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eahistory.or.kr/Menu04/Menu04Sub06_5.htm마젤란 항로를 개척한 페르디난드 마젤란

범양사보 2001년 봄호

세계 일주를 계획하지도, 성공하지도 못한 마젤란

흔히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항해가는 마젤란(1480-1521)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결코 세계를 일주하려고 계획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일주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포르투갈의 하층귀족 계급에 속했던 마젤란은 어린 시절에 주앙 2세의 왕비인 레오노르(Leonor)의 시동(侍童) 노릇을 했고, 젊어서는 포르투갈의 동인도 함대에 배속되어 인도와 향료제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513년 포르투갈과 모로코의 무어인간에 벌어진 전투에 참가한 마젤란은 전투 도중 부상을 당했으나, 그 동안의 공을 인정받아 모로코인들로부터 빼앗은 가축을 관리하는 관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가축 도난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자 가축관리관을 그만두고 리스본으로 귀국한 마젤란은 마누엘 1세를 알현하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왕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마젤란은 동인도로 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동인도함대에 배속되어 있을 때 향료제도에 가본 적이 있었던 마젤란은 이 제도가 스페인령에 속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희망봉 항로를 경유하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향료제도까지 갈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젤란의 친구로 향료제도의 테르나테 섬에 정착한 프란시스코 세하웅이 “바스코 다가마가 발견한 세계 보다 더 풍요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밝힌 편지를 받고 확신을 갖게 된 마젤란은 1517년 10월 세빌랴로 이주하여 스페인 궁정에 항해를 후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의 항해계획을 검토한 스페인 궁정은 1518년 3월 마젤란과 그와 함께 항해계획을 수립한 팔레이루와 다음과 같은 계약을 체결하였다.  

“발견될 나라에서 얻어지는 수입의 20분의 1을 마젤란과 팔레이루에게 주며, 6개 이상의 섬을 발견할 경우에는 2개 섬에 대한 특별권을 인정한다. 콜럼버스와 맺은 계약과 마찬가지로 발견된 모든 육지와 섬들의 귀족이나 총독의 지위를 당사자와 그 자손들에게 세습할 것을 인정한다.”

몬테비디오․태평양 명명

1519년 9월 안토니오, 트리니다드(마젤란의 기함), 빅토리, 콘셉시온, 산티아고호 등 배 5척과 선원 265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이끌고 스페인 남단의 산 루카르 항에서 출항한 마젤란은 카나리아제도에서 일주일 가량 머문 뒤 대서양을 가로질러 12월 13일에 리우 데 자네이루에 도착하였다. 리우 데 자네이루는 1502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레모스(Lemos)가 1월 1일에 발견하여 ‘1월의 강’이란 뜻으로 명명한 곳이다. 1519년 12월 26일 리우를 출항한 마젤란은 우뚝 솟아있는 구릉을 보고 ‘멀리서 보이는 구릉’이란 뜻으로 몬테 비디(Monte Vidi)라고 명명하였는데, 이곳이 우르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이다. 남미 연안을 따라 남하를 계속한 마젤란 일행은 남미 남단의 산 훌리앙에 이르렀으나, 이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원정대 5척 중 3척의 선장들이 마젤란이 얘기한 대로 대양으로 통하는 해협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주도면밀하게 이들을 진압한 마젤란은 반란자 중 주동자 1명만 처형하고 좌초한 1척을 포기하고 4척만 이끌고 항해를 계속하였다.  

1520년 10월 21일 남미 최남단에 도착한 마젤란은 36일간의 악전 고투 끝에 11월 28일 대양으로 진입하였다. 마젤란은 이 해협을 ‘모든 성인들의 해협’으로 명명하였지만, 후에 마젤란 해협으로 개칭되었다. 마젤란이 접어든 대양은 마젤란 해협에 비하면 잔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젤란은 이를 보고 ‘잔잔한 바다’라는 뜻으로 ‘태평양'(Oceano Pacifico)이라고 명명하였다. 향료제도를 향해 서진을 계속한 마젤란은 태평양 1만 2천마일을 항해한 끝에 1521년 3월 6일 한 섬에 도착하였다. 태평양을 항해하는 동안 선원들이 겪은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피가페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는 벌레가 득실거리는 비스킷을 먹어야 했다. 썩어 냄새나는 물을 마셔야 했고, 톱밥도 자주 먹었다. 쥐는 한 마리에 반 두캇에 거래되었는데, 그것마저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했던 것은 잇몸이 부어 올라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원정대가 도착한 섬의 원주민들은 배로 올라와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마젤란은 이 섬을 ‘도둑의 섬‘이란 뜻으로 라드론(Ladrones) 섬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섬이 오늘날의 괌이다. 일주일 뒤 괌에서 출항한 마젤란은 필리핀제도에 도착하였으나, 마탄 섬에서 원주민들과의 전투 도중 1521년 4월 27일 사망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빅토리호와 트리니다드호 두 척 뿐이었다. 트리니다드호는 태평양 쪽으로 항해하였으나 포르투갈인들에게 나포되어 탐사대 전원이 살해되었고, 빅토리호는 인도양을 돌아 1522년 9월 6일 세빌랴로 귀항하였다. 이때 귀환한 사람은 불과 18명에 불과했다. 당시 빅토리호는 향료 26톤을 싣고 왔는데, 그 판매 수익금으로 5 척의 항해비용을 충당하고도 500두캇의 순이익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사에 남긴 흔적

빅토리호를 이끌고 세계를 최초로 주항한 사람은 델 카노였다. 그러나 보통 마젤란을 세계를 처음으로 일주한 항해가로 부르고 있는 것은 그가 원정을 계획하고 지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로써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향료 무역의 독점은 깨어지게 되었다.  

마젤란은 세계 곳곳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마젤란 해협에는 자신의 이름을 남겨 놓았고, 태평양, 몬테비데오, 처녀 곶, 티에라 델 푸에고 등은 그가 명명한 이름 그대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부어스틴은 “정신적인 면에서나 지적인 면을 물론, 실제적인 의미에서도 마젤란은 콜럼버스나 다 가마가 이룩한 그 이상의 업적을 이룩하였다.”고 평가하였다.  

* 마젤란에 대해서는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젤란』(자작나무)을 참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