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게시판
"김봉한교수의 월북"행로
'노벨의학상감' 극찬서 "배신자"로 평가받은 김봉한은 누구인가?
김봉한(1916-1966?)은 1916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고 서울제2고보((경북고 전신)를 거쳐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서울대 의대 전신)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그는 당시 최첨단 과학인 원자물리학에 흥미를 갖고 이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런 편력은 훗날 그가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밝히는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학 졸업 후 여러 의대의 강사를 거쳐 경성여의전 교수로 있다가 6·25전쟁의 와중에 북한으로 갔다. 전쟁 중 제2후방병원 의사로 배속돼 수술을 잘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전후 평양의학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의학의 과학화에 주력,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규명한 봉한학설을 발표해 북한의학계를 풍미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10여년 뒤 정치적 이유 등이 섞여 용도폐기 됐고, 그도 숙청 당한 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대 북한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하다. 10여 년만에 거의 흔적 없이 몰락해 버린 한 의학자의 삶은 월북 지식인들의 행로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경우다. 전통 한의학의 과학화에 성공한 '세계적 의학자'로 북한이 한때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김봉한, 그의 등장과 퇴장은 북한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있어 더욱 드라마적 요소가 짙다.
1956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라 불리는 반(反) 김일성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인민보건사업을 개선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의제가 상정돼 토의됐다. 전 해 12월 김일성이 사상사업에서 '주체' 확립을 강조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한 주체 열풍이 의학분야에도 밀어닥친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는 동의학(한의학)의 육성과 과학화가 추진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김봉한 이었다.
김봉한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서양 의학자였다. 그런 그가 왜 동의학 과학화의 선봉에 섰는지는 명확지 않다. 다만 그가 의학에 입문하기 전부터 동의학의 원리와 치료법에 깊이 매료돼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월북 동기나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움 모르고 자란 그에게 사회주의자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회상이다.
북한 사람들이 화학자 이승기와 함께 노벨상감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던 김봉한의 업적은 '봉한학설'에 집약돼 있다. 이 학설은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전통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經絡)의 실체를 규명한 '봉한관설'이다. 다른 하나는 세포보다 작은 미세한 조직인 산알('살아있는 알'이라는 뜻)이 봉한관을 주행하면서 세포가 되고, 세포는 다시 산알로 변하기를 반복하면서 순환시스템 속에서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산알학설'이다.
이 이론은 1961년 8월조선의학자대회에서 처음 발표된 이래 1965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학술논문으로 발표됐다. 김봉한의 연구결과를 두고 북한당국은 흥분해 마지않았다. 북한은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 생물학과 의학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조선중앙통신. 1964)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연구논문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외부세계에 타전됐고 노동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평양의학대학 교수였던 김봉한이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매체들은 앞다투어 대서특필했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북한 내에서는 없을 정도가 됐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수립 이래 김일성 이외에 특정인의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일찍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봉한학설에 대한 세계의학계의 견해는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견해는 관련자료 요청과 공동연구 제의, 견학단 파견 등으로 구체화됐다. 부정적인 반응은 면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에서부터 아예 무시하거나 냉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중국과 북한 내부의 반발은 당사자인 김봉한은 물론이고 북한당국까지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부 한의사들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하면서 봉한학설의 '부당함'을 시위하고 나섰다.
이즈음 중소분쟁 등 가파른 국제정세의 흐름을 타고 북한 권력 상층부에서 터져나온 갑산파 숙청사건은 김봉한과 그의 동료들을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았다.
김봉한 팀의 경락연구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당내 2인자 박금철이 종파사건에 연루돼실각한 것이다. 그 불똥은 김봉한에게 튀었고 봉한학설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북한당국은 이의 폐기를 선언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봉한학설의 폐기가 결정되자 연구와 실험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김봉한은 하루아침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지방으로 추방됐다. 그가 쫓겨간 곳이 탄광이었다는 주장과 함남 정평군의 어느 시골 농장이었다는 설이 엇갈린다. 그는 얼마 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북한의 모든 공식 문건이나 서적에서 김봉한과 그의 이론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북한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마저 모를 만큼 그의 제거는 철저했다.
북한에서 김봉한과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들은 "민족 앞에 죄를 짓고 인류 앞에 공헌했다"는 말로 그의 일생을 반추하고있다고 한다. 봉한학설은 남한에도 전해져 일부 의학자들이 "반드시 재조명해서 복원해야 할 민족의 귀중한 과학업적"이라며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미약하기만 하다.
김봉한의 존재와 그의 학설이 역사의 한 일화로 끝나버릴지, 언젠가 화려하게 부활 할 수 있을지는 가늠키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월북지식인들이 피해가기 어려웠던 정치적 소용돌이가 의학자였던 그의 삶마저 삼켜버린 사실이, 그의 업적보다 더욱 비극적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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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한교수의 월북"행로
'노벨의학상감' 극찬서 "배신자"로 평가받은 김봉한은 누구인가?
김봉한(1916-1966?)은 1916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고 서울제2고보((경북고 전신)를 거쳐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서울대 의대 전신)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그는 당시 최첨단 과학인 원자물리학에 흥미를 갖고 이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런 편력은 훗날 그가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밝히는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학 졸업 후 여러 의대의 강사를 거쳐 경성여의전 교수로 있다가 6·25전쟁의 와중에 북한으로 갔다. 전쟁 중 제2후방병원 의사로 배속돼 수술을 잘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전후 평양의학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의학의 과학화에 주력,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규명한 봉한학설을 발표해 북한의학계를 풍미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10여년 뒤 정치적 이유 등이 섞여 용도폐기 됐고, 그도 숙청 당한 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대 북한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하다. 10여 년만에 거의 흔적 없이 몰락해 버린 한 의학자의 삶은 월북 지식인들의 행로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경우다. 전통 한의학의 과학화에 성공한 '세계적 의학자'로 북한이 한때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김봉한, 그의 등장과 퇴장은 북한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있어 더욱 드라마적 요소가 짙다.
1956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라 불리는 반(反) 김일성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인민보건사업을 개선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의제가 상정돼 토의됐다. 전 해 12월 김일성이 사상사업에서 '주체' 확립을 강조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한 주체 열풍이 의학분야에도 밀어닥친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는 동의학(한의학)의 육성과 과학화가 추진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김봉한 이었다.
김봉한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서양 의학자였다. 그런 그가 왜 동의학 과학화의 선봉에 섰는지는 명확지 않다. 다만 그가 의학에 입문하기 전부터 동의학의 원리와 치료법에 깊이 매료돼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월북 동기나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움 모르고 자란 그에게 사회주의자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회상이다.
북한 사람들이 화학자 이승기와 함께 노벨상감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던 김봉한의 업적은 '봉한학설'에 집약돼 있다. 이 학설은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전통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經絡)의 실체를 규명한 '봉한관설'이다. 다른 하나는 세포보다 작은 미세한 조직인 산알('살아있는 알'이라는 뜻)이 봉한관을 주행하면서 세포가 되고, 세포는 다시 산알로 변하기를 반복하면서 순환시스템 속에서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산알학설'이다.
이 이론은 1961년 8월조선의학자대회에서 처음 발표된 이래 1965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학술논문으로 발표됐다. 김봉한의 연구결과를 두고 북한당국은 흥분해 마지않았다. 북한은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 생물학과 의학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조선중앙통신. 1964)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연구논문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외부세계에 타전됐고 노동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평양의학대학 교수였던 김봉한이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매체들은 앞다투어 대서특필했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북한 내에서는 없을 정도가 됐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수립 이래 김일성 이외에 특정인의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일찍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봉한학설에 대한 세계의학계의 견해는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견해는 관련자료 요청과 공동연구 제의, 견학단 파견 등으로 구체화됐다. 부정적인 반응은 면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에서부터 아예 무시하거나 냉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중국과 북한 내부의 반발은 당사자인 김봉한은 물론이고 북한당국까지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부 한의사들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하면서 봉한학설의 '부당함'을 시위하고 나섰다.
이즈음 중소분쟁 등 가파른 국제정세의 흐름을 타고 북한 권력 상층부에서 터져나온 갑산파 숙청사건은 김봉한과 그의 동료들을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았다.
김봉한 팀의 경락연구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당내 2인자 박금철이 종파사건에 연루돼실각한 것이다. 그 불똥은 김봉한에게 튀었고 봉한학설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북한당국은 이의 폐기를 선언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봉한학설의 폐기가 결정되자 연구와 실험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김봉한은 하루아침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지방으로 추방됐다. 그가 쫓겨간 곳이 탄광이었다는 주장과 함남 정평군의 어느 시골 농장이었다는 설이 엇갈린다. 그는 얼마 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북한의 모든 공식 문건이나 서적에서 김봉한과 그의 이론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북한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마저 모를 만큼 그의 제거는 철저했다.
북한에서 김봉한과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들은 "민족 앞에 죄를 짓고 인류 앞에 공헌했다"는 말로 그의 일생을 반추하고있다고 한다. 봉한학설은 남한에도 전해져 일부 의학자들이 "반드시 재조명해서 복원해야 할 민족의 귀중한 과학업적"이라며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미약하기만 하다.
김봉한의 존재와 그의 학설이 역사의 한 일화로 끝나버릴지, 언젠가 화려하게 부활 할 수 있을지는 가늠키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월북지식인들이 피해가기 어려웠던 정치적 소용돌이가 의학자였던 그의 삶마저 삼켜버린 사실이, 그의 업적보다 더욱 비극적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사라지는 꿀벌들, 성경 예언의 성취인가?
사라지는 꿀벌들, 성경 예언의 성취인가?
30-60% 꿀벌군단 증발…셀폰∙군용항공기 운항 문제점 추정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말라 하더라”
과연 계시록 6장6절 하반절은 말세의 지구촌 특히 미국에서 일어날 현상을 예언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올리브 꽃은 자가증식을 하며 포도 역시 완전 자가증식을 하거나 바람에
의해 수분된다.
그러므로 포도와 올리브는 당연히 꿀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요즘 미국의 주요농산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각국에서
갑자기 꿀벌군단이 사라지는 군집붕괴신드롬(CCD)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
꿀벌과‘화학운’(chemtrail)으로 추정되는 비행기꼬리. 출처=REUTER 통신. ⓒ
다수의 과학자들은 CCD현상의 원인을 세계 전역에 흐르는 셀폰(휴대전화)의 전파나
기타 전파를 발산하는
하이텍 장비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서부연안에서 꿀벌단이 사라지는 현상은
30-60%에 달하고 있으며
동부연안과 텍사스 등지는
70%에 달한다는 게
꿀벌전문가들의 보고다.
CCD는 유럽에도 번져 가고 있으며 최근 영국에도 발생 조짐을 보였다.
이같은 꿀벌증발로 캘리포니아의 경우 꿀벌의 도움이 필수적인
건과류 편도나무(아몬드) 등 농산물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
가주 아몬드는 전국에서 가장 수입이 높은 농작물 중의 하나.
펜실배니아주 데이브 해켄버그씨는 꿀벌 연구가들에게 CCD 현상을 가장 먼저 보고한 양봉가다. 꿀벌은 수퍼마켓과 각 가정의 식탁에 수많은 과일과 채소를 제공해주는 긴사슬 구실을 한다. 그러나 CCD는 꿀벌군집을‘사라져가는 링크’(a missing link)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코넬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꿀벌은 연간 140여억불 어치의 과일/야채/견과류
종자와 작물의 수분을 돕고 있다. 전 국민의 식량 3분의1을 꿀벌이 채워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론적으로 벌들의 비행 시스템은 모빌 폰 등에서 발산되는 전파에 방해를 받아
자기 벌집을 찾기가 극난한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 란다우대학교의 실험에 의하면 꿀벌들은 모빌폰이 인근에서 작동할 시
벌집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밖에도 최근 미국 전역을 비롯한 각국에서 발견된다(?)고 지적돼온 군용항공기의 비행운(contrail)도 원인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다. 일반 여객기에 비해 군용항공기의 비행운은 여러 시간 하늘에 머무는 데다 이상한 무늬를 남긴다는 것.
군용항공기의 이상한 비행운은‘화학운’ (chemtrail)으로 불린다.
화학운이 출몰하는 지역에서는 평소 깨끗하던 인근 연못 등에서 공해 화학물질이 실제로 발견되고 있다는 게 관찰자들의 주장이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경고한 바 있다. “만약 벌떼가 사라지면 사람은
4년밖에 더 못 산다.”
http://www.choonggy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