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지 님의 설법 내용 전법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근기지인(大根器之人)
무엇이 대근기지인(大根器之人)인가? 대근기지인과 근기(根基)가 좋고 나쁨은 여전히 구별이 있다. 이런 대근기지인은 찾기가 매우 어려우며, 모두 상당히 긴 역사시기를 거쳐서야만 비로소 한 사람이 출생할 수 있다. 물론 대근기지인은 우선 반드시 아주 큰 德(더)를 구비해야 하며, 이런 백색물질장(白色物質場)이 상당히 커야 하는데, 이 점은 확실하다. 동시에 그는 또한 고생 중의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대인지심(大忍之心)이 있어야 하며, 또한 버릴 수 있어야 하고, 또한 德(더)를 지킬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오성(悟性)이 좋아야 하는 등등이다.
무엇이 고생 중의 고생인가? 불교 중에서는 사람으로 됨이 바로 고생인데, 당신이 사람으로 되기만 하면 곧 고생을 겪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것은 모든 공간의 생명체는 모두 우리 속인의 이런 신체가 없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고, 생로병사 문제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공간의 사람은 떠오를 수 있고 무게가 없으며 아주 미묘(美妙)하다. 속인은 바로 이 신체가 있음으로써 문제가 나타난다: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고, 목말라도 안 되고, 배고파도 안 되고, 힘들어도 안 되며, 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데, 어찌됐든 당신은 편안하지 못하다.
나는 한 신문에 실린 당산(唐山) 지진 때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지진 중에 죽었으나, 일부 사람들은 응급치료를 받아 살아났다. 이 부분 사람에 대해 한 차례 특수한 사회조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사망한 상태에서 모두 어떤 감각이 있었는가? 그런데 의외로 이 사람들은 모두 특수한 정황을 말했으며 또한 일치했다. 바로 사람이 죽는 그 일순간에는 두려운 느낌 없이 도리어 정반대로 갑자기 해탈감이 있고 잠재적인 흥분감이 있음을 느꼈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단번에 신체의 속박이 없어져 가볍고도 아주 미묘(美妙)하게 뜬 것을 느꼈고 또한 자신의 신체도 보았으며, 어떤 사람은 또 다른 공간의 생명체를 보았고, 어떤 사람은 또 어떠어떠한 곳에 갔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일순간에 해탈감과 잠재적인 흥분감을 느꼈으며, 고통스러운 감각이 없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람의 육신이 있다는 것이 바로 고생인데, 그러나 모두 다 이렇게 모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생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은 고생 중의 고생을 겪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내가 지난번에 말했다. 인류의 이 시공과 더욱 큰 다른 시공의 공간 개념은 역시 같지 않은데, 우리 이쪽의 한 시진(時辰)은 두 시간이며, 바로 그의 그 공간의 1년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고생스러운 환경하에서 연공(煉功)하는 것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하며, 이 사람이 도를 얻으려는 마음이 있어 수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그야말로 극히 대단하다고 한다. 이렇게 고생스러운데도 그는 아직 그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았으며, 그는 여전히 수련해 되돌아가려 한다. 왜 무조건 수련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속인의 공간에서 하룻밤 가부좌를 했다면, 남들이 보고는 이 사람은 정말로 대단하다며 그는 여기에 이미 6년이나 앉아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한 시진(時辰)이 그쪽의 1년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극히 특수한 공간이다.
어떻게 고생 중의 고생을 겪는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 사람이 어느 날 출근했다. 직장은 경기가 그다지 좋지 않아, 일자리보다 사람이 더 많은 이런 상황은 안 되기 때문에 직장에서는 개혁을 하려 하고, 도급제를 하려 하므로 남아도는 인원은 물러나야 했다. 그도 그중 하나로서 단번에 밥그릇을 잃었다. 이는 어떠한 심정이겠는가? 봉급을 주는 곳이 없으니 어떻게 생활하겠는가? 다른 것을 좀 하자니 또 할 줄을 모르므로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막 도착하니 집안의 노인이 병이 나서 심하게 앓고 있었다. 조급하고 안달이 났다. 빨리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지. 겨우 돈을 빌려 병원에 입원시켰다. 집에 돌아가 노인에게 드릴 물건을 준비하려고 막 집에 도착하니 학교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당신의 아들이 남을 때려 다치게 했으니 당신은 빨리 가보세요. 이 일을 금방 처리하고 집에 돌아와 앉자마자 전화가 왔다: 당신의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 물론 여러분이 이런 일과 마주치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인은 이런 고생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서 뭣 하겠는가. 밧줄이나 찾아 걸자. 살지 않겠다!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 나는 사람이 고생 중의 고생을 겪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물론 꼭 이런 형식인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싸움, 心性(씬씽)의 마찰, 개인이익의 쟁탈은 이에 못지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체면을 위해 살고 있으며, 견디지 못하면 목을 매어 죽어버리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복잡한 환경 중에서 수련해야 하며, 고생 중의 고생을 겪어낼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또 대인지심(大忍之心)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 대인지심인가?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 우선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으며,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어찌 연공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 참음은 해내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나는 성격이 좋지 않다. 성격이 좋지 않으면 고쳐야 하지 않는가. 연공인은 반드시 참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단속하는 데도 화를 내며 그야말로 떠들썩한데, 당신이 자녀를 단속한다 해도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당신 자신은 진정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좀 이지(理智)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 작은 일마저 넘기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도 공을 자라게 하려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길을 걸을 때 누가 나를 발로 한번 차더라도 아는 사람이 없기에 이건 내가 참아낼 수 있다. 나는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장래에 어쩌면 당신이 가장 체면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의 뺨을 두어 번 때려 당신으로 하여금 망신을 당하게 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당신이 참아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이 참아낼 수 있지만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한다면 이 역시 안 된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한(羅漢) 그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과 마주쳐도 다 마음에 두지 않고, 속인 중의 모든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싱글벙글하면서, 아무리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런 정도까지 참는다면 속인도 우리가 너무나 나약하고 너무나 괴롭히기 쉽다고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데 그것은 나약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속인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 문화 층차(層次)가 높은 사람들도 함양(涵養)을 말하며 남과 견식을 같이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연공인(煉功人)임에랴? 그것이 어찌 나약한 것이겠는가? 그것은 대인지심(大忍之心)의 체현이고, 그것은 견강한 의지의 체현으로서, 오로지 연공인만이 이런 대인지심이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말한다. 이런 한 마디 말이 있다: 필부(匹夫)는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들고 싸운다. 속인이라서 그건 당연하다. 당신이 날 욕하면 나도 당신을 욕하고, 당신이 날 때리면 나도 당신을 때리겠다. 그러면 곧 속인인데 그를 연공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만약 견강한 의지가 없고, 당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한 점을 해내지 못한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고대에 한신(韓信)이 있었다. 이 한신은 능력이 있고 유방(劉邦)의 대장군(大將軍)이었으며, 국가의 동량(棟樑)이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이 한신을 말하자면 어려서부터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전고(典故)가 있는데, 한신이 사타구니 밑을 기어나가는 치욕을 당했다고 한다. 한신은 소년시절에 무예를 연마(練)했는데,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은 늘 보검을 차고 다녔다. 어느 날 거리를 걷는데, 한 지방의 무뢰한이 손을 허리에 걸치고서 그가 가는 길을 막았다: 네가 보검을 차고서 뭘 하겠다는 거냐? 네가 감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네가 감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너는 내 머리를 베어봐라. 말하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한신은 생각했다: 내가 당신의 머리를 베어서는 뭘 하겠는가? 그때에도 사람의 머리를 베면 역시 관청에 신고하고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데,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는 한신이 감히 죽이지 못하는 것을 보자 곧바로 말했다: 네가 날 감히 죽이지 못한다면 너는 내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가라. 한신은 정말로 그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갔다. 이는 한신이 대단한 대인지심이 있고, 그가 일반 속인과는 달라서 그는 비로소 이렇게 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사람은 체면을 살려야 한다는, 그것은 속인의 말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이 체면을 위해서 산다면, 사는 것이 힘들지 않겠는가? 고생스럽지 않겠는가? 가치가 있겠는가? 한신은 필경 속인이고 우리는 수련하는 사람이라, 우리는 그보다도 훨씬 나아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속인의 층차를 벗어남에 도달하는 것이며, 더욱 높은 층차를 향해 매진(邁進)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과 마주칠 수는 없겠지만, 수련인이 속인 중에서 굴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할 때에도 꼭 이보다 못하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心性(씬씽) 중의 마찰은 이것만 못하지 않으며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고 나는 말하는데, 역시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동시에, 수련인은 또 버릴 수 있어야 하며, 속인 중의 각종 집착과 각종 욕망을 버려야 한다. 단번에는 해낼 수 없겠지만, 우리는 서서히 할 수 있다. 오늘 당신이 단번에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오늘 곧 부처다. 수련이란 서서히 해야 하는 것이기는 하나, 당신은 느슨하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말한다: 스승님께서 수련은 서서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서서히 하자. 그건 안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해야 하며 불법(佛法) 수련에서 당신은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한다 또한 德(더)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心性(씬씽)을 지켜야 하며,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제멋대로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하여 무엇을 할 수 없으며, 당신은 당신의 心性(씬씽)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속인 중에서 여러분은 늘 이런 한 마디 말을 듣는다: 좋은 일을 하여 德(더)를 쌓는다. 연공인(煉功人)은 德(더)를 쌓음을 말하지 않으며, 우리는 德(더)를 지킴을 말한다. 왜 德(더)를 지킴을 말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정황을 보았기 때문이다: 德(더)를 쌓는다는 것은 속인 중에서 말하는 것으로서, 그가 만약 德(더)를 쌓고 선(善)을 행하면 내세에 잘된다. 그러나 우리 여기는 이런 문제가 없다. 당신이 수련 성취했다면 도를 얻은 것으로서, 그 생의 일이 없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德(더)를 지킴을 말하는 것은 또 한 층의 뜻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체가 갖고 있는 두 가지 물질은 일생일세(一生一世)에 누적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주 오래고 먼 연대를 거쳐서 남겨 내려온 것이다. 당신이 자전거를 타고 온 도시를 다녀도 꼭 좋은 일을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날마다 이렇게 한다 해도 꼭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한 층의 뜻이 있는데, 당신이 德(더)를 쌓는다고 하자. 당신이 보기에 그 일이 좋은 일이라도 당신이 하면 곧 나쁜 일일지도 모르며, 당신이 보기에 그 일이 나쁜 일이라도 당신이 만약 상관하면 또한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당신은 그 속에 있는 그것의 인연관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률이 속인 중의 일을 상관하는 이것은 문제가 없다. 연공인이라면 바로 초상(超常)적인데, 그렇다면 당신은 초상적인 사람으로서, 초상적인 이치로 당신에게 요구해야 하지, 속인 중의 이치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한 가지 일의 인연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이 일을 잘못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위(無爲)를 말하는데,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단지 나쁜 사람을 단속하려 한다. 그러면 당신은 가서 경찰이나 되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 역시 당신에게 살인 방화하는 것을 보고도 상관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여 그가 사람을 발로 차고, 그가 사람을 주먹으로 치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이전에 그에게 빚을 졌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 둘은 결산을 한 것이다. 당신이 상관한다면 그들 사이는 결산하지 못해 다음번을 기다려 또다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인연관계를 보지 못해 나쁜 일을 하기 쉽고, 이렇게 하여 德(더)를 잃는다는 것이다.
속인이 속인의 일을 상관하는 것은 관계가 없으며, 그는 속인의 이치로 가늠한다. 당신은 초상(超常)적인 이치로 가늠해야 하는데, 살인 방화하는 것을 보고도 당신이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心性(씬씽)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좋은 사람을 체현해 낼 수 있겠는가? 당신이 살인 방화하는 것마저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상관할 것인가? 다만, 이런 것들은 우리 수련하는 사람과 무슨 관계가 없다. 반드시 당신에게 안배하는 것은 아니며, 꼭 당신이 만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德(더)를 지킴을 말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이 그 일을 조금만 해도 어쩌면 나쁜 일을 하는 것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德(더)를 잃게 마련이다. 당신이 德(더)를 잃기만 하면 당신의 층차를 어떻게 위로 제고하겠는가? 어떻게 당신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겠는가? 여기에는 이런 문제가 있다. 이 외에, 또한 오성이 좋아야 하며, 근기가 좋으면 아마 오성도 좋을 텐데, 환경의 영향도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는 또 말했다. 우리 사람마다 모두 안으로 수련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心性(씬씽)에서 찾고, 무엇을 잘하지 못했으면 스스로 원인을 찾아 다음번에 잘할 것이며, 일을 함에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사회도 좋게 변하고 도덕도 되돌아 승화되며, 정신문명도 좋게 변하고 치안상황도 좋게 변해, 또 경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당신이 말해 보라. 다른 사람이 상관할 필요 없이 사람마다 모두 자신을 단속하고 자신의 마음 안으로 찾는다면 이 얼마나 좋은가. 여러분이 알다시피 현재 법률이 점차 완비되어 가고 점차 완벽해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왜 여전히 나쁜 짓을 하는가? 법이 있어도 따르지 않는가? 바로 당신이 그의 마음을 단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않을 때 그는 여전히 나쁜 일을 할 것이다. 만약 사람마다 모두 내심을 향해 수련한다면, 그럼 확연히 달라진다. 또 당신이 불공평한 일에 대해 나설 필요도 없다.
법은 이 한 층까지만 말할 수 있을 뿐이며, 더욱 높은 것은 당신 자신에 의거해 수련해야만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문제를 제출함에 제출할수록 더욱 구체적인데, 만약 생활 중의 문제를 모두 나에게 해답하라고 한다면, 당신 자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당신은 자신이 수련해야 하고 자신이 깨달아야 하는데, 모두 내가 말한다면 당신이 수련할 것이 없다. 다행히 대법(大法)을 이미 전했으므로 당신은 대법(大法)에 따라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법을 전하는 시간이 기본적으로 거의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것들을 여러분에게 남겨주어, 여러분이 앞으로 수련하는 가운데 여러분을 지도할 법이 있게 하려 한다. 법을 전하는 전반 과정 중에서 나는 역시 여러분을 책임지고, 동시에 역시 사회를 책임짐에 의거해 하였으며, 실제로 우리는 역시 이 원칙에 따라 했다. 잘하고 못하고에 대해서는 나도 말하지 않겠지만, 자연히 공론(公論)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원은, 대법(大法)을 전하여 우리의 더욱 많은 사람이 득을 볼 수 있도록 하며, 진정으로 수련하려는 사람이 법에 따라 위로 수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법을 전하는 과정 중에서 우리는 또 사람이 되는 이치를 말했는데, 당신들이 학습반에서 돌아간 후에 설령 대법(大法)에 따라 수련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저한도로 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유익한 것이다. 사실 당신은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는지를 이미 알았기에, 돌아간 후에 당신 역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법을 전하는 과정 중에 역시 순조롭지 못한 데가 있었으며, 여러 방면의 교란 역시 아주 컸다. 주최기관과 각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지지와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학습반은 비교적 원만하게 열렸다.
학습반을 여는 중에 내가 말한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여러분이 고층차로 수련하는 것을 지도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설법 중에는 이런 것들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말한 것은 매우 명료하며 현대과학과 현대 인체과학을 결합하여 말했을 뿐만 아니라, 말한 층차도 대단히 높다. 주로 여러분이 장래에 진정하게 법을 얻고 수련해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었다. 우리가 법을 전하고 공을 전하는 과정 중에 많은 사람이 법은 역시 매우 좋다고 여기지만, 하려면 아주 어렵다고 한다. 사실 나는 어렵고 어렵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는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속인으로서 수련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수련이 그야말로 너무나 어렵고 불가사의하며, 수련 성취할 수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속인이라, 그가 수련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는 아주 어렵다고 볼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상사(上士)가 도(道)를 들음에 근면히 행하고, 중사(中士)가 도를 들음에 있는 듯 없는 듯하며, 하사(下士)가 도를 들음에 대소(大笑)하거니, 웃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도다.”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데 아주 쉬운 것으로서, 무슨 너무 높아서 오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여기에 자리한 많은 노수련생과 오지 않은 노수련생은 이미 상당히 높은 층차로 수련되었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집착심, 득의양양해하는 등등의 요소가 생겨, 당신의 공력이 위로 자람에 영향 줄까 우려해서다. 진정하게 수련을 결심한 사람으로서, 그가 참고 견딜 수 있고, 각종 이익 앞에서 이 집착심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그것을 아주 담담하게 여길 수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 이른바 어렵다고 하는 사람은 바로 그가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법을 수련하는 그 자체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층차를 제고하는 자체도 무슨 어려울 것이 없다. 바로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여 그는 비로소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 이익 중에서 그것을 내려놓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이 이익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그는 어렵다고 여기는데, 실제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순이 발생했을 때, 이 화를 참아내지 못하며, 심지어 자신을 연공인(煉功人)으로 간주하여 대할 수 없다면, 내가 말하는데 이러면 안 된다. 내가 과거에 수련할 때에 많은 고인(高人)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 사실 바로 이러한데 여러분이 돌아가서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무방하다. 진정한 겁난(劫難) 중에서 또는 관(關)을 넘는 중에서 당신은 시험해 보라. 참기 어려운 것을 당신은 참아 보고, 보기에 안 되고 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그러면 당신이 한번 시험해 보라. 도대체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너무 많이 말하면 여러분이 기억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나는 주요한 요구를 좀 제기하겠다: 여러분은 금후 수련 중에서 자신을 연공인(煉功人)으로 간주하여 진정하게 수련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나는 신, 노(新老) 수련생이 모두 대법(大法) 중에서 수련할 수 있고, 모두 공성원만(功成圓滿)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이 돌아가서 시간을 다그쳐 착실히 수련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