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북인권제기 검은 속셈

<아메리칸 히로시마>에 담겨있는 미국의 악마성


자주민보(http://www.jajuminbo.net) 이창기 기자


이라크전쟁 피해 태아/아동 사진의 진실


현재 핵폐기장 추진단체에서는 반핵대책위에서 ‘이라크전쟁’시의 사진을 사용했다고

전폭적인 모함과 비난 선전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민일보의 모함성 기사는 그러한 비난 선전전을 촉발시켰는데요.




그 기사를 써낸 전민일보의 박경식 기자는 얼마 전에 반핵대책위에서

시장실점거 투쟁을 하고 있는 중에 우리의 농성 모습을 보면서

‘야이 개새끼들아! 여기가 너희 집안이냐!’고 쏘아붙이고 가면서

반핵활동을 방해하는 등의 정말로 언론사 기자로서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

편파적으로 치우친 사고를 가진 이였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도덕성을 비난하면서 정리했던 그 사진은

이라크전쟁에서 저준위 폐기물로 만들어진

열화우라늄 탄으로 인한 2세들의 방사능 피해사진이었습니다.




이들의 흑색선전전이 도에 넘고 있는 상황에서 ‘관’과 ‘관변조직’ 등이  

한번에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관심 있는 시민 여러분들이

싸이트 곳곳으로 아래의 내용을 많이 배포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핵폐기장추진단체]는 [반핵대책위]에서 ‘이라크전쟁’시의 사진을 사용했다고

전폭적인 모함과 비난 선전전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도덕성을 비난하면서 정리했던 그 사진은,

이라크전쟁에서 저준위 폐기물로 만들어진

열화우라늄 탄으로 인한 2세들의 방사능 피해사진이었습니다.




그러한 저준위 폐기물보다 훨씬 위험한 중저준위 폐기물이

군산에 들어오게 되면 그로 인한 방사능 피해는 타의 추정을 불허할 것입니다.




방사능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경악스러운 피해를 안기는지...

해당 싸이트의 사진을 보시고...

해당 싸이트를 해석한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 된지 5년이 지났습니다.

첨단 물질문명은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인류는 중세시대 때 보다 1000배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인간의 야만성은 아직도 동굴 속에서 헤메이면서

어둠을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사진보기 => http://www.uksociety.org/us_crimes_against-humanity_1.htm



(번역 : 반핵대책위 자원봉사자 이영숙)

([핵폐기장 추진단체]들이 말하는 ‘봉사자’들의 상당수는

일당에 월급 받고 활동하는 이들이지만, [핵폐기장 반대단체]에서 말하는

‘봉사자’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반핵활동을 하는 이들입니다.

양측에서 사용하는 용어상의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이트는 이라크 전에서 열화우라늄으로 인해 심하게 신체가

훼손된 아기들의 사진을 싣고 있다.




이 아기들은 걸프전에서 열화우라늄에 노출되었다. 근년에 있었던 공격에서는

열화우라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수많은 신생아들에게 신체적 결함이나

암이 발병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인과 영국인이 찾아준 ‘자유의 대가’이다.

나는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해, 이 소름끼치는 무기를 사용한

잘못에 대해 부시와 블레어가 책임져야 한다고 계속해서 요구해왔다.





처음 걸프전 때 미해군은 열화우라늄의 위험성이나 열화우라늄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선박이 사실은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주의를 받지 못했다.



저명한 과학자들은 우리들의 상당수가 열화우라늄에 노출되었고,

우리 폐에 축적된 방사성폐기물질로 인한 암으로 사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영웅- 군인’이었던 것의 대가이다.







'인류에 대한 범죄’의 국제법적 정의

: 별개의 사건을 이름이 아니고 대규모적으로, 체계적으로 실행되고

당국이 은폐한 사건으로 인류의 양심에 충격을 주는 잔인한 범죄.

전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대량학살, 집단학살(한 민족을 말살하고자하는 학살),

노예화, 국외추방, 그리고 사람을 심하게 괴롭히는 무자비한 행위들이 이에 포함된다.

(Black's law 사전 - 미국의 대표적 법률사전)



다음의 글과 사진은 무기통제연구센터의 Ross B. Mirkarimi씨의 보고서에 실린 것이다.

보고서의 제목은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한 걸프 지역의 환경적 신체적 영향’이다.

“나는 현재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직한 기형아들의 수 많은 사진을 입수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없다. 이 사진이나

이 홈페이지를 복사해서 가능한 한 많이 퍼뜨려 주기 바란다.”



잔인하게도, 미국의 인ㆍ허가위원회(The Sanctions Committee)는

이라크로서는 열화우라늄탄으로 인한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오염 정화 장비의 이라크 수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열화우라늄탄의 사용으로

대략 315톤의 열화우라늄 먼지가 발생했다.

또한 항암치료제에는 소량의 방사선 핵종이 들어있는데

위원회는 이것이 핵물질을 구성한다는 이유로 이라크가

항암치료제를 수입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래 사진들의 대부분은 현재 익명을 원하는 한 정보원이 제공해 준 것들이다.

나는 원판혹은 원판으로부터 프린트한 화면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 사진들은 A4 용지에 컬러의 형태로 입수되었다.



나는 이 사진들을 포토샵을 이용하여

스캔한 뒤 가능한 한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이도록 했다.

사진을 깨끗하고 선명하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디지털 작업은 하지 않았다. 의학용어 등 이 기형 사진들에 대해

어느 누구라도 더 많은 정보나 지식을 제공해 준다면 감사하겠다.



추가로 국제Yellow Cross의 회장인

Siegwart Horst-Gunther의 박사가 찍은 사진들이 있다.

대부분은 1996년에 발간된 그의 책 “우라늄 발사체 - 불구가 된 군인,

기형인 아기들, 죽어가는 어린이들”에 실린 것들이다.



이 책은 열화우라늄 무기의 후유증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고

사진은 1993년과 1995년 사이에 찍혔다. Gunther박사는

발간하지 않은 그의 자료에서도 사진을 더 제공해주었으며

이 사진들 중 일부는 걸프전에 참전했던 퇴역군인들의

신생아에게서 나타나는 기형에 관한 것이다.



나는 Gunther박사에게 이 사진들을 공공으로 사용하여도

저작권에 위배되지 않게 해달라는 허락을 요청하였고 박사는 동의하였다.

따라서 지금 당장이라도 이 사진들을 퍼가도 좋다.





미국과 영국의 국방부는 열화우라늄에 노출될 경우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미국이 이라크 원자력발전소 공격을 주도한 것이 사실인 것인가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기형과 암의 주요 원인으로 ‘열화우라늄’을 꼽는다.



이라크에서는 기형과 암의 발생건이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열화우라늄 공격이 집중된 이라크 남부지역은 그 여파가 크다.

이라크 의사들은 지금까지 이런 경우를 접해 본 적이 없으며,

2차대전 말기 미국이 일본에 2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일본에서

기형 및 암 발생이 증가한 형태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암은 7~10배, 기형은 4~6배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미군 문서가 아래와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미국은 걸프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민간인과 군인이 열화우라늄 무기가

방출하는 방사선 및 화학적 유독성으로부터 받을 영향을 알고 있었다 :




① "전쟁터 군인들이 열화우라늄에 노출될 경우, 방사선 물질 및 화학적 특성에 의한 잠재적 영향이 심각할 수 있다. 전투시 가장 많이 노출될 사람들은 두꺼운 장갑도 뚫는 이 무기를 교환하기 위해(armour-piercing munitions - 열화우라늄탄은 탱크나 장갑차도 뚫는 방사능무기) 전투장에 재진입하는 지상군이다. 우리는 평시의 작전 시에는 행해지지 않는 실제 전투 상황에서 군인들에게 노출되는 열화우라늄의 잠재성에 대해 강조한다. 열화우라늄은 낮은 강도의 알파파를 방출하는 물질로 인체 내부가 오염이 되면 암 발생에 관련되고 그 화학적 독성은 콩팥의 손상을 가져온다. 짧은 기간동안 많은 양에 노출되면 사망할 수 있고 적은 양씩 오랜 기간 동안 영향을 받으면 암이 발생할 수 있다. 인체와 환경적 측면에서 열화우라늄 침투기는(DU kinetic penerators) 건강을 돌봐줄 전문의료인이 대기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처럼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 (Our conclusion regarding the health and environmental acceptability of DU penetrators assume both controlled use and the presence of excellent health physics management practices.) 전투 상황에 따라 열화우라늄은 무분별하게 유포될 것이다. 전투장의 상황에 따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지역민들의 생명 및 건강은 위협을 받을 것이고, 퇴역군인들은 열화우라늄 침투기(DU kinetic penetrators)를 군사작전 목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화두가 될 것이다. (The conditions of the battle field and the long term health risks to natives and combat veterans may become issues in the acceptability of the continued use of DU kinetic penetrators for military applications.)

② 1990년 7월 “Science and Applications International Corporation report(과학과 그 활용에 관한 국제협력보고서)"라는 보고서에서 ‘운동에너지가 관통했을 때의 환경과 인체에 미치는 영향 고찰’(kinetic energy penetrator environment and health considerations) 같은 해 같은 달에 미군 무기ㆍ군수품ㆍ화학전 보고서에서 ‘장기간 운동에너지가 관통했을 때의 전략 연구’(kinetic energy penetrator long term strategy study)를 발췌.

③ 미국은 열화우라늄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때의 위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위험성의 의미를 축소시키려 했음을 아래의 메모와 서류들이 알려주고 있다.

ⅰ)“열화우라늄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전시에 있어서 열화우라늄의 효과가 입증되지 않으면 열화우라늄 작전은 용인될 수 없으며 무기에서 제외해야 한다. 우리는 전투보고서를 작성할 때 이 문제의 중요성을 명심해야 한다”

- 1991년 3월 1일 로스 알라모스(미국 뉴멕시코주의 도시, 원자력연구의 중심지) 국영연구소 관계자의 비망록.

ⅱ) 병사들이 전투장에서 먼지나 연기에 의해 열화우라늄에 노출될 수 있다. 미공중위생국장은 이 병사들의 노출 정도가 심각할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먼지나 연기로 열화우라늄에 노출된 병사들에게 후속적인 의료조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략..열화우라늄 무기는 전세계 무기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기 때문에 이 무기는 장래의 전쟁(충돌)에서도 사용될 것이다. 장래에 전투장에서 발생하는 열화우라늄 환자의 수는 아주 높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열화우라늄을 포함한 작전 시스템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열화우라늄은 저준위 방사선 폐기물이다(본문: ‘DU is a low-level radioactive waste’). 따라서 인가를 받은 저장소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중략.. 미국이 걸프전 상황을 조정하기를 요구하는 어떠한 국제법, 조약, 규약, 관습도 없다. - 1995년 6월 미군 환경정책협회의 '미군에게 있어 열화우라늄의 중요성과 인체건강´ 에 관한 보고서

ⅲ) 현재 열화우라늄탄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12개국 이상이다. 나토군이 유고슬라비아에서 폭파작전을 할 때도 쓰였다. 각 국가에 파견된 서부국가의 군인들은 그 지역에서 만들어진 식품이나 물을 마시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의 국방부는 여전히 잠재적인 위험성에 대해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열화우라늄의 위험성을 입증할 어떤 정밀한 자료를 보지 못했다. 열화우라늄탄을 무기에서 제외시킬 어떤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 1999년 5월 20일, 22일에 영국 국방부 사무관 Simon Wren이 나에게 보낸 2통의 편지.

개인적으로 이라크를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라크의 중년부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며 더 이상 출산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끝에서 세 번째 문단에는 DU is a low-level radioacative waste

(열화우라늄은 저준위 방사선폐기물이다) 문장이 있네요.
Dhuha and her mother. Dhuha's name means "sunrise." This picture taken in Al Mansur Hospital, Baghdad, Dec. 1996. She has leukemia. In Sept. 1997, it had spread to her bone marrow. In Feb. 1998, there was no word from her. Dhuha lived outside Baghdad and no treatment was available; she may have died at home.

Child with previously unknown renal disease, first diagnosed in Iraq by Dr. Gunther. The speculation is that the child had played with DU ammunition casings.

Child with almost total deformity of the face; no recognisable features at all, and what appears to be one eye situated in the middle of the forehead.

Child with hydrocephalus.

Extreme hydrocephalus; deformity of face, body and ear. The line running down the right hand side of the head would appear to show that potentially two heads were forming.

Deformity of ear; possible deformation of lower body.
Born without eyes. I can offer no explanation as to the translucent quality of the skin other than it is possibly a result of flash photography at close range.

Huge hole in child's back, which is, I believe, an extreme form of Spina Bifida.

Possibly taken shortly after birth, this picture appears to show ambiguous genitalia, sometimes referred to as 'Non-Viable Children'.
This child is completely covered in a white susbstance of unknown properties. Obvious deformation of face and eyes. Flash photography at close range obscures detail.

Two children with similar deformities of the face. Dr. Gunther refers to this condition as 'Zyklopie.'


Child with unknown white substance covering almost the whole body. Severe deformities of mouth and eyes. The welts appear to indicate open wounds, or unformed skin tissue.

Severe hydrocephalus; again, almost as though two heads were being formed. Flash at close range obscures detail, but this appears to show malformation of the mouth and one eye missing, with the eye socket deformed.

It isn't clear what has happened to this child, and I have no explanation for the dark nature and condition of the skin.
Lack of focus obscures detail, but missing eyes are clearly visible, as is deformity of the mouth.

Horrendous deformity of entire body and head. Note lack of eyes and malformation of the hands and feet.
Child with unknown defomity of the mouth, possibly a large tumour grown during foetal stage.

Severe malformation of face. Dr. Gunther refers to this condition as 'Zyklopie.'

Severe deformity of arms. This child was born to a US Gulf veteran.
Iraqi child with extreme hydrocephalus, and defects of cerebral nerves.
Iraqi child with extreme hydrocephalus, and defects of cerebral nerves.
So now it is time once again for the U.S. to invade Iraq? Shame on the U.S. if it produces even more innocent death in the name of "National Security."

올해 초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히로시마(American Hiroshima)>라는 책이 출간돼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미 육군 정보장교 출신으로서

기업가로 변신해 <포춘> 선정 500대 경영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저자 데이비드 디오니시는 이 책에서 미국의 강압적 외교정책 때문에

미국은 핵테러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디오니시는 현재 아프리카 등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알 자지라는 지난 11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그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를 프레시안 박인규 기자가 그 전문을 공개하여

지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인터뷰에서 디오니시는 미국이 얼마나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제국주의 나라인지를 폭로하면서 하루빨리

자신의 조국, 미국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군비의 1/3만 줄여 중동의 어려운 나라들을 도와주어도

테러의 위험은 없어질 것이며 다음 1/3을 미국의 의료보험에 투자하면

미국 전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루빨리 그런 좋은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해도 나머지 1/3의 군비만으로도

세계 1위를 여전히 고수할 수 있다고 그는 꼬집었다.

디오니시가 이 인터뷰에서 밝힌 미국의 천인공노할 죄악상은

익히 알려진 것들이었지만 다시 들어도 기가 막힐 것들이었다.



[알 자지라: 당신은 한때 보수적 공화당원이었다.

무엇이 당신을 변화시켰는가?

디오니시: 일련의 발견의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변화시켰다.

처음 군에 들어갔을 때,

나는 미국이 세계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 정보장교로서, 그리고 후에는 기업을 경영하고

국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나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때로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세계를 더욱 위험한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중미 지역에서
미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팀에 내가 배속돼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온두라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지에서

사회적 정의를 위해 일하는 세력들을 억압하는 임무를 지닌 미 기동타격대의 일원이었다.]



중남미의 여러나라들에서 친미군부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난후

정보관련 기관의 마당과 뒷산을 파헤쳐보면 숱한 뼈들이 발견되었다.

그 뼈들은 고문으로 으깨어져있었으며

두개골과 뼈의 곳곳에 총알이 박혀있거나 관통되어 있었다.

그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친미군부독재정권을 뒤엎고

자주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정의로운 애국자들이었다.

미국은 중남미의 군부독재정권 관리들을

미국에 불러들여 저항세력에 대해 고문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독재통치의 비법들을 전수해 주었었다.

  
디오니시는 이런 과정을 직접 보면서
미국의 악마적 제국주의 정책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것이다.

디오니시는 인터뷰에서 미국을 움직이는 대기업가들 중심의

‘검은 세력’들의 악랄한 음모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





[알 자지라: 당신은 미 국민들이 실상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디오니시: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한줌밖에 안 되는 대기업 소유인데,

이들은 광고 수입과 친정부적 보도 외에는 관심이 없다.

기존 권력구조에 도전하는 기사가 보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극단적인 예로 공화당의 선전도구라 해야 할 폭스 TV를 꼽을 수 있다.
  


자신의 조국이 전쟁을 하고 있다면,

국민들은 마땅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은 국민들은 불의의 심부름꾼이 될 수 있다.

야구나 축구 경기 등등을 볼 시간이 있다면, 책을 읽거나 여행을 하거나

대화를 통해, 정부가 유포하는 공포의 메시지를 맹신하는 대신,

자기 나라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미 국민들은 또한 자기 나라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62년 미 합참은 '노스우드 작전(Operation Northwood)'이란

작전계획을 제출했었는데 그 내용이 최근 기밀해제 됐다.



그 내용은 (미군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작전을 펼치고

그 책임을 쿠바에 떠넘김으로써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전쟁을 미국인들이 지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작전은 케네디 대통령의 반대로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앞으로 미국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

무조건 알 카에다 소행이라고 조건반사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디오니시는 이 인터뷰에서 이란·이라크 전쟁도

미국이 이라크를 부추겨 이란을 공격하게 한 것이고

페르시아만 전쟁도 ‘후세인은 미국으로부터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괜찮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라는 말로





미국이 후세인을 부추겨서 쿠웨이트를 침략하게 하였고

미국은 이 침략을 빌미로 이라크 후세인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 미국은 가혹한 이라크 봉쇄로 어린이 50만 명을 비롯해

100만 명 이상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게 만들었다며

이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라고 디오니시는 주장하고 있다.

악마적 제국주의 미국이라는 말뿐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을 정도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권탄압은 전쟁이다.

미국의 군산복합체 자본가들은 무기를 소모하기 위해

끊임없이 온갖 음모를 동원해 전쟁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숱한 어린이와 죄 없는 사람들을 제국주의 패권과

무기소모를 위해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베트남 북부공해상 통킹만에 있는 미국의 구축함을

비밀작전을 통해 스스로 공격한 후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격했다고 뒤짚어 씌워

북베트남 공격에 관한 의회의 승인을 얻어 베트남전을 일으켰다.





당시 북베트남은 통킹만 사건은 날조라고 강하게 반발했었다.

후에 뉴욕타임스가 미국 정부에서 입수한 일명

‘펜타콘페이퍼’를 보도함으로써 사건 7년 만에 그 진상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9.11테러도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많이 있다.

공격당한 펜타곤에 비행기 잔해가 없었으며 허물어진 건물의 구멍도

보잉기의 크기가 아니라, 조그마한 미사일의 크기였다거나,

마지막에 추락한 비행기는 미국 발표에 의하면,

납치범과 승객들 사이에 결투가 벌어져 추락한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 이 비행기의 잔해가 반경 2킬로미터에 걸쳐  

산산조각이 난 상태로 퍼져 있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격투로 추락한 비행기 잔해가

어떻게 이렇게 산산 조각으로 퍼질 수 있는가?

이는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당한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다.  



한국전쟁도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게 많은 무기를 공급하여 주고

여러 가지로 부추겨 북한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게 하여

결국 북이 반돌격으로 밀고 내려오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저격사건도 군산복합체 자본가들이

베트남전을 그만두려고 하는 대통령을  죽여 버리고

계속 무기를 팔아먹으려고 저지른 사건임이 거의 확실하다.

미국 정부는 아직도 이 사건 조사 결과를

속 시원하게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미국이 최근 북한이 ‘강제구금 및 고문’, ‘인신매매’, ‘위조지폐’,

‘강제결혼과 낙태’ 등의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은 이에 대해 완전한 날조이며 북을 어떻게든지

공격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라고 규탄하고 있다.

저런 악마의 나라 미국이 과연 인권을 입에 거론할 자격이나 있는가?



음모와 조작의 나라, 위선과 거짓의 나라,

침략과 전쟁의 나라 약탈과 지배의 나라 미국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인권에 대해서는 입이 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특히 여기서 항시 잊지 말아야할 점은 미국의 입에서

인권이 거론된 나라는 결국

미국의 공격을 받았던 선례가 있다는 것이다.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했던 미국의 명분이

아프카니스탄 여성에 대한 인권탄압이었으며,

유고 공격의 빌미는 인권탄압의 한 종류인 인종탄압이었다.

이라크 전쟁 빌미의 핵심은 대량살상무기였지만,

독재자 후세인의 인권탄압도 중요한 명분이었다.

북의 대한 인권공세는 그래서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평균 일 년에 한 두 번은 전쟁을 해야

군수산업체를 유지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이라크전쟁 이후

자잘한 대테러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쟁다운 전쟁을 근 1년 째 못하고 있다.

미국은 아마도 1년에 한 번씩 전쟁을 치러야만,

치유불가능한 생리통(?)이 멈춰지는 나라일 것이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지금 이란, 시리아, 북을 두고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를 가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대북 인권공세가 가열되자,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최전방 1천미터 고지까지 오르면서

전선군부대 시찰을 연일 이어가고 있다.

북의 노동신문은 ‘전선에서 전선에로’라는 제목의 정론을 통해

"우리를 압살하려는 원수들의 발악적 공세가 11월의 선군장정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부대와 현지시찰)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6자회담 공동성명 이행을 두고 논의를

5차 1단계 6자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북미사이에는 치열한 대결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군수독점 검은 세력들이 계속 미국을 틀어쥐고

피의 전쟁잔치를 벌려가는 한, 우리가 사는 한반도와 세계는

전쟁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서 떠벌거리는 인권타령은 그 전쟁의 전주곡이다.

한나라당과 이 땅의 극우세력들도 미국의 대북인권타령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합창하고 있다. 아니 선창하고 있다.



어쩌자는 것인가!

물론 한국의 극우세력은 과거 자신들의

친일친미 파쇼적인 행적이 드러남으로써

치명상을 당하여 몰락하게 되자,

대북인권총공세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고

극우세력들을 단결시켜내는 명분과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도 다분히 가지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본질상 이런 인권타령은 결국은

피의 전쟁을 부르는 귀곡산장의 메들리곡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라크, 베트남, 노근리... 그리고 대한민국 | 나의 관심정보   2008/03/25 13:14    

leebywan   http://memolog.blog.naver.com/leebywan/7





2006년 이라크 하디타



美해병대 이라크 양민학살 파문 확산(종합)

은폐 의혹..임산부 피살사건 겹쳐 일파만파

[연합뉴스 2006-06-01 07:13]

(워싱턴=연합뉴스) 조복래 이기창 특파원 = 지난해 11월 이라크 하디타 마을에서 숨진 주민 24명은 당초 미 해병대 발표처럼 노변폭탄에 희생된 게 아니라 해병대원들에게 무고하게 살해됐다는 증거가 확보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으로 가던 이라크인 임산부가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 미군의 만행에 대한 이라크인의 반미감정이 극에 달하고 미국내 반전 여론도 비등하고 있다.


국제 앰네스티 미국지부 래리 콕스 소장은 "만약 이번 양민학살 의혹사건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전범(戰犯) 차원에서 다뤄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미르 알 수마이다이에 신임 주미 이라크 대사는 CNN 인터뷰에서 하디타 마을에서 자신의 가족도 일부 미 해병대원들에게 피살됐다면서 이번에도 불필요한 살해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美軍, 민간인 보복살해… 머리에 한발씩” [동아일보 2006-05-31 18:15]

‘지난해 8월 이라크 수니 삼각지대의 하디타에서 미국 해병대원 20명이 살해됐다. 3개월 뒤인 11월 19일 같은 도시에서 일단의 해병대원들이 민가에 들어가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해 민간인 19명을 사살했다. 이들은 지나가는 택시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승객 5명을 숨지게 했다. 해병대가 24명의 민간인을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엔 무장 세력의 소행으로 군 당국에 보고됐다. 이후 미군은 일부 피해 가족에게 1인당 2500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뉴욕타임스도 타임 보도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이라크인 작가를 하디타로 보내 생존자 4명을 인터뷰했고 30일자에서 그 내용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사망한 이라크인들은 머리에 총알을 한 발씩 맞았고 교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8월 해병대원 피습 사건의) 보복으로 보인다”고 썼다.

LA타임스에 따르면 의혹의 현장에 있었던 해병대원은 10명이 넘지만 실제 총격을 가한 해병대원은 4명.


부시 행정부를 더욱 난처하게 만든 것은 군이 일부 피해자 가족에게 현금보상을 했다는 점이다. 존 머사(민주당) 의원은 “현금 보상은 군 고위층의 결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해병대 지휘부의 은폐 가능성을 제기했다.  



여론 악화의 조짐을 읽은 공화당 지도부도 즉각 대응에 나섰다. 존 워너 상원 군사위원장은 ABC방송에 출연해 “군의 진상 조사가 끝나는 대로 상원 청문회를 열겠다”며 “2003년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포로 학대 당시처럼 의회 차원의 진실 규명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국방부의 조사는 일단 6월 초 완료될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이 사건을 ‘제2의 미라이 학살 사건’으로 불렀다. 이 통신은 이어 “전문가들은 1968년 벌어진 베트남 미라이 사건이 미군과 베트남전에 미친 부정적 영향과 비슷한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라이 사건은 미군 부대가 대부분 부녀자인 마을 주민 수백 명을 살해한 뒤 침묵해 오다가 이듬해 언론 보도로 공개된 사건이다.





살해후 돈으로 유가족 무마하기도   조선일보 [세계]  2006.05.31 오전 03:08

특히 해병대 출신이자 이라크 철군론자인 존 머서 민주당 의원은 “해병대가 사건 직후 일부 유가족들에게 돈을 줬다”며 “이는 해병대 지휘부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군, 이라크 양민 학살 조작   노컷뉴스 [세계]  2006.06.01 오전 09:12

로이터 통신은 1일 지난해 11월 이라크의 하디타 마을에서 발생한 주민 집단 사망 사건은 도로 폭탄에 의한 희생이라고 미 해병대가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에 의한 양민 학살사건이라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미 국방부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사망자들의 부검을 해본 결과 폭탄의 파편이 아닌 희생자들의 대부분 머리와 가슴 등에서 총상을 입은 것으로 돼있는 사망증명서가 확보됐다고 전했다.



"부시, 민간인 살해사건 언론보도후 보고받아" [연합뉴스 2006-05-31 05:56]

(워싱턴=연합뉴스) 김병수 특파원 =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판 `미라이사건'으로 불리는 미 해병대의 `하디타 마을 민간인 살해사건'을 언론 보도 이후에야 보고받았다고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이 30일 밝혔다.



[국제플러스] 이라크 총리 “미군, 민간인학살 조사”   서울신문 [세계]  2006.06.01 오전 09:00

말라키 총리는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실수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하디타뿐 아니라 민간인 희생이 수반된 모든 군사작전에 대해 미국측의 답변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말라키 총리가 강경입장을 보이는 것은 곧 미군의 보복학살극으로 결론날 가능성이 큰 이번 사건이 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이라크 정부에도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라크 미군 이번엔 임신부 사살 파문   YTN [세계]  2006.06.01 오전 08:33이라크 주둔 미군이 하디타에서 양민 24명을 학살한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으로 가던 임신부가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해 충격을 주고 있다고 AP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원했던 양두구육의 탈을 쓴 '자유'의 모습인가?   프레시안 [세계]  2005.11.14 오후 13:41

언론 기사만을 근거로 사망·부상자를 집계하고 있는 이라크바디카운트(IBC,www.iraqbodycount.net)의 통계를 보자. IBC는 11월 10일 현재 2003년 3월 전쟁 개시 후 최소 2만6931명에서 최대 3만318명의 이라크인이 사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군 사망자 수와 비교해 최소 10배 이상이다. 지난 7월 IBC가 낸 보고서를 보면 전체 사망자의 37%가 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토록 많아 보이는 저항 세력의 테러로 인한 희생자수는 9%에 불과하다. 전시 최대의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중이 높은 것은 물론이다. 스위스 국제문제연구소의 지난 11일 발표를 보면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는 3만9000명으로 IBC보다 많다.


  
  영국의 의학 주간지 <랜싯>은 이미 지난해 10월 민간인 사망자수를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는 미국 존스홉킨스대와 컬럼비아대, 이라크의 알-무스탄시리야대 소속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진 조사 결과 나온 것이었다.




  이것이 미국이 원한 자유의 모습인가?



  이라크는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미군은 지난해 4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반미정서가 높은 수니파 거주지 팔루자에 대한 대공습을 감행했다. 1차 공격에서 미국은 AC-130 중무장 항공기, 아파치 헬기, F-16 전투기 등을 동원해 민가와 이슬람 사원 등을 무차별 폭격해 20여 일간 7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공격에서 미군은 사원 철탑과 건물 옥상에 두세 명씩의 저격수를 배치해 길 위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고 이 지역의 민간인 피해를 조사했던 사진작가 윤정은 씨가 전했다. 윤씨는 또 미군들이 앰뷸런스에까지 폭격을 가했다는 현지인들의 증언을 들려주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재선에 성공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군 1만2000명을 팔루자에 투입해 공격을 재개했다. 당시 저항세력 지도부는 이미 팔루자를 떠났고, 노약자를 비롯한 6만여 명과 순교를 각오한 저항세력 그리고 집과 가족을 지키려는 주민들만 그곳에 있었다. 공습 책임자인 토머스 메츠 미군 중장조차 "무장세력의 고위 지도부는 팔루자를 빠져 나갔다"고 말하는 데도 불구하고 시작된 공격은 2085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러나 미군은 민간인 사망으로 인한 여론 악화를 의식해 민간인 사망자 집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종합병원, 진료소 등 집계 가능 시설을 접수해버렸다. 하지만 팔루자 종합병원의 타미르 살리 박사는 당시 미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가옥에서 이라크인 700구의 시신을 발견했고, 그 중 여성과 어린이의 것이 504구라고 증언해 민간인 피해의 일단을 보여줬다.





미국 지배세력의 대중 조작 뜯어보기  

한겨레 [생활/문화]  2005.04.22 오후 19:33



“미국이 북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을 대량 학살한, 중대하면서도 너무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200년이 걸렸다. 최근까지 인디언은 (거꾸로) ‘잔인한’ 가해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남부 베트남을 공격한 게 아니라 방어했다는 생각이 앞으로 70년간 더 지속된다면 오웰이 생각한대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가)‘불가능’해질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은 동맹국(베트남)에 390만t의 폭탄을 떨어뜨렸고(이는 2차대전 중 미국이 투하한 폭탄양의 2배다) 종종 인구가 매우 밀집한 지역을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구한다는 허울 아래 B-52로 융단 폭격했다.”



1984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경찰의 성직자 살해사건과 1964-78년 남미에서 72명의 성직자가 살해당한 일 및 1980년의 엘살바도르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의 암살을 비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뉴욕타임스>나 <뉴스위크>, <타임> 등 미국 유력 언론은 사회주의체제에 균열이 일고 있던 폴란드쪽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미국이 지원했던 독재체제하의 남미지역 사건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이스라엘·파키스탄·인도의 핵엔 침묵하면서 이란·북한 핵에 대해서는 과민하다.

1989년 12월 미군이 마누엘 노리에가 단 한사람의 마약 및 인권침해 혐의를 앞세워 3천여명의 민간인을 희생시키며 파나마를 전격 침공한 것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적극 지원했던 그가 지나치게 자신감이 커져서 파나마운하협정이 1990년부터 바뀌게 될 경우 자주권을 강화해 미국기업들의 이익을 침해할 것이라고 보고 새 꼭둑각시를 앉히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니카라과의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것도 민족주의적인

좌파 산디니스타 정권이 미국기업의 이익에 봉사하기보다

니카라과 농민을 위한 사회복지 정착과 토지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

서구 기업들의 이익을 해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크 침공 역시 사담 후세인의 독자노선이 미국의 중동내

석유이권과 패권을 위협할까봐 취한 조처였다는 건 다 안다.





킬링필드의 숨겨진 진실들

“혁명을 이용한 나쁜 놈들이 있었지”  

한겨레21 [세계, 매거진]  2005.04.22 오후 18:12



크메르루주 혁명 30돌 기념 특별 인터뷰…

살아있는 최고책임자인 누온 체아

전 캄푸치아공산당 부서기장의 장장 5시간 심경고백



1975년 혁명에 성공한 민주캄푸치아 시절로 가보자.

가장 궁금한 건 왜 당신들이 프놈펜을 장악하자마자

소개령을 내려 주민들을 농촌으로 몰았는가인데?


배경 설명이 필요해. 1969~73년에 미국이 베트콩을 잡겠다며

아무 잘못도 없는 캄보디아에 융단폭격을 가해

5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을 학살했잖아.

게다가 미국이 조종해온 론 놀 괴뢰정부를 우리가 뒤엎고

프놈펜에 입성했으니 미군 폭격을 염려했을 수밖에.

냉전이 온 세상을 지배한데다,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상황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런 결정은 상식으로 봐야 해.

미군 폭격이 예상되는데도

인민들을 도시에 앉혀놓고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겠어?



근데 왜 그런 순수한 주민 소개령이 강제노동으로 변했나?
당시 상황을 봐. 모든 부를 미국에 기생했던

론 놀 정권 하수인들이 빼먹고 인민들은 먹을거리도

약품도 없었던 시절이야. 캄보디아는 농업사회야.

인민들이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도시민들도 농사를 짓게 했던 거야.





그 모든 결정을 누가 내렸나?


누구 한 사람이 내린 게 아냐. 혁명 자체가 내린 명령이야.

사람들은 자꾸 ‘누가 명령했나’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혁명은 그렇게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게 아냐.

그건, 사람이 죽었고,

그 책임 소재를 가리자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게 아냐.





좋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통해 그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나?


앞서 말했듯이 몇 가지 조건이 어우러진 결과다.

부족한 식량과 바닥난 의약품에다 혁명을 이용해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인 나쁜 놈들이 뒤섞여 그런 일이 벌어졌어.





프놈펜 입성 전에 예상했던 일인가?


전혀. 아무도 인민을 처형하겠다는

계획이나 전략을 생각한 적이 절대로 없었어.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혁명전선 내부에 여러 파벌이 섞여 있어

중앙 지도부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최고 지도부의 명령이 하부로 내려가면서

파벌들에 의해 변질됐으리라고 본다.

전국적으로 하부 단위 군인들이 벌이는 일을

중앙 지도부가 모두 관리할 수도 없었고.



책임을 하부 단위로 떠넘기는 꼴이 되고 마는데?

기록을 추적해보면 당신이 살해 명령을 내렸을 개연성이 높다.

프놈펜의 투올 슬렝(Tuol Sleng) 형무소 고문·살해건은 더 그렇고.


난 인민을 이용하지 않아. 거듭 말하지만

난 내 직책과 과업에 대해 신성하게 책임진다.

내가 져야 할 몫이 있다면 발뺌하지 않겠다.

그게 삶을 혁명에 바친 내 명예고, 또 내가 살아온 방식이니.

내 목숨을 바칠 각오도 돼 있고. 내가 산들 얼마나 더 살겠나?



당신이 오늘 내게 진실을 듣고 싶어했고,

나는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어.

잘 봐. 내가 최고 지도부에 있었는데도

삼촌과 사촌을 포함한 내 핏줄 40여명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내가 학살을 미리 알았다면 그냥 내버려뒀겠어? 당신이 판단해봐.



아무튼 그 학살건으로 국제재판 법정에 설 준비는 돼 있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난 절대 그이들이 바라는 대로 무릎 꿇지 않을 거야.

난 그 외국인들에게 사과할 만큼 잘못한 게 없어.

외국인들이 짓밟은 내 나라를 내가 사랑해서 내가 지켜냈어.

그래서 그런 국제재판이 있기 훨씬 전에

난 내 감정과 정신을 스스로 이미 재판했어.





링필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한겨레21 [매거진]  2002.11.21 오전 11:45



<킬링필드>는 시드니 샨베르그라는 <뉴욕타임스> 기자와 그를 도운

캄보디아 현지 기자 사이에 폴 포트가 집권한

‘1975~79년’이라는 정치공간을 집어넣고, 이별과 만남 같은

통속적인 주제로 감성을 자극해 크메르 루주에 대한

저주를 증폭시키는 동시에 아메리카 학살사를 교묘하게 은폐시킨 영화였다.


“영화가 지닌 창작성을 인정하더라도 ‘실화’로 강조한 다음에는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특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은

‘선전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고, 그렇게 되면 영화는 이미 음모가 되고 만다.”


1975년 4월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에 입성할 당시

시드니와 함께 마지막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남아

캄보디아를 취재한 종군기자 나오키 마부치( 뉴스 카메라맨)의

말마따나 현장에 있던 대다수 기자들은 <킬링필드>가 인물관계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모두 ‘아메리카 지상주의’를 살포한

무슨 ‘꿍꿍이’가 있는 영화라 혹평했다.


그럼에도 <킬링필드>는 전설이 됐다. 전설은 곧 역사가 되었다. 희생자들이 두 눈 빤히 뜨고 살아 있는 기껏 30년 전 캄보디아 현대사는 그렇게 아메리카가 만든 ‘킬링필드’에 묻혀 전설 따위나 기록하는 어처구니없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킬링필드’든 무엇이든 학살을 이야기할라치면 적어도 아래와 같은 세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학살자가 누구였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왜 학살을 했는가”  캄보디아에서도 아메리카에서도 또 한국에서도 ‘킬링필드’ 전설에 따르면 대답은 간단하다.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 “200만명.” “공산주의 체제 건설한답시고.”

이렇듯 아무도 의심하는 이 없이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역사가 돼온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아메리카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누구를 재판에 회부할 것인가”

“재판정은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비용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캄보디아와 국제사회가 판사를 각각 몇명씩 배치할 것인가”

“형벌을 사형으로 할 것인가 무기형으로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정하는 데만도 무려 5년이나 걸렸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희생자들을 두번 죽이는 정치적 흥정이었고 음모였다.


69~73년 제외, 훈센과의 흥정

이 마가 낀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의 야심과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아메리카 속셈이 충돌한

한판이다 보니 처음부터 ‘순정’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지만.


“1969~73년에 벌어진 일들도 재판에 포함시켜야 한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이 카드를 은근히 뽑아들었지만,

유엔과 아메리카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달래기도 하고,

두들겨패기도 하며 결국 자신들 뜻대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1975~79년의 기간만을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아메리카는 킬링필드 학살재판에서 사력을 다해

‘1969~73년’을 제외시켰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고 하면,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두번에 걸쳐 자행했고, 따라서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범죄대상으로 다루면 킬링필드 역사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거니와

결국 모든 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겠다는

아메리카식 음모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진 라코처가 쓴 <이어 제로>(Year Zero, cited Pol Pot official)가 있다.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 이 책은 아메리카에게 ‘성경’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스스로 그 수를 조작한 것이라 해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책은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죽였다는 전설, 그 공식적인 자료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100만명이든 200만명이든 학살 희생자 수를 따지려면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해서 죽인 60만~8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을 흔히 알고 있는 킬링필드 전설에서 분리시켜야만 온전한 역사가 된다.


이미 알려진 대로 마오이즘을 본떠 1975년 캄보디아 혁명에 성공한 크메르 루주는 화폐통용 금지, 무역 금지 같은 조치들을 취하며 공상적 사회주의라 부를 만한 극단성을 드러냈다. 특히 크메르 루주는 아메리카 괴뢰정부 론 놀에 봉사한 이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지식인과 시민들을 처형했고, 1975~79년의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과로와 질병이나 기아로 죽은 이들이 70만~80만명을 웃돌았다. 이 기간에 발생한 기아와 질병 사망자는 아메리카가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의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해버린 데서 비롯한 일이기도 해서 크메르 루주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학살 제2기에 해당하는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사람들 수는 연구자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수많은 캄보디아 연구서들을 쏟아낸 데이비드 챈들러나 마이클 비커레이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가 대체로 극단적인 추산을 피한 경우로 꼽혀왔다. 챈들러는 크메르루주가 처형한 수를 10만명으로, 비커레이는 처형한 수를 15만~30만명 정도에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죽은 이들을 약 75만명으로,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명으로 각각 밝힌 바 있다.


이런 조사연구를 기준삼아 전문가들 사이에는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이들 수를 80만~100만명이라 여겨왔다. 여기에 학살 제1기에 해당하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으로 죽인 양민 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명으로, 위 다른 연구자들은 40만~80만명 정도로 각각 추산했다. 이렇게 해서 제1기 아메리카 학살과 제2기 크메르 루주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살해당했는데, 이게 킬링필드의 전모다.


이래도 아메리카가 주장하는 대로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킬링필드로 부른다거나, 10여년 동안 진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두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온당한 일일까

아메리카는 킬링필드를 모두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짓이라 잡아떼겠지만, 프놈펜에서 1번국도를 따라 약 35km 떨어진 프레크트렝 마을을 기억해보라 권하고 싶다.


1973년 B-52 전략폭격기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마을주민들은 아직도 당시 희생자 유골을 담은 보따리를 간직하고 있으니.

끝내 아메리카가 시치미를 떼겠지만 프놈펜에서 남쪽으로 베트남 국경에 이르는 어디든 좋다. 어느 마을이든 가보라 권하고 싶다. B-52에 폭격당하지 않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으면 당장 아메리카는 자유로워져도 좋다. 모든 학살책임을 크메르 루주에게 돌려도 좋다는 뜻이다.

캄보디아가 너무 멀다고 그러면 이번에는 아메리카 안에서 찾아보라고 권할 수도 있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 불법폭격을 고발한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을 아메리카는 1973년 6월19일 폭격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세웠다. 아메리카 군사자료를 종합해보면, 1969~73년에 아메리카는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t을 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이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1957년 제네바협약을 송두리째 위반한 이 폭탄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말썽이 나자 자취를 감췄지만, 클러스터밤만은 여전히 걸프전과 코소보전, 최근 아프가니스탄전에서도 악명을 떨치며 아이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베트콩 잡겠다며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

게다가 B-52란 놈은 핵무기 수송수단으로 개발한 탓에 공군전략사령부 소속이었으나 캄보디아 폭격에 비밀스레 동원한 B-52는 아메리카 남부 베트남사령부에서 명령을 내렸고, 심지어 국방장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불법작전을 수행했다. 그렇게 비밀불법전을 통해 학살한 캄보디아 양민 수가 60만~80만명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크메르 루주쪽 학살주범 폴 포트와 달리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은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모든 관련자들이 ‘최고 명령권자’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고문(1974년부터는 국무장관)을 지목했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주무른 헨리 키신저가 강조한 캄보디아 비밀폭격 논리였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이건 1973년 들어 결국 對캄보디아 비밀폭격을 눈치챈 의회가 공습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자, 키신저가 맞받아친 말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60만~8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들이 베트콩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이 난다.


키신저, 왜 그를 학살주범으로 기소해야 하는지는 처음부터 이렇게 분명했다.

전쟁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에 융단폭격을 가했다는 사실도, 전쟁과 무관한 중립국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은 사실도, 시민들에게 공습경고 한번 내리지 않은 사실도, 제네바협약을 어기며 불법 폭탄을 퍼부은 사실도, 4년 동안 폭격하면서 의회에 대한 보고의무를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군 명령권자가 아니면서 폭격점까지 지시하며 권력을 남용한 사실도, 군 명령과 보고체계를 무시한 채 비밀전쟁을 수행한 사실도, 캄보디아 폭격에 대한 진실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실도, 그렇게 해서 양민 60만~80만명을 살해한 죄목은 모두 키신저 몫이다.


살아 있는 크메르 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 키우 삼판, 눈 치에, 타 목을 기소하겠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를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 ‘감동적인 눈물’의 진실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전문가라 불리며 호사스러운 여생을 보내는 키신저를 기소하지 않고는 킬링필드도 학살재판도 모두 영원히 반쪽짜리 전설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밀불법전쟁을 주도한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아메리카식 킬링필드에 침묵해온 언론들은 키신저를 존경하는 석학이라 떠들어대며 거금을 주고 글 나부랭이나 받는 걸 명예로 여겨왔다. 옳은 일인지 어떤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아메리카식 정의만 있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아메리카식 킬링필드를 지우려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그래도 이 학살재판을 인정할 것인가 그래도 킬링필드 전설을 따라 감동적인 눈물을 흘릴 것인가?


현대사에 최고 최대 거짓말인 아메리카식 킬링필드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더 이상

세계 시민사회가 아메리카로부터

‘개죽음’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경고다.








[여적] 밀라이 학살  

경향신문 [칼럼]  2006.05.30 오후 18:39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잔혹하고 추악한 사건으로는 단연 밀라이 학살사건이 꼽힌다. 1968년 3월16일 미군 11경보병 여단 찰리 중대 소속 병사 150명은 윌리엄 캘리 중위의 인솔 아래 남베트남 밀라이 마을로 들어가 500여명의 비무장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여자, 어린 아이, 노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미군들은 자동소총을 난사해 주민들을 살해한 뒤 시신을 총검으로 난도질했다. 시신의 가슴에는 ‘C Company’(찰리 중대)라는 칼자국을 새기기도 했다. 여자들과 소녀들은 강간을 당한 끝에 살해됐고 마을 전체는 화염방사기에 의해 잿더미가 됐다. 이 끔찍한 학살극은 ‘베트콩 요새를 격파한 빛나는 승리’로 조작돼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미군 사령관은 찰리 중대에 직접 축전을 보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미국의 신뢰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반전의 거센 물결이 미국 안팎을 휩쓸었다. 뒷날 캘리 중위는 “우리는 전쟁 동안 공산주의자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美는 실패한 국가" 촘스키, 또 쓴소리[한국일보 2006-05-31 20:57]

미군 해병대의 이라크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이 거센 와중에 ‘미국의 깨어있는 지성’으로 꼽히는 노암 촘스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교수가 “미국은 실패한 국가”라고 못박았다.


촘스키가 이 책에서 제시한 실패한 나라는 공통적으로

▦국민을 보호할 능력ㆍ의지의 부족

▦자국만은 법 테두리를 벗어나도 된다는 독단

▦민주주의 결핍 등 세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거울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힘겹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라며 “잠시만 생각해보면 미국의 시스템이 실패한 나라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의 결핍’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미국은 원하는 정당(파타당)의 승리를 위해 투표 전 200만달러를 쏟아 부으며 불법 선거운동을 펼쳤다”며 “그것도 모자라 국민투표로 선출된 하마스를 아직도 ‘테러 정당’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인권과의 전쟁'  

오마이뉴스 [세계]  2003.04.10 오전 09:33



침략전쟁 개시 이후, 미군은 이라크에서 민간인 학살에 이어

외신기자들의 숙소와 알자지라 TV지국까지 폭격하는 등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은 국내에서도

또다른 인권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갈수록 폭력화되는 경찰



지난 7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경찰이 반전 시위대를 향해

고무총탄과 사과탄을 발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AP통신에 따르면, 오클랜드 항구의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선박회사 앞에서 평화적 피켓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고무총탄을 발포, 시위대 10여명과 이를 지켜보던

부두노동자 6명이 크게 다쳤다.




심지어 수십 대의 오토바이를 탄 경찰이 달아나는

시위군중을 향해 최루가스와 파편을 분출하는

사과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당시 시위의 대상이 된

Stevedoring Services of America라는 회사는

최근 이라크 움카스르 항구로의 운항 계약으로

48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8일자 <알자지라> 영문판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연방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18명이 구금됐고,

전쟁 발발 후 첫 이틀간 이 도시에서 체포된 인원은 2천여명에 달한다.

7일 뉴욕에서도 군수산업체인 '칼라일' 건물 앞에서

"칼라일은 전쟁으로 자신을 살찌우고 있다"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수십 명이 체포됐다.



재갈 물린 표현의 자유


'딕시 칙스'에 이어 반전 발언을 한 락그룹 '펄 잼'도 미국인들의 거센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펄 잼'의 리드싱어 에디 베더는 지난 1일 덴버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반전 발언과 함께 "부시는 리더가 아니라 텍사스 리거"라는 내용의 'Riot Act'를 부른 후 마이크 스탠드에 부시 대통령의 가면을 꽂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에 분노한 수십 명의 팬들이 퇴장했고, 이후 펄 잼의 홈페이지도 비난과 불매운동을 선동하는 글들로 불타고 있다. 자신을 '자랑스런 양키'라고 부른 한 미국인은 "닥치고 노래나 불러라. 아니면 수잔 서랜든, 숀 팬 등과 함께 이 땅을 떠나라"고 폭언을 늘어놓기도 했다.




지난달 부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불매운동과 방송 중단, 음반화형식의 대상이 됐던 '딕시 칙스'는 지금도 엄청난 협박 메일에 시달리고 있다. 내달 1일 그린빌에서 열리기로 한 콘서트도 항의집회 예정으로 취소됐으며, 발언의 주인공 나탈리 메인은 권총을 휴대하고 다닐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재판 앞둔 미군 병역거부자


이라크전에 반대,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한 한 미군이 군사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스티픈 이글 펑크라는 이름의 이 20세 청년은 "이번 전쟁은 부도덕하며 위선적"이라며 지난 1일 군복무 중단을 선언했다. 대학등록금을 지원받을 목적으로 지난해 말 군에 자원했던 펑크는 12주간 훈련을 받는 동안 매일 "죽여! 죽여!"를 외치도록 강요받았다고 증언했다.


하원에 제출된 유엔 탈퇴 법안


강력한 자유시장 주창자인 론 폴 하원의원(자유당)이 지난달 13일 "유엔은 미국민을 구속하는 법을 만들 어떠한 권한도 없다"면서 유엔 탈퇴를 위한 '2003 미 주권 회복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지난 1999년에도 제출됐다가 통과되지 못했고, 이번에 다시 제출돼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심의에 부쳐져 있는 상태다. 현재 미국이 유엔을 대하는 태도를 고려해 볼 때, 이 법안의 제출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리라는 보장도 없는 상태다.



1950. 대한민국 노근리

[뉴스타임] 이석재의 사건파일 '멈추지 않는 노근리의 분노'   KBS TV [TV]  2004.09.06 오후 21:45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에서 후퇴중이던

미군이 피난민과 인근 주민들을 노근리 철로 위로 모아놓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나흘 동안 계속된 기관총 난사로 피난민 수백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기자: 보도가 나간 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은

노근리 주민에게 속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노근리 주민들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참사현장의 증거 은폐시도입니다.


99년 9월 노근리 사건 보도 직전 노근리 쌍굴 안쪽벽에

시멘트가 덧발라진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양성북(노근리 주민/공사 현장 목격자): 해머드릴이라고 하는

시멘트 부수는 도구를 이용해서 누수된 부분이나

실탄 자국 같은 깊이 패인 부분을 깎아냈습니다.




⊙기자: 이 부분이 쌍굴의 원래 표면이고

이 부분이 시멘트로 새로 덧씌워진 부분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쌍굴 내부 전체가 이렇게 시멘트로 새로 덧씌워져

원래 모습을 볼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시멘트를 바르기 전 쌍굴 내부의 모습입니다.


곳곳에서 총격자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시멘트가

떨어져나간 자리에서도 선명한 탄흔 자국을 볼 수 있습니다.


50년 동안 방치됐던 사건 현장에 왜 갑자기 시멘트를 덧씌운 것일까?




⊙철도청 관계자: 열차 안전운행에는 큰 이상은 없는데

장기적으로 방치할 경우에 뭔가 문제점이 발생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그 지침에 의해서 공사를 한 겁니다.




⊙기자: 시멘트로 덧씌운 곳은 노근리 쌍굴 중에서도

주민들의 희생이 커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었던 곳입니다.


말 그대로 보수공사였다면 또 다른 한쪽은

왜 그대로 놔둔 것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노근리 사건이 공식 확인된 이후 국방부에는

포항 연암동 함포 사격사건과 충북 단양군 미군기 폭격 등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라고 주장하는 민원이 현재까지 60건이나 접수됐습니다.



“양민학살은 軍·警 의도된 작전”   경향신문 [사회]  2004.05.24 오후 19:17

이신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미리 제출한 ‘6·25남북전쟁기 이북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연구’ 논문을 통해 북한 지역 민간인 학살의 피해규모를 고찰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중 이북지역 인명피해 규모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추정돼왔다. 미국의 한국현대사 연구가 브루스 커밍스는 민간인 사망자를 2백만명 이상이라고 주장한 반면 한국전쟁기의 북한 인구변동에 주목한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는 1백50만명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연구원은 최근 공개된

‘1950~5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경제의

총손실규모’ 등 구소련 문서들을 통해

민간인 피해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전쟁기간중 민간인 감소 인원을

▲폭격 피해 28만2천명 ▲월남 및 실종 79만6천명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로 이동 8만명

▲남한 편입 4만명 ▲군징집 60만명으로 분류했다.



그는 이른바 ‘학살피해자’는 폭격 피해자 28만여명에

월남 및 실종자 중 희생자(10만여명)를 합친 약 40만명이라고 밝혔다.


이연구원은 이와 함께 이북 민간인 학살의 유형을

▲미군과 국군, 우익청년단에 의한 직접학살

▲미군의 무차별 폭격 ▲세균전에 의한 학살 등 세가지로 나누어 소개했다.


‘한국전쟁기 남한의 민간인학살의 유형과 성격’을 발표하는 정병준 목포대 교수는 국민보도연맹원과 수감자 예방학살의 배경에 초점을 맞춰 남한에서 어떻게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는지를 고찰했다. 정교수는 보도연맹 예비검속과 관련한 경찰문서를 검토, 한국전쟁 초기 10만여명으로 추정되는 보도연맹원 및 수감자 희생자에 대한 학살 주체는 군경이며 학살 지휘 조직의 책임자는 장석윤 내무부 치안국장이라고 밝혔다.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CIA 전신인 COI-OSS라는 미국 특수공작·정보기관의 공작요원 출신인 장석윤은 치안국장으로서 50년 6월25일부터 7월11일 사이에 최소 4차례 이상 보도연맹원 즉시 구속과 형무소 경비강화를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교수는 “보도연맹원·수감자를 학살한 표면적인 이유는 이들의 이적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지만, 한국 정부의 핵심세력이었던 군경, 우익 등의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쟁 중 한국 군경 부대 가운데 북한군에 투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학살의 ‘효과’를 말해준다고 그는 해석했다.


이런 측면에서 정교수는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충동적 행동이나 실수가 초래한 재앙이 아니라 사전에 잘 짜여진 ‘우발계획’(contingency plan)의 실현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 '한국전쟁 미군 피란민학살' 물증발견  

한국일보 [세계]  2000.06.06 오후 17:41

터너 로저스 공군 대령이 기록한 메모 형식의 이 문서는 “육군은 아군진지로 접근해 오는 모든 민간인 피란민 대열에 기총소사할 것을 요청했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이 요구에 따랐다”고 적고 있다. 공군 역사학자 톰 이블러드는 “당시 미 공군은 진군하는 적군의 기갑부대와 무장병력을 포함해 적군 행렬을 저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민간인들에게 기총소사할 것을 직접 명령한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온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로저스 대령의 메모에 따르면 육군은 “인민군의 조종을 받거나 인민군이포함된 대규모 민간인들이 미군 진지로 침투하고 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에 대한 기총사격을 정당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로저스 대령은 “민간인들을 목표로 삼는 것은 공군을 당혹케 할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로저스 메모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하기 하루전에 작성돼 한국전초기 미군이 의도적으로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정책을 선택했음을 강력히시사하는 것이다.



美 노근리 양민학살, 무쵸 美대사 서한 전문  

뉴시스 [정치]  2006.05.30 오후 12:05

1950년 7월 26일


친애하는 딘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보께


한국 피난민 문제는 구호 문제를 제외하고도 미군에게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로 발전하게 됐다. 이로 인해 미군이 한국 피난민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있으며 이 결정이 미국 내에서 반향을 일으킬 것을 고려할 때 당신에게 미군의 결정을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적군은 피난민들을 다방면에서 이용해왔다. : 적군은 피난민들이 남하하도록 만들어 도로를 막아 미군의 이동을 방해한다. : 또 피난민들을 적군 요원들의 침투 경로로 사용한다 : 가장 위험한 것은 적군을 피난민으로 위장해 방어선을 넘어와 어두워지면 숨겨둔 무기를 가지고 후방에서 미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공격은 대부분 압도적으로 성공했으며 대전에서 미 24사단이 패배한 것도 이런 침투가 큰 역할을 했다. 당연히 미군은 이런 위협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어제 저녁 8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임시 수도 내무장관실에서 G-1, G-2, 헌병대장, CIC, 대사관, 내무 및 사회부, 경찰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조율했다.



다음은 결정된 사항들 :

1.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만약 남쪽으로 이동하면 폭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미 방어선 북쪽에 살포할 예정이다.

만약 피난민들이 미 방어선 북쪽에 나타날 경우

경고 사격을 하고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받을 것이다.



2. 누구도 명령없이 남쪽으로 이동할 수 없고 경찰의 통제 하에서만

이동하도록 하기 위해 미 전투지역 내에서

경고 전단지 살포와 경찰의 구두 경고가 이뤄질 것이다.

모든 한국민의 이동은 일몰까지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어두워지면 총격을 받을 수 있다.



3. 지역 전술 지휘관이 특정 지역의 피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사령부 내

경찰 연락관에게 통지하고 한국 경찰이 주민들에게

경찰 통제하에 정해진 좁은 도로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해야 한다.

경찰의 통지가 없으면 누구도 이동이 허용되지 않으며

남쪽의 피난민들도 통지가 없으면 이동을 중단해야 한다.



4. 피난민들은 일몰까지 이동이 가능하며

아침해가 밝을 때까지 이동해서는 안된다.

경찰은 적군 요원들을 색출하기 위해 검문소를 설치할 것이다.

또 사회부를 만들어 피난민들을 돌보고 임시캠프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할 것이다.



5. 경찰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대규모 이동도 불가능하다.

개인적인 이동은 여러 검문소에거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될 것이다.



6.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통행금지는

저녁 9시이며 오후 10시부터 단속이 실시된다.

오후 10시 이후에 허락없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체포되고

철저하게 수색을 받을 것이다.

이 마지막 내용은 이미 실시되고 있다.


존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민노 "미국, 양민학살 사과·보상하고 모든 전쟁 중단해라"   한국일보 [정치]  2006.05.30 오후 14:18



민노당은 전날 AP통신이 발표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피난민에 대한 사격 방침'을 양민학살의 증거로 보고, 미국측의 사과와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30일 발표했다.
민노당은 성명서에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도처에서 대규모적으로 벌어졌다는 증언을 통해 당시 미군의 조직적 학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품었던 의심이 비로소 확인된 셈"이라며 "지금껏 학살이 병사 개인의 실수로 인한 것이라 치부해왔던 미국정부에서 50년대 한반도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에 대해 입을 열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분단과 전쟁에 미국이 어떤 의도를 갖고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 것이야말로 상처입은 남북관계나 남남갈등을 치유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며 또한 "새롭게 한미관계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라도 양국정부가 과거의 과오를 규명하는데 적극 나서야한다"고 주장했다.


민노당은 특히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양민학살이 확인된 만큼 국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라크 주둔 미 해병대에 의해 어린이와 여성이 학살된 사건과 한반도 혹은 이란 등지에서 후속 전쟁을 꾀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현주소라고 꼬집었다.
민노당은 "영원히 가릴 수 있는 진실은 없다"면서 "미국이 다시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인권유린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한국당국도 이라크에서 군을 철수시키는 것은 물론 진실규명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美軍 “피란민 사냥감으로 보라” 지시   [경향신문 2006-06-01 09:24]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피란민들을 ‘사냥감’으로 간주, 무차별 총격을 지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피란민을 사냥감으로 보라’=1999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던 AP통신의 최상훈 기자는 31일 KBS1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에 출연해 “미군이 피란민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승인한 사실을 보여주는 문건을 19건 정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최기자는 “7월25일 피란민 대책회의 이후 7월과 8월, 9월 당시의 미군 문건을 보면 피란민을 향해서 총격을 가하라는 지시가 담긴 문건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문서에는 ‘피란민들을 사냥감으로 보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또 ‘밤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면 누군지 묻지 말고 그냥 총격을 가하라. 총격을 가하지 않으면 중대장을 보직 해임한다’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공군 같은 경우 피란민이 8명 이상 보이면 적군으로 간주해서 공격했다는 내용도 있고, ‘이제부터는 보이는 모든 피란민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문건도 있었습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은 피란민 대책회의에 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들도 참석했다는 내용의 존 무초 당시 주한 미대사의 비밀 서한과 관련, “조병옥 내무부장관, 전봉두 헌병사령관, 김태선 치안국장 등이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전지휘권이 미국으로 이관된 상태여서 한국이 독자적 의견을 내긴 어려웠겠지만 한국 측에서 (노근리 사건 등을) 인지를 하고 있었음을 말한다”고 주장했다. 올 3월에 나온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보고서’ 역시 당시 한·미 양측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미 국방부 플렉스 플렉시코 공보관은 31일 “노근리 사건에 대해선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다”면서 “무초 전 대사의 서한이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없다. 현재 재조사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그러나 한·미 합동 조사보고서에 무초 전 대사의 서한이 빠진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美 국방부 “노근리 학살사건 재조사 방침 없다”  

국민일보 [정치, 세계]  2006.05.31 오후 21:49

미국 국방부는 30일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학살사건 전날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란민에 대한 사격방침을 결정했다는 내용의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 서한이 공개된 데 대해 현재로서는 재조사방침이 없다고 밝혔다고 연합뉴스가 30일 보도했다.





정부, '피난민에 총격' 서한 美에 확인 요청  

한국일보 [정치]  2006.05.31 오후 20:42



정부 관계자는 31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시절 실시한 노근리 사건 조사에서는 무초 대사의 서한은 언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당시 무초 전 대사의 서한이 정확히 조사가 됐는지 등 몇 가지에 대한 미 국무부에 확인을 요청해 놓은 상태”라고 밝혔다.

앞서 미 국방부는 30일 무초 전 대사의 서한 공개에도 불구, “노근리 사건을 재조사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미 국방부는 이날 공보실을 통해 “무초 대사의 서한 내용이 새로운 사실을 제공하는 것은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같은 미 국방부의 언급은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난민에 대한 ‘1차 경고 사격후 발포’지침은 노근리 학살과는 관계가 없으며 노근리 사건은 우발적으로 저질러졌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美 노근리 피해보상금 400만불 ‘흥정’  

경향신문 [정치]  2006.05.31 오후 17:39



미국측이 노근리 사태를 포함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 보상으로 4백만달러의 보상금을 제안했지만 노근리 피해주민들이 거부한 것으로 30일 드러났다.


미국측은 이마저도 9월30일까지 수용하지 않으면 미 의회로 귀속된다며 노근리 피해주민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피해보상과 추모사업도 지지부진=노근리사건 처리지원단에 의하면 지난해 5월23일 실시한 희생자 및 유족 최종심사 결과 피해자로 인정받은 인원은 희생자 총 218명과 유족 2,170명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보상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근리 희생자 명예회복특별법 상에는 보상 규정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노근리 학살, 한국정부도 책임있다”  

경향신문 [정치]  2006.05.31 오후 17:39




노근리 학살 사건 전날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란민에 대한 사격 방침을 결정했던 미8군사령부 주최 대책회의에는 한국 정부의 내무부, 보사부 고위 관계자들과 경찰국장도 참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한국정부의 노근리 심사보고서의 조사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AP통신이 30일 공개한 존 무초 당시 주한미대사가 딘 러스크 미 국무부 차관보 앞으로 보낸 비밀 서한(전문) 분석 결과 이같이 확인됐다.

AP통신의 서한 전문 공개는 이 서한을 노근리 양민학살이 미군의 ‘우발적 사고’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도한 뒤 나온 것이다. 서한 전문에 따르면 대책회의 참석자들은 “G-1, G-2, 헌병대장, CIC, 대사관, 내무 및 사회부, 그리고 치안국장(the Director National Police)”으로 돼 있다.

‘내무 및 사회부’(the Home and Social Affairs Ministries)의 경우 참석자의 직책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 정부 내무부와 사회부 관계자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서한은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도 참석한 자리에서 한국 정부와 미군 당국간 피난민 대책이 결정된 것임을 보여준다. 당시 내무부장관은 조병옥(趙炳玉), 사회부장관은 이윤영(李允榮), 치안국장은 김태선(金太善)씨였다.

한편 1950년 7월 당시 한국정부가 미군과 피란민 통제와 관련해 ‘긴밀한 협조’를 통해 ‘통제 지침’을 하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3월 국무총리실 산하 ‘노근리사건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위원회’가 발간한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하순쯤에 한국 정부와 미8군은 긴밀한 협조를 통해 … 도로를 이동하는 피란민들이 군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피란민 통제 지침을 하달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AP통신이 밝힌 주한미대사의 편지 및 한국 정부 관계자가 참가한 회의가 열린 시점과 일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