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살해한 '영남의 양심'
[손석춘칼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해야할 일
손석춘(ssch)기자
살인마 박정희.

그렇게 쓰면 감정적 선동일까. 더구나 박정희 향수가 짙은 나라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외친 여성이 있다. 그것도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다. 비단 "살인마 박정희"라고 외치는데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절규했다.

"천벌을 받으라!"

누구였을까. 서슬 시퍼런 '유신체제'에서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고 부르댄 여성은. 고 우홍선의 부인이다. 우홍선. 그는 옹근 30년 전인 1975년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만이 아니다. 대구와 영남에서 태어나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고뇌하며 깨끗하게 살아가던 인재들이 줄이어 사형대에 올랐다.

고 우홍선의 부인은 회고했다.

"저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5년 동안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하였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푸른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한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꼭 세 번씩 외쳤습니다."

살인마 박정희에 천벌을 주문했던 여성

  

▲ 1964년 8월1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해 57명 중 41명을 구속, 16명을 수배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랬다. 박정희는 결국 '천벌'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가. 아직도 민주공화국 곳곳에 시퍼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인민혁명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이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고문조작으로 사건의 성격을 규정했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이수병.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 살해당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협회는 일찌감치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 당한 당사자는 물론, 유족이 겪은 고통도 심각했다. 동네 아이들이 어린 아들을 볏짚줄로 매어 끌고 다니면서 "너희 아빠는 간첩이다"라며 때렸다. 그 뿐인가. 나무에 묶어놓고 총살시키는 '놀이'를 벌였다. 초등학생 딸이 소풍 갔을 때는, 아이들이 몰려와 도시락에 개미를 넣었다. "간첩의 딸"이라며 돌을 던졌다. 어린 딸은 나무 뒤에 울면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랬다. 그것이 박정희 시대였다. 영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사형 당한 사람 대다수가 대구와 영남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주인사들이었다.

박정희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주인사들에게 사법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장기집권 전략'에 있었다. 지역감정을 부추겨 영남을 영구집권의 토대로 삼는 데 '눈엣가시'가 대구지역의 민주인사들이었다.

                   부인의 절규대로 그들은 천벌을 받았다. 아니 천벌이 아니고 스스로 내린 벌을 당했다.
                   고 우홍선씨는  마지막 유언으로  내무덤에 빨간 카네이션을 심어달라 했단다.
                   너무나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