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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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어들 보세요.
1.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 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世間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2.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네 귀절이 바로 [信心銘]의 근본 골자입니다.
이제 정맥으로서 낭야각(瑯揶覺)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註解)를 내려주십시요"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낭야각선사가 답하기를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하는 첫 귀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뒷 귀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요?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귀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귀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귀절들은 모두 이 귀절의 주해일뿐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낭 야각선사가 앞 네 귀절만 크게 쓰고 뒤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 (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귀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뒷 귀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호리유차 천지현격
毫釐有差 天地懸隔
"지극한 도는 어렵지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쉽다는 것은 간택심 증애심만 버린다면 중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만, "이 간택심을 버린다, 증애심을 버린다"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뜻을 털끝만큼이라고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 만큼이나 벌어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4.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욕득현전 막존순역
欲得現前 莫存順逆
"무상대도를 깨우치려면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버리라"한 것입니다. '따름'과 '거슬림'은 상대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슬린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은 다르나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데,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따름과 거슬림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5. 어긋남과 다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위순상쟁 시위심병
違順相爭 是爲心病
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서로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불식현지 도로염정
不識玄旨 徒勞念靜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 증애심(憎愛心) 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상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동태허 무흠무여
圓同太虛 無欠無餘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양유취사 소이불여
良由取捨 所以不如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숙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막축유연 물주공인
莫逐有緣 勿住空忍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 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 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평회 민연자진
一種平懷 泯然自塵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 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옴직임이 되나니
지동귀지 지갱미동
止動歸止 止更彌動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 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텐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유체양변 영지일종
唯滯兩邊 寧知一種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일종불통 양처실공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견유몰유 종공배공
遣有沒有 從空背空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말아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다언다려 전불상응
多言多慮 轉不相應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절언절려 무처불통
絶言絶慮 無處不通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귀근득지 수조실종
歸根得旨 隨照失宗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 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수유반조 승각전공
須臾返照 勝却前空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전공 전변 개유망견
前空 轉變 皆由妄見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 20공(二十空) 등 여러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불용구진 유수식견
不用求眞 唯須息見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
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이견 부주 심막추심
二見 不住 愼莫追尋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 시비 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재유시비 분연실심
在有是非 紛然失心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아유일유 일역막수
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버려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리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24.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 없느니라.
일심불생 만법무구
一心不生 萬法無咎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무장애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바로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 만법에 통달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무구무법 불생불심
無咎無法 不生不心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며, 법도 변이고, 나는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 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26.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능수경멸 경축능침
能隋境滅 境逐能沈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경유능경 능유경능
境由能境 能由境能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개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 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28. 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욕지양단 원시일공
欲知兩段 元是一空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 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 객관을 따라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가게 되는데, 양단(兩段)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공했더라는 것입니다. '공했다'는 것은 양변을 여읜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뚝처럼 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30.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불견정추 영유편당
不見精 寧有偏黨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 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멸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칠음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 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한 무장애법계에 있어서는 세밀함과 거칠음을 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상이 다 떨어져 원융무애하고 대자재한 것을 말한 것이지, 세밀함과 거칠음이나 편당(偏黨)을 가지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세밀함과 거칠음에 기우는 편당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도리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31.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대조체관 무이무난
大道體寬 無易無難
무상대도는 그 본바탕이 넓기로는 진시방무진허공(盡十方無盡虛空) 을 여러 억천만개를 합쳐 놓아도 그 속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같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 해도 실제로는 이 자성에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도의 본체는 바탕이 넓다'고 한 것으로서 무궁무진하고 무한무변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다'한 것은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대법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공부해서 성춰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려면 참으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쉬운 것도 역시 아니라는 밀입니다. 곧 쉽다, 어렵다 하는 것은 모두 중생이 변견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知見)은 모두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32.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소견 호의 전급전지
小見 狐疑 轉急轉遲
조그만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꾸 의심하고 급하게 서둘면 반대로 더욱 더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데, 이를 자꾸 가깝게 하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누구든지 대도를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어렵다는 생각도 내지 말며, 급한 생각도 더디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쉽다 어렵다 급하다 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견으로서 취사심(取捨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33.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집지 실도 필입사로
執之 失度 必入邪路
대도나 중도나 또는 다른 뭐라고 하든지, 이를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누구든지 중도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려면 집착하는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한 사람이며, 집착이 있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법도를 잃고, 근본 대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 즉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34.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방지 자연 체무법위
放之 自然 體無去住
홀연히 집착을 놓아 버리면 모두가 자연히 현전하며, 본체는 본래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도는 본래 원만구족하여 머무름과 가는 것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완전히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5.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임성합도 소요절뇌
任性合道 逍遙絶惱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이는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르듯이 힘 안들이고 마음대로 활동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습니다. 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제한 기상을 말하는데,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한번 읽어들 보세요.
1.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 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世間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2.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네 귀절이 바로 [信心銘]의 근본 골자입니다.
이제 정맥으로서 낭야각(瑯揶覺)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註解)를 내려주십시요"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낭야각선사가 답하기를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하는 첫 귀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뒷 귀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습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요?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귀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귀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귀절들은 모두 이 귀절의 주해일뿐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낭 야각선사가 앞 네 귀절만 크게 쓰고 뒤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 (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귀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뒷 귀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호리유차 천지현격
毫釐有差 天地懸隔
"지극한 도는 어렵지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쉽다는 것은 간택심 증애심만 버린다면 중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만, "이 간택심을 버린다, 증애심을 버린다"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뜻을 털끝만큼이라고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 만큼이나 벌어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4.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욕득현전 막존순역
欲得現前 莫存順逆
"무상대도를 깨우치려면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버리라"한 것입니다. '따름'과 '거슬림'은 상대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슬린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은 다르나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데,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따름과 거슬림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5. 어긋남과 다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위순상쟁 시위심병
違順相爭 是爲心病
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서로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불식현지 도로염정
不識玄旨 徒勞念靜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대도(大道)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 증애심(憎愛心) 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상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원동태허 무흠무여
圓同太虛 無欠無餘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습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양유취사 소이불여
良由取捨 所以不如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숙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막축유연 물주공인
莫逐有緣 勿住空忍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 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 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평회 민연자진
一種平懷 泯然自塵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 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옴직임이 되나니
지동귀지 지갱미동
止動歸止 止更彌動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 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텐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유체양변 영지일종
唯滯兩邊 寧知一種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일종불통 양처실공
一種不通 兩處失功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견유몰유 종공배공
遣有沒有 從空背空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말아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다언다려 전불상응
多言多慮 轉不相應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절언절려 무처불통
絶言絶慮 無處不通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귀근득지 수조실종
歸根得旨 隨照失宗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 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수유반조 승각전공
須臾返照 勝却前空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전공 전변 개유망견
前空 轉變 皆由妄見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空) 20공(二十空) 등 여러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불용구진 유수식견
不用求眞 唯須息見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
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이견 부주 심막추심
二見 不住 愼莫追尋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 시비 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재유시비 분연실심
在有是非 紛然失心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아유일유 일역막수
二由一有 一亦莫守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버려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리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24.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이 허물 없느니라.
일심불생 만법무구
一心不生 萬法無咎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무장애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바로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 만법에 통달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무구무법 불생불심
無咎無法 不生不心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며, 법도 변이고, 나는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 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26.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능수경멸 경축능침
能隋境滅 境逐能沈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경유능경 능유경능
境由能境 能由境能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개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 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28. 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욕지양단 원시일공
欲知兩段 元是一空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 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 객관을 따라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가게 되는데, 양단(兩段)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공했더라는 것입니다. '공했다'는 것은 양변을 여읜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뚝처럼 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30.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불견정추 영유편당
不見精 寧有偏黨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 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멸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칠음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 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한 무장애법계에 있어서는 세밀함과 거칠음을 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상이 다 떨어져 원융무애하고 대자재한 것을 말한 것이지, 세밀함과 거칠음이나 편당(偏黨)을 가지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세밀함과 거칠음에 기우는 편당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도리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31.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대조체관 무이무난
大道體寬 無易無難
무상대도는 그 본바탕이 넓기로는 진시방무진허공(盡十方無盡虛空) 을 여러 억천만개를 합쳐 놓아도 그 속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같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 해도 실제로는 이 자성에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도의 본체는 바탕이 넓다'고 한 것으로서 무궁무진하고 무한무변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다'한 것은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대법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공부해서 성춰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려면 참으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쉬운 것도 역시 아니라는 밀입니다. 곧 쉽다, 어렵다 하는 것은 모두 중생이 변견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知見)은 모두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32.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소견 호의 전급전지
小見 狐疑 轉急轉遲
조그만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꾸 의심하고 급하게 서둘면 반대로 더욱 더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데, 이를 자꾸 가깝게 하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누구든지 대도를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어렵다는 생각도 내지 말며, 급한 생각도 더디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쉽다 어렵다 급하다 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견으로서 취사심(取捨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33.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집지 실도 필입사로
執之 失度 必入邪路
대도나 중도나 또는 다른 뭐라고 하든지, 이를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누구든지 중도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려면 집착하는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한 사람이며, 집착이 있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법도를 잃고, 근본 대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 즉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34.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방지 자연 체무법위
放之 自然 體無去住
홀연히 집착을 놓아 버리면 모두가 자연히 현전하며, 본체는 본래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도는 본래 원만구족하여 머무름과 가는 것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완전히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5.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임성합도 소요절뇌
任性合道 逍遙絶惱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이는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르듯이 힘 안들이고 마음대로 활동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습니다. 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제한 기상을 말하는데,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선종의 3조(三祖) 승찬(僧璨)대사의 작품. <삼조승찬대사신심명(三祖僧璨大師信心銘)>을 줄여서 <신심명>이라고 한다. 모두 4언 146구 584자로 되어있다. <신심명>은 승찬대사가 선사상의 궁극적인 경지를 간략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제목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믿음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담고 있는데, '도에 이르기란 어렵지만은 않으니, 오직 차별을 짓지 말 것이다.'라는 구절로부터 시작해서 '언어가 끊어지니 오고 감이 지금에 있지 않다.'라는 구절로 끝맺고 있다.
차별과 대립으로 이루어진 현상세계를 뛰어넘어 마음의 본성을 되찾는 길은 바로 차별하는 마음에서부터 벗어나서 평등자재의 경지에 머물러야 된다는 것을 표현했는데, 선종문학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선종 특유의 직관적이고 전체적으로 간결한 언어에 중국적인 선사상의 세계를 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산문이지만 시에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승찬대사의 <신심명>은 중국 불교문학사뿐만 아니라 초기 선종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초기 선종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후대 선승들의 수행에도 많은 지침을 주어서 선종의 발전과 함께 교단의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은 작품이다.
승찬대사의 <신심명>은 그와 비숫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선종의 5가 중에 하나인 조동종을 개창한 석두희천(石頭希遷)의 <참동계(參同契)>도 <신심명>의 영향을 받은 작품 중의 하나다. <참동계>는 5언 44구 220자로 쓰여져서 삼라만상의 평등한 실상을 읊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신신명>을 이야기할 때는 영가현각(永嘉玄覺)의 <증도가(證道歌)>를 빼놓을 수 없다. 영가현각은 육조혜능대사의 제자로 <증도가>는 그가 증득한 깨달음의 세계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증도가>는 오도송(悟道頌)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명법천(南明法泉)선사가 계승한 <증도가> 320수 중에서 세종대왕이 30여 수를 골라 직접 번역하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우리말로 옮기게 해서 <증도가남명계송언해(證道歌南明繼頌諺解)>를 펴냈다.
(출처 : 불교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