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기를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먹거리를 위해서 장을 보러 가지요.
먹거리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삶과 우주에서 생명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은 장보러 가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커피가 떨어져서 커피를 사러 마트에 갔습니다.
그런데 다양하게 진열된 먹거리들을 보는 순간,
그것들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하지요.
아, 맞아. 저것도 필요하지?
맞아, 저것도 떨어졌어.
새로 나왔나? 한번 사볼까?

그렇게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부피가 커져버린 장바구니를 푸는 순간,
그제야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작 사야할 커피는 사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마트 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모든 것에서 벌어지는 일이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성이라는 용어가
일반 정신이나 철학과
구별짓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약속하에,
영성이라는 말을 여기서도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영성이라는 것을 하늘 한 쪽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크게 뭉쳐있는 구름처럼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흩어지는 구름의 속성을 간과한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존 종교의 입장이기도 하죠.
우리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제 흩어질 때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비추는 곳을 가리지 않는 햇빛처럼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시는 비처럼,
구석구석 비밀스럽게 향으로 채우는 향 연기처럼,
존재하는 모든 곳곳에 가득 퍼져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의 영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출 것 없이, 적실 것 없이, 채울 것 없이, 퍼질 것 없이,
모두가 영성의 상태인데, 해야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는 물음은 '왜 사는가?'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왜 삽니까?
저는 장보러 다니기 위해 삽니다.
먹거리들을 구하고 그것을 먹고 나누고 살기 위해서 말이지요.

만약에 제가 먹지 않고도 살 수 있고,
무엇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있다고 해도,
저는 사람들로 화연한 마트에 가서
장바구니를 들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것이 제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장보러 다니는 것보다
더욱 근사한 삶의 의미를 지니고 계신지요?
만약에 있다면, 설마 장보러 다니는 저의 삶보다
더욱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먹거리들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마트에는 정말 엄청난... 다양한 먹거리들이 진열돼 있죠.
이것이 바로, 오늘날 쏟아지고 있는
영성에 관한 메시지들입니다.
양파를 닮은 것이든 소시지를 닮은 것이든,
그것들은 사람들의 다양성과 제각기 다른 취향을 위해
구색을 갖춰놓은 것입니다.

아니, 다시 말해,
"사람들의 다양성과 제각기 다른 취향을 위해
  구색을 갖춰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마트는 장보러 가는 사람의 냉장고가 아니지요.
마트는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냉장고 입니다.
그것이 왜 혼란스럽니까?

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트에 가서 너무나 혼란하여,
사야할 것은 못 찾고 귀가해버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마트는 바로 영성의 백화점이자 창고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먹거리나 도구들이
넘쳐나지요.
기존 종교가 이 마트에서 한 것은,

커피를 사러 갔다가,
정작 커피는 못 사고, 다른 것들에 취해
부피만 커진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일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커피를 사지 못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경우입니다.

여기서 커피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종교가 된 까닭은,
아니, 협소한, 편견과 편애에 집중돼 있는
그러한 사랑이 된 이유는,
다양하게 진열돼 있는 먹거리들에
본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먹거리들이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본심을 잊어버리는 일이
과연 그 먹거리들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양한 그 영적 메시지들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혹, 배달한 사람의 잘못이라 여기는 것은 아닐테지요?

--------------- *

여러분들은 진보에 대해서 아직도
선형적, 직선적 시간관념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사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익숙한 것이고, 그렇게 좀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직선이든 곡선이든 기형이든 아예 선이 없든,
모든 관념은 진리의 발현인 것이며,
진리를 설명하지 못하는 관념과
표현, 도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진리란 것이, 특정한 경지와
특정한 깨달음의 상태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글로도 얼마든지 진리를 표현할 수 있고,
땅따먹기로도 진리는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이지만, 같은 것은 아니랍니다.
우리가 하나의 커다란 신념에서 미끄러져 나와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은,
다양성을 통해 하나를 배워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먹거리들이 같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가려내기 위해
진열돼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다양성을 위해 구색을 갖추고
우리 앞에 진열돼 있는 메시지들과
외계의 존재들과 지구의 이웃들은
'참진리 선발대회'에 출전해 있는
선수들이 아닌 것입니다.

단순히 선호를 지니십시오.
끌리는 것을 선택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께 좋은 먹거리 이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먹을 수 없는 다른 먹거리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어떤 이에게 그것은 매우 필요하고 고마운
먹거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에겐 선호가 없지만,
신적 표현과 신적 체험에는 선호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하게 잘 이루어지려면
본심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 마인드에 신적이라는 '조화의 바탕'을
의식적으로 제거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커피를 잊지 마세요.
장을 보러 갈 때, 수첩에 커피를 적어가십시오.

다시 시간관념으로 돌아가서,
오늘날, 시간에 대해서 직선이 아닌,
동시적, 순환적 인식을 지니고 관찰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정신적 진보의 과제이며,
이 시대의 가르침이지요.

16세기가 21세기 보다 진보되지 못한
낡은 시대는 아니며, 시대마다 시대의 과제가 있고,
그것이 해결이 됐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진보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대에는 시대에 맞게 가르침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가르침이 지금 시대 보다 못하다는
관점이야말로 윈시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겠지요.

기존 종교가 우리가 하려는 것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는 일이
기존 종교를 낡고 원시적인 것이라 무시해 버리고,
그것을 갈아치우고 와해시킨다는 폭력적 영적 인식을
사용하게 된다면 말이지요.

여러분은 처음부터 기존 종교가 잘못되었다고
평을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서 교회나 성당, 절에 처음 갔던
기억이 나나요?

저는 교회에 처음 갔을 때,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이의 순수한 관점에서 그것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옥 얘기가 무섭고, 천국은 동경되었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새벽기도에도 잘 참석했고,
목사님의 설교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 교회 안에서
제가 어린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어른이 된 제 자신이 나타나서는,
손을 잡아 끌면서,

"그건 잘못된 것이야. 너는 죄인이 아니야. 천국이나
  지옥, 심판은 전부 거짓이야! 이것은 전부 없어져야해!
  이 종교는 실패한 종교라고!"

라고 큰 소리로 제게 소리를 친다면,
저는 겁에 질리고, 마음에는 커다란 상처가 생길 것입니다.

그 어른인 저는, 본심을 잊고서
그렇게 해 버린 것이지요.
그 어른인 제가 새로운 종교관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결과는 그 자신,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기존 종교의 역사적 수순을 밟을 것입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하는 일이 주로 이렇습니다.
다른 사상과 다른 종교관, 다른 영적 이해를 가진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자기에게 맞는 먹거리들을 사고 있고,
자신의 환경에 맞는 먹거리들을 고르고 있을 뿐인데요.
상처주는 일이 어째서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매'인가요? 이것은 폭력을 선호하는 사람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특정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트로트라면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약간 꺼려하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당신에게,

"트로트는 유치해! 천박하다고! 나랑 클래식을 듣자!"

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클래식과 더욱 멀어지면 멀어졌지
그것을 같이 좋아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고집할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그 사람이 듣게 하려면,
그 사람의 것을 인정해주고, 같이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자신의 것에 귀를 기울여 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전쟁을 증오하는 사람은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

기존 종교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증오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더욱 더 사랑하고,
그것을 존중해주며, 그것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그 존재성, 창조적 표현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심입니다.
우리가 장보러 가서 잊어버렸던 커피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의 사건들을 만들고 있으며
편애와 두려움을 앞세운 종교를 탄생시키고 있으며
가난과 굶주림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벌어진 사건도 미래에 벌어질 사건도 아니지요.
지금 그것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과거로 인식되는 종교들도 우리와 같은 종교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도 선함과 사랑을 생각했으며,
신적 자아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본심을 잊었던 것 중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회를 강요로 만든 일입니다.

신과 우주와 창조에 대한 참다운 자기 이해,
자기 나름의 영적 성장 과정을 종교가 무시해 버린 것이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을 믿어라.

사람들은 시간의 기회를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믿기 바빴고,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지요.
천국과 지옥이 발명됐고,
강요에 의해 착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건 역시, 신적 표현이자 체험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존중되고 인정받아야 하는 역사적 가치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사건에서
지금 여기로 끌어와야 하는 것은,

기회에 관한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사실에 근거하여 스승들입니다.

가르침을 전하는 자는
모든 것이 창조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 기회라는 것이 창조의 마음이며,
사랑의 원리라는 것을 잊지 않지요.

여러분에게 히틀러와 같은 제자가 있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그는 어둠과 폭력적 성향, 정복과 지배의 의욕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사랑을 아는 여러분은 답답해 할 지도 모르지요.
그게 아닌데, 그건 아닌데... 말이야...

어떤 사람은 차라리 '지옥'이라는 관념을 만들어서
그에게 협박을 하는 것이 전쟁과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두려움의 가르침을 권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용하여 지배를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가르친다면, 두려움만을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폭력을 막기 위해 폭력적 관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의 폭력적 관념과 공명하는 일입니다.
공명은 증폭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기존 종교가 한 일입니다.

가르침이란 기회입니다.
기회야말로 사랑이며 창조주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은 스승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십시오.
사랑으로 가르치고 따뜻함으로 그를 대하십시오.

하지만 답답해 하지 마세요.
그를 밝게 바라보고,
그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여러분의 선형적 시간관념에서는 그가 과연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알 날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시간의 동시적 움직임 속에서 그는 이미
깨달음의 기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답답해함이나 그를 부정하는 것은
그의 기회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시간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우주에게 기회를 주세요.
이것이 가르침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서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낡은 종교관을 붙들고 지옥을 두려워하며 천국을 동경하는 사람이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지만,

언젠가, 우주의 어느 한 별, 한 나라, 한 마을, 한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사먹다가
아! 하고 깨달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본심을 잊지않는 자의 마인드이며,
자신이 신적 자이의 성스러운 표현이며,
우주와 시간을 이해하고,
신의 체험과 동시에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자의 마인드입니다.

히틀러가 천국에 갔음을 이해하라는 것은
모두가 천국에 존재하고 있음을 이해하라는 것이며,
모두에게 동등한 창조적인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무엇으로 강요하거나
단지 이 세상의 표면적인 삶의 원리와 이해로
존재를 무시하거나 반대하거나 부정하거나 하는 일은
자신의 영적 마인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틀러라는 상징적 존재는 증오심의 결과입니다.
그를 증오하여 그를 부정한다면 또다른 히틀러가 탄생할 것입니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증오심입니다.
이것이 한번 그룹적으로 치유가 되기 위해선
많은 육체적 희생과 자연의 손실이 뒤따릅니다.
전쟁도 이 중의 하나이지요.

무한의 바탕 속에서 존재를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커피일 뿐입니다.

-------------------------- *

마트에 구색을 갖춰놓은 진열장을 생각하세요.
우리가 인식하는 외계 존재들은
그 마트에 우리와 함께 진열되어 살고 있습니다.
진열돼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다른 비유를 선택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에 진열장은 지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들은 외계인이란 없다, 다 우리의 이웃이다라는
영성을 풍부하게 하는 좋은 이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여전히 문 밖으로 내 모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뭐 우리가 별개의 존재라면 그들도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들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자식을 낳아 본 사람은 알겠지요.
그 자식의 독립성과 개성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항상 여러분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음을.

밖은 안의 반영입니다.
지구 밖 존재들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세상에는 영혼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 천사들이 나타나서 우리를 데려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은 실패다. 사라져야 한다,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 술을 좋아하는 사람.

이 사람들의 존재성을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선호와 취향에 맞는
이들과 어울리게 되는 것이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진리입니다.
그들의 모든 말들과 표현이 진리탐구를 위한 행동입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우리 이웃입니다.

여러분 옆 호실에 살고 있는 집주인이
과학을 좋아하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집주인을 그 집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과 같은 마트에서 같은 양파를 고르며
인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웃사랑입니다.
그냥 모르고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증오와 부정과 미움, 실망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은 영적 성장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외계인과 이웃이 다르지 않음을 아십시오.
지구인과 그들은 매우 가까운 이웃입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 거리가 얼마나 가깝겠습니까.

그들을 여러분들은 너무 어렵고, 높게, 혹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 누구에게
제가 "정신과에 한번 가보세요. 심리적으로 치료할 부분이 있어요."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벗들과의 자리에서,
"그 사람 말야... 나보고 정신병자라고 하더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라고 하면서 불평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은 감기에 걸렸어요...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벗들과의 자리에서
이 얘기를 화제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신과 영성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인식하는
문제점이란 이렇습니다.
  
너무 민감하고 예민하게, 심각하고,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함과 두려움이
여러분의 공간을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정전이 된 것처럼 말이지요.

심리와 관계된 사항을 예민하고 어렵게 생각하면 할 수록
그것은 치유가 힘들어지며
고통은 더욱 커집니다.

이것은 감기가 큰 병을 유발할 수 있는 이치와도 같지요.
감기에 걸렸을 뿐인데, 그것을 크게 생각하고 염려하고,
불안해 한다면 단순한 감기는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면역력을 높이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인간심리, 정신과 관계된 것도, 꾸준한 자기관찰과,
의식을 확장을 통해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공명은 증폭을 끌어옵니다.
영성의 세계가 활기차지 않고, 어렵고 , 높고, 심각해진다면,
기존 종교의 흐름과 다르지 않게 흘러갈 것임을 주시하세요.

쉽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은
장바구니를 옆에 끼고 먹거리를 위해 장보러 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나지는 모든 것은 마트에 진열돼 있는,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먹거리인 것입니다.

그것들의 모든 가치를 인정하세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것,
당신이 하려고 하는 것의 가치가 인정될 것입니다.

깨달음은 답답함이 아닙니다.
알면 알 수록 답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이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답답해 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향하여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에게 기회를 주세요.
우주에게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창조주에게 기회를 주세요.

잡념을 떨치고 싶다면,
잡념을 사랑한다고 인정하십시오.

이웃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기 집의 주인임을 인정하세요.

기억하세요.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과 여러분이 하려고 하는 것을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다르지 않음을.

댓가의 의미가 보장된
봉사와 희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열망을 지니고 그것에 관한 꿈을 지니고
그것이 사랑스러워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다르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다른 것이 당신인데,
굳이 다르려고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특별하고 싶다면,
다른 이들의 특별함을 인정하세요.
그러면 당신의 특별함도 인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커피입니다.
이것을 사려고 마트에 들렀다는 것을 잊지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