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여름, 인도 불교대학의 초청을 받은 나는 영어회화를 익히고자 잠시 대구의 ECA 학원에 다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다닌 것이었건만, 학원 수강생 중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삽 시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대구에 나온 김에 법문을 해달라며 여기저기서 계속 졸라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연한 계기로 2군 사령부 장교들 모임에 가서 저녁마다 한 시간씩 일주일 동안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법문을 듣는 사람들 중 2군사령관의 불심은 특히 깊었습니다.
그는 2군 사령부 안에 법당을 짓고 종각도 세우고 탱화도 봉안하는 등 많은 불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법회를 마치는 날 사령관의 집안에는 매우 불행한 사건이 불어닥쳤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사령관의 외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감포 앞바다로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이 사고로 2군사령부 전체는 초상집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사령관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방 안에만 들어앉아 있었으며, 거의 실신상태에 빠진 부인은 엎친 덮친 격으로 2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이윽고 팔공산 동화사에서 아들의 49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볼 일로 참석할 수 없었으므로 뒤늦게 그날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의 독경과 염불을 들으며 아들의 명복을 빌던 사령관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패를 모신 영단을 향해 버럭 같이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이놈의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 이놈!"
감히 보통 사람으로는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있는 대로 퍼붓고는 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법당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독경하던 스님과 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소동에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밤 사령관의 명으로 헌병대장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가는 도중, 헌병대장은 사령관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소상히 일러주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사령관님의 금쪽같은 외동아들입니다. 친구 둘과 감포 해수욕장에 갔다가, 사람들이 많은 해수욕장을 피해 주위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바위에서 다이빙을 하였는데, 친구 둘은 금방 물 위로 나왔으나 사령관의 아들만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황급히 수색해보니 그 아들은 뾰족한 바윗돌에 가슴 명치를 찔려 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말 잘 듣고 착하던 외아들이 그렇게 죽었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잠시 후 나는 사령관이 기거하는 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방 안에 촛불을 밝혀놓고 따로 자리 하나를 마련하여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령관은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제가 지금까지 불교를 믿기는 믿었어도 헛껍데기만을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불교를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는 나에게 자리를 권한 사령관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었습니다.
"6.25 사변 당시 저는 30여단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자신감에 넘쳐흘렀던 저는 백두산 꼭대기에 제일 먼저 태극기를 꼽기 위해 선두에 서서 부대원들을 지휘하며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문이 날라왔습니다.
'지휘관 회의가 있으니 급히 경무대로 오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급히 경무대를 향해 출발하면서, 평소 아끼고 신임하던 부관에게 거듭거듭 당부하였습니다.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중공군 수십만 명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한시도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시간 내에 돌아오지 못하면 부관이 나 대신 백두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아라.'
그런데 '가는 날이 바로 장날' 이라더니, 그날 저녁 중공군 30만 명이 몰려와서 산을 둘러싸고 숨 쉴 틈 없이 박격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우리 부대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살 당하였습니다.
뒤늦게 급보를 받고 달려가 보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급히 부관을 찾았습니다.
'부관은 어디 있는가?'
얼마 동안 찾다가' 어찌 그 와중에 부관인들 무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 가닥 희망조차 포기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당연히 죽었을 것으로 여겼던 부관이 쫓아 들어왔습니다.
'살아있었구나, 어떻게 너는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
'죄송합니다. 실은 이웃 온천에 있었습니다.'
'온천? 누구와?'
'기생들과 함께....'
'너 같은 놈은 군사재판에 회부할 감도되지 못한다. 내 손에 죽어라'
어찌나 부아가 치미는지 그 자리에서 권총 세발을 쏘았고, 부관은 피를 쏟으며 나의 책상 앞에 고꾸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21년 전의 일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 낮 아들의 위패를 놓은 시식상 앞에 그 부관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였으므로 엉겁결에 일어나 고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로 그날 죽은 부관이 이번에 죽은 아들로 태어난 것이 틀림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부관이 죽은 날과 아들이 태어난 날짜를 따져보아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모셔오게 한 것입니다."
당시의 2군 사령관이었던 육군 중장 박은용 장군은 이렇게 이야기를 매듭지었습니다.
부관은 자기의 가슴에 구멍을 내어 죽인 상관의 가장 사랑하는 외동아들로 태어났고, 그 아들은 가슴을 다쳐 죽음으로써 아버지의 가슴에 구멍을 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