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소리
글 수 1,249
사랑은 전 우주에 가득 차 있어
설령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흡수한다 해도
결코 고갈되지 않읍니다.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
사랑은 우주적인 교신이자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에너지입니다.
신이 바로 사랑이죠.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이야기를 들려줄
유기적인 사랑이 존재합니다.
사랑 때문에 줄기에 붙어 있는 이파리처럼.
사랑은 세계를 바꿀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읍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그대의 행성을 회전시키겠읍니까?
타오르는 태양의 불길도,
몸뚱아리의 세포도,
가슴속의 의식도,
이 모두가 무엇으로 이뤄졌을까요?
바로 사랑 입니다.
오직 사랑일 뿐입니다.
가면을 끄고 폼을 잡는 멍청이가 되지 마십시오.
사랑이야말로 우주를 한데 묶는 아교인 것입니다.
영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성취입니다.
이러한 자기애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는 화합이 나타나며
그러한 화합 속에서 고통을 빚어재는
모든 판단들이 소멸되죠.
참된 자기 사랑은 에고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큰 겸양이지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는
자아에 대한 상당한 배려가 없는 한
존재할 수 없읍니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의 사랑을 느끼겠읍니까?
그것들은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그대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렇게도 갈망하는 의식확장의 문에
스스로 빗장을 걸어 두는 격이 됩니다.
의식 확장은 가슴을 통하여 오게 되죠.
그러므로 자신에게 친절해지십시오.
사랑은 연습이 필요치 않읍니다.
사랑은 그저 있는 것입니다.
있음은 연습할 수 없지요.
연습할 수 있는것은 사랑하고자 하는 결심입니다.
어둠을 알아야만
빛의 길을 갈수 있듯이
사랑의 길도
사랑이 없는 상태를 경험해야만 알게 되죠.
최상의 선택을 하십시오.
사랑은 숙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그릇 속에 담을 수 있읍니다.
사랑은 예술가의 작품에서 흘러나옵니다.
사랑은 순교자의 자기 희생이나
지도자의 단호한 결단,
부모의 손길일 수도 있읍니다.
어린애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단순한 행동에도
불멸의 사랑이 숨쉬고 있읍니다.
친절과 사랑의 행위는
그대의 세상에 깃든 신의 진리에
보다 많은 빛과 힘을 저해 줍니다.
자신의 현실 속에 사랑의 개넘을 적용하여
가능한 한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환생을 명한 내적인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러한 사랑의 성취를 열망합니다.
그런 실천적인 사랑은 신적 사랑의 대용품이 아니며
오히려 우주적인 계획에 따라
영양을 주고 기운을 북돋우며 자유롭게 해주는
신적 사랑 그 자체입니다.
신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짝에 대한 사랑이 나뉠까 봐
두려워할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실상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걸 밝혀 드리고 싶군요.
육체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자양분은
사실상 영적인 성장에도 도움이 됩니다.
꽃들이 태양을 갈망하듯
그대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충분히 있지요.
* 엠마누엘 고려원 미디어
설령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흡수한다 해도
결코 고갈되지 않읍니다.
사랑은 존재하는 모든 것
사랑은 우주적인 교신이자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에너지입니다.
신이 바로 사랑이죠.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이야기를 들려줄
유기적인 사랑이 존재합니다.
사랑 때문에 줄기에 붙어 있는 이파리처럼.
사랑은 세계를 바꿀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읍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그대의 행성을 회전시키겠읍니까?
타오르는 태양의 불길도,
몸뚱아리의 세포도,
가슴속의 의식도,
이 모두가 무엇으로 이뤄졌을까요?
바로 사랑 입니다.
오직 사랑일 뿐입니다.
가면을 끄고 폼을 잡는 멍청이가 되지 마십시오.
사랑이야말로 우주를 한데 묶는 아교인 것입니다.
영혼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성취입니다.
이러한 자기애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는 화합이 나타나며
그러한 화합 속에서 고통을 빚어재는
모든 판단들이 소멸되죠.
참된 자기 사랑은 에고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큰 겸양이지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는
자아에 대한 상당한 배려가 없는 한
존재할 수 없읍니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신의 사랑을 느끼겠읍니까?
그것들은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그대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렇게도 갈망하는 의식확장의 문에
스스로 빗장을 걸어 두는 격이 됩니다.
의식 확장은 가슴을 통하여 오게 되죠.
그러므로 자신에게 친절해지십시오.
사랑은 연습이 필요치 않읍니다.
사랑은 그저 있는 것입니다.
있음은 연습할 수 없지요.
연습할 수 있는것은 사랑하고자 하는 결심입니다.
어둠을 알아야만
빛의 길을 갈수 있듯이
사랑의 길도
사랑이 없는 상태를 경험해야만 알게 되죠.
최상의 선택을 하십시오.
사랑은 숙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 그릇 속에 담을 수 있읍니다.
사랑은 예술가의 작품에서 흘러나옵니다.
사랑은 순교자의 자기 희생이나
지도자의 단호한 결단,
부모의 손길일 수도 있읍니다.
어린애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단순한 행동에도
불멸의 사랑이 숨쉬고 있읍니다.
친절과 사랑의 행위는
그대의 세상에 깃든 신의 진리에
보다 많은 빛과 힘을 저해 줍니다.
자신의 현실 속에 사랑의 개넘을 적용하여
가능한 한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환생을 명한 내적인 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러한 사랑의 성취를 열망합니다.
그런 실천적인 사랑은 신적 사랑의 대용품이 아니며
오히려 우주적인 계획에 따라
영양을 주고 기운을 북돋우며 자유롭게 해주는
신적 사랑 그 자체입니다.
신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짝에 대한 사랑이 나뉠까 봐
두려워할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실상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걸 밝혀 드리고 싶군요.
육체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자양분은
사실상 영적인 성장에도 도움이 됩니다.
꽃들이 태양을 갈망하듯
그대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대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충분히 있지요.
* 엠마누엘 고려원 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