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종파-에세네파(Essenes)


에세네파(Essenes)는
프랑스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뻬레 롤랑 드 뽀(Pere Roland de Vaux)가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서 한 묶음의 두루마리(사해사본)를 발견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쿰란(Qumran)공동체라고도 불린다. 고대 기록에 에세네파에 대한 언급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Judeaeus)의 글과 요세푸스의 고대사 그리고 플리니(Pliny)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는 달리 에세네파는 세속의 삶을 떠나 나름의 영역을 다져나갔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원적 삶과 금욕적 삶을 지향하면서 유대광야에 은둔하였다. 그들은 재산을 헌납하여 함께 공유하고 학습과 예배와 일을 함께 했고, 정결의식으로서 침례를 행하였고 공동식사를 실행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XVIII Chapter 1) 당시에 결혼한 여성과 노예들을 제외하고도 이들의 숫자는 약 4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이들은 소득의 일부를 이 공동체에 지불했고 그들을 위해 옥수수와 식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에세네파는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겼다. 영혼의 불멸과 의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의로운(rightoussness)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존재들로 여기며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노동하며 자급하며 살았다.

- 에세네파에 대한 아래 내용은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V의 'Essenes'를 번역한 것이다.



에세네파라는 이름은


처음 필로가 '거룩'이라는 뜻의 단어 hosios를 사용한데서 유래했으며,
요세푸스에 의해서 Essi와 Esseni 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숫자는 약 4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해(Dead Sea)로부터 멀지 않은 곳의 서쪽 지역에 주요 은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 이외에서도 거주했지만 주로 팔레스틴의 작은 마을에 거주했었는데 도시들에서 가끔 그 흔적이 발견된다. 엣세네파(Essene의 옛이름은 Judas였다. BC 110)는 B.C 150년 경에 시작되었고 AD 1세기 말 경에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것들의 창조주요 통치자요 전지하신 유일신 하나님을 경배했다. 모세는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불명예을 의미했다. 태양은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깨우는 것으로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신이 정한 운명의 보편성은 믿었지만 자유의지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으로 희생제물을 보내기는 했지만 불결해지는 것을 저어하여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거부했다. 이것은 그들은 경건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제사로 여긴 것으로서 피의 희생이 그들에 의해 드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임은 지켜졌고 그들의 모임장소에서는 연장자의 순으로 자리가 배정되었으며 그 모임에서는 문서가 낭독되고 현자에 의해 알레고리적 해석을 따른 문서해설이 이어졌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곳으로서 정결의식 즉 자주 씻는 예식을 행했고 레위인들이 제사에서 더럽혀진 반면에 이 규정을 철저히 지켰다. 심지어 젊은이가 어른을 만지는 것은 그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내부규율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죽음은 '육체는 타락하기 쉽고, 가진 물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지만 영혼은 불멸하고 영원히 살아있으며 가장 신비한 하늘로부터 어떤 생래적 욕망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육체 안으로 던져진다'는 그들의 생각 때문에 환영받을 일로 여겼다. 육체와의 결합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랜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서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눈이나 폭풍우 그리고 사막의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렇지만 대양으로부터 시원한 북동풍이 불어와서 항상 고요하고 원기를 주는 대양(바다) 곁을 좋은 거주 장소로 여겼던 그리이스인들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나쁜 영혼들은 음울하고 결코 끝나지 않는 고통으로 가득찬 험악한 동굴 속에 있다고 보았다. 어떤 글에 보면 에세네파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에세네파는 복종과 정직과 성적 금욕, 정의 그리고 절제 등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병자들에 아주 큰 관심을 기울였고 연장자를 존중하였으며 방문자들에게 친절과 환대를 베풀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여겼고 노예제도는 천륜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큰 죄를 지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은 오랜 기간 추방되거나 완전히 추방되는 처벌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기간에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먹어서는 안되며 큰 곤란을 겪고 가끔은 죽기도 했다. 철학은 무용한 것으로 악마적 인간의 놀음으로 배척받았다. 그렇지만 윤리는 열정적으로 학습하였다. 그들은 자연에서 약품의 재료들을 찾았고 신조에 상관없이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광천수의 효과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비한 능력과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예언의 능력에 대하여 기록했다.
에세네파 중 마나헴(Manahem)이란 사람은 헤롯이 왕위계승의 어떠한 여지도 없던 어린 시절에 그가 헤롯대왕이 될 것을 말하기도 했다.
모든 것들은 공유했고 심지어 집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농사와 농지경작 그리고 가내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결코 전쟁을 위한 무기는 생산하지 않았고 여행 중 방어용 이외에는 그것을 운반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수확물과 임금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청지기에게 보내졌다.
의복들과 신발들은 다 헤어질 때까지 입었다.
물물교환 이외에는 어떠한 상업적 활동도 불허했다.
도유(기름을 붓는 예식)는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종을 두는 것은 불의에 유혹되는 것으로서 금지되었다.
그들의 지도자들과 수장은 그들의 사제들-비록 그가 부름을 받은 자라해도-, 청지기들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원칙으로 하였다.
관리로서 마을에 있는 사람은 여행하는 형제들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1백명으로 재판정이 구성되었는데 그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판결된 것은 번복될 수 없었다.
에세네파의 구성원은 네 개의 과업을 수행했다. 매일의 일과는 그날그날 주어졌다.
그들은 동트기 전에 기상하여 태양이 뜨기 전까지는 불경스럽지 않은 말 만을 했으며 마치 태양이 뜨도록 간구하는 것처럼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 후 그들은 지정된 일터로 보내어지고 그곳에서 11시까지 5시간동안 일을 했다.
모두가 모였을 때 그들은 특별하게 축귀된 물에서 목욕을 했다.

그리고 흰 옷을 입고 아주 고요하고 조용하게 공동 식사를 위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각각 어떤 류의 빵과 한 종류의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여지기 전에 한 사제가 은혜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끝나기 전에는 먹을 수 없었다.
식사 기도의 끝에 사제가 다시 흰 옷을 그 곁에 놓도록하고 평상복을 갈아입으라고 말하고 그들은 저녁때까지 일을 한다. 저녁 식사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오 식사에서는 그들의 사제들에 의해 준비 된 하나의 희생 만찬으로서 외부인에게는 동참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녁만찬에는 참석을 허용한다.
식사를 마친 후에야 말을 할 수 있고 음식과 음료는 아주 알맞게 준비되며, 외부인들에 식사에서의 고요는 매우 종교적이고 신비스럽게 보여진다. 에세네파의 많은 사람들은 고령이고 그들은 로마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고통에도 마음과 몸의 평정을 유지했으며 절개를 꺾지 않았고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했다.

대다수의 에세네파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여성들에게 집착하지 않았고 평화와 조화를 열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공동체는 어린이들을 받아들이고 플리니(Pliny)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거친 바다에서의 싸움에서 지친' 성인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유지되었다. 그들이 입회하면 그들에게는 목욕시에 입을 앞치마(apron)가 주어진다. 흰 의복과 작을 구덩이를 파기 위한 작은 연장이 주어지며 그들은 태양 광선으로부터 자신의 배설물을 덮는다. 1년 동안 공동체의 금욕적 규칙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그들의 극기가 시험된다. 그런 다음 2년간 육체적 시험이 주어지는데 그동안 그들은 정결예식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공동식사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들이 이 모든 시험에 통과하면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정의를 지키며 모두에게 특별히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경건한 맹세를 하게된다.

*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의 의복이 자기들의 것보다 더 낫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동료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며 외부인들에게 아무 것도 발설하지 않으며 그들이 읽는 서적들의 내용과 그들의 천사들 이름을 비밀로 지킬 것을 엄중히 맹세한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단 한번 이 맹세를 했을 때 그들의 말은 헤롯이 자기 신하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던 것이 매우 신성한 것이었듯이 그들 모두에게 그렇게 간주되었다.
그들 중의 일부에게는 미혼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공동체의 의무는 아니다. 이것은 3년이 지난 후의 시험에서만 시행되고 만약 여성이 건강하고 자원하여 아이를 데리고 들어올 때에는 요구되지 않는다.

에세네파는 3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그들의 수와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과 종교 운동의 한 분파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이런 주목은 외부적인 하나와 외부적인 두가지 요소에서 나타난다. 내부적인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것들이 그들의 교의와 관습에서 매우 깊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함은 호기심을 자아내었고, 에세네파들이 비록 헬라어를 매우 능숙하게 말하였다할지라도 그들이 순수한 유대인들이었다는 이 조화를 가늠하는 것을 통해 알게된 것의 진의를 실험하도록 했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안식일을 준수했고 할례를 열광적으로 고집했다(Hippolytus). 이 모든 것들은 내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반면에 태양을 향한 그들의 태도, 사제들의 선출, 삶의 방식, 요세푸스 그 자신에 의해 피타고라스학파와의 유사성 등은 외부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1. 에세네파의 탄생

에세네파의 기원은, 셀레우코스 왕조를 상대로 마카베오스 독립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 하시딤이다. 그들이 외형적인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가 열리면서, 하시딤들 역시 갈리게 되었다.

최초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정교일치 정책과, 마카베오 집안의 요나단이 사제직을 획득하는 데에 반기를 든 하시딤의 일부가 유다사회를 떠나서 사해 서쪽의 촌락군에 은거를 하게 되는데, 그들이 에세네파를 형성하게 된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제관 계급인 사두가이파들을 차츰 중용하면서, 친 하스모니아 왕조 경향을 가지고서 남아 있던 하시딤들은 바리사이파를 형성하게 된다.


2. 에세네파의 생활과 교리

에세네파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마사다 결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느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믿었으며, 구약의 나지르인과 비슷한 의미로 자신을 주께 봉헌한다고 생각하였다.
모세는 존경하는 선지자였으며, 희생 제사를 지양하고, 정결의식을 자주 행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의 내세관과 유사한 관점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는 여타 유다인들의 권위, 특히 대사제직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엄격한 유다인이면서도, 많은 이방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들의 신학에 적응시켰다. 이들이 두 영(靈) 또는 두 권능의 근본적 대립을 바탕으로 매우 이원론적(二元論的)인 교리를 발전시키게 된 것은, 틀림없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하나는 ‘선’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 이 두 존재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무자비한 전투를 벌이는데, 결국은 ‘빛의 제후’가 ‘암흑의 천사’를 완전히 쳐 이기게 된다.

에세네파는 반(反)로마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이들은 격동의 70년대에, 최후의 항쟁이었던 마사다 결전 이후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에세네파에 주목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리니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에서 그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으며, 뻬레 롤랑 드뽀 수사가 사해 사본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