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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르스카님.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있고 명칭을 선택하는 데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허용하는 우주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시스템이지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지만 통일되지 못한 환경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갖습니다.
이 사이에 불안감이 스미게 되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실인 것 같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왜곡된 지구인의 마음입니다. 메시지의 통일된 관점 중 하나는 외계의 개입으로 인해
행성의 본래 목적이 왜곡이 되었고, 인간의 본성도 왜곡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구인의 자기 세계관은 전혀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람만 불면 쓰러질 화선지 한장과도 같지요.
그런데 강하게 보입니다. 너무 강해서 전쟁도 하고 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것은 병드는 수행자의 원인이요, 종교인의 변질 원인입니다.
정상인(?) 지구인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명칭과 상징이 중요하겠습니까?
예수라는 존재도, 그 외의 성자라고 수용되고 있는 존재들도, 언제나,
그 시대와 환경, 그 사람에 맞게, 명칭과 비유를 섞어가며 가르침을 주었지요.
이 성자 그룹(?)의 어떤 사람도 자기 세계관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며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심지를 일깨워 주려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아우르스카님이 하나님이라는 명칭에 대해서 어떤 좋은 느낌을 갖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남에게 전달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또 그것을 위해 바꿔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아우르스카님은 충분히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명칭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잘못 사용된 사례가 많다는 것이 중요하고,
깨어난 사람은 그러한 것에 집착하지 않기에
자신이 어떤 명칭을 좋아하고 선호한다고 해도, 남에게 전달할 때는,
오해의 소지가 적고, 보다 균형적이고, 보다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며, 표현을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표현의 자유와 허용하는 우주관에서 나온 명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조직이 강요한 명칭이며, 이 명칭의 갈라짐이 곧 종교의 갈라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갈라짐은 곧 국가의 갈라짐, 민족의 갈라짐으로 번져갔죠.
인류는 자신의 사고대로 신과 우주를 디자인해 왔습니다.
자신이 명칭과 구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상징어입니다.
아우르스카님에게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떠오를 때,
조화로운 사랑, 상상을 뛰어넘는 넓은 포용력, 모든 이해와 모든 배려, 이러한 느낌 속에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칭 보다, 명칭이나 상징이 바라보는 것을
자꾸 만끽하게 되면, 오히려 그 명칭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어지겠지요.
그런 후에 남에게 그것을 설명할 때는,
고민하게 되지요. 그 사람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저는 이 부분에서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있으나, 보다 새로운 것, 조화로운 것을 하려면,
신선한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명칭과 상징에 깃들어 있는 에너지,
말이 가져오는 에너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을 때, 즉 전환기를 넘어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때,
낡은 것은 가져갈 수 없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 낡은 것은 표현하는 모든 명칭과 상징도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새로운 균형과 질서를 위해서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와 허용하는 우주의 세계입니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있고 명칭을 선택하는 데에도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허용하는 우주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시스템이지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지만 통일되지 못한 환경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갖습니다.
이 사이에 불안감이 스미게 되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실인 것 같아...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이 왜곡된 지구인의 마음입니다. 메시지의 통일된 관점 중 하나는 외계의 개입으로 인해
행성의 본래 목적이 왜곡이 되었고, 인간의 본성도 왜곡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구인의 자기 세계관은 전혀 튼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람만 불면 쓰러질 화선지 한장과도 같지요.
그런데 강하게 보입니다. 너무 강해서 전쟁도 하고 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것은 병드는 수행자의 원인이요, 종교인의 변질 원인입니다.
정상인(?) 지구인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명칭과 상징이 중요하겠습니까?
예수라는 존재도, 그 외의 성자라고 수용되고 있는 존재들도, 언제나,
그 시대와 환경, 그 사람에 맞게, 명칭과 비유를 섞어가며 가르침을 주었지요.
이 성자 그룹(?)의 어떤 사람도 자기 세계관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며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심지를 일깨워 주려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아우르스카님이 하나님이라는 명칭에 대해서 어떤 좋은 느낌을 갖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남에게 전달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 또 그것을 위해 바꿔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아우르스카님은 충분히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명칭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잘못 사용된 사례가 많다는 것이 중요하고,
깨어난 사람은 그러한 것에 집착하지 않기에
자신이 어떤 명칭을 좋아하고 선호한다고 해도, 남에게 전달할 때는,
오해의 소지가 적고, 보다 균형적이고, 보다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며, 표현을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표현의 자유와 허용하는 우주관에서 나온 명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조직이 강요한 명칭이며, 이 명칭의 갈라짐이 곧 종교의 갈라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갈라짐은 곧 국가의 갈라짐, 민족의 갈라짐으로 번져갔죠.
인류는 자신의 사고대로 신과 우주를 디자인해 왔습니다.
자신이 명칭과 구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상징어입니다.
아우르스카님에게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떠오를 때,
조화로운 사랑, 상상을 뛰어넘는 넓은 포용력, 모든 이해와 모든 배려, 이러한 느낌 속에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칭 보다, 명칭이나 상징이 바라보는 것을
자꾸 만끽하게 되면, 오히려 그 명칭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어지겠지요.
그런 후에 남에게 그것을 설명할 때는,
고민하게 되지요. 그 사람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저는 이 부분에서 문제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는 있으나, 보다 새로운 것, 조화로운 것을 하려면,
신선한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명칭과 상징에 깃들어 있는 에너지,
말이 가져오는 에너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을 때, 즉 전환기를 넘어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때,
낡은 것은 가져갈 수 없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 낡은 것은 표현하는 모든 명칭과 상징도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새로운 균형과 질서를 위해서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표현의 자유와 허용하는 우주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