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안 하오펑쥔의 탈출 수기




【독점보도】하오펑쥔(郝鳳軍):나는 왜 중국에서 탈출하였는가 (1)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 하오펑쥔의 공안(police)증명서



【대기원 6월 8일 소식】(하오펑쥔 구술, 대기원 기자 리화 정리)

하오펑쥔(郝鳳軍, 32)은 톈진시(天津市) 국내 안전보위국 및 610사무실 관리로서 1급 경사이다. 그는 파룬궁 및 기타 종교 신앙단체에 대한 박해에 더 이상 참여하기를 원치 않아, 2005년 2월 톈진에서 호주로 피신했으며 정치망명을 신청하였다.

하오펑쥔은 최근에 대기원 사설, <<9평 공산당>>과 천융린 영사 사건에 고무되어 대중들에게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아래는 그가 왜 중국에서 탈출하였는가에 대한 심경을 구술한 글이다.

1. 나의 성장 경력과 가정에 대하여

나는 중국 "문화대혁명" 후기에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건축 일을 하였고 어머니는 가정 주부이며 위로는 형이 한 명 있다. 계급 투쟁의 시대에는 아버지 혼자 돈을 벌어 온 가족을 먹여 살렸으며 그 당시에는 또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

다행히 나의 아버지는 끝없는 사랑과 아름다운 미래를 염두에 두고 나를 교육하셨고 나로 하여금 수많은 인생의 의미, 사람으로서의 준칙 그리고 곤란을 이겨내는 용기와 생활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알게 하셨다. 아버지는 아이의 성품에 대한 교육을 아주 중시하셨고 우리더러 성실하고, 정직하며, 겸손하며, 사람을 선하게 대해야 하는 동시에 곤란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활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성장과정 속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나는 계속 열심히 공부하였고 성적도 아주 좋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여러 직업을 동경 하였었다. 어릴 때 나는 경찰이 되어 사회와 시민을 위해 악을 제거하고 범죄와 싸우고 싶었다. 나 또한 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였다. 나는 1985년 초등학교 졸업 후 남개(南開)중고등학교에 합격했고 이 학교는 시 전체에서 유명한 5개의 중고등학교 중 한 곳 이였고, 나는 문과를 선택했다.

1989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 사이에 세계를 놀라게 한 "6.4"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베이징 소식이 나의 모교에 전해오면서 우리는 베이징의 형세와 그 대학생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우리를 이끌고 거리로 나가 대학생들을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때 내가 시위대에서 받은 전단지는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전단지에서는 중앙 각 급 지도자들의 탐오, 부패의 추악한 행각을 폭로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 덩푸팡(鄧樸芳)은 장애인연맹 의장이고, 덩즈팡(鄧質芳)은 북방공사의 총 이사 (군사장비 장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등등 헤아릴 수 없었다. TV에서 나는 그 당시의 리펑(李鵬) 총리와 대학생의 대화를 보았는데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는 확실히 그 당시 사회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나의 인생관은 그다지 명랑하지 않았지만 사회에 대한 부패, 추악, 빈부격차, 관청 브로커 세력과 사회도덕, 관습에 대해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나는 그 대학생들 속에서 우리 고등학교의 선배들을 보았고 그들은 국가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마침 나의 마음의 소리를 전달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나는 내심으로 민주를 요구하고 탐관오리를 반대하며 대학생의 정의로운 행동을 동정하는 정서가 일어났다. 후에 중앙정부는 총으로 전반 사건을 제압하였는데 이는 정말로 우리가 정치 서적에서 배운 그 한 마디 "총에서 권력이 나온다"란 말과 맞물렸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당뮌?무릇 "6.4"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은 전부 이 사건의 기록과 연관하여, 졸업해도 국가에서 직업을 분배해 주지도 않고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엔 또 누구도 감히 이 졸업생들을 고용하지 못하였고 그들은 오로지 스스로 막일을 하며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2. 꿈과 현실의 충돌

1991년 나는 톈진시 남개대학 법학계에 입학하였고 1994년 졸업 후 나는 톈진시 공안국에 차출되어 갔다. 일년간 사상교육과 법률교육, 그리고 일년 동안 군사화 교육 및 복종교육을 주입 받아 많은 대학생들의 머리 속에는 "공안기관은 인민 민주독재의 국가폭력기구로서 당을 위한 공구"라고 쇄뇌되었다. 이 기간 우리는 복종과 무조건 따라 하는 것(맹종)을 배웠다. 1994년 말, 나는 경찰훈련기지를 졸업하였고, 톈진시 공안국 평화분국의 폭력 방지 대대에 배치되어 2년간 일하였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사회를 위해 악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또 일부 살인, 강도, 마약 밀수하는 범죄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조화롭지 못한 일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그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나는 "부려화(富麗華 )오락센터"에서 한 사람이 칼에 찔렸다는 신고를 받았다. 우리가 "부려화오락센터"에 출동 했을 때, 다친 사람은 칼에 4군데나 찔려 피를 흘리며 대청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에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보안요원 6명이 서 있었다. 그때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 6명의 보안요원이 나더러 이 피해자를 경찰국에 보내 구류하라고 하였다. 나는 막대한 치욕과 곤혹을 느꼈다. 후에 나의 대장 자오소충(趙紹忠)도 현장에 도착하였고 나에게 그 피해자를 데리고 공안병원에 가서 치료한 후 구류하라고 명령하였다.

나중에 나는 "부려화오락센터"의 배경은 원래 톈진시의 상업위원 겸 평화구 구위원회 서기 류잉(劉英)의 여동생 류리(劉莉)가 개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아주 엄하게 기생집을 열지 못하도록 하지만 "부려화오락센터"는 드러내놓고 기생집을 열고 있었다. 그 시기의 시위원회 서기 가오더잔(高德占)도 이곳에 들락거렸다 (나중에 "부려화오락센터"에서 기생질하다 들켜 시위원회 서기에서 해임되어 베이징으로 보내졌다.) 베이징의 일부 고급간부 그리고 중앙 수뇌부의 자식들도 늘 이 곳을 찾곤 하였다. 나는 그를 구류하고 싶지 않아 자오소충 대장더러 다른 사람이 이 사건을 맡게 해달라고 하였다. 후에 이 피해자는 정말로 15일간 구류되었는데 죄명은 공공질서를 어지럽혔다는 것이다.

사실 이 피해자는 "부려화오락센터"에 가서 그의 딸을 찾았다. 그의 딸은 대학생이고 주말마다 항상 집에 돌아왔었는데 거의 반년 동안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딸의 동창생이 그에게 알려주기를, 딸이 매일 수업이 끝나면 "부려화오락센터"에 가서 술을 팔고 손님 접대를 하고 있으니 그 곳에 가서 딸을 찾으라고 하였다. 이 사건은 나에게는 나주 큰 충격이었고 나의 앞길에 대해 갈등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경찰이 되는 것을 일치 시키기 어려웠다.

3. 어쩔 수 없이 파룬궁에 대한 정치 투쟁에 휩쓸리다

1999년 세계를 놀라게 한 "4.25"사건이 톈진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그리고 나와 인민경찰은 이 사건을 직접 겪은 증인이다.

4월초, 우리는 상급으로부터 "파룬궁의 동향을 비밀리에 주시하라"라는 통지를 받았다.

1999년 4월 11일, 베이징의 남대문 도시 톈진에서는 교육학원이 청년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잡지가 있다. 그때 이 잡지사는 파룬궁과 그의 창시인을 공격하는 문장을 실었고 작가 허쭤슈(何柞庥)는 중국과학원 부속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도 소수의 파룬궁을 반대하고 기공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부류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기공 중의 모든 초상적 현상, 예를 들면 귀로 글씨를 알아내고 사람이 공중에서 비행하고 약물 없이 건강이 회복되며, 다른 공간의 생명을 감지하는 등등을 일률로 반 과학, 미신, 사기극이라고 여겼다.

그는 파룬궁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을 초래하게 하고 또 파룬궁이 마치 의화단처럼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암시하였다. 허쭤슈의 글은 많은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생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고 또 이 때문에 일부 수생들은 톈진시 교육학원과 기타 관련기구에 가서 실제 사정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모두 시 기관(市局)에서 명령을 받았는 바, 전부 현장에 가서 교통정리를 하는 동시에 소식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파룬궁 수련생을 포위하라고 하였다. 4월 23일 300여 명의 경찰들은 이 지역으로 출동하여 45명의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 체포하였다. 일부 군중들은 직접 시 정부를 찾아 갔는데, 시 정부의 책임자는 이 문제를 그들이 해결 할 수 없으니 베이징에 가라고 하였다. 수련생들은 25일 베이징에 가서 더 고위층의 정부 당국에 청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때 나도 임무를 집행하느라고 현장에 도착하였는데 눈 앞의 정경은 나를 아주 막연하게 만들었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거기에 모인 파룬궁 수련생들은 손에 흉기를 들고 교육학원에 돌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부 평범한 나이 많은 시민들이고 실직자, 병원에 갈 돈이 없는 연로한 노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정경은 얼마 지속되지 못하였다. 2,3일간의 대치를 거쳐 경찰은 장소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 몸에 병이 있든 없든 모두 똑 같이 끌어냈고 강제로 해산시켰다. 주동 인물은 각 파출소에 보내 조사하고 기록하였다. 후에 나는 알았는데, 무릇 파룬궁 수련생으로 기록된 사람들은 나중에 그 사람들이 어떠 하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따로 분류하여 기록해 넣는다. 이는 당신의 여생과 당신의 모든 가족성원 등에 영향을 주며 또한 일체 복지 대우에도 영향을 준다.

나는 또 그날 톈진시 교육학원 주위 빌딩 위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여 그 자리에 있던 5천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의 모습을 전부 기록해 놓은 것을 알았다.

1999년 4월 25일 정부는 자료 수집과 탄압 전에 준비해야 할 일을 강화하였다. 이때 공안국의 직능부서와 정부부서, 국가안전국 중 종교 사무부서가 모두 행동하였다. 7월경 상급은 7월 18일 파룬궁을 금지한다는 소식을 전달하며 또 이 소식이 중앙TV에 방송될 것이라고 통지하였다. 그러나 후에 고위층의 의견이 엇갈려 방송되지 않았다.

7월 20일 전에 각 기관 부문은 각 계층 별로 회의를 열고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생각을 하나로 통일 시켰다. 회의에서 총서기(장쩌민)의 파룬궁에 대한 몇가지 논술을 전달하였는데 파룬궁 금지를 더는 기다릴 수 없으며, 그 근거는 필요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당이 망하고 나라가 망한다 따위의 말들이었다. 7월 20일 중앙 언론은 끝내 파룬궁을 금지하는 뉴스를 방송하였고 회사들은 전체 인원이 시청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파룬궁을 주시하게 되었다.

7월 20일 밤 11시 집에 있던 나는 호출되어 급히 파출소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튿날 아침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청원할 것이므로, 상급에서는 우리에게 밤새 명령 대기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새벽 5시 전에 우리는 근무지점에 도착하였는데 시위원회의 정문 앞이었다. 시위원회, 시정부에서 우리 전체 공안국의 경찰들은 두 파트로 나눠졌다. 일부분은 경찰 복을 입고 정면적으로 집행하며, 다른 일부분은 사복경찰로 기회를 봐서 청원자 사이에 침투하여 반대로 작용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상급은 행동기율과 비밀을 엄수하고 파룬궁과의 경계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새벽 5시 우리는 각자 일터에 들어갔다. 8시에 많은 수련생들이 시위원회와 시정부 앞에 2줄로 서서 청원하였는데 왜 파룬궁을 금지하는가 하고 물었다.

시위원회 민원 부서의 책임자가 나오더니, 시 공안국 현장지휘 책임자 저우강산(周嵐山, 시국상위: 정치보위 일을 주로 맡음)에게 대화하지 말고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먼저 흩어지도록 설득하고, 가지 않는 자에 대해 강제로 내쫓으라고 알려주었다. 이때 저우강산 총지휘자는 사람들을 해산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는 명령을 집행하지 않고 시위의 마당에 들어가 강제로 끌려온 청원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생, 현실, 사회, 건강 방면의 많은 문제를 이야기하였다. 이는 처음으로 파룬궁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다. 그날 출동한 몇 십 대의 대형버스는 파룬궁 수련생을 끌어가 해산시켰으며 주요 역할을 한 사람들을 처벌 했다.

“7.20”이후는 전체 시에서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한편 비밀리에 조사하고 기록하는 과정이었다. 상부에서는 각 파출소에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책자를 만들어 보고하라고 하였다(중점적으로 4.25, 7.20, 7.22의 참여자를 수집).그리고 파룬궁 수련생에게 앞으로 연공 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요구하였으며 보증서를 쓰지 않으면 무조건 당국에서 연 ‘학습반’에 보내고 치안구류 처리를 하라고 하였다.

무릇 기록된 파룬궁 수련생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모두 진학, 취업, 자녀의 군대 배치, 사회복지 등 여러 방면에서 겹겹으로 권리를 박탈 당하였는데 그 고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일부 회사에서는 파룬궁의 사람이기만 하면 모두 퇴직을 강요하였다.

“7.20”이후. 건국 50주년 대 경축 시기에 베이징의 안전과 톈진시의 안정을 확보하려고 파룬궁 인원에 대해 대대적인 수색을 하였고 이 행동은 주로 톈진시 공안국 제1처 (정치보위처)에서 행동방안을 만들었다. 국경일 전에 전국 각 지역의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스스로 차를 임대하여 베이징에 청원하러 왔고 베이징에서는 대규모로 송환하였다.

그 당시 파룬궁 수련생을 붙잡으면 거의 진실한 성명과 지역을 말하지 않아 중앙610 사무실은 아주 골치가 아팠다. 그리하여 공안국 610사무실에 명령하여 사람인원에 따라 구분하라고 하였다. 이때 톈진시 공안국에 수백 명 파룬궁 수련생들이 보내졌고 시국1처에서 구분한 후 다시 각 구, 국에서 구분하면 파출소에 보내 심사를 받았다.

각 파출소에서는 사람을 분국에 보내 수련생을 데려가게 하였는데 마치 짐승을 데려가는 것 같았다. 어느 파출소로 보내지게 되면 그 파출소에서는 밧줄로 파룬궁 수련생의 목을 감아 차에 올린 후 차에 엎드려 앉게 하였다. 우리 파출소에는 여성 3명이 왔고 모두 4,50세 이었다. 그녀들 세 명에 대해 파출소의 형사 사건 담당 경찰팀(刑警組)이 가서 심문하였다. 이 십여 일 동안 나는 출근하여 사람의 가슴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나는 가서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소장은 형사 경찰팀의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나중에 형사 경찰 종사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룬궁 수련생에게 이름과 주소를 말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2000년 구정, 톈진시 시위시정부(市委市政府)는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회사(또는 기관), 큰 길, 공안국, 이 3방면에서 세뇌하는 소그룹을 만들도록 규정 하였다. 정부에서는 소위 "학습반"을 만들고 파룬궁 수련생을 강제로 한 곳에 모아 세뇌하였으며 또 일정한 학습비용을 받았는데 그 당시 영향이 아주 나빴다. 나와 일부 정부인원은 이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파룬궁을 금지하는 것이 인력, 물력, 재력을 소모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바로 몸을 건강히 하고 선을 행하는데 왜 그들이 연공하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가. (계속)



독점보도】하오펑쥔(郝鳳軍):나는 왜 중국에서 탈출하였는가 (2)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대기원 6월8일 소식】(하오펑쥔 구술, 대기원 기자 리화 정리)

하오펑쥔(郝鳳軍, 32)은 톈진시(天津市) 국내 안전보위국 및 610사무실 관리이며 1급 경사이다. 그는 파룬궁 및 기타 종교 신앙단체에 대한 박해에 더 이상 참여하기를 원치 않아, 2005년 2월 톈진에서 호주로 피신했으며 정치망명을 신청하였다.

하오펑쥔은 최근에 대기원 사설, <<9평 공산당>>과 천융린 영사 사건에 고무되어 대중들에게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아래는 그가 왜 중국에서 탈출했는가에 대한 심경을 구술한 글이다.

4. 국내 안전보위국(국보국) 요원에 차출 되어, 많은 신앙인들을 접촉  

2000년 10월 중공 중앙의 정치안정 강화 캠페인으로 각 지역의 공안국 정보처(톈진시공안국 제1처)를 2급국(부국급에 상당함)으로 승격시켰고 현재의 국내 안전보위국을 원래 정보처와 610사무실의 업무를 합쳤다. 우스운 것은 비록 그것이 시국(市局 , 톈진시 공안국)의 회사이지만 아래층에서 위로 옮겨 오겠다고 신청하는 사람이 오히려 몇몇이 안되었다.

이때 비극이 발생하였다. 시국(市局)은 각 지역국의 전체 인원 명단을 컴퓨터로 뽑게 하였고 컴퓨터에 의해 무작위로 선택되는 사람은 반드시 시국(市局) 국보국에 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퇴직으로 처리하였다. 불행한 것은 사람마다 가기 싫어한 회사에 내가 뽑혀 가게 된 것이다.

생계 때문에 나는 새로 건설된 이 톈진시 공안국 국내 안전보위국에 가서 일하게 되었다. 2005년 2월 중국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나는 파룬궁과 중국정부에 의해 사교로 지정된 각종 교파에 대한 일을 주관하였다.

각 성시 공안국 국내 안전보위국은 국가와 사회 안정을 수호하기 위하여 새로 성립된 회사이고 이 때문에 중앙과 공안부가 각 지역의 국내 안전부위국에 투자한 경비가 아주 넉넉 하였다. 하여 이런 국장정치위원회, 더욱이 610사무실(국보국 반 사교처)일을 나눠 관리하는 자오웨쩡(趙月增) 부국장은 항상 공무 명의로 활동경비를 긁어 모아 부자가 되었다.

1999년 이전 자오웨쩡은 원래 톈진시공안국 사무실에서 부주임(부처급)이었는데 나중에 그는 선배와 후배의 인맥관계를 이용하여 공안부 상층에서 활동하면서 인맥을 구축하고 공산당에 죽을 때까지 "충성"하겠다고 보증하여 톈진시공안국 국내 안전보위국 부국장 겸 610사무실주임(정처급)의 자리로 "영광스러운 승진"을 하였다.

2001년 10월3일 톈진시공안국 네트워크 수사처(偵查處)에서는 파룬궁수련생이 인터넷 안전방호를 우회하여 해외의 "명혜망"에 등록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들은 이 정황을 국보국 610사무실의 경찰들에게 통보하였다.

국보국 610사무실 1대(파룬궁 현안부대)는 이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을 맏기로 하였다. 그들은 톈진시공안국 제1처(기술 수사처, 원래 제14처)에 협조를 구하여 도청, 추적, 비밀수색, 비밀체포를 감행하였다. 그 해 연말, 이 "103"사건은 공안부에 의해 부급(部級)서에서 관리 감독하는 사건으로 분류되게 되었다.

5. 모녀가 비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깊은 구렁텅이 속에 빠지는 것 같았다

2002년 초, "103"사건으로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하루는 79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붙잡혔고, 다른 두 사람은 도망갔다(그 중 한 명은 쉬쯔아오(徐子傲)라는 여자 아이인데 겨우 13세, 그녀의 모친 쑨티(孫緹) 역시 이 사건에서 체포되어 13살난 아이는 이렇게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

2002년 2월의 어느 날 저녁 나는 회사의 전화를 받고 다른 한 명의 여자 인민경찰(民警)과 함께 난카이(南開)분국구치소(天津市 南開區 二緯路)에 도착하였다. 파룬궁 수련생 쑨티가 심문실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는데 눈은 이미 맞아서 거의 맞붙어 있었다. 그때 그녀를 심문한 경찰은 국보국 610사무실 2대의 대장 무루이리(穆瑞利)이며 그 당시 그의 핏자국이 있는 나선형 무늬 쇠 곤봉을 손에 들고 있었다 (직경은 1.5센치). 심문 책상 위에는 고압 전기몽둥이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간 후 무루이리(穆瑞利)를 나가도록 하였으며 파룬궁 수련생 쑨티는 단번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윗 옷을 열어 우리에게 보이려고 하였으며 나는 그녀가 여자 이기에 내가 나간 후 하라고 하였다. 쑨티는 나에게 나가지 말라고 하였다. 나에게는 등을 보여 주었는데, 그녀가 몸을 돌려 윗 옷을 열자 나는 놀라서 멍해졌다. 그녀의 뒷등은 거의 피부색이 없어지고 전부 검붉은 색이었고, 20센치에 달하는 두 줄의 상처자국으로 선혈이 천천히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참 지나서 국보국 부국장 겸 610사무실 주임 자오웨쩡(趙月增)도 왔다. 그러나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이 일을 절대 누설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고, 나와 그 여자 인민경찰(民警)에게 그녀를 구치소의 의무실에 데리고 가 약을 발라주라고 하였다.

한 달이 넘도록 우리는 매일 쑨티에게 약을 발라주었고 쑨티와 접촉하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그녀가 자기 아이의 행방을 묻는 것을 들었다. 또한 우리 파룬궁이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데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었다. 그 당시 나의 마음은 모두 찢어져 나가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들이 모두 좋은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더욱 걱정하는 것은 그녀의 아이 이었다. 13살난 아이가 부모가 곁에 있지 못하고 또 친척집에도 못가고 (쉬쯔아오의 모든 친척들이 전부 감시 당하였다) 아이가 밖에서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잠을 잘까? 나는 내가 제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나는 내심으로 무척 불안하고 조급하였으며 눈물이 났다.

이 모녀에 관한 불행한 이야기는 명혜망에 아래와 같이 보도되었다.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1/12/3/208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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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어린 여자아이와 어머니를 긴급 구원할 것을 호소"

【명혜망 2001년 12월 3일】쉬쯔아오,15살 , 집은 톈진시 다강구 성리가 첸광리 18동 1단원 3호(天津市 大港區 勝利街 前 光 里 18 棟 1 單元3門). 금년 5월 1일 현지 파출소와 가도에서 그녀 혼자만을 위해 여는 세뇌반을 제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났다. 2001년 11월 8일 톈안먼 성루에서 붙잡혔고 핑구현에서 불법으로 수감된 후 거의 5일간 단식하여 11월 3일 석방되었다. 명혜망은 전에 이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그녀의 어머니 쑨티는 수련한 이유로 여러차례 다강구 경찰의 괴롭힘을 당하였고 집을 수색당하고 두번 집에서 체포 되었으며 구치소에서 두차례 나왔다. 톈진시가 그녀를 불법으로 수배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진상을 알리며 세인을 구도하는 것을 견지하였다. 쉬쯔아오는 어머니 쑨티와 11월 21일 저녁 톈진시의 큰 길에서 사복경찰에게 발각되어 납치되었다. 12월 2일 이미 불법으로 11일 구류되었는데 이 며칠 동안 어린 여자아이와 어머니는 어떠한 괴롭힘을 당하였는지 모른다. 동시에 그녀들이 임대한 집안의 컴퓨터와 집은 몰수되었다.

붙잡히기 전 모녀 두 사람은 위험을 느꼈지만 그녀들은 후퇴하지 않고 여전히 진상을 알림으로써 법에서 사부님의 배치를 단호하게 믿었다. 쑨티와 쉬쯔아오는 납치되기 전 만약 붙잡히면 이전에 불법으로 수감될 때처럼 단식으로 항의할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현재 쑨티와 딸은 불법으로 톈진시공안국에 수감되었고 직접적인 책임자는 톈진시공안국 610사무실이다. 세계의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행동하여 중국 대륙의 어린 제자와 이 아이의 어머니를 구원하고 끝없이 진행되는 이번 박해를 다 함께 없앨 것을 호소한다.

                                                         *************

대략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난 후의 어느날 오전 시위 부서기 겸 시위정법위 서기 쑹핑쑨(宋平順, 원래 톈진시공안국 국장)이 국보국에 와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해 몇몇 지도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 파룬궁을 대하는 것은 한 가지 아주 어려운 정치임무이므로 피 흘리고 살인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2, 비밀공작을 잘 하여 비밀이 새어나가 국제적인 영향이 조성되는 것을 방지하라.
3, 각 급의 기율검사 감찰부서는 파룬궁 인원에게 나타난 사망과 상해에 대한 조사에 개입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일체는 큰 국면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톈진시 쐉커우시 노교소가 파룬궁 수련생을 구타하여 불구로 만든 소식이 해외 "명혜망"에 실린 예와 조성된 국제적 영향을 예로 들었다.

"톈진시 대법제자 쑨티는 여러차례 박해를 받아 생사가 불명"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2/4/29/29261.html

【명혜망 2002년 4 월 29일】대법제자 쑨티는 2001년 11월 21일 톈진시 허핑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어 다강구치소에 보내졌다. 심문 기간 경찰은 연속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다 후에 톈진시 공안국에서 사람을 요구하였을 때 쑨티가 사악에게 협조하지 않아 시국의 사람은 발로 배를 걷어차고 주머니 칼로 목을 때리고 내리쳤으며 또한 등 뒤로 수갑을 채움으로써 그녀는 한쪽 손의 손가락이 며칠 동안 감각이 없었다.

경찰은 네가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시국에는 많은 형구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너를 잡기 위해 우리는 최신식 감시설비를 사용하였고 또 너의 거처 주위에 5백명을 심어 놓았다고 말했다. 쑨티는 매번 아침에 심문하러 갔다가 야밤에야 돌아왔다. 비록 이렇다 할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 당시 또 한 사람이 배우고 연마하겠다고 하였다. 나중에 시국의 사람들은 그녀를 시국에 보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쑨티는 곧 유서를 작성하여 자신은 절대 자살하지 않음을 증명하였는데 만약 위험이 나타나면 반드시 사악한 무리들의 박해로 조성된 것이라고 하였다.(아래에 유서를 첨부함)

그후 쑨티는 난카이분국에 보내졌고 내막을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난카이분국에서 쑨티는 한동안 단식으로 항의하고 또 음식물주입과 등 뒤로 수갑을 채우는 괴롭힘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심문하는 사람들에게 홍법하여, 시국의 경찰은 처음에 태도가 아주 좋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좋아졌는데 대법제자의 정념의 작용을 증명하였다. 그녀를 접촉하는 매 사람들이 모두 그녀가 아주 부드럽고 선량하다고 여겼다. 이어서 쑨티는 또 톈진시 제1구치소에 보내졌고 지금까지 수감되어 있는 바 어떠한 결론, 소식도 없다.

다강구 610의 류훙치(劉弘琦)의 말에 의하면 쑨티가 10년 판결을 받고 또 터무니없는 죄명까지 씌워졌는데 지금까지 가족에게 통보되지 않았다고 한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단서를 제공하기 바란다. 5달동안의 불법 수감에서 어떠한 소식도 없었는데 이상의 자료도 우여곡절 끝에 얻은 것이다.그러나 쑨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으며 이 글을 본 대법제자들은 다 함께 정념을 내보내어 톈진시의 사악한 요소를 제거하기 바란다.

"유서"

아오(그녀 딸의 아명):

시국의 사람이 나를 데려가려고 하며 고문하겠다고 한다. 만약 이 기간에 나에게서 나타난 모든 위험(사망을 포함하여) 은 반드시 그들이 조성한 것이며 나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 바, 반드시 그들의 사악한 행위를 폭로하라.

대법제자: 쑨티 2001년 12월

(영문판: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2/5/2/21588.html)


두 모녀가 겪은 일과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참상은 늘 나의 꿈 속에서 나타나 밤 새도록 잠을 설치곤 하였다. 더욱이 중국의 앞날에 대해 그리고 경찰로서의 나의 앞날에 대해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나는 쑨티가 7-10년형 판결을 받았고 아직까지 생사가 불투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속)



독점보도】하오펑쥔(郝鳳軍):나는 왜 중국에서 탈출하였는가 (3)  


대기원시보 기자 webmaster@epochtimes.co.kr



【대기원 6월9일 소식】(하오펑쥔 구술, 대기원 기자 리화 정리)

하오펑쥔(郝鳳軍, 32)은 톈진시(天津市) 국내 안전보위국 및 610사무실 관리이며 1급 경사이다. 그는 파룬궁 및 기타 종교 신앙단체에 대한 박해에 더 이상 참여하기를 원치 않아,  2005년 2월 톈진에서 호주로 피신했으며 정치망명을 신청하였다.

하오펑쥔은 최근에 대기원 사설, <<9평 공산당>>과 천융린 영사 사건에 고무되어 대중들에게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하였다. 아래는 그가 왜 중국에서 탈출했는가에 대한 심경을 구술한 글이다.

6. 중앙TV를 향해 진실한 말을 하다 탄압을 당하다

2004년 구정 직후 톈진시공안국 국보국은 한가지 특수임무를 지시 받고 610사무실 1대 스허(石何) 대장이 4,5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허베이성 스자쫭시(河北省石家莊市)에 사건 처리하러 갔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보니 심문하는 방에는 수갑이 채워진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나중에 나는 그가 허베이성의 부청급 간부인 징잔이(景占義)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후에 중앙TV의 기자가 국보국에 와서 징잔이를 취재하여 국제사회에 부청급 간부가 어떻게 회개하는가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날 인터뷰는 국보국의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내가 그날 문 밖에서 국보국 부국장 자오웨쩡(趙月增)이 징잔이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반드시 그들이 제공한 대사에 따라 말하면 그에게 감형시켜주고 그렇지 않으면 나라 배반한 죄 한가지를 더하여 무기 징역 혹은 비밀 총살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가련한 노인은 위협 하에서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TV 인터뷰를 하였고 어찌할 수 없이 파룬궁을 비판하였다. 후에 그는 유기징역 7년 판결을 받았다.

중앙TV가 인터뷰하던 날 인터뷰 기자는 인터뷰실에서 나오면서 마침 나와 마주쳤고 그녀는 직접 마이크를 나의 입가에 대며 이 일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녀는 편집할 소재를 찾았을 것인데 그녀는 실망하였다. 나는 "이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라고 대답하였다. 이 기자는 듣고서 멍해졌고 나는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누가 알았으랴, 이 대답이 나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가져올 줄이야. 이 일이 발생한 지 이틀 후 부국장 자오웨쩡은 나를 찾았고 나에게 그날 기자가 인터뷰할 때 말한 "거짓말"이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 당시 “당신은 왜 징잔이를 위협하였는갚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였다. 그는 책상을 내리치면서 일어서더니 내가 반역을 한다(造反)고 말했다. 그런 환경에서는 나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임을 잘 알고 있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철저하게 자아비판서를 쓰고 나서 다시 일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구금되었다. 그들은 나를 톈진시공안국 7처 구치소(안에는 시국(市局)의 감금실(禁閉室)이 있는데 전문적으로 경찰을 가둔다)에 가두었고, 이 독방에 감금된 그날부터 내 마음은 철저히 절망에 빠졌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독방에 갇힌 것이고 또 유일한 한번이었기 때문이었다. 10평짜리 작은 방 이였는데 창문은 없고 높고 높은 지붕에는 24시간 꺼지지 않는 백열등 하나가 있었다. 방안의 구석에는 변기통 하나가 놓여 있어 계속 악취를 풍겼다. 중국 북방 톈진의 2월은 아주 추웠고, 이 독방에는 또 보온할 수 있는 장비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거의 한 달 동안 생활하였다. 내가 이 독방을 나갈 때에 나의 두 손과 두 귀는 이미 동상을 입어, 손은 부어서 찐빵 같았고 두 귀는 얼어서 끊임없이 고름이 나왔다.

이 30일 동안 나는 가족에게 전화 한 통도 못하였는데 나는 그들에 의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거의 붕괴될 지경까지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글은 한자도 쓰지 않았다. 끝내 어느 날 아무런 이유 없이, 어리둥절하게 풀려났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들이 조용히 처리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이전에 파룬궁 수련생 쑨티가 구타 당하는 등등의 많은 추악한 일들을 말해낼 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독방에서 나온 후 나는 경비실에 배치되었고 신문과 편지를 보내는 일과 일부 잡다한 일을 하였으며 출국하기 전까지 계속 이런 일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약혼녀도 이 일 때문에 아주 심하게 정신적 타격을 받았다. 그들이 나를 독방에 가둘 때 약혼녀와 나의 어머니, 형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도 나를 찾지 못하였고 그들은 그녀에게 내가 타 지역에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몸과 마음이 산산히 부수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을 뿐더러 또 그들 자신의 경찰 가족마저 속이는데 그들이 못할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늘의 이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7. 철창에서 벗어나 민주자유 세계로 향하다

중국에서 경찰은 출국할 수 없고 출국하려면 비밀보호기한(국보부서에서 퇴직한 후 5년이 걸림)이 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국가를 배반한 것으로 처리한다. 이리하여 나의 여권을 만드는 것이 큰 어려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회사를 놀라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친구를 찾아 호적상의 회사를 다른 회사로 옮겼고 이렇게 2003년 1월 외무처(外管處)에 가서 여권을 가질 수 있었다.

2005년 2월 나는 끝내 호주 관광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비자가 나온 후 나는 출국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고, 2월14일 아침 9시에 베이징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날 비행기로 중국선전(深圳) 공항을 거쳐 저녁 6시 30분경에 홍콩에 도착했다.

나는 선전 출입국 안전검사에서 걸릴 것을 아주 두려워했었는데, 그것은 내가 지닌 MP3에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탄압한 문서가 대량으로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만약 7시 30분까지 내가 집에 전화를 걸지 않으면 내가 안전검사에서 걸렸고 사고가 났다는 것을 뜻한다고 알렸다.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나는 약혼자를 데리고 홍콩에서 호주로 가는 항공편에 올랐다. 금년 2월15일 아침 아름다운, 자유 민주 국가의 땅을 밟게 되었다.

지금 회사에서는 내가 이미 실종된 것을 알고 나의 가족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내게 회사로 돌아오라고 한다. 그리고 돌아오면 무엇이든지 잘 처리된다고 약속하는데 가장 악독한 것은 그들이 나의 약혼자의 집에 가서도 똑같이 소동을 부리고 협박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극히 악랄한 수단으로 우리를 대처할 것이다. 내가 회사에 사직서를 써도 그들을 받지 않고 나를 제적하였다. 그들은 또 나와 약혼자의 가족을 위협하며 나더러 "해외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며"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 때문에 마음 쓸일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가족들도 나에게 집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유는 전화가 도청되기 때문이고, 약혼자 집의 전화도 도청되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형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고 형은 집 상황은 말하지 않고 다만 나에게 평안하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격고 있는 곤란과 위험을 알고 있다. 나는 연로하신 어머니와 나의 온 가족, 그리고 약혼자의 온 가족에게 이러한 고통을 가져다 준 것으로, 마음 속으로는 밤낮으로 불안하였다. 오늘날 그들은 가족을 잃은 것과 같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8.《9평》과 천융린 사건으로 감화를 받아,  정의로운 일을 하기로 결정

나는 중국정부가 나와 나의 가족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호주에 온 후 특히 "9평 공산당"을 본 후 이 책이 나를 깊이 깊이 감동시켰음?느꼈다. 그 속에 씌여진 일부 문장과 사례를 국내에서 보지 못하였지만 평범한 중국 대중들은 이 문장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말한 것이 중국의 일부 어두운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폭로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9평을 본 후 나는 걸어 나와 진실을 밝힐 것을 생각하였다.

며칠 전 멜버른의 "중공에서 탈퇴하고 6,4를 잊지 말자"란 공중 집회에서 나는 주 호주 중국 영사 천융린이 공개적으로 일어나 중공이 해외로 침투한 사실을 폭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고무를 받았다. 나는 천융린이 중공의 외교관으로써 이런 선택을 한데 대하여 그에게 자긍심과 자랑을 느꼈다. 그래서 일어나 실제 행동으로 천융린을 성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나는, 중국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거짓말은 정부에서 나온 것이며 "뉴스"는 정부 혼자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 한 막, 한 막의 피에 젖은 자살과 살인의 장면들은 세상 사람들의 두뇌와 두 눈을 미혹시켜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공산당은 히틀러의 "거짓말이 클수록 사람들은 더욱 믿으며 음모 계략은 달성 될 수 없는데 그것은 달성되면 음모 계략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란 논리를 명령으로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속고 피해를 받는 것은 진실한 상황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또 나의 인생의 좌표를 찾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는 정의에 대한 추구가 내가 영원히 추구해야 할 인생 목표라고 이미 인정하였다.

나의 가족과 약혼자의 가족이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준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구해주었던 마음씨 좋은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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