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과 그 이전, 신화  일본에도 있다.  

   글쓴이 : 玉光


일제시대 관련 책자 분류작업 박창화씨 해방 후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에 증언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5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 불태웠다,

또한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사편수회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1938년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일본의 사학자인 하라타사카에루는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하여,

한국과 관계가 있는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이 일제의 우리 고사서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핵심작업이었던 것이다.



광복이 된지 57년이 지나도록 우리 민족의 근원인 단군조선등의

상고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 일본등의 교묘한 역사 왜곡에도

이유가 있지만,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함께 부화뇌동하여 식민사관,

실증사관, 반도사관으로 날조 왜곡된 우리 역사를 답습하여,

아직까지도 민족주체성에 의한 역사로 복본하지 못한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즉 일제가 의도적으로 남겨둔 단군조선에 대해 역사성이 희박한

'삼국사기'(유교중심의 모화사관)나 '삼국유사'(불교중심의 종교사관)

같은 사대주의적 사서 등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인식하며,

과거 일본 및 서구열강이 가져간 수많은 사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상고시대의 사료들을 모으려는 노력이 미흡했고, 진정 민족주체성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기술하고자는 노력이 부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우리역사회복을 위한 충격적인 실화가 소개되었다.

다름아니라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

사서 분류 작업을 하였던 박창화님(朴昌和;1889∼1962)의 증언이

최기철박사님(崔基哲;1910∼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 의해 공개되었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과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았을까?



이제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수많은 단군시대이전의 고사서를

수십만권을 압수 소각하면서 일부 중요한 상고사의 고문헌을 문화적,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아마 은밀히 보관하고 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일본 궁내청 서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박청화님은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다

고 그 당시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박사에게 증언하였다.



(사)한배달 최봉열 원로회 회장, 한애삼 부회장 등이 1998년 10월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를 탐방하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왕실도서관에서

도서분류 및 내용분석 업무를 담당했던 박창화씨와의 관련하여

증언한 녹취록이 (사)한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배달40호(1998년 겨울호)에 실려있다.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고향인 박창화는 1889년

이곳 박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으며,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등에서 조선어, 일본어, 체육등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을 하다 중국 안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독립항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신념을 밝히자 그 관헌이

박창화의 뜻을 좋게 여겨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본건의 제보자인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시 처음으로 박창화를 만난다.

박창화는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1945년 광복 직전 미국의 B-29의 폭격이 한창이자 일본정부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하리(尾張)공작 저택 지하실로 사서들을 옮겼는데

이때 박창화가 직접 왕실문고를 옮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직후에 박창화는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고,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계속 고향에 머물게 되었으며,

옮긴 사서의 정확한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오하리의 집 지하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아니면 왕실도서관으로 다시 복귀하였을 것이라고

당시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왕실문고 재직 당시 왕실문고 내 소장된 사료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사서임을 직접 확인했고,

우리 민족의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만큼

엄청난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수탈된 사료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사료의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사료였다.

당시 일본천왕 소화(昭和)라는 이름을 내각총리의 의뢰로 박창화가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그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청주사범학교로 자주 찾아와 최기철 교장과 말동무를 하던

박창화는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요청하였고,

최기철 박사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인정, 청주사범학교의 국사교사로 채용하게 되었다.

박창화는 마땅한 말동무가 없어 자주 최기철 박사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왕실문고에서 보았던 책들과 사료 정리작업등의 내용을 여러번 증언하였으나,

역사에 전문지식이 없던 최기철 박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던 박창화는 한 학기 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단군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창화로부터 국사를 배운 제자로는 김준호 교수

(현 서울대 명예교수, 생물학)와 임양재 교수(전 중앙대 교수)가 있다.

박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과의 확실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 퇴임자 명부에 보면

최종적으로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서기1950년)에 의원 면직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로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근무하였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명확한 증거를 위해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 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

그중 1935년 직원명부에 분명히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수입은 85엔이라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분명 박창화는 일제시대에 일 왕실 도서관에서 일하였으며

우리민족의 고서를 친견하고 읽었던 것이다.



그 뒤 최기철 박사가 서울대에 재직할 당시

이병도 박사(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게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된, 우리나라에서 수탈해 간 고대사 관련 사료의 존재와

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알렸으나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또 1957년경 문교부 편수국장을 방문하여 박창화의

왕실문고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나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