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세계
최 동환 해설서 서문에서...
도서출판 지혜의 나무
2000년 5월 초판
고대문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에 신이나 영웅이 출현하여 인간 세상에 질서를 창조한다. 이는 하나(一)가 셋(三)이 되는 시대로 신의 시대이다.
삼일신고는 셋(三)이 하나(一)가 되는 삼일(三一)이 그 제목의 서두를 이룬다. 이는 모든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시대를 말하고 있다. 삼일신고는 전적으로 인간의 시대의 경전임을 말한다.
100년 전 철학자 니이체는 스스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연결하는 밧줄이 되었다. 하나가 셋이 되는 신본주의에서 셋이 하나가 되는 인본주의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역사상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대혼돈의 시대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었다! …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하늘을 부정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초인은 대지를 의미한다." 라는 말로 땅을 긍정한다. 니이체는 하늘(天)을 부정하면 할수록 땅(地)이 강조되는 이치로 혼돈을 발생시켰다. 양(陽)을 강조하면 할수록 음(陰)이 강조되는 이치이다.
혼돈은 양(陽)인 하늘과 음(陰)인 땅이 서로 부딪치며 만드는 형태가 기본형이다. 그 혼돈의 구성은 땅은 상극의 원리로, 하늘은 상생의 원리로 설명된다.
따라서 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초인을 대지로 하여 혼돈을 발생시키는 것만이 니이체 철학의 전부라고 한다면 니이체의 철학은 한마디로 상극의 원리이며, 전쟁의 미학이다. 니이체는 산업시대가 대지의 시대임을 알았고, 대지의 시대는 곧 상극의 시대임을 알았다.
그는 하늘대신 땅을, 정신대신 물질을 존중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은 마음이 없고 몸만 있는 괴물들이라는 역겨운 사실을 미리 알았다. 이른바 짐승의 시대요, 천민(賤民)의 시대요, 노예(奴隸)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초인(超人)은 신(神)을 대신하여 이들을 지배해야 한다.
신이 죽어 버림으로서 마음이 없고 몸만 있는 괴물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성욕(性慾)뿐이다! 이로써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일 수 있다. 신이 죽어 버림으로 정신이 없고 물질만 있는 괴물들의 사회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물욕(物慾)뿐이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일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은 신이 죽고 물욕과 성욕만 남은 괴물들의 벌리는 집단히스테리가 아니었을까? 신이 죽지 않았다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근거조차 없다. 남은 것은 성욕뿐인 괴물에게 성적타락이란 정해져 있는 당연한 진행 과정이다.
그러나 이제 니이체를 필요로 했던 땅의 시대, 하드웨어의 시대, 산업시대는 이미 과거의 시대이다. 신이 죽었다며 하늘을 능멸하고, 천박하게 물질을 신으로 모시는 혼돈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초인超人들과 그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짐승, 천민, 노예들도 곰이 인간이 되듯 인간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은 고대의 신이나 영웅처럼 하늘에서 강림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깊숙한 중심에서 깨어나시는 하나님이다.
이를 삼일사상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큰 근본은 나의 중심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天下大本在於吾心之中一也 : 檀君嘉勒 中一經
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신은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의 상징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삼일사상의 핵심에 동참하고 있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라고 바가바드 기타는 전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중심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시대!
그럼으로써 인간 스스로 혼돈을 깨치고, 인간 스스로 하늘과 땅의 중심에 서서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새로운 시대는 동서고금의 희망의 시대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중심에 살아있는 한, 인간은 더 이상 짐승이 아니다. 천민(賤民)도, 노예도 아니다.
이제 곰이 인간이 되듯 마음이 없고 몸만 있는 괴물인 짐승과 천민과 노예들도 스스로 미망에서 벗어나 세 가지 참됨(三眞)을 회복하여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 세 가지 참됨! 선(善)함과 깨끗함(淸)과 후(厚)함은 태양처럼 밝고도 밝게 빛난다.
그리고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은 온 세상과 인류를 밝게 하고, 다시 하나 되어 크게 하나님에게로 돌아갔다.
물신(物神)의 시대, 과학 오용의 시대, 타락의 시대는 끝나고 대지는 다시 대지를 위한 대지로, 하늘은 다시 하늘을 위한 하늘로 돌아갔다. 이제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이 되었다.
삼일신고는 6000년 전에 창제되었지만 진실로 6000년 후인 이 위대한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설계된 경전이다. 바야흐로 셋이 하나가 되는 존엄한 인간의 시대의 개막을 알려야 할 때가 왔다.
경진년(庚辰年)의 새 하늘에 벽력 같이 호령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
"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 "
조심스럽게 살펴보라 ! 그대들의 중심에 존재하는 밝은 빛을! 혼돈으로 어두웠던 모든 것은 이 빛으로 처음처럼 밝아졌다.
하이센터 High Center
하이테크(High Tech)는 기술이며 음(陰)이며 상극오행이다.
하이터치(High Tough)는 마음이며 양(陽)이며 상생오행이다.
하이테크와 하이터치의 대립은 음양의 대립, 상극오행과 상생오행의 대립과 같다. 이는 혼돈이며 멀쩡한 인간을 뇌(腦)가 활동하지 않는 식물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이센터(High Center)는 식물인간에게 뇌(腦)가 되살아나 몸과 마음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힘을 제공한다. 즉 식물인간 문명을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의 문명으로 전환해주는 힘이다. 이 힘은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의 배달민족의 경전에서 체계화된다.
산업사회의 혼돈(Chaos), 다시 말해 음양대립적인 패러다임에서 질서(Cosmos)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하이테크의 창조(創造)이며 전혀 새로운 하이터치의 창조이다.
하이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전혀 새로운 하이테크와 하이터치는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이며, 누구의 손도 닿은 적이 없는 처녀림이며, 무궁무진한 미래가 있는 꿈의 대륙이다. 그리고 정복자가 아니라 창조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 새로운 대륙은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며 경영했던 유라시아대륙보다 오히려 더 드넓고 더 비옥하다. 그리고 땅이나 자원, 재물과 달리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우리만의 독점적인 경전이라는 지적재산을 바탕으로 하여 각 분야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이 새로운 대륙은 미래의 한민족의 의식주문제 해결은 물론 국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정신적인 논밭과 공장을 무궁무진하게 제공할 수 있다.
하이터치와 하이테크의 패러다임은 미국에서 나왔지만 그것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발전시키며 출현하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은 한국에서 출현하여 세계로 향한다.
배달사상은 서양철학을 만나면서 더욱 풍요로워졌다
동양철학의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의 원리는 혼돈(Chaos)과 질서(Cosmos)의 그리고 공간의 원리이다. 태극과 64괘가 설명하는 질서의 원리를 유교에서는 이기론(理氣論), 불교에서는 공색론(空色論), 도교에서는 무유론(無有論)으로 설명했다. 이는 천부경의 두 글자 무궤이다. 그리고 삼일신고의 첫 글자 제(帝)이다. 또 삼일신고와 366사의 철(哲)과 중(衆)이다. 그리고 공간의 개념은 천부경의 무진본(無盡本)과 부동본(不動本)이다.
동양은 이 원리가 수 천년 전부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년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그 개념이 무엇인지 조차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서양의 니이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융, 프롬등 많은 철학자들이 설명한 내용들이 바로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의 원리, 그리고 공간의 개념인 무진본(無盡本)과 부동본(不動本)이다.
다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한 일이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 그리고 무진본(無盡本)과 부동본(不動本)의 주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잊어버린 동양에서 그들의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리는 더더구나 없었다.
배달사상의 전체적인 틀은 유불선을 포함하면서 풍요로움이 새로워졌다. 그리고 서양사상을 포함하면서 더욱 더 풍요로워졌다.
한민족 언어는 불멸의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다.
삼일신고는 그 자체로 알타이어족들의 신화와 전설의 원형이다. 그리고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 등의 원리를 비롯하여 고대 동서양의 수많은 고대문명의 유적과 유물의 근본적인 설계원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일신고와 우리 한민족의 고대언어는 일체이다. 이 둘이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고대언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도서관보다 더 소중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세상 그 어떤 박물관보다 더 가치 있는 유물들을 담고 있음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이 같은 사실은 한밝감닥새알해말이라는 우리 배달사상의 중심언어와 삼일신고의 내용이 결합하면서 그 감추었던 찬란한 빛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언어들은 우리 한민족을 포함한 전체 알타이어족, 지나티벳트어족인 한족(漢族), 나아가 슈메르문명과 그 갈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역사와 문화까지를 하나로 꿰어 설명해준다. 한민족의 언어는 인류전체를 위한 불멸의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다.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 !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왕국(the Kingdom of Kokurei)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 … 그리고 유일한 신 하나님은 크고 유일한 하나(only One)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기록은 100년 전 기독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남긴 말이다. 100년 전 이 땅에 기독교를 퍼뜨리기 위해 온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히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당시의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 헐버트는 "'하나님(Hananim)'이란 단어는 '하늘'과 '님'의 합성어로서 한자어 천주(天主)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엄격한 일신론자(monotheists)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종교적 개념은 외래적 의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라고 당시 한국인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에 대해 말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천주(天主)라는 우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외적 형상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라는 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이 기록들은 100년 전 이 땅에 기독교를 퍼뜨린 선교사들이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그들의 신 여호와 대신 차용하면서 남긴 여러 연구 검토 기록들 중 일부이다. 그들은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차용함으로써 얼마나 쉽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감사와 감탄이 감추지 않았다.
이들의 기록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 한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모시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불과 100년 후인 오늘의 한국인 중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우리 한민족이 어쩌다가 이 정도로까지 기막힌 지경이 되었을까? 개인의 사유재산은 잘 지켜진다. 그러나 만인의 공유재산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산이 아니라 한민족의 중심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불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민족 모두의 중심인 하나님을 지키려고 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나님은 어떤 외적형상도 없이 우리 한민족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난 만년간 존재해왔다. 우리 한민족에게서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제외하고 한민족의 문화와 사상, 역사 등 한민족을 설명하는 작업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면 그 동안 우리는 한국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설명한 것일까?
심리학자 C.G. 융은 무의식은 본래 위험한 것이어서 여러가지 재난이나 사고 또는 육체적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했고, 이 무의식이 위험하다는 것은 많은 경우 의식이 무의식과 일치되지 않고 대립될 때임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
지난 100년 전만 해도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은 한민족의 무의식 세계와 의식 세계의 하나님(一神)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었었다. 그러나 불과 100년 후인 지금의 한민족에게는 무의식 세계의 하나님一神과 의식 세계의 하나님은 완전히 불일치를 이룬다.
빙산과 한국인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
C.G. 융은 무의식과 의식의 불일치가 육체적 질병은 물론 여러가지 재난의 원인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인들에게 이 무의식과 의식의 하나님이 불일치를 이룸으로써 야기하는 질병과 재난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하나님은 우리 한민족의 잃어버린 중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실례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지난 천 수백년간 무엇을 얼마나 잃어버렸는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볼 작은 용기와 자신감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비공식적으로 전락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은 눈에 보이는 의식 세계에서 눈에 안 보이는 무의식 세계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눈에 보이는 의식 세계를 빙산의 수면 위의 모습이라면 눈에 안 보이는 무의식 세계는 수면 아래의 거대한 모습의 빙산이다.
신라이래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한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불일치는 C.G. 융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민족에게는 한恨이라는 응어리로 마음 속에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한恨은 너무도 예민하여 너무도 쉽게 상처 입는다. 또 이성적이기보다는 너무도 감성적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작은 충동에도 예기치 않게 크게 반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한恨은 언제든 정치나 종교 등에서 민족주의의 허울을 쓴 무책임하고 교활한 사람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쉽게 악용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한민족의 불행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무의식 세계와 의식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 규모가 얼마일지 측량조차 할 수 없는 개인적, 사회적 비용의 낭비를 막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실을 사실대로 분명히 알 때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모두를 위한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는 소식은 100년 가뭄 끝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목타는 대지를 흠뻑 적셨다.
한민족韓民族의 천명天命
고구려의 경전 다물흥방가는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새로 온 것은 존중한다. 따라서 지나간 것은 새로 생김도 없고 멸해짐도 없으며, 새로 온 것은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다."
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내용은 우리의 고유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외래종교와 사상을 존중하자는 고구려시대의 사회적 합의이다. 그리고 이 합의는 고구려의 강력했던 국력의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구려시대의 이 합의는 천수백년후인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에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고구려시대의 합의가 천수백년간의 세월동안 우리 사회 안에서 갈고 닦여지며 이루어낸 의미심장한 성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지난 만년동안 계승되어온 고유의 사상을 성공적으로 계승했고, 유불선과 기독교를 천수백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체질화시켜 그 종주국에 버금가는 정신적 경쟁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는 기적이다.
"모든 덕은 다른 덕에 대해 질투를 품는다. 질투는 무서운 것이며 여러 덕은 질투 때문에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다.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자는 마침내 자신에게로 전갈의 독침을 돌리게 된다."
니이체가 싸늘하게 분석한 모든 덕德 간의 질투, 다시 말해 종교간의 질투는 이제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악惡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더러운濁 인간성이 노출되는 분야가 되었다. 또 인간사이에 가장 박薄한 인정이 드러나는 분야가 되었다. 이제 종교간의 질투가 인류에게 그 어떤 핵폭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달민족의 공동체 안에는 종교간의 질투들이 아무리 흉악한 것이라 해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이미 고구려 때부터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천수백년간 모두 하나가 되었다.
필자는 인류역사상 민족단위에서 이 같은 정신적 경쟁력을 보유했던 민족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그 어떤 기록도 본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민족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정신적 경쟁력을 지닌 미래의 인류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이 경쟁력은 새로운 시대에 우리 민족의 재산이며 우리 나라의 국력이다.
더구나 산업사회의 물질문명이 저물고 바야흐로 문화와 지식, 정보라는 정신문명이 시작되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는 때를 기다려 이 모든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편의상 이 경이로운 프로그램의 이름을 '한민족韓民族의 천명天命'이라 하자.
우리 민족의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개인과 사회에 어떤 불행을 안겨 줄지 예측이 안 되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이 무서운 불일치를 천수백년이라는 세월 동안 갈고 닦아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미 배양했다.
이 능력, 아니 '한민족(韓民族)의 천명(天命)'은 우리 모두를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둘도 없는 긍정적 에너지가 되어줄 수 있다.
파괴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인 에너지의 양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지금까지처럼 숙명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도서출판 지혜의 나무
2000년 5월 초판
고대문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에 신이나 영웅이 출현하여 인간 세상에 질서를 창조한다. 이는 하나(一)가 셋(三)이 되는 시대로 신의 시대이다.
삼일신고는 셋(三)이 하나(一)가 되는 삼일(三一)이 그 제목의 서두를 이룬다. 이는 모든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시대를 말하고 있다. 삼일신고는 전적으로 인간의 시대의 경전임을 말한다.
100년 전 철학자 니이체는 스스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연결하는 밧줄이 되었다. 하나가 셋이 되는 신본주의에서 셋이 하나가 되는 인본주의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역사상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대혼돈의 시대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신은 죽었다! …
니이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하늘을 부정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초인은 대지를 의미한다." 라는 말로 땅을 긍정한다. 니이체는 하늘(天)을 부정하면 할수록 땅(地)이 강조되는 이치로 혼돈을 발생시켰다. 양(陽)을 강조하면 할수록 음(陰)이 강조되는 이치이다.
혼돈은 양(陽)인 하늘과 음(陰)인 땅이 서로 부딪치며 만드는 형태가 기본형이다. 그 혼돈의 구성은 땅은 상극의 원리로, 하늘은 상생의 원리로 설명된다.
따라서 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초인을 대지로 하여 혼돈을 발생시키는 것만이 니이체 철학의 전부라고 한다면 니이체의 철학은 한마디로 상극의 원리이며, 전쟁의 미학이다. 니이체는 산업시대가 대지의 시대임을 알았고, 대지의 시대는 곧 상극의 시대임을 알았다.
그는 하늘대신 땅을, 정신대신 물질을 존중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은 마음이 없고 몸만 있는 괴물들이라는 역겨운 사실을 미리 알았다. 이른바 짐승의 시대요, 천민(賤民)의 시대요, 노예(奴隸)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초인(超人)은 신(神)을 대신하여 이들을 지배해야 한다.
신이 죽어 버림으로서 마음이 없고 몸만 있는 괴물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성욕(性慾)뿐이다! 이로써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일 수 있다. 신이 죽어 버림으로 정신이 없고 물질만 있는 괴물들의 사회에서 남는 것은 오로지 물욕(物慾)뿐이다! 이로써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일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은 신이 죽고 물욕과 성욕만 남은 괴물들의 벌리는 집단히스테리가 아니었을까? 신이 죽지 않았다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근거조차 없다. 남은 것은 성욕뿐인 괴물에게 성적타락이란 정해져 있는 당연한 진행 과정이다.
그러나 이제 니이체를 필요로 했던 땅의 시대, 하드웨어의 시대, 산업시대는 이미 과거의 시대이다. 신이 죽었다며 하늘을 능멸하고, 천박하게 물질을 신으로 모시는 혼돈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초인超人들과 그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짐승, 천민, 노예들도 곰이 인간이 되듯 인간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은 고대의 신이나 영웅처럼 하늘에서 강림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깊숙한 중심에서 깨어나시는 하나님이다.
이를 삼일사상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큰 근본은 나의 중심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天下大本在於吾心之中一也 : 檀君嘉勒 中一經
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신은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의 상징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삼일사상의 핵심에 동참하고 있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라고 바가바드 기타는 전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중심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시대!
그럼으로써 인간 스스로 혼돈을 깨치고, 인간 스스로 하늘과 땅의 중심에 서서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새로운 시대는 동서고금의 희망의 시대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중심에 살아있는 한, 인간은 더 이상 짐승이 아니다. 천민(賤民)도, 노예도 아니다.
이제 곰이 인간이 되듯 마음이 없고 몸만 있는 괴물인 짐승과 천민과 노예들도 스스로 미망에서 벗어나 세 가지 참됨(三眞)을 회복하여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 세 가지 참됨! 선(善)함과 깨끗함(淸)과 후(厚)함은 태양처럼 밝고도 밝게 빛난다.
그리고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은 온 세상과 인류를 밝게 하고, 다시 하나 되어 크게 하나님에게로 돌아갔다.
물신(物神)의 시대, 과학 오용의 시대, 타락의 시대는 끝나고 대지는 다시 대지를 위한 대지로, 하늘은 다시 하늘을 위한 하늘로 돌아갔다. 이제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인간이 되었다.
삼일신고는 6000년 전에 창제되었지만 진실로 6000년 후인 이 위대한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설계된 경전이다. 바야흐로 셋이 하나가 되는 존엄한 인간의 시대의 개막을 알려야 할 때가 왔다.
경진년(庚辰年)의 새 하늘에 벽력 같이 호령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
"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 "
조심스럽게 살펴보라 ! 그대들의 중심에 존재하는 밝은 빛을! 혼돈으로 어두웠던 모든 것은 이 빛으로 처음처럼 밝아졌다.
하이센터 High Center
하이테크(High Tech)는 기술이며 음(陰)이며 상극오행이다.
하이터치(High Tough)는 마음이며 양(陽)이며 상생오행이다.
하이테크와 하이터치의 대립은 음양의 대립, 상극오행과 상생오행의 대립과 같다. 이는 혼돈이며 멀쩡한 인간을 뇌(腦)가 활동하지 않는 식물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이센터(High Center)는 식물인간에게 뇌(腦)가 되살아나 몸과 마음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힘을 제공한다. 즉 식물인간 문명을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의 문명으로 전환해주는 힘이다. 이 힘은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의 배달민족의 경전에서 체계화된다.
산업사회의 혼돈(Chaos), 다시 말해 음양대립적인 패러다임에서 질서(Cosmos)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하이테크의 창조(創造)이며 전혀 새로운 하이터치의 창조이다.
하이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전혀 새로운 하이테크와 하이터치는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이며, 누구의 손도 닿은 적이 없는 처녀림이며, 무궁무진한 미래가 있는 꿈의 대륙이다. 그리고 정복자가 아니라 창조자를 기다리고 있다.
이 새로운 대륙은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며 경영했던 유라시아대륙보다 오히려 더 드넓고 더 비옥하다. 그리고 땅이나 자원, 재물과 달리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우리만의 독점적인 경전이라는 지적재산을 바탕으로 하여 각 분야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이 새로운 대륙은 미래의 한민족의 의식주문제 해결은 물론 국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정신적인 논밭과 공장을 무궁무진하게 제공할 수 있다.
하이터치와 하이테크의 패러다임은 미국에서 나왔지만 그것을 설명하고 분석하고 발전시키며 출현하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은 한국에서 출현하여 세계로 향한다.
배달사상은 서양철학을 만나면서 더욱 풍요로워졌다
동양철학의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의 원리는 혼돈(Chaos)과 질서(Cosmos)의 그리고 공간의 원리이다. 태극과 64괘가 설명하는 질서의 원리를 유교에서는 이기론(理氣論), 불교에서는 공색론(空色論), 도교에서는 무유론(無有論)으로 설명했다. 이는 천부경의 두 글자 무궤이다. 그리고 삼일신고의 첫 글자 제(帝)이다. 또 삼일신고와 366사의 철(哲)과 중(衆)이다. 그리고 공간의 개념은 천부경의 무진본(無盡本)과 부동본(不動本)이다.
동양은 이 원리가 수 천년 전부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년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그 개념이 무엇인지 조차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서양의 니이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융, 프롬등 많은 철학자들이 설명한 내용들이 바로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의 원리, 그리고 공간의 개념인 무진본(無盡本)과 부동본(不動本)이다.
다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한 일이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 그리고 무진본(無盡本)과 부동본(不動本)의 주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잊어버린 동양에서 그들의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리는 더더구나 없었다.
배달사상의 전체적인 틀은 유불선을 포함하면서 풍요로움이 새로워졌다. 그리고 서양사상을 포함하면서 더욱 더 풍요로워졌다.
한민족 언어는 불멸의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다.
삼일신고는 그 자체로 알타이어족들의 신화와 전설의 원형이다. 그리고 음양오행과 태극과 64괘 등의 원리를 비롯하여 고대 동서양의 수많은 고대문명의 유적과 유물의 근본적인 설계원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일신고와 우리 한민족의 고대언어는 일체이다. 이 둘이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우리의 고대언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도서관보다 더 소중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세상 그 어떤 박물관보다 더 가치 있는 유물들을 담고 있음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이 같은 사실은 한밝감닥새알해말이라는 우리 배달사상의 중심언어와 삼일신고의 내용이 결합하면서 그 감추었던 찬란한 빛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언어들은 우리 한민족을 포함한 전체 알타이어족, 지나티벳트어족인 한족(漢族), 나아가 슈메르문명과 그 갈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역사와 문화까지를 하나로 꿰어 설명해준다. 한민족의 언어는 인류전체를 위한 불멸의 도서관이며 박물관이다.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 !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왕국(the Kingdom of Kokurei)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 … 그리고 유일한 신 하나님은 크고 유일한 하나(only One)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기록은 100년 전 기독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남긴 말이다. 100년 전 이 땅에 기독교를 퍼뜨리기 위해 온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히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당시의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 헐버트는 "'하나님(Hananim)'이란 단어는 '하늘'과 '님'의 합성어로서 한자어 천주(天主)에 해당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엄격한 일신론자(monotheists)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종교적 개념은 외래적 의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라고 당시 한국인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에 대해 말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천주(天主)라는 우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외적 형상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라는 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이 기록들은 100년 전 이 땅에 기독교를 퍼뜨린 선교사들이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그들의 신 여호와 대신 차용하면서 남긴 여러 연구 검토 기록들 중 일부이다. 그들은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차용함으로써 얼마나 쉽게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감사와 감탄이 감추지 않았다.
이들의 기록은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 한민족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모시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나 불과 100년 후인 오늘의 한국인 중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우리 한민족이 어쩌다가 이 정도로까지 기막힌 지경이 되었을까? 개인의 사유재산은 잘 지켜진다. 그러나 만인의 공유재산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산이 아니라 한민족의 중심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불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민족 모두의 중심인 하나님을 지키려고 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나님은 어떤 외적형상도 없이 우리 한민족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난 만년간 존재해왔다. 우리 한민족에게서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제외하고 한민족의 문화와 사상, 역사 등 한민족을 설명하는 작업이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면 그 동안 우리는 한국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설명한 것일까?
심리학자 C.G. 융은 무의식은 본래 위험한 것이어서 여러가지 재난이나 사고 또는 육체적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했고, 이 무의식이 위험하다는 것은 많은 경우 의식이 무의식과 일치되지 않고 대립될 때임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
지난 100년 전만 해도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은 한민족의 무의식 세계와 의식 세계의 하나님(一神)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었었다. 그러나 불과 100년 후인 지금의 한민족에게는 무의식 세계의 하나님一神과 의식 세계의 하나님은 완전히 불일치를 이룬다.
빙산과 한국인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
C.G. 융은 무의식과 의식의 불일치가 육체적 질병은 물론 여러가지 재난의 원인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인들에게 이 무의식과 의식의 하나님이 불일치를 이룸으로써 야기하는 질병과 재난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하나님은 우리 한민족의 잃어버린 중심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실례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지난 천 수백년간 무엇을 얼마나 잃어버렸는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볼 작은 용기와 자신감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비공식적으로 전락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은 눈에 보이는 의식 세계에서 눈에 안 보이는 무의식 세계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눈에 보이는 의식 세계를 빙산의 수면 위의 모습이라면 눈에 안 보이는 무의식 세계는 수면 아래의 거대한 모습의 빙산이다.
신라이래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한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불일치는 C.G. 융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민족에게는 한恨이라는 응어리로 마음 속에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한恨은 너무도 예민하여 너무도 쉽게 상처 입는다. 또 이성적이기보다는 너무도 감성적이다. 따라서 한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작은 충동에도 예기치 않게 크게 반응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한恨은 언제든 정치나 종교 등에서 민족주의의 허울을 쓴 무책임하고 교활한 사람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쉽게 악용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 한민족의 불행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무의식 세계와 의식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 규모가 얼마일지 측량조차 할 수 없는 개인적, 사회적 비용의 낭비를 막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사실을 사실대로 분명히 알 때 우리 모두를 파괴할 수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모두를 위한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는 소식은 100년 가뭄 끝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목타는 대지를 흠뻑 적셨다.
한민족韓民族의 천명天命
고구려의 경전 다물흥방가는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새로 온 것은 존중한다. 따라서 지나간 것은 새로 생김도 없고 멸해짐도 없으며, 새로 온 것은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다."
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내용은 우리의 고유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외래종교와 사상을 존중하자는 고구려시대의 사회적 합의이다. 그리고 이 합의는 고구려의 강력했던 국력의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구려시대의 이 합의는 천수백년후인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에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고구려시대의 합의가 천수백년간의 세월동안 우리 사회 안에서 갈고 닦여지며 이루어낸 의미심장한 성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은 지난 만년동안 계승되어온 고유의 사상을 성공적으로 계승했고, 유불선과 기독교를 천수백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체질화시켜 그 종주국에 버금가는 정신적 경쟁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는 기적이다.
"모든 덕은 다른 덕에 대해 질투를 품는다. 질투는 무서운 것이며 여러 덕은 질투 때문에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다.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자는 마침내 자신에게로 전갈의 독침을 돌리게 된다."
니이체가 싸늘하게 분석한 모든 덕德 간의 질투, 다시 말해 종교간의 질투는 이제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악惡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더러운濁 인간성이 노출되는 분야가 되었다. 또 인간사이에 가장 박薄한 인정이 드러나는 분야가 되었다. 이제 종교간의 질투가 인류에게 그 어떤 핵폭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달민족의 공동체 안에는 종교간의 질투들이 아무리 흉악한 것이라 해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이미 고구려 때부터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천수백년간 모두 하나가 되었다.
필자는 인류역사상 민족단위에서 이 같은 정신적 경쟁력을 보유했던 민족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그 어떤 기록도 본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민족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정신적 경쟁력을 지닌 미래의 인류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이 경쟁력은 새로운 시대에 우리 민족의 재산이며 우리 나라의 국력이다.
더구나 산업사회의 물질문명이 저물고 바야흐로 문화와 지식, 정보라는 정신문명이 시작되는 전혀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는 때를 기다려 이 모든 경쟁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편의상 이 경이로운 프로그램의 이름을 '한민족韓民族의 천명天命'이라 하자.
우리 민족의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개인과 사회에 어떤 불행을 안겨 줄지 예측이 안 되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이 무서운 불일치를 천수백년이라는 세월 동안 갈고 닦아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미 배양했다.
이 능력, 아니 '한민족(韓民族)의 천명(天命)'은 우리 모두를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둘도 없는 긍정적 에너지가 되어줄 수 있다.
파괴적인 에너지와 긍정적인 에너지의 양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지금까지처럼 숙명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