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생명은 모두가 하나의 마당을 갖고 있는데, 이 마당이 바로 이 생명의 세력 범위이다. 이 마당에 들어온 생명은 이 마당의 규율에 복종해야 하며, 들어온 후의 생명은 이 마당의 에너지를 증가하고 이 마당의 범위를 확대한다.

생명이 마당(장: field 에너지장, 전자기장, 시공간장의 장)을 통제한다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공간(空間)·시간(時間)·피로(疲勞)·상상(想像)·수면(睡眠)·고통(痛苦)·게으름(懶怠)·분노(憤怒)·힘겨움(累) 등등이 사람의 생명을 통제함을 본다면, 이것들은 다 자기자신의 범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거기에 있지 않다면, 그것의 통제하에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그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것을 예로 들면, 우리가 두려워하면 우리는 두려움의 마당의 통제하에 있게 되며, 두려움은 자기의 규율에 좇아 우리를 배치한다. 동시에 우리가 두려워함으로써 그것을 자양시키고 힘을 충실케 해주며 그것의 마당의 범위와 힘을 증가하여 준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면, 우리는 이 두려움이라는 생명의 통제 밖에 있게 된다.

전형적인 예를 하나 들자. 분노(憤怒) 이것이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상 속에 이런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사람이 분노할 때 이것의 통제를 받아 화난 김에 아주 이지적이지 못한 행위가 나올 수 있다. 사후에 이 사람은 매우 후회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기를 억제하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분노"에게 단단히 통제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면 사상중에 있는 이러한 것을 없애야 되는 바, 사상중에 분노가 없다면 외부의 생명이 어떻게 우리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마치 차에 강철을 가득 담고 자장(磁場) 속을 지나가게 되면 모두 흡인해 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차에 있는 강철을 모두 던지면 자장이 흡인해 갈 작용이 없게 된다.

사람을 통제하는 생명은 모두가 자기의 특징이 있는 것으로, 분노(憤怒)와 원한(仇恨)을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생명은 사람을 지배하여 사람을 때리고 죽이게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려면 먼저 열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이 자선(慈善)과 상화(祥和)한 상태에서는 사람을 때리려 해도 손을 쳐들지 못한다. 자선(慈善) 이 생명은 사람을 때린다는 개념이 없으므로 그것은 또한 사람을 때리지 않는다. 사이트에서 한 수련생이 쓴 한 편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자선(慈善)한 한 노년의 대법제자가 악한 경찰을 보자 사람을 때리려던 이 경찰의 손이 스스로 내려졌다. 바로 이 대법제자의 자선(慈善)한 마당이 악한 경찰의 사악한 마당을 와해시킨 것으로, 이 악한 경찰에게 흉신(凶神)의 통제가 없으면 바로 사람을 때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사례는 또 한가지 문제를 분명히 설명하는데, 그것은 바로 저급 생명은 고급 생명의 제약을 받으며 심지어 고급생명에 의해 용해되며 해체된다. 자비(慈悲)는 가히 모든 것을 와해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일체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 그것은 더욱 미시적이기 때문에 힘이 더욱 크다. 그것은 우주특성의 체현이다.

자선(慈善)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의 경지에 있게 되면 태도가 매우 상화롭고 우호적이며,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살펴 이해해 주며, 사람으로 하여금 내심 감격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바, 이것이 자선(慈善) 이 생명의 특징이다. 육친정(親情)은 이것과는 다르다. 육친정 이 생명마당에도 다른 사람을 위하는 내용이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사심(私心)의 요소가 있다. 신변에 있는 사람에 대한 친근함과 좀 사이가 먼 사람에 대한 냉담함이 있으므로 이것은 그리 좋지가 못하다. 자비(慈悲)의 경지는 박대(博大)하고 무사(無私)한 것으로,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잊고서(忘我) 그 품으로 용해시켜 끌어가는 힘이 있다.

사람이 말하고 일할 때, 모두 당시의 하나의 상태가 있는데 곧 출발점이다. 사람이 모종의 상태에서 말하거나 일할 때에, 이 상태의 생명마당 (혹 경지)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다. 비하건대 사람이 자선(慈善) 상태에서 말할 때 다른 사람이 매우 온화한 감을 느끼고 매우 당신을 접근하고 싶어하며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을 설복시키려는 상태에서 말할 때, 다른 사람은 일종 압력을 느낄 수 있고 무엇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감을 느낄 수 있어서, 일종 자기를 보호하려는 심리가 나타난다. 또 과시심을 갖고서 말할 때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은 바로 한 편의 이기심(自私)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거리낌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과시 이 생명이 갖고 있는 물질마당이 바로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사람은 아주 잘 위장했지만 그러나 그 마당이 거기에 있으므로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언어라도, 부동한 상태 하에서 곧 부동한 경지 마당에서는 내포가 반드시 다르며, 효과도 다르다. 언어는 그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포에 있으며, 말하는 사람의 경지에 있다. 사부님의 <<전법륜>>은 완전히 구어(口語)의 형식으로 쓰여졌지만 우주대법의 비할 바 없이 높은 내포를 표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로는 어떤 사람이 비록 큰 도리는 그럴 듯하게 설하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수련생의 가장 순수하고 소박한 "들어보세요"라는 한 마디의 말이 깊이깊이 우리들의 내심을 울려준다. 나는 어떤 때 힘을 다하여 말하거나 문장을 쓸 때 나 자신의 상태를 조절하는데, 되도록 나 자신의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비(慈悲)와 상화(祥和)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나아가 내 생명의 무사(無私)한 본원으로써 일을 하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아직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꼭 노력하여 하려고 한다.

사람을 통제하고 있는 어떤 생명도 자신의 시간마당(時間場)을 갖고 있는 바, 사람이 부동한 상태 하에 있으면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느리거나 빠름이 다른 것이다. 사람이 초조(焦慮)라는 이 생명의 마당 중에서의 시간 흐름은 매우 느리며, 기쁨(高興)이라는 이 생명의 마당 중에서의 시간 흐름은 매우 빠르다.

인류의 허다한 허위적 가짜이치(假理)는 처음 시작에는 그렇게 큰 세력범위 곧 마당의 범위가 없었는데, 사람이 점차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무형 중에서 이 물질 마당의 밀도와 세력범위를 증가한 것이다. 가짜이치 세력범위 내에서 이것은 그의 이념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으로서 그렇다면 그의 마당 범위 내에서는 그가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비록 틀린 것일지라도 그것이 당신에게 하나의 가상을 배치하여 아주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처럼 여기게 한다. 가짜이치 에너지의 증가는 그것을 믿는 생명에 대하여 도리어 제약작용을 하는데 그의 궤도에 따라 가게 한다. 이런 가짜이치는 오늘의 인류에 대해 끼친 상해가 매우 크다. 예를 들면 무신론(無神論), 진화론(進化論), "팔이 다리를 이기지 못한다", "명철보신(明哲保身)", "좋은 사람은 명이 길지 못하다", "사람이 선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말이 선하면 사람이 올라탄다"와 같은 등등이다. 우리가 속인(자기자신 까지)의 나쁘게 된 관념을 돌려세우는 중에서 이러한 것을 점차적으로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조성한 물질마당은 우리의 정법(正法)중의 장애가 된다.

일정한 층차로부터 말한다면, 생명(生命)의 속박은 사유(思惟)의 속박이다. 그러면 우리가 저급생명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사상중에서 거기에 있지 말아야 하고 사상중에 남아 있는 저급 파생물질을 제거하며, 이런 개념의 속박을 타파함으로써 사상중에 이러한 물질의 개념이 없어야 한다. 신체는 세포로 구성되었다. 세포의 사상과 대뇌의 사상은 거의 서로 같은 바, 우리 세포의 사상이 이런 속박을 돌파하면 우리의 신체도 모두 돌파한 것으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더욱 높은 경지에서 본다면, 사유(思惟)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 마찬가지로 마당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통제함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의 국한이 있는 것이다. 신(神)으로 말한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또한 사유의 통제를 돌파해야 한다.

대법제자는 저급한 물질마당의 속박이 없어야 비로소 진정한 해방을 얻는 것이며, 공능은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공능인가>>에서 "근본적인 원인은 우주의 최고층으로부터 우주의 최저층에 이르기까지, 더욱 아래의 생명과 존재하고 있는 경지(境界)의 일체가 포괄하고 있는 물질의 비중은 더욱 크고, 입자 과립은 더욱 크며, 생명의 부하 중력(負重)은 더욱 크고, 더욱 아래의 생명일수록 본능(功能)이 물질자체에 의하여 억제됨이 더욱 많고 더욱 무거워 더욱 역할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이것이 곧 층차가 낮을수록 능력이 더욱 작아지는 원인을 조성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생명은 물질마당을 벗어난 것이 더욱 많을수록, 경계가 더욱 높으며 능력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정념(正念)을 발해낼 때, 회의(懷疑)·두려움(害 )·시도(試試看)·과시(顯示)·환희(歡喜)·원한(仇恨) 등등 이러한 저급물질의 작용이 많을 때에 우리들의 생각에 무슨 힘이 있겠는가? 일념의 차이에 천양지판의 구별이 있는 바, 순정(純淨)한 정념이라야 비로소 위력이 무궁할 수 있다.

대법제자로서 모든 파생물질의 속박이 없이 시간·공간 등등의 일체 천차만별의 개념의 통제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생명의 본래(本來)로서, 있지 않은 바가 없고 시종(始終)이 없으며, 일체 시공(時空) 등 물질의 본래를 육성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그 한층 경지의 본래(本來)이며 움직이지 않는 물이다(물체가 떨어져도 파동도 일지 않을 완전히 정적인 물, 우주의 가장 본원적 물질).

나의 마음이 이 한 경지를 감촉하자, 그 경지의 위대함을 느꼈다. 일체가 모두 내 손안에 있는 것으로서, 그런 소위 속박(束縛)과 통제(控制)는 다만 우리 본래생명(本來生命)의 파생이며, 우리가 다시 만들 수 있고 고칠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들이 다시는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변이(變異)는 오히려 원래에도 모두 나 자신의 몸에 있으며, 나는 일체에 가득차 있고 일체는 나의 속에 있으므로, 마(魔)를 제거하는 것은 또한 나 자신의 몸속의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경지에 있으면 모든 것은 변화됨이 이처럼 간단하다.……

대법은 우주의 모든 것의 본래를 만들었으므로, 우리는 다만 대법에 동화되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하게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대법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비로소 진정으로 일체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게 하는 여의자재(自在如意)이다.

법공부 중에서의 개인 체득이므로 참고로만 제공한다.



<정견망> 2001년 11월 29일







대법제자

<정견망>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된 영문인가를 모르고 있으

며 또한 사람의 감각, 이념(理念), 사상, 성격 등등 이 모두가 어디에

서 오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실 사람의 모든 사상과 행위는 각종 생명물

질들이 지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우매함과 무지로 하여 그것들

을 자신의 본성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하면, 그 무슨 "자연"이나 "천생

(天生)"으로 부르면서 이러한 생명들에 의해서 꼭두각시처럼 조롱 당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러한 생명들이 모든

것을 하고 있기에, 사실 사람들은 어떠한 재간도 없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무지 속에서 그것들 속에 깊이 파묻혀 스스로 빠져 나오기가 매

우 힘들게 된다.

대법은 대법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초월한 지혜를 가져다주며 우리들이

높은 곳에 서서 사람들의 모든 것을 내려다본다면 한눈으로 알아 볼 수

있게 된다. 아래에 내가 사람의 생명행위와 사람을 지배하는 몇 가지 생

명에 대한 이해를 말하고자 한다.

사람의 생명과정 중에서 제일 명확한 지배적 힘의 작용을 갖고 있는

일종의 생명을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작용은 마치도 한 폭의

그림묶음처럼 한 가지 사물을 펼치도록 하는데,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

금 한번에 다 보지 못하게 하며 천천히 펼치도록 한다. 그리하여 사람

은 일출일락, 춘하추동, 생노병사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은 우

리들로 하여금 어떠한 일을 하던지 모두 하나의 과정을 망라하게 하지

만, 부처님의 단원세계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생명(더욱 고층의 시

간이 있다)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보든지 한눈으로 볼 수 있으며 한 폭

의 그림묶음이 본래부터 펼쳐져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일생은 동시에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생명을 "결과"라고 부른다. 그

는 언제나 시간 단락의 제일 마감에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은 그 "결

과"가 자신의 노력을 거쳐서 얻은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결과"는 사

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단지 시간에 의해 제일 마지막에

놓여졌던 것뿐이다. "현재"와 "미래" 역시 한 몸이지만 "시간"은 그들

을 갈라놓았다. "시간"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사람도 가상 속에 미혹되

어 미래를 동경하고 집착하게 되며 "결과"에 대한 기다림과 바램으로 집

착하게 되기에 미래를 위하여 분투하게 된다. 우리 대법제자들의 경지

는 인류환경 속의 "시간"을 초월하여 있기에 우리는 미래의 "하늘과 함

께 경축하는"데 대한 집착이 없다. 우리는 "엄동(嚴冬)"의 정법과정 속

에 있으며 이미 "봄날"속에 있다. 그러므로 법이 언제 바로 잡혀질 것인

가에 대한 어떤 동수들의 기대 또한 사람의 집착으로서 삼계 내의 "시

간"에게 조정(control)당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이런 생명은 높은 층차까지 관통되어 있는데 인간세상에

서의 표현은 각종 생명들에게 하나의 범위, 하나의 구역을 구분 지어 주

는 것으로 나타내기에, 여기로부터 거리의 개념과 사람들이 말하는 소

위 큰 것과 작은 것의 개념이 파생되어 나오게 된다. 만약 "공간"의 제

약을 초탈한다면 생명은 일체에 충만 될 수 있으며 모여서는 형상을 이

룰 수 있고 흩어져서는 물체로 될 수 있으며 크고 작은 것, 멀고 가까

운 것의 개념이 없게 된다. 대법제자들은 자신의 층차 이하의 공간의 제

약을 받지 않아도 되는데, 물론 여기에는 사람의 공간이나 혹은 다른 어

떤 공간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포함된다. 때문에 정념을 내보낼 때 공

(功)은 삼계 내의 모든 곳에, 지어는 모든 간격사이까지 충만되고 흩어

질 수 있으며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고 누락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든

사악한 세력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작디작은 감옥 또한 공간이 대법제

자에 대한 제한이자 박해이기에 대법제자들은 인간의 "공간"도 바로 잡

으려고 하고 있다. 어떠한 "공간"이든지 대법제자들의 정법을 제한하지

못하며 삼계내의 어떠한 "공간"도 대법제자들을 제한하고 박해할 자격

이 없으며, 대법제자들에게는 감옥의 개념이란 없는 것이다. "공간"의

변이와 제약에 대한 승인을 던져버리고 그런 감옥을 사악한 이들에게 남

겨두어야 한다.

"고생"이란 생명은 사람들의 업을 제거할 수 있으며 사람들더러 진 빚

을 갚도록 한다. 또한 사람들을 경고하고 권유시키기도 하는데 그의 주

요한 표현은 사람들에게 재난, 질병 등을 가져다줌으로서 사람들로 하여

금 고통 속에서 업을 갚도록 하게 한다. 오늘날 "고생"도 변이되어 있으

며 곧 대법제자들에게 고난을 가져다줌으로서 정법을 저해하고 있

다. "고생"으로 대법제자들의 의지를 훼멸하고 대법제자들에게 각종 마

난을 만들고 있으며 악인에 대해서 많이는 방종 시키고 있다. 우리의 마

음속에 "고생"스럽다는 감각이 들 때면 바로 이 생명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마땅히 정념을 내보내어 즉시로 그것들을 소멸함으로서

그것들이 어떠한 파괴작용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고생"과 늘 함께 있는 한가지 생명을 "두려움"이라고 하는데 이 생명

은 아주 저급적이다. 그가 정법에서 일으키는 파괴작용은 오히려 아주

나쁜데 "상상"과 "고생"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으면서 사람으로 하여

금 이것도 "두려워"하게 하고 저것도 "두려워"하게 한다. "고생"과 "두

려움" 모두가 변이되어 더욱 높은 사악한 세력의 지배하에 그것들은 더

욱더 선량함과 정의를 향하여 덮쳐들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인간세상

에서도 충분히 체현되고 있다.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악인들보다 담

이 작은 것만 같고 그 선량한 토끼는 언제나 "공포와 두려움"속에서 생

활하는 것만 같은 것을 나는 보았다. 정법제자들은 더욱 높은 신이며 우

리는 더는 개인수련이 아니다. 우리는 일체의 바르지 못한 저급적인 생

명을 바로잡을 책임과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고생"과 "두려움"에

대한 약한 의지를 없애버려야 하며 그것들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온 물

건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들은 모두 외부에서 온 생명들이

며 우리들의 허락과 접수에 의해서 작용할 뿐이다. 나에게 "두려운"생각

이 들기만 하면 나는 즉시로 이 생명을 소멸하거나 사악한자들에게 쳐

내보낸다. 지어 나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동수들 몸에 있는 "두려

움"을 악인들에게 쳐 내보내는데 사실 그곳이야말로 "두려움"이 마땅히

작용해야 할 장소이다. "고생"도 마찬가지이다. 절대로 그가 정법의 노

정에서 소란 피움을 허용하지 않으며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마땅히

그런 사악한 것들이어야 한다. 악인들이 대법제자들을 전기로 지질 때,

그 "전기"는 마땅히 악인의 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악인들이 감옥에

들어가야 하며 대법제자들에게 강제로 얹혀 놓은 모든 박해는 마땅히 악

인들 자신들이 받아야 할 것이다. "고생"을 철저히 바로잡아야 하며 장

래의 "고생"은 마땅히 바로잡혀진 생명일 것이다.

"의심"이란 생명이 우리들에 대한 간섭작용도 매우 크다. 우리가 어

떤 때 무엇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가를 모르고 있는데, 사실 이

런 생명의 올가미에 든 것이다. 고대의 사람들은 성실하며 신을 믿고 있

으므로 그들은 신을 만날 수 있었다. 서방 천국의 화상(畵像)과 동방 벽화

의 불국(佛國)세계는 모두 고대 사람들이 보아낸 결과로서 그 무슨 "상

상"이 아니다. 우리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신심을 가지

지 못하게 됨은 사실 모두가 이 "의심"이라는 생명의 저해를 받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우리 원유의 물건이 아니며 또한 사람을 조절하는 외

래에서 온 생명이다. 이 생명은 속인사회에서 현재 아주 방대해졌으며

대법에 대한 사람들의 정신(正信)을 가로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의 공능 사용을 가로막고 있다. "의심"은 마땅히 깨끗이 제거해야 할 행

열에 놓여져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마땅히 전력으로 이 생명의 저해

를 제거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의 더욱 강대한 신통을 내보내어 사악을

제거하고 법을 바로 잡아야 한다.

"상상"이란 생명이 오늘날 일으키는 작용도 아주 나쁘다. "상상"자체

가 사실은 사람을 미혹하는 물건으로 우주 진실의 반영이 아니며 일종

허황한 추측과 가상에 속한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에 의해 크게 표방되

어 마치 각종 창조는 모두 그것의 결과인 듯 하지만,

사실은 그것들의 작용이 아니라 다른 생명이 영적으로

참여한 결과이며, "상상"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마치도

이런 물건들은 상상하여 얻어낸 것이라는 가상을 가져다주고

있다. "상상"은 사람들더러 허튼 생각을 하게 하는데 사실은 모두 존재

하지 않는 가상으로 그 재료와 원료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접촉한 것들로

서 머리 속에 집어넣은 가짜 이치와 기억인데, "상상"이란 생명이 이런

물건들을 마음대로 배열하고 조합해낸 것이다. "상상"이 오늘날 정법에

대한 저해는 아주 크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잡히거나, 얻어맞거나, 형

을 언도 받거나, 사악이 어떻게 창궐하다 등등을 "상상"해내게 하며 사

람들이 어떻게 이해하지 못하며, 진상을 똑똑히 밝히는 일은 어떻게 힘

들며 지어는 동수들 사이의 모순까지도 "상상"해내게 함으로서 대법에

혼란을 빚어내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상상"이라

는 것을 제거해야 하며 우리들이 대법 속에서 닦아낸 가장 바른 일체로

일체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 잡아야 한다. 또한 신의 정념으로 제일 바

른 미래를 창조해내야지 가짜 이치 속에서 미래를 "상상"해내는 것이 아

니다.

"상상"과 유대관계를 갖고 있는 "논리적"인 것도 변이된 생명으로서

매우 저급적이다. 현대 과학은 그것을 매우 숭배하고 있지만 인류의 모

든 중대한 발명은 모두 "영감"이 가져다 준 것으로 다른 고층 생명이 부

여한 것임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논리적"인 것은 "합리"적인 해석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한다. "논리적"인 것의 범

위는 협애하며 "1+1=2"인 것만 알고 있지 1 더하기 1은 2가 되지 않는

사실은 오히려 너무나 많다. "논리적"인 것에 의해 "추리"해낸 결과는

많은 것들이 진실하지 못하며 그것들이 일단 "논리적"이지 못하면 "우

연"이라는 구실을 만들어 낸다. 대법제자들은 이런 "논리적"인 함정 속

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모종의 현상으로부터 박해받는 결과

를 "추리"해낸다면 우리자체는 여전히 "논리적"인 가짜 이치 속에 떨어

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짜 이치 속의 생명은 곧 당신을 도와서 그

것을 실현시키며 따라서 우리들로 하여금 퇴폐 되어버린 가짜 이치 속

에 빠져버리게 된다. 인류의 행위 속의 "필연"적인 결과는 사실 더욱 높

은 신의 의지로서, "논리적"인 것과 "상상"도 무엇 때문에 그들이 "상

상"해내지 못했던 것과 "논리적"이지 못했던 사실들이 발생하는가를 상

상해낼 수 없는데,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 저급적인 것이기에 필연적인

결과이다.

(역자 주: 논리란 이치에 따라 논함을 말하는데, 낮은 층차의 이치가

높은 층차에선 맞지 않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치는

낮은 층차에선 맞는 것으로 낮은 층차에서 그 이치에 따라 논리적으로

논함은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것이 높은 층차로의 승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거나, 높은 층차에서 맞지 않음을 발견할 때, 그것이

잘못됬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함"은 위대한 생명이며 그는 인류에게 우주의 진실을 가져다준

다. 그러므로, 고대의 성인과 지혜로운 자들은 모두 조용함 속에서 지혜

와 진리를 얻어내며 그들의 지혜는 현대 속인들이 비교할 엄두도 못 낸

다는 점을 우리들은 보아낼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사람들은 "조용함"의

위대한 작용을 인식하였으므로 온 사회가 모두 그러한 "조용함"의 상태

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靜而不思, 玄妙可

見"(≪홍음≫ ≪道中≫), "精心學法"(경문≪走向圓滿≫)이라고 하셨거

늘 나의 이해로는 "조용함"의 내포는 아주 큰 것이다. "조용함"과 대립

되는 "상상"은 현대인들이 떠받들어낸 것으로서 사실은 진리를 배척하

는 물건이며 그가 생각하여 낸 것은 모두 가짜 이치로서 사람을 간섭하

는 외래 생명들이다.

"명(名)"과 "이(利)"란 이 두 가지 생명은 모두 "정"의 범주에 속한

다. 이 두 가지 생명은 사람들에게 허황하고 가식적인 쾌감을 가져다주

는 능력을 갖고있다고 여겼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의 덕(德)으로서 바꾸어오며 덕이 없으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그 무슨 큰 관리, 대 과학자와 같

은 "命(운명)"이 있더라도 만약 사람들이 받들지 않고 존경하지 않으며 부러워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긴다면 당신은 그 무슨 쾌락을 말

할 수 있겠는가? 큰 부자라 해도 만약 바깥세계와의 비교와 다른 사람들

의 부러움이 없다면 그에게는 쾌락이란 말을 논할 여지가 없게 되며, 더

욱이 만약에 덕이 없어서 큰 병으로 한바탕 앓는다면 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향수 할 수 없게 된다. 생명의 진정한 쾌락은 내심 깊은 곳에

서 오며 온몸에 충만된 희열로서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본원

이 갖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명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

리"가 가져오는 것은 아주 표면적인 쾌락으로서 이 두 가지 생명이 사람

들에게 주는 미혹성은 아주 크다.

"사(私)"가 낡은 우주에서 높은 층차까지 관통되어 있지만 그의 능력

도 매우 한정되어 있다. "사"가 갖고있는 범위가 작기 때문에 다른 생명

과 일정하게 격리되어 있으며 오직 작은 구역만 갖고 있기에 "무사(無

私)"의 박대와 광활함을 갖고 있지 못한다. 만약 생명이 "사욕"중에 있

지 않는다면 "無私"의 弘大한 품에 안기게 되며 생명에게 더욱 아름다

운 것을 가져다주게 된다. "無私"는 우주 진선인 특성에 더욱 근접되어

있다.

사람이 인식하는 많은 선천적인 감각은 사실 기타 다른 생명들이 작용

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신맛, 단맛, 씀, 매움, 짠맛"감각과 남녀간의

애정, 사모 등등은 모두 사람들이 구비한 것이다. 수련하는 사람들이 이

런 집착에서 뛰어나와서 본다면 사람들이 이런 생명들의 지배 하에 꽤

나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은 이런 것들을 그들 자

신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 배후 생명들의 조정함을 알 수

있겠는가? 어떤 동수가 어느 수련과정 중에서 한줌의 소금을 먹었지만

짠 감각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는 곧 "짠"생명의 조정함이 없었던 원인이다.

......

대법입자들은 사람을 초월하는 神으로서 이러한 저급적 생명들의 제약

을 더는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그러한 저급적인 파생물질의 속박

에서 벗어날 때면 곧 가장 순정한 본원인 "진, 선, 인"속에 있게 되는

데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진정한 자신이다.

사람의 실질은 곧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서 선택의 여지만 있을 뿐이

다. 우주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에게 가져다 줄 뿐 가져가는 것은 없

다. "修在自己, 功在師父"라 우리 자신이 또 무엇을 수련해낼 수 있겠는

가? 사부님이 없다면 우린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오직 선

을 향하고 되돌아가려는 마음에 대한 선택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사부님

께서 해주는 것이다.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준 일체에 대하여 萬分 감격스럽다!

되돌아가는 길의 한 단락 과정 중에서 깨달은 옅은 개인적 견해로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동수들의 많은 지적 바란다.


정견망 10/23/2001 11:45:00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