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공간(차원)의 존재 양식은 미시적으로 관찰해서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공간이란 장소가 아닌 물리학의 시공간이라는 의미의 공간입니다. 차원과 같은 의미.
즉 태양과 달은 다른 장소에는 있지만, 하나의 같은 공간(하나의 세계, 같은 물질 공간 차원)에 있는 것이죠.
반면, 나의 영체와 나의 육체는 같은 장소에 있지만, 다른 공간(차원, 별개의 세계, 이 공간의 물체는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없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죠.
인류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서 태양계를 벗어 나간다해도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멀리 여행을 함에 불과하지만, 실재로 같은 장소에 있는 다른 공간(차원), 영적인 세계, 신의 세계는 전혀 인식도 못하고 돌파를 못합니다.
같은 장소에 있는 다른 공간은, 같은 공간의 가장 먼 장소보다도 더 멉니다. 그것은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 돌파의 문제라서요.

많은 사람들은 막연히 다른 공간, 다른 차원 그런게 있나보다 하는 관념을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의 존재 양식을 미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막연히 어떻게든 있을 수 있겠지가 아닌, 확실히 다른 공간은 존재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물체가 분자라는 더욱 작은 물체들로 구성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분자들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원자는 중성자, 양성자, 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더 나아가서 쿼크나 중성미자까지 인식을 했습니다.
즉 물체는 더욱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입자 역시 더욱 작은 입자로, 그 더욱 작은 입자 역시 더더욱 작은 입자로, 이렇게 무한히 내려간답니다. 정확히는 무한이 아니라, 끝이 있지만 워낙 끝없이 미시적으로 내려가기에, 인간에게는 또 많은 레벨의 신들에게조차 그것은 무한이랍니다.


그런 미시적 입자의 레벨(층차)에서 보면 그것이 거기에 그 레벨(층차)의 공간이 존재한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무수한 공간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영체는 영체가 활동하는 영적인 공간이 있고, 육체는 육체가 활동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공간이 어떻게 같은 장소에 동시에 있는지는 존재성을 감 잡을 수 없는 텅빈 공간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그 공간을 차지하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물체로 설명하면 그 공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 공간도 텅 비어있고, 저 공간도 텅 비어 있는데, 텅 빈 것이 두개가 겹쳐있다고 해서 그 공간과 이 공간의 구분이 가지는 않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공간의 물체인 육체와 다른 공간의 물체인 영체가 어떻게 동시에 아무 충돌 없이 같이 존재하는지를 말이죠.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어 있듯이 더욱 작은 입자로 구성되며 더욱 유동적인 물질이 그 보다 더욱 큰 입자로 구성되고 덜 유동적인 물질에 침투해있 듯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여러 금속물체들의 분자들 간에 그보다 미시적인 전자들이 이동하 듯이요. 전자 한 알갱이만 보면 입자 하나에 불과할 뿐이지만, 만약 거기에 전자로 이루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금속이라는 이 공간의 여러 육체들 사이를 들락 날락할 수 있는 영혼 같은 것이죠.

병에 자갈을 채워넣고 모래를 뿌리면, 모래는 자갈이 더 못 움직여 들어가는 자갈들 사이 사이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모래가 아니라 아주 작고 작은 미립자, 전자보다도 작고, 중미립자보다도 작다면, 자갈들 사이 뿐 만아니라, 자갈들 속으로 다 흘러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즉 미시적 입자로 구성된 생명체는 거시적 입자로 구성된 물체는 안팎을 아무런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으니,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물체라는 것은 같은 수준의 입자로 구성되어서 서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면,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더욱 미시적 입자로 구성된 물체는 그 이상의 입자로 구성된 물체와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죠. 그러나 같은 레벨의 미시적 입자로 구성된 물체끼리는 역시 부딪힐 수 있는 것으로 거기서 그들끼리의 공간이 생기게 되죠.

즉 이 공간에서 사람이 있고 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가 앉고, 그 천장을 투과해 내려오진 않지만, 미시적 입자로 구성된 영체의 사람이라면 계단이건, 천장이건 다 투과해 다니겠죠.

그러나 영계에도 가면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사회가 있다는 얘기가 흔하죠. 그 공간에선 그 공간끼리의 물체끼린 역시 마찬가지겠죠.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이층에 앉아도 밑으로 투과해 떨어지진 않겠죠.

물론 이것이 절대적은 아니지만, 여기선 논외로 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간과 영적인 다른 공간이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면, 아마 우리 공간에서 집이 있는 곳엔, 다른 공간에선 들판일 수 있고, 우리 공간에서 허허벌판인 곳이, 다른 공간에선 궁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시적 세계에 침투해있늠 미시적 세계는 우리의 인식력의 제한으로 인식할 수 없을 뿐이죠.


예를 들어, 육신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고, 영체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육신 전체를 분자로 구성된 분자로 가득찬 사람 모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안에 뼈, 혈관, 내장 역시 다 분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장소에 원자로 구성된 사람 모양이 그대로 있습니다. 육신의 속에도 분자로 구성된 뼈, 혈관, 내장 안에 똑같은 형태로 원자로 구성된 뼈, 혈관, 내장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죠. 더욱 미시적이고 더욱 조밀한 형태로요. 그런데 원자로 구성된 신체는 모든 뼈, 혈관, 내장, 피부 모든 세세한 곳에서 분자의 테두리(껍질)에 감싸여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 비슷한 그림을 상상해보세요.


분자로 매꿔진 사람의 상상도에서 분자 껍질을 살짝 벗겨 버리면, 거기엔 원자로 구성된 사람이 동시에 분자배열 순서 고대로 존재하는 게 보일겁니다. 피부에서 내장까지요. 분자껍데기에 쌓인 원자물질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 지점을 보는게 아니라 인간의 전반적 신체를 상상하셔야 됩니다. 한 지점을 보면 분자 속에 원자들이 있지만, 전반 신체를 상상하시면 속속들이 분자로 된 신체 속에 속속들이 원자로 된 신체가 겹쳐 있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공간에서의 다른 지점을 말하는 안팎의 개념이 아니라, 같은 지점의 공간의 깊이의 개념입니다.


이것이 육체와 영체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존재하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비단 물질과 영 이런 2 단계가 아닙니다. 영이란 물질의 반대말도 추상적 관념도 아닌, 더욱 미시적 물질입니다.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죠. 그럼 그보다 더욱 미시적 물질, 더더욱 미시적 물질, 더더더욱 미시적 물질은 무한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각 입자 층마다 무수한 층층층(layer after layer)의 공간과 그 공간에 합당한 물질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인간의 몸엔 육체와 하나의 영체뿐이 아니라, 더욱 미시적 물질로 구성된 영체, 더더욱 미시적 물질로 구성된 영체, 무수한 층(layer)의 몸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 신체가 속속들이 분자로 된 몸에 감싸인 원자로 된 몸, 또 거기에 감싸인 미립자로 된, 또 거기에 감싸인 더욱 미립자로 된 몸...마치 나무의 나이테 처럼 겹겹이 존재하지만, 이 공간에서처럼 두 장소간의 안팎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점에서 공간의 깊이로 인한 층이 겹겹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같은 지점에 대한 공간의 깊이"

육체가 표면적이란 뜻은, 신체 바깥의 피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혈관, 뼈, 내장, 분자로 구성된 일체 육체가 다 표면적이란 뜻입니다. 분자 신체에 감싸여 있는 그 속의 원자 신체에 비해서 말이죠. 내장역시 분자로 된 내장이 속속들이 원자로 구성된 내장을 전체로 알알이 감싸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전반 육체는 그 속에 침투해 있는 영체에 대해 표면적인 신체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 무수한 신체가 겹쳐져 있고, 동시에 각 신체들이 활동하는 무수한 공간이 겹쳐져 있는 것이죠. 거기서 분자로 구성된 신체가 가장 표면적 신체이고 가장 표면적 공간에 있는 것이랍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사람이 죽었다고 그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분자입자의 껍데기가 탈락되었을 뿐이지, 분자이하의 그 미시적인 입자로 조성된 신체의 그 한 부분은 죽지 않았고 그것이 떠났을 따름이다. 마치 사람이 한 견지 옷을 벗은 것과 같이 그것은 정말로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간의 이 사람만은 오히려 소실되었다. 왜냐하면 신체를 화장하거나 혹은 흙으로 묻어놓기 마련이므로 신체는 조만간 썩고 해체되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는 그가 없어졌다. 즉 이 한 층의 입자가 소실되었다. " (이홍지 1999년 2월 21~22일, LA에서)


입자의 테두리라는 것이 물체의 경계선이되는데, 아마 이런 테두리가 없다면, 분자, 원자, 각종 미립자의 테두리를 상상도에서 다지워 버리면 텅빈 공간만이 남게 되겠죠....



더욱 미시적인 입자일 수록 거기서의 그 공간은 더욱 방대해지고 더욱 유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답니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능력도 더 유동적으로(크게)  나타날 수 있답니다. 신체를 크게 부풀릴 수도 작게 축소시킬 수도, 그 신체를 이루는 입자들이 극히 미시적이고 유동적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 신체를 이루는 미시적 입자 분포도가 널리 확산되었다가 축소되었다가 하는 모양일겁니다.

사실 공간의 존재 형식의 한 단면일 뿐이며, 공간의 전체적 존재 형식은 극히 복잡하다고 합니다.


신은 물체를 볼 때 입체적으로 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입체적이란 것이 삼차원의 입체란 뜻과는 다릅니다.
인간이 보는 것은 이차원적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두뇌 속에 스크린처럼 나타나는데,
마치 영화관 평면 스크린을 보듯이 하죠. 2차원적으로요.

공능이 생기면 입체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답니다.
아마 두뇌 속에 평면 스크린을 정면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삼차원적인 입체도가 나타나고 동시에 사방팔방의 각도에서 그 물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신이 물체를 입체적으로 본다는 뜻은 한 공간 속에서 물체를 여러 각도에서 인식한다는 것 이상입니다. 한 지점에 있는 여러 공간을 각 공간의 깊이(층 layer)마다 동시에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각 층 공간 속에서의 존재 양상을 볼 수 있는 것이겠죠.
아마 그 사람이 고층 공간에서 용의 형상이었다면, 그 사람의 그 공간 속에 용의 정보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볼 때 이 공간에서는 분자로된 사람의 형상이 인식되지만, 동시에, 겹쳐있는 미시적 공간에서 그 사람이 고층 공간에서의 본원은 원자로 구성된 용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두 공간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세세생생의 존재양상을 동시에 층층층이 겹쳐있는 각공간 속에서 동시에 인식해낼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더욱 미시적 공간으로 돌파할 수 있는가는 능력과 레벨(층차)의 차이에따라서 다릅니다.




"신이 무엇을 안배하든지 사람처럼 그렇게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안배하려고 하면 연관된 문제가 굉장히 크고 대단히 전면적이다. 사람이 세계를 봄에 있어서는 한 층의 입자[분자] 속에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사람이 본 이 세계는 바로 분자와 행성 두 가지 입자 사이에 있으며 분자로 구성된 입자 속에서 이 세계를 보고 있다. 신은 그렇지 않다. 그의 능력의 범위 내에서 우주 중의 모든[층의] 입자가 같은 하나의 문제에서 나타난 결과를 보고 있으며 그들은 입체적으로 보고 있고 전 방위적으로 문제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을 배치하여 도달하는 목적은 여러 항목이다.

뿐만 아니라, 설령 이렇다 할지언정 사람이 이 한 층 입자로 구성된 세계에서 당신더러 전면적으로 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더러 전면적으로 보게 한다면 많은 것은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믿지 말라고 하여도 사람은 다신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완전히 똑똑하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이런 한 쌍의 눈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의 눈은 비록 분자입자로 구성되었지만 무엇 때문에 분자입자로 구성된 이 범위 내의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아직도 보아내지 못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에게 또 많은 장애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李洪志, 2004년 4월 12일 뉴욕에서)

*[] 속의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임의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공간차원이 같은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간단한 일면을 설명해 봤습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어떤 미립자를 발견하면 그 미립자 한 조각만을 인식할 수 있지, 그 미립자가 존재하는 전체적인 공간을 인식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알갱이를 쪼개서 그 속의 알갱이를 쪼개고 또 알갱이를 쪼개고 알갱이 하나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답니다.

"나는 어느 한 기공사가 이러한 한마디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 그는 사람의 땀구멍 하나 속에 하나의 도시가 있고 그 속에서 기차가 달리고 자동차가 달린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듣고서 아주 놀랐고 아주 허황하다고 생각했다. 여러분 알다시피 물질은 미립자에 분자?원자?양성자가 있는데, 최후 아래로 추적하여, 만약 매 한 층에서 당신이 한 점이 아니라 이 한 층의 면을 볼 수 있어, 분자 한 층의 면, 원자 한 층의 면, 양성자 한 층의 면, 원자핵 한 층의 면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부동한 공간 중에서 존재하는 형식을 보게 된 것이다. 사람의 신체를 포함한 어떠한 물체이든 모두 우주공간의 공간층차와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통하고 있다. 우리 현대 물리학은 물질의 미립자를 연구할 때, 다만 하나의 미립자를 연구하며 그것을 분석[剖析]?분열시키고, 원자핵이 분열한 후, 다시 그것의 핵분열 후의 성분을 연구한다. 만약 이러한 계기[儀器]가 있어 능히 전개(展開)할[펼쳐 보일] 수 있음으로 해서, 그것의 이 한 층차 중에서, 모든 원자 성분 또는 분자 성분의 이 한 층차 중에서의 전체적인 체현을 본다면, 만약 이러한 광경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이 공간을 돌파하였고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진상을 보게 된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바깥공간과 대응되는데, 그것은 모두 이러한 존재형식이 있다."
<전법륜>



"문: 진수(眞修)제자는 병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부: 대륙의 많은 곳에는 사람들이 하나의 설이 형성되었다. 어떤 사람이 병을 고치지 못했을 때면 어떤 사람은 곧 그에게 당신은 빨리 가서 파룬궁(法輪功)을 배워라, 배우기만 하면 효과가 있다고 알려준다. 왜 이럴 수 있는가? 이는 파룬궁(法輪功)이 수련인의 신체에 대한 조절이 아주 빠르기 때문이다. 목적이란 조절한 후에 즉시 수련으로 진입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또 속인이 인식한 이런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연공하러 왔을 때에 병을 치료하려는 어떠한 생각도 가지지 않으면 가장 좋다. 왜냐하면 수련은 집착하지 말 것을 요구하므로 구함이 없어야만 치료될 수 있다.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집착심이므로 효과는 도리어 좋지 못하다. 나는 병을 치료하려고 온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집착이 있는 것이다. 대법을 세상에 전하는 것은 사람에게 병을 치료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제도하려는 것이다. 병을 제거해주는 것은 제도받는 자의 신체를 조절해주는 것이다. 집착을 위해 왔다면 이 병이라는 것을 잡고 놓지 않는 것과 같으므로 병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

인류의 이념(理念)과 우주의 이치를 비하면 반대로 되는 것으로 구할수록 더욱 없다. 당신이 오로지 이 마음을 내려놓을 적에 당신은 비로소 이 병을 내려놓게 된다. 수련하러 왔다면 병을 치료하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구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병이 있는 사람은 연공 중에서 병이 있는 일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 당신이 구하고자 함이 없이 당신이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당신이 연공하는 일만 생각한다면 연마할수록 더욱 좋아질 것이다. 아마 연공을 마치고 돌아간 다음 하룻밤 사이에 어떤 병이든 다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박수) 이런 현상은 중국 대륙의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으며 아주 신기하게 여겨 많은 사람이 모두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배울수록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나는 바로 이 도리를 이야기한 것이다. 즉 구하고자 함이 없어야 가장 빠르며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마 늦을 것이다. 내가 병에 대하여 보는 견해는 이러하다 ── 내가 제자에게 이러한 일을 해줄 때 역시 병을 제거한다고 말하지 않고 수련인의 번티(本體)를 정화시킨다고 했다. 정화하는 목적은 수련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이다. 병이 있는 신체를 갖고는 공이 나올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연공하러 왔으면 연공하도록 하라. 당신은 어떠한 집착도 있지 말아야 하며 또한 어떤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이 가장 좋은 것이다. 이러면 내가 당신의 신체를 정화시켜줄 수 있으며 거의 병이 없는 상태에까지 정화시켜줄 수 있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람은 당신의 수련에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아마 아직도 당신에게 좀 소업해야 할 것과 병이 있는 감각을 남겨줄 수 있다. 왜 좀 남겨두는가? 왜냐하면 어떤 수련인의 오성을 제고시켜야 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만약 한 사람의 표면신체에 모두 병이 없을 때면 바로 초상적인 것으로서 소업하는 감각마저 다 없다면 그것은 수련이 아니다. 그럼 물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러해도 아직 믿지 않겠는가? 끝까지 믿을 것이다. 때문에 어떤 개별적인 사람은 정황에 따라 수련에 쓸 고만한 일부 요소를 남겨둘 필요가 있는데 당신이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보고 있다. 목적이란 수련인으로 하여금 깨달음으로부터 걸어 나오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아닌가? (박수)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를 내가 여러분에게 똑똑히 말하겠다. 사람은 수련할 때에 여전히 일부 번거로움에 부딪힐 수 있으며 또한 난이 있을 수 있다. 이 난은 두 개 방면으로 표현되고 있다. 하나는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불편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이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원인을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는데 병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표현되는 것은 병과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은 그것이 소업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무엇이 소업인가? 사실 나는 당신의 전반 신체를 정화시키고자 한다. 사람이 속인 중으로 환생하는데 환생 중의 일생일세(一生一世), 일생일세라든가, 어떤 사람은 이십 몇 세(世)이며 어떤 사람은 삼십 몇 세(世)이며 심지어 더욱 오랜 사람도 있다. 그처럼 여러 차례 환생되므로 사람 중에서 환생하고 환생되는데 매 한 차례 모두 대량의 업을 빚게 된다. 물론 매 일세(一世) 중에 병이 있거나 고통이 있을 때에는 업을 좀 없애지만 매 한 생마다 모두 아주 많은 것으로 많이 누적되면 병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병이 있을 때면 의사를 찾아가 병을 보기 마련이다. 의사가 병을 볼 때면 다만 신체의 표면을 사람에게 처리해 준다. 사람은 병이 생김으로 인한 고통으로 역시 일부 업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다수 업력과 본질적으로 병을 조성한 근본적 원인은 다른 공간에 있으므로 그러한 것들을 의사는 고치지 못하는데 병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생세세에 모두 일부 업을 남기게 된다.

여러분은 지금 사람의 이 신체는 어떠한 모양인지를 아는가? 내가 강의할 때 본 어떤 수련생의 골수(骨髓)는 그 속에 모두 한 덩이 한 덩이의 시꺼먼 것들이다. 물론 이 공간에서는 보아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업력은 다른 공간의 체현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의 신체는 미시적인 입자로부터 표면입자에 이르기까지, 작은 데로부터 큰 데 이르기까지 한 층 한 층 입체적으로 본다면, 마치 나무의 나이테 동그라미처럼 매 한 층이 모두 깨끗하지 않다. 나는 가장 중심으로부터 당신의 신체를 정화시켜 주고 있다. 만일 당신이 수련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이러한 일을 해줄 사람이 없다. 과거 불교에서는 사람은 일세(一世)에 수련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는데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정화할 수 없으며 제고하기란 더욱 어려웠다. 만일 수련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정법이 있어야만 비로소 될 수 있었다. 당신들이 대법 중에서 수련하려고 한다면 나는 당신들의 이 신체 속에 쌓인 업력, 조성된 오염, 신체가 좋지 못하게 된 일체 원인을 모두 밀어내 주어야 한다. 단번에 당신의 표면물질 신체로부터 밀어낸다면 사람은 견뎌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밀어내는 과정 중에서 대부분은 다른 공간에서 이동해 가며 당신의 신체를 떠나서 이동하는데 다만 극히 적은 일부분만 당신의 신체 표면으로부터 밀어낸다.

왜 표면으로부터 가는가? 모두 다른 공간으로부터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한다면 하늘의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어야 하며 빚졌으면 갚아야 하는데 이것은 하늘의 이치이다. 사람이 업을 빚었다면 갚아야 하며 수련하는 사람은 특히 이러하다. 사실 나는 다만 당신더러 조금만 갚게 하고 또 당신이 갚은 것으로 친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수련하려는 이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당신더러 표면적으로 조금만 감당하라고 했지만 당신 또한 갑자기 신체가 중병을 얻은 것처럼 괴로워 견디지 못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살지 못할 것처럼 여긴다.[업력을 표면 공간의 표면 신체로 밀어내므로] 오성이 좋은 사람은 알고 있다. 나는 기왕 수련을 하고 있으니 내가 두려워 할 것이 뭔가. 나는 법도 다 들었고 나는 책을 읽었으며 나는 도리도 다 알고 있으므로 내가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바로 이처럼 소박하고 확고한 일념(一念)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금보다 더 빛난다. 그는 약도 먹지 않았고 의사한테 가보지도 않았지만 갑자기 아무 일도 다 없게 되었다. 한 차례 큰 난이 지나갔으며 한 덩이의 큰 업이 없어졌는데 더욱 큰 업은 다른 공간으로부터 밀어내었다. 사실 표면에서 나온 것은 단지 조그마한 것뿐이지만 이 업을 없애버린 것으로 치며 이것을 당신이 갚은 것으로 친다. 그러므로 수련과정 중에서 어떤 사람은 신체적으로 괴로운 정황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런 괴로움은 어떤 한 가지 병과 다 같지 않다. 때문에 이런 정황이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속에 또한 당신이 근본적으로 견정한 정도를 고험하는 것이 있으며 난 속에서 당신이 자신을 연공인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고 있으며 이때에 당신이 또 이 법을 믿는지 믿지 않는가를 보고 있다. 부처수련이란 바로 아주 엄숙한 일이다.

쓰젠파(世間法) 이외의 수련은 신체가 고도로 정화된 것이며 또 나한체(羅漢體)라고도 부른다. 그 때의 신체는 이미 고에너지물질의 신체로 승화되었으며 속인의 조그마한 세포마저도 다 없게 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 속인과 같지만 또 같지 않다. 이때에는 더 이상 병업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간의 병은 이미 당신의 이 고에너지물질로 구성된 신체를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쓰젠파(世間法)를 벗어나면 이미 모든 병업을 다 밀어낸 것이다. 쓰젠파(世間法) 수련에서는 신체가 불편함이 나타날 수 있거나 혹은 어떤 놀라움은 있으나 위험은 없는 일에 부딪힐 수 있다. 당시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지만 다른 사람은 겁이 나서 야단일 것인데 이런 일이 나타날 수 있다. 대법의 진수제자들이 그처럼 많은 사람이 수련하여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오직 당신이 수련하기만 하면 나는 당신을 보호해 준다. 물론 당신이 수련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당신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수련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다른 사람을 끌고 와서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하지 말라. 속인의 일을 나는 지금 관여하지 않으며 당신들도 법을 파괴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그가 만일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자신이 한 일체를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그가 어떤 일에 부딪혔든지 간에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다 해답해주었다."

(이홍지, 1996년 10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