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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心性을 영성靈性으로 다듬어 쓰는 수필
심성心性을 영성靈性으로 다듬어 쓰는 수필
-김열규의 수필론 <수필 생각, 인생 생각>-
이방주
Ⅰ. 들어가기
수필 창작은 수필의 문학적 독자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수필가들은 수필이 시나 소설 같은 다른 문학 양식에 비해 대접받지 못한다고 섭섭해 한다. 사실은 그런 불평을 하기 전에 먼저 수필문학의 본질을 알고 또 어떤 수필관을 가지고 창작에 임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수필가들은 먼저 수필의 장르적 독자성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창작에 임해야 수필다운 글을 쓸 수 있고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시, 소설, 희곡이 허구인데 반해 수필은 수필가 자신의 체험의 기록이다. 시, 소설, 희곡이 상상을 바탕으로 체험을 재구성하는데 비해 사실의 기록인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을 재구성한다. 시는 시적 자아 또는 서정적 자아가, 소설은 서술적 자아라는 허구적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반면 수필은 작가와 동일한 수필적 자아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수필은 사실과 체험의 철학적 해석이 중심이 되므로 허구적 문학 양식에 비해 체험의 진정성으로 이웃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러한 소통에 의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고통이 치유된다. 그러므로 수필은 체험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 없으면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고 만다. 시는 비유나 상징에 의해 빚어지는 언어적 아름다움에서 예술성이 드러나고, 소설은 허구적 사건의 개연성에서 공감을 얻어낸다면, 수필은 체험의 진정성과 언어의 품격에 미적 울림을 기대한다.
김열규의 수필론 <수필 생각, 인생 생각>(김열규 수필선 《산에 마음을 기대고 바다에 영혼을 맡기면》 (2009. 좋은수필사)은 수필의 이러한 본질과 특성이 명쾌하게 담았다. 이 글은 《산에 마음을 기대고 바다에 영혼을 맡기면》의 1부 <왜 글을 쓰냐면 웃지요>와 5부 <수필 생각, 인생 생각>을 중심 텍스트로 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두 편의 수필론에 김열규 수필가의 수필관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수필선집 《산에 마음을 기대고 바다에 영혼을 맡기면》에 수록된 작품을 필요에 따라 뽑아 인용하도록 하겠다.
Ⅱ. 수필이 지향하는 세계
1. 수필은 성필聖筆
수필은 필筆을 수隨하면 쓸 수 있을 것으로 안다. 붓이 가는 대로 따라서 쓰는 것이 수필이라 한다. 이 말이 수필문학의 위상을 떨어뜨렸을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이 말만큼 수필을 잘 설명한 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붓을 단순한 붓이라 이해하면 이 말이 수필문학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원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붓이란 곧 사색이다. 붓은 수필가의 생각이고 축적된 경험이다. 붓은 그의 진정한 체험이고 과거의 고백이며 미래에 대한 맹세이다. 붓은 그의 가치관을 말하고 그 가치관에 따른 선택의 기준이다. 곧 수필가의 생활철학이다. 붓은 그의 교양이고 기초가 되는 지적 재산이다. 붓은 그의 윤리적 태도이고 그의 신언서판이다. 붓은 속일 수도 감출 수도 없는 수필가 자신이다.
붓은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붓을 잘 닦아서 써야 한다. 글쓰기에 앞서 맑은 물에 잘 닦아 마음을 가다듬어 써야 한다. 잘 닦은 붓은 힘찬 용틀임으로 생기 넘치는 글을 쓸 수 있지만, 닦지 않은 붓은 뻣뻣하여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수필가는 글을 쓰기 전에 먼저 수신修身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수필隨筆은 그래서 수필修筆이다. 김열규는 이러한 수필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수隨는 워낙 타墮의 원천적인 의미와 다를 바 없이 신령이 깃든 곳을 찾아가서 그 뜻을 물어서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신령을 섬기고 신과 손잡고 어디든 언제든 가고 또 가는 것이 다름 아닌 수隨다.
그러자면 인간 소행所行은 절로 정갈해지고 또 거룩해질 것이니 그것에 바로 수필 쓰는 붓 길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지에서는 수필은 ‘성필聖筆이 되고 제문쓰기가 될 것이다.
우리의 심기心氣를 영기靈氣로 씻고 우리의 심성心性을 영성靈性으로 다듬으면서 쓰는 수필, 그게 어찌 쉬울까마는 그 아스라한 경지를 동경하고 싶다.
- <수필 생각, 인생 생각>에서 -
그러면서 우리들은 허다하게 ‘영성을 잊고 심지어는 영혼을 잃고 살고 있다.’고 우리네 마음을 대신 고백하였다. 따름[隨]은 결국 순리와 신령스러움을 이루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성필을 이루면 인간 소행은 절로 정갈해지고 거룩해진다. 결국 순리와 신령스러움을 따른다는 말은 붓을 닦아 아주 부드럽게 만들어야 힘찬 글을 쓸 수 있다는 말과 통한다.
과연 수필은 성필聖筆이다. 김열규는 수필이 성필이란 수필관을 정립하기 위해 ‘筆’에 의미의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隨’의 해석에 중심 의미를 실었다.
그는 ‘隨’의 해석을 매우 진지하게 했는데 이런 점을 보면 그가 국문학자이면서 민속학을 연구한 학자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수필이 성필聖筆이 되기 위한 다섯 가지 해석을
붙였는데 이를 통하여
그의 수필관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첫째는 수행해서 좋고 수반해서
뜻있는 것을 따라서 가는 ‘수隨’다.
‘개울가에서는 물소리 따라서 쓰고
구름 쳐다보고는 그 흐름을 따라서 쓰는 것’
‘바람 불면 풀잎처럼 너울대고
햇살 눈부시면 풀잎 끝에 구슬로 영그는 것’이
수필이라 했다.
햇발 싱그러운 날에는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운동회를 벌일 것 같아 보인다.
흐린 날이나 안개 짙은 날이면 좌선坐禪도 하고 묵상에 잠기기도 한다.
맑은 날, 황혼 무렵이면 붉은 노을에 지펴서는 미소를 짓는 그들, 보는 이 마음도 연분홍으로 곱게 물이 든다.
섬들은 바다에 뜬 다양함이고 변화다. 그 섬 내려다보면서 중치고갯마루에 서는 것, 그 건 온전하게 딴 세상살이를 하는 것이다. 이승 고갯마루에 서서는 피안을 누리는 것이다.
- <중치고개 그 달막재에 서면>에서-
섬을 바라보면서 날씨에 따라서 변하는 모습을 그린 글이다. 이렇게 흐름을 따라서 저절로 써지는 것이 수필이라는 그의 수필관은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두 번째 ‘수隨’의 의미는 진리를 따르고 진정眞情을 따른 것이라 했다
. 진리와 진정의 가치를 글로 옮겨 놓으면 바로 수필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수필은 생각과 글의 진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시가 정서를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하는데 중심을 둔다면 소설은 허구적 서사의 개연성이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에 비해 수필은 미적 형상보다 오히려
체험의 진정성과 해석의 철학성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문학에 대하여 치유의 효과를 기대한다면,
수필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 내용을 자신의 목소리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양식적 특성 때문에
타문학 양식에 비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사물의 진수를 담고
만상의 진골을 품은 수필’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산은 그 품마다 개울을 열었다. 개울은 흘러서 들을 열었다. 들에 생기를 주면서 개울가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였다. 높은 곳 산짐승들은 골짝에서 목축이고, 얕은 곳 사람들은 개울에서 목축이면서 목숨 부지해 왔다. 이렇게 해서 개울은 스스로 열리는 여세로 세상을 열었다. 덩달아서 목숨들을 열었다.
-<개울 흐르고 세상 열렸으니>에서-
그의 수필은 이렇게 자연의 진수眞髓와 만상의 진골眞骨을 품었다.
산과 개울은 자연의 시작이다. 산은 마을을 나누고 개울을 따라 사람들은 소통하게 된다. 사람들은 산에 의지하고 살면서 물을 따라 생명의 에너지를 얻는다. 자연의 만상과 사람의 소통을 그 진수를 추구하여 곡절을 찾아내는 것이 수필이라는 그의 수필관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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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수隨’의 미덕은 모방에서 얻어낸다.
따름이란 ‘본보기요 모범이요 가르침’이라고 했다.
수필쓰기의 첫 단계는 만상을 관찰하여
어떤 물질적인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물질적인 상상력에 의해 촉발된 기본 이미지는 상상의 도약에 의해 결국 원형적이고 궁극적인 가치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수필이 꿈꾸는 보편적인 세계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체계는 작가와 독자 간의 근본적인 교감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수隨의 세 번째 미덕인 본보기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수필은 결국 자연의 섭리를 본으로 삼는 것이다.
사랑도 미움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곡절이 없으면 사랑은 맨송맨송해서 젊은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미움에도 휘고 뻗음이 없다면 미움을 품은 사람이 먼저 배겨내질 못할 것이다. 감기고 옭혀들고 하던 미움은 그 여세로도 실타래처럼 풀리기도 한다.
-<개울 흐르고 세상 열렸으니>에서-
개울은 곧바로 물길을 트지 않고 휘돌고 감돌고 하면서 꺾여서는 펴고 펴서는 다시 꺾이고 하면서 물길 연다.
길이 그렇고 고개가 그렇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도 얻음과 잃음 막힘과 트임이 이를 본을 삼고 있다는 말이다.
수필가는 자연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아내고 어떻게 자연을 본받고 있는지 알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수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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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수隨’의 의미는 ‘존재의 어울림’을 들었다. 사물과 사물이 진솔한 속내를 내보임으로 서로 따르고 보완하는 것이라 한다.
개울 물살 따라서 구름이 모양 짓고 바람결 따라서 산마루의 마음에 설레는 그 경지는 ‘수隨’의 구실이다. 그러므로 그 은근한 비경에 그 은은한 선경仙境에 인연 대는 것이 곧 수필이다.
- <수필 생각, 인생 생각>에서 -
‘인因’은 어떤 사물의 근원을 뜻한다.
그런데 이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입口자 안에 작게 큰大자가 들어 있다.
껍질만 벗겨내면 얼마든지 클 수 있는 가능성을 형상화했다. 결국 ‘인因’은 씨앗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연이란 말은 씨앗과 연줄로 해석할 수 있다.
수필은 은근한 비경과 은은한 선경이 씨앗이 되어 창작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만상과 만물의 심성교류라고 했다. 수필 작가는 독자와 교류할 뿐 아니라 꽃과 교류하고 나무와 교류한다. 만상에 기대어 좋은 글로 쓰이는 것이 수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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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수隨’의 미덕은 심령과 원천을 따라 쓰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앞서 수필은 붓을 닦아서 쓰는 글이라 말했다.
붓을 닦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것이고, 가치관을 닦는 것이고 도를 닦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수필修筆’ ‘수행修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제대로 닦았을 때 수필가는 만상 앞에 자유로운 자세로 바로 앉아 창작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2. 수필은 자기 응시와 진실의 토로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주의, 자기애, 자존심, 고결, 순결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전설에서 연유한 꽃말이다. 나르키소스라는 잘 생긴 청년은 맑은 물에 비친 아름다움에 반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수선화이다. 소년의 화신이라 그런지 수선화에도 암술은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수선화는 자기를 사랑하는 나르키소스의 영혼이다. 심리학에서도 지나친 자기애를 나르시시즘이라 한다. 그런데 이 수선화와 수필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김열규는 수필의 특성을 수선화에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들 누구나가 추구하는 수필의 정情이, 한 송이 수선화이듯이 피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우리들 각자의 얼굴마냥, 우리들 각자의 다만 하나뿐일 마음을 응시한 결실로 수필이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 <수필 생각, 인생 생각>에서 -
결국 수필은 나를 응시하여 하나뿐인 나를 찾아내는 작업이란 말이다. 자신의 마음의 고갱이를 찾아내는 작업이 수필이란 말이다.
김열규는 수필이 나르키소스의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외에 내심의 깊이를 봉선화처럼 터트려 보여주는 수필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익은 우리의 진정이, 봉선화 씨앗주머니 터지듯이, 이 보란 듯이 가슴 젖히고 수필을 통해서 토로’되어야 한다고 했다. 솔직한 고백이 그만큼 수필의 예술성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수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내보이지 않고 감추면 의미 없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창피하다면서 고백에 관한 딜레마를 토로했다.
그러나 부끄러운 체험도 고백한 이후에는 나의 체험일 뿐 아니라 모든 이의 공동체험이 되므로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사실 솔직하지 않은 고백에서 체험의 진정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수선화 같은 자기 응시와 봉선화 씨앗주머니 같은 진실 토로라는 그의 수필관은 공감을 준다.
3.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
다산 정약용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글은 문학이 아니라고 했다.
시대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있어야 문학이란 의미이다.
김열규 수필가는 수필은 대상에 대하여 ‘비수 같은 눈살로 반짝이면서 사물을 캐고 드는 것은 그리고 번갯불 같은 입놀림으로 인생을 따지는 것’은 수필이 비평의 문학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시가 신과의 소통을 기대한다면 수필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진정한 체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삶의 문제 해결 방법을 매우 겸손한 말로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속삭임이다.
수필은 그 체험의 진정성으로 대상을 설득하고, 원형적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공감을 얻어내는 문학이다. 수필은 ‘때로는 부드러운 말투, 우아한 말씨로’ ‘때로는 매서운 말투로, 다부진 말씨로’ 비평과 비판을 해낸다.
김열규는 수필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평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뚫어지라고 노려본다. 샅샅이 뒤지고 캔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것, 그저 그렇고 그런 것으로 밀쳐두기 쉬운 것일수록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수필은 찰거머리가 된다.
그럴 때, 수필은 돋보기가 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아예 현미경이 된다. 모험스러운 돋보기, 탐험하는 현미경, 그것이 곧 수필이다.
- <수필 생각, 인생 생각>에서 -
비평과 비판의 수필관은 다음과 같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오늘날 도시에는 이웃이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웃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도시에는 남은 있어도 이웃이 없다.
이웃 형, 이웃 누이, 이웃 아저씨, 아웃 아주머니 …….
그 정겨웠던 말들! 그 정다웠던 가슴들!
하지만, 이제 이 말들은 겨우 사전에나 묻혀 있을 뿐이다. 이 말들은 모두 한마을 안에는 ‘이웃 일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도시 공간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 <이웃사촌들 이야기>에서 -
이 글은 ‘하일면 송천마을에서’란 부제가 붙은 작품인 것으로 보아 귀향한 터전에서 느끼는 이웃 간의 정을 도시와 대비적으로 말한 것이다.
시골 생활에 대조되는 도시 생활에 대한 비판이다. 수필에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비판도 있지만 상관물을 통한 간접적인 비판도 있게 마련이다.
김열규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수필관 이외에도 수필은 ‘신변잡기’란 말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수필을 ‘신변잡기’라고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평론가는 신변잡기를 벗어나기 위해 신변에서 뛰어넘어 소재 영역을 넓혀야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제까지 수필을 쓸 때 신변에서 소재를 얻되 잡기에 머물지 말고 신변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 의미화해야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열규의 수필관에서는 이런 생각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김열규는 ‘잡기雜記’란 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잡기雜記’란 ‘잡동사니’ ‘잡음’ ‘잡된 것’일뿐 아니라 ‘잡영雜英’이란 현란한 아름다움을 의미한다면서 ‘여러 가지, 갖가지 어울림’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변잡기란 신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에서 현란하게 일어나는 아름다운 기운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수필관에 의하면 아무도 수필을 신변잡기라면서 그 문학적 가치를 폄훼할 수 없을 것이다.
Ⅲ. 김열규 수필관의 의의와 한계
김열규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독서광이었다고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그는 어린 시절의 독서가 자신의 수필에 밑바탕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수필 생각, 인생 생각>에서 토로한 수필관을 이렇게 정리한다.
수필은 사물의 본성을, 세계의 진실을, 그리고 인생살이의 묘방妙方을 찾아내고 들추어낸다. 그러니 수필은 비판의 눈을, 비평의 말투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