 전 서울대(경성제국대) 총장 왈
조그만 나라에서 너무 큰 것을 가질려고 하면 안된다.
말씀이 위의 분하고 어찌 그리 닮았을까
從迷 事大
종미 사대주의 자의 생각은 언제나 언제나 迷國 종살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
카스라 테프트 밀약이 무엇인지
전 주한 미국 대사가 왜 사과를 했는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의 未國을
다국적 회사는 다국적등으로 남의 나라 등쳐먹는 회사가 아닌지
#140 (2008, 5,11) 금수보다 못한 개신교 청교도인 미국의 만행을
읽어 보시고
반박을 해 보시죠
남의 나라 등쳐먹는 리드쉽을 배우실려고
미국의 군사력에 의한 패권주의는
북한의 군사력에 의해
미국의 달러화에 의한 패권주의는
달러화 결제를 거부하는 나라의 확산으로
그린스펀 전 의장의 발언으로
미국의 달러화에 의한 경제 패권주의는 끝났습니다..
.죽은 아이 뭐 만지면 뭐 합니까.
살아 날때 까지 만지고 있을 겁니까
.금수보다 못한 개신교 청교도인 미국의 천인공노할 만행
미국의 범죄 행위
개신교 청교도 영국의 돼지 치기 앵글로 색슨족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나라를 무단히 침략하여
인디언들은 불쌍히 여겨 일용한 양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었건만
떼거리로 몰려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금수보다 못한 지금까지 인디언을 학살한 것은 1억명 어찌 나치와 비교가 되리
아메리카, 하와이 원주민의 90 % 이상을 학살하고도 모자라 그들을
동물농장인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두고 알콜 중독자 등으로 타락하게 만들어
씨를 말리고 쓰레기 종자로 만든 천인공로할 짓을 한 개신교, 청교도들
개신교 목사는 이것을 자랑인양 떠벌이고
개척정신, 뉴 프론티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양을 탈을 쓴 늑대의 음흉함을
왜곡 미화하고
남의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유린하고 웬 개척정신 황무지나 개척하지 적반하장
인디언에게 담요에 전염병균을 묻혀 전염병이 퍼져 죽게 만들고
먹지 않을 들소를 인디언들 못먹게 다 죽이고 씨를 말리는 천인공로할 짓을 ,
인디언은 먹을 만큼만 소를 잡는데
그리고 인디언 종자를 쓰레기 종자로 만들고 씨를 말리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동물사냥하듯 잡아서 동물부리듯 노예를 삼는 천박하고 야비하고
간교한 금수보다 못한 종자들
이제 이 개신교 청교도 미국을
하늘이 드디어 벌을 내리는 구나
지금의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남부지방의 땅이 원래는 멕시코 땅이 였으나
조작하여 강탈한 천하에 몹쓸 나쁜 美親者들
공은 카톨릭과 나누고 죄는 카톨릭에 덮어 씌우는 마녀 사냥식의 독선적인 사고방식
카톨릭도 일부 공범이지만
이런 금수보다 못한 靡國을 從迷 事大하는 종자들의 머리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내 머리로는 계산이 안됩니다. 이 메가는 잘 알지않을까 요?
그러나 제대로 알려면 이 기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사람들의 머리에는 변형 야곱균이 잠복해 있을까요 ?
제발 우리 모두 다 같이 잘못은 시인하고 반성하고 삽시다.
죄는 덮으면 덮을 수록 더 커집니다.
"너희들은 도둑이나 창녀를 경멸하지만 그들은 죄가 드러났거나 고백한 자 일 뿐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죄를 묘하게 감추고 있는 자들이다.
죄란 원망이나 욕정에 있는 것이지 행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고로 죄를 감추고 있는 너희들이 창녀나 도둑 보다 더 나쁜 인간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겨보고 다 같이 반성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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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는 북한제나 소련제가 훨씬 값싸고 성능이 좋은 걸로 알고 있고
미국은 약소국 등쳐먹은 나라 같네요.
황 우석 박사의 기술은 어떻고
정운찬 전 서울대(경성제국대) 총장 왈
조그만 나라에서 너무 큰 것을 가질려고 하면 안된다.
말씀이 위의 분하고 어찌 그리 닮았을까
從迷 事大
종미 사대주의 자의 생각은 언제나 언제나 迷國 종살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
카스라 테프트 밀약이 무엇인지
전 주한 미국 대사가 왜 사과를 했는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의 未國을
다국적 회사는 다국적등으로 남의 나라 등쳐먹는 회사가 아닌지
#140 (2008, 5,11) 금수보다 못한 개신교 청교도인 미국의 만행을
읽어 보시고
반박을 해 보시죠
남의 나라 등쳐먹는 리드쉽을 배우실려고
미국의 군사력에 의한 패권주의는
북한의 군사력에 의해
미국의 달러화에 의한 패권주의는
달러화 결제를 거부하는 나라의 확산으로
그린스펀 전 의장의 발언으로
미국의 달러화에 의한 경제 패권주의는 끝났습니다..
.죽은 아이 뭐 만지면 뭐 합니까.
살아 날때 까지 만지고 있을 겁니까
.금수보다 못한 개신교 청교도인 미국의 천인공노할 만행
미국의 범죄 행위
개신교 청교도 영국의 돼지 치기 앵글로 색슨족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나라를 무단히 침략하여
인디언들은 불쌍히 여겨 일용한 양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었건만
떼거리로 몰려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금수보다 못한 지금까지 인디언을 학살한 것은 1억명 어찌 나치와 비교가 되리
아메리카, 하와이 원주민의 90 % 이상을 학살하고도 모자라 그들을
동물농장인 인디언 보호구역에 가두고 알콜 중독자 등으로 타락하게 만들어
씨를 말리고 쓰레기 종자로 만든 천인공로할 짓을 한 개신교, 청교도들
개신교 목사는 이것을 자랑인양 떠벌이고
개척정신, 뉴 프론티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양을 탈을 쓴 늑대의 음흉함을
왜곡 미화하고
남의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유린하고 웬 개척정신 황무지나 개척하지 적반하장
인디언에게 담요에 전염병균을 묻혀 전염병이 퍼져 죽게 만들고
먹지 않을 들소를 인디언들 못먹게 다 죽이고 씨를 말리는 천인공로할 짓을 ,
인디언은 먹을 만큼만 소를 잡는데
그리고 인디언 종자를 쓰레기 종자로 만들고 씨를 말리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동물사냥하듯 잡아서 동물부리듯 노예를 삼는 천박하고 야비하고
간교한 금수보다 못한 종자들
이제 이 개신교 청교도 미국을
하늘이 드디어 벌을 내리는 구나
지금의 미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남부지방의 땅이 원래는 멕시코 땅이 였으나
조작하여 강탈한 천하에 몹쓸 나쁜 美親者들
공은 카톨릭과 나누고 죄는 카톨릭에 덮어 씌우는 마녀 사냥식의 독선적인 사고방식
카톨릭도 일부 공범이지만
이런 금수보다 못한 靡國을 從迷 事大하는 종자들의 머리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내 머리로는 계산이 안됩니다. 이 메가는 잘 알지않을까 요?
그러나 제대로 알려면 이 기가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사람들의 머리에는 변형 야곱균이 잠복해 있을까요 ?
제발 우리 모두 다 같이 잘못은 시인하고 반성하고 삽시다.
죄는 덮으면 덮을 수록 더 커집니다.
"너희들은 도둑이나 창녀를 경멸하지만 그들은 죄가 드러났거나 고백한 자 일 뿐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죄를 묘하게 감추고 있는 자들이다.
죄란 원망이나 욕정에 있는 것이지 행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고로 죄를 감추고 있는 너희들이 창녀나 도둑 보다 더 나쁜 인간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겨보고 다 같이 반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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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2 06:02:12 (*.218.188.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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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의 교훈, ‘사대주의하면 머저리 된다’
브릭의 교훈, ‘사대주의하면 머저리 된다’
[광우병집중분석]
9.친미과학자들 괴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자주민보(http://www.jajuminbo.net) 이창기 기자
최근 5월 13일 방송된 KBS ‘시사기획 쌈’이라는 보도를 보면서 황우석박사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브릭’사이트의 광우병집중토론방의 광우병에 걸릴 확률에 관한 글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브릭’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물론 토론방에는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회원도 글을 써서 올리고 있지만 주로 확률을 언급하는 글쓴이들은 대부분 브릭 회원으로 보였다.
그들이 드는 근거와 그래프 등을 보면 전문가가 아니고는 찾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사람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20억분의 1 즉 0.0000000005 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는 비행기 사고를 당할 확률보다 매우 낮은 수치라는 것이다.
이 말을 협상팀에서 자주 거론하기에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가’ 했더니 결국 브릭에서 나온 말이었다. 즉,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미국이라면 장까지 뒤집어 보여주는 일부 과학자들이 마련해준 논거였던 것이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논리가 명쾌했다.
“영국의 광우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긴 잠복기 때문에 2차피크가 올 것이라는 과학자도 많다”
“영국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머리고기, 뼈나 내장 등을 거의 먹지 않고 살코기만 먹고도 그렇게 병에 걸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등 일반인들의 반론이 브릭회원보다 더 예리했다.
사실, 브릭에서 밝힌 광우병 집중 토론방을 개설 취지만 봐도 그 의도가 뻔히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미국산소고기수입논란) 가운데 걱정스러운 점은 정확한 사실과 과학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광우병 논란에 대한 의견과 토론이 진행되지 못하는 부분이 발생하고 있고, 이렇게 생산된 부정확한 사실들이 여과 없이 일반인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이번 문제를 바라보는 많은 일반인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이에 BRIC 소리마당에서 광우병 논란에 대해서 주제를 잡아 집중 토론방을 개설하였습니다.]- 4월 30일 브릭사이트, [공지] 광우병 논란에 대한 소리마당 집중토론방을 오픈하며...
결국 브릭사이트 관리자는 이 집중토론방을 개설할 때 예정 시한보다 더 연장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예정된 시한이 지나자 바로 토론을 끝내버렸다.
사실, 광우병은 아직 그 매커니즘이 밝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브릭이 아니라 브릭 할애비라도 정확한 사실을 말해주기 어렵다. 그래서 ‘사전예방의 원칙’에서 무조건 조심하는 수밖에 없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다가 이번 30개월 이상된 한미쇠고기협상으로 미국의 6-10년 된 늙다리소들이 대거 몰려올 판이다. 이런 소가 1년에 700만마리나 된다. 우리나라는 겨우 1년에 200만 마리 정도 소비한다. 씨받이용 암소와 젖소만으로도 우리나라 소비량을 세 번 뒤집어씌우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브릭은 토론방을 열었다.
명성도 얻었겠다. 대충 주장하면 국민들이 돌아설 것으로 여겼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 국민들의 과학적 상식도 이제 만만치가 않다.
특히 양심적인 과학자들도 적지 않고 또 인터넷을 발전으로 얼마든지 진실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사기획 쌈 사회자는 ‘브릭’ 사이트를 무슨 황우석 박사 사건의 진실을 처음으로 파헤친 과학자들이라고 아직도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을 보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사기획 쌈의 이번 기획의 결말이 이상하게 흐른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된다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브릭 그들이 과학사전을 달달 암기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가슴에는 영혼이 없고, 그들의 심장에는 한민족의 피가 이미 말라버렸으며, 그들의 도덕관념에서는 이미 양심이 사라져버렸다.
황우석 박사는 지금도 재판에 시달리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판결까지 긴 시간이 걸린 재판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검사들이 주장하는 황우석 박사의 죄의 핵심은 지원금과 후원금 타낼 목적으로 실패한 실험을 성공했다고 속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론의 찬사를 받았던 브릭 회원들이 밝혀낸 사실은 바로 사이언스에 올라간 황우석박사팀과 미즈메디병원 공동연구 논문에 올라간 조작된 사진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공동연구에서 황우석 박사팀이 연구한 분야는 배반포를 만드는 것까지였고 그 배반포를 가지고 줄기세포를 분화하는 것은 미즈메디병원측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찰도 미즈메디 소속 김선종 연구원이 줄기세포 분화실험을 바꿔치기를 통해 속였다고 밝혀냈으며 브릭이 밝힌 문제의 사진도 김선종 연구원이 촬영한 사진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형식적으로 전체연구팀장이었지만 황우석 박사는 수의학전공자로서 배반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만 책임을 졌던 사람이며 그 배반포에서 줄기세포를 분화해 내는 것은 전적으로 미즈메디 담당이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황박사가 지식도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책임을 물으려면 황우석 박사를 속인 김선종 연구원과 황우석 박사를 이 연구에 참여시킨 미즈메디 병원의 노성일 이사장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황우석 박사도 김선종 연구원의 바꿔치기에 당한 피해자인 것이다.
그러나 검찰도 줄기세포 바꿔치기는 황박사와 무관한 김선종 단독 범행이라고 밝혀냈으면서도 김선종 연구원과 노성일 이사장은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풀어주고 황우석 박사만 지금 계속 재판장에 불러다 재판을 벌이는 바람에 황우석 박사는 연구도 제대로 못하는 불이익을 계속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한 연구팀이 황우석 박사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체세포핵이식에 의한 배아복제 배반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떠들면서 미국에서는 이제 줄기세포 실용화에 거대한 진전을 이루었다며 흥분했었다.
이를 또한 우리 언론들도 흥분된 목소리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바로 서울대조사위는 당시에 황우석 박사팀이 그 배반포를 100개도 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었다.
최근 황우석 박사팀에서 미국과학자들이 번번이 실패한 미국애완견 복제에 성공하여 미국과 세계 과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인간과 유전자가 비슷할 정도로 복잡한 개를 복제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동물복제분야이다. 미국도 여전히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당시 논문조작사건이 불거졌을 때 브릭 회원들은 그 잘난 과학적 실력으로 황우석 박사의 첫 복제견인 스너피도 조작이라며 수많은 근거를 들이대며 공격했었다.
하지만 스너피는 성공한 복제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브릭은 한마디 사과도 없었고 언론들에게는 브릭의 젊은 과학자들은 여전히 영웅이었다.
황우석 박사팀이 체세포핵이식배아복제배반포와 복제견에 이렇듯 하는 족족 성공하고 있다는 이것만으로도 그는 우리나라의 영웅과학자가 되기에 충분하며 전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할 보배과학자이다.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황박사와 같은 배반포만 만들어도 영웅 중에 영웅 과학자가 된다.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과학자들도 황우석 박사의 복제기술에 대해서는 그 탁월함을 모두 다 인정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의 배반포와 복제견의 성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금방 알 수 있다.
그저 애완견이나 복제하는 데 쓰이는 기술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의료혁명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법정에서는 황우석 박사를 몇 년째 심문하고 있다.
언론들에게 그는 여전히 논문조작 사기꾼이고 그를 몰아세운 브릭은 영웅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인가.
머저리들이 득시글거리는 나라 돌아도 한참 돌아버린 나라인 것이다.
정말 황우석 박사팀이 당시 연구에서 배반포뿐만 아니라 줄기세포 분화기술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 김선종을 시킨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역할을 수행했다면 브릭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 일은 황우석 박사팀이 한 것이 아니라 김선종이 했지 않는가. 그는 미즈메디병원 의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브릭은 모조리 황우석 박사의 잘못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것은 팩트자체도 구별못하는 정시나간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철저히 황우석 박사의 기술을 강탈해가려는 미국의 새튼 일당을 도와주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브릭이 이번 광우병 사태에서도 역시나 철저히 미국편에 서서 움직이다가 네티즌들에 몰매를 맞고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괜히 더 나섰다가는 이용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고 보았을까. 브릭이 정말 양심이 있다면 황우석박사 때처럼 왜 끝까지 나서지 못하는 것일까!
조국이 없는 과학자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브릭이 굳이 보여주지 않더라도 인류는 아인쉬타인 박사의 삶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핵기술은 나가사키, 히로시마 수 십 만 명의 주민들을 학살하는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 박사는 조국이 떠나버렸기에 그의 기술이 망명해서 살았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었다.
그 후 그는 열렬한 반전반핵 운동가가 되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핵무기 사용 반대운동을 폈기 때문이다.
최근 밝혀진 아인쉬타인박사의 편지에서는 ‘신이 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비과학’이라는내용도 담겨있다고 한다.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의 의미도 이제 명백해진 것이다.
우주는 자체의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리라.
그러나 브릭은 조국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 정도라면 머저리 단계에서 더 나아나 매국노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지금이라도 빨리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이제는 미국에 기대어 사는 것이 부귀영화로 직결되는 시대는 갔다. 미국이 망해가는 소리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과학도 공부하면서 제발 신문도 좀 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려고 했으면 좋겠다.●
브릭의 교훈, ‘사대주의하면 머저리 된다’
브릭의 교훈, ‘사대주의하면 머저리 된다’
[광우병집중분석]
9.친미과학자들 괴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자주민보(http://www.jajuminbo.net) 이창기 기자
최근 5월 13일 방송된 KBS ‘시사기획 쌈’이라는 보도를 보면서 황우석박사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브릭’사이트의 광우병집중토론방의 광우병에 걸릴 확률에 관한 글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브릭’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물론 토론방에는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회원도 글을 써서 올리고 있지만 주로 확률을 언급하는 글쓴이들은 대부분 브릭 회원으로 보였다.
그들이 드는 근거와 그래프 등을 보면 전문가가 아니고는 찾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사람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20억분의 1 즉 0.0000000005 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는 비행기 사고를 당할 확률보다 매우 낮은 수치라는 것이다.
이 말을 협상팀에서 자주 거론하기에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가’ 했더니 결국 브릭에서 나온 말이었다. 즉,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미국이라면 장까지 뒤집어 보여주는 일부 과학자들이 마련해준 논거였던 것이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논리가 명쾌했다.
“영국의 광우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긴 잠복기 때문에 2차피크가 올 것이라는 과학자도 많다”
“영국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머리고기, 뼈나 내장 등을 거의 먹지 않고 살코기만 먹고도 그렇게 병에 걸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등 일반인들의 반론이 브릭회원보다 더 예리했다.
사실, 브릭에서 밝힌 광우병 집중 토론방을 개설 취지만 봐도 그 의도가 뻔히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미국산소고기수입논란) 가운데 걱정스러운 점은 정확한 사실과 과학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광우병 논란에 대한 의견과 토론이 진행되지 못하는 부분이 발생하고 있고, 이렇게 생산된 부정확한 사실들이 여과 없이 일반인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이번 문제를 바라보는 많은 일반인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이에 BRIC 소리마당에서 광우병 논란에 대해서 주제를 잡아 집중 토론방을 개설하였습니다.]- 4월 30일 브릭사이트, [공지] 광우병 논란에 대한 소리마당 집중토론방을 오픈하며...
결국 브릭사이트 관리자는 이 집중토론방을 개설할 때 예정 시한보다 더 연장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예정된 시한이 지나자 바로 토론을 끝내버렸다.
사실, 광우병은 아직 그 매커니즘이 밝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브릭이 아니라 브릭 할애비라도 정확한 사실을 말해주기 어렵다. 그래서 ‘사전예방의 원칙’에서 무조건 조심하는 수밖에 없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다가 이번 30개월 이상된 한미쇠고기협상으로 미국의 6-10년 된 늙다리소들이 대거 몰려올 판이다. 이런 소가 1년에 700만마리나 된다. 우리나라는 겨우 1년에 200만 마리 정도 소비한다. 씨받이용 암소와 젖소만으로도 우리나라 소비량을 세 번 뒤집어씌우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브릭은 토론방을 열었다.
명성도 얻었겠다. 대충 주장하면 국민들이 돌아설 것으로 여겼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 국민들의 과학적 상식도 이제 만만치가 않다.
특히 양심적인 과학자들도 적지 않고 또 인터넷을 발전으로 얼마든지 진실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시사기획 쌈 사회자는 ‘브릭’ 사이트를 무슨 황우석 박사 사건의 진실을 처음으로 파헤친 과학자들이라고 아직도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을 보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사기획 쌈의 이번 기획의 결말이 이상하게 흐른 원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된다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브릭 그들이 과학사전을 달달 암기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가슴에는 영혼이 없고, 그들의 심장에는 한민족의 피가 이미 말라버렸으며, 그들의 도덕관념에서는 이미 양심이 사라져버렸다.
황우석 박사는 지금도 재판에 시달리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판결까지 긴 시간이 걸린 재판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검사들이 주장하는 황우석 박사의 죄의 핵심은 지원금과 후원금 타낼 목적으로 실패한 실험을 성공했다고 속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언론의 찬사를 받았던 브릭 회원들이 밝혀낸 사실은 바로 사이언스에 올라간 황우석박사팀과 미즈메디병원 공동연구 논문에 올라간 조작된 사진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공동연구에서 황우석 박사팀이 연구한 분야는 배반포를 만드는 것까지였고 그 배반포를 가지고 줄기세포를 분화하는 것은 미즈메디병원측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찰도 미즈메디 소속 김선종 연구원이 줄기세포 분화실험을 바꿔치기를 통해 속였다고 밝혀냈으며 브릭이 밝힌 문제의 사진도 김선종 연구원이 촬영한 사진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형식적으로 전체연구팀장이었지만 황우석 박사는 수의학전공자로서 배반포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만 책임을 졌던 사람이며 그 배반포에서 줄기세포를 분화해 내는 것은 전적으로 미즈메디 담당이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황박사가 지식도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책임을 물으려면 황우석 박사를 속인 김선종 연구원과 황우석 박사를 이 연구에 참여시킨 미즈메디 병원의 노성일 이사장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황우석 박사도 김선종 연구원의 바꿔치기에 당한 피해자인 것이다.
그러나 검찰도 줄기세포 바꿔치기는 황박사와 무관한 김선종 단독 범행이라고 밝혀냈으면서도 김선종 연구원과 노성일 이사장은 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풀어주고 황우석 박사만 지금 계속 재판장에 불러다 재판을 벌이는 바람에 황우석 박사는 연구도 제대로 못하는 불이익을 계속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한 연구팀이 황우석 박사가 만들었던 것과 같은 체세포핵이식에 의한 배아복제 배반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떠들면서 미국에서는 이제 줄기세포 실용화에 거대한 진전을 이루었다며 흥분했었다.
이를 또한 우리 언론들도 흥분된 목소리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바로 서울대조사위는 당시에 황우석 박사팀이 그 배반포를 100개도 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었다.
최근 황우석 박사팀에서 미국과학자들이 번번이 실패한 미국애완견 복제에 성공하여 미국과 세계 과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인간과 유전자가 비슷할 정도로 복잡한 개를 복제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동물복제분야이다. 미국도 여전히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당시 논문조작사건이 불거졌을 때 브릭 회원들은 그 잘난 과학적 실력으로 황우석 박사의 첫 복제견인 스너피도 조작이라며 수많은 근거를 들이대며 공격했었다.
하지만 스너피는 성공한 복제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브릭은 한마디 사과도 없었고 언론들에게는 브릭의 젊은 과학자들은 여전히 영웅이었다.
황우석 박사팀이 체세포핵이식배아복제배반포와 복제견에 이렇듯 하는 족족 성공하고 있다는 이것만으로도 그는 우리나라의 영웅과학자가 되기에 충분하며 전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할 보배과학자이다.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황박사와 같은 배반포만 만들어도 영웅 중에 영웅 과학자가 된다.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과학자들도 황우석 박사의 복제기술에 대해서는 그 탁월함을 모두 다 인정하고 있다.
황우석 박사의 배반포와 복제견의 성공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도 금방 알 수 있다.
그저 애완견이나 복제하는 데 쓰이는 기술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의료혁명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런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법정에서는 황우석 박사를 몇 년째 심문하고 있다.
언론들에게 그는 여전히 논문조작 사기꾼이고 그를 몰아세운 브릭은 영웅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인가.
머저리들이 득시글거리는 나라 돌아도 한참 돌아버린 나라인 것이다.
정말 황우석 박사팀이 당시 연구에서 배반포뿐만 아니라 줄기세포 분화기술까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 김선종을 시킨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역할을 수행했다면 브릭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 일은 황우석 박사팀이 한 것이 아니라 김선종이 했지 않는가. 그는 미즈메디병원 의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브릭은 모조리 황우석 박사의 잘못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것은 팩트자체도 구별못하는 정시나간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철저히 황우석 박사의 기술을 강탈해가려는 미국의 새튼 일당을 도와주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브릭이 이번 광우병 사태에서도 역시나 철저히 미국편에 서서 움직이다가 네티즌들에 몰매를 맞고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괜히 더 나섰다가는 이용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고 보았을까. 브릭이 정말 양심이 있다면 황우석박사 때처럼 왜 끝까지 나서지 못하는 것일까!
조국이 없는 과학자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브릭이 굳이 보여주지 않더라도 인류는 아인쉬타인 박사의 삶을 통해서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의 핵기술은 나가사키, 히로시마 수 십 만 명의 주민들을 학살하는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아인쉬타인 박사는 조국이 떠나버렸기에 그의 기술이 망명해서 살았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었다.
그 후 그는 열렬한 반전반핵 운동가가 되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핵무기 사용 반대운동을 폈기 때문이다.
최근 밝혀진 아인쉬타인박사의 편지에서는 ‘신이 있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비과학’이라는내용도 담겨있다고 한다.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의 의미도 이제 명백해진 것이다.
우주는 자체의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리라.
그러나 브릭은 조국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도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 정도라면 머저리 단계에서 더 나아나 매국노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지금이라도 빨리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이제는 미국에 기대어 사는 것이 부귀영화로 직결되는 시대는 갔다. 미국이 망해가는 소리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과학도 공부하면서 제발 신문도 좀 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려고 했으면 좋겠다.●
2008.06.02 06:04:36 (*.218.188.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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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사건, 미국 조종하고 이승만정권 자행
보도연맹사건, 미국 조종하고 이승만정권 자행
구분
내용
보도연맹 설립취지
이승만정권, 좌익인사들 전향시켜 북을 분쇄한다는 취지로 '보도연맹' 결성
외적으로는 좌익전향자들을 '보도'(保導, 편하게 이끈다)한다는 취지로 결성
실상은 전향자가 제출한 자백서를 기반으로 좌익세력 섬멸하려는 의도로 결성
설립연도
1949년 6월
규모
33만명(1949년말, 서울만 2만명), 전국 단위 지부 갖춘 대규모 조직
만행
1945년 해방후 53년까지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치하에서 100만명의 민간인학살
사건의 은폐기도
이승만정권, 6.15전쟁당시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 명분으로 보도연맹원들 살해, 보도연맹사건 은폐기도
50년대 보도연맹원 피학살문제 제기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상범으로 몰아 처형
60년 4.19직후 양민학살진상규명 요구한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 5.16쿠데타 당시 용공분자로 구속
군사정권, 피학살자 유가족 친지 끊임없이 감시, 국가기관 취직통제, 출국금지
80년대초 연좌제 폐지후 국가보안법으로 위협, 유족들 침묵강요
학살규모
보도연맹 가입자 30만명 가운데 최소 10만명 이상 학살 추정
학살주체, 이승만친위대인 특무대(CIC)와 헌병
경찰과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보조적 가담
AP통신보도
(2008.5.18)
보도연맹사건 연속 기획기사 게재
기획기사중 1950년 여름 이승만정권 대전형무소 수감 보도연맹원 수천명 학살사건 보도
희생자가족, 학살가담 전직 경찰관, 교도관 인터뷰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자료 발굴내용
이승만정권 민간인학살에 대한 미국의 '이중태도' 강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 등 인터넷판 주요 뉴스로 게재
프로그레시브 김동관
남측지역에서의 미군 양민학살
2008-05-30 오후 11:00:27
시기
지역
피해자
내용
충북
노근리 사건
1950.7.25~29
노근리 경부선
철로 일대
400여명
피난민(임계리, 주곡리, 타지역 주민 등) 500~600명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서 피난민들을 미군들이 국도에서 철로로 행로를 변경, 미군전투기 폭격 및 기총소사로 철로위 피난민 들 중 다수 사망, 이후 7월 26~29일 노근리 개근철교(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에 대해 미군의 기관총사격
곡계굴 사건
1951.1.20
영춘 곡계굴
300~400명
미전투기가 네이팜탄 투하해 동굴속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 300여명이상이 타죽거나 질식해 사망했으며 기총소사로 주민들이 굴밖으로 못나오게 함
충남
아산 폭격사건
1950.1.15
둔포 마을
300여명
창고에 피신해 있던 피란민을 향해 미전투기폭격, 생존자들은 당시 피란민들은 추위를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었으며 미전투기는 아무런 경고 없이 폭격
경북
포항 학살사건
1950.9.1
북구 송골계곡
200여명
주민 1000여명이 피난중 정찰기가 저공 비행으로 피난민들 사이로 지나간 후 영일만 앞바다에서 작전중인 미해군 군함 3척에서 수백발의 함포사격을 함
영일군 폭격사건
1950.9
칠포해수욕장
미상
22대의 미군전투기가 흥안 2리부터 차례로 폭격 시작한 후 칠포해수욕장에 모여든 피난민들에게 미군 전투기가 무차별 기총 소사
경남
마산 곡안리
학살사건
1950.8.11
곡안리 뒷산
83명
성주 이씨 재실에 피난해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미군들이 폭겨과 기총소사
사천 폭격사건
1950.8.2
곤명면 조장리, 마곡리 일대
150여명
미군폭격기 4대가 폭격, 기총사격
진주 학살사건
1950.8.3
경남 진주지역
100명이상
진주 주약동 약골과 진치령 터널에서의 폭격
함안 학살사건
1950.8
경남 함안 일대
170명 이상
8.20 법수면 토현리, 같은 날 군북면 장지리, 8.27 수곡리, 박곡리, 그리고 군북면 원북터널, 군북면 유현리, 가야읍 혈곡리 등지에서 미군 폭격, 기총소사에 의한 학살, 네이팜탄도 사용
의령 학살사건
1950.8.11~17
의령 일대
100여명이상
1950.8.11. 13, 15, 17 화정면 상일리 보천마을, 1950.8.20 의령읍 만천리, 1950.8.22 용덕면 정동리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 부림면 단원리, 지정면 마산리에서도 희생
창녕군 학살사건
1950.8
창녕군
마을
100여명
주둔중이던 미군 24사단 수시간동안 무차별 총격
하동군 학살사건
1950.7
하동 1리
12명
미전투기 기총사격
전북
익산역 폭격사건
1950.7.11
이리역
300~450여명
미군전폭기 B29 2대가 무차별 폭격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당시 조선인민군은 7월 20일 경 도착
전남
광주 광산구
폭격학살사건
1950.8.2
10여명
미전투기 2~3대가 폭탄 3~4발 투하
여수 여자만
양민학살사건
1950.8
장도와 고흥군 과역면 백일리
원주도 사이
미상
미전투기 폭격
여수 남면 두룩여
집단학살사건
1950.8.7
횡간도와 금오도 사이의 두룩여앞 바다
12명
미전투기 기총소사
여수 남면
안도리
이야포
집단학살사건
1950.8.3
안도리 이야포
140~150여명
미전투기 4대가 기총사격
독도 폭격사건
1947.4
1948.6.8
1952.9
독도인근 해역
150명이상
조업중이던 어선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수백명이 희생당한 미군에 의한 독도 주민 학살 사건. 1950년 7월 6일 독도가 미군의 해상폭격연습지로 지정
프로그레시브 김미성
북측지역에서의 미군 양민학살
2008-05-30 오후 10:27:03
구분
내용
폭격에 의한 학살
1950.6.29~7.3 평양 미폭격기 80여대, 무차별폭격과 로케트발사, 기관총사격, 48명 주민 살해
1950.8.7 평양 B29 33대 폭탄 450개, 여성 20여명 총 70여명 주민들 살해
1951.7.11~8.20 평양 미군비행기1만대이상 250회이상 4000여개의 폭탄 4000여명의 주민 살해 2500명 부상
1952.3.25 평양 B29 24대 포함 미군비행기 63대 39회에 걸쳐 1370개의 폭탄 투하, 120명이상의 주민 살해,
1952.7.11~12 400여대 6000여개의 나팜탄, 시한탄 투하, 8000여명의 부녀자와 노인, 어린이들 살상
1950.7.2~8.3 함흥, 흥남 지구에 약 200대의 미군비행기 폭탄 투하, 기관총사격 주민 297명 살해, 446명 중상
1950.8월초 미군비행기 흥남중앙병원 28개 폭탄 투하, 의사, 간호원 18명과 해산중이던 여성 포함, 117명 환자 살해 106명 환자들 부상, 흥남탁아소에 대형폭탄 투하 기관총사격 생후6개월부터 4살 어린이 52명 사망
1950.8.19 청진시 60여대의 미군폭격기들은 1012개의 폭탄 투하, 393명의 여성 포함, 1034명의 시민 살해, 2347명의 시민 부상
1950.11.8 미군폭격기 100대 신의주시 폭탄과 소이탄 등 투하 8900호의 살림집 파괴, 4000명이상의 여자와 어린이 포함 5000명이상의 시민 살해, 3155명 부상
1950.7.2~27 원산지구 12회 폭격, 여자 739명, 어린이 325명 포함, 1647명 살해, 2267명 부상
1951.8 한달간 함경북도일대 비행기 2122개 폭탄 투하, 6098개의 함포사격 주민 2857명 살해
3년간 공군비행대 80만회, 해병대와 해군비행기 25만회이상 출격, 이중 85% 평화적 대상과 주민들에 대한 폭격과 포격, 기관총사격
폭탄과 네이팜탄 60만t(태평양전쟁시기 일본본토에 투하한 폭탄 16만1425t의 3.7배 초과, 일본의 1/3도 안되는 영토에 집중투하)
평양시 총 1400여회 출격, 42만8000여개의 폭탄 투하, 공장, 기업소, 교육, 보건, 봉사시설들과 살림집 파괴, 무고한 주민들 살해
북측지역 일시적점령기 학살
1950.11.7 해주시 5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룡당리 수도산에서 총살, 뒤이어 벽성군금산면 하우고개 골짜기 600여명의 주민 총살
1950.12.5 사리원시, 950여명 총살
평양 시민 4000여명 체포, 평양감옥마당에서 2000여명 총살, 그 시체를 21개의 방공호와 3개의 우물과 저수지에 매몰
1950.10.18 900여명 신천군당 방공호에 가두어 놓고 휘발유로 불태워 학살, 같은 방법으로 1550여명 군당 방공호와 그 주변지역 학살
1950.10.21 10∼20명씩 결박, 돌과 흙가마니를 달아서 남부저수지에 산채로 수장, 룡문면과 남부면일대의 저수지와 물웅덩이 2093명 수장
신천군 석당교에서 우룡리, 석당리, 청산리 주민 2000여명 칼부림으로 강물에 떨어뜨려 학살, 재령군 고잔리 페천강에서 300여명, 남대천에서 500여명 수장
평양시 1만5000여명, 신천군 3만5380여명, 안악군 1만9072명, 은률군 1만3000여명, 해주시 6000여명, 벽성군 5998명, 안주군 5000여명 등 학살
세균 및 화학무기에 의한 학살
1950년 12월중순부터 1951년 1월까지 평양시, 평안남도, 강원도, 황해도 등 미군철수 78일후 천연두가 폭발적으로 발생, 1951.4월 천연두 3500건이상 발생, 그중 10% 사망
1951.3 유엔군총사령부 세균살륙정 비밀리에 거제도 앞바다에 정박, 포로들 대상으로 세균무기시험 진행
1951.5.6 남포시 4차례 독가스탄 투하, 1379명 살해
1951.7.6, 9.1 원산지구와 황해도 여러 지대 최루성 및 질식성 독가스탄 투하, 수십명의 중독자와 희생자 발생
1952.1~3월 169개 지역에 연 804차, 고원지대, 해안지대, 산간지대 등 각종 세균탄 대량 투하
1952.1.28 미군비행기는 파리, 벼룩, 빈대와 같은 전염병균 가진 독충들 이천지구에 대량 살포, 다음날 대량의 파리와 벼룩 살포
1952.2.13,15,16,17 평강지구와 주변지구에 파리, 거미, 모기, 벼룩과 같은 각종 벌레들 살포
1952.2.27~4.9 여러 지역에 33차례에 걸쳐 독가스탄 살포, 대량살륙무기 스파나팜탄 1500여만개 투하
1952.5.18 대동군 독해물을 묻힌 조개 투하
1952.9 간리지역 연안지방, 독해물을 묻힌 100원짜리 가짜돈과 삐라 살포
폭격에 동원된 비행기의 1/4이 세균전에 동원, 어떤 날은 하루 480대 출격
조선인민군 전쟁포로 대상 학살
1950.11.20 부산 거제리 제100호포로수용소 관하 제7호수용소 200m 떨어진 곳에서 땡크들의 중기로 집중사격, 전원 학살
1952.2.18 거제도 제62호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민간억류자'로 되겠다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약 1000명의 미군병력으로 수용소를 포위, 25정의 중기관총, 63정의 경기관총 난사, 102명 즉사, 260여명 부상
1952.5.27 거제도 제77호 포로수용소 북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 포로 800여명 화염방사기 소살
1952.6.10 제76호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개인면회심사' 거절한것과 관련, 4000여명의 무장인원과 22대의 땡크, 20문의 포, 40정의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을 동원 무려 4시간에 걸쳐 무차별사격과 독가스 살포, 수류탄 투척, 276명의 포로들이 살해되고 수많은 포로들 부상
1952.6.10 거제도 76호 포로수용소 27대의 땡크 12문 포 동원, 화학탄 발사, 227명 희생
1952.7.7 거제도수용소 작업 동원 구실로 거제도수용소 4대대 조선인민군포로 120명 4시간동안 감금한채 가스무기시험, 두달동안 눈을 뜨지 못하고 불구가 됨
1952.8.13 룡초도 제2호포로수용소 자그마한 철조망안에 수많은 인민군포로들을 가두고 2개소대병력 동원 1000여개의 가스탄 폭발, 350명이상 중화상, 44명 의식불명, 4명 희생
1952.3~4 20여개의 수용소 3만3600여명 학살
* 조선외무성 발표 비망록(2000.3.21) 참고
프로그레시브 김계림
보도연맹사건 관련 AP 기사 원문
2008-06-01 오전 12:19:36
AP IMPACT: Thousands killed by US's Korean ally
By CHARLES J. HANLEY and JAE-SOON CHANG - May 18, 2008
DAEJEON, South Korea (AP) - Grave by mass grave, South Korea is unearthing the skeletons and buried truths of a cold-blooded slaughter from early in the Korean War, when this nation's U.S.-backed regime killed untold thousands of leftists and hapless peasants in a summer of terror in 1950.
With U.S. military officers sometimes present, and as North Korean invaders pushed down the peninsula, the southern army and police emptied South Korean prisons, lined up detainees and shot them in the head, dumping the bodies into hastily dug trenches. Others were thrown into abandoned mines or into the sea. Women and children were among those killed. Many victims never faced charges or trial.
The mass executions - intended to keep possible southern leftists from reinforcing the northerners - were carried out over mere weeks and were largely hidden from history for a half-century. They were "the most tragic and brutal chapter of the Korean War," said historian Kim Dong-choon, a member of a 2-year-old government commission investigating the killings.
Hundreds of sets of remains have been uncovered so far, but researchers say they are only a tiny fraction of the deaths. The commission estimates at least 100,000 people were executed, in a South Korean population of 20 million.
That estimate is based on projections from local surveys and is "very conservative," said Kim. The true toll may be twice that or more, he told The Associated Press.
In addition, thousands of South Koreans who allegedly collaborated with the communist occupation were slain by southern forces later in 1950, and the invaders staged their own executions of rightists.
Through the postwar decades of South Korean right-wing dictatorships, victims' fearful families kept silent about that blood-soaked summer. American military reports of the South Korean slaughter were stamped "secret" and filed away in Washington. Communist accounts were dismissed as lies.
Only since the 1990s, and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has the truth begun to seep out.
In 2002, a typhoon's fury uncovered one mass grave. Another was found by a television news team that broke into a sealed mine. Further corroboration comes from a trickle of declassified U.S. military documents, including U.S. Army photographs of a mass killing outside this central South Korean city.
Now Kim's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has added government authority to the work of scattered researchers, family members and journalists trying to peel away the long-running cover-up. The commissioners have the help of a handful of remorseful old men.
"Even now, I feel guilty that I pulled the trigger," said Lee Joon-young, 83, one of the executioners in a secluded valley near Daejeon in early July 1950.
The retired prison guard told the AP he knew that many of those shot and buried en masse were ordinary convicts or illiterate peasants wrongly ensnared in roundups of supposed communist sympathizers. They didn't deserve to die, he said. They "knew nothing about communism."
The 17 investigators of the commission's subcommittee on "mass civilian sacrifice," led by Kim, have been dealing with petitions from more than 7,000 South Koreans, involving some 1,200 alleged incidents - not just mass planned executions, but also 215 cases in which the U.S. military is accused of the indiscriminate killing of South Korean civilians in 1950-51, usually in air attacks.
The commission last year excavated sites at four of an estimated 150 mass graves around the country, recovering remains of more than 400 people. Working deliberately, matching documents to eyewitness and survivor testimony, it has officially confirmed two large-scale executions - at a warehouse in the central South Korean county of Cheongwon, and at Ulsan on the southeast coast.
In January, then-President Roh Moo-hyun, under whose liberal leadership the commission was established, formally apologized for the more than 870 deaths confirmed at Ulsan, calling them "illegal acts the then-state authority committed."
The commission, with no power to compel testimony or prosecute, faces daunting tasks both in verifying events and identifying victims, and in tracing a chain of responsibility. Under Roh's conservative successor, Lee Myung-bak, whose party is seen as democratic heir to the old autocratic right wing, the commission may find less budgetary and political support.
The roots of the summer 1950 bloodbath lie in the U.S.-Soviet division of Japan's former Korea colony in 1945, which precipitated north-south turmoil and eventual war.
In the late 1940s, President Syngman Rhee's U.S.-installed rightist regime crushed leftist political activity in South Korea, including a guerrilla uprising inspired by the communists ruling the north. By 1950, southern jails were packed with up to 30,000 political prisoners.
The southern government, meanwhile, also created the National Guidance League, a "re-education" organization for recanting leftists and others suspected of communist leanings. Historians say officials met membership quotas by pressuring peasants into signing up with promises of rice rations or other benefits. By 1950, more than 300,000 people were on the league's rolls, organizers said.
North Korean invaders seized Seoul, the southern capital, in late June 1950 and freed thousands of prisoners, who rallied to the northern cause. Southern authorities, in full retreat with their U.S. military advisers, ordered National Guidance League members in areas they controlled to report to the police, who detained them. Soon after, commission researchers say, the organized mass executions of people regarded as potential collaborators began - "bad security risks," as a police official described the detainees at the time.
The declassified record of U.S. documents shows an ambivalent American attitude toward the killings. American diplomats that summer urged restraint on southern officials - to no obvious effect - but a State Department cable that fall said overall commander Gen. Douglas MacArthur viewed the executions as a Korean "internal matter," even though he controlled South Korea's military.
Ninety miles south of Seoul, here in the narrow, peaceful valley of Sannae, truckloads of prisoners were brought in from Daejeon Prison and elsewhere day after day in July 1950, as the North Koreans bore down on the city.
The American photos, taken by an Army major and kept classified for a half-century, show the macabre sequence of events.
White-clad detainees - bent, submissive, with hands bound - were thrown down prone, jammed side by side, on the edge of a long trench. South Korean military and national policemen then stepped up behind, pointed their rifles at the backs of their heads and fired. The bodies were tipped into the trench.
Trembling policemen - "they hadn't shot anyone before" - were sometimes off-target, leaving men wounded but alive, Lee said. He and others were ordered to check for wounded and finish them off.
Evidence indicates South Korean executioners killed between 3,000 and 7,000 here, said commissioner Kim. A half-dozen trenches, each up to 150 yards long and full of bodies, extended over an area almost a mile long, said Kim Chong-hyun, 70, chairman of a group of bereaved families campaigning for disclosure and compensation for the Daejeon killings. His father, accused but never convicted of militant leftist activity, was one victim.
Another was Yeo Tae-ku's father, whose wife and mother searched for him afterward.
"Bodies were just piled upon each other," said Yeo, 59, remembering his mother's description. "Arms would come off when they turned them over." The desperate women never found him, and the mass graves were quickly covered over, as were others in isolated spots up and down this mountainous peninsula, to be officially "forgotten."
When British communist journalist Alan Winnington entered Daejeon that summer with North Korean troops and visited the site, writing of "waxy dead hands and feet (that) stick through the soil," his reports in the Daily Worker were denounced as "fabrication" by the U.S. Embassy in London. American military accounts focused instead on North Korean reprisal killings that followed in Daejeon.
But CIA and U.S. military intelligence documents circulating even before the Winnington report, classified "secret" and since declassified, told of the executions by the South Koreans. Lt. Col. Bob Edwards, U.S. Embassy military attache in South Korea, wrote in conveying the Daejeon photos to Army intelligence in Washington that he believed nationwide "thousands of political prisoners were executed within (a) few weeks" by the South Koreans.
Another glimpse of the carnage appeared in an unofficial U.S. source, an obscure memoir self-published in 1981 by the late Donald Nichols, a U.S. Air Force intelligence officer, who told of witnessing "the unforgettable massacre of approximately 1,800 at Suwon," 20 miles south of Seoul.
Such reports lend credibility to a captured North Korean document from Aug. 2, 1950, eventually declassified by Washington, which spoke of mass executions in 12 South Korean cities, including 1,000 killed in Suwon and 4,000 in Daejeon.
That early, incomplete North Korean report couldn't include those executed in territory still held by the southerners. Up to 10,000 were killed in the city of Busan alone, a South Korean lawmaker, Park Chan-hyun, estimated in 1960.
His investigation came during a 12-month democratic interlude between the overthrow of Rhee and a government takeover by Maj. Gen. Park Chung-hee's authoritarian military, which quickly arrested many then probing for the hidden story of 1950.
Kim said his projection of at least 100,000 dead is based in part on extrapolating from a survey by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in one province, Busan's South Gyeongsang, which estimated 25,000 killed there. And initial evidence suggests most of the National Guidance League's 300,000 members were killed, he said.
Commission investigators agree with the late Lt. Col. Edwards' note to Washington in 1950, that "orders for execution undoubtedly came from the top," that is, President Rhee, who died in 1965.
But any documentary proof of that may have been destroyed, just as the facts of the mass killings themselves were buried. In 1953, after the war ended in stalemate, after the deaths of at least 2 million people, half or more of them civilians, a U.S. Army war crimes report attributed all summary executions here in Daejeon to the "murderous barbarism" of North Koreans.
Such myths survived a half-century, in part because those who knew the truth were cowed into silence.
"My mother destroyed all pictures of my father, for fear the family would get an image as leftists," said Koh Chung-ryol, 57, who is convinced her 29-year-old father was innocent of wrongdoing when picked up in a broad police sweep here, to die in Sannae valley.
"My mother tried hard to get rid of anything about her husband," she said. "She suffered unspeakable pain."
Even educated South Koreans remained ignorant of their country's past. As a young researcher in the late 1980s, Yonsei University's Park Myung-lim, today a leading Korean War historian, was deeply shaken as he sought out confidential accounts of those days from ordinary Koreans.
"I cried," he said. "I felt, 'Oh, my goodness. Oh, Jesus. This was my country? It was true?'"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can recommend but not award compensation for lost and ruined lives, nor can it bring surviving perpetrators to justice. "Our investigative power is so meager," commission President Ahn Byung-ook told the AP.
His immediate concern is resources. "The current government isn't friendly toward us, and so we're concerned that the budget may be cut next year," he said.
South Korean conservatives complain the "truth" campaign will only reopen old wounds from a time when, even at the village level, leftists and rightists carried out bloody reprisals against each other.
The life of the commission - with a staff of 240 and annual budget of $19 million - is guaranteed by law until at least 2010, when it will issue a final, comprehensive report.
Later this spring and summer its teams will resume digging at mass grave sites. Thus far, it has verified 16 incidents of 1950-51 - not just large-scale detainee killings, but also such events as a South Korean battalion's cold-blooded killing of 187 men, women and children at Kochang village, supposed sympathizers with leftist guerrillas.
By exposing the truth of such episodes, "we hope to heal the trauma and pain of the bereaved families," the commission says. It also wants to educate people, "not just in Korea, but throughou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o the reality of that long-ago conflict, to "prevent such a tragic war from reoccurring in the future."
Associated Press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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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사건, 미국 조종하고 이승만정권 자행
보도연맹사건, 미국 조종하고 이승만정권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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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정권, 좌익인사들 전향시켜 북을 분쇄한다는 취지로 '보도연맹' 결성
외적으로는 좌익전향자들을 '보도'(保導, 편하게 이끈다)한다는 취지로 결성
실상은 전향자가 제출한 자백서를 기반으로 좌익세력 섬멸하려는 의도로 결성
설립연도
1949년 6월
규모
33만명(1949년말, 서울만 2만명), 전국 단위 지부 갖춘 대규모 조직
만행
1945년 해방후 53년까지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치하에서 100만명의 민간인학살
사건의 은폐기도
이승만정권, 6.15전쟁당시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 명분으로 보도연맹원들 살해, 보도연맹사건 은폐기도
50년대 보도연맹원 피학살문제 제기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상범으로 몰아 처형
60년 4.19직후 양민학살진상규명 요구한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 5.16쿠데타 당시 용공분자로 구속
군사정권, 피학살자 유가족 친지 끊임없이 감시, 국가기관 취직통제, 출국금지
80년대초 연좌제 폐지후 국가보안법으로 위협, 유족들 침묵강요
학살규모
보도연맹 가입자 30만명 가운데 최소 10만명 이상 학살 추정
학살주체, 이승만친위대인 특무대(CIC)와 헌병
경찰과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보조적 가담
AP통신보도
(2008.5.18)
보도연맹사건 연속 기획기사 게재
기획기사중 1950년 여름 이승만정권 대전형무소 수감 보도연맹원 수천명 학살사건 보도
희생자가족, 학살가담 전직 경찰관, 교도관 인터뷰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자료 발굴내용
이승만정권 민간인학살에 대한 미국의 '이중태도' 강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타임스 등 인터넷판 주요 뉴스로 게재
프로그레시브 김동관
남측지역에서의 미군 양민학살
2008-05-30 오후 11:00:27
시기
지역
피해자
내용
충북
노근리 사건
1950.7.25~29
노근리 경부선
철로 일대
400여명
피난민(임계리, 주곡리, 타지역 주민 등) 500~600명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서 피난민들을 미군들이 국도에서 철로로 행로를 변경, 미군전투기 폭격 및 기총소사로 철로위 피난민 들 중 다수 사망, 이후 7월 26~29일 노근리 개근철교(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에 대해 미군의 기관총사격
곡계굴 사건
1951.1.20
영춘 곡계굴
300~400명
미전투기가 네이팜탄 투하해 동굴속에 피신해 있던 민간인 300여명이상이 타죽거나 질식해 사망했으며 기총소사로 주민들이 굴밖으로 못나오게 함
충남
아산 폭격사건
1950.1.15
둔포 마을
300여명
창고에 피신해 있던 피란민을 향해 미전투기폭격, 생존자들은 당시 피란민들은 추위를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었으며 미전투기는 아무런 경고 없이 폭격
경북
포항 학살사건
1950.9.1
북구 송골계곡
200여명
주민 1000여명이 피난중 정찰기가 저공 비행으로 피난민들 사이로 지나간 후 영일만 앞바다에서 작전중인 미해군 군함 3척에서 수백발의 함포사격을 함
영일군 폭격사건
1950.9
칠포해수욕장
미상
22대의 미군전투기가 흥안 2리부터 차례로 폭격 시작한 후 칠포해수욕장에 모여든 피난민들에게 미군 전투기가 무차별 기총 소사
경남
마산 곡안리
학살사건
1950.8.11
곡안리 뒷산
83명
성주 이씨 재실에 피난해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미군들이 폭겨과 기총소사
사천 폭격사건
1950.8.2
곤명면 조장리, 마곡리 일대
150여명
미군폭격기 4대가 폭격, 기총사격
진주 학살사건
1950.8.3
경남 진주지역
100명이상
진주 주약동 약골과 진치령 터널에서의 폭격
함안 학살사건
1950.8
경남 함안 일대
170명 이상
8.20 법수면 토현리, 같은 날 군북면 장지리, 8.27 수곡리, 박곡리, 그리고 군북면 원북터널, 군북면 유현리, 가야읍 혈곡리 등지에서 미군 폭격, 기총소사에 의한 학살, 네이팜탄도 사용
의령 학살사건
1950.8.11~17
의령 일대
100여명이상
1950.8.11. 13, 15, 17 화정면 상일리 보천마을, 1950.8.20 의령읍 만천리, 1950.8.22 용덕면 정동리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 부림면 단원리, 지정면 마산리에서도 희생
창녕군 학살사건
1950.8
창녕군
마을
100여명
주둔중이던 미군 24사단 수시간동안 무차별 총격
하동군 학살사건
1950.7
하동 1리
12명
미전투기 기총사격
전북
익산역 폭격사건
1950.7.11
이리역
300~450여명
미군전폭기 B29 2대가 무차별 폭격해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당시 조선인민군은 7월 20일 경 도착
전남
광주 광산구
폭격학살사건
1950.8.2
10여명
미전투기 2~3대가 폭탄 3~4발 투하
여수 여자만
양민학살사건
1950.8
장도와 고흥군 과역면 백일리
원주도 사이
미상
미전투기 폭격
여수 남면 두룩여
집단학살사건
1950.8.7
횡간도와 금오도 사이의 두룩여앞 바다
12명
미전투기 기총소사
여수 남면
안도리
이야포
집단학살사건
1950.8.3
안도리 이야포
140~150여명
미전투기 4대가 기총사격
독도 폭격사건
1947.4
1948.6.8
1952.9
독도인근 해역
150명이상
조업중이던 어선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수백명이 희생당한 미군에 의한 독도 주민 학살 사건. 1950년 7월 6일 독도가 미군의 해상폭격연습지로 지정
프로그레시브 김미성
북측지역에서의 미군 양민학살
2008-05-30 오후 10:27:03
구분
내용
폭격에 의한 학살
1950.6.29~7.3 평양 미폭격기 80여대, 무차별폭격과 로케트발사, 기관총사격, 48명 주민 살해
1950.8.7 평양 B29 33대 폭탄 450개, 여성 20여명 총 70여명 주민들 살해
1951.7.11~8.20 평양 미군비행기1만대이상 250회이상 4000여개의 폭탄 4000여명의 주민 살해 2500명 부상
1952.3.25 평양 B29 24대 포함 미군비행기 63대 39회에 걸쳐 1370개의 폭탄 투하, 120명이상의 주민 살해,
1952.7.11~12 400여대 6000여개의 나팜탄, 시한탄 투하, 8000여명의 부녀자와 노인, 어린이들 살상
1950.7.2~8.3 함흥, 흥남 지구에 약 200대의 미군비행기 폭탄 투하, 기관총사격 주민 297명 살해, 446명 중상
1950.8월초 미군비행기 흥남중앙병원 28개 폭탄 투하, 의사, 간호원 18명과 해산중이던 여성 포함, 117명 환자 살해 106명 환자들 부상, 흥남탁아소에 대형폭탄 투하 기관총사격 생후6개월부터 4살 어린이 52명 사망
1950.8.19 청진시 60여대의 미군폭격기들은 1012개의 폭탄 투하, 393명의 여성 포함, 1034명의 시민 살해, 2347명의 시민 부상
1950.11.8 미군폭격기 100대 신의주시 폭탄과 소이탄 등 투하 8900호의 살림집 파괴, 4000명이상의 여자와 어린이 포함 5000명이상의 시민 살해, 3155명 부상
1950.7.2~27 원산지구 12회 폭격, 여자 739명, 어린이 325명 포함, 1647명 살해, 2267명 부상
1951.8 한달간 함경북도일대 비행기 2122개 폭탄 투하, 6098개의 함포사격 주민 2857명 살해
3년간 공군비행대 80만회, 해병대와 해군비행기 25만회이상 출격, 이중 85% 평화적 대상과 주민들에 대한 폭격과 포격, 기관총사격
폭탄과 네이팜탄 60만t(태평양전쟁시기 일본본토에 투하한 폭탄 16만1425t의 3.7배 초과, 일본의 1/3도 안되는 영토에 집중투하)
평양시 총 1400여회 출격, 42만8000여개의 폭탄 투하, 공장, 기업소, 교육, 보건, 봉사시설들과 살림집 파괴, 무고한 주민들 살해
북측지역 일시적점령기 학살
1950.11.7 해주시 5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룡당리 수도산에서 총살, 뒤이어 벽성군금산면 하우고개 골짜기 600여명의 주민 총살
1950.12.5 사리원시, 950여명 총살
평양 시민 4000여명 체포, 평양감옥마당에서 2000여명 총살, 그 시체를 21개의 방공호와 3개의 우물과 저수지에 매몰
1950.10.18 900여명 신천군당 방공호에 가두어 놓고 휘발유로 불태워 학살, 같은 방법으로 1550여명 군당 방공호와 그 주변지역 학살
1950.10.21 10∼20명씩 결박, 돌과 흙가마니를 달아서 남부저수지에 산채로 수장, 룡문면과 남부면일대의 저수지와 물웅덩이 2093명 수장
신천군 석당교에서 우룡리, 석당리, 청산리 주민 2000여명 칼부림으로 강물에 떨어뜨려 학살, 재령군 고잔리 페천강에서 300여명, 남대천에서 500여명 수장
평양시 1만5000여명, 신천군 3만5380여명, 안악군 1만9072명, 은률군 1만3000여명, 해주시 6000여명, 벽성군 5998명, 안주군 5000여명 등 학살
세균 및 화학무기에 의한 학살
1950년 12월중순부터 1951년 1월까지 평양시, 평안남도, 강원도, 황해도 등 미군철수 78일후 천연두가 폭발적으로 발생, 1951.4월 천연두 3500건이상 발생, 그중 10% 사망
1951.3 유엔군총사령부 세균살륙정 비밀리에 거제도 앞바다에 정박, 포로들 대상으로 세균무기시험 진행
1951.5.6 남포시 4차례 독가스탄 투하, 1379명 살해
1951.7.6, 9.1 원산지구와 황해도 여러 지대 최루성 및 질식성 독가스탄 투하, 수십명의 중독자와 희생자 발생
1952.1~3월 169개 지역에 연 804차, 고원지대, 해안지대, 산간지대 등 각종 세균탄 대량 투하
1952.1.28 미군비행기는 파리, 벼룩, 빈대와 같은 전염병균 가진 독충들 이천지구에 대량 살포, 다음날 대량의 파리와 벼룩 살포
1952.2.13,15,16,17 평강지구와 주변지구에 파리, 거미, 모기, 벼룩과 같은 각종 벌레들 살포
1952.2.27~4.9 여러 지역에 33차례에 걸쳐 독가스탄 살포, 대량살륙무기 스파나팜탄 1500여만개 투하
1952.5.18 대동군 독해물을 묻힌 조개 투하
1952.9 간리지역 연안지방, 독해물을 묻힌 100원짜리 가짜돈과 삐라 살포
폭격에 동원된 비행기의 1/4이 세균전에 동원, 어떤 날은 하루 480대 출격
조선인민군 전쟁포로 대상 학살
1950.11.20 부산 거제리 제100호포로수용소 관하 제7호수용소 200m 떨어진 곳에서 땡크들의 중기로 집중사격, 전원 학살
1952.2.18 거제도 제62호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민간억류자'로 되겠다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약 1000명의 미군병력으로 수용소를 포위, 25정의 중기관총, 63정의 경기관총 난사, 102명 즉사, 260여명 부상
1952.5.27 거제도 제77호 포로수용소 북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 포로 800여명 화염방사기 소살
1952.6.10 제76호 포로수용소 포로들이 '개인면회심사' 거절한것과 관련, 4000여명의 무장인원과 22대의 땡크, 20문의 포, 40정의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을 동원 무려 4시간에 걸쳐 무차별사격과 독가스 살포, 수류탄 투척, 276명의 포로들이 살해되고 수많은 포로들 부상
1952.6.10 거제도 76호 포로수용소 27대의 땡크 12문 포 동원, 화학탄 발사, 227명 희생
1952.7.7 거제도수용소 작업 동원 구실로 거제도수용소 4대대 조선인민군포로 120명 4시간동안 감금한채 가스무기시험, 두달동안 눈을 뜨지 못하고 불구가 됨
1952.8.13 룡초도 제2호포로수용소 자그마한 철조망안에 수많은 인민군포로들을 가두고 2개소대병력 동원 1000여개의 가스탄 폭발, 350명이상 중화상, 44명 의식불명, 4명 희생
1952.3~4 20여개의 수용소 3만3600여명 학살
* 조선외무성 발표 비망록(2000.3.21) 참고
프로그레시브 김계림
보도연맹사건 관련 AP 기사 원문
2008-06-01 오전 12:19:36
AP IMPACT: Thousands killed by US's Korean ally
By CHARLES J. HANLEY and JAE-SOON CHANG - May 18, 2008
DAEJEON, South Korea (AP) - Grave by mass grave, South Korea is unearthing the skeletons and buried truths of a cold-blooded slaughter from early in the Korean War, when this nation's U.S.-backed regime killed untold thousands of leftists and hapless peasants in a summer of terror in 1950.
With U.S. military officers sometimes present, and as North Korean invaders pushed down the peninsula, the southern army and police emptied South Korean prisons, lined up detainees and shot them in the head, dumping the bodies into hastily dug trenches. Others were thrown into abandoned mines or into the sea. Women and children were among those killed. Many victims never faced charges or trial.
The mass executions - intended to keep possible southern leftists from reinforcing the northerners - were carried out over mere weeks and were largely hidden from history for a half-century. They were "the most tragic and brutal chapter of the Korean War," said historian Kim Dong-choon, a member of a 2-year-old government commission investigating the killings.
Hundreds of sets of remains have been uncovered so far, but researchers say they are only a tiny fraction of the deaths. The commission estimates at least 100,000 people were executed, in a South Korean population of 20 million.
That estimate is based on projections from local surveys and is "very conservative," said Kim. The true toll may be twice that or more, he told The Associated Press.
In addition, thousands of South Koreans who allegedly collaborated with the communist occupation were slain by southern forces later in 1950, and the invaders staged their own executions of rightists.
Through the postwar decades of South Korean right-wing dictatorships, victims' fearful families kept silent about that blood-soaked summer. American military reports of the South Korean slaughter were stamped "secret" and filed away in Washington. Communist accounts were dismissed as lies.
Only since the 1990s, and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has the truth begun to seep out.
In 2002, a typhoon's fury uncovered one mass grave. Another was found by a television news team that broke into a sealed mine. Further corroboration comes from a trickle of declassified U.S. military documents, including U.S. Army photographs of a mass killing outside this central South Korean city.
Now Kim's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has added government authority to the work of scattered researchers, family members and journalists trying to peel away the long-running cover-up. The commissioners have the help of a handful of remorseful old men.
"Even now, I feel guilty that I pulled the trigger," said Lee Joon-young, 83, one of the executioners in a secluded valley near Daejeon in early July 1950.
The retired prison guard told the AP he knew that many of those shot and buried en masse were ordinary convicts or illiterate peasants wrongly ensnared in roundups of supposed communist sympathizers. They didn't deserve to die, he said. They "knew nothing about communism."
The 17 investigators of the commission's subcommittee on "mass civilian sacrifice," led by Kim, have been dealing with petitions from more than 7,000 South Koreans, involving some 1,200 alleged incidents - not just mass planned executions, but also 215 cases in which the U.S. military is accused of the indiscriminate killing of South Korean civilians in 1950-51, usually in air attacks.
The commission last year excavated sites at four of an estimated 150 mass graves around the country, recovering remains of more than 400 people. Working deliberately, matching documents to eyewitness and survivor testimony, it has officially confirmed two large-scale executions - at a warehouse in the central South Korean county of Cheongwon, and at Ulsan on the southeast coast.
In January, then-President Roh Moo-hyun, under whose liberal leadership the commission was established, formally apologized for the more than 870 deaths confirmed at Ulsan, calling them "illegal acts the then-state authority committed."
The commission, with no power to compel testimony or prosecute, faces daunting tasks both in verifying events and identifying victims, and in tracing a chain of responsibility. Under Roh's conservative successor, Lee Myung-bak, whose party is seen as democratic heir to the old autocratic right wing, the commission may find less budgetary and political support.
The roots of the summer 1950 bloodbath lie in the U.S.-Soviet division of Japan's former Korea colony in 1945, which precipitated north-south turmoil and eventual war.
In the late 1940s, President Syngman Rhee's U.S.-installed rightist regime crushed leftist political activity in South Korea, including a guerrilla uprising inspired by the communists ruling the north. By 1950, southern jails were packed with up to 30,000 political prisoners.
The southern government, meanwhile, also created the National Guidance League, a "re-education" organization for recanting leftists and others suspected of communist leanings. Historians say officials met membership quotas by pressuring peasants into signing up with promises of rice rations or other benefits. By 1950, more than 300,000 people were on the league's rolls, organizers said.
North Korean invaders seized Seoul, the southern capital, in late June 1950 and freed thousands of prisoners, who rallied to the northern cause. Southern authorities, in full retreat with their U.S. military advisers, ordered National Guidance League members in areas they controlled to report to the police, who detained them. Soon after, commission researchers say, the organized mass executions of people regarded as potential collaborators began - "bad security risks," as a police official described the detainees at the time.
The declassified record of U.S. documents shows an ambivalent American attitude toward the killings. American diplomats that summer urged restraint on southern officials - to no obvious effect - but a State Department cable that fall said overall commander Gen. Douglas MacArthur viewed the executions as a Korean "internal matter," even though he controlled South Korea's military.
Ninety miles south of Seoul, here in the narrow, peaceful valley of Sannae, truckloads of prisoners were brought in from Daejeon Prison and elsewhere day after day in July 1950, as the North Koreans bore down on the city.
The American photos, taken by an Army major and kept classified for a half-century, show the macabre sequence of events.
White-clad detainees - bent, submissive, with hands bound - were thrown down prone, jammed side by side, on the edge of a long trench. South Korean military and national policemen then stepped up behind, pointed their rifles at the backs of their heads and fired. The bodies were tipped into the trench.
Trembling policemen - "they hadn't shot anyone before" - were sometimes off-target, leaving men wounded but alive, Lee said. He and others were ordered to check for wounded and finish them off.
Evidence indicates South Korean executioners killed between 3,000 and 7,000 here, said commissioner Kim. A half-dozen trenches, each up to 150 yards long and full of bodies, extended over an area almost a mile long, said Kim Chong-hyun, 70, chairman of a group of bereaved families campaigning for disclosure and compensation for the Daejeon killings. His father, accused but never convicted of militant leftist activity, was one victim.
Another was Yeo Tae-ku's father, whose wife and mother searched for him afterward.
"Bodies were just piled upon each other," said Yeo, 59, remembering his mother's description. "Arms would come off when they turned them over." The desperate women never found him, and the mass graves were quickly covered over, as were others in isolated spots up and down this mountainous peninsula, to be officially "forgotten."
When British communist journalist Alan Winnington entered Daejeon that summer with North Korean troops and visited the site, writing of "waxy dead hands and feet (that) stick through the soil," his reports in the Daily Worker were denounced as "fabrication" by the U.S. Embassy in London. American military accounts focused instead on North Korean reprisal killings that followed in Daejeon.
But CIA and U.S. military intelligence documents circulating even before the Winnington report, classified "secret" and since declassified, told of the executions by the South Koreans. Lt. Col. Bob Edwards, U.S. Embassy military attache in South Korea, wrote in conveying the Daejeon photos to Army intelligence in Washington that he believed nationwide "thousands of political prisoners were executed within (a) few weeks" by the South Koreans.
Another glimpse of the carnage appeared in an unofficial U.S. source, an obscure memoir self-published in 1981 by the late Donald Nichols, a U.S. Air Force intelligence officer, who told of witnessing "the unforgettable massacre of approximately 1,800 at Suwon," 20 miles south of Seoul.
Such reports lend credibility to a captured North Korean document from Aug. 2, 1950, eventually declassified by Washington, which spoke of mass executions in 12 South Korean cities, including 1,000 killed in Suwon and 4,000 in Daejeon.
That early, incomplete North Korean report couldn't include those executed in territory still held by the southerners. Up to 10,000 were killed in the city of Busan alone, a South Korean lawmaker, Park Chan-hyun, estimated in 1960.
His investigation came during a 12-month democratic interlude between the overthrow of Rhee and a government takeover by Maj. Gen. Park Chung-hee's authoritarian military, which quickly arrested many then probing for the hidden story of 1950.
Kim said his projection of at least 100,000 dead is based in part on extrapolating from a survey by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in one province, Busan's South Gyeongsang, which estimated 25,000 killed there. And initial evidence suggests most of the National Guidance League's 300,000 members were killed, he said.
Commission investigators agree with the late Lt. Col. Edwards' note to Washington in 1950, that "orders for execution undoubtedly came from the top," that is, President Rhee, who died in 1965.
But any documentary proof of that may have been destroyed, just as the facts of the mass killings themselves were buried. In 1953, after the war ended in stalemate, after the deaths of at least 2 million people, half or more of them civilians, a U.S. Army war crimes report attributed all summary executions here in Daejeon to the "murderous barbarism" of North Koreans.
Such myths survived a half-century, in part because those who knew the truth were cowed into silence.
"My mother destroyed all pictures of my father, for fear the family would get an image as leftists," said Koh Chung-ryol, 57, who is convinced her 29-year-old father was innocent of wrongdoing when picked up in a broad police sweep here, to die in Sannae valley.
"My mother tried hard to get rid of anything about her husband," she said. "She suffered unspeakable pain."
Even educated South Koreans remained ignorant of their country's past. As a young researcher in the late 1980s, Yonsei University's Park Myung-lim, today a leading Korean War historian, was deeply shaken as he sought out confidential accounts of those days from ordinary Koreans.
"I cried," he said. "I felt, 'Oh, my goodness. Oh, Jesus. This was my country? It was true?'"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can recommend but not award compensation for lost and ruined lives, nor can it bring surviving perpetrators to justice. "Our investigative power is so meager," commission President Ahn Byung-ook told the AP.
His immediate concern is resources. "The current government isn't friendly toward us, and so we're concerned that the budget may be cut next year," he said.
South Korean conservatives complain the "truth" campaign will only reopen old wounds from a time when, even at the village level, leftists and rightists carried out bloody reprisals against each other.
The life of the commission - with a staff of 240 and annual budget of $19 million - is guaranteed by law until at least 2010, when it will issue a final, comprehensive report.
Later this spring and summer its teams will resume digging at mass grave sites. Thus far, it has verified 16 incidents of 1950-51 - not just large-scale detainee killings, but also such events as a South Korean battalion's cold-blooded killing of 187 men, women and children at Kochang village, supposed sympathizers with leftist guerrillas.
By exposing the truth of such episodes, "we hope to heal the trauma and pain of the bereaved families," the commission says. It also wants to educate people, "not just in Korea, but throughou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o the reality of that long-ago conflict, to "prevent such a tragic war from reoccurring in the future."
Associated Press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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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계 최강의 군사력 아주 비싸고 성능좋은 무기들을 만들수 있는 능력들
우수한 과학자 우수한 대학들 한국의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싶은가? 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애국심이 있다면 지식을 배우고 물건을 만들어서 국가를 위해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2.사람을 다루는 리더십
미국은 자유라는 헌법아래 평화를 추구 합니다.
MBA 라는 경영학을 통해서 세계 최강의 다국적 기업을
만들고 세계 평화를 추구 합니다.
선진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배워야 할것들이죠.
조그만 나라의 국민들이 세계 최강이 되기에는 미국은 너무나 큰 경쟁 상대이며
꿈 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국,일본,이스라엘을 보면 작지만 강한나라는 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