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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잘못 알려졌던 9.11의 `진실'> <WSJ>
(뉴욕=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9.11 직후 전군에 경 계강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지만 사실 73년 중동전 이후 처음으로 군 경계태세를 ` 데프콘 3'로 강화 발령한 사람은 리처드 마이어스 당시 합참의장 대행이었다.
9.11 직후 백악관 벙커에서 상황을 파악하면서, 플로리다를 방문 중이던 부시 대통령과 연락을 취했던 딕 체니 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공군 1호 기)'에 대한 위협이 보고돼 워싱턴으로 복귀하려던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안전한 곳 으로 피신토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백악관 벙커에 있던 그 누구에게 서도 `에어포스 원'의 위협에 관한 보고는 없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22일 9.11 진상조사위원회가 수많은 관계자들을 대상 으로 벌인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잘못 알려졌던 일들의 진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고 보도했다. 10명의 9.11 진상조사위원 가운데 야당인 민주당 소속 위원들은 이와 같은 오류가 단순히 실수라기보다는 현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실책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부분을 중점 조사하겠다고 밝혀 왔다.
다음은 월 스트리트 저널이 9.11 조사위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잘못 알려졌거 나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사항들이다.
▲부시의 초등학교 방문=부시 대통령은 피랍 여객기가 처음 뉴욕 세계무역센터( WTC)에 충돌한 직후 자신이 제안한 교육개혁안 홍보를 위해 플로리다주의 초등학교 를 방문 중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후 "이 초등학교의 대기실에서 TV를 통해 비행기가 WTC에 충돌 했다는 보도를 봤다"고 말했으나 첫 충돌 장면이 TV에 보도된 것은 이날 오후 늦게 였으며 당시 대기실의 TV는 전원조차 연결돼 있지 않았다고 관계자들이 증언했다.
백악관측은 이에 대해 "단순한 착각이었다"고 해명했다.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은 두번째 피랍 여객기가 WTC에 부딪친 직후 부시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부시 대통령이 수업을 참 관하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나왔다고 훗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실 부시 대통령은 카드 실장의 보고를 받고서도 최소한 7분 이상 이 교실에 더 머물렀던 것으로 밝혀 졌다. 백악관측은 "아이들이 겁을 먹을 것을 우려해 교실에서 즉시 나오지 않았다" 고 설명했다.
▲`에어포스 원'에 대한 위협=체니 부통령은 9.11 직후 백악관 상황실에서 대통 령 경호를 담당하는 비밀경호국 요원들한테서 `에어포스 원'에 대한 위협 보고를 받 고 워싱턴으로 향하던 부시 대통령의 진로를 네브래스카주의 지하 벙커로 변경토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비밀경호국의 백악관 당직 요원들은 이런 보고를 한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백악관측은 "당시 백악관 벙커에서는 부시 대통령의 텍사스 목장과 국무 부 청사도 공격을 받았다는 등 루머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다"고 실수 가능성을 인정 했다.
반면에 부통령실 관계자는 "체니 부통령이 비밀경호국이 아니라 제복을 입은 군 인에게서 `에어포스 원'의 위협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말을 바꿨으나 "경황이 없 어 이 보고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밝혔다.
칼 로브 백악관 정치고문도 2001년 10월1일자 뉴요커와 한 인터뷰에서 "9.11 당 일 오후 4시까지 행방이 규명되지 않은 항공기가 3-4대 있었다"고 `에어포스 원'의 진로 변경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당시 연방항공청(FAA) 담당자는 이날 낮 12시16분 까지는 미국 상공의 모든 항공기들이 착륙하거나 다른 나라로 항로를 변경했으며 이 사실은 백악관이나 국방부에도 보고됐다고 상반한 진술을 했다.
▲공군의 대응=첫번째 WTC 공격 직후 신속하게 공군 전투기들이 출격해 나머지 피랍 여객기들을 저지했다면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북미항 공우주사령부(NORAD) 관계자들은 그 이전까지 항공 전력의 배치는 주로 외부 공격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9.11 당시 뉴욕이나 워싱턴 근처에 출동 태세를 갖춘 전투기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렇다 하더라도 버지니아주 랭글리 공군기지에 배치돼 있던 NORAD 소속 전투기 들이 재빨리 대응했다면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피랍 여객기를 막을 시간의 여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WTC에 두번째 피랍 여객기가 충돌한 지 27분 만에 NORAD 는 다른 여객기가 납치됐다는 FAA의 통보를 받고서도 50분간이나 버지니아의 전투기 3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당시 NORAD의 전투기 운용책임자였던 래리 아널드 예비역 공군 소장은 "미국이 실제로 공격을 받고 있는 지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추가 여객기 피랍에 관한 FAA 의 통보가 늦었을 뿐만 아니라 대응 태세를 갖춘 전투기 수도 절대 부족했다"고 진 술했다. 그러나 FAA는 "피랍 여객기가 더 있다는 사실을 즉각 군에 통보해줬다"고 반박했다.
공군기들이 제때 출동했다 하더라도 국방부 청사로 향하던 피랍기를 격추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한 증언은 엇갈린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범들에 납치된 여객기를 격 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지만 아널드 예비역 소장은 이를 부인했다.
▲비상조치 발령자=부시 대통령은 9.11 당일 밤 자신이 "첫번째 공격 직후 정부 의 비상대응 계획들을 이행했다"고 밝혔지만 `정부합동 국내테러 작전계획 개념(콘 플랜)'에 의해 비상령을 발동한 주체는 연방수사국(FBI)이었다. FBI 관계자는 9.11 테러 발생 즉시 콘플랜의 규정에 따라 백악관의 지시 없이 비상령을 발동했으며 당 시 상황이 방송을 통해 보도됐기 때문에 관계 부처들은 FBI의 통보를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인 대응을 이미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직 백악관 직원은 부시 대통령이 국가적 재난을 선포한 시기는 9.11이 발생한 지 3일 후인 9월14일이었고 그 이전에는 그가 비상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 다. 9.11 조사위의 민주당측 위원들은 9.11 당시 `콘플랜'과는 별도로 백악관이 자 체적인 비상대응 계획을 마련해뒀어야 하는 지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cwhyna@yna.co.kr
부시 대통령 9.11 테러 징후 무시 "자넷잭슨 가슴이 9.11을 제쳤다"
"미스터 부시, 9.11에 대답해달라"-무어 7가지 공개질의 ’이라크전 근거는 거짓말과 오해’
"9.11테러때 동정심이 모두 사라졌다"
http://ucc.media.daum.net/uccmix/news/foreign/america/200403/23/yonhap/v6350113.html?u_b1.valuecate=4&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7158&u_b1.targetkey2=6350113&_top_G=news=img1
(뉴욕=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9.11 직후 전군에 경 계강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지만 사실 73년 중동전 이후 처음으로 군 경계태세를 ` 데프콘 3'로 강화 발령한 사람은 리처드 마이어스 당시 합참의장 대행이었다.
9.11 직후 백악관 벙커에서 상황을 파악하면서, 플로리다를 방문 중이던 부시 대통령과 연락을 취했던 딕 체니 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공군 1호 기)'에 대한 위협이 보고돼 워싱턴으로 복귀하려던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안전한 곳 으로 피신토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백악관 벙커에 있던 그 누구에게 서도 `에어포스 원'의 위협에 관한 보고는 없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22일 9.11 진상조사위원회가 수많은 관계자들을 대상 으로 벌인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잘못 알려졌던 일들의 진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고 보도했다. 10명의 9.11 진상조사위원 가운데 야당인 민주당 소속 위원들은 이와 같은 오류가 단순히 실수라기보다는 현정부가 기민하게 대응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실책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부분을 중점 조사하겠다고 밝혀 왔다.
다음은 월 스트리트 저널이 9.11 조사위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잘못 알려졌거 나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사항들이다.
▲부시의 초등학교 방문=부시 대통령은 피랍 여객기가 처음 뉴욕 세계무역센터( WTC)에 충돌한 직후 자신이 제안한 교육개혁안 홍보를 위해 플로리다주의 초등학교 를 방문 중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후 "이 초등학교의 대기실에서 TV를 통해 비행기가 WTC에 충돌 했다는 보도를 봤다"고 말했으나 첫 충돌 장면이 TV에 보도된 것은 이날 오후 늦게 였으며 당시 대기실의 TV는 전원조차 연결돼 있지 않았다고 관계자들이 증언했다.
백악관측은 이에 대해 "단순한 착각이었다"고 해명했다.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은 두번째 피랍 여객기가 WTC에 부딪친 직후 부시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고 "몇초 지나지 않아" 부시 대통령이 수업을 참 관하던 초등학교 교실에서 나왔다고 훗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사실 부시 대통령은 카드 실장의 보고를 받고서도 최소한 7분 이상 이 교실에 더 머물렀던 것으로 밝혀 졌다. 백악관측은 "아이들이 겁을 먹을 것을 우려해 교실에서 즉시 나오지 않았다" 고 설명했다.
▲`에어포스 원'에 대한 위협=체니 부통령은 9.11 직후 백악관 상황실에서 대통 령 경호를 담당하는 비밀경호국 요원들한테서 `에어포스 원'에 대한 위협 보고를 받 고 워싱턴으로 향하던 부시 대통령의 진로를 네브래스카주의 지하 벙커로 변경토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비밀경호국의 백악관 당직 요원들은 이런 보고를 한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백악관측은 "당시 백악관 벙커에서는 부시 대통령의 텍사스 목장과 국무 부 청사도 공격을 받았다는 등 루머가 난무하는 상황이었다"고 실수 가능성을 인정 했다.
반면에 부통령실 관계자는 "체니 부통령이 비밀경호국이 아니라 제복을 입은 군 인에게서 `에어포스 원'의 위협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말을 바꿨으나 "경황이 없 어 이 보고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밝혔다.
칼 로브 백악관 정치고문도 2001년 10월1일자 뉴요커와 한 인터뷰에서 "9.11 당 일 오후 4시까지 행방이 규명되지 않은 항공기가 3-4대 있었다"고 `에어포스 원'의 진로 변경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당시 연방항공청(FAA) 담당자는 이날 낮 12시16분 까지는 미국 상공의 모든 항공기들이 착륙하거나 다른 나라로 항로를 변경했으며 이 사실은 백악관이나 국방부에도 보고됐다고 상반한 진술을 했다.
▲공군의 대응=첫번째 WTC 공격 직후 신속하게 공군 전투기들이 출격해 나머지 피랍 여객기들을 저지했다면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북미항 공우주사령부(NORAD) 관계자들은 그 이전까지 항공 전력의 배치는 주로 외부 공격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9.11 당시 뉴욕이나 워싱턴 근처에 출동 태세를 갖춘 전투기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렇다 하더라도 버지니아주 랭글리 공군기지에 배치돼 있던 NORAD 소속 전투기 들이 재빨리 대응했다면 국방부 청사에 충돌한 피랍 여객기를 막을 시간의 여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WTC에 두번째 피랍 여객기가 충돌한 지 27분 만에 NORAD 는 다른 여객기가 납치됐다는 FAA의 통보를 받고서도 50분간이나 버지니아의 전투기 3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당시 NORAD의 전투기 운용책임자였던 래리 아널드 예비역 공군 소장은 "미국이 실제로 공격을 받고 있는 지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추가 여객기 피랍에 관한 FAA 의 통보가 늦었을 뿐만 아니라 대응 태세를 갖춘 전투기 수도 절대 부족했다"고 진 술했다. 그러나 FAA는 "피랍 여객기가 더 있다는 사실을 즉각 군에 통보해줬다"고 반박했다.
공군기들이 제때 출동했다 하더라도 국방부 청사로 향하던 피랍기를 격추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한 증언은 엇갈린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범들에 납치된 여객기를 격 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지만 아널드 예비역 소장은 이를 부인했다.
▲비상조치 발령자=부시 대통령은 9.11 당일 밤 자신이 "첫번째 공격 직후 정부 의 비상대응 계획들을 이행했다"고 밝혔지만 `정부합동 국내테러 작전계획 개념(콘 플랜)'에 의해 비상령을 발동한 주체는 연방수사국(FBI)이었다. FBI 관계자는 9.11 테러 발생 즉시 콘플랜의 규정에 따라 백악관의 지시 없이 비상령을 발동했으며 당 시 상황이 방송을 통해 보도됐기 때문에 관계 부처들은 FBI의 통보를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인 대응을 이미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직 백악관 직원은 부시 대통령이 국가적 재난을 선포한 시기는 9.11이 발생한 지 3일 후인 9월14일이었고 그 이전에는 그가 비상계획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 다. 9.11 조사위의 민주당측 위원들은 9.11 당시 `콘플랜'과는 별도로 백악관이 자 체적인 비상대응 계획을 마련해뒀어야 하는 지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cwhyna@yna.co.kr
부시 대통령 9.11 테러 징후 무시 "자넷잭슨 가슴이 9.11을 제쳤다"
"미스터 부시, 9.11에 대답해달라"-무어 7가지 공개질의 ’이라크전 근거는 거짓말과 오해’
"9.11테러때 동정심이 모두 사라졌다"
http://ucc.media.daum.net/uccmix/news/foreign/america/200403/23/yonhap/v6350113.html?u_b1.valuecate=4&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7158&u_b1.targetkey2=6350113&_top_G=news=img1
2004.03.23 14:01:54 (*.92.90.151)
부시 대통령 9.11 테러 징후 무시
[머니투데이 임동욱기자]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계속되는 테러 징후들을 무시했고,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단행해 국제 테러 조직의 결속 강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이 측근에게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리처드 클라크 전(前) 백악관 테러담당관은 22일(현지시간) 발간될 예정인 저서를 통해 부시 대통령이 2001년 테러 공격 첩보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9.11테러 사건 발생 이후 무리하게 이라크를 공격키로 결정, 국제 테러 조직의 결속 강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당시 테러담당관을 역임했던 클라크는 이라크가 테러에 연루됐다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부시 행정부가 사담 후세인 축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라크의 연관성을 일부러 찾았다고 지적했다. 클라크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모든 적들에 맞서며(Against All Enemies)'를 출간할 예정이다.
전날 클라크는 CBS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도 알카에다와 연관된 테러 공격이 예상된다는 첩보가 놀랄정도로 늘어났지만 부시 행정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클라크는 "나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리즘에 훌륭히 대응했다는 주장을 통해 재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며 "부시는 수개월동안 테러 경고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시가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9.11테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30년간 4명의 대통령을 보좌했던 클라크는 지난해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1992년 국무부에서 백악관으로 옮겨 테러방지 업무를 담당했다.
이에 대해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반테러 정책에 대한 행정부의 노력을 옹호하고 나섰다. 라이스 보좌관은 반테러정책은 부시 행정부에게 우선 순위였으며 알카에다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정책을 세우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미국이 이미 알카에다가 예멘에서 발생한 USS 콜 전함 폭파 사건의 배후라는 첩보를 입수하고도 보복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 라이스 보좌관은 "우리는 적절한 군사적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알카에다의 테러훈련 기지를 크루즈 미사일로 공격하는 방법 뿐이었다"고 답했다.
앞서 클라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도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그의 경고가 폴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에 의해 무시됐다고 말했다. 클라크는 당시 울포위츠는 "누가 아프가니스탄의 작은 테러리스트를 신경쓰느냐"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클라크는 울포위츠가 후세인을 테러의 중요한 배후로 지목하며 군사적 행동 대상을 후세인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주 예정된 9.11테러 진상조사위원회의 증언에서는 리처드 클라크, 조지 테넷 CIA국장 등 증인들이 증언할 예정이다.
임동욱기자 dwlim@moneytoday.co.kr
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임동욱기자]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계속되는 테러 징후들을 무시했고,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단행해 국제 테러 조직의 결속 강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이 측근에게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리처드 클라크 전(前) 백악관 테러담당관은 22일(현지시간) 발간될 예정인 저서를 통해 부시 대통령이 2001년 테러 공격 첩보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9.11테러 사건 발생 이후 무리하게 이라크를 공격키로 결정, 국제 테러 조직의 결속 강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9.11 테러' 당시 테러담당관을 역임했던 클라크는 이라크가 테러에 연루됐다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지만, 부시 행정부가 사담 후세인 축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라크의 연관성을 일부러 찾았다고 지적했다. 클라크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모든 적들에 맞서며(Against All Enemies)'를 출간할 예정이다.
전날 클라크는 CBS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도 알카에다와 연관된 테러 공격이 예상된다는 첩보가 놀랄정도로 늘어났지만 부시 행정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클라크는 "나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리즘에 훌륭히 대응했다는 주장을 통해 재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당혹감을 느낀다"며 "부시는 수개월동안 테러 경고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시가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9.11테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30년간 4명의 대통령을 보좌했던 클라크는 지난해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1992년 국무부에서 백악관으로 옮겨 테러방지 업무를 담당했다.
이에 대해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반테러 정책에 대한 행정부의 노력을 옹호하고 나섰다. 라이스 보좌관은 반테러정책은 부시 행정부에게 우선 순위였으며 알카에다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정책을 세우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라고 말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미국이 이미 알카에다가 예멘에서 발생한 USS 콜 전함 폭파 사건의 배후라는 첩보를 입수하고도 보복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 라이스 보좌관은 "우리는 적절한 군사적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오직 할 수 있었던 것은 알카에다의 테러훈련 기지를 크루즈 미사일로 공격하는 방법 뿐이었다"고 답했다.
앞서 클라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도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그의 경고가 폴 울포위츠 국방부 차관에 의해 무시됐다고 말했다. 클라크는 당시 울포위츠는 "누가 아프가니스탄의 작은 테러리스트를 신경쓰느냐"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클라크는 울포위츠가 후세인을 테러의 중요한 배후로 지목하며 군사적 행동 대상을 후세인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번주 예정된 9.11테러 진상조사위원회의 증언에서는 리처드 클라크, 조지 테넷 CIA국장 등 증인들이 증언할 예정이다.
임동욱기자 dwlim@moneytoday.co.kr
머니투데이
【서울=뉴시스】
미국 영화감독이자 독설가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는 지난해 출간된 그의 저서 '멍청한 백인들'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그의 측근세력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부시를 향한 그의 독설이 다시 시작됐다.
6일(현지시간) 가디언은 최근 출간된 그의 신작 '조국의 현실'에서 무어가 부시를 향해 던진 독기서린 질문 7가지를 보도했다.
무어는 "이 7가지 질문들을 9.11 희생자들과 미국인들을 대표해서 부시, 당신에게 한다"며 "당신에게 복수하려는게 아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싶고 테러범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어떤 조치가 가능한 지 알고 싶은 것 뿐"이라는 전제를 깔고 질문했다.
질문에서 무어는 "빈 라덴과 거래가 있었는지"를 가장 먼저 물었다.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이 25년 이상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지적과 함께였다.
또 사우디 왕가와의 친밀도를 거론하면서 도대체 누가 9.11을 저질렀는지 속시원히 털어놓으라고 추궁했다.
빈 라덴과 사우디 패밀리들이 9.11 직후 제트기를 타고 유유히 파리로 날아간 것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지적했다.
신장투석 중인 빈 라덴의 근황과, 목표 건물을 정확히 맞출 정도의 비행실력은 아무에게나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테러범들이 도대체 누구인지도 물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9.11을 처음 보고받았던 플로리다 한 초등학교에서의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영주기자 yjle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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