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소리
글 수 1,249
영혼은 본래의 하나로 되돌아가는 진화 과정 속에 있지요.
영혼이 현재의 의식 수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무수한 외적인 대상들 사이를 방황하다가
고립무원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대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기 위한 것
바로 이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다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나왔겠읍니까?
살아가며 종종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속에 있을 때는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 우엇인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친구여,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야말로 위대하고 영광스런 교실이자
그대의 의식이 진정으로 속한 곳이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대에게 고향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곳은 바로 환상을 공부하는 교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에
영원한 실재성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목적했던 것을 배우면
환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교과서를 남겨 두고 갈 때는
다음 학급이 공부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남겨 두십시오.
환상의 목적을 안다면
환상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환상이라는 것도 아주 쓸모있는 것이니까요.
빛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커지면
그 갈망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 저항이 무엇인지 책임지고 탐구 하겠지요
신성의 법칙은
인간들이 처리 못 할 의무나 결정 사항은
아예 부과하지도 않읍니다.
유유상종의 법칙은
물질적으로 나타난 인간의 실재를
그것에 맞는 의식의 차원에 두게 되죠.
초급반에서 곧바로 졸업반으로 갈 수는 없읍니다.
누구라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죠.
의식이 스스로 탐구하고 창조하는 과정에서도
자각의 계단들을 차근차근 밟아올라갑니다.
육체를 떠나게 될때
짙은 어두움과 무지에 싸여 있던 사람이
갑자기 찬란한 빛과 총체적인 의무 속으로
뛰어들수는 없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 창조하기로 한
의식의 신성한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니까요.
수많은 차원의 진리가 있지만
그 모두는 전체적인 앎을 위한것입니다.
자신의 지각 수준에 맞추어 갈을 가되,
모순된 상황들을 겪는다고 해서
당황하지 마십시오.
궁극적으론 이런 이원성들도
전체가 되는 데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씨알도 바로 이런 환상 속에 있으니,
삷의 고통을 탐구하여
그 고통을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환상, 곧 내면의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통찰력을 얻고
어둠의 얽힌 부분들을 풀어서
다시금 삶의 흐름 속에 띄워 보낼수 있겠지요.
바로 진리 속으로.
그대의 진리는 그대 자신의 힘
진리는 그대 자신을 최고로 자유케 하는 그대 자신의 발견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불신과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대가 내성과
정직의 대가를 치르고 얻게 될 선물 입니다.
진리가 바로 힘, 구원, 성취요
그대의 목적이며 길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인간의 삶은 지극히 고달픈 배움의 터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진정으로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삶은 원래의 의도대로
즐겁고 풍요로운 에덴 동산이 됩니다.
기쁨이란 우주에 울려퍼지는 소리
자신의 모든 투쟁들이
그릇된 이해에서 나왔음을 알게 될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읍니다.
그때에는 온갖 혼란, 좋거나 나쁜인간 세상의 천태만상이
이미 자신 속에 존재하는 합일성을 찿기 위해
영혼의 의식이 만든 환상적인 창조물들로 보일 겁니다.
자유는 환상이 아닌 존재의 자연스런 길이며
그대의 천부적으로 타고난 권리이자 그대의 고향
햇빛을 가로막는 그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 세상이 완벽한 곳이라면
영혼은 그 어디서 배울 수 있겠읍니까?
이 세상의 한계들에 부딪칠 때,
그대여, 눈물짓지 마십시오.
그것들도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면
그 어디서 배울 기회가 있겠읍니까?
삶의 능력이 모자라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대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영혼들이
세세하고 정확하게
학습 과정을 선정하여 찿아온 곳이니
임시로 머무는 장소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은 신의 것인지라
모든 의식은 결국 신과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의식의 자연스런 흐름은 영혼의 빛을 향해 갑니다.
그 하나에 대한 유일한 저항도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영혼의 투쟁이 있읍니다.
일단 각성이 확대되면 결코 줄어들 수 없읍니다.
왜곡될 수는 있을지언정 줄어들지는 않는 것입니다.
일단 인간의 의식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 풀잎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죠.
왜냐하면 인가이 가진 업의 구조가
훨씬 복잡하고 자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을 통하여 그대 자신의 것이 되는
삶의 체험들은 진리와 빛을 가져옵니다.
경험을 통해 장애물이 주는 고통을 알게 되면
그 고통을 뚫고 나아갈 수 있게 되지요.
모든 것이 신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장애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와 모습을 띄게 됩니다.
인간의 차원에서는 장애물이지만
절대의 차원에서는 가르침이지요.
일시적인 것이든 영원한 것이든
우주의 모든 것은 아름답읍니다.
어떤 이들은 빛나는 것만을 찾으며
세상의 어두운 것은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결점을 감출 필요는 없답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분석한답시고
그것을 구성요소들로 조각낸다면
정작 이 점에 대해 사죄받아야 할 존재 자체는
도외시한 것이 아닐까요?
일체 속에 생명이 있고
일체 속에 의식이 있읍니다.
의식이 풀잎의 차원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의식의 수준입니다.
그 의식이 성장하여 스스로
더둑 커다란 자각 상태 속에 있다면
더욱 카다란 자각 상태 속에 있다면
더욱 커다란 자각의 차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법이죠.
빛과 어둠의 전쟁은 그대 안에 있읍니다.
이 세상은 희생을 바라는 곳이 아닙니다.
그대 자신의
인생을 다스리는 이는 바로
그대 자신이죠.
그대는 자신이 빛 속 어디쯤 와 있으며
아울러 그 빛에 방해가 되는
어둠의 언저리를 발견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부정성에
희생되었다고 느끼지만
사실 부정성이라
업보의 일부분으로
다름아닌 소위 희생자 자신의 것이랍니다.
어둠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입으로 빛이 없다고 말할 순 있어도
실제로 빛이 없는 곳은 없읍니다.
그러므로 일체에 존재하는 신이란 개념은
결코 모순된것이 아니지요.
ㅡ 엠마누엘 고려원미디어
영혼이 현재의 의식 수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무수한 외적인 대상들 사이를 방황하다가
고립무원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대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기 위한 것
바로 이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다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세상에 나왔겠읍니까?
살아가며 종종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통속에 있을 때는 이렇게 물어 보십시오.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 우엇인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친구여,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야말로 위대하고 영광스런 교실이자
그대의 의식이 진정으로 속한 곳이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대는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대에게 고향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곳은 바로 환상을 공부하는 교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에
영원한 실재성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목적했던 것을 배우면
환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교과서를 남겨 두고 갈 때는
다음 학급이 공부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남겨 두십시오.
환상의 목적을 안다면
환상을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환상이라는 것도 아주 쓸모있는 것이니까요.
빛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커지면
그 갈망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대는 그 저항이 무엇인지 책임지고 탐구 하겠지요
신성의 법칙은
인간들이 처리 못 할 의무나 결정 사항은
아예 부과하지도 않읍니다.
유유상종의 법칙은
물질적으로 나타난 인간의 실재를
그것에 맞는 의식의 차원에 두게 되죠.
초급반에서 곧바로 졸업반으로 갈 수는 없읍니다.
누구라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죠.
의식이 스스로 탐구하고 창조하는 과정에서도
자각의 계단들을 차근차근 밟아올라갑니다.
육체를 떠나게 될때
짙은 어두움과 무지에 싸여 있던 사람이
갑자기 찬란한 빛과 총체적인 의무 속으로
뛰어들수는 없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 창조하기로 한
의식의 신성한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니까요.
수많은 차원의 진리가 있지만
그 모두는 전체적인 앎을 위한것입니다.
자신의 지각 수준에 맞추어 갈을 가되,
모순된 상황들을 겪는다고 해서
당황하지 마십시오.
궁극적으론 이런 이원성들도
전체가 되는 데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씨알도 바로 이런 환상 속에 있으니,
삷의 고통을 탐구하여
그 고통을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환상, 곧 내면의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통찰력을 얻고
어둠의 얽힌 부분들을 풀어서
다시금 삶의 흐름 속에 띄워 보낼수 있겠지요.
바로 진리 속으로.
그대의 진리는 그대 자신의 힘
진리는 그대 자신을 최고로 자유케 하는 그대 자신의 발견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불신과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대가 내성과
정직의 대가를 치르고 얻게 될 선물 입니다.
진리가 바로 힘, 구원, 성취요
그대의 목적이며 길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인간의 삶은 지극히 고달픈 배움의 터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진정으로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삶은 원래의 의도대로
즐겁고 풍요로운 에덴 동산이 됩니다.
기쁨이란 우주에 울려퍼지는 소리
자신의 모든 투쟁들이
그릇된 이해에서 나왔음을 알게 될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읍니다.
그때에는 온갖 혼란, 좋거나 나쁜인간 세상의 천태만상이
이미 자신 속에 존재하는 합일성을 찿기 위해
영혼의 의식이 만든 환상적인 창조물들로 보일 겁니다.
자유는 환상이 아닌 존재의 자연스런 길이며
그대의 천부적으로 타고난 권리이자 그대의 고향
햇빛을 가로막는 그늘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 세상이 완벽한 곳이라면
영혼은 그 어디서 배울 수 있겠읍니까?
이 세상의 한계들에 부딪칠 때,
그대여, 눈물짓지 마십시오.
그것들도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는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면
그 어디서 배울 기회가 있겠읍니까?
삶의 능력이 모자라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대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영혼들이
세세하고 정확하게
학습 과정을 선정하여 찿아온 곳이니
임시로 머무는 장소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은 신의 것인지라
모든 의식은 결국 신과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의식의 자연스런 흐름은 영혼의 빛을 향해 갑니다.
그 하나에 대한 유일한 저항도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 있으니
바로 여기에 영혼의 투쟁이 있읍니다.
일단 각성이 확대되면 결코 줄어들 수 없읍니다.
왜곡될 수는 있을지언정 줄어들지는 않는 것입니다.
일단 인간의 의식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 풀잎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죠.
왜냐하면 인가이 가진 업의 구조가
훨씬 복잡하고 자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을 통하여 그대 자신의 것이 되는
삶의 체험들은 진리와 빛을 가져옵니다.
경험을 통해 장애물이 주는 고통을 알게 되면
그 고통을 뚫고 나아갈 수 있게 되지요.
모든 것이 신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장애물들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와 모습을 띄게 됩니다.
인간의 차원에서는 장애물이지만
절대의 차원에서는 가르침이지요.
일시적인 것이든 영원한 것이든
우주의 모든 것은 아름답읍니다.
어떤 이들은 빛나는 것만을 찾으며
세상의 어두운 것은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결점을 감출 필요는 없답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분석한답시고
그것을 구성요소들로 조각낸다면
정작 이 점에 대해 사죄받아야 할 존재 자체는
도외시한 것이 아닐까요?
일체 속에 생명이 있고
일체 속에 의식이 있읍니다.
의식이 풀잎의 차원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바로 그 의식의 수준입니다.
그 의식이 성장하여 스스로
더둑 커다란 자각 상태 속에 있다면
더욱 카다란 자각 상태 속에 있다면
더욱 커다란 자각의 차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법이죠.
빛과 어둠의 전쟁은 그대 안에 있읍니다.
이 세상은 희생을 바라는 곳이 아닙니다.
그대 자신의
인생을 다스리는 이는 바로
그대 자신이죠.
그대는 자신이 빛 속 어디쯤 와 있으며
아울러 그 빛에 방해가 되는
어둠의 언저리를 발견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부정성에
희생되었다고 느끼지만
사실 부정성이라
업보의 일부분으로
다름아닌 소위 희생자 자신의 것이랍니다.
어둠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입으로 빛이 없다고 말할 순 있어도
실제로 빛이 없는 곳은 없읍니다.
그러므로 일체에 존재하는 신이란 개념은
결코 모순된것이 아니지요.
ㅡ 엠마누엘 고려원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