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옮깁니다.

(예수는 불교 승려이었다.)

종교란 서로 이간질하는게 아니고 서로 화합하면서 잘 살아보자는것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칭찬하는 예수님도 한때는 불교승려였다는 기록이 있다길래 제가 한번 실어봅니다.

성경에도 밝혀지지 않고있는 에수의 13세부터 29세까지의 행적은 그동안 신비속에 묻혀있었다. 그러나 최근 신비에 싸여졌던 그 기간동안 "불교를 수행하던 이름높은 고승高僧이었다." 는 사실이 한 석학碩學에 의해 소개돼 상당한 관심을 끌고있다.

예수의 13세부터 29세까지 16년동안의 행적을 밝힌 각종 기록을 발굴, 수집해 귀국한 장본인은 불문학박사이자 한양대교수인 민희식씨.

84년 펜번역문학상.85년 프랑스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등을 수여 받은바 있는 민교수는 "나는 특정종교의 신자가 아닌 학자로써, 신앙의 문제가 아닌 학문자료의 견지에서, 서양문화의 근본이 되는기독교를 연구하며 그동안 예수의 업적과 행적을 오랬동안 조사. 연구 추적해왔다."고 말했다.

그 동안 인도의 여러곳을 답사해온 민교수의 예수생애추적의 개가로 인정되는 이번 자료는 인도. 네팔.. 티베트등 사원에 산재해있던 불교계 경전과 기록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프랑스 국립박무관에 비장된채 공개 되지 않던 것을 민교수가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발굴, 입수해 귀국한것. 민교수는 이자료공개와 발론내용 발표회를 지난 9월20일 조계사관음회를 통해 열었는데 이 이후 기독교계 신학도들 사이에서도 강연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는것.

기독교계 기록들이 침묵하고있는 예수의 청년기와 활동내용을 받고있는 이들 불교계연대기 와 기록은 인도 라다크州 지방의 수도 '레에'남쪽 40km 지점의 '하이미스' 7대사원에서 발견된 티베트어 경전들.

예수생애에서 밝혀지지 않는 기간의 진상에 대해 모호한 점에 짙은 회의를 품었던 서양의 학자들은 많았고. 대표적인 인물이 재정러시아때의 러시아인 '니꼬라그.노그비치'
그는 인도. 네팔등지의 여러사원에 있는 예수의 기록을 모아서 지난 1894년 불어판으로 발표했으나. '예수전'의 편찬자 '에르네스트.르남'및 기독교 단체측의 박애를 받고, 이 자료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번에 프랑스정부의 특별배려로 이 희귀자료를 다시 찾아 귀국한 민교수는 '예수가 원효대사와 같은 불교의 고승으로 활약했다.' 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에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을 갖고 결혼을 해야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에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난다.

이사는 14세때 아리아인들속에 정착, 힌두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사드등을 공부하나, 사성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를 느끼고 이를 비판하며, 이곳을 탈출한다.
'이사'는 만인의 해탈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녹야원, 베나레스등지에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카시미아를 거쳐 라다크의 레에에서 팔리語, 산스크리트語를 배우며 계속되며 이어 티베트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인 '멩게스 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大師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위해 29세때 이뤄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실천(간음한 여인의 예)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 혜일 대사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문헌(누가복음)이 다만 "그때까지 (30세) 예수는 사막에 있었다." 고만 막연히 기록되고 있다.

민교수는 불교측문헌이 정확한 이유는 순교당시의 견문기록임에 반해ㅡ 기독교측 문헌은 오랜세월이 경과된뒤 여러시기에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까닭이라고 지적했다. 뿐만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뒤 제자들은 기독교교리의 확립을 위해 예수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히 기술한 '토마스'복음서등이 지나치게 불교적색체를 띄고 있어 바이블 편집에서 삭제되었다는거.

기독교의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법화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민교수는 불교의 '장자궁자'와 기독교의 '탕자의비유'외에도 삼위일체의 삼신불에서의의 유래등 많은 부분을 예로 들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의 뜻인 '메시아'의 어원은 불교에서 말세중생을 구제하러올 미래불인 '미륵'(마에트리아 혹은 메테아) 에서 유래했다는 일화를 비롯, 예수에게 세례를 준 성聖요한의 이름은 한역불전의 정반왕(서가모니의 부친) 의 서양식 발음(이태리'조바니') 프랑스'장' 영국의'존'에서 나왔다는 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은 서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나온 이름이라은 설이 있다고 민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민교수가 이번에 발표한 두루마리 문서에는 예수와 '필라드'와의 대립은 예수의 십자가처형, 유다의 배신등의 숨은 비화까지 철저하게 저술하고 있다.

특히 처형후의 예수의 무덤이 빈것은 이사의 죽음을 계기로 유태인의 반란이 일어날것이 두려워 '빌라도'가 이사의 무덤에서 시체를 옮겼다고 기록돼있다.
또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총독 빌라도가 에수 제거를 결심한 이유는 민중에세 막강한 여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사가 비록 혁명적 민중지도자가 될 의지가 없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그를 처형하는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까닭이 라는것.

예수를 이사로 표기한 이 기록헤는 모세를 모사로 표기해 소개하며 모사는 이스라엘 인이 아니라 이집트의 두번째 왕자였으며, 차남임 신분때문에 왕위를 계승할수 없게 되자 노예인 이스라엘인들과 '홍해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탈출, 제 2의 왕국건설을 꾀했다고 기록했다.

예수생애에 밝혀지지않은 부분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이들 불교적 자료는 한때 '리처드.보크'가 실제로 인도 티베트등을 답사 다큐멘터리 필름(The Lost Years of jesus) 에 담겨진 적도 있다는 것.

이러한 사실에 대해 예수를 신의 아들로 신앙하는 기독교측의 반론 여부에 대해 묻자 민교수는 오히려 강연요청을 받고 있는 이번의 발표는 진실을 밝히려는 학문적 열의의 결과 라고 말했다.

"예수가 불교를 수행하며 승려 활동을 했다고 해서 에수의 위대함이 줄어드는것은 아니지 않느냐?"는게 민교수의 반문이다.


이상의 글은 오래전 86년 10월26일자로 발간된 모 주간지에 실린 글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불교의 진리는 빛을 발할것이고 기독교의 허구한 교리는 숨어버릴것입니다.
과학이 이렇게 발달할줄 예수가 진즉에 알았드라면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그렇게 버리지 않았을것이고 하나님이란 허상을 만들지도 않았을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일체 모든 천상의 신 지옥의 신들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이고 중생구제 하셨습니다.
하물며 미약한 인간들의 구제야 말한들 뭐하리까.
더이상 불교의 진리를 욕되게 하지말고 한번씩 들리시면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이 인연공덕으로 차미향님도 부디 성불하는 인연공덕을 지어시길 합장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