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수행
글 수 461
모세 이야기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둘을 들라고 하면 필경 요셉과 모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물론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성경을 떠나서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고 성경의 내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로 오랫동안 막내였던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며, 그는 이집트에 도착한 지 십여 년 만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1720년경이다. 그리고 후에 요셉은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버지와 70여 세대의 형제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출하여 이집트의 고센(Goshen)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한다. 이 곳은 ‘람세스(Ramesses)의 땅’이라고 창세기 47장 11절에 설명하였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이 때가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한 때가 되고, 3백여 년 후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이기원전 1491년의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람세스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람세스 2세(Ramesses II., c.1304~1237 B.C.)의 소유지를 말하는데, 카이로 출신 이집트 역사가 오스만(Ahmed Osman)에 의하면 기원전 1491년은 람세스 왕이 존재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고, 람세스 왕 때 고센이란 곳에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람세스 2세를 위해 고센이란 곳에 곡식을 넣어 두는 창고들을 건설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와 약 3-4백여 년의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정하여 짝을 맞추면 요셉이 이집트에 간 것이 기원전 18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15세기 초가 되는 것이고, 그는 ‘투트모시스 4세(Tuthmosis IV., c.1413~1405 B.C.)’라는 파라오 밑에서 재상을 하게 되었으며, 이집트에서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지 않고 유야(Yuya: Yusuf the Vizier, 즉 재상 Yusuf에서 기인한 말. Yusuf는 요셉을 이집트화한 말)라고 불렀다 한다. 유야에 관련된 그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파라오 투트모시스가 죽을 때, 그의 아들은 당시의 이집트 관례에 따라 왕위를 잇는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형제인 시타문(Sitamun)과 결혼하여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라는 파라오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유야(요셉)의 딸 티예(Tiye)와도 결혼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러나 티예의 아버지가 유대인으로서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권력을 너무 크게 잡는 것을 우려하는 이집트 사람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티예가 낳는 아들은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었고, 티예가 임신했을 때에는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죽이라고 파라오가 특별 칙령까지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티예가 해산할 때 즈음해서 자기의 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고센 땅 자루(Zarw) 강 상류에 별장을 짓고, 그 곳에 가서 기원전 1394년경 아이를 낳았는데, 과연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때 따라갔던 산파역 상궁에 해당하는 여자와 함께 티예는 아이를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워 유야의 배다른 형제 레위(Levi)의 집으로 가도록 하였다. 즉 삼촌에게 맡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는 사원의 승려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한편 첫째 부인인 시타문은 네퍼티티(Nefertiti)라는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티예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한편 나일 강 델타의 동쪽 끝 지방에서 자라던 아미나답은 십대에 들어서면서 나일 강 상류 지방인 테베스(Thebes)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십분 납득하고 있는 아미나답은 당시 테베스에서 주로 섬기고 있던 아문(Amun: 유대인들은 Amon 또는 Amen이라 불렀다)이라는 신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신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46장 25절에 아몬(Amon)이란 신으로 소개·설명되었다. 이러한 사회조건에서 아미나답은 아문 신을 없애고 히브리 사람들이 섬기던 아텐(Aten: 원래는 페니키아 민족에서 유래한 신으로 이름 자체는 다만 주님이란 뜻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이를 받아 융화시킨 것이다)이라는 형상이 없는 신을 소개하고, 자기 이름 아미나답을 악헤나텐(Akhenaten)으로 바꾸었다.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은 원래 유대계 이름으로 이집트어 아멘호텝(Amenhotep)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아몬(Amun) 또는 아멘(Amen) 신이 흡족해한다’는 뜻이었고, 새로 지은 악헤나텐은 아텐(Aten: 히브리의 Adon과 동일 신) 신의 종이란 뜻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파라오 아멘호텝 3세는 병으로 눕게 되었고,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는 파라오는 딸 네퍼티티와 악헤나텐을 혼인시켜 악헤나텐을 응당한 파라오로 계승시키도록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함께 국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드디어 아멘호텝 3세가 죽고 파라오가 된 악헤나텐은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재위기간 c.1367~1361 B.C.)가 되었다. 그는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투탕하텐(Tutankhaten)이라 하였다. 악헤나텐은 파라오가 되자마자 이집트 신을 섬기던 모든 사원을 폐쇄하고 아텐(Aten) 신을 섬기는 사원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신앙에서부터 통치방법까지 대혁명을 일으켰다. 이러한 그의 과격한 변혁은 사면팔방으로 적을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고대부터 섬겨 오던 태양신 라(Ra)와 아문(Amun)을 섬기던 승려부터 신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위협과 탄원이 있었으나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의 결단을 고수하였다. 결국 무장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악헤나텐뿐 아니라 유대인 전반에 걸친 타도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파라오 아멘호텝 4세, 즉 악헨나텐은 40여 년 후에 피난에서 돌아와 위험에 처한 유대인들을 이끌고 피신하여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으며, 혁명세력은 잠시 악헤나텐의 조카 스멩카레(Smenkhkare-일명 아론Aaron)를 왕위에 앉혔으나 곧 11살 정도밖에 안 된 악헤나텐의 아들 투탕하텐을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어린 파라오는 왕위에 앉은 지 불과 9년 내지 10년 후, 아직 젊은 나이에 타살로 목숨을 잃게 되고, 오늘날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유품이 세계 여러 곳에서 순환 전시를 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집트를 떠난 악헤나텐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도착한 곳이 시내(Sinai)라는 곳이었다.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 갖고 간 것은 파라오를 상징하는 셉터라고 부르는 봉(棒)이었다. 셉터(sceptre)라고 부르는 이 봉은 군악대의 지휘자가 들고 흔드는 봉과 같이 생긴 것을 말하는데, 악헤나텐이 갖고 간 파라오의 봉은 머리를 놋쇠로 만든 뱀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임금이 옥새를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여, 그를 따라 시내까지 함께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헤나텐이 당연히 파라오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연한 계승자 또는 계승자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그 별명이 ‘모세(Mose, Moses 또는 Mosis)’라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서 ‘모세’라는 이름의 말뜻은 계승자라는 것이다. 요셉이 처음 이집트에서 벼슬을 할 때 파라오의 이름이 투트모시스(Tuthmosis)라 하였다. 그 이름은 ‘투트(Tuth)’와 ‘모세(Mose)’ 또는 ‘모시스(Mosis)’를 합한 이름으로 ‘투트를 계승하여 태어난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모세라는 이름의 어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람세스(Ramesses)라는 이름도 태양신 라(Ra)를 계승 또는 대표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마찬가지 형식의 이름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모세(악헤나텐)는 피라메세(Pi-Ramesses: Per Ramessu(페르 라메수) 고대 이집트 15, 19, 20대 왕조시대의 수도, 지금의 El Qantara 부근)라는 곳에서 떠나, 수에즈 운하 지역과 시내 반도를 거쳐 티마시(Timash) 호수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이 지역은 습지여서 사람은 걸어서 겨우 갈 수 있으나 말이나 수레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모세를 따라간 사람들은 야곱의 후예인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시내 산 밑에서 예배소 성막(Tabernacle)을 짓고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대신 선조의 고향인 가나안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에 페니키아(Phoenicians) 사람과 필리스티아(Philistines, 블레셋)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을 때였다. 기록에 의하면 많은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바다에서도 많은 전투를 벌였고, 특히 여호수아(Joshua)의 지휘 아래 한때는 요르단을 건너 제리코(Jericho)까지 점령하여 소위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든든한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는 판관(Judges)들을 임명하여 통치를 하였으나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얼마 후 사울(Saul)이란 사람에 의하여 히브리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합되고 기원전 1048년에 사울을 시조로 하는 통합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나안 땅을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유명한 다윗(David)은 그 다음 세대의 사람으로 사울의 딸과 결혼하고 기원전 1008년에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정도의 영토를 가진 유다의 왕이 되고, 그 후 나머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왕이 된다. 홀리 그레일(Holy Grail)의 혈통이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가가 역사적인 사적을 기본으로 찾아본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또 참고로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은 이집트인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많은 어휘를 서로 교환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7장 1~2절 또는 사무엘하 6장 3절에 ‘아비나답의 집(House of Abinadab)’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이집트어 아미나답(Aminadab)이 아문(Amun) 신이 만족했다는 뜻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만족하고 기뻐했다는 뜻이며, 아비나답의 집이란 말은 한국의 조상신,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것과 같은 일종의 사당(祠堂)을 말했던 것이다. 모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한 학자 신부도 동의하는 일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무어(Fr. Charles Moore)라는 신부는 원래 검사생활을 하다 신부가 된 사람으로 신학박사와 철학박사학위를 갖고 성서적 고전을 연구한 사람인데, 이 분도 위의 모세 이야기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예수와 마리아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대개 예수의 정체에 대하여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정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몇 년간 노력하다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당한 인간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한 하나의 존체였다는 것 정도로 얼버무리고, 그 이상 따져 볼 생각을 포기하든가 그냥 덮어놓고 그런 대로 믿으라니까 믿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우선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었는가 아니면 완전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대개는 그가 완전한 하나님도 되고 완전한 인간도 된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은 하나님이란 존재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니 그냥 믿어 두라고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이고 교리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이나 판단력이란 것을 집어넣을 필요가 어디 있었을까? 이것도 질문하는 것 자체가 감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 던지는 건방진 질문이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최소한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가 승천할 때 육신을 갖고 함께 하늘로 올라갔는가 아니면 육신은 인간이 사는 지구에 놓아두고 혼만 하늘로 올라갔는가? 만약 육신까지 갖고 올라갔다면 하늘 어디에다 두었으며, 지금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어 로켓을 타고 가면 만나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육신은 하늘에서 어디에 필요하여 갖고 갔는가? 또, 만약 육신을 이 땅에 놓아두고 승천했다면 그 육신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는가? 이에 대한 자초지종을 성경에 설명해 놓는다든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혹시 잊어버렸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가르쳐 주었어야 옳지 않은가? 그래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덤이라도 제대로 해 놓고 제사라도 드리지 않겠는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마치 유치원 학생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 자체가 교인들의 지능수준을 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교인들 자체가 자진하여 이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닐까 질문하고 싶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이 몹시 불만이셨는데, 어느 날 논쟁 중에 어머니는 동네에 살던 최남선 씨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심사숙고하여 천주교를 선택했는데 네가 뭐 그리 유식하다고 안 믿는단 말이냐며 야단치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 신부에게 부탁했으니 교리강좌에 한번 나가 보라고 당부를 하시기에, 좋다고 약속하고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간 일이 있었다. 신부를 만났더니 교회 회장을 소개하면서 주일학교도 담당하고 있으니 따라가 보라 하기에 따라갔더니, 유치원 학생과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끝난 다음 따로 시간을 내어 줄 것 같아 끝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끝나고 난 다음에 그 회장님 말씀이 강의내용을 잘 이해했냐고 하면서 그렇게 잘 설명해 주었는데 무엇이 의문스러워 안 믿느냐고 나에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돌아서 나왔다. 그 후에도 당시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가 하는 교리강좌도 두 여름이나 열심히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이런 저런 내용에 대하여 목사와 신부 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토론한 적이 많았지만, 아직도 교회에서 원하는 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필자의 현재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나 자신과 다른 학자들의 예수에 대한 의견 또는 그 동안 알아낸 사항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예수는 열다섯 살 난 마리아라는 어머니와 할아버지 뻘이 될 정도로 나이가 많았던 요셉이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세 가족은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가서 몇 년간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예수가 얼마간 자랐을 때 그는 그의 종조(從祖)할아버지 격 되는 사람을 따라 인도에도 갔다 왔다. 인도 힌두교의 성경 ‘릭 베다(Rig Vedas)’에 예수가 네팔(Nepal)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비슈누 퓨라나(Vishinu Purana)’에도 예수가 인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니 틀림없이 인도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수 당시 예수와 유대인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 Augustus: 제2대 로마의 황제, 재위 A.D. 14~37) 즉위 15년, 즉 서기 29년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세례 요한은 31년 9월 갈릴리에서 그 유명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안티파스(Herod-Antipas)에 의하여 사형을 당했다.
예수를 논할 때 예수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람은 물론 그를 낳은 부모가 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교육시키고 돌보아 준 그의 후견인을 빠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필경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크리스천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디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서 ‘아리마태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마치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말았다. 그래서 여기에 간단하나마 잠깐 그가 어떤 신분이었으며 어떤 일을 했나 소개하고 지나가기로 하겠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원래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예루살렘 지방에 근거를 두기도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의 세상에서 니코데무스(Nicodemus)와 함께 가장 부자로 알려진 두 사람 중 하나였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영국의 주석과 납 광산을 위시하여 전세계에 광산을 갖고 있던, 이를테면 광산왕이라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의 광산은 주로 영국에 있었지만 중동지방과 인도에까지도 광산을 갖고 있어, 이러한 연유로 예수가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 그를 따라 인도까지 가게 되기도 했고, 예수가 죽은 다음 예수의 가족들을 영국으로 피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필경 지금 세상에 비교한다면 록펠러 정도의 부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가 하도 부자였고 로마제국에 무기와 기구의 제작에 필요한 철 자재를 거의 모두 공급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Citizen)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블리스 데큐리오(Noblis Decurio)’란 칭호를 로마 황제로부터 받기까지 했다. 이 칭호는 로마제국에 금속을 마련하는 책임자라는 뜻이며, 키케로(Cicero)는 ‘노블리스 데큐리오’라는 직위가 로마의 상원의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직위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러한 그의 직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루살렘 지역에 있던 일종의 식민지 유대인들의 자치의회인 ‘산헤드린(Sanhedrin)’의 중요한 의원이었으며, 그의 동료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서 원로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부자였기 때문에 여러 곳에 장원을 갖고 있었고, 성경에 나오는 겟세마네(Gethsemani) 동산이란 장원도 그의 것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뒤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담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일등 부자로 알려졌던 아리마태아 요셉은 에세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와 함께 다른 부자로 알려졌던 니코데무스라는 사람은 바리새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가 가고 난 다음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의 가족들 사이에 심한 분쟁이 일어난다. 즉, 예수의 혈통으로 예수의 지위를 계승하려고 한 가족들 세력과 교리와 철학을 중심으로 했던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이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세력은 결국 바울(Paul)이라는 바리새 사람으로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이끌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가족들은 거대한 부자였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거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 사람들에게 뒤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은 니코데무스라는 부자였다. 물론 후에 니코데무스도 크리스천이 되었고,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필라테(Pontius Pilate, 본디오 빌로도)나 그의 부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Claudia Procula)도 모두 크리스천이 된다.
예수의 가족과 그 가족을 이끌던 아리마태아 요셉은 세력싸움에 패배했다고도 하지만, 로마 당국과 산헤드린의 명령에 의하여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포고 때문에도 신변안전을 위해 멀리 피신을 해야 했었다. 그때 함께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부인 막달라 마리아, 성모 마리아의 동서인 클레오파스의 마리아(Maria of Cleophas), 막달라 마리아의 오라버니 라자로, 예수의 유모 등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얼마간 머물다 결국 영국(Gaul)으로 가게 된다. 이것이 서력 36년경이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라는 곳으로, 지금의 서머싯(Somerset) 주에 있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이렇게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본인은 태연하게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 결국 산헤드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마태아 요셉을 죽이지 않고 다만 닻도 노도 없는 배에 태워 바다에 떠내려보냈다. 아마도 이렇게 한 것은 그 동안 산헤드린 의원들이 존경하던 아리마태아 요셉을 벌은 주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리마태아 요셉은 자기 소유의 많은 선박과 부하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구출되어 유럽 쪽으로 피신을 갔고, 이 때에야 비로소 그도 나머지 예수의 가족들과 합세하여 영국 글래스턴베리에 정착하여 큰 성당을 짓고 선교사업에 열중하게 된다. 이 성당을 글래스턴베리 사원(Glastonbury Abbey)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가는 곳이며, 이 곳에 성모 마리아가 묻혀 있다고도 한다. 그 때문에 예수의 사도 도마(Thomas), 빌립(Philip) 같은 사람들은 자주 찾아와서 그와 마리아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고, 바울(Paul)과 누가(Luke)도 이 곳을 찾았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후에 ‘영국의 사도(Apostle of Britain)’란 호칭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국을 지칭하여 ‘신성한 섬(Sacred Isle)’ 또는 모국(母國-Motherland) 또는 ‘지상에서 가장 지하가 빈 땅(the most hollowed ground on earth)’이란 말을 전 유럽에 퍼뜨리기도 했다. 여하튼 서력 196년경 로마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기 시작한 것보다 훨씬 이전에 영국이 크리스천화됐다는 설이 여기에 기인한 것이며, 로마제국이 영국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 할 때 이미 영국에 나름대로의 크리스천이 있는 것을 보고 로마 당국은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하고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 없앴다. 통상적으로 이 때의 크리스천들을 ‘켈트 크리스천(Celtic Christian)’이라고 하며, 그들이 사용하던 십자가는 십자가 교차점에 원(圓)이 있어 이를 ‘켈트의 십자가(Celtic Cross)’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태어나서 이집트로 피난가게 된 것도 아리마태아 요셉의 기반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며, 예수를 교육시킨 사람도 그였으며, 예수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준 사람도 이 사람이었다. 또 그는 예수가 죽을 때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에 안장시키는 일 등 모든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그 후에도 예수의 가족을 피신시켜 끝까지 돌보아 준 사람으로 예수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창설과정에서도 가장 공이 많은 사람 중 하나로 꼽힐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뿐 아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가 어렸을 때 죽어서 문제가 안 되지만, 그의 어머니는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건재해 있었다. 그러나 예수 사후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만약 성모 마리아를 지금처럼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다면,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모 마리아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를 자문해 보기 바란다. 현재의 크리스천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다만 예수를 동정녀로서 잉태했다는 점, 즉 그리스도교의 신성을 강조하는 목적에만 열성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부모를 섬기라는 십계명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모범인가? 그러면 왜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숨겨 버렸을까?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가장 앞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은 예수가 달성하려고 노력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안에서 정치놀음이 작용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옛 소련에서 공산국가의 상징으로 레닌(Lenin)을 앞세우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스탈린이 레닌의 노선을 없애 버리고 자기의 노선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존경을 받았고 중심인물이었던 레닌을 영웅화시킨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를 앞세우고 그 안의 내용은 자기네 마음대로 요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수를 말하는 대목에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몇 마디 해보았으며, 아래에 예수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겠다.
예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공식적인 예수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그리고 그는 33세에 죽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원년, 즉 1년 12월 25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33년에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가 태어난 해부터 확인하여 보자. 우선 마태복음 2장을 보면 헤롯 왕 때에 태어났고, 동방박사들이 동방에서 베들레헴의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갔다고 하였다. 점성가들은 원년에는 그런 별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점성가들에 의하면, 베들레헴에 별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한다. 우선 산양좌(山羊座-Capricorn) 별자리 안에서 광을 발하는 혜성은 기원전 5년 3월에 66일 동안 존재했던 일이 있었고, 독수리 별자리 안에서 기원전 4년 4월에 ‘노바(Nova)’가 폭발한 적이 있었으며, 물고기자리(Pisces)에서 기원전 7년 5, 9, 12월에 목성(Jupiter)과 토성(Saturn)이 직선상에 놓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성과 토성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일은 139년에 한 번씩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이런 일이 있었고, 다음 차례는 2100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치선이 물고기자리 안에 일어나는 일은 900년 만에 한 번씩 있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물고기 해에 물고기 달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며, 그런 이유로 초기 크리스천들은 물고기로 암호를 삼기도 했고, 교황도 어부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망원경이 없었을 터이니 육안으로 밝은 별을 보았을 것이며, 육안으로 밝은 별을 보았다는 것은 두 개의 별이 겹쳐 마치 별 하나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가 태어났을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가 호적을 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즉, 출생신고를 하라는 말이었고,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한다. 그런데 역사책에는 그 명령은 기원전 7년에 있었다고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되며, 점성가들은 예수가 기원전 7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4세기까지 사람들은 1월 6일을 예수의 생일로 알고 잔치를 했다. 그런데 ‘미트라(Mithras)’ 신을 믿는 태양종교에서의 12월 25일은 미트라의 생일이자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정복되지 않는 태양)’ 축제일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이 신봉하던 이 태양종교에서의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날과 예수가 태어난 날을 일치시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바꾸었다. 그 내용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2월 21일은 동지이다. 그리고 동지를 며칠 지나서 25일부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낮이 길어지는 것을 태양이 다시 태어남으로 간주하여 고대부터 축제를 올렸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 인빅투스’라는 것은 시리아 지방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이집트에서도 빛을 주는 미트라(Mithras)라는 태양신이 태어났다는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영원하며 미래의 심판의 날에 태양을 잘 섬긴 사람들은 죽은 자도 되살아나 부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으나 태양 대신 예수로 바뀐 것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유대인들도 ‘하누카’라는 빛의 축제일이 있는데, 첫째 날 촛불 하나로 시작하여 매일 하나씩 더하여 8일째 되는 날에는 촛불 여덟 개를 밝히는 8일간의 빛을 추모하는 축제를 하고 있다. 또 중세기에 와서는 크리스마스 때 12일간 사과나무에 여러 가지의 장식을 하고 사과로 만든 술을 마시며 남자들은 머리에 뿔 달린 의상을 입고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염을 하며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하나인 ‘크리스마스의 12일(Twelve Days of Christmas)’의 12일이라는 숫자는 이런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에서는 동짓날에 주인이 노예들에게 반대로 봉사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사투말리아(Satumalia)라는 축제일이 있었다. 이 때에는 온 집 안팎에 호화스런 치장을 하고, 미슬토(Mistletoe)라는 나무에 마치 우리의 성황당처럼 주렁주렁 장식을 매달아 놓고는 그 나무 밑에서 서로 번갈아 가며 혼잡한 성교를 하는 오르지(orgy)를 행하여 잉태를 많이 해 자식을 많이 낳도록 하는 축제이다. 또 동쪽으로 가면서 인도로 넘어와서도 많은 동짓날의 축제전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동짓날 서양 사람들처럼 요란하지는 않을 망정 잔치를 벌인 것도 이와 상통하는 일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서양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된 것이다.
만약 예수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하면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33세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33세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카발라(Kabala)를 알아야 이해된다. 카발라 철학은 유대인들이 고대에서부터 비밀리에 신봉해 오고 있는 수상학(數相學-numerology)을 포함한 철학이다. 근래에 성경을 숫자로 풀이하는 이론이 나온 것도 이 수상학을 이용한 것이고, 예수가 그 많은 제자 중에서도 12제자를 택한 이유도, 프리메이슨의 최고 계급이 33도인 것도, 미국의 휘장에 별이 13개인 것 등등 모두가 이 수상학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예수의 나이를 33세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러기 위해서 원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그런 미신 같은 일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런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미국 독립전쟁 때 미국기의 별도 13개가 있었고 남북전쟁 때 남부의 깃발에도 별이 13개였다. 이것은 13개의 주가 합쳤기 때문에 별을 13개 넣은 것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실상 그 때의 주는 11개밖에 없었는데 구태여 13개의 별을 집어넣어야 했던 것을 이해한다면 숫자가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유대인들이 1월 6일을 그의 생일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카발라에 의한 날짜였을 확률이 높다. 또 그레일(Grail)의 혈통, 즉 다윗 또는 예수의 혈통을 잇는 왕가의 한 귀족이며 학자인 가드너(Laurence Gardner)는 예수의 진짜 생일이 기원전 7년 3월 1일 일요일이라고 계산해 냈다.
진정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이었고 고향은 나사렛이었는가?
유대인들은 다윗 왕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 그래서 종국적인 유대인의 지도자는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도 다윗 왕의 후예일 것이며, 그 때문에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가 메시아로 행세하려 했던 것이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개 같은 지도급 부족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온의 칙훈서’를 보아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세계를 통일하여 지배하는 절대군주는 유대인 중에서 나올 것이며 그 사람은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다윗 왕조는 벌써 오래 전에 끝이 났고 그 뒤를 ‘마카베(Maccabees)’ 또는 ‘아스모니아(Asmonean)’라고 부르는 왕조가 이었다. 유대인들이 ‘마카베(Maccabees)’ 왕조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왕조의 혈통은 피를 섞음으로써 그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이스라엘의 왕은 아스모니아 왕조의 이르카누스 2세(Yrkanus II.)였다. 그리고 다윗 왕계의 장손은 가말라(Gamala)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던 에제키아(Ezekiah)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헤롯(Herod)이 로마의 실력가이자 셰익스피어의 소설 ‘줄리어스 시저’에서 줄리어스를 죽인 자객 중의 한 사람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클레오파트라의 애인이었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등에 업고 로마 정부로부터 유일한 합법적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로마군 2개 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에제키아는 최선을 다하여 이르카누스를 도왔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 때에 이르카누스는 헤롯에게 잡혀 죽었으며, 에제키아는 로마의 적이라 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도 얼마 후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서 아스모니아와 다윗의 전통은 끝을 맺게 되었으며, 헤롯은 전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런데 헤롯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혈통이 없었다. 그래서 헤롯은 이르카누스를 죽였지만 그의 딸 마리암네 2세(Mariamne II.)를 부인으로 삼는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은 아스모니아 가문의 전통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다윗 왕의 혈통만이 유일한 이스라엘 왕위계승의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가말라의 유다가 주동이 되어 ‘질로트’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가말라의 유다(Judas of Gamala)는 에제키아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자마자 종손으로서 가문의 가장이 되었고, 미리암네 2세의 사촌 미리암(Myrhiam)과 결혼하였다. 미리암이란 이름은 마리아의 유대인 이름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마리아로 소개되어 있고, 이 마리아가 동정녀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유다는 헤롯 왕과 대결하기 위해 질로트를 결성하게 되고, 예수,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이름들이 마가복음 6장 3절에 기록되어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헤롯이 갓난아이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상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 헤롯은 어린아이들을 죽인 일이 없으며, 다만 테러당이라 할 수 있는 질로트 당원들을 잡아죽였다. 그것은 질로트가 헤롯의 왕위를 뺏으려는 정적이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결국 유다도 헤롯에게 잡혀서 자기 아버지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식들의 보호를 위하여 안전하게 피신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부인 마리아와 함께 온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을 했던 것이고, 그런 배경 때문에 이집트에서 요셉과 온 가족은 귀족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학자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절에 가서 주로 살았고, 열 네 살 전후하여 예수를 임신하였다. 이 나이는 그 당시의 여자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적령기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에 비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해당할 정도로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성경에 목수라 하여 가난하고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목수라는 직업은 오늘의 건축가에 해당하는 직업으로 매우 존경받는 상류층의 직업이었다. 가까운 예를 들면 일본에서도 집을 짓는 일의 책임자는 목수이다. 그리고 목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다른 기능공들을 채용하고 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중상류층의 부유한 사람으로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염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대리 아버지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요셉은 대부호로서 비밀리에 이집트에도 피난을 시키고, 후에 예수를 인도로 데리고 가서 장성할 때까지 교육을 시켰고, 예수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왔을 때에는 다윗 왕의 후계자라고 하면 당장 잡히니까 메시아로서 유대인 사회에 소개하려 했으며,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간접적으로 홍보를 하려 했다는 추론이 서게 된다. 그래서 요셉이 자식 같은 마리아가 자기와 관계없이 임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 맞이한 것은 애국적인 마음에서 주변의 애국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며, 혼자 한 일도 아니고 집단으로서 사회적인 압력에 의하여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헤롯의 눈과 산헤드린을 속이기 위해 가짜 남편과 가짜 고향(나사렛)을 대고 호적신고를 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성경 여러 곳에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 ‘나사렛’이고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 때에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있지도 않았다. 나사렛이란 마을은 예수가 가고 8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 생긴 마을이었다. 누가복음 4장 29절에 보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라고 하여 나사렛의 지형을 잠깐 소개하였다. 그런데 나사렛에 가 보면 그 부근은 아주 낮고 완만한 언덕뿐이지 높은 언덕이나 낭떠러지 같은 곳이 없다. 그리스도교가 점점 확대되어 중세기에 와서는 많은 순례자가 생겼고, 순례자들은 예수가 태어난 곳을 가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교회가 마을을 창조해 내고 요셉이 목수였으니 목공소와 예수의 집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1291년에 프랑크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모슬렘에게 빼앗겼을 때 어떤 천사가 와서 그 집을 크로아티아(Croatia)로 옮겼다는 것이며, 3년 반 후에는 여기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또 천사가 와서 그 집을 이탈리아의 로레타(Loretta)라는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산타 카사(Santa Casa)’라고 하여 매년 3월 25일, 8월 15일, 9월 8일, 12월 8~10일에 이를 개방하여 순례자들이 찾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모슬렘인 터키 사람들이 쳐들어왔어도 천사들이나 하나님은 기적의 힘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 집을 부수지 못하게 막지 못하고, 대신 크로아티아나 이탈리아로 천사들이 옮기는 기적을 대신 행했다는 말이다. 만약 집을 그대로 놓아두고 모슬렘들이 집을 도저히 부술 수 없도록 기적을 보였다면, 많은 모슬렘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제로 옮긴 이는 천사가 아니라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이다.
또 누가복음 2장 39절에 보면 요셉의 본래 고향이 나사렛이란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나사렛이란 말은 ‘나사렌(Nazarene 또는 Nazarite)’이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 것이지 지명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5절에서 바울이 반국가 선동죄로 잡혀 팔레스타인 총독 앞에 나타났을 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한글 성경에 표현된 글이 있다. 한글 성경에는 나사렛 이단이라 하였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다만 나사렌 종파(sect)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또 아랍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부를 때 ‘나스라니(Nasrani)’라고 한 것과 이슬람의 성경 ‘코란’에 그리스도교를 ‘나사라(Nasara)’ 또는 ‘나자라(Nazara)’라고 부르는 것은 히브리어 어원의 ‘나즈리 하-브릿(Nazrie ha-Brit)’의 복수형 ‘노즈림(Nozrim)’에 그 근원을 둔 것이며, 그 뜻은 ‘언약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비슷한 어원으로 ‘나사롯(Nazaroth)’의 ‘나사르(nazar)’라는 말이 있다. 그 어휘의 어원은 점성학에 있다. 사해의 문서가 발견된 곳은 사해 옆 쿰란이라는 험악하게 생긴 지역이다. 이것은 그 지방에 있던 사람들의 신앙이 투철하여 그 사람들이 신봉하던 종교와 다른 중요한 일에 관한 내용을 담은 문서이며, 그 문서의 소유자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에세네(Essenes)라고 부르는 종족이었다. 우선 여기서는 간단하게 ‘나사렛’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 말해 보자. 에세네 사람들은 애초에 태양신을 믿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임에는 틀림없으나 다른 부족들이 모두 음력 달력을 사용하였어도 이들은 양력을 사용했고, 태양을 위주로 하는 점성술(astrology)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열 두 띠, 즉 열 두 별자리를 ‘나사롯(Nazaroth)’이라고 불렀다. 이의 어근(語根) ‘나사르(Nazar)’의 뜻은 마치 매일 밤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는 열 두 별자리를 둘러싸듯 한다는 것이다. 즉, 지구를 둘러싼다는 말이다. 욥기 38장 32절을 보면, “네가 열 두 궁성(constellations/Nazaroth)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열 두 궁성’이란 열 두 개의 별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영어로 된 근래의 성경에는 ‘constellation’, ‘star’ 또는 ‘zodiac’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래된 성경을 보면 ‘마사롯(Mazzaroth)’이나 ‘나사롯(Nazaroth)’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M자와 N자가 섞인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두 자를 서로 바꾸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어휘는 사해(死海) 쿰란(Qumr?n) 지방에 위치했던 에세네(Essene) 부족을 의미했지 지명을 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하여 예수의 열 두 제자 등 주변 사람들이 에세네 사람들이었다는 증거는 여러 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나사렛의 사람 나사렌(한글 NIV에는 나실인이라고 표기하였고, 가톨릭 성경에는 나지르인이라 표기하였음)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 2~21절에 기술한 것과 같이 대단히 엄격한 절제생활을 어떤 특정 기간 동안에 행했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가 아니라면 어디가 그의 고향이었단 말인가? 위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말라(Gamala)가 고향이라고 한다. 가말라라는 곳은 갈릴리 해의 동쪽에 있는 어항 벳새다(Bethsaida)라는 마을의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일명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가 하면 험준한 바위가 많아 질로트들이 숨어 있기 좋은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로마 폭동이나 항쟁은 항상 질로트들이 시작했으며, 그런 뜻에서 가말라 사람들을 진정한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며, 성경이 씌어진 4세기경에만 하더라도 아직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숨기는 것이 안전해서 예수의 고향이나 가족사항을 계속 거짓 소개했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예수는 진정한 메시아였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예수 말고도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시몬(Simon the wizard)이나 티아니스(Apollonios Tyaneas)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예수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는 완전한 유대인의 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윗 왕의 직계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헤롯 대왕은 특히 다윗 왕의 가문과 연결되는 족보들을 보이는 대로 태워 버렸지만, 유대인 사회에서도 족보를 가정마다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족보 전체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에 내려오는 예언자들은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온다고 말해 왔다. 그래서 예수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나귀를 구해 타고 들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도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인정받으려고 노력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갔고, 후에는 인도로 가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고, 정작 팔레스타인에 돌아와서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보내지 못했다. 그가 혜성처럼 돌아와 온 유대인 사회가 그를 메시아로 떠받들고 유대인의 왕으로 모시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리 쉽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다윗 왕의 장손이었고 예수의 아버지인 유다는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이고 헤롯 왕을 타도하기 위해 혁명단체인 질로트를 창설하여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그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질로트는 지하에서 30여 년간 이렇다 할 지도자 없이 별로 명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보다 불과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이 유능한 지도자로 대두되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하난(Yohanaan)이라는 유대인 이름이었고, 이것이 로마어로 번역되면서 요한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사람은 질로트에 다시 활기를 집어넣었고,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로드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왕위에 있을 때 전투를 시작하여 왕권에 도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예수에게 돌아왔어야 할 지도권을 예수의 형제들이 갖지 못하고 친척인 요한이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예수는 헤로드 안티파스 왕의 질녀이며 양녀가 된 살로메(Salome)라는 공주를 이용한다. 예수와 살로메는 먼 친척도 된다. 왜냐하면 헤롯 왕의 부인이 된 마리암네 2세는 살로메의 할머니가 되며, 다윗 왕 가문과 마카베(Maccabees) 가문과는 이미 혈연의 관계를 맺은 사이였기 때문에 예수의 혈통과 연결이 된다. 그런데 예수와 살로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리하여 살로메가 예수를 돕기 위해 부왕인 헤롯 왕을 충동질하여 세례 요한을 잡아 없애도록 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서기 31년 9월 갈릴리에서 사형당했고, 그가 가고 난 다음에 예수는 질로트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지위는 예수가 가고 난 다음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계승하였고, 야고보는 67년에 구속되어 산헤드린에 의하여 살해당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혈통에 의한 지배가 끝나게 된다.
예수는 결혼했는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예수가 결혼을 했는가, 여자관계가 있었는가 하고 질문을 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같으며, 물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보통 인간이 행하는 성적인 차원을 넘은 존재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직접이건 간접이건 예수의 결혼이나 그의 성생활에 대하여 전혀 말이 없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가 성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구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버미스(Dr. Geza Vermes) 박사는 “성경은 예수의 결혼에 관하여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 … 고대 유대인 풍습으로 이러한 문제를 파헤쳐 논한다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기도 하였다.” 이 말을 다시 되씹어 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자가 완전히 우월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결혼을 했어도 가정이나 부부관계에 관한 내용을 공중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습성이었으며, 오히려 여자관계를 멀리하고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이상하고 독특한 일이기 때문에 이야기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와 정도 이상으로 가까웠던 여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여자에게서 돈까지 받았고 피임을 권장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수가 결혼을 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해 보자. 그렇다면 그의 부인이 누구였으며, 자식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또 자식이 있었다면 몇 명이나 있었고 누구였는가? 이러한 질문은 그렇다, 안 그렇다 어느 쪽을 주장하든 양쪽 모두 자기 쪽이 확실히 옳다고 증명하기에는 물적 증거가 희박하다. 다만 이미 알고 있는 물증을 토대로 하여 정황을 참작하는 수밖에 없고, 또 물증도 해석하기에 따라 정반대의 의견을 초래할 수 있기에 다만 독자 각자가 판단하여 나름대로 믿도록 하는 길밖에 없는 줄 안다. 이러한 맥락으로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내용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내할 뿐이다. 우선 마태복음 19장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한 것을 참작하면, 정상적인 일반 사람들은 결혼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풍습을 고찰해 보면 성인이 되면 결혼은 당연한 사회조건이었고, 에세네 부족의 경우를 빼고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일부러 독신생활하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으로 한 가정의 가장은 자식의 결혼을 부모의 책임으로 여겼으며, 아들의 할례도 부모의 책임이었다. 만일 예수가 그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 예수는 자기 자신의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과시했기에 지도자로 섬김을 받았겠지만, 그가 사원 장로들 앞에서 보인 종교의식에 대한 그의 지식을 보면 유대인으로서 정식 랍비훈련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결혼 안 한 사람은 랍비로 허락되지 않았던 유대교의 ‘미시나(Mishina)’ 율법을 감안할 때 그 결론은 당연하지 않나 생각된다. 또 요한복음 2장 3~4절을 보면 ‘갈릴리’ 지방 ‘가나’라는 마을에서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 등이 모두 초대받아 갔다. 유대인들의 풍습으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이 있을 때 술과 음식은 모두 신랑·신부의 집에서 부담하도록 되어 있고 손님에게 부담 지우는 일은 실례로 여겼다. 그런데 성경의 이 대목에서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술이 떨어졌으니 술을 마련하라고 했고, 예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항의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지시를 하고, 하인들은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마리아의 명령에 복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붓고 예수가 기적을 행하여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하객들이 모두 잘 마시고 유쾌하게 놀았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식 당사자가 아니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였기에,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이 결혼식이 예수 자신의 결혼식이었다고 추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판단은 읽는 사람 각자의 추측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부인이었을까? 만약 예수가 결혼을 했다면 예수가 여행을 많이 하였기에 예수를 많이 따라다녔을 것이고, 예수 옆에 자주 있었다면 성서에 그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경을 뒤지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두 여자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하나는 갈리리(Galilee) 지방 막달라라는 마을 출신의 마리아라는 여자이다. 이런 안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보면, 그녀의 존재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예수가 죽었을 때, 그녀의 위치는 바뀌어져 몇 안 되는 중요한 소수에 속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가 선교활동을 하는 초창기인 갈릴리에 있을 때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예수와 동행하여 유대아 지방에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두 지방 사이에 언제고 예수가 필요한 때에는 그 옆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볼 때 분명 결혼한 여자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의 풍습으로 결혼 안 한 독신 여성이 동행하는 특정 남자 없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특히 종교적인 집단으로 먹고 자며 함께 움직이는 일행에 여자 혼자 따라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풍습을 고찰할 때 체면을 유지하고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혹시 그녀가 예수의 제자 중 어느 한 사람과 결혼한 것으로 성경에 소개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논리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예수와 너무 가까워 간통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을 터이니 그것도 있음직한 일이 못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예수가 일곱 귀신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뽑아냈다고 했다. 마치 막달라에게 잡귀신이 일곱이나 들어 신들린 여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막달라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당시의 토속종교에서 사랑과 임신을 다스리는 어머니 여신 이시타(Ishitar)나 천당의 여왕 아스타테(Astarte)를 섬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에 입문하기 위하여 일곱 단계의 의식(儀式)을 치렀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 일곱 번의 신(神)과 맺은 결연을 취소시켰다고 해설한다면 일리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막달라의 이야기가 나오기 바로 전에 어떤 여자가 예수에게 향수를 발라 주는 대목이 나오고, 마가복음에서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여자가 비슷한 일을 했다고 적혀 있는데, 누가나 마가 둘 다 막달라와 구분할 수 있도록 이 여자들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막달라와 공통된 점이 많아 동일인일 확률이 높다. 또 이 여자들은 예수에게 기름부음(anointment)을 준 사람들이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일은 향수를 바른다는 이야기이며, 왕과 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받는 일이었다. 이 여인들이 예수에게 기름부음을 봉사한 이유는 예수를 참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부부가 되는 한 예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생애에 가까이 와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베드로와 거의 동격에 가까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의 무덤에 시체가 없어진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막달라였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처음 알려 준 상대도 막달라였다. 따라서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는 독특한 것이었다. 역사상 유대인들의 풍습은 가장 극심한 남존여비의 사상에 젖어 있어 지금도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그러한 족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물며 그 당시의 여자란 아무리 예수의 부인이었다 해도 대접에 한계가 있었지 않나 짐작된다. 또 하나는 예수가 죽은 후 대개 그의 제자들이나 그 후계자들이 쓴 글들이 모아져 성서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의 당시 위치를 생각할 때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예수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지도 않은 여자의 신분을 구태여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또 특히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는 좋지 않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필경 막달라가 예수의 주위에 항상 있는 것이 사도들의 마음에 걸리는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이유로 그녀를 창녀로 과장하여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창녀란, 특히 사원(寺院)의 창녀란 신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돈에 몸을 파는 창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막달라가 실제로 사원의 창녀였다 해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나 가나안(Canaan) 문화에서 창녀행위란 것은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행해졌다. 사원에서 성품(聖品)을 받은 여자가 임신이나 다산(多産)을 대표하는 여신(女神)을 대신하여 사원을 찾는 남자 신도와 성교를 한다는 것은 성(聖)스러운 영적(靈的)인 결합이었기 때문에 지금 사회에서 대하는 창녀처럼 천한 계급이 아니고 오히려 성직자에 가까운 신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부일처주의를 주창해 온 그리스도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개전한 전직 창녀를 막달라(Magdalen)라 부르는 풍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또 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여자가 또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역시 마리아이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2마일 정도밖에 안 되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던 마리아이다. 이 여자도 예수에게 향수를 발라 준 여자였다고 요한복음 11장에 씌어져 있다. 그녀는 예루살렘 교외에 사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그녀의 다른 형제와 함께 모든 식구가 예수를 믿고 따르던 집안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기 가문의 무덤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고급 관리나 부자로 추정된다. 당시에 자기 가문의 무덤이 따로 있을 정도면 상당한 지위의 집안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가 베다니를 떠나 이미 여러 날이 되어 요르단에 있을 때 마리아의 오라버니 라자로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는 이 말을 듣고 베다니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일부러 이틀을 더 묵으면서 기다렸다가 길을 떠난다. 예수의 일행이 베다니에 가까이 갔을 때 라자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시킨 지 사흘이나 되었고, 마중 나온 사람은 마리아의 여자 형제인 마르다 혼자였다. 이에 예수가 마르다를 통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마중 나오도록 한 후에야 마리아가 나왔고, 그러는 동안에 예수는 더 이상 마리아의 집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예수는 그 곳에서 기다리다 마리아를 만난 후에야 그녀의 집으로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마리아가 왜 예수를 마중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가 중요하다. 이때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의 상을 맞아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상제(喪制)로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상제가 여자일 경우에 특별히 남편을 마중 나가는 일 외에는 7일간의 상이 끝날 때까지 집 밖을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의 내용에 의하면 이때 마리아와 예수 두 사람의 처신은 완전한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예수가 베다니에 방문했던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에도 나온다. 38장에서 42절까지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註: 언니일 확률이 높음)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염려하는 일이 많고 역정 되는 일이 많도다. 한 가지 일만 하면 족하노라. 마리아는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를 빼앗지 말지어다.”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가 마리아에 대하여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결혼하여 자기 부인을 다루는 관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베다니의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이 두 여자들이 동일인일 것으로 믿고 있다. 마태·마가·요한 세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그 옆에 있었다고 기록하였지만,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 옆에 있었다는 말은 없었다. 만일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처럼 예수와 가깝고 따르던 사이였고, 죽었던 자기 오라버니를 부활시켜 주었던 은인이라면,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그 마당에 그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두 여자가 동일인이라면 한 ‘마리아’만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또 이것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소위 비밀의 마가복음이라는 삭제되었던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위의 요한복음에 소개된 내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예수가 죽었다는 라자로를 되살리기 위해 베다니 어귀에 도달했을 때 마리아를 집에 두고 마르다 혼자 나왔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고, 마르다가 집에 가서 마리아에게 예수가 왔다는 말을 하자 마리아는 재빨리 집을 뛰쳐 나왔다. 그 곳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곧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다시 들어가 예수의 지시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인으로서 마리아는 지켜야 하는 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관례로는 신부나 갓 결혼한 새댁은 남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집 밖으로 나와 남편 마중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때 마리아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기 때문에 안정을 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마르다는 예수에게 마리아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는데, 예수는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택했다고 설명하면서 마리아가 편히 있는 것을 두둔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정식 메시아로 차림을 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이미 마리아는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 만약 베다니의 마리아가 부인이었다면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는 예수와 처남관계가 될 것이고 라자로에게 예수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자로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우선 그가 죽었을 때 일어난 일을 따져 보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는 베다니에서 하룻길인 요르단에 있었다. 소식을 전해 주는 이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사용 않고 다만 사랑하는 이가 아프다고 하였다(요한복음 11장 3절). 이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였음을 나타낸 증거라 할 수 있다. 또 예수는 이 소식에 죽을병이 아니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라자로가 있는 베다니로 돌아가면서도 일부러 이틀씩이나 지연시키면서 늑장을 부렸고,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는데도 서두르기는커녕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을 연출하듯 딴청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라자로에게 가자고 하였고, 그의 사도들 역시 이상한 표현을 하였다. 이때 도마(Thomas)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 하였다. 만약 라자로가 진짜 죽었다면 그 때문에 다 함께 가서 예수와 함께 단체자살을 하겠다는 뜻이었겠는가? 예수가 거의 무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에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마치 한바탕 쇼를 벌이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스미스(Prof. Morton Smith)라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는 이들이 연극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많은 사교에서 종교의식으로 입교(入敎) 또는 입단(入團)예식을 할 때 흔히 했던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주검으로 무덤에 묻어 두고, 다시 태어나서 새로 맹세하는 신앙으로 새 인생을 산다는 걸 마치 연극처럼 제식(祭式)으로 행하였다. 지금도 성공회나 천주교의 제식을 보면 시늉만 보아도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의 제식을 보면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이와 같은 제식은 연옥(煉獄)의 설명을 읽으면 더욱 확실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니 2천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며, 지금도 세례(洗禮)가 마찬가지의 관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미스 교수는 예수가 한 행적은 당시의 마술사(魔術師-magician), 의술사(醫術師-healer) 등 신비를 행하고 기적을 행하던 다른 기인(奇人)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보면 예수가 치료받는 사람과 비밀리에 만나고 혼자서 조용하게 말하곤 하였으며, 종종 예수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예수가 습관적으로 비유(比喩)의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라자로의 죽음소동이 실제로는 하나의 제식으로 일장 연극에 불과했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실제의 일로 여겨, 결과적으로 속은 꼴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러면 어째서 라자로의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에서 거의 삭제되었는가? 여기에도 이론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마리아가 마중을 나와 함께 집으로 가는 도중 예수는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몰라도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정도였다면 예수의 마음속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텐데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라자로는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소개된다. 문둥이 시몬(마태복음 26장 6절, 마가복음 14장 3~9절), 지롯 시몬(마태복음 10장 4절, 마가복음 3장 18절, 註: Simon the Zealot, 한글에서는 가나안인 시몬이라 번역하였다) 모두 라자로를 말하는 이름이었다. 공관 복음서에서 요한복음과 같이 라자로의 집이라고 하는 대신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완전히 별개의 일로 소개한 것은 라자로의 사건을 감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자로의 문제와 마리아의 문제는 1958년 콜롬비아 대학의 고대역사학 교수인 스미스(Morton Smith) 씨가 예루살렘 동쪽 마 사바(Mar Saba)에 있던 한 사원에서 콘스탄티노플 교역의 문서를 발견했을 때 논란이 된 일이 있다. 즉, 발견된 문서 중에는 안티오크의 성(聖) 이그네시우스(St. Ignatius)의 저서가 있었고, 그 저서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교장이었던 클레멘트 주교가 동료인 데오도(Theodore)에게 보낸 편지가 끼어 있었다. 이 때는 그노시스계 카포크라시아(Capocratians) 종파에서 소위 마가복음에서 삭제된 비밀 복음서를 들고 나와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라자로가 죽은 것을 부활시킨 것은 상징적인 제식(祭式)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이를 반박하는 주류 크리스천계와 싸움이 한창일 때였다. 내용은 마가복음 중 현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삭제된 부분에 대하여, 그 내용은 교회가 원하는 바에 합당치 않으니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번역된 것을 그대로 옮기면, “진실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사실에 동감하고 그 진실을 말하고 싶다 해도, 그 대목을 진실이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은 반드시 참진실이 아니며, 또 신앙으로 인한 인간의 판단의식으로 참진실이기를 원한다 해도 참진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맞서지 말 것이며, 그들이 마가의 비밀 복음서를 믿으라 하면 이를 따라야 하겠지만, 다만 맹세하는 마당에서는 이를 거부하십시오. 이는 모든 진실을 항상 사람들에게 전부 말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함축된 말이어서 한참 새겨 보아야 하는 말이다. 이 편지는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라자로(Lazarus-Simon Zelotes)가 다시 살아나는 대목과, 그때 마리아가 한 행동과, 예수가 죽은 후 무덤에서 다시 부활할 때의 장면에 관한 내용이 마가복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을 교회 당국에서 삭제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렇게 편지로 그의 친지에게 (비밀)마가복음의 내용을 인정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삭제된 내용 중 라자로의 이야기는 라자로가 무덤 속에서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이 옆으로 옮겨지기 전에, 즉 무덤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고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불러댔다는 대목이었다. 이는 라자로가 실질적으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당시 교회가 원하는 바는 죽어 있는 라자로를 예수가 들어가서 되살리는 기적을 행했다고 만들고 싶었으니, 이런 내용을 없애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그러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결론이다. 또 마가복음 원본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것을 발견했을 때, 여자들이 무덤에서 뛰쳐 나갔다고만 기술하였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에서 열 두 절은 후일 사람들이 만들어 추가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낙 하마디’ 문서에는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계속적인 반목과 불화에 대하여 여러 증언을 다루었다. 두 사람은 메시지를 중심으로 한 교리와 혈통을 중심으로 한 교리 때문에 서로 맞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복음서(The Gospel of Mary)’에 베드로는 “자매여, 구세주께서 당신을 어느 여자보다도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 구세주께서 하신 말씀 중에 당신만 알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기억되는 대로 말해 주시오”(마리아복음 472쪽, 영문 번역판). 그리고 후에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게 분개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네들은 진정으로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하지 않은 말을 그 여자에게 했다고 생각하시오? 이제 우리는 모두 그 여자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이오?”(마리아 복음 473쪽, 영문 번역판). 그리고 나서 한 사도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물론 구세주께서는 그녀를 잘 알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했던 것이오.” 또 ‘빌립 복음서(The Gospel of Philip)’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와 가까웠으며 베드로와 언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음을 더욱더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신부(新婦)방 차리는 문제로도 신경전이 있었다. 막달라는 “주께서는 세례, 성유(聖油), 성찬(聖餐), 구속(救贖), 신부방(新婦房), 모든 것을 신비로 다루었습니다.” 또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주님의 동반자로 불린 막달라 마리아, 이 세 여자는 항상 주님과 함께 걸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다(빌립 복음 135, 140쪽, 영문번역판). 한 학자는 여기서 동반자라고 한 것을 사실상의 배우자로 해석하였다. 그가 그렇게 해설한 이유는 다른 근거를 참작해서이다. 즉, “그리고 구세주의 동반자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느 사도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하여 그녀와는 입을 맞추어 키스를 하곤 하였다. 이에 역한 사도들은 불만을 표시하며 왜 주님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구세주는 왜 내가 그녀처럼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요?라고 대답하였다”라는 어록이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육신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를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고, 이를 사랑하면 그것이 당신을 삼켜 수족이 마비될 것이오”라고 자기의 사랑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는가 하면, “혼인의 신비는 위대한 것이오. 그것이 없다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아니했을 것이오. 세상이 존재함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혼인이 있기 때문이오.”라 하였으며, ‘빌립 복음서’의 마지막에 가면, “사람의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사람의 아들(인자)이오, 사람의 아들을 통해 창조한 사람의 아들의 아들이다”라고 기술된 것을 보면 더욱 확신이 간다는 동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수는 헤롯 왕의 딸 살로메와도 심상치 않은 관계였다. ‘도마 복음(the Gospel of Thomas)’에 보면 “…살로메가 주께 질문하였다. 주여 언제 죽음의 왕국이 끝날 것이오? 예수가 답하기를, 모든 여자들이 아이 낳는 일을 그칠 때이니라. … 살로메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나는 아이를 만들지 않았으니 잘한 일이옵니까? … 예수가 또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든 과실을 먹되 잉태하는 과실은 먹지 말지어다 ….” 또 다른 구절에서는, “남자여, 당신은 누구이니까? 누가 나의 침대에 들어오고 내 상에서 먹으라 허락하였나이까 하매, 예수가 대답하기를 당신과 동격인 내가 허락한 자이고, 내가 허락을 받은 자이고, 그것이 바로 나 장본인이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자기의 소유물을 나에게 준 것이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살로메의 침실에서 주고받은 대화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여자 혼자 있는 살로메의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가 성공하여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헤롯 왕의 용상에 대신 앉았다면 예수의 부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예수는 양성애자였는가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예수가 요단 강 가까이 갔을 때 베다니에 있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전갈이 온다.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동생 마르다, 두 여자 형제가 전한 말의 내용이었다. 또 예수가 잡혀갈 것을 예상하여 마지막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할 때,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 대화장면이 요한복음 13장에 나온다. 그때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를 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할 때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예수의 품에 안긴 라자로를 통하여 물었다. 이것은 마치 부인이 옆에 있어 부인을 존중해 주기 위해 질문의 형식을 간접적으로 부인을 통해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라자로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예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을 것이고, 특히 그의 제자들을 더욱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인물 하나만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막연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따위의 사랑과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이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으로만 사랑했던 정신적인 사랑이라기보다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 앞에서도 꺼리지 않고 예수의 몸에 의지할 정도였고, 이러한 일을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여겨 마치 부부가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 이 두 남자들이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을 당연하게 보았던 것 같다. 여기서 사랑하는 이는 라자로를 뜻한다. 예수는 다른 남자와 서로 품에 의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라자로 한 사람과 이런 관계를 가졌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어느 특정한 두 남자만이 서로 껴안는 광경을 본다면 독자들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공개적이었으며, 심지어 라자로의 가족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틀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각자가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바랄 뿐이다.
.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둘을 들라고 하면 필경 요셉과 모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물론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성경을 떠나서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고 성경의 내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로 오랫동안 막내였던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며, 그는 이집트에 도착한 지 십여 년 만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1720년경이다. 그리고 후에 요셉은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버지와 70여 세대의 형제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출하여 이집트의 고센(Goshen)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한다. 이 곳은 ‘람세스(Ramesses)의 땅’이라고 창세기 47장 11절에 설명하였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이 때가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한 때가 되고, 3백여 년 후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이기원전 1491년의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람세스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람세스 2세(Ramesses II., c.1304~1237 B.C.)의 소유지를 말하는데, 카이로 출신 이집트 역사가 오스만(Ahmed Osman)에 의하면 기원전 1491년은 람세스 왕이 존재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고, 람세스 왕 때 고센이란 곳에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람세스 2세를 위해 고센이란 곳에 곡식을 넣어 두는 창고들을 건설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와 약 3-4백여 년의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정하여 짝을 맞추면 요셉이 이집트에 간 것이 기원전 18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15세기 초가 되는 것이고, 그는 ‘투트모시스 4세(Tuthmosis IV., c.1413~1405 B.C.)’라는 파라오 밑에서 재상을 하게 되었으며, 이집트에서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지 않고 유야(Yuya: Yusuf the Vizier, 즉 재상 Yusuf에서 기인한 말. Yusuf는 요셉을 이집트화한 말)라고 불렀다 한다. 유야에 관련된 그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파라오 투트모시스가 죽을 때, 그의 아들은 당시의 이집트 관례에 따라 왕위를 잇는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형제인 시타문(Sitamun)과 결혼하여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라는 파라오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유야(요셉)의 딸 티예(Tiye)와도 결혼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러나 티예의 아버지가 유대인으로서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권력을 너무 크게 잡는 것을 우려하는 이집트 사람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티예가 낳는 아들은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었고, 티예가 임신했을 때에는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죽이라고 파라오가 특별 칙령까지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티예가 해산할 때 즈음해서 자기의 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고센 땅 자루(Zarw) 강 상류에 별장을 짓고, 그 곳에 가서 기원전 1394년경 아이를 낳았는데, 과연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때 따라갔던 산파역 상궁에 해당하는 여자와 함께 티예는 아이를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워 유야의 배다른 형제 레위(Levi)의 집으로 가도록 하였다. 즉 삼촌에게 맡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는 사원의 승려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한편 첫째 부인인 시타문은 네퍼티티(Nefertiti)라는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티예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한편 나일 강 델타의 동쪽 끝 지방에서 자라던 아미나답은 십대에 들어서면서 나일 강 상류 지방인 테베스(Thebes)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십분 납득하고 있는 아미나답은 당시 테베스에서 주로 섬기고 있던 아문(Amun: 유대인들은 Amon 또는 Amen이라 불렀다)이라는 신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신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46장 25절에 아몬(Amon)이란 신으로 소개·설명되었다. 이러한 사회조건에서 아미나답은 아문 신을 없애고 히브리 사람들이 섬기던 아텐(Aten: 원래는 페니키아 민족에서 유래한 신으로 이름 자체는 다만 주님이란 뜻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이를 받아 융화시킨 것이다)이라는 형상이 없는 신을 소개하고, 자기 이름 아미나답을 악헤나텐(Akhenaten)으로 바꾸었다.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은 원래 유대계 이름으로 이집트어 아멘호텝(Amenhotep)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아몬(Amun) 또는 아멘(Amen) 신이 흡족해한다’는 뜻이었고, 새로 지은 악헤나텐은 아텐(Aten: 히브리의 Adon과 동일 신) 신의 종이란 뜻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파라오 아멘호텝 3세는 병으로 눕게 되었고,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는 파라오는 딸 네퍼티티와 악헤나텐을 혼인시켜 악헤나텐을 응당한 파라오로 계승시키도록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함께 국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드디어 아멘호텝 3세가 죽고 파라오가 된 악헤나텐은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재위기간 c.1367~1361 B.C.)가 되었다. 그는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투탕하텐(Tutankhaten)이라 하였다. 악헤나텐은 파라오가 되자마자 이집트 신을 섬기던 모든 사원을 폐쇄하고 아텐(Aten) 신을 섬기는 사원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신앙에서부터 통치방법까지 대혁명을 일으켰다. 이러한 그의 과격한 변혁은 사면팔방으로 적을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고대부터 섬겨 오던 태양신 라(Ra)와 아문(Amun)을 섬기던 승려부터 신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위협과 탄원이 있었으나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의 결단을 고수하였다. 결국 무장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악헤나텐뿐 아니라 유대인 전반에 걸친 타도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파라오 아멘호텝 4세, 즉 악헨나텐은 40여 년 후에 피난에서 돌아와 위험에 처한 유대인들을 이끌고 피신하여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으며, 혁명세력은 잠시 악헤나텐의 조카 스멩카레(Smenkhkare-일명 아론Aaron)를 왕위에 앉혔으나 곧 11살 정도밖에 안 된 악헤나텐의 아들 투탕하텐을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어린 파라오는 왕위에 앉은 지 불과 9년 내지 10년 후, 아직 젊은 나이에 타살로 목숨을 잃게 되고, 오늘날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유품이 세계 여러 곳에서 순환 전시를 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집트를 떠난 악헤나텐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도착한 곳이 시내(Sinai)라는 곳이었다.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 갖고 간 것은 파라오를 상징하는 셉터라고 부르는 봉(棒)이었다. 셉터(sceptre)라고 부르는 이 봉은 군악대의 지휘자가 들고 흔드는 봉과 같이 생긴 것을 말하는데, 악헤나텐이 갖고 간 파라오의 봉은 머리를 놋쇠로 만든 뱀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임금이 옥새를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여, 그를 따라 시내까지 함께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헤나텐이 당연히 파라오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연한 계승자 또는 계승자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그 별명이 ‘모세(Mose, Moses 또는 Mosis)’라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서 ‘모세’라는 이름의 말뜻은 계승자라는 것이다. 요셉이 처음 이집트에서 벼슬을 할 때 파라오의 이름이 투트모시스(Tuthmosis)라 하였다. 그 이름은 ‘투트(Tuth)’와 ‘모세(Mose)’ 또는 ‘모시스(Mosis)’를 합한 이름으로 ‘투트를 계승하여 태어난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모세라는 이름의 어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람세스(Ramesses)라는 이름도 태양신 라(Ra)를 계승 또는 대표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마찬가지 형식의 이름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모세(악헤나텐)는 피라메세(Pi-Ramesses: Per Ramessu(페르 라메수) 고대 이집트 15, 19, 20대 왕조시대의 수도, 지금의 El Qantara 부근)라는 곳에서 떠나, 수에즈 운하 지역과 시내 반도를 거쳐 티마시(Timash) 호수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이 지역은 습지여서 사람은 걸어서 겨우 갈 수 있으나 말이나 수레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모세를 따라간 사람들은 야곱의 후예인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시내 산 밑에서 예배소 성막(Tabernacle)을 짓고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대신 선조의 고향인 가나안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에 페니키아(Phoenicians) 사람과 필리스티아(Philistines, 블레셋)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을 때였다. 기록에 의하면 많은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바다에서도 많은 전투를 벌였고, 특히 여호수아(Joshua)의 지휘 아래 한때는 요르단을 건너 제리코(Jericho)까지 점령하여 소위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든든한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는 판관(Judges)들을 임명하여 통치를 하였으나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얼마 후 사울(Saul)이란 사람에 의하여 히브리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합되고 기원전 1048년에 사울을 시조로 하는 통합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나안 땅을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유명한 다윗(David)은 그 다음 세대의 사람으로 사울의 딸과 결혼하고 기원전 1008년에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정도의 영토를 가진 유다의 왕이 되고, 그 후 나머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왕이 된다. 홀리 그레일(Holy Grail)의 혈통이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가가 역사적인 사적을 기본으로 찾아본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또 참고로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은 이집트인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많은 어휘를 서로 교환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7장 1~2절 또는 사무엘하 6장 3절에 ‘아비나답의 집(House of Abinadab)’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이집트어 아미나답(Aminadab)이 아문(Amun) 신이 만족했다는 뜻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만족하고 기뻐했다는 뜻이며, 아비나답의 집이란 말은 한국의 조상신,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것과 같은 일종의 사당(祠堂)을 말했던 것이다. 모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한 학자 신부도 동의하는 일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무어(Fr. Charles Moore)라는 신부는 원래 검사생활을 하다 신부가 된 사람으로 신학박사와 철학박사학위를 갖고 성서적 고전을 연구한 사람인데, 이 분도 위의 모세 이야기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예수와 마리아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대개 예수의 정체에 대하여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정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몇 년간 노력하다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당한 인간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한 하나의 존체였다는 것 정도로 얼버무리고, 그 이상 따져 볼 생각을 포기하든가 그냥 덮어놓고 그런 대로 믿으라니까 믿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우선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었는가 아니면 완전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대개는 그가 완전한 하나님도 되고 완전한 인간도 된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은 하나님이란 존재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니 그냥 믿어 두라고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이고 교리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이나 판단력이란 것을 집어넣을 필요가 어디 있었을까? 이것도 질문하는 것 자체가 감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 던지는 건방진 질문이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최소한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가 승천할 때 육신을 갖고 함께 하늘로 올라갔는가 아니면 육신은 인간이 사는 지구에 놓아두고 혼만 하늘로 올라갔는가? 만약 육신까지 갖고 올라갔다면 하늘 어디에다 두었으며, 지금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어 로켓을 타고 가면 만나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육신은 하늘에서 어디에 필요하여 갖고 갔는가? 또, 만약 육신을 이 땅에 놓아두고 승천했다면 그 육신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는가? 이에 대한 자초지종을 성경에 설명해 놓는다든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혹시 잊어버렸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가르쳐 주었어야 옳지 않은가? 그래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덤이라도 제대로 해 놓고 제사라도 드리지 않겠는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마치 유치원 학생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 자체가 교인들의 지능수준을 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교인들 자체가 자진하여 이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닐까 질문하고 싶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이 몹시 불만이셨는데, 어느 날 논쟁 중에 어머니는 동네에 살던 최남선 씨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심사숙고하여 천주교를 선택했는데 네가 뭐 그리 유식하다고 안 믿는단 말이냐며 야단치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 신부에게 부탁했으니 교리강좌에 한번 나가 보라고 당부를 하시기에, 좋다고 약속하고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간 일이 있었다. 신부를 만났더니 교회 회장을 소개하면서 주일학교도 담당하고 있으니 따라가 보라 하기에 따라갔더니, 유치원 학생과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끝난 다음 따로 시간을 내어 줄 것 같아 끝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끝나고 난 다음에 그 회장님 말씀이 강의내용을 잘 이해했냐고 하면서 그렇게 잘 설명해 주었는데 무엇이 의문스러워 안 믿느냐고 나에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돌아서 나왔다. 그 후에도 당시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가 하는 교리강좌도 두 여름이나 열심히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이런 저런 내용에 대하여 목사와 신부 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토론한 적이 많았지만, 아직도 교회에서 원하는 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필자의 현재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나 자신과 다른 학자들의 예수에 대한 의견 또는 그 동안 알아낸 사항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예수는 열다섯 살 난 마리아라는 어머니와 할아버지 뻘이 될 정도로 나이가 많았던 요셉이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세 가족은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가서 몇 년간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예수가 얼마간 자랐을 때 그는 그의 종조(從祖)할아버지 격 되는 사람을 따라 인도에도 갔다 왔다. 인도 힌두교의 성경 ‘릭 베다(Rig Vedas)’에 예수가 네팔(Nepal)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비슈누 퓨라나(Vishinu Purana)’에도 예수가 인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니 틀림없이 인도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수 당시 예수와 유대인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 Augustus: 제2대 로마의 황제, 재위 A.D. 14~37) 즉위 15년, 즉 서기 29년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세례 요한은 31년 9월 갈릴리에서 그 유명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안티파스(Herod-Antipas)에 의하여 사형을 당했다.
예수를 논할 때 예수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람은 물론 그를 낳은 부모가 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교육시키고 돌보아 준 그의 후견인을 빠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필경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크리스천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디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서 ‘아리마태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마치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말았다. 그래서 여기에 간단하나마 잠깐 그가 어떤 신분이었으며 어떤 일을 했나 소개하고 지나가기로 하겠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원래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예루살렘 지방에 근거를 두기도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의 세상에서 니코데무스(Nicodemus)와 함께 가장 부자로 알려진 두 사람 중 하나였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영국의 주석과 납 광산을 위시하여 전세계에 광산을 갖고 있던, 이를테면 광산왕이라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의 광산은 주로 영국에 있었지만 중동지방과 인도에까지도 광산을 갖고 있어, 이러한 연유로 예수가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 그를 따라 인도까지 가게 되기도 했고, 예수가 죽은 다음 예수의 가족들을 영국으로 피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필경 지금 세상에 비교한다면 록펠러 정도의 부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가 하도 부자였고 로마제국에 무기와 기구의 제작에 필요한 철 자재를 거의 모두 공급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Citizen)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블리스 데큐리오(Noblis Decurio)’란 칭호를 로마 황제로부터 받기까지 했다. 이 칭호는 로마제국에 금속을 마련하는 책임자라는 뜻이며, 키케로(Cicero)는 ‘노블리스 데큐리오’라는 직위가 로마의 상원의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직위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러한 그의 직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루살렘 지역에 있던 일종의 식민지 유대인들의 자치의회인 ‘산헤드린(Sanhedrin)’의 중요한 의원이었으며, 그의 동료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서 원로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부자였기 때문에 여러 곳에 장원을 갖고 있었고, 성경에 나오는 겟세마네(Gethsemani) 동산이란 장원도 그의 것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뒤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담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일등 부자로 알려졌던 아리마태아 요셉은 에세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와 함께 다른 부자로 알려졌던 니코데무스라는 사람은 바리새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가 가고 난 다음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의 가족들 사이에 심한 분쟁이 일어난다. 즉, 예수의 혈통으로 예수의 지위를 계승하려고 한 가족들 세력과 교리와 철학을 중심으로 했던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이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세력은 결국 바울(Paul)이라는 바리새 사람으로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이끌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가족들은 거대한 부자였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거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 사람들에게 뒤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은 니코데무스라는 부자였다. 물론 후에 니코데무스도 크리스천이 되었고,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필라테(Pontius Pilate, 본디오 빌로도)나 그의 부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Claudia Procula)도 모두 크리스천이 된다.
예수의 가족과 그 가족을 이끌던 아리마태아 요셉은 세력싸움에 패배했다고도 하지만, 로마 당국과 산헤드린의 명령에 의하여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포고 때문에도 신변안전을 위해 멀리 피신을 해야 했었다. 그때 함께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부인 막달라 마리아, 성모 마리아의 동서인 클레오파스의 마리아(Maria of Cleophas), 막달라 마리아의 오라버니 라자로, 예수의 유모 등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얼마간 머물다 결국 영국(Gaul)으로 가게 된다. 이것이 서력 36년경이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라는 곳으로, 지금의 서머싯(Somerset) 주에 있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이렇게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본인은 태연하게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 결국 산헤드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마태아 요셉을 죽이지 않고 다만 닻도 노도 없는 배에 태워 바다에 떠내려보냈다. 아마도 이렇게 한 것은 그 동안 산헤드린 의원들이 존경하던 아리마태아 요셉을 벌은 주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리마태아 요셉은 자기 소유의 많은 선박과 부하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구출되어 유럽 쪽으로 피신을 갔고, 이 때에야 비로소 그도 나머지 예수의 가족들과 합세하여 영국 글래스턴베리에 정착하여 큰 성당을 짓고 선교사업에 열중하게 된다. 이 성당을 글래스턴베리 사원(Glastonbury Abbey)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가는 곳이며, 이 곳에 성모 마리아가 묻혀 있다고도 한다. 그 때문에 예수의 사도 도마(Thomas), 빌립(Philip) 같은 사람들은 자주 찾아와서 그와 마리아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고, 바울(Paul)과 누가(Luke)도 이 곳을 찾았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후에 ‘영국의 사도(Apostle of Britain)’란 호칭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국을 지칭하여 ‘신성한 섬(Sacred Isle)’ 또는 모국(母國-Motherland) 또는 ‘지상에서 가장 지하가 빈 땅(the most hollowed ground on earth)’이란 말을 전 유럽에 퍼뜨리기도 했다. 여하튼 서력 196년경 로마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기 시작한 것보다 훨씬 이전에 영국이 크리스천화됐다는 설이 여기에 기인한 것이며, 로마제국이 영국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 할 때 이미 영국에 나름대로의 크리스천이 있는 것을 보고 로마 당국은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하고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 없앴다. 통상적으로 이 때의 크리스천들을 ‘켈트 크리스천(Celtic Christian)’이라고 하며, 그들이 사용하던 십자가는 십자가 교차점에 원(圓)이 있어 이를 ‘켈트의 십자가(Celtic Cross)’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태어나서 이집트로 피난가게 된 것도 아리마태아 요셉의 기반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며, 예수를 교육시킨 사람도 그였으며, 예수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준 사람도 이 사람이었다. 또 그는 예수가 죽을 때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에 안장시키는 일 등 모든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그 후에도 예수의 가족을 피신시켜 끝까지 돌보아 준 사람으로 예수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창설과정에서도 가장 공이 많은 사람 중 하나로 꼽힐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뿐 아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가 어렸을 때 죽어서 문제가 안 되지만, 그의 어머니는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건재해 있었다. 그러나 예수 사후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만약 성모 마리아를 지금처럼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다면,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모 마리아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를 자문해 보기 바란다. 현재의 크리스천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다만 예수를 동정녀로서 잉태했다는 점, 즉 그리스도교의 신성을 강조하는 목적에만 열성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부모를 섬기라는 십계명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모범인가? 그러면 왜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숨겨 버렸을까?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가장 앞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은 예수가 달성하려고 노력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안에서 정치놀음이 작용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옛 소련에서 공산국가의 상징으로 레닌(Lenin)을 앞세우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스탈린이 레닌의 노선을 없애 버리고 자기의 노선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존경을 받았고 중심인물이었던 레닌을 영웅화시킨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를 앞세우고 그 안의 내용은 자기네 마음대로 요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수를 말하는 대목에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몇 마디 해보았으며, 아래에 예수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겠다.
예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공식적인 예수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그리고 그는 33세에 죽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원년, 즉 1년 12월 25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33년에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가 태어난 해부터 확인하여 보자. 우선 마태복음 2장을 보면 헤롯 왕 때에 태어났고, 동방박사들이 동방에서 베들레헴의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갔다고 하였다. 점성가들은 원년에는 그런 별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점성가들에 의하면, 베들레헴에 별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한다. 우선 산양좌(山羊座-Capricorn) 별자리 안에서 광을 발하는 혜성은 기원전 5년 3월에 66일 동안 존재했던 일이 있었고, 독수리 별자리 안에서 기원전 4년 4월에 ‘노바(Nova)’가 폭발한 적이 있었으며, 물고기자리(Pisces)에서 기원전 7년 5, 9, 12월에 목성(Jupiter)과 토성(Saturn)이 직선상에 놓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성과 토성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일은 139년에 한 번씩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이런 일이 있었고, 다음 차례는 2100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치선이 물고기자리 안에 일어나는 일은 900년 만에 한 번씩 있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물고기 해에 물고기 달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며, 그런 이유로 초기 크리스천들은 물고기로 암호를 삼기도 했고, 교황도 어부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망원경이 없었을 터이니 육안으로 밝은 별을 보았을 것이며, 육안으로 밝은 별을 보았다는 것은 두 개의 별이 겹쳐 마치 별 하나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가 태어났을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가 호적을 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즉, 출생신고를 하라는 말이었고,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한다. 그런데 역사책에는 그 명령은 기원전 7년에 있었다고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되며, 점성가들은 예수가 기원전 7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4세기까지 사람들은 1월 6일을 예수의 생일로 알고 잔치를 했다. 그런데 ‘미트라(Mithras)’ 신을 믿는 태양종교에서의 12월 25일은 미트라의 생일이자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정복되지 않는 태양)’ 축제일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이 신봉하던 이 태양종교에서의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날과 예수가 태어난 날을 일치시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바꾸었다. 그 내용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2월 21일은 동지이다. 그리고 동지를 며칠 지나서 25일부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낮이 길어지는 것을 태양이 다시 태어남으로 간주하여 고대부터 축제를 올렸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 인빅투스’라는 것은 시리아 지방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이집트에서도 빛을 주는 미트라(Mithras)라는 태양신이 태어났다는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영원하며 미래의 심판의 날에 태양을 잘 섬긴 사람들은 죽은 자도 되살아나 부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으나 태양 대신 예수로 바뀐 것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유대인들도 ‘하누카’라는 빛의 축제일이 있는데, 첫째 날 촛불 하나로 시작하여 매일 하나씩 더하여 8일째 되는 날에는 촛불 여덟 개를 밝히는 8일간의 빛을 추모하는 축제를 하고 있다. 또 중세기에 와서는 크리스마스 때 12일간 사과나무에 여러 가지의 장식을 하고 사과로 만든 술을 마시며 남자들은 머리에 뿔 달린 의상을 입고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염을 하며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하나인 ‘크리스마스의 12일(Twelve Days of Christmas)’의 12일이라는 숫자는 이런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에서는 동짓날에 주인이 노예들에게 반대로 봉사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사투말리아(Satumalia)라는 축제일이 있었다. 이 때에는 온 집 안팎에 호화스런 치장을 하고, 미슬토(Mistletoe)라는 나무에 마치 우리의 성황당처럼 주렁주렁 장식을 매달아 놓고는 그 나무 밑에서 서로 번갈아 가며 혼잡한 성교를 하는 오르지(orgy)를 행하여 잉태를 많이 해 자식을 많이 낳도록 하는 축제이다. 또 동쪽으로 가면서 인도로 넘어와서도 많은 동짓날의 축제전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동짓날 서양 사람들처럼 요란하지는 않을 망정 잔치를 벌인 것도 이와 상통하는 일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서양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된 것이다.
만약 예수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하면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33세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33세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카발라(Kabala)를 알아야 이해된다. 카발라 철학은 유대인들이 고대에서부터 비밀리에 신봉해 오고 있는 수상학(數相學-numerology)을 포함한 철학이다. 근래에 성경을 숫자로 풀이하는 이론이 나온 것도 이 수상학을 이용한 것이고, 예수가 그 많은 제자 중에서도 12제자를 택한 이유도, 프리메이슨의 최고 계급이 33도인 것도, 미국의 휘장에 별이 13개인 것 등등 모두가 이 수상학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예수의 나이를 33세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러기 위해서 원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그런 미신 같은 일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런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미국 독립전쟁 때 미국기의 별도 13개가 있었고 남북전쟁 때 남부의 깃발에도 별이 13개였다. 이것은 13개의 주가 합쳤기 때문에 별을 13개 넣은 것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실상 그 때의 주는 11개밖에 없었는데 구태여 13개의 별을 집어넣어야 했던 것을 이해한다면 숫자가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유대인들이 1월 6일을 그의 생일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카발라에 의한 날짜였을 확률이 높다. 또 그레일(Grail)의 혈통, 즉 다윗 또는 예수의 혈통을 잇는 왕가의 한 귀족이며 학자인 가드너(Laurence Gardner)는 예수의 진짜 생일이 기원전 7년 3월 1일 일요일이라고 계산해 냈다.
진정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이었고 고향은 나사렛이었는가?
유대인들은 다윗 왕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 그래서 종국적인 유대인의 지도자는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도 다윗 왕의 후예일 것이며, 그 때문에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가 메시아로 행세하려 했던 것이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개 같은 지도급 부족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온의 칙훈서’를 보아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세계를 통일하여 지배하는 절대군주는 유대인 중에서 나올 것이며 그 사람은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다윗 왕조는 벌써 오래 전에 끝이 났고 그 뒤를 ‘마카베(Maccabees)’ 또는 ‘아스모니아(Asmonean)’라고 부르는 왕조가 이었다. 유대인들이 ‘마카베(Maccabees)’ 왕조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왕조의 혈통은 피를 섞음으로써 그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이스라엘의 왕은 아스모니아 왕조의 이르카누스 2세(Yrkanus II.)였다. 그리고 다윗 왕계의 장손은 가말라(Gamala)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던 에제키아(Ezekiah)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헤롯(Herod)이 로마의 실력가이자 셰익스피어의 소설 ‘줄리어스 시저’에서 줄리어스를 죽인 자객 중의 한 사람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클레오파트라의 애인이었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등에 업고 로마 정부로부터 유일한 합법적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로마군 2개 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에제키아는 최선을 다하여 이르카누스를 도왔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 때에 이르카누스는 헤롯에게 잡혀 죽었으며, 에제키아는 로마의 적이라 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도 얼마 후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서 아스모니아와 다윗의 전통은 끝을 맺게 되었으며, 헤롯은 전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런데 헤롯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혈통이 없었다. 그래서 헤롯은 이르카누스를 죽였지만 그의 딸 마리암네 2세(Mariamne II.)를 부인으로 삼는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은 아스모니아 가문의 전통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다윗 왕의 혈통만이 유일한 이스라엘 왕위계승의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가말라의 유다가 주동이 되어 ‘질로트’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가말라의 유다(Judas of Gamala)는 에제키아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자마자 종손으로서 가문의 가장이 되었고, 미리암네 2세의 사촌 미리암(Myrhiam)과 결혼하였다. 미리암이란 이름은 마리아의 유대인 이름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마리아로 소개되어 있고, 이 마리아가 동정녀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유다는 헤롯 왕과 대결하기 위해 질로트를 결성하게 되고, 예수,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이름들이 마가복음 6장 3절에 기록되어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헤롯이 갓난아이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상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 헤롯은 어린아이들을 죽인 일이 없으며, 다만 테러당이라 할 수 있는 질로트 당원들을 잡아죽였다. 그것은 질로트가 헤롯의 왕위를 뺏으려는 정적이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결국 유다도 헤롯에게 잡혀서 자기 아버지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식들의 보호를 위하여 안전하게 피신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부인 마리아와 함께 온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을 했던 것이고, 그런 배경 때문에 이집트에서 요셉과 온 가족은 귀족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학자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절에 가서 주로 살았고, 열 네 살 전후하여 예수를 임신하였다. 이 나이는 그 당시의 여자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적령기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에 비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해당할 정도로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성경에 목수라 하여 가난하고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목수라는 직업은 오늘의 건축가에 해당하는 직업으로 매우 존경받는 상류층의 직업이었다. 가까운 예를 들면 일본에서도 집을 짓는 일의 책임자는 목수이다. 그리고 목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다른 기능공들을 채용하고 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중상류층의 부유한 사람으로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염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대리 아버지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요셉은 대부호로서 비밀리에 이집트에도 피난을 시키고, 후에 예수를 인도로 데리고 가서 장성할 때까지 교육을 시켰고, 예수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왔을 때에는 다윗 왕의 후계자라고 하면 당장 잡히니까 메시아로서 유대인 사회에 소개하려 했으며,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간접적으로 홍보를 하려 했다는 추론이 서게 된다. 그래서 요셉이 자식 같은 마리아가 자기와 관계없이 임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 맞이한 것은 애국적인 마음에서 주변의 애국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며, 혼자 한 일도 아니고 집단으로서 사회적인 압력에 의하여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헤롯의 눈과 산헤드린을 속이기 위해 가짜 남편과 가짜 고향(나사렛)을 대고 호적신고를 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성경 여러 곳에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 ‘나사렛’이고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 때에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있지도 않았다. 나사렛이란 마을은 예수가 가고 8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 생긴 마을이었다. 누가복음 4장 29절에 보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라고 하여 나사렛의 지형을 잠깐 소개하였다. 그런데 나사렛에 가 보면 그 부근은 아주 낮고 완만한 언덕뿐이지 높은 언덕이나 낭떠러지 같은 곳이 없다. 그리스도교가 점점 확대되어 중세기에 와서는 많은 순례자가 생겼고, 순례자들은 예수가 태어난 곳을 가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교회가 마을을 창조해 내고 요셉이 목수였으니 목공소와 예수의 집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1291년에 프랑크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모슬렘에게 빼앗겼을 때 어떤 천사가 와서 그 집을 크로아티아(Croatia)로 옮겼다는 것이며, 3년 반 후에는 여기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또 천사가 와서 그 집을 이탈리아의 로레타(Loretta)라는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산타 카사(Santa Casa)’라고 하여 매년 3월 25일, 8월 15일, 9월 8일, 12월 8~10일에 이를 개방하여 순례자들이 찾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모슬렘인 터키 사람들이 쳐들어왔어도 천사들이나 하나님은 기적의 힘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 집을 부수지 못하게 막지 못하고, 대신 크로아티아나 이탈리아로 천사들이 옮기는 기적을 대신 행했다는 말이다. 만약 집을 그대로 놓아두고 모슬렘들이 집을 도저히 부술 수 없도록 기적을 보였다면, 많은 모슬렘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제로 옮긴 이는 천사가 아니라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이다.
또 누가복음 2장 39절에 보면 요셉의 본래 고향이 나사렛이란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나사렛이란 말은 ‘나사렌(Nazarene 또는 Nazarite)’이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 것이지 지명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5절에서 바울이 반국가 선동죄로 잡혀 팔레스타인 총독 앞에 나타났을 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한글 성경에 표현된 글이 있다. 한글 성경에는 나사렛 이단이라 하였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다만 나사렌 종파(sect)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또 아랍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부를 때 ‘나스라니(Nasrani)’라고 한 것과 이슬람의 성경 ‘코란’에 그리스도교를 ‘나사라(Nasara)’ 또는 ‘나자라(Nazara)’라고 부르는 것은 히브리어 어원의 ‘나즈리 하-브릿(Nazrie ha-Brit)’의 복수형 ‘노즈림(Nozrim)’에 그 근원을 둔 것이며, 그 뜻은 ‘언약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비슷한 어원으로 ‘나사롯(Nazaroth)’의 ‘나사르(nazar)’라는 말이 있다. 그 어휘의 어원은 점성학에 있다. 사해의 문서가 발견된 곳은 사해 옆 쿰란이라는 험악하게 생긴 지역이다. 이것은 그 지방에 있던 사람들의 신앙이 투철하여 그 사람들이 신봉하던 종교와 다른 중요한 일에 관한 내용을 담은 문서이며, 그 문서의 소유자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에세네(Essenes)라고 부르는 종족이었다. 우선 여기서는 간단하게 ‘나사렛’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 말해 보자. 에세네 사람들은 애초에 태양신을 믿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임에는 틀림없으나 다른 부족들이 모두 음력 달력을 사용하였어도 이들은 양력을 사용했고, 태양을 위주로 하는 점성술(astrology)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열 두 띠, 즉 열 두 별자리를 ‘나사롯(Nazaroth)’이라고 불렀다. 이의 어근(語根) ‘나사르(Nazar)’의 뜻은 마치 매일 밤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는 열 두 별자리를 둘러싸듯 한다는 것이다. 즉, 지구를 둘러싼다는 말이다. 욥기 38장 32절을 보면, “네가 열 두 궁성(constellations/Nazaroth)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열 두 궁성’이란 열 두 개의 별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영어로 된 근래의 성경에는 ‘constellation’, ‘star’ 또는 ‘zodiac’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래된 성경을 보면 ‘마사롯(Mazzaroth)’이나 ‘나사롯(Nazaroth)’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M자와 N자가 섞인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두 자를 서로 바꾸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어휘는 사해(死海) 쿰란(Qumr?n) 지방에 위치했던 에세네(Essene) 부족을 의미했지 지명을 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하여 예수의 열 두 제자 등 주변 사람들이 에세네 사람들이었다는 증거는 여러 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나사렛의 사람 나사렌(한글 NIV에는 나실인이라고 표기하였고, 가톨릭 성경에는 나지르인이라 표기하였음)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 2~21절에 기술한 것과 같이 대단히 엄격한 절제생활을 어떤 특정 기간 동안에 행했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가 아니라면 어디가 그의 고향이었단 말인가? 위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말라(Gamala)가 고향이라고 한다. 가말라라는 곳은 갈릴리 해의 동쪽에 있는 어항 벳새다(Bethsaida)라는 마을의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일명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가 하면 험준한 바위가 많아 질로트들이 숨어 있기 좋은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로마 폭동이나 항쟁은 항상 질로트들이 시작했으며, 그런 뜻에서 가말라 사람들을 진정한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며, 성경이 씌어진 4세기경에만 하더라도 아직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숨기는 것이 안전해서 예수의 고향이나 가족사항을 계속 거짓 소개했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예수는 진정한 메시아였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예수 말고도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시몬(Simon the wizard)이나 티아니스(Apollonios Tyaneas)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예수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는 완전한 유대인의 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윗 왕의 직계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헤롯 대왕은 특히 다윗 왕의 가문과 연결되는 족보들을 보이는 대로 태워 버렸지만, 유대인 사회에서도 족보를 가정마다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족보 전체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에 내려오는 예언자들은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온다고 말해 왔다. 그래서 예수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나귀를 구해 타고 들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도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인정받으려고 노력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갔고, 후에는 인도로 가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고, 정작 팔레스타인에 돌아와서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보내지 못했다. 그가 혜성처럼 돌아와 온 유대인 사회가 그를 메시아로 떠받들고 유대인의 왕으로 모시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리 쉽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다윗 왕의 장손이었고 예수의 아버지인 유다는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이고 헤롯 왕을 타도하기 위해 혁명단체인 질로트를 창설하여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그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질로트는 지하에서 30여 년간 이렇다 할 지도자 없이 별로 명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보다 불과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이 유능한 지도자로 대두되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하난(Yohanaan)이라는 유대인 이름이었고, 이것이 로마어로 번역되면서 요한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사람은 질로트에 다시 활기를 집어넣었고,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로드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왕위에 있을 때 전투를 시작하여 왕권에 도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예수에게 돌아왔어야 할 지도권을 예수의 형제들이 갖지 못하고 친척인 요한이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예수는 헤로드 안티파스 왕의 질녀이며 양녀가 된 살로메(Salome)라는 공주를 이용한다. 예수와 살로메는 먼 친척도 된다. 왜냐하면 헤롯 왕의 부인이 된 마리암네 2세는 살로메의 할머니가 되며, 다윗 왕 가문과 마카베(Maccabees) 가문과는 이미 혈연의 관계를 맺은 사이였기 때문에 예수의 혈통과 연결이 된다. 그런데 예수와 살로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리하여 살로메가 예수를 돕기 위해 부왕인 헤롯 왕을 충동질하여 세례 요한을 잡아 없애도록 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서기 31년 9월 갈릴리에서 사형당했고, 그가 가고 난 다음에 예수는 질로트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지위는 예수가 가고 난 다음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계승하였고, 야고보는 67년에 구속되어 산헤드린에 의하여 살해당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혈통에 의한 지배가 끝나게 된다.
예수는 결혼했는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예수가 결혼을 했는가, 여자관계가 있었는가 하고 질문을 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같으며, 물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보통 인간이 행하는 성적인 차원을 넘은 존재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직접이건 간접이건 예수의 결혼이나 그의 성생활에 대하여 전혀 말이 없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가 성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구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버미스(Dr. Geza Vermes) 박사는 “성경은 예수의 결혼에 관하여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 … 고대 유대인 풍습으로 이러한 문제를 파헤쳐 논한다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기도 하였다.” 이 말을 다시 되씹어 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자가 완전히 우월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결혼을 했어도 가정이나 부부관계에 관한 내용을 공중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습성이었으며, 오히려 여자관계를 멀리하고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이상하고 독특한 일이기 때문에 이야기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와 정도 이상으로 가까웠던 여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여자에게서 돈까지 받았고 피임을 권장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수가 결혼을 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해 보자. 그렇다면 그의 부인이 누구였으며, 자식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또 자식이 있었다면 몇 명이나 있었고 누구였는가? 이러한 질문은 그렇다, 안 그렇다 어느 쪽을 주장하든 양쪽 모두 자기 쪽이 확실히 옳다고 증명하기에는 물적 증거가 희박하다. 다만 이미 알고 있는 물증을 토대로 하여 정황을 참작하는 수밖에 없고, 또 물증도 해석하기에 따라 정반대의 의견을 초래할 수 있기에 다만 독자 각자가 판단하여 나름대로 믿도록 하는 길밖에 없는 줄 안다. 이러한 맥락으로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내용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내할 뿐이다. 우선 마태복음 19장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한 것을 참작하면, 정상적인 일반 사람들은 결혼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풍습을 고찰해 보면 성인이 되면 결혼은 당연한 사회조건이었고, 에세네 부족의 경우를 빼고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일부러 독신생활하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으로 한 가정의 가장은 자식의 결혼을 부모의 책임으로 여겼으며, 아들의 할례도 부모의 책임이었다. 만일 예수가 그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 예수는 자기 자신의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과시했기에 지도자로 섬김을 받았겠지만, 그가 사원 장로들 앞에서 보인 종교의식에 대한 그의 지식을 보면 유대인으로서 정식 랍비훈련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결혼 안 한 사람은 랍비로 허락되지 않았던 유대교의 ‘미시나(Mishina)’ 율법을 감안할 때 그 결론은 당연하지 않나 생각된다. 또 요한복음 2장 3~4절을 보면 ‘갈릴리’ 지방 ‘가나’라는 마을에서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 등이 모두 초대받아 갔다. 유대인들의 풍습으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이 있을 때 술과 음식은 모두 신랑·신부의 집에서 부담하도록 되어 있고 손님에게 부담 지우는 일은 실례로 여겼다. 그런데 성경의 이 대목에서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술이 떨어졌으니 술을 마련하라고 했고, 예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항의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지시를 하고, 하인들은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마리아의 명령에 복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붓고 예수가 기적을 행하여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하객들이 모두 잘 마시고 유쾌하게 놀았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식 당사자가 아니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였기에,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이 결혼식이 예수 자신의 결혼식이었다고 추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판단은 읽는 사람 각자의 추측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부인이었을까? 만약 예수가 결혼을 했다면 예수가 여행을 많이 하였기에 예수를 많이 따라다녔을 것이고, 예수 옆에 자주 있었다면 성서에 그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경을 뒤지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두 여자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하나는 갈리리(Galilee) 지방 막달라라는 마을 출신의 마리아라는 여자이다. 이런 안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보면, 그녀의 존재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예수가 죽었을 때, 그녀의 위치는 바뀌어져 몇 안 되는 중요한 소수에 속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가 선교활동을 하는 초창기인 갈릴리에 있을 때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예수와 동행하여 유대아 지방에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두 지방 사이에 언제고 예수가 필요한 때에는 그 옆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볼 때 분명 결혼한 여자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의 풍습으로 결혼 안 한 독신 여성이 동행하는 특정 남자 없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특히 종교적인 집단으로 먹고 자며 함께 움직이는 일행에 여자 혼자 따라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풍습을 고찰할 때 체면을 유지하고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혹시 그녀가 예수의 제자 중 어느 한 사람과 결혼한 것으로 성경에 소개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논리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예수와 너무 가까워 간통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을 터이니 그것도 있음직한 일이 못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예수가 일곱 귀신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뽑아냈다고 했다. 마치 막달라에게 잡귀신이 일곱이나 들어 신들린 여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막달라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당시의 토속종교에서 사랑과 임신을 다스리는 어머니 여신 이시타(Ishitar)나 천당의 여왕 아스타테(Astarte)를 섬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에 입문하기 위하여 일곱 단계의 의식(儀式)을 치렀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 일곱 번의 신(神)과 맺은 결연을 취소시켰다고 해설한다면 일리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막달라의 이야기가 나오기 바로 전에 어떤 여자가 예수에게 향수를 발라 주는 대목이 나오고, 마가복음에서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여자가 비슷한 일을 했다고 적혀 있는데, 누가나 마가 둘 다 막달라와 구분할 수 있도록 이 여자들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막달라와 공통된 점이 많아 동일인일 확률이 높다. 또 이 여자들은 예수에게 기름부음(anointment)을 준 사람들이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일은 향수를 바른다는 이야기이며, 왕과 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받는 일이었다. 이 여인들이 예수에게 기름부음을 봉사한 이유는 예수를 참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부부가 되는 한 예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생애에 가까이 와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베드로와 거의 동격에 가까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의 무덤에 시체가 없어진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막달라였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처음 알려 준 상대도 막달라였다. 따라서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는 독특한 것이었다. 역사상 유대인들의 풍습은 가장 극심한 남존여비의 사상에 젖어 있어 지금도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그러한 족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물며 그 당시의 여자란 아무리 예수의 부인이었다 해도 대접에 한계가 있었지 않나 짐작된다. 또 하나는 예수가 죽은 후 대개 그의 제자들이나 그 후계자들이 쓴 글들이 모아져 성서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의 당시 위치를 생각할 때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예수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지도 않은 여자의 신분을 구태여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또 특히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는 좋지 않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필경 막달라가 예수의 주위에 항상 있는 것이 사도들의 마음에 걸리는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이유로 그녀를 창녀로 과장하여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창녀란, 특히 사원(寺院)의 창녀란 신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돈에 몸을 파는 창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막달라가 실제로 사원의 창녀였다 해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나 가나안(Canaan) 문화에서 창녀행위란 것은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행해졌다. 사원에서 성품(聖品)을 받은 여자가 임신이나 다산(多産)을 대표하는 여신(女神)을 대신하여 사원을 찾는 남자 신도와 성교를 한다는 것은 성(聖)스러운 영적(靈的)인 결합이었기 때문에 지금 사회에서 대하는 창녀처럼 천한 계급이 아니고 오히려 성직자에 가까운 신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부일처주의를 주창해 온 그리스도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개전한 전직 창녀를 막달라(Magdalen)라 부르는 풍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또 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여자가 또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역시 마리아이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2마일 정도밖에 안 되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던 마리아이다. 이 여자도 예수에게 향수를 발라 준 여자였다고 요한복음 11장에 씌어져 있다. 그녀는 예루살렘 교외에 사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그녀의 다른 형제와 함께 모든 식구가 예수를 믿고 따르던 집안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기 가문의 무덤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고급 관리나 부자로 추정된다. 당시에 자기 가문의 무덤이 따로 있을 정도면 상당한 지위의 집안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가 베다니를 떠나 이미 여러 날이 되어 요르단에 있을 때 마리아의 오라버니 라자로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는 이 말을 듣고 베다니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일부러 이틀을 더 묵으면서 기다렸다가 길을 떠난다. 예수의 일행이 베다니에 가까이 갔을 때 라자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시킨 지 사흘이나 되었고, 마중 나온 사람은 마리아의 여자 형제인 마르다 혼자였다. 이에 예수가 마르다를 통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마중 나오도록 한 후에야 마리아가 나왔고, 그러는 동안에 예수는 더 이상 마리아의 집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예수는 그 곳에서 기다리다 마리아를 만난 후에야 그녀의 집으로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마리아가 왜 예수를 마중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가 중요하다. 이때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의 상을 맞아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상제(喪制)로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상제가 여자일 경우에 특별히 남편을 마중 나가는 일 외에는 7일간의 상이 끝날 때까지 집 밖을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의 내용에 의하면 이때 마리아와 예수 두 사람의 처신은 완전한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예수가 베다니에 방문했던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에도 나온다. 38장에서 42절까지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註: 언니일 확률이 높음)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염려하는 일이 많고 역정 되는 일이 많도다. 한 가지 일만 하면 족하노라. 마리아는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를 빼앗지 말지어다.”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가 마리아에 대하여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결혼하여 자기 부인을 다루는 관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베다니의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이 두 여자들이 동일인일 것으로 믿고 있다. 마태·마가·요한 세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그 옆에 있었다고 기록하였지만,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 옆에 있었다는 말은 없었다. 만일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처럼 예수와 가깝고 따르던 사이였고, 죽었던 자기 오라버니를 부활시켜 주었던 은인이라면,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그 마당에 그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두 여자가 동일인이라면 한 ‘마리아’만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또 이것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소위 비밀의 마가복음이라는 삭제되었던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위의 요한복음에 소개된 내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예수가 죽었다는 라자로를 되살리기 위해 베다니 어귀에 도달했을 때 마리아를 집에 두고 마르다 혼자 나왔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고, 마르다가 집에 가서 마리아에게 예수가 왔다는 말을 하자 마리아는 재빨리 집을 뛰쳐 나왔다. 그 곳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곧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다시 들어가 예수의 지시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인으로서 마리아는 지켜야 하는 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관례로는 신부나 갓 결혼한 새댁은 남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집 밖으로 나와 남편 마중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때 마리아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기 때문에 안정을 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마르다는 예수에게 마리아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는데, 예수는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택했다고 설명하면서 마리아가 편히 있는 것을 두둔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정식 메시아로 차림을 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이미 마리아는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 만약 베다니의 마리아가 부인이었다면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는 예수와 처남관계가 될 것이고 라자로에게 예수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자로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우선 그가 죽었을 때 일어난 일을 따져 보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는 베다니에서 하룻길인 요르단에 있었다. 소식을 전해 주는 이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사용 않고 다만 사랑하는 이가 아프다고 하였다(요한복음 11장 3절). 이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였음을 나타낸 증거라 할 수 있다. 또 예수는 이 소식에 죽을병이 아니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라자로가 있는 베다니로 돌아가면서도 일부러 이틀씩이나 지연시키면서 늑장을 부렸고,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는데도 서두르기는커녕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을 연출하듯 딴청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라자로에게 가자고 하였고, 그의 사도들 역시 이상한 표현을 하였다. 이때 도마(Thomas)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 하였다. 만약 라자로가 진짜 죽었다면 그 때문에 다 함께 가서 예수와 함께 단체자살을 하겠다는 뜻이었겠는가? 예수가 거의 무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에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마치 한바탕 쇼를 벌이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스미스(Prof. Morton Smith)라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는 이들이 연극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많은 사교에서 종교의식으로 입교(入敎) 또는 입단(入團)예식을 할 때 흔히 했던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주검으로 무덤에 묻어 두고, 다시 태어나서 새로 맹세하는 신앙으로 새 인생을 산다는 걸 마치 연극처럼 제식(祭式)으로 행하였다. 지금도 성공회나 천주교의 제식을 보면 시늉만 보아도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의 제식을 보면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이와 같은 제식은 연옥(煉獄)의 설명을 읽으면 더욱 확실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니 2천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며, 지금도 세례(洗禮)가 마찬가지의 관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미스 교수는 예수가 한 행적은 당시의 마술사(魔術師-magician), 의술사(醫術師-healer) 등 신비를 행하고 기적을 행하던 다른 기인(奇人)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보면 예수가 치료받는 사람과 비밀리에 만나고 혼자서 조용하게 말하곤 하였으며, 종종 예수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예수가 습관적으로 비유(比喩)의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라자로의 죽음소동이 실제로는 하나의 제식으로 일장 연극에 불과했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실제의 일로 여겨, 결과적으로 속은 꼴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러면 어째서 라자로의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에서 거의 삭제되었는가? 여기에도 이론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마리아가 마중을 나와 함께 집으로 가는 도중 예수는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몰라도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정도였다면 예수의 마음속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텐데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라자로는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소개된다. 문둥이 시몬(마태복음 26장 6절, 마가복음 14장 3~9절), 지롯 시몬(마태복음 10장 4절, 마가복음 3장 18절, 註: Simon the Zealot, 한글에서는 가나안인 시몬이라 번역하였다) 모두 라자로를 말하는 이름이었다. 공관 복음서에서 요한복음과 같이 라자로의 집이라고 하는 대신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완전히 별개의 일로 소개한 것은 라자로의 사건을 감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자로의 문제와 마리아의 문제는 1958년 콜롬비아 대학의 고대역사학 교수인 스미스(Morton Smith) 씨가 예루살렘 동쪽 마 사바(Mar Saba)에 있던 한 사원에서 콘스탄티노플 교역의 문서를 발견했을 때 논란이 된 일이 있다. 즉, 발견된 문서 중에는 안티오크의 성(聖) 이그네시우스(St. Ignatius)의 저서가 있었고, 그 저서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교장이었던 클레멘트 주교가 동료인 데오도(Theodore)에게 보낸 편지가 끼어 있었다. 이 때는 그노시스계 카포크라시아(Capocratians) 종파에서 소위 마가복음에서 삭제된 비밀 복음서를 들고 나와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라자로가 죽은 것을 부활시킨 것은 상징적인 제식(祭式)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이를 반박하는 주류 크리스천계와 싸움이 한창일 때였다. 내용은 마가복음 중 현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삭제된 부분에 대하여, 그 내용은 교회가 원하는 바에 합당치 않으니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번역된 것을 그대로 옮기면, “진실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사실에 동감하고 그 진실을 말하고 싶다 해도, 그 대목을 진실이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은 반드시 참진실이 아니며, 또 신앙으로 인한 인간의 판단의식으로 참진실이기를 원한다 해도 참진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맞서지 말 것이며, 그들이 마가의 비밀 복음서를 믿으라 하면 이를 따라야 하겠지만, 다만 맹세하는 마당에서는 이를 거부하십시오. 이는 모든 진실을 항상 사람들에게 전부 말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함축된 말이어서 한참 새겨 보아야 하는 말이다. 이 편지는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라자로(Lazarus-Simon Zelotes)가 다시 살아나는 대목과, 그때 마리아가 한 행동과, 예수가 죽은 후 무덤에서 다시 부활할 때의 장면에 관한 내용이 마가복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을 교회 당국에서 삭제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렇게 편지로 그의 친지에게 (비밀)마가복음의 내용을 인정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삭제된 내용 중 라자로의 이야기는 라자로가 무덤 속에서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이 옆으로 옮겨지기 전에, 즉 무덤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고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불러댔다는 대목이었다. 이는 라자로가 실질적으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당시 교회가 원하는 바는 죽어 있는 라자로를 예수가 들어가서 되살리는 기적을 행했다고 만들고 싶었으니, 이런 내용을 없애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그러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결론이다. 또 마가복음 원본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것을 발견했을 때, 여자들이 무덤에서 뛰쳐 나갔다고만 기술하였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에서 열 두 절은 후일 사람들이 만들어 추가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낙 하마디’ 문서에는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계속적인 반목과 불화에 대하여 여러 증언을 다루었다. 두 사람은 메시지를 중심으로 한 교리와 혈통을 중심으로 한 교리 때문에 서로 맞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복음서(The Gospel of Mary)’에 베드로는 “자매여, 구세주께서 당신을 어느 여자보다도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 구세주께서 하신 말씀 중에 당신만 알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기억되는 대로 말해 주시오”(마리아복음 472쪽, 영문 번역판). 그리고 후에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게 분개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네들은 진정으로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하지 않은 말을 그 여자에게 했다고 생각하시오? 이제 우리는 모두 그 여자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이오?”(마리아 복음 473쪽, 영문 번역판). 그리고 나서 한 사도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물론 구세주께서는 그녀를 잘 알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했던 것이오.” 또 ‘빌립 복음서(The Gospel of Philip)’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와 가까웠으며 베드로와 언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음을 더욱더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신부(新婦)방 차리는 문제로도 신경전이 있었다. 막달라는 “주께서는 세례, 성유(聖油), 성찬(聖餐), 구속(救贖), 신부방(新婦房), 모든 것을 신비로 다루었습니다.” 또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주님의 동반자로 불린 막달라 마리아, 이 세 여자는 항상 주님과 함께 걸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다(빌립 복음 135, 140쪽, 영문번역판). 한 학자는 여기서 동반자라고 한 것을 사실상의 배우자로 해석하였다. 그가 그렇게 해설한 이유는 다른 근거를 참작해서이다. 즉, “그리고 구세주의 동반자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느 사도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하여 그녀와는 입을 맞추어 키스를 하곤 하였다. 이에 역한 사도들은 불만을 표시하며 왜 주님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구세주는 왜 내가 그녀처럼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요?라고 대답하였다”라는 어록이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육신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를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고, 이를 사랑하면 그것이 당신을 삼켜 수족이 마비될 것이오”라고 자기의 사랑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는가 하면, “혼인의 신비는 위대한 것이오. 그것이 없다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아니했을 것이오. 세상이 존재함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혼인이 있기 때문이오.”라 하였으며, ‘빌립 복음서’의 마지막에 가면, “사람의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사람의 아들(인자)이오, 사람의 아들을 통해 창조한 사람의 아들의 아들이다”라고 기술된 것을 보면 더욱 확신이 간다는 동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수는 헤롯 왕의 딸 살로메와도 심상치 않은 관계였다. ‘도마 복음(the Gospel of Thomas)’에 보면 “…살로메가 주께 질문하였다. 주여 언제 죽음의 왕국이 끝날 것이오? 예수가 답하기를, 모든 여자들이 아이 낳는 일을 그칠 때이니라. … 살로메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나는 아이를 만들지 않았으니 잘한 일이옵니까? … 예수가 또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든 과실을 먹되 잉태하는 과실은 먹지 말지어다 ….” 또 다른 구절에서는, “남자여, 당신은 누구이니까? 누가 나의 침대에 들어오고 내 상에서 먹으라 허락하였나이까 하매, 예수가 대답하기를 당신과 동격인 내가 허락한 자이고, 내가 허락을 받은 자이고, 그것이 바로 나 장본인이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자기의 소유물을 나에게 준 것이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살로메의 침실에서 주고받은 대화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여자 혼자 있는 살로메의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가 성공하여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헤롯 왕의 용상에 대신 앉았다면 예수의 부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예수는 양성애자였는가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예수가 요단 강 가까이 갔을 때 베다니에 있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전갈이 온다.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동생 마르다, 두 여자 형제가 전한 말의 내용이었다. 또 예수가 잡혀갈 것을 예상하여 마지막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할 때,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 대화장면이 요한복음 13장에 나온다. 그때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를 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할 때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예수의 품에 안긴 라자로를 통하여 물었다. 이것은 마치 부인이 옆에 있어 부인을 존중해 주기 위해 질문의 형식을 간접적으로 부인을 통해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라자로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예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을 것이고, 특히 그의 제자들을 더욱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인물 하나만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막연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따위의 사랑과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이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으로만 사랑했던 정신적인 사랑이라기보다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 앞에서도 꺼리지 않고 예수의 몸에 의지할 정도였고, 이러한 일을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여겨 마치 부부가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 이 두 남자들이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을 당연하게 보았던 것 같다. 여기서 사랑하는 이는 라자로를 뜻한다. 예수는 다른 남자와 서로 품에 의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라자로 한 사람과 이런 관계를 가졌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어느 특정한 두 남자만이 서로 껴안는 광경을 본다면 독자들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공개적이었으며, 심지어 라자로의 가족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틀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각자가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바랄 뿐이다.
.
2009.05.07 07:24:09 (*.131.66.217)
성경
성경의 역사
서양에서는 성경(聖經)을 ‘바이블(Bible)’ 또는 ‘비블’이란 어근을 근본으로 이름 지어 부른다. 성스러운 책이란 뜻의 ‘바이블’이란 단어의 어원은 ‘비를로스(Byblos)’에서 왔다고 한다. 비블로스라는 곳은 고대 페니키아의 한 국가였으며, 지금은 레바논의 게발(Gebal)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곳은 세상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오래된 사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거룩한 어머니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었던 곳이다. 이 거룩한 어머니는 아스타테(Astarte), 바알랏(Baalat) 또는 하토르(Hathor) 등으로 불리는 여신이었으며, 이 여신은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이 여신을 숭배하는 대표 승려는 파피루스로 된 책들을 소장하여 사원 일부에 도서관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성스러운 책이란 뜻에서 ‘바이블’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 기원이 되어 신에 관한 성스러운 책을 ‘바이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기 325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관하여 소위 니케아 종교회의라고 부르는 회의가 소집되었다. 처음에 그리스도교가 지하에 존재하면서 무척 박해당하고 있을 당시, 로마에서는 태양신(太陽神)이나 지신(地神)을 위주로 하는 종교가 당연한 신앙으로 여겨졌고,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이상한 신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이 바뀌어 그리스도교를 믿어도 좋다는 단계를 거쳐 드디어 그리스도교를 국교(國敎)로 만들고 그리스도교만이 허락되는 사회로 변환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고 국교로 탈바꿈을 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니케아 종교회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313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표하고 325년 종교회의를 열 때까지는 겨우 12년이란 짧은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이 사이에 성경을 만든 것이다. 성경을 쓴 기간은 무척 오랜 시간의 일이지만, 마지막에 마감질 하는 일은 무척이나 서둘렀다는 결론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성령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과오나 모순이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지만, 성경이 만들어진 내역을 보면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위 크리스천의 기본이론이 예수가 온 다음에 처음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구약이라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수백 년 전부터 성경의 사상은 꽤 많이 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기원전 3세기부터 모은,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1백만 권이란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기원전 70년에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이것은 예수가 오기 불과 70년 전의 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3세기 말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음) 당시 구약성경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불에 타기 약 20년 전에 성직자회의에서 수집하여 도서관에 보관하였는데, 이것들이 모두 불탔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다. 이 성직자회의 소속 성직자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까지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성서들을 수집했다 한다. 그러나 불에 타서 없어진 성서들은 무척 아까웠지만 세상의 모든 성서들을 수집했던 것은 아니며, 다른 사본들이 많이 나돌아다녔을 것이고, 계속하여 글이 씌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틀림없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성서들이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물론 구약에 해당하는 서적이었을 것이고, 계속하여 새로운 책들이 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왔다 간 이후 3백 년이나 지난 다음에 성경을 만든다고 모임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그리스도에 관한 책을 제대로 모두 수집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에 채택할 문서를 선택하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도대체 어떤 책들이 세상에 나돌아다니는지 수집하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나서 선택을 했어야 옳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가로서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무리, 종교인으로서 세력을 잡으려는 무리 그리고 그 때까지 자기가 믿던 이론만이 옳다고 주장하여 그 이론을 관철하려는 무리 등의 혼합으로 회의 자체가 요즈음의 한국 국회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70여 권의 책을 선택한다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안건을 토의했던 일곱 번의 니케아 종교회의는 462년이 걸렸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성경을 만드는 데 12년이란 세월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심각도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발달과정에서 이집트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 크리스천이 많았고, 일단 예수가 떠난 다음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여서 그 곳에 자료도 많았을 뿐 아니라 성직자나 학자들이 많았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예수가 헤롯 왕을 피해 간 곳이 이집트였고 그는 이집트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그의 가족은 파라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집트를 떠날 때에는 돈까지 주면서 환송을 해 준 것 등 예수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이집트에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가 이집트에서 한 일들을 무시하거가 일부러 모두 빼어 버려 성경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필경 이는 후일 노예의 신분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모세가 대탈출했다는 일을 미화하기 위해 예수에 가장 관대했던 이집트를 나쁘게만 색칠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40년대에 발견된 낙 하마디 문서와 사해의 문서 덕분에 성경에서 분명치 않았던 많은 부분을―완전하진 않아도―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모든 문서가 발견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아직도 다른 문서가 있는가 하여 탐색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미 더러는 새로 발견하였다는 소문도 돌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새로 얻게 된 지식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믿어 오고 가르치던 교리나 원리가 변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교회 당국에서는 자칫하면 교회 전체를 뜯어 고쳐야 할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기 바란다. 예를 들어 창조론 문제, 부활론 문제, 삼위일체론, 종말론 또는 지옥과 천당에 관한 이론 같은 것들이 뒤엎어질지 누가 알랴. 1만 분의 1이라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교회 당국에서 이를 원할 리가 있을 것인가? 새로 발견된 문서의 내용을―물론 발표된 것도 많이 있지만―그대로 전체를 학자적인 양심으로 모두 발표하는 데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포함돼 있다고 믿는다. 또 정치적인 복잡성도 있어 많은 사실이 비밀로 숨겨져 있으며, 다만 소문만 떠돌아다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서기 325년 제일 처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회의를 열었을 때, 의회의 결정으로 성서로 발탁된 책들 중에서 45개의 책을 삭제하고 이를 재정리하여 짤막하게 편성하여 삽입시키자는 제의를 하여 이것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책들은 혹시라도 읽혀질까 두려워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없애 버렸고, 낙 하마디나 사해의 문서 따위는 그 전에 사용되었던 책이기에 우리가 모르던 책들이 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의 뜻을 전하려 했다면 왜 책들을 마음대로 없애며, 어째서 그리 많은 책을 써서 혼동하게 만들었으며, 현대인들이 왈가왈부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고 따질 때 한 손에 들어가는 둘도 아닌 성경 하나만을 갖고 따지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성경의 내용을 보면―특히 신약은―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고 서술하는 식이 아니고 사도들의 경험담이나 일화를 엮은 형식이다. 그것도 예수를 구경해 보지도 못한 사도의 제자들이 애초 사도들의 말이나 적어 놓은 글에서 퍼 온 것도 많다. 예를 들어 마태(Matthew)는 복음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쓴 다른 책들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으며 다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고 하였으나, 과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그런 책들을 볼 것인가? ‘야고보서(Book of James)’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쓴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람도 예수의 어릴 적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으나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예수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함께 자랐으며 예수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형제나 어머니보다 더 잘 알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던 바울의 이야기를 오히려 더 중요하게 취급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어지는 도마(Thomas)도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두 권이나 썼고 복음서도 썼다. 그의 저서는 교리에 남달리 충실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보다 훨씬 먼저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다. 도마의 저서는 소위 Q 문서에 해당하는 서적이다. Q 문서라는 것은 사도들이 직접 말한 가장 신빙성 있는 말이나 구절을 의미한다. 그런데 도마는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수와 형제관계인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꾸민 사람들에게 도마의 소리는 그들이 원하는 내용도 아니고 반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윤회설을 주장했기 때문인가? 그의 책은 다만 그노시스파 크리스천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책이 되어 버렸다. 이 그노시스파 사람들은 로마 교황이 추천하는 글만 읽지 않은 죄로 모두 로마 교황 명령에 의하여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고 이미 2세기에 유포되어 널리 읽혀졌고 채택된 네 권의 복음서와 대등한 다른 책들도 또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가 있다는 말은 180년 안티오크 교황이 언급하여 잘 알려진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신약에 누락되었다. 이 복음서는 1886년 이집트의 나일 강 상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복음서에 아리마태아 요셉이 본디오 빌라도와 아주 가까운 친구관계라는 내용이 나오며, 예수가 죽은 후 들어갔던 무덤이 ‘요셉의 정원’에 있었다고 하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조작극을 했을 가능성을 높여 주는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2세기나 그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유아(幼兒) 예수의 복음서’이다. 이 복음서는 예수가 아주 어렸을 때 그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아주 영리했지만 난폭하고 버릇이 없고 신경질이 대단히 심한 어린이였음이 묘사되었다. 그 중에는 자기 심기를 건드린 다른 아이를 때려죽인 일도 있었고, 자기의 가정교사를 죽도록 두들겨 팬 적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예수의 행실은 신(神)이기에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나 내용은 당시의 일반적 사고방식을 고려하여 그가 성(聖)스러웠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 방편으로 과장하고 지어낸 이야기로 몰아 판단하기도 한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성경을 만들 때 목적하는 바를 예수의 메시지에 중점을 두었고, 예수의 혈통관계는 일부로 멀리하였다. 따라서 필경 이러한 복음서가 누락된 이유가 당시 성경을 만드는 사람들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대개 예수에 대하여 글을 쓴 사람들은 자기네가 쓴 글이 훗날 성경에 채택될지, 아니면 제거를 당하게 될지 전혀 그러한 생각 없이 글을 썼을 것이며, 다만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옮겨 자기 자신이 아는 한 이야기로 엮어 썼을 것이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내용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 내용은 각양각색이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쓴 사람들은 진실하게 자기가 듣고 본 대로 옮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교통과 통신수단이 불편했던 당시의 넓은 세상에 퍼지다 보니 당연히 내용에 차이가 생겼다. 성경을 무조건 성령에 의해 완벽하게 씌어진 책이라고 믿으라는 일은 너무 억지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성경이란 책자는 완벽하지 않은 책이란 말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모순도 많고 완벽하지 못한 설명도 많이 있다. 성경을 꾸민 사람들이 완벽한 것처럼 만든다고 했지만, 아직 완벽을 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인가 성경을 기본으로 하는 소위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종파는 2만 2천 내지 2만 8천의 종파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모두 성경의 해석이 다른 것이다. 결국 종교개혁도 마르틴 루터의 성경해석이 바티칸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성경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고치든가 빼어 없애든가 했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부를 없애 버리고 성경을 만들었다면,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모든 일을 판결한다는 이론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또 완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애매하게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혼동하도록 만든 것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이상하게 작용했다는 점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신약의 요한복음 6장 48~58절을 보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 하였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 것인가 ? 필경 멀쩡한 예수의 살을 도려내 식인종처럼 먹는다는 해석부터 오만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비유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왜 이런 식으로 표현하여 불완전한 인간들이 혼동하게 만들었을까? 이는 하나님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든가, 아니면 성경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든가 양자택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만약 예수가 전 인류를 상대로 인류를 구하러 이 세상에 내려왔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했다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이야기가 최소한 잠깐이라도 다른 지방에서도 있었어야 하지 않은가 하고 질문을 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인류가 집중된 중심지도 아니었는데 왜 로마나 중국 같은 곳을 제쳐놓고 하필이면 팔레스타인에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크리스천 계통이 아닌 다른 문서에 예수에 대하여 언급을 한 일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문서에는 예수를 특별하게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든가 인류를 위해 일하러 다녔다는 말은 없고, 돈 많은 유대인이고 질로트와 마찬가지로 로마에 항거하는 정치적 지도자로 언급되었고, 자기와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처럼 언급되었으며, 그가 평화를 위해 일했다거나 기적을 행했거나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을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쓴 책이라 하고, 그 자체가 역사적인 증거이며, 성경에는 틀린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이나 우주탐험 과학자들은 오직 성경을 증명하는 학자들이어야 한다. 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학자들은 오히려 66권의 성경에서 발견해 내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며 천체과학이나 고고학 발굴장소에는 항상 성경을 지침서로 지도와 함께 갖고 다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관련되었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같은 나라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니 지질학적인 지구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를 물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룡이나 아틀란티스 문명, 아즈텍 문명 또는 북극·남극의 유래나 천체 등 성경에서 말하는 차원을 넘어서이다. 성경에 의해서 교회는 지구가 편편하다는 주장을 했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람을 마귀에 홀린 놈이라고 죽인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다. 17세기 아일랜드의 대주교 허셔(Archbishop James Husher)가 창세기에 의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기원 전 4004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교회가 이를 정설로 여겨 왔으니, 지금이 2000년이라면 지금으로부터 6,004년 이상 오래 됐다는 역사나 고고학 따위의 과학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경에 의하여 틀린 소리를 하는 것이므로 옛날 같으면 마귀에 홀린 이단으로 몰아 태워 죽였어야 될 사람들인 것이다. 성서의 정확성 문제는 이런 것뿐 아니다. 4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씌어진 성서적인 책들이 무려 1천5백여 권 정도로 많이 있는데, 이 책들 사이에 8만 가지 이상이 서로 짝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번역하고 옮기는 사람들이 내용을 조정하고, 옮긴 내용과 내용 사이에 뜻이 달라지는 일이 생긴다.
잠깐 성경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70인역(Septuagint)이란 성경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인데,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II.)가 유대인들의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치하고 싶다고 하자 엘레아자르(Eleazar)라는 유대인 최고위 제사장이 유대인 12부족 중에서 6명씩 골라 모두 72명을 보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들을 파로스(Pharos)라는 섬에 보내 각각 다른 방에 가두고 각자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일시에 번역을 끝내고 이를 모아 비교해 보니 번역한 내용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번역은 하나님이 성령을 내려 다만 사람의 손만 빌린 것이고, 누가 쓰든 관계없이 그 결과는 하나님이 쓴 글로서 모두 똑같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 72명은 지금처럼 사전이나 기타 참고서적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고 언어에 능한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능통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어서, 이들의 번역은 서로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이를 통일하기 위하여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수소문하여 공동으로 수긍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만드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4세기 이전에 쓴 것은 없다. 여하튼 이런 자료들이 유대인들의 손에서 크리스천의 손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고, 이것이 단일본으로 종교회의의 여러 곡절을 거쳐 처음 성경이 된 것이다. 이 때에 이미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고,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없던 이야기가 삽입되기도 했다. 특히 남성우월주의가 완전히 자리잡은 이 때에 성서 속에 있던 여성에 대한 내용이 많이 없어졌고, 결국 성경에 의하여 여자들의 지위가 격하되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여자에 관한 내용은 롯기와 사사기의 4장 4절에 있는 짤막한 구절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 1844년 시내(Sinai) 사원에서 4세기의 기록인 소위 시내 산 사본(Codex Sinaiticus)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1056년의 예루살렘 사본(Jerusalem Codex)이나 1209년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1621년에 발견한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 등과 마찬가지로 희랍어로 씌어진 사본이지만 서로 다르고 나중에 번역된 킹 제임스판과도 차이가 난다. 이 ‘시내 산 사본’에 의하면 최소한 일곱 명의 저자가 1만 6천 개의 정정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을 바꾼 일도 여럿 발견됐다. 델릿치(Dr. Friedrich Delitzsch) 박사는 혼자서 3천 개나 되는 오식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 우리는 아리우스(Arius) 등 알렉산드리아 출신 성서학자들이 많은 글을 쓴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창설과정에서 권력싸움에 패배했기 때문에, 그들의 글들은 모두 삭제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초창기 성경을 만들 때 관여한 성직자들이 추가하고, 지우고, 보충하든가 또는 뭉텅이로 삭제해 버리는 일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과연 성경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람의 손을 빌려 쓴 글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이 있었을 때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대하여 대단한 불만이 있었다. 그는 1534년에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성경으로 성경을 마름질하였다. 이때 그는 ‘마카베(Machabees I & II)’ 상·하권을 위시한 7권의 책과 ‘에스더’와 ‘다니엘’의 일부를 없애고 이를 구약과 신약 사이의 ‘아포크리파(Apocrypha)’, 즉 외경(外經)이라 하여 따로 부록으로 만들었다. 이를 ‘아포크리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말의 뜻이 희랍어로 ‘숨겨진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들의 내용은 너무 중요하고 귀중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숨겨야 하며, 다만 선택된 소수에게만 알려 주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종파가 있는가 하면, 어떤 종파는 이 책들을 제거한 이유가 너무 귀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귀중하게 취급할 가치가 미약하여 성경에 보충자료로 취급해야 한다고도 하였고, 또 어떤 종파는 회의적이고 심지어는 이단(異端)에 속하는 문헌이라고 하여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 무리의 종파들은 4세기에 성경을 번역했던 성(聖) 예로메(Jerome)가 히브리 성서 외에 따로 엮어 제2의 율법이라 할 신명기(Deuteronomy)를 보조하는 뜻에서 15권의 책을 엮어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던 것이 장로교와 칼뱅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1826년 영국 성서공회(필자 주―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에서 ‘아포크리파’의 배포를 금지하도록 합의를 보았고, 이 때부터 영어권 내의 개신교에서 ‘아포크리파’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영국 성공회 계통과 독일 루터교에서 아직 ‘아포크리파’를 부록으로 출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희랍이나 러시아 정교회측에서는 아직도 원래의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원래의 성경을 ‘프로토캐논(Proto-Canon)’ 또는 ‘듀트로캐논(Deutro-Canon)’이라고 부른다. ‘프로토캐논’은 제일 첫번째 시성(諡聖)한 것이라 하여 우리말로 ‘원정경’이라고 부르고 히브리어로 씌어져 있으며 개신교에서 받아들인 구약을 말한다. 그리고 ‘듀트로캐논’은 두 번째 시성한 성경이란 뜻이며, ‘아포크리파’를 구비한 성경을 말한다. ‘듀트로캐논’은 천주교에서는 계속 사용하고 있었으나 개신교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성경이다. 그런데 실제로 영국 성공회 계통의 성경 ‘아포크리파’ 부록을 보면 위에서 뽑았다는 7권 외에 다른 성서 8권을 첨가하여 전부 15권의 다른 성서가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원래의 그리스도교로 알고 있는 천주교에서 옛날에 사용하던 성경을 불가타판(Vulgate vers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프로토캐논’이고, ‘듀트로캐논’을 4세기 교황 다마수스(St. Damasus)의 명에 의하여 예로메(St. Jerome)란 사람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라틴 불가타’라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라틴어를 몹시 천시하였다. 지금도 영어에 보면 쌍스럽다는 뜻으로 ‘벌가(vulgar)’라고 한다.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 한글을 천한 글이라 하여 언문이라 했던 것과 같이 천한 라틴어로 된 성경이라 하여 불가타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 여왕도 여러 나라 말을 했어도 천한 라틴어는 안 배운다고 하여 라틴어를 몰랐다는 것이다. 여하튼 불가타판(Vulgate Version)은 구약 46권,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으며,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천주교는 아직 이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판인(이제는 이것도 구판이 되었지만) ‘듀에이-림스(Dueay-Reheims Version)’이고, 또 현대어로 바꾼 ‘신아메리카판(New American Bible Version, NAV)’, ‘개정판(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 그리고 신·구교가 합하여 공동으로 편집한 ‘신예루살렘판(New Jerusalem Bible, NJV)’을 영어권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1600년대에 영국 왕 제임스의 명령으로 편 ‘킹 제임스판(King James Version, KJV)’이 근래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1978년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성서공회(International Bible Society)’에서 주관하여 ‘신국제판(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 새로 나와 한국어로도 이미 번역되어 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로 공동번역이라고 근래에 성경을 출판하였는데, 에스텔(에스더)서에서 16장이던 것을 여섯 장을 잘라 없애고 10장만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주로 미국계 영어권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되었으며, 지금도 영어권 개신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어권의 성경 역사도 잠깐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위에 아주 간단하게 성경의 변천사를 설명해 보았지만, 좀더 자세하게 보면 아주 복잡한 사연이 깃들여 있다. 영어권의 근본지인 영국에서는 지금의 영어와는 판이하게 다른 영어이지만 7세기 중엽부터 부분별로 성경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은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을 직접 읽어 보라는 취지에서 나왔고, 이는 영국뿐 아니라 어느 언어권에서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점점 널리 퍼지자, 11세기에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성서라는 것이 그리 존엄한 책이 못 되는 일이고, 또 어중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엉뚱하게 해석하여 신앙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위험이 있기에, 성서라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여 장소와 비밀을 지키는 것이 전능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일이다”라 하여 성서번역을 못하도록 하였고, 또 이노센트 3세 교황이 1199년에 “믿음에 관한 신비의 비밀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설명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려 성경의 번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계속 번역되었다. 영국에서는 1382년 위클리프(John Wycliffe)라는 옥스퍼드의 학자가 신약을 완전히 영어로 번역하였고, 계속 구약을 번역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대주교 아룬델이란 사람은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 표현하기를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은 좀벌레 같은 녀석이 적그리스도 새끼 행세를 하더니 결국 성경을 제 모국어로 번역하는 마귀 같은 짓을 했습니다”라 하였고, 옥스퍼드 지역 당국에서는 “앞으로는 당국의 허락 없이 아무도 성서를 영어로 옮겨서는 안 되며, 근간에 문제가 된 위클리프 성서의 책이나 그 책의 일부를 읽어서도 안 된다. 만일 앞으로 허락 없이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성서의 전부 또는 일부를 번역하는 일이 발견될 때에는 극단적인 파문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당국의 명령은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항간에는 계속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모국어로 번역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의 바람이 전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틴데일, 코버데일, 로저스, 매튜 같은 사람들이 결국 들켜서 사형을 당하면서도 번역사업이 계속되었고, 이들이 만들어 놓은 번역판을 기반으로 1537년 드디어 완전한 영어판 성경이 완성되었으며, 2년 후 헨리 8세가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난 영국 교회의 창설 덕분에 처음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아 ‘위대한 성경(Great Bible)’이란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친천주교계였던 헨리 8세의 딸 메리 1세 여왕 때의 30년을 제외하고는 킹 제임스판이 나올 때까지 거의 유일한 영어 성경이었으며, 킹 제임스판은 이 성경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560년대에 메리가 왕이 되면서 다시 영어 성경을 없애 버리고, 번역한 사람들과 성공회나 개신교 사람들을 처벌하기 시작하여 대거 국외로 피난가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 피난을 한 영국계 크리스천의 중심지는 스위스 제네바였으며, 여기서 이 사람들은 다른 영어판 성경과 절충하여 제네바판 성경을 만들었다. 이 성경책은 칼뱅주의에 매우 충실한 성경책이었으며,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올 때 가져온 성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칼뱅(John Calvin)은 자기의 교리가 확고해짐에 따라 절대군주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는 정부는 교회에 속해야 하며 모든 성경적 해설은 칼뱅주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교리적인 폭군이었다. 이렇게 제네바판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영국은 메리의 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위대한 성경(Great Bible)의 개정판을 1568년에 만들어 ‘주교의 성경(Bishop's Bible)’이라 이름 지었다. 또 이것을 1603년 제임스 스튜어트 왕이 직접 명하여 47명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새로 성경을 만들게 하여 8년 만인 1611년에 내놓은 것이 유명한 ‘킹 제임스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성경은 바로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다. 결국 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제네바판을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경은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번 수정되고 개정되었으며, 그 외에도 히브리나 희랍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된 것들 등등 여러 가지의 성경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우리 세대에 와서는 위에서 말한 1978년의 ‘신국제판’이 나와 ‘킹 제임스판’을 대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알기에는 한국어로 출판된 성경은 100년 전 번역·출판되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읽던 ‘킹 제임스판(KJV)’이었고, 그 뒤를 이어 옛말 냄새가 덜 나는 ‘신국제판(표준 새 번역, NIV)’은 1993년에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개신교는 영국판 성경을 위주로 번역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과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은 전세계의 인류가 미처 걷잡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변화를 거듭하였다. 성경의 세계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심리학, 철학, 사회학, 고고학, 고대 역사학, 심지어는 언어학까지 많은 변화를 거쳤으며, 첨단을 걷고 있는 학자들의 세계를 구태의연한 주류 학자나 대중이 미처 소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들 첨단의 위치에 있다 할 학자들은 과거 이해 못 하던 기원전·후의 종교적· 사회적 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어구나 종교·철학적인 용어 같은 것들도 더 많이 이해하고 있으며, 더욱이 1940년대에 발견된 낙 하마디 문서나 사해의 문서 따위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근원을 훨씬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까지 성경의 물리적인 상황을 설명해 보았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그리스도교 안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많은 차이를 보여 주게 된다. 그 좋은 예로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한 전도학교의 교사 밀러(Dave Miller at Brown Trail School of Preaching in Bedford, Texas) 씨가 설명한 성경의 완전무결성(完全無缺性-inerrancy)에 대한 문구를 소개하니, 이에 대하여 심각하게 음미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한 작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매 구석구석 어김없이 영감이 작용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러한 성스러운 영감의 지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표현한 언사에도 작용하였으며, … 따라서 성서는 인간을 속이는 일이나 잘못 인도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어떻게 생활하는가에 따라 모든 인간은 그 가치를 판단받게 되는 것이다. ‘완전무결(inerrant)’하다는 말은 ‘완전한 진리’를 말하며, ‘잘못이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며, 성경을 쓴 사람들은 그들이 기술한 바에서 완벽하게 실수가 없었고, 진실되며, 완전하게 믿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무결성’의 교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도덕과 종교의 참진실됨을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과학적·역사적·지질학적 사실을 말하는 데에도 마찬가지 적용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쓴 작가들은 성경에 채택된 부분 이외의 그들이 쓴 다른 저서에서도 오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필경 대부분의 독자들은 위의 이러한 설명이 그리 낯선 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라건대 이 문구를 마음에 두고 나중에 소개되는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의 장을 읽을 때 참고해 주기 바란다.
낙 하마디 문서
우선 약 50년 전 발견된 ‘그노시스’의 문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좀 해보자. 1945년 남부 이집트의 한 농부가 ‘낙 하마디(Nag Hammadi)’라는 지방에서 농사지을 땅을 개간하는 중에 우연히 붉은 색깔의 항아리를 땅에서 파내게 되었다. 그 안에는 13권의 책이 들어 있었는데, 이 책들은 가죽표지와 파피루스 종이로 된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이 물건의 진가를 알 길이 없는 무식한 이 농부는 불쏘시개로도 좀 사용하고 더러는 고물상에 팔았으며, 어떤 사람은 고물상에서 가죽책 껍질을 사서 신발바닥에 대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좀 아는 사람이 보고 가치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것을 사서 큰 도시 고물상에 팔아 그 곳에서 돌다가, 결국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한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급기야는 밀수출되어 ‘칼 융(C.G.Jung) 재단’에서 일부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이 문서의 존재와 진가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수소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판명된 내용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Thomas)의 복음서였다. 그제야 이를 알게 된 이집트 정부는 1952년에 국보로 정하고, 나머지 문서를 수집하여 보관하게 된 것이다. 1961년에는 세계의 학자들이 연구팀을 결성하고 번역에 들어갔으며, 1972년에 사진판이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전문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흔히 ‘낙 하마디 문서’라고도 하고,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라고도 하며, 근본적으로 그노시스 사람들이 주창하던 내용과 상응하는 내용의 문서들을 모아 묶은 성서집이다. 연대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에 엮은 것으로 추정되며, 발견된 문서는 복사본이고, 원본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리의 복음(Gospel of Truth)’이나 ‘이집트인의 복음(Gospel of the Egyptians)’ 같은 것들은 클레멘트, 이레니우스, 오리겐(Origenes, 185?~254? A.D.) 같은 그리스도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쓴 것이며, 현대 학자들의 판정으로는 150년대 이전에 씌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고, 최소한 하나는 현재 신약의 네(4) 복음서보다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평가하면 낙 하마디 성서집은 로마 당국의 검열을 피했다는 점이며, 다른 성서와 달리 로마인 대신에 이집트인을 상대로 썼기 때문에 로마인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삭제나 변조할 필요 없이 그대로 기술되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성지를 탈출한 사람들로서 예수를 직접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고 목격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기술한 점들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정통 주류 크리스천계의 교리와 상반되는 구절이 많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해의 문서
또 하나 발견된 중요한 옛 문서는 ‘사해의 문서(Dead Sea Scroll)’이다. 이 문서는 현재 성경의 네 복음서가 씌어지기 전 유대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서로 인정되고 있다. 1947년 팔레스타인의 제리코(Jericho) 부근 쿰란이란 곳에서 한 베두인(Bedouin: 사막의 사람들이란 뜻으로 주로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음) 양치기 목동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 한 동굴에까지 와서 무서워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돌을 던졌더니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상히 여겨 살살 들어가 보았더니 큰 항아리가 여러 개 있고 그 안에 이해할 수 없는 두루마리 문서가 많이 있어, 낙 하마디의 경우처럼 몇 개 꺼내어 불쏘시개도 하고 신발창도 하며 고물상에 팔기도 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드디어 전문가들의 눈에 띄게 되어 탐사를 한 결과 쿰란뿐 아니라 그 근처 지방에 산재해 있는 열 한 개의 동굴에서 약 5백여 개의 히브리어와 아람어(Aramaic language: 예수가 사용하던 언어)로 씌어진 문서 꾸러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대개 구약성경에 속한 문서들과 기원전 250년경부터 자기네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수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서기 66년에서 70년 사이 로마에 항쟁했던 전투에서 보호하기 위해 감추어 두었던 문서였다. 이 문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얇은 동판(銅版)을 연결하고 두들겨서 글씨를 새긴 두루마리는 예루살렘과 케드론 계곡(Kedron Valley)의 공동묘지 어느 곳에 보물들을 숨겨 두었는지 암호로 기록한, 이를테면 보물섬 지도 같은 것이다. 또 전쟁의 서(War Scroll)는 중국의 손자병법(孫子兵法)처럼 군대의 전략과 전술을 설명한 책이며, 수신보감(修身寶鑑-Manual of Discipline)이라 할 수 있는 책 하나는 당시의 법률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법과 제식(祭式)을 설명하였으며 그 사회에서 신앙심을 돈독하게 유지하기 위한 십이인위원회(十二人委員會-Council of Twelve)의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하박국(Habakkuk Pesher)서는 당시의 중요한 인물과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록과, 그들의 행적과 그에 대한 평가를 하였고, 이사야(Isaias)서는 사해의 문서 전체 중에서도 가장 긴 문서로 총 9미터 정도가 되며 구약성경에 씌어진 원본으로 알려진 것보다 수백 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고, 이사야서를 완전히 기록한 책이다.
복음서
복음서라 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네 개의 책으로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의 책을 말한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가 살았을 당시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서기 66년에서 74년 사이와 132년에서 135년 사이에 유대에서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독립 또는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봉기가 일어났던, 즉 서기 60년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약 80년 동안에 만들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의견을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은 지 약 30년이 지난 후에 전화로 많이 분실된 기록을 근거로 하고, 저자 본인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이를 수집하여 쓴 글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많은 대목이 과장되었거나 편리하게 변형되었거나 누락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이론이고, 비록 예수 생전에 그를 만나고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기억했다 하여도 그들은 어린 나이의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기에 그들의 기억이 완벽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2세기에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라는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당시 번창하였던 지식본위로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그노시스(Gnosis)파의 하나인 ‘카포크라시아(Carpocratians)’ 종파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공박하기 위하여 쓴 글이 얼마 전에 발견되었다고 위에 설명하였었다. 그 편지내용에 복음서에 관한 말이 나오며, 마가복음 원본에서 인용한 돈 많은 젊은 남자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었다. 그의 편지에서 말하는 많은 부분이 일반 마가복음에서는 누락되어 있었고 다만 특수층에서만 그 원본이 유통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동시에 마가가 복음서를 쓴 것은 희랍-로마인들을 상대로 로마 시에서 썼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마가가 복음서를 쓰고 있을 때는 한참 유대인들이 봉기를 해 로마에 항거하여 열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던가, 아니면 막 진압되어 수많은 유대인들이 처형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마가는 자기의 복음서가 로마인들에게 호감을 사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가 로마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는 인상을 주는 글은 피하고, 예수를 죽인 책임이 로마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유대인 그룹에 있다고 말을 바꾸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예수를 미워하고 그를 체포하여 구속한 것은 유대인 공회(公會)의 산헤드린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를 없애려는 동기는 로마인이 아니고 이들 유대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로마의 법에 의하여 로마 관리의 판결로 로마군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식민통치를 하던 당시의 로마 집정관이 그 곳 주민들의 의향에 끌려 그들이 하자는 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였단 말인가? 전권을 갖고 있던 총독 빌라도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처럼 진정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다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 예수의 무죄를 왜 선언하지 못했을까? 복음서에 대하여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스미스(Morton Smith) 교수는 복음서의 저자들뿐 아니라 초기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이러한 방침을 채택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그 당시 명절을 당하면 팔레스타인의 총독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어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중 어느 죄인을 놓아줄 것인가를 유대인 관중에게 물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이란 페삭(유월절- Pesach 또는 Passover)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모세의 지도를 받으면서 탈출한 출애굽의 거사를 기념하는 7일간 계속되는 명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축제 때 총독이 죄수를 놓아주는 관습이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은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가 처형당한 날짜도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전날이었다고 한 데 반하여, 나머지 마가·누가·마태복음서에서는 유월절 다음날이라고 하여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또 예수가 마지막 한 말도 마태복음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다 이루었다”란 말만 하고 머리를 떨어뜨렸다고 나와 각각 다름을 알 수 있다.
서기 36년경, 예수가 처형을 당했다. 따라서 예수의 가족이나 제자 등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변이 위험하게 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들이 어디로 갔든 간에 정착한 곳에서 각각 예수의 가르침을 전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으로 채택된 복음서의 경우를 보면, 이들의 선교사업은 유대인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핍박받는 유대인만이 믿는 종교라면 무조건 박해를 당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때까지도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많은 로마인들이 예수의 사상을 신앙으로 믿게 된다면 더 이상 박해를 할 수 없으리라는 간단한 판단이 나온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그 책임을 로마인들에게 돌린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빌라도 자신이나 로마 통치인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아도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추앙받는 예수를 직접 죽이기보다 될 수 있는 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없애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복음서를 꾸몄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서기 80년경 희랍인 의사였던 누가(Luke)가 당시 팔레스타인의 수도 시자리아(Caesarea)에서 로마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 쓴 책으로 알고 있다. 누가도 마가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인 책임을 특정 부류의 유대인으로 돌리고, 로마인들은 책임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85년경 마태복음이 씌어질 때에는 이러한 양상은 기정사실로 당연시되는 상태였다. 마태복음은 희랍어로 희랍풍으로 씌어졌지만, 절반 이상이 마가복음에서 직접 퍼 온 내용이다. 마태는 팔레스타인 출신 피난민인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를 예수의 제자 마태와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제자 마태는 아람어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마태복음이 씌어질 때에는 이미 죽은 지 오랜 사람이다. 그리하여 마가·마태·누가의 세 복음서는 모두 구두로 된 증언과 이미 상실된 문서들을 근거로 결국 내용의 근원을 공동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Synoptic Gospel)’라고 부르고 있고 요한복음과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지만, 사실은 요한이 썼다는 물적 근거는 없다. 성경을 뒤져보면 예수를 세례해 준 요한 이외에 요한이란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나중에 씌어진 것으로, 서기 100년경 에페수(Ephesus)라는 한 희랍의 도시에서 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글을 쓴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복음서와는 차이나는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다른 복음서는 주로 갈릴리 북쪽에서 활동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썼고, 남쪽인 유대아나 예루살렘에서의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일을 포함하여 두세 차례 입을 건너간 이야기를 전했다. 그에 반하여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아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활동을 생생하게 그렸고, 골고다에서의 이야기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진술로 여겨지는 목격담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이 없는 가나에서의 결혼식 광경, 니고데모(Nicodemus)와 아리마태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의 역할, 라자로(Lazarus)의 부활 이야기(비록 마가복음에서 약간 언급은 하였지만) 따위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비록 가장 늦게 씌어진 복음서이긴 하지만,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고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서기 66년 예루살렘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적 여건을 종합적으로 잘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손질을 보아 간추려지고 잘려지고 변조는 되었어도 신약성경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책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환생론(Reincarnation)
.
성경의 역사
서양에서는 성경(聖經)을 ‘바이블(Bible)’ 또는 ‘비블’이란 어근을 근본으로 이름 지어 부른다. 성스러운 책이란 뜻의 ‘바이블’이란 단어의 어원은 ‘비를로스(Byblos)’에서 왔다고 한다. 비블로스라는 곳은 고대 페니키아의 한 국가였으며, 지금은 레바논의 게발(Gebal)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곳은 세상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오래된 사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거룩한 어머니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었던 곳이다. 이 거룩한 어머니는 아스타테(Astarte), 바알랏(Baalat) 또는 하토르(Hathor) 등으로 불리는 여신이었으며, 이 여신은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이 여신을 숭배하는 대표 승려는 파피루스로 된 책들을 소장하여 사원 일부에 도서관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성스러운 책이란 뜻에서 ‘바이블’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 기원이 되어 신에 관한 성스러운 책을 ‘바이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기 325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관하여 소위 니케아 종교회의라고 부르는 회의가 소집되었다. 처음에 그리스도교가 지하에 존재하면서 무척 박해당하고 있을 당시, 로마에서는 태양신(太陽神)이나 지신(地神)을 위주로 하는 종교가 당연한 신앙으로 여겨졌고,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이상한 신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이 바뀌어 그리스도교를 믿어도 좋다는 단계를 거쳐 드디어 그리스도교를 국교(國敎)로 만들고 그리스도교만이 허락되는 사회로 변환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고 국교로 탈바꿈을 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니케아 종교회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313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표하고 325년 종교회의를 열 때까지는 겨우 12년이란 짧은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이 사이에 성경을 만든 것이다. 성경을 쓴 기간은 무척 오랜 시간의 일이지만, 마지막에 마감질 하는 일은 무척이나 서둘렀다는 결론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성령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과오나 모순이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지만, 성경이 만들어진 내역을 보면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위 크리스천의 기본이론이 예수가 온 다음에 처음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구약이라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수백 년 전부터 성경의 사상은 꽤 많이 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기원전 3세기부터 모은,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1백만 권이란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기원전 70년에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 이것은 예수가 오기 불과 70년 전의 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3세기 말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음) 당시 구약성경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불에 타기 약 20년 전에 성직자회의에서 수집하여 도서관에 보관하였는데, 이것들이 모두 불탔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다. 이 성직자회의 소속 성직자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까지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성서들을 수집했다 한다. 그러나 불에 타서 없어진 성서들은 무척 아까웠지만 세상의 모든 성서들을 수집했던 것은 아니며, 다른 사본들이 많이 나돌아다녔을 것이고, 계속하여 글이 씌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틀림없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성서들이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물론 구약에 해당하는 서적이었을 것이고, 계속하여 새로운 책들이 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왔다 간 이후 3백 년이나 지난 다음에 성경을 만든다고 모임을 가졌지만, 어디에도 그리스도에 관한 책을 제대로 모두 수집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에 채택할 문서를 선택하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도대체 어떤 책들이 세상에 나돌아다니는지 수집하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나서 선택을 했어야 옳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가로서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무리, 종교인으로서 세력을 잡으려는 무리 그리고 그 때까지 자기가 믿던 이론만이 옳다고 주장하여 그 이론을 관철하려는 무리 등의 혼합으로 회의 자체가 요즈음의 한국 국회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70여 권의 책을 선택한다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안건을 토의했던 일곱 번의 니케아 종교회의는 462년이 걸렸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성경을 만드는 데 12년이란 세월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심각도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발달과정에서 이집트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 크리스천이 많았고, 일단 예수가 떠난 다음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여서 그 곳에 자료도 많았을 뿐 아니라 성직자나 학자들이 많았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예수가 헤롯 왕을 피해 간 곳이 이집트였고 그는 이집트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으며, 그의 가족은 파라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집트를 떠날 때에는 돈까지 주면서 환송을 해 준 것 등 예수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이집트에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가 이집트에서 한 일들을 무시하거가 일부러 모두 빼어 버려 성경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필경 이는 후일 노예의 신분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모세가 대탈출했다는 일을 미화하기 위해 예수에 가장 관대했던 이집트를 나쁘게만 색칠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40년대에 발견된 낙 하마디 문서와 사해의 문서 덕분에 성경에서 분명치 않았던 많은 부분을―완전하진 않아도―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모든 문서가 발견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은 아직도 다른 문서가 있는가 하여 탐색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미 더러는 새로 발견하였다는 소문도 돌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새로 얻게 된 지식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믿어 오고 가르치던 교리나 원리가 변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교회 당국에서는 자칫하면 교회 전체를 뜯어 고쳐야 할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기 바란다. 예를 들어 창조론 문제, 부활론 문제, 삼위일체론, 종말론 또는 지옥과 천당에 관한 이론 같은 것들이 뒤엎어질지 누가 알랴. 1만 분의 1이라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교회 당국에서 이를 원할 리가 있을 것인가? 새로 발견된 문서의 내용을―물론 발표된 것도 많이 있지만―그대로 전체를 학자적인 양심으로 모두 발표하는 데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포함돼 있다고 믿는다. 또 정치적인 복잡성도 있어 많은 사실이 비밀로 숨겨져 있으며, 다만 소문만 떠돌아다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서기 325년 제일 처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종교회의를 열었을 때, 의회의 결정으로 성서로 발탁된 책들 중에서 45개의 책을 삭제하고 이를 재정리하여 짤막하게 편성하여 삽입시키자는 제의를 하여 이것이 채택되었으며, 이러한 책들은 혹시라도 읽혀질까 두려워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없애 버렸고, 낙 하마디나 사해의 문서 따위는 그 전에 사용되었던 책이기에 우리가 모르던 책들이 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의 뜻을 전하려 했다면 왜 책들을 마음대로 없애며, 어째서 그리 많은 책을 써서 혼동하게 만들었으며, 현대인들이 왈가왈부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고 따질 때 한 손에 들어가는 둘도 아닌 성경 하나만을 갖고 따지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성경의 내용을 보면―특히 신약은―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고 서술하는 식이 아니고 사도들의 경험담이나 일화를 엮은 형식이다. 그것도 예수를 구경해 보지도 못한 사도의 제자들이 애초 사도들의 말이나 적어 놓은 글에서 퍼 온 것도 많다. 예를 들어 마태(Matthew)는 복음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쓴 다른 책들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으며 다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고 하였으나, 과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그런 책들을 볼 것인가? ‘야고보서(Book of James)’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쓴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람도 예수의 어릴 적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으나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예수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함께 자랐으며 예수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형제나 어머니보다 더 잘 알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던 바울의 이야기를 오히려 더 중요하게 취급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어지는 도마(Thomas)도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두 권이나 썼고 복음서도 썼다. 그의 저서는 교리에 남달리 충실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보다 훨씬 먼저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하나도 채택되지 않았다. 도마의 저서는 소위 Q 문서에 해당하는 서적이다. Q 문서라는 것은 사도들이 직접 말한 가장 신빙성 있는 말이나 구절을 의미한다. 그런데 도마는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수와 형제관계인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꾸민 사람들에게 도마의 소리는 그들이 원하는 내용도 아니고 반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윤회설을 주장했기 때문인가? 그의 책은 다만 그노시스파 크리스천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책이 되어 버렸다. 이 그노시스파 사람들은 로마 교황이 추천하는 글만 읽지 않은 죄로 모두 로마 교황 명령에 의하여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고 이미 2세기에 유포되어 널리 읽혀졌고 채택된 네 권의 복음서와 대등한 다른 책들도 또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가 있다는 말은 180년 안티오크 교황이 언급하여 잘 알려진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신약에 누락되었다. 이 복음서는 1886년 이집트의 나일 강 상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복음서에 아리마태아 요셉이 본디오 빌라도와 아주 가까운 친구관계라는 내용이 나오며, 예수가 죽은 후 들어갔던 무덤이 ‘요셉의 정원’에 있었다고 하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조작극을 했을 가능성을 높여 주는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2세기나 그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유아(幼兒) 예수의 복음서’이다. 이 복음서는 예수가 아주 어렸을 때 그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아주 영리했지만 난폭하고 버릇이 없고 신경질이 대단히 심한 어린이였음이 묘사되었다. 그 중에는 자기 심기를 건드린 다른 아이를 때려죽인 일도 있었고, 자기의 가정교사를 죽도록 두들겨 팬 적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예수의 행실은 신(神)이기에는 너무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나 내용은 당시의 일반적 사고방식을 고려하여 그가 성(聖)스러웠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 방편으로 과장하고 지어낸 이야기로 몰아 판단하기도 한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성경을 만들 때 목적하는 바를 예수의 메시지에 중점을 두었고, 예수의 혈통관계는 일부로 멀리하였다. 따라서 필경 이러한 복음서가 누락된 이유가 당시 성경을 만드는 사람들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대개 예수에 대하여 글을 쓴 사람들은 자기네가 쓴 글이 훗날 성경에 채택될지, 아니면 제거를 당하게 될지 전혀 그러한 생각 없이 글을 썼을 것이며, 다만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 옮겨 자기 자신이 아는 한 이야기로 엮어 썼을 것이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내용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 내용은 각양각색이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쓴 사람들은 진실하게 자기가 듣고 본 대로 옮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교통과 통신수단이 불편했던 당시의 넓은 세상에 퍼지다 보니 당연히 내용에 차이가 생겼다. 성경을 무조건 성령에 의해 완벽하게 씌어진 책이라고 믿으라는 일은 너무 억지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성경이란 책자는 완벽하지 않은 책이란 말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모순도 많고 완벽하지 못한 설명도 많이 있다. 성경을 꾸민 사람들이 완벽한 것처럼 만든다고 했지만, 아직 완벽을 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인가 성경을 기본으로 하는 소위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종파는 2만 2천 내지 2만 8천의 종파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모두 성경의 해석이 다른 것이다. 결국 종교개혁도 마르틴 루터의 성경해석이 바티칸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성경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고치든가 빼어 없애든가 했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부를 없애 버리고 성경을 만들었다면, 성경을 유일한 기준으로 모든 일을 판결한다는 이론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또 완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애매하게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혼동하도록 만든 것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이상하게 작용했다는 점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신약의 요한복음 6장 48~58절을 보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 하였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 것인가 ? 필경 멀쩡한 예수의 살을 도려내 식인종처럼 먹는다는 해석부터 오만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비유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왜 이런 식으로 표현하여 불완전한 인간들이 혼동하게 만들었을까? 이는 하나님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든가, 아니면 성경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든가 양자택일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만약 예수가 전 인류를 상대로 인류를 구하러 이 세상에 내려왔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했다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이야기가 최소한 잠깐이라도 다른 지방에서도 있었어야 하지 않은가 하고 질문을 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인류가 집중된 중심지도 아니었는데 왜 로마나 중국 같은 곳을 제쳐놓고 하필이면 팔레스타인에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크리스천 계통이 아닌 다른 문서에 예수에 대하여 언급을 한 일이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문서에는 예수를 특별하게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든가 인류를 위해 일하러 다녔다는 말은 없고, 돈 많은 유대인이고 질로트와 마찬가지로 로마에 항거하는 정치적 지도자로 언급되었고, 자기와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처럼 언급되었으며, 그가 평화를 위해 일했다거나 기적을 행했거나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성경을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쓴 책이라 하고, 그 자체가 역사적인 증거이며, 성경에는 틀린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이나 우주탐험 과학자들은 오직 성경을 증명하는 학자들이어야 한다. 대학에서 과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학자들은 오히려 66권의 성경에서 발견해 내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하며 천체과학이나 고고학 발굴장소에는 항상 성경을 지침서로 지도와 함께 갖고 다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관련되었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같은 나라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으니 지질학적인 지구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를 물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룡이나 아틀란티스 문명, 아즈텍 문명 또는 북극·남극의 유래나 천체 등 성경에서 말하는 차원을 넘어서이다. 성경에 의해서 교회는 지구가 편편하다는 주장을 했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람을 마귀에 홀린 놈이라고 죽인 일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다. 17세기 아일랜드의 대주교 허셔(Archbishop James Husher)가 창세기에 의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기원 전 4004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교회가 이를 정설로 여겨 왔으니, 지금이 2000년이라면 지금으로부터 6,004년 이상 오래 됐다는 역사나 고고학 따위의 과학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경에 의하여 틀린 소리를 하는 것이므로 옛날 같으면 마귀에 홀린 이단으로 몰아 태워 죽였어야 될 사람들인 것이다. 성서의 정확성 문제는 이런 것뿐 아니다. 4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씌어진 성서적인 책들이 무려 1천5백여 권 정도로 많이 있는데, 이 책들 사이에 8만 가지 이상이 서로 짝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번역하고 옮기는 사람들이 내용을 조정하고, 옮긴 내용과 내용 사이에 뜻이 달라지는 일이 생긴다.
잠깐 성경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70인역(Septuagint)이란 성경이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인데,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y II.)가 유대인들의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치하고 싶다고 하자 엘레아자르(Eleazar)라는 유대인 최고위 제사장이 유대인 12부족 중에서 6명씩 골라 모두 72명을 보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들을 파로스(Pharos)라는 섬에 보내 각각 다른 방에 가두고 각자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일시에 번역을 끝내고 이를 모아 비교해 보니 번역한 내용이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번역은 하나님이 성령을 내려 다만 사람의 손만 빌린 것이고, 누가 쓰든 관계없이 그 결과는 하나님이 쓴 글로서 모두 똑같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 72명은 지금처럼 사전이나 기타 참고서적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고 언어에 능한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능통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어서, 이들의 번역은 서로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이를 통일하기 위하여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사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수소문하여 공동으로 수긍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만드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4세기 이전에 쓴 것은 없다. 여하튼 이런 자료들이 유대인들의 손에서 크리스천의 손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고, 이것이 단일본으로 종교회의의 여러 곡절을 거쳐 처음 성경이 된 것이다. 이 때에 이미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고,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없던 이야기가 삽입되기도 했다. 특히 남성우월주의가 완전히 자리잡은 이 때에 성서 속에 있던 여성에 대한 내용이 많이 없어졌고, 결국 성경에 의하여 여자들의 지위가 격하되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여자에 관한 내용은 롯기와 사사기의 4장 4절에 있는 짤막한 구절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 1844년 시내(Sinai) 사원에서 4세기의 기록인 소위 시내 산 사본(Codex Sinaiticus)이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1056년의 예루살렘 사본(Jerusalem Codex)이나 1209년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1621년에 발견한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 등과 마찬가지로 희랍어로 씌어진 사본이지만 서로 다르고 나중에 번역된 킹 제임스판과도 차이가 난다. 이 ‘시내 산 사본’에 의하면 최소한 일곱 명의 저자가 1만 6천 개의 정정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내용을 바꾼 일도 여럿 발견됐다. 델릿치(Dr. Friedrich Delitzsch) 박사는 혼자서 3천 개나 되는 오식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 우리는 아리우스(Arius) 등 알렉산드리아 출신 성서학자들이 많은 글을 쓴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창설과정에서 권력싸움에 패배했기 때문에, 그들의 글들은 모두 삭제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초창기 성경을 만들 때 관여한 성직자들이 추가하고, 지우고, 보충하든가 또는 뭉텅이로 삭제해 버리는 일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과연 성경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사람의 손을 빌려 쓴 글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이 있었을 때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대하여 대단한 불만이 있었다. 그는 1534년에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성경으로 성경을 마름질하였다. 이때 그는 ‘마카베(Machabees I & II)’ 상·하권을 위시한 7권의 책과 ‘에스더’와 ‘다니엘’의 일부를 없애고 이를 구약과 신약 사이의 ‘아포크리파(Apocrypha)’, 즉 외경(外經)이라 하여 따로 부록으로 만들었다. 이를 ‘아포크리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말의 뜻이 희랍어로 ‘숨겨진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들의 내용은 너무 중요하고 귀중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숨겨야 하며, 다만 선택된 소수에게만 알려 주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하는 종파가 있는가 하면, 어떤 종파는 이 책들을 제거한 이유가 너무 귀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귀중하게 취급할 가치가 미약하여 성경에 보충자료로 취급해야 한다고도 하였고, 또 어떤 종파는 회의적이고 심지어는 이단(異端)에 속하는 문헌이라고 하여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 무리의 종파들은 4세기에 성경을 번역했던 성(聖) 예로메(Jerome)가 히브리 성서 외에 따로 엮어 제2의 율법이라 할 신명기(Deuteronomy)를 보조하는 뜻에서 15권의 책을 엮어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던 것이 장로교와 칼뱅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1826년 영국 성서공회(필자 주―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에서 ‘아포크리파’의 배포를 금지하도록 합의를 보았고, 이 때부터 영어권 내의 개신교에서 ‘아포크리파’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영국 성공회 계통과 독일 루터교에서 아직 ‘아포크리파’를 부록으로 출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희랍이나 러시아 정교회측에서는 아직도 원래의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원래의 성경을 ‘프로토캐논(Proto-Canon)’ 또는 ‘듀트로캐논(Deutro-Canon)’이라고 부른다. ‘프로토캐논’은 제일 첫번째 시성(諡聖)한 것이라 하여 우리말로 ‘원정경’이라고 부르고 히브리어로 씌어져 있으며 개신교에서 받아들인 구약을 말한다. 그리고 ‘듀트로캐논’은 두 번째 시성한 성경이란 뜻이며, ‘아포크리파’를 구비한 성경을 말한다. ‘듀트로캐논’은 천주교에서는 계속 사용하고 있었으나 개신교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성경이다. 그런데 실제로 영국 성공회 계통의 성경 ‘아포크리파’ 부록을 보면 위에서 뽑았다는 7권 외에 다른 성서 8권을 첨가하여 전부 15권의 다른 성서가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원래의 그리스도교로 알고 있는 천주교에서 옛날에 사용하던 성경을 불가타판(Vulgate vers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위에서 말한 ‘프로토캐논’이고, ‘듀트로캐논’을 4세기 교황 다마수스(St. Damasus)의 명에 의하여 예로메(St. Jerome)란 사람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라틴 불가타’라 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라틴어를 몹시 천시하였다. 지금도 영어에 보면 쌍스럽다는 뜻으로 ‘벌가(vulgar)’라고 한다.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 한글을 천한 글이라 하여 언문이라 했던 것과 같이 천한 라틴어로 된 성경이라 하여 불가타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 여왕도 여러 나라 말을 했어도 천한 라틴어는 안 배운다고 하여 라틴어를 몰랐다는 것이다. 여하튼 불가타판(Vulgate Version)은 구약 46권,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으며,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천주교는 아직 이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며,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판인(이제는 이것도 구판이 되었지만) ‘듀에이-림스(Dueay-Reheims Version)’이고, 또 현대어로 바꾼 ‘신아메리카판(New American Bible Version, NAV)’, ‘개정판(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 그리고 신·구교가 합하여 공동으로 편집한 ‘신예루살렘판(New Jerusalem Bible, NJV)’을 영어권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1600년대에 영국 왕 제임스의 명령으로 편 ‘킹 제임스판(King James Version, KJV)’이 근래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1978년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성서공회(International Bible Society)’에서 주관하여 ‘신국제판(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 새로 나와 한국어로도 이미 번역되어 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로 공동번역이라고 근래에 성경을 출판하였는데, 에스텔(에스더)서에서 16장이던 것을 여섯 장을 잘라 없애고 10장만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주로 미국계 영어권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되었으며, 지금도 영어권 개신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어권의 성경 역사도 잠깐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위에 아주 간단하게 성경의 변천사를 설명해 보았지만, 좀더 자세하게 보면 아주 복잡한 사연이 깃들여 있다. 영어권의 근본지인 영국에서는 지금의 영어와는 판이하게 다른 영어이지만 7세기 중엽부터 부분별로 성경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은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성경을 직접 읽어 보라는 취지에서 나왔고, 이는 영국뿐 아니라 어느 언어권에서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점점 널리 퍼지자, 11세기에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성서라는 것이 그리 존엄한 책이 못 되는 일이고, 또 어중간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읽으면 엉뚱하게 해석하여 신앙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위험이 있기에, 성서라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여 장소와 비밀을 지키는 것이 전능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일이다”라 하여 성서번역을 못하도록 하였고, 또 이노센트 3세 교황이 1199년에 “믿음에 관한 신비의 비밀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설명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려 성경의 번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계속 번역되었다. 영국에서는 1382년 위클리프(John Wycliffe)라는 옥스퍼드의 학자가 신약을 완전히 영어로 번역하였고, 계속 구약을 번역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대주교 아룬델이란 사람은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 표현하기를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은 좀벌레 같은 녀석이 적그리스도 새끼 행세를 하더니 결국 성경을 제 모국어로 번역하는 마귀 같은 짓을 했습니다”라 하였고, 옥스퍼드 지역 당국에서는 “앞으로는 당국의 허락 없이 아무도 성서를 영어로 옮겨서는 안 되며, 근간에 문제가 된 위클리프 성서의 책이나 그 책의 일부를 읽어서도 안 된다. 만일 앞으로 허락 없이 개인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성서의 전부 또는 일부를 번역하는 일이 발견될 때에는 극단적인 파문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당국의 명령은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항간에는 계속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모국어로 번역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의 바람이 전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틴데일, 코버데일, 로저스, 매튜 같은 사람들이 결국 들켜서 사형을 당하면서도 번역사업이 계속되었고, 이들이 만들어 놓은 번역판을 기반으로 1537년 드디어 완전한 영어판 성경이 완성되었으며, 2년 후 헨리 8세가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난 영국 교회의 창설 덕분에 처음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아 ‘위대한 성경(Great Bible)’이란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친천주교계였던 헨리 8세의 딸 메리 1세 여왕 때의 30년을 제외하고는 킹 제임스판이 나올 때까지 거의 유일한 영어 성경이었으며, 킹 제임스판은 이 성경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1560년대에 메리가 왕이 되면서 다시 영어 성경을 없애 버리고, 번역한 사람들과 성공회나 개신교 사람들을 처벌하기 시작하여 대거 국외로 피난가게 되었다. 이렇게 종교 피난을 한 영국계 크리스천의 중심지는 스위스 제네바였으며, 여기서 이 사람들은 다른 영어판 성경과 절충하여 제네바판 성경을 만들었다. 이 성경책은 칼뱅주의에 매우 충실한 성경책이었으며,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올 때 가져온 성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칼뱅(John Calvin)은 자기의 교리가 확고해짐에 따라 절대군주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는 정부는 교회에 속해야 하며 모든 성경적 해설은 칼뱅주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교리적인 폭군이었다. 이렇게 제네바판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영국은 메리의 손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위대한 성경(Great Bible)의 개정판을 1568년에 만들어 ‘주교의 성경(Bishop's Bible)’이라 이름 지었다. 또 이것을 1603년 제임스 스튜어트 왕이 직접 명하여 47명의 학자들을 모아 놓고 새로 성경을 만들게 하여 8년 만인 1611년에 내놓은 것이 유명한 ‘킹 제임스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성경은 바로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다. 결국 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제네바판을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경은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번 수정되고 개정되었으며, 그 외에도 히브리나 희랍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된 것들 등등 여러 가지의 성경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우리 세대에 와서는 위에서 말한 1978년의 ‘신국제판’이 나와 ‘킹 제임스판’을 대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알기에는 한국어로 출판된 성경은 100년 전 번역·출판되어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읽던 ‘킹 제임스판(KJV)’이었고, 그 뒤를 이어 옛말 냄새가 덜 나는 ‘신국제판(표준 새 번역, NIV)’은 1993년에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개신교는 영국판 성경을 위주로 번역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과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은 전세계의 인류가 미처 걷잡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변화를 거듭하였다. 성경의 세계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심리학, 철학, 사회학, 고고학, 고대 역사학, 심지어는 언어학까지 많은 변화를 거쳤으며, 첨단을 걷고 있는 학자들의 세계를 구태의연한 주류 학자나 대중이 미처 소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들 첨단의 위치에 있다 할 학자들은 과거 이해 못 하던 기원전·후의 종교적· 사회적 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어구나 종교·철학적인 용어 같은 것들도 더 많이 이해하고 있으며, 더욱이 1940년대에 발견된 낙 하마디 문서나 사해의 문서 따위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근원을 훨씬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까지 성경의 물리적인 상황을 설명해 보았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그리스도교 안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많은 차이를 보여 주게 된다. 그 좋은 예로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한 전도학교의 교사 밀러(Dave Miller at Brown Trail School of Preaching in Bedford, Texas) 씨가 설명한 성경의 완전무결성(完全無缺性-inerrancy)에 대한 문구를 소개하니, 이에 대하여 심각하게 음미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한 작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매 구석구석 어김없이 영감이 작용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러한 성스러운 영감의 지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표현한 언사에도 작용하였으며, … 따라서 성서는 인간을 속이는 일이나 잘못 인도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어떻게 생활하는가에 따라 모든 인간은 그 가치를 판단받게 되는 것이다. ‘완전무결(inerrant)’하다는 말은 ‘완전한 진리’를 말하며, ‘잘못이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며, 성경을 쓴 사람들은 그들이 기술한 바에서 완벽하게 실수가 없었고, 진실되며, 완전하게 믿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무결성’의 교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도덕과 종교의 참진실됨을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과학적·역사적·지질학적 사실을 말하는 데에도 마찬가지 적용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쓴 작가들은 성경에 채택된 부분 이외의 그들이 쓴 다른 저서에서도 오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필경 대부분의 독자들은 위의 이러한 설명이 그리 낯선 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라건대 이 문구를 마음에 두고 나중에 소개되는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의 장을 읽을 때 참고해 주기 바란다.
낙 하마디 문서
우선 약 50년 전 발견된 ‘그노시스’의 문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좀 해보자. 1945년 남부 이집트의 한 농부가 ‘낙 하마디(Nag Hammadi)’라는 지방에서 농사지을 땅을 개간하는 중에 우연히 붉은 색깔의 항아리를 땅에서 파내게 되었다. 그 안에는 13권의 책이 들어 있었는데, 이 책들은 가죽표지와 파피루스 종이로 된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이 물건의 진가를 알 길이 없는 무식한 이 농부는 불쏘시개로도 좀 사용하고 더러는 고물상에 팔았으며, 어떤 사람은 고물상에서 가죽책 껍질을 사서 신발바닥에 대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좀 아는 사람이 보고 가치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것을 사서 큰 도시 고물상에 팔아 그 곳에서 돌다가, 결국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한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급기야는 밀수출되어 ‘칼 융(C.G.Jung) 재단’에서 일부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이 문서의 존재와 진가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수소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판명된 내용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Thomas)의 복음서였다. 그제야 이를 알게 된 이집트 정부는 1952년에 국보로 정하고, 나머지 문서를 수집하여 보관하게 된 것이다. 1961년에는 세계의 학자들이 연구팀을 결성하고 번역에 들어갔으며, 1972년에 사진판이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전문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흔히 ‘낙 하마디 문서’라고도 하고,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라고도 하며, 근본적으로 그노시스 사람들이 주창하던 내용과 상응하는 내용의 문서들을 모아 묶은 성서집이다. 연대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에 엮은 것으로 추정되며, 발견된 문서는 복사본이고, 원본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리의 복음(Gospel of Truth)’이나 ‘이집트인의 복음(Gospel of the Egyptians)’ 같은 것들은 클레멘트, 이레니우스, 오리겐(Origenes, 185?~254? A.D.) 같은 그리스도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쓴 것이며, 현대 학자들의 판정으로는 150년대 이전에 씌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고, 최소한 하나는 현재 신약의 네(4) 복음서보다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평가하면 낙 하마디 성서집은 로마 당국의 검열을 피했다는 점이며, 다른 성서와 달리 로마인 대신에 이집트인을 상대로 썼기 때문에 로마인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삭제나 변조할 필요 없이 그대로 기술되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성지를 탈출한 사람들로서 예수를 직접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고 목격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기술한 점들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정통 주류 크리스천계의 교리와 상반되는 구절이 많이 있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해의 문서
또 하나 발견된 중요한 옛 문서는 ‘사해의 문서(Dead Sea Scroll)’이다. 이 문서는 현재 성경의 네 복음서가 씌어지기 전 유대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서로 인정되고 있다. 1947년 팔레스타인의 제리코(Jericho) 부근 쿰란이란 곳에서 한 베두인(Bedouin: 사막의 사람들이란 뜻으로 주로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음) 양치기 목동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 한 동굴에까지 와서 무서워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돌을 던졌더니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상히 여겨 살살 들어가 보았더니 큰 항아리가 여러 개 있고 그 안에 이해할 수 없는 두루마리 문서가 많이 있어, 낙 하마디의 경우처럼 몇 개 꺼내어 불쏘시개도 하고 신발창도 하며 고물상에 팔기도 하는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드디어 전문가들의 눈에 띄게 되어 탐사를 한 결과 쿰란뿐 아니라 그 근처 지방에 산재해 있는 열 한 개의 동굴에서 약 5백여 개의 히브리어와 아람어(Aramaic language: 예수가 사용하던 언어)로 씌어진 문서 꾸러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들은 대개 구약성경에 속한 문서들과 기원전 250년경부터 자기네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수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서기 66년에서 70년 사이 로마에 항쟁했던 전투에서 보호하기 위해 감추어 두었던 문서였다. 이 문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얇은 동판(銅版)을 연결하고 두들겨서 글씨를 새긴 두루마리는 예루살렘과 케드론 계곡(Kedron Valley)의 공동묘지 어느 곳에 보물들을 숨겨 두었는지 암호로 기록한, 이를테면 보물섬 지도 같은 것이다. 또 전쟁의 서(War Scroll)는 중국의 손자병법(孫子兵法)처럼 군대의 전략과 전술을 설명한 책이며, 수신보감(修身寶鑑-Manual of Discipline)이라 할 수 있는 책 하나는 당시의 법률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법과 제식(祭式)을 설명하였으며 그 사회에서 신앙심을 돈독하게 유지하기 위한 십이인위원회(十二人委員會-Council of Twelve)의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하박국(Habakkuk Pesher)서는 당시의 중요한 인물과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록과, 그들의 행적과 그에 대한 평가를 하였고, 이사야(Isaias)서는 사해의 문서 전체 중에서도 가장 긴 문서로 총 9미터 정도가 되며 구약성경에 씌어진 원본으로 알려진 것보다 수백 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고, 이사야서를 완전히 기록한 책이다.
복음서
복음서라 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네 개의 책으로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의 책을 말한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가 살았을 당시에 씌어진 것이 아니고, 서기 66년에서 74년 사이와 132년에서 135년 사이에 유대에서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독립 또는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봉기가 일어났던, 즉 서기 60년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약 80년 동안에 만들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의견을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은 지 약 30년이 지난 후에 전화로 많이 분실된 기록을 근거로 하고, 저자 본인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이를 수집하여 쓴 글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많은 대목이 과장되었거나 편리하게 변형되었거나 누락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이론이고, 비록 예수 생전에 그를 만나고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기억했다 하여도 그들은 어린 나이의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기에 그들의 기억이 완벽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2세기에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라는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당시 번창하였던 지식본위로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그노시스(Gnosis)파의 하나인 ‘카포크라시아(Carpocratians)’ 종파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공박하기 위하여 쓴 글이 얼마 전에 발견되었다고 위에 설명하였었다. 그 편지내용에 복음서에 관한 말이 나오며, 마가복음 원본에서 인용한 돈 많은 젊은 남자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었다. 그의 편지에서 말하는 많은 부분이 일반 마가복음에서는 누락되어 있었고 다만 특수층에서만 그 원본이 유통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동시에 마가가 복음서를 쓴 것은 희랍-로마인들을 상대로 로마 시에서 썼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다. 마가가 복음서를 쓰고 있을 때는 한참 유대인들이 봉기를 해 로마에 항거하여 열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던가, 아니면 막 진압되어 수많은 유대인들이 처형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마가는 자기의 복음서가 로마인들에게 호감을 사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가 로마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는 인상을 주는 글은 피하고, 예수를 죽인 책임이 로마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유대인 그룹에 있다고 말을 바꾸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예수를 미워하고 그를 체포하여 구속한 것은 유대인 공회(公會)의 산헤드린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를 없애려는 동기는 로마인이 아니고 이들 유대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로마의 법에 의하여 로마 관리의 판결로 로마군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식민통치를 하던 당시의 로마 집정관이 그 곳 주민들의 의향에 끌려 그들이 하자는 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였단 말인가? 전권을 갖고 있던 총독 빌라도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처럼 진정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다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 예수의 무죄를 왜 선언하지 못했을까? 복음서에 대하여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스미스(Morton Smith) 교수는 복음서의 저자들뿐 아니라 초기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이러한 방침을 채택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마태복음서에 의하면, 그 당시 명절을 당하면 팔레스타인의 총독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어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중 어느 죄인을 놓아줄 것인가를 유대인 관중에게 물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이란 페삭(유월절- Pesach 또는 Passover)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모세의 지도를 받으면서 탈출한 출애굽의 거사를 기념하는 7일간 계속되는 명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축제 때 총독이 죄수를 놓아주는 관습이 없었다고 한다. 이 말은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가 처형당한 날짜도 요한복음에서는 유월절 전날이었다고 한 데 반하여, 나머지 마가·누가·마태복음서에서는 유월절 다음날이라고 하여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또 예수가 마지막 한 말도 마태복음에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다 이루었다”란 말만 하고 머리를 떨어뜨렸다고 나와 각각 다름을 알 수 있다.
서기 36년경, 예수가 처형을 당했다. 따라서 예수의 가족이나 제자 등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변이 위험하게 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들이 어디로 갔든 간에 정착한 곳에서 각각 예수의 가르침을 전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으로 채택된 복음서의 경우를 보면, 이들의 선교사업은 유대인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핍박받는 유대인만이 믿는 종교라면 무조건 박해를 당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때까지도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많은 로마인들이 예수의 사상을 신앙으로 믿게 된다면 더 이상 박해를 할 수 없으리라는 간단한 판단이 나온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그 책임을 로마인들에게 돌린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빌라도 자신이나 로마 통치인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아도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추앙받는 예수를 직접 죽이기보다 될 수 있는 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없애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복음서를 꾸몄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서기 80년경 희랍인 의사였던 누가(Luke)가 당시 팔레스타인의 수도 시자리아(Caesarea)에서 로마 고위 관리들을 상대로 쓴 책으로 알고 있다. 누가도 마가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인 책임을 특정 부류의 유대인으로 돌리고, 로마인들은 책임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85년경 마태복음이 씌어질 때에는 이러한 양상은 기정사실로 당연시되는 상태였다. 마태복음은 희랍어로 희랍풍으로 씌어졌지만, 절반 이상이 마가복음에서 직접 퍼 온 내용이다. 마태는 팔레스타인 출신 피난민인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를 예수의 제자 마태와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제자 마태는 아람어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마태복음이 씌어질 때에는 이미 죽은 지 오랜 사람이다. 그리하여 마가·마태·누가의 세 복음서는 모두 구두로 된 증언과 이미 상실된 문서들을 근거로 결국 내용의 근원을 공동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Synoptic Gospel)’라고 부르고 있고 요한복음과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지만, 사실은 요한이 썼다는 물적 근거는 없다. 성경을 뒤져보면 예수를 세례해 준 요한 이외에 요한이란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 가장 나중에 씌어진 것으로, 서기 100년경 에페수(Ephesus)라는 한 희랍의 도시에서 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글을 쓴 방식이나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복음서와는 차이나는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다른 복음서는 주로 갈릴리 북쪽에서 활동하는 예수를 중심으로 썼고, 남쪽인 유대아나 예루살렘에서의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는 일을 포함하여 두세 차례 입을 건너간 이야기를 전했다. 그에 반하여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아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활동을 생생하게 그렸고, 골고다에서의 이야기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진술로 여겨지는 목격담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이 없는 가나에서의 결혼식 광경, 니고데모(Nicodemus)와 아리마태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의 역할, 라자로(Lazarus)의 부활 이야기(비록 마가복음에서 약간 언급은 하였지만) 따위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비록 가장 늦게 씌어진 복음서이긴 하지만,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고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서기 66년 예루살렘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적 여건을 종합적으로 잘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손질을 보아 간추려지고 잘려지고 변조는 되었어도 신약성경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책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환생론(Reincarnation)
.
2009.05.07 20:54:05 (*.131.66.217)
.[펌]
이스라엘의 실체를 이야기 하다가 신에 대한 이야기로 비약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파헤칠수는 있는데 이를 수습하고 그래서 무엇을 할수잇느냐는 다음 문제에 답이 있어야하죠. 이런 문제의 귀결점은 신께서 어떤 일을 하고있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데서 답이 있습니다.
인류는 신의 자녀이며 신의 뜻을 실현하는 아주 특수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이 주어지고 불멸의 영원한 삶이 주어진 이유입니다. 더 긴 이야기는 어쩌면 비약이 될수있기에 인류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주어지는대로 의미가 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이런 제 견해가 타당한 것이라면 신께서 말한 것이 2천년전에 성경에 말한 것이 전부이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얘기를 하질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이 한가하고 무책임한 분이라는 얘기로 귀결됩니다.
아래의 글은 신의 뜻은 ESU 께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신이 우리 인류를 죄가많고 구원해줘야할 나약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동반자라고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창조과정에 막중한 사명을 주기를 원하시며 그를 위해 훈련하기를 바란다는 얘기입니다. 함께 보시죠.
******************************
누가 ‘신성함[GODLINESS]’의 고결한 예가 될 것인가?
‘신성한 하나님의 뜻[Holy God’s will]’이 밝혀 주시는 방향을 따라,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서, 진심으로 인류를 돕고자 하는 자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당신이 이 사실을 알건 모르건 간에), 이미 그 분의 가장 고결한 공동 창조자들로서, 인간 육체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당신들의 동료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들에 의해 제시되는 불완전함과 악과 혼란을 잘 분별해 내고, 이를 극복하여, 그 위로 날아 오를 수 있는 건 바로 당신들인 것입니다.
바로 당신들이, ‘하나님의 법칙[God’s Laws]’을 따르며, ‘공존[co-existing]’과 ‘공동창조[co-creating]’를 통해, 이 행성이 균형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을 돕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자들이여, 머지않아, 당신들 각자각자가 ‘앎[KNOWING]’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무수한 ‘신비로운 일들’은 더 이상 신비로운 일이 아닌 일들이 될 것입니다. 나의 형제 하톤이 종종 이야기 해 온 다음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은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오직 당신들이 ‘하나님-앎[God-knowing]’의 상태에 이르게 되기 전까지, 그리하여 이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들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게 되기 전까지, 신비해 보일 뿐인 것입니다.” 여기 이 말 그대로입니다.
이제 나는 이 장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드루셔여, 난 당신의 봉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신이 내 말을 경청해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이여, 나는 항상 당신들로부터 불과 ‘한 호흡[a breath]’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음을 아십시오. 나는 이 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지, 당신들을 대신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될 때, 그리고 당신 자신들의 모습 속에서 그 분의 모습을 영예롭게 비춰 보이게 될 때, 나는 ‘사랑과 보호와 안내의 날개[wings of love, protections and guidance]’를 펼쳐 당신들을 감싸 안을 것입니다. 내 소중한 지구의 형제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부디 평화와 사랑 속으로 나아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그 분의 길[His way]’을 밝혀 보여주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사난다입니다. Salu.
Esu (Jesus) Jmmanuel (Immanuel) Sananda, 예수 (예수) 임마누엘 사난다
피닉스 저널 제 47권, “Pre-Flight Instructions For The Phoenix” Vol. I, 제 22-25장, pp. 140-163에서 발췌.
**********************
“아톤[ ATON ]”이라는 표현에 관한 설명
‘아톤[Aton]’은 수천년 전, “이집트인들[Egyptians]”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의 빛[The ONE Light]”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이 하나의 빛’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의 창조주[our ONE Creator]’를 묘사하는 단어로 ‘하나님[God]’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갖는 의식 속에서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가, 모든 창조물들의 ‘위대한 원인자[The Great CAUSE]’이자, ‘위대한 영혼[The Great Spirit]’인 대상과의 회합 속에서, 이에 연결되고자 하는 것인 한, 이를 일컫는 표현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를 우리 호스트들은 종종 ‘아톤[Aton]’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나는 이번 장의 제목을 ‘우선 순위의 것들을 알기[Knowing Your Priorities]’라고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받아쓰는 나의 서기뿐만 아니라, 당신들 대부분은 종종 무엇이 자신의 진정한 우선 순위의 일들인지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지구 상에서 겪는 3차원의 물질적인 진동 속에 머무는 일은, 때때로 대단히 혼동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당신의 이목을 끄는 여러가지 “것들”이 산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처한 여러가지 상황들 속에서, 최우선 순위의 일[YOUR FIRST PRIORITY]이 무엇인지를 잘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드루셔는 자신이 현재 물리적인 일들에 파묻혔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끼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거리들이 그녀로 하여금, 현재 그녀가 취하고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그 분을 위해 글을 쓰는, 이 ‘최우선 순위의 일’을 거의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정말로 많은 이들이 이 물리적인 “환상”이 만들어 내는 혼란과 뒤범벅 상태에서 길을 잃고, 종종 자신들이 미처 인식하지도 못한 채, 적들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드루셔는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에 대한 도움을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사실 당신들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인 셈이지만, 정작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녀가 그녀에게 주어지는 ‘답변들’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취약한 상태 속에 있을 때, 그리하여 적이 그녀를 통제하게 되어 서서히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게 될 때, 나, 사난다가 그녀를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문제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적에 의해 가해지는 통제력을 극복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도움과 안내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지휘관 하톤[Commander Hatonn]은 이 ‘적’에 맞서기 위해 보내지신 분입니다. 드루셔는 자신의 난국을 마침내 “극복”해 냈을 때, 다시금, 회복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지시사항들’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당신들도 너무 독선적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 당신들 모두가 겪고 있는 난국들도 사실상 모두 동일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이고, 드루셔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일을 헤쳐나가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하톤은 당신들 모두를 위해 보내졌습니다. 드루셔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의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이 시대[THIS time]’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당신들이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들은, 종종 그저 당신들 주위에 펼쳐지는 환경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한 때, “타락”하기도 했던 것일까요? 형제들이여, 이는 오직 ‘그녀’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일 뿐입니다. 자신의 예를 드는 일을 허락한 것에 대해, 우리는 그녀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훈은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앎[GOD-KNOWING]’으로 향하는, 깨어나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면, ‘에고에 기초한 인식[ego consciousness standpoint]’을 통해서는, 왜 이러저러한 일들이 자신에게 일을 나는 것인지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깨어나는 과정’으로 접어든 사람들이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갖는 가치를 당신이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고자 합니다. : 단지 지난 ‘한 주’동안만이라고 하더라도,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일련의 자극 속에서 결국 받아들이게 된, 이 ‘영적 성장’의 총합은 실로 엄청납니다. 당신들 대부분은, 지금 당장은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당신 자신이, 당신의 인식이, 그리고 당신의 태도가, 분명히 변했음을 결국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당신들의 모습에 대단히 기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디 아시기 바랍니다!
피터김님의 글 [펌]
.
이스라엘의 실체를 이야기 하다가 신에 대한 이야기로 비약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파헤칠수는 있는데 이를 수습하고 그래서 무엇을 할수잇느냐는 다음 문제에 답이 있어야하죠. 이런 문제의 귀결점은 신께서 어떤 일을 하고있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데서 답이 있습니다.
인류는 신의 자녀이며 신의 뜻을 실현하는 아주 특수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이 주어지고 불멸의 영원한 삶이 주어진 이유입니다. 더 긴 이야기는 어쩌면 비약이 될수있기에 인류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 주어지는대로 의미가 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이런 제 견해가 타당한 것이라면 신께서 말한 것이 2천년전에 성경에 말한 것이 전부이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얘기를 하질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이 한가하고 무책임한 분이라는 얘기로 귀결됩니다.
아래의 글은 신의 뜻은 ESU 께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신이 우리 인류를 죄가많고 구원해줘야할 나약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동반자라고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창조과정에 막중한 사명을 주기를 원하시며 그를 위해 훈련하기를 바란다는 얘기입니다. 함께 보시죠.
******************************
누가 ‘신성함[GODLINESS]’의 고결한 예가 될 것인가?
‘신성한 하나님의 뜻[Holy God’s will]’이 밝혀 주시는 방향을 따라,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서, 진심으로 인류를 돕고자 하는 자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당신이 이 사실을 알건 모르건 간에), 이미 그 분의 가장 고결한 공동 창조자들로서, 인간 육체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당신들의 동료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들에 의해 제시되는 불완전함과 악과 혼란을 잘 분별해 내고, 이를 극복하여, 그 위로 날아 오를 수 있는 건 바로 당신들인 것입니다.
바로 당신들이, ‘하나님의 법칙[God’s Laws]’을 따르며, ‘공존[co-existing]’과 ‘공동창조[co-creating]’를 통해, 이 행성이 균형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을 돕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자들이여, 머지않아, 당신들 각자각자가 ‘앎[KNOWING]’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무수한 ‘신비로운 일들’은 더 이상 신비로운 일이 아닌 일들이 될 것입니다. 나의 형제 하톤이 종종 이야기 해 온 다음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은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오직 당신들이 ‘하나님-앎[God-knowing]’의 상태에 이르게 되기 전까지, 그리하여 이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들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게 되기 전까지, 신비해 보일 뿐인 것입니다.” 여기 이 말 그대로입니다.
이제 나는 이 장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드루셔여, 난 당신의 봉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신이 내 말을 경청해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이여, 나는 항상 당신들로부터 불과 ‘한 호흡[a breath]’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음을 아십시오. 나는 이 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지, 당신들을 대신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될 때, 그리고 당신 자신들의 모습 속에서 그 분의 모습을 영예롭게 비춰 보이게 될 때, 나는 ‘사랑과 보호와 안내의 날개[wings of love, protections and guidance]’를 펼쳐 당신들을 감싸 안을 것입니다. 내 소중한 지구의 형제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부디 평화와 사랑 속으로 나아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그 분의 길[His way]’을 밝혀 보여주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사난다입니다. Salu.
Esu (Jesus) Jmmanuel (Immanuel) Sananda, 예수 (예수) 임마누엘 사난다
피닉스 저널 제 47권, “Pre-Flight Instructions For The Phoenix” Vol. I, 제 22-25장, pp. 140-163에서 발췌.
**********************
“아톤[ ATON ]”이라는 표현에 관한 설명
‘아톤[Aton]’은 수천년 전, “이집트인들[Egyptians]”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의 빛[The ONE Light]”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태양은 ‘이 하나의 빛’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의 창조주[our ONE Creator]’를 묘사하는 단어로 ‘하나님[God]’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영혼이 갖는 의식 속에서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가, 모든 창조물들의 ‘위대한 원인자[The Great CAUSE]’이자, ‘위대한 영혼[The Great Spirit]’인 대상과의 회합 속에서, 이에 연결되고자 하는 것인 한, 이를 일컫는 표현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를 우리 호스트들은 종종 ‘아톤[Aton]’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나는 이번 장의 제목을 ‘우선 순위의 것들을 알기[Knowing Your Priorities]’라고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받아쓰는 나의 서기뿐만 아니라, 당신들 대부분은 종종 무엇이 자신의 진정한 우선 순위의 일들인지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지구 상에서 겪는 3차원의 물질적인 진동 속에 머무는 일은, 때때로 대단히 혼동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당신의 이목을 끄는 여러가지 “것들”이 산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처한 여러가지 상황들 속에서, 최우선 순위의 일[YOUR FIRST PRIORITY]이 무엇인지를 잘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드루셔는 자신이 현재 물리적인 일들에 파묻혔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책임감”을 느끼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거리들이 그녀로 하여금, 현재 그녀가 취하고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그 분을 위해 글을 쓰는, 이 ‘최우선 순위의 일’을 거의 잊어버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정말로 많은 이들이 이 물리적인 “환상”이 만들어 내는 혼란과 뒤범벅 상태에서 길을 잃고, 종종 자신들이 미처 인식하지도 못한 채, 적들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드루셔는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에 대한 도움을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사실 당신들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인 셈이지만, 정작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녀가 그녀에게 주어지는 ‘답변들’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취약한 상태 속에 있을 때, 그리하여 적이 그녀를 통제하게 되어 서서히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게 될 때, 나, 사난다가 그녀를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문제에 처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적에 의해 가해지는 통제력을 극복해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도움과 안내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지휘관 하톤[Commander Hatonn]은 이 ‘적’에 맞서기 위해 보내지신 분입니다. 드루셔는 자신의 난국을 마침내 “극복”해 냈을 때, 다시금, 회복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지시사항들’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당신들도 너무 독선적이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 당신들 모두가 겪고 있는 난국들도 사실상 모두 동일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다를 뿐이고, 드루셔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 일을 헤쳐나가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하톤은 당신들 모두를 위해 보내졌습니다. 드루셔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의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이 시대[THIS time]’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당신들이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들은, 종종 그저 당신들 주위에 펼쳐지는 환경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한 때, “타락”하기도 했던 것일까요? 형제들이여, 이는 오직 ‘그녀’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일 뿐입니다. 자신의 예를 드는 일을 허락한 것에 대해, 우리는 그녀에게 고마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훈은 그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앎[GOD-KNOWING]’으로 향하는, 깨어나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면, ‘에고에 기초한 인식[ego consciousness standpoint]’을 통해서는, 왜 이러저러한 일들이 자신에게 일을 나는 것인지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깨어나는 과정’으로 접어든 사람들이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갖는 가치를 당신이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고자 합니다. : 단지 지난 ‘한 주’동안만이라고 하더라도,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일련의 자극 속에서 결국 받아들이게 된, 이 ‘영적 성장’의 총합은 실로 엄청납니다. 당신들 대부분은, 지금 당장은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당신 자신이, 당신의 인식이, 그리고 당신의 태도가, 분명히 변했음을 결국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당신들의 모습에 대단히 기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디 아시기 바랍니다!
피터김님의 글 [펌]
.
복음서에는 예수가 자식이 있었다고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랍비였다는 것은 학자들 대부분이 수긍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라 랍비가 되려면 대개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어야 하고, 랍비가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유독 서른 살이 넘은 예수만이 결혼도 않고 가정과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현대에는 한국이나 서양이나 남녀 할 것 없이 평생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 그럭저럭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6·25 전쟁 중 서울 근교 구파발이란 곳에 잠깐 피란 갔을 때 열 서너 살 난 젊은 처녀들이 모여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일이 생각난다. 그 처녀들의 이야기는 열 다섯이나 열 여섯 살에 시집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하면서 열 일곱 살이면 너무 늦는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1951년 여름방학 동안에 학급 친구의 고향인 인천 앞바다 영흥도라는 곳에 놀러간 일이 있었다. 그 섬은 임(林)씨 가문의 동네여서 섬사람 거의 모두가 임씨 성을 갖고 있었다. 그 중에 열 일곱 살 난 한 고등학교 학생이 방학이라고 집에 왔었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열 일곱 살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집안망신을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개학하기 전에 집에서 마련하는 규수와 혼례를 올리고 학교에 가라고 호통을 치고, 학생은 도망가면서 쫓아오는 할아버지를 피하여 어느 집 지붕에까지 올라가고, 할아버지가 잡지 못해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호통 치던 일이 생각난다. 물론 그 때만 해도 한국사회가 많이 개화되었기 때문에 나이 어린 우리들은 희한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20~30년 전인 한 세대만 올라가도 이런 일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따라서 2천여 년 전 예수 당시의 풍습으로는 예수가 서른이나 된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 축에 끼지 못했을 것이고, 더욱이 랍비 또는 지도자, 선생으로서 독신이라는 것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인정받는 데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도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일단 마음 뒤편에 넣어두고, 복음서에서 민란을 꾸미고 살인했다고 잡힌 ‘바라바’에 대하여 살펴봐도 분명한 설명 없이 슬쩍 넘어간 것이 좀 수상쩍은 생각이 든다. 그의 이름은 마태복음의 초창기 기록에 ‘예수 바라바’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바라바도 예수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로마군에게 잡혀 있을 때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유대인 군중에게, 민란(民亂)을 꾸미고 민란에 살인한 ‘바라바(Barabbas)’와 ‘유대인의 왕(King of the Jews)’ 예수, 두 죄인 중에 누구를 놓아주기 원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군중은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하였다. 다시 말하면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기로 했다고 마가복음 15장에 설명되어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바라바는 누구인가.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따라 고찰해 보자.
우선 그의 이름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의견이 있다. 첫째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는 ‘예수 베랍비(Jesus Berabbi)’의 와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베랍비(Berabbi)라는 단어의 뜻은 선생이라는 뜻으로서 지금도 신부나 목사에 해당되는 유대교의 성직자를 랍비(Rabbi)라고 부르고 있는 그 단어 앞에 ‘베(Be)’라는 접두어를 붙여 선생 중에서도 최상의 선생이란 뜻으로, ‘예수님’ 하는 식으로 예수 베랍비라고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베랍비라는 이름은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체를 말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둘째로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는 ‘예수 바르 랍비(Jesus Bar Rabbi)’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는 논리이다. 즉, 이 말의 뜻은 ‘랍비의 아들 예수’라는 뜻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의 아버지가 랍비였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는 일이고, 예수가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들을 예수 바라바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예수 바라바가 ‘예수 바르 아빠(Jesus bar Abba)’에서 유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빠(Abba)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란 해석이 나오는데, 이 말이 어폐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히 누구든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라는 것이 단순히 자기를 낳은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같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면 바라바, 즉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간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바라바는 바로 예수 당신을 말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예수가 아들이 있었고 예수를 보통 말하는 아버지와 달리 주(主)님을 뜻하는 아버지로 해석한다면, 이들의 이름으로 ‘예수 바라바’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다음에 바라바가 왜 죄인으로 붙잡혀 있었는지 그 내용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성경에 나오는 설명은 위에 이야기한 대로 민란을 일으키고 민란 도중에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설명되는 내용은 그가 단순한 살인범이고 도적질을 한 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예수와 동등시하여 둘 중에 누구를 살리겠는가라고 빌라도 총독이 물어 본 것도 이상하려니와, 모든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살인 범죄자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유대인 군중들이 원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정신상태를 완전히 모욕하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이다. 문제는 과연 바라바가 그런 인간 이하의 흉악범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실제로 그를 도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고 정치범으로 표현했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민란을 꾸몄다는 이야기는 민중의 난리, 즉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봉기를 하는 중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죄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도 지도자 격이었고 필경 그 봉기의 주모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람을 도둑으로 만들고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을 창녀로 격하시키는 일은 그리스도교에서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진정으로 바라바가 예수의 아들이었다면 성경을 쓴 사람들이나 성경자료를 수집하여 교열을 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희랍 원서 18장 40절에는 바라바를 레스타이(lestai)라고 표현했다 하며, 이 단어의 뜻은 도둑 또는 폭도였지만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에세네나 질로트(Zealot)를 일반적으로 레스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질로트는 에세네 부족에 속한 한 집단이며, 로마 식민통지에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던, 말하자면 레지스탕스나 빨치산 같은 용맹스럽고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혁명세력이 집합되어 있는 부족이었다. 학자들은 이런 배경에 의거하여 바라바를 질로트라고 판단한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의 한 사원 내에 들어가 환전꾼들의 목판을 뒤엎으며 그들을 쫓아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마가복음 11장 15절), 그 조금 전에 예루살렘 시내에서 마치 한국에서 데모를 하듯 유대인들의 봉기가 있었다고 한다. 만약 바라바가 이때 그 데모꾼 중의 하나였다면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가 되며, 또 그렇다면 바라바는 예수 일행의 하나였을 확률도 높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 여파로 예수의 감정이 격해져서 사원 안에 들어가 환전꾼들의 목판을 뒤엎고 처음으로 광폭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아무리 유대교 제사장들이 시켰다 하더라도 유대인 군중들이 예수와 무슨 철천지한이 있다고 젊은 혁명가를 살리고 예수를 대신 죽게 했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고함을 치면서 빌라도에게 요구했다는 것은 좀 석연치 못한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하여 근래 학자들간에는 이렇게 설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수는 다윗 왕의 혈통을 이은 후손이어서 당연히 유대인의 왕이 될 자격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유대의 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빌라도 총독도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고, 또 예수가 잡혀왔을 때 이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바라바는 예수의 아들로 믿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논리가 사실이라면 유대인들이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살린 이유가 합당하다고 느껴지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왕림한다고 믿고 있었고, 핍박받는 민족의 영적·정치적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를 점령 군주인 통치자가 제거하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개인을 구하는 것보다 혈통을 가진 대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믿어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믿고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요구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처형했다는 성경의 표현은 조작일 가능성이 높고, 또 그래야만 이치가 맞는다. 이에 대한 설명은 복음서가 씌어진 유래부터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예수는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만일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자식을 낳았을 것이라는 이론도 있다. 그러나 로렌스 가드너(Laurence Gardner)라는 예수 혈통을 연구한 학자의 말에 의하면, 예수는 정식 부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다마리스(Damaris, 일명 Tamar)’, ‘예수 2세(Jesus II., 일명 The Justus)’, ‘요셉(Joseph, 일명 The Rama-Theo)’ 이렇게 세 아들을 두었다 한다. 그리고 ‘요셉’의 후손이 계속 번창하여 7세기 아더 왕(King Arthur) 때 아더 왕을 위시하여 ‘랜셀롯(Lancelot)’과 그의 아들 ‘갈라하드(Galahad)’, ‘보르스(Bors)’와 그의 아들 ‘리오넬(Lionel-Stewart 왕가의 시조)’, ‘가웨인(Gawain)’, ‘파르치발(Parzival)’과 그의 아들 ‘로헹그린(Lohengrin)’ 등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은 또 어떻게 되었으며 현재 그 후손들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비밀로 되어 있든가 장막에 쌓여 있어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수는 진정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가?
예수가 진정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지 아닌지 하는 질문은 크리스천에게는 자지러질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마치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이치와 증거를 갖고 논쟁을 하듯 해부를 해보면 최소한 의문은 많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할 줄로 믿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이야기는 주로 복음서에 묘사된다. 그러나 복음서 자체에서는 진정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적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의문점은, 만약 진정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원수로 생각했다면 로마 당국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기네 자신의 율법으로 직접 돌로 쳐죽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복음서 자체도 분명히 예수가 로마의 법을 어기거나 로마 당국과 충돌한 일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로마법에 의하여 로마의 죄인으로 절차를 밟아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냥 죽은 게 아니라 극형인 십자가형으로 죽었다. 그 당시의 법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일은 로마제국 자체에 도전하는 아주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나 주는 형벌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정말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복음서에서 설명한 것 같은 그런 류의 정치범이 아니고, 유대인 때문이 아니라 필경 로마제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어떤 말이나 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이치에 맞는다. 십자가에 죄수를 매달아 죽인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전기의자형이나 교수형과 마찬가지로 사형언도를 받은 자를 사형하는 방법으로 십자가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당시 십자가형을 행하는 절차나 관습을 먼저 이해하고, 예수는 어떻게 했는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로마는 십자가형을 줄 때 엄격한 규칙을 따라 형을 집행했었다. 십자가형의 언도가 내려지면 옛날 한국에서 곤장으로 죄인을 때리듯 가죽채찍으로 때려 살이 갈라지고 피를 많이 흘리게 만들었다. 흠뻑 얻어맞고 피를 많이 흘리며 기진맥진해져 축 늘어진 죄수의 목과 어깨 위에 십자가의 가름대가 될 굵은 각목을 횡으로 올려놓고 양팔을 벌려 손목을 끈으로 묶었고, 특별한 경우에 끈 대신 손에 못을 박아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 죄수가 걸어서 사형장으로 가, 그 곳에서 이미 수직으로 땅에 박아 놓은 긴 장대에 십자가 형태로 높이 부착하여 양손이 가름목에 고정된 죄수가 공중으로 매달려 올라가게 된다. 이렇게 양손이 고정되어 공중에 매달리게 되면 몸무게로 인하여 가슴이 좁혀져 죄수는 호흡이 불가능하게 되며 몇 분 후에 죽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몸을 떠받칠 수 있도록 발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발을 손목과 마찬가지로 끈으로 묶든가 못을 박았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놓아두면 고통은 극심하겠지만 최소 하루나 이틀 정도 생명을 유지하게 되고, 건강한 사람의 경우 일주일까지도 살게 된다. 그래서 의학적인 사망원인은 대개 탈진과 탈수가 대부분이며, 못을 사용했을 경우에는 혈액에 독이 들어가 죽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사형집행하는 형리들이 몇 시간 지난 후에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다리나 무릎 있는 곳을 분질러 주어 빨리 죽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자마자 지금의 표현으로 말하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데, 고문 도중 실신을 하면 찬물을 끼얹어 다시 제정신을 차리게 하고 나서 계속 고문을 하는 것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경찰에 잡혀가면 당하는 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는 물론 물도 사용했겠지만 신 포도주, 즉 식초의 냄새를 맡게 하든가 조금 먹이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일단 죽은 다음에는 시체를 그냥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여 날짐승들이 와서 쪼아먹고 말라 없어지게 만들었고, 절대로 시체를 내려 보통 사람들처럼 무덤에 묻는 장사(葬事)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 당시의 규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옆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가족들이 시체를 못 가져가게 했다. 이것이 당시 십자가 형벌의 절차였다.
예수가 죽는 광경을 증인의 말을 기준으로 설명한 것은 요한복음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예수의 발이 십자가에 고정되었다고 했고,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고 했으니 예수는 분명 2~3일 정도 십자가에 매달려 살 수 있었다는 추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죽었으며, 마가복음 15장 44절에 보면 빌라도도 예수가 그리 빨리 죽은 것에 대하여 놀랐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수가 죽게 된 의학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복음의 설명에 의하면(19장 32, 33절) 형리들이 예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려 할 때 예수가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고, 그리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으니 모두 죽은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 빨리 죽은 사인은 탈진이나 심리적인 원인으로밖에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예수가 시간을 맞추어서 적절하게 죽은 것이나 예수가 살아 행한 일이나 모두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구세주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조건과 너무나 호흡이 잘 들어맞게 행하여졌다. 예를 들어 구약에 구세주는 나귀를 타고 온다고 했기에, 예수가 베다니에서 일부러 나귀를 구하여 타고 요란스럽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유별난 연극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비약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과정은 기가 막힌 연극을 하여 죽기 직전에 사람을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목이 마르다고 하니 스펀지에 신 포도주를 적셔 입을 축이게 하였다. 예수는 이 신 포도주로 입을 적신 후 “다 이루었다”, 즉 ‘끝났다’라는 말을 남기고 머리를 떨어뜨리며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 당시 신 포도주, 즉 식초는 죄수가 매를 맞아 실신했을 때 일시적으로 정신이 들게 하기 위해 쓰는 물건이었다. 사람들은 기진맥진하여 죽어갈 때 이 식초의 냄새를 맡거가 조금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드는데, 예수는 반대로 이것을 마시고 그 길로 죽어 버렸다. 그래서 실제로 준 것은 신 포도주가 아니라 만약 연극을 했다면 최면제였을 것이고, 진짜로 죽었다면 독약을 주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는 ‘골고다(Golgotha)’, 즉 ‘해골이 있는 장소’에서 사형식을 가졌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해골처럼 생긴 동산으로 불모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41절에 설명한 것을 보면, “동산(garden-정원)이 있었고 그 동산 안에는 아직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고 하였다. 우선 우리말 성경에는 동산이라 하여 확실한 뜻을 알 수 없지만, 영어 성경 해설을 보면 분명히 잘 차린 정원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고 장사 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sepulchre)이라 한 것은 그 당시 그 지방의 관습으로는 동굴같이 생긴 곳에 입구를 돌로 막고 그 안을 제단처럼 만들어 시체를 안치하는 곳으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모솔리움(mausoleum)’ 같은 것인데, 여기서 말한 새 무덤이란 예수를 그 안에 안치하기 위해서 이미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동산은 죄수들을 사형하는 공공장소가 아니라 어느 개인 소유의 아담한 정원이 있는 곳으로, 이미 만들어진 무덤 바로 옆에 십자가를 세웠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무덤은 예수의 ‘아리마태아 요셉’의 개인 소유라고 마태복음 27장 60절에 설명되었다. 물론 이 무덤에는 예수만이 들어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예수가 처형을 당할 때 마치 우리나라의 홍제동 공동묘지처럼 살벌한 넓은 장소에서 수천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복음서 네 개를 다 뒤져보고, 특히 누가복음 23장 49절에 보면, 예수의 아는 자들과 따라온 여자들이 모두 멀리 서서 구경했다고 하였다. 이 문구를 새겨 보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 아니고 가까운 사람들만 모인 십자가 사형집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 소유지에서 가족적으로 행해진 행사였고, 현대 학자들은 그 장소를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가 제자들과 자주 갔던, 신분을 밝히지 않은 비밀 사도의 개인 소유지였고, 그 비밀스런 사도는 다름 아닌 아리마태아 요셉이다. 만일 개인 소유지에서 친근한 몇 사람만 모여 행해진 일이었고, 그나마도 몇 사람의 연극 담당자만 빼고 나머지는 멀찌감치에서 구경만 했다면 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또 하나는 예수의 시체를 군말 없이 아리마태아 요셉에게 빌라도가 선뜻 내주었다는 점이 납득하기 어려운 유별난 일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의 시체는 십자가에서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놓아두는 법인데, 어째서 예수의 경우에는 시체를 그리 쉽게 내주었는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기는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두 강도들은 어떻게 하여 개인 땅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형을 당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학자들의 풀이로는 예수는 혼자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두 강도는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희랍어 원서에는 이 강도를 레스타이(Lestai)라 표현했다. 당시 로마의 식민정부에 가장 혹독하게 무장 항거를 했던 질로트(Zealots) 사람들을 로마 사람들이 강도, 즉 레스타이라고 표현했고, 예수와 함께 잡혔다가 유대인들의 선택으로 빌라도가 석방시켜 주었다는 바라바도 레스타이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을 번역하면서 직역하여 강도라고 표기한 것이다. 또 다른 고찰은 예수 훨씬 이전, 트로이 전쟁 이야기보다도 훨씬 이전 고대 희랍의 신화에서 오르페우스(Orpheus)가 하나님 아폴로의 아들로 지상에 내려와 사람은 물론 삼라만상이 감동하는 시와 노래를 읊으며 여러 곳을 다녔다. 그의 신비스러운 노래에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 또는 신앙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 빠져 유리디스(Eurydice)와 결혼했으나 유리디스는 얼마 후 뱀에 물려 죽게 된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지옥으로 찾아가 지옥의 여신 퍼시포니(Persephone)를 감동시켜 부인 유리디스를 데리고 지옥을 나가도록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나가는 동안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퍼시포니의 주의를 잊고 유리디스를 보고 싶은 마음에 뒤를 돌아본다. 그 순간 유리디스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이에 분격한 오르페우스는 애절한 노래를 부르며, 아폴로 하나님과 상반되는 신을 섬기며 여자의 세상에 사는 트라세(Thrace)의 여인들을 증오하였다. 이에 격분한 트라세의 여인들은 술의 신 바커스(Bacchus)를 축하하는 잔칫날 성(性)과 술의 향연을 베풀고, 얼마 시간이 지난 후 오르페우스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난 후 그를 갈기갈기 찢어 헤브루스(Hebrus) 강에 버린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를 십자가에 매달 때 그는 다른 두 강도와 함께 처형되었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 전설과 짝을 맞추기 위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도 강도 이야기를 삽입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여러 조건을 감안하여 예수의 십자가형을 조작극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러한 조작을 꾸미는 데에는 분명히 어떤 공모자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공모자 제1호를 생각한다면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는 빠져 나갈 수 없다. 그는 이 지역 최고 집정자로서 예수의 심판을 직접 담당한 로마 사람이며, 예수가 잡힌 표면적인 죄목으로 보아 유대인들끼리 해결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로마의 법으로 빌라도가 직접 관장하여 로마의 형리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만약 빌라도가 공모자가 아니었다면 빌라도 이상의 권력을 가진 자가 있어 빌라도에게 명령을 내리고 빌라도는 모든 일을 담당하여 그 하수인 역을 했을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빌라도는 (최소 그 때까지는) 잔악한 폭군이었으며, 반면에 부패하여 뇌물을 좋아했다. 역사적인 근거로 볼 때, 복음서의 기록과는 반대로, 일단 잡아 죄인으로 만든 예수를 그가 살려 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히 막대한 뇌물과 앞으로 예수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우선 예수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고 대중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정부로서는 그를 제거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며, 예수가 상상을 초월하게 빨리 죽었다는 소리에 빌라도가 놀란 척 연극을 하고 놀랐다는 표현을 한 점들이 수상하고, 특히 중요한 점은 예수가 죽자마자 규칙을 어기면서 시체를 아리마태아 요셉에게 내준 것이다. 영문판 성경 마가복음에 의하면 아리마태아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었다는 말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백부장(Centurion)에게 예수가 죽었음을 확인하고 만족을 표하면서 시체인양을 허락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영문으로 번역될 때의 그 원서인 희랍어판 성경을 보면, 아리마태아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달라고 요청할 때 소마(soma)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빌라도가 허락하면서 사용한 말은 토마(ptoma)였다. 소마란 말은 죽지 않은 산 사람의 육신을 뜻하고. 토마란 말은 죽은 시체를 뜻한다. 다시 설명하면 아리마태아 요셉이 살아 있는 예수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빌라도는 예수가 죽었다고 믿었는지, 죽은 사람이라고 능청을 떨면서 시체를 내주라고 대답했다. 또 빌라도가 본의든 매수에 의한 행동이었든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내용이 당시 로마 황제 카이사르(Caesar Augustus)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참작해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카이사르(Caesar) 각하에게 문안드립니다. 최근에 발생한 예수에 대한 사건을 보면 모든 다른 신(神)들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같이 보입니다. 내가 만나 보았던 그는 30세 가량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얼굴을 본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신들과 영웅의 형상을 그린 수많은 화가들도 아직 그려 내지 못한 유형(類型)의 사람이었습니다. … 황제께서는 저의 혈관(血管)에는 로마인의 피에 서반아(西班牙)의 피가 섞여 흐르는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두려워하는 따위의 유약한 감정을 모르는 사람인 줄을 아실 것입니다. 그 나사렛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저는 바닥에 붙여 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으며, 그 나사렛 젊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서 있는데도 저는 마치 형사범처럼 사지를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죄 없는 나사렛 젊은이를 처형하려고 끌고 다니는 어두컴컴한 지옥의 악마 같은 저들의 무서운 계략을 꺾을 방안을 생각해 보았지만, 저들의 폭동을 염려하여 그들이 원하는 민란의 수괴인 바라바(Barabbas)를 풀어 주고 죄 없는 예수를 처형하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그의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각처로 다니면서 예수가 자신이 말한 대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했습니다. 그의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불러 조사해 봤더니, 제사장은 밤에 일어난 예수부활사건이 단지 지진이었으며 파수꾼이 모두 잠들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마치 진흙이 토기장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손에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생애와 조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를 지지한 자들과 그를 죽이기까지 미워하고 핍박한 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했던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드림.”
이 편지가 실제 빌라도가 쓴 글이었다면,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본디오가 아리마태아 요셉에게 매수되어 글을 썼든가, 아니면 진실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 글을 썼다는 것이다. 만약 아리마태아 요셉에게 매수되어 쓴 글이라면 빌라도는 아리마태아 요셉의 뜻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논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진실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다면 어떠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예수의 생명을 구하고 예수의 안전을 도모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면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권력으로 예수를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지위에 있던 그가 왜 유대인의 공회 산헤드린이 직접 죽이게 하지 않고 자청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십자가형을 지시했는가? 어느 쪽으로 숙고를 해보아도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여기서 잠깐 아리마태아 요셉이 어떤 사람이며 어떠한 연유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 사고방식으로는 예수는 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와 가깝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박해를 당할 수 있고 심지어는 위험한 지경이 될 수도 있는데, 이 사람은 자청하여 예수를 돌본 것이다. 복음서에는 그가 다만 아주 부자이며 예수의 비밀 제자로 알려져 있고, 산헤드린의 원로로 알려져 있다. 산헤드린은 로마 당국이 인정하는 예루살렘 지역 최고 유대인 자치의회를 말하며, 원로는 그 중에서도 격이 가장 높은 존경받는 지위였다. 따라서 요셉은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신분으로, 거대한 장원도 여러 곳에 소유했고, 지위도 높기 때문에 로마 시민(citizen)이라는 신분도 갖고 있어 빌라도 같은 사람과 1 대 1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배다른 형 뻘 되는 사람으로 예수를 교육시켰을 뿐 아니라 예수를 지금의 네팔까지 데리고 간 장본인이었고, 나중에 막달라 마리아나 성모 마리아 같은 사람들을 영국에까지 데리고 가 보호해 준 건 이미 밝힌 바 있다. 또 한편으로 중세기 전설에 의하면 그는 홀리 그레일(Holy Grail)을 가진 사람이었고, 갈라하드(Galahad)와 파르치발(Parzival)은 그의 직계 후손이며, 예수와 같은 혈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 왕의 직계라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유대인들을 다스려야 할 위치에 있었으며, 그러기 위하여 구세주 메시아임을 일반 유대인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 순교가 조작극이었다는 가설이 점점 이치가 들어맞는 이야기로 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수 당시 그리스도(Christo 또는 Christ)나 메시아(Messiah)라는 단어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메시아’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희랍말은 ‘그리스도’이다. 이 말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대개 왕을 지칭하여 사용했다. 이런 뜻에서 다윗 왕도 메시아라고 불렀다. 그래서 주권을 빼앗긴 유대 땅에서 잃어버린 그들의 왕을 의미하고, 누군지 모르나 다윗 왕의 종손을 그리는 마음에서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은, 특히 질로트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기름부음을 받은 아무 왕보다는 더욱 애틋한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뜻했던 메시아는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줄 다윗의 후손을 뜻했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뜻하는 메시아 예수(Jesus the Messiah) 또는 그리스도 예수(Jesus the Christ)는 후일 예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희망대로 해설된 것이라고 한다.
또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사람인 마시옹(Marcion)이라는 주교(主敎)가 있었다. 이 사람은 14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 시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당대의 선박왕으로 불릴 정도로 대부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거장의 한 사람이며, 그는 그 한 이유로 로마로 이사한 지 4년 만에 파문을 당하고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박식한 지식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고, 마시옹 학파(Marcionites)라 하여 이단으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큰 지지를 받았다. 주류 정교파에서는 그를 박해하면서도 그가 만든 신약성경의 책 명단은 그대로 유지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신약성경은 바로 마시옹이 선택한 것이다. 그는 율법과 사랑을 완전히 별개의 관념으로 성경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또 한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죽은 사기극이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바실리데스(Basilides)라 하며, 히브리어와 복음서의 권위자였고, 실제로 죽은 사람은 시린(Cyrene)이라는 곳에 살던 ‘시몬(Simon)’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의 이야기는 7세기에 와서 회교도의 코란 4장 157절에도 설명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여하튼 바실리데스의 주장은 1945년 발견된 낙 하마디 문서 중 ‘위대한 셋의 논설 2(The Second Treatise of the Great Seth)’라는 책에 예수가 고백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담았다.
“나는 그들이 계획했던 대로 당하지 않았다. …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해 죽은 것처럼 보여 주었을 뿐이다. … 그들은 똑똑히 보지도 않고 엉뚱한 사람을 나라고 믿고 못박아 죽였기에. … 그 사람은 다른 지아비에게 쓸개와 신 포도주를 먹인 것이지 내가 아니다. 그들은 나를 채찍질하였다. 그러나 어깨에 십자가를 진 사람은 ‘시몬’이라는 다른 사람이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운 자는 다른 사람이다. … 그래서 나는 그들의 무식함에 대하여 웃었던 것이다”(332쪽, 영문 번역판).
대개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이야기는 것은 조작극일 수 있다는 이론이 더욱 신빙성 있게 나오게 되었으며, 그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추리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윗 왕이 신앙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지도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예수는 그의 후예로서 혈통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가 추구한 것이 유대인의 왕이 되는 일이었다. 예수의 출생지도 갈릴리 지방으로, 이 곳은 당시 가장 격렬하게 로마 집권에 대항하던 유대인들의 세력이 집중되어 있던 본거지로서 예수는 원주민 자격으로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구비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절대 다수의 유대인 주민들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성원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또 물리적인 조건도 충분하였다. 즉, 수도 격인 예루살렘을 위시하여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돈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물은 아리마태아 요셉과 예루살렘 교외에 있는 베다니(Bethany)에 살던 막달라 마리아 집안이었다. 독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의 오라버니 라자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베다니에 있는 이 사람들의 집에서 당나귀 행차를 준비해 예루살렘에 들어갔고, 그 집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했던 것처럼 라자로를 삼일 만에 부활시키는 제식을 올렸다. 한편 기존 유대인들이나 로마인으로서 볼 때 불과 수년 동안에 난데없이 나타난 예수라는 사람의 인기가 높아지는가 하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장까지 하니 로마 당국과 사두개(Sadducees)파 같은 유대인 부류들은 자기네들의 권익에 위협을 느낀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제거하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들 중 한 쪽이나 양쪽이 합세하여 예수를 없애는 음모공작을 시작했다고 추리하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예수를 없애려는 그들의 노력은 그들이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가 아주 높은 고위층 인사를 알고 있었고, 그의 도움으로 부패한 로마 집권층이 매수되어 개인 소유지에서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십자가 사형연극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머지 사람들은 멀리서 구경만 하게 하여 잘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십자가의 예수를 바꿔치기 했거나 죽지 않은 예수를 죽은 척하고 속였을 것으로 본다.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 눈을 속여 예수를 근처에 준비해 놓은 무덤으로 데려고 가 하루나 이틀 후에 신기하게도 시체가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여 시내에 들어가 모든 사람들이 보고서 증명할 수 있도록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 가까운 소수의 몇 사람 앞에만 나타났다. 진짜 예수가 부활했다면 무엇이 두려워서 확실하게 대중 앞에 나타나 추호의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귀신과 같이 된 그를 또 죽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를 산헤드린 유대인들이 직접 죽이지 않은 것은 그 유대인들이 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측근들이 예수를 산헤드린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 총독 빌라도를 움직여 로마군이 직접 관장하여 조작을 가능하게 했고, 그래야만 마음대로 다른 유대인들을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만약 예수 처형을 유대인에게 맡겼더라면 그들은 실제로 예수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원한이 없었고 부패한 로마 군인들은 다만 상부의 명령에 따르고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당시의 모든 상황의 이치가 들어맞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설이 사실이었다면 예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에 대해 아무도 근거 있는 대답은 하지 못하지만, 몇 가지 설은 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곳은 인도의 카슈미르(Kashmir) 지방으로, 그 곳에서 늙도록 오래 살다 죽었다 한다. 그런가 하면 오스트리아의 한 학자는 마사다(Masada)에서 로마에 항쟁하다 죽었다는 이론을 폈다. 마사다는 유대인들의 로마 통치에 대한 마지막 항거지로 유명하다. 서기 66년에서 74년까지 쿰란 지방, 즉 갈릴리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나 로마군과 싸움이 치열하였으며, 마사다는 말굽처럼 생긴 바위로 된 자연요새지로 960명의 남녀노소, ‘에세네(Essenes)’의 ‘질로트(Zealots)’파 유대인들이 끝까지 항거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모두 불태워 없애고 자결한 곳이다. 여기에 80세의 늙은 예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신비스런 이야기는 프랑스에 있는 레네-르-샤토(Rennes-le-Chateau)라는 성당의 주임신부 소니에(B?renger Sauni?re)가 서기 45년에 예수가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긴 서류를 발견하여 신임할 만한 몇몇 학자들에게 서신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서에는 어디에 살아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들의 추측으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믿고 있으며,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에 존재하던 토속종교의 도인(道人) 오르무스(sage Ormus)와 함께 두 사상을 병합시켜 장미십자가(薔薇十字架-Rose Croix)를 창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니에 신부는 레네-르-샤토 성당 주변에 미라(mirra)화된 예수의 시체가 안치되었다는 암시를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소니에 신부가 갖고 있는 양피지에 “IL EST L? MORT(그는 죽어서 그 곳에 있노라)”라고 적힌 수상학적(數相學的) 의미가 담긴 글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프랑스로 갔다면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았을 리 없다. 아리마태아 요셉이 예수의 어머니와 부인 막달라 마리아와 처남 라자로 등 가족들을 몰래 선박에 태워 영국으로 가는 도중 프랑스의 마르세유(Marseilles)에 얼마 동안 머무르고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다윗 왕가의 족보(族譜-Sangraal, the Scion of the House of David)를 프랑스에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의 여행은 어려웠으리라는 이론도 있다. 왜냐하면 여행으로 노출이 되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까지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 필경 그의 동생 야고보(Saint James)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그냥 은둔하며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다.
예수의 할례 포피
흥미로운 이야기는 예수가 할례를 했을 때, 잘라 낸 살을 어떤 늙은 할머니가 고급 향료를 담아 두던 옥합에 넣어 보관하였다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옥합을 죄인 마리아가 사서, 그 옥합에 담긴 고급 향유로 예수의 머리와 발에 발라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채택된 마가복음 14장 3절에 어떤 여자가 나타나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으로 소개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예식으로서의 기름부음이며, 이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는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 가문과 예수의 가문 사이에 오래 전부터 준비해 왔던 일이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의 자른 살을 어느 늙은 여자가 달란다고 선뜻 준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여자와 예수의 부모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서로 언약된 어떤 내용이 있었고, 또 이 여자는 막달라 마리아의 집안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다른 추측은 옛날 유대인 사회에서는 대개 늙은 여자가 중매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대개 유대인들의 경우 결혼은 이 중매할미가 다니면서 수소문을 해 서로 적당한 배필을 구해 소개하는 것이 사회풍습이었다. 그래서 혹시 이 할머니는 중매쟁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들을 출생한 집을 다니면서 포경수술로 잘라 낸 살을 수집하여 옥합에 향수와 함께 담아 절였다가 후일에 혼담이 진행될 때 팔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할 수도 있다.
또 예수의 포피 이야기로 중세기에도 요란을 떤 적이 있어 여담으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크리스천들이 광적으로 믿고 있던 중세기에는 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성인(聖人)의 살이나 뼈나 몸의 조그마한 조각도 구하면 이것을 성보(聖寶)라 하여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한다 하였고, 이런 것을 갖고 있는 교회는 부자가 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는 교회뿐 아니라 온 동네가 부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옛날에는 서양에서도 소똥을 약으로 많이 사용하던 시대였기에, 성보(聖寶)라 할까 이런 유품은 지극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잠깐 샛길로 빠져 다른 예를 좀 들면, 프랑스의 루이 9세는 확실하게 얼마나 큰 돈인지는 모르나 금조각 1만 개라는 엄청난 금액을 주고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샀다고 한다. 그러자 파리에서는 국민들이 대승리를 한 것처럼 거리에 나와 축제행진을 벌였다고 한다. 이렇게 성보의 열풍은 당시 전 유럽을 휩쓸 정도였고, 십자군 시대에도 출정한 젊은이들이 혹시나 성보를 발견하여 팔자를 고칠 수 있지 않나 하여 그럴 만한 곳이 있으면 사방을 뒤지는 바람에 그 피해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어떤 경우는 두 교회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서로 갖고 있다고 하여 싸움을 한 일이 있는가 하면, 마르틴 루터 시대에도 예수의 사도 18명의 유골이 독일에 묻혀 있다고 해서 루터가 어떻게 12명도 아니고 18명이나 되는 성인들의 유골이 묻힐 수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 혁명가의 한 사람인 칼뱅(John Calvin)도 동정녀 마리아가 한평생 유모노릇을 해 젖을 만들어도 온 세상 구석구석에 젖을 배달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기에는 모자랐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성인(聖人)들의 몸 일부가 병을 치료하는 효능을 발휘한다면 예수의 몸 일부는 당연히 최고의 치병효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예수가 승천할 때 육신까지 함께 하늘로 올라갔느냐, 아니면 몸은 세상에 놓아두고 영만 올라갔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어쨌든 비록 육신이 하늘로 올라갔다 해도 최소한 포경수술하고 남은 포피는 세상에 남아 있을 것 아닌가 하고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2세기 초 프랑스 포이치에(Poitiers) 교구에 있는 샤루(Charroux)라는 수도원에서 자기네 수도원을 지을 때 신성로마의 초대 황제 샤를마뉴(Charlemagne)로부터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 조각과 예수가 신고 다니던 샌들 조각과 포피를 선사받았다고 주장하여, 그 사원의 중들이 로마에 있는 이노센트 3세 교황에게 보여 준다고 행렬을 지어 로마까지 간 일이 있었다. 그러자 로마 북쪽에 위치한 비테르보(Viterbo) 주(州)에 있는 칼카타(Calcata) 교구에서 자기네들이 갖고 있는 예수의 포피가 진짜라고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샤트레 교구의 쿠롬이라는 사원에서도 자기네가 진짜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고, 또 피이(Puy), 메츠(Metz), 안베르(Anvers), 힐더샤임(Hildersheim), 노틀담 앙보, 샤론수르만느 등 약 10여 군데에서 진짜를 갖고 있다고 나서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입장이 곤란해진 이노센트 교황은 하나님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 하면서 판결을 거부하고 싸움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교황이 판결을 거부하고 중립을 지키게 되니까 대여섯 개 정도가 또 더 나와서 진짜 포피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샤루의 것을 진짜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름 자체가 빨간 살(Chair Rouge)이란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얼마 후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재위 1523~1534)는 샤루의 포피를 구경한 사람에게는 면죄를 해 주는 특혜까지도 베푸는 일이 일어나 샤루의 포피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샤루의 포피가 사라지는 일이 생겼다. 모두들 도둑맞은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를 했는데, 1856년 건물 수리하는 사람이 우연하게 벽 속에서 그 포피를 보관한 상자를 발견하여 포피를 다시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도원에서는 이 포피를 위한 건물을 새로 짓고, 낙성식 하는 날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는데, 그때 피이(Pie)라는 몬시뇰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응고한 피가 성스러운 살갗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황청은 이러한 성보에 대하여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게 되어, 1900년에는 이러한 성보를 중히 여기는 일은 응당한 호기심이 못 되는 일이라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에서는 1980년대까지도 할례축제기간에 이를 관람시키고 포피를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1983년에 도둑을 맞아 없어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언론이 별로 취급을 해 주지 않아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직 경찰은 이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예수의 과업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예수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일은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의 모든 행적은 기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는 신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기에 그의 언행에서 잘못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은 그가 죽은 지 여러 세기가 흐른 다음의 일이었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씌어진 것이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씌어진 글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오류가 있을 수도 없기에, 성경에 있는 말은 그대로 100% 믿어야 한다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지론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믿도록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과업이다. 하나님은 전세계의 인류를 상대로 인류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하나님의 과업은 몇 십 년, 몇 백 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천·수만 년이 지나도 그의 말은 진리라 변함이 있을 수도 없고 틀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원본뿐 아니라 성경을 번역하는 데도 성령이 작용하여 그 성경이 오류 없이 모든 언어로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성경이 번역판도 많을 뿐 아니라, 번역판끼리 말이 달라 뜻이 변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혼돈스럽기 그지없고, 권위 있는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경을 잘라 일부 없애기도 하고 없는 말을 집어넣기도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 앞에 주어진 성경이라는 것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많은 독자들은 알지도 못하고 기억에도 없겠지만, 필자가 경험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보자. 6·25 전쟁이 났을 즈음의 일이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북한 군대와 전쟁터에서 싸워 전사한 몇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국방부 정훈국에서 문교부를 통해 각 학교 학생들에게 그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고, 사회 전반에 홍보된 삼용사(三勇士) 또는 십용사(十勇士) 같은 전쟁영웅의 영웅담을 담은 작은 책자들을 소설책과 섞어 시중에 팔고 있었다. 이 책들의 공통된 내용은 영웅들이 모두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으며 항상 정직했고 정의감이 남달리 강했다는 것이다. 또 벌써 서너 살 때부터 남다른 기질을 보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범생 중의 모범 소년으로 자라 훌륭한 청년이 되었고, 나라를 위한 애국심이 강하여 군대에 지원했으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열혈의 청년으로서 드디어 자살행위인 줄 알면서도 폭탄을 몸에 지니고 적군의 벙커에 들어가 폭파시켜 그들의 공훈으로 결국 국군이 승리하게 되고 그 지역을 탈취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2차 대전 중 일본에서 ‘로라구라’라는 개(犬)가 군대에 지원하는 영웅담이 만화로 재미있게 읽혔는가 하면, 미국에서도 월트 디즈니의 명물로 ‘도날드 덕(Donald Duck)’이란 오리의 만화 영웅담이 국민들에게 영웅심을 갖고 용감하게 싸우라는 심리작전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비슷한 일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어렸을 때 사과나무를 자른 이야기, 심보 나쁜 사람이 그의 말을 훔쳐간 것을 여러 단계의 함정을 만든 질문으로써 결국 도둑을 증명하는 천재적인 현명함을 어릴 때부터 과시했다는 이야기 등 너무 유명해서 모두 잘 알고 있을 이야기들이 몽땅 거짓말이었음이 지금은 모두 드러났다. 이것뿐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통치자를 신격화시키고 그 통치자는 실수라는 것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의 판단과 실행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 신(神)이나 이해할 그런 사람이라고 국민들을 믿게 하는 예는 개명했다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계속하여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신(神)에 버금 가는 영웅을 만든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런데 2천 년 가까운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런 재간이 없었으며, 성경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런 기능을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증거를 과연 댈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수는 어렸을 때 헤롯 대왕의 치하를 벗어나 이집트로 가서 얼마간 살았고, 고향인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다 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는 인도에 가 있었다는 설이 아주 유력하다. 여하튼 그는 30세 정도의 성인이 되어 고향에 되돌아왔고, 그 길로 선교활동을 했다. 예수가 어려서부터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러나 방금 위에서 설명했듯이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물론 그가 행한 기적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후세 사람들이 조작하여 만든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설령 그 기적들이 사실이라 해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만이 행할 수 있던 것은 아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코치를 받으면서 여러 차례 파라오를 만나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평화롭게 떠나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일종의 위협처럼 여러 가지의 마술을 부린다. 물론 모두 기적을 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 성경은 파라오가 소개하는 마술사도 비등한 마술을 피웠음을 함께 소개하였다. 우선 같은 일을 했어도 모세가 한 일은 기적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이 한 일은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차별을 두고 달리 생각하는 크리스천의 사리분별방법이다. 그러나 누가 했든 결과는 같기에 모두 기적을 행했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마술 또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그 옛날에도 물론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에도 비크리스천 중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독단적인 크리스천들이 이들을 마귀에 홀린 사람들이라며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기에,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이해하는 사람들 앞에서만 행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기적이란 다만 일반 사람들이 불가능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이루어졌을 때 기적이라 부르지, 만약 그 일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라면 기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기적을 행했던 일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거나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는 증명이라는 논법은 일단 접어 두자. 왜냐하면 이런 기적을 행한 사람은 예수뿐이 아니기도 하고, 그가 인도 같은 아주 다른 세상에 가서 도술(道術)을 배워 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이 책의 여러 장에서 간헐적으로 언질을 많이 한 바와 같이, 그는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표하였다. 왕은 정치하는 인간이지 신(神)은 아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은 다만 유대인의 왕이라고만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산헤드린 원로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자기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제는 자기의 왕국이 다른 곳에 있다고 예수가 대답했다. 왜 ‘이제는’이라고 했는가? 이 단어 하나만도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방면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으로서 지상에 내려왔다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어나는 길로 전지전능했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행세를 하지 않고 곧바로 30대의 청년이 됐을 때와 마찬가지의 말을 했을 것이고,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왔다는 신뢰감을 만민 앞에 확실하게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갈릴리 지방만 아니라 천하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치에 어울리지 않나 싶다. 특히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할 때 기적을 행하여 천하에 하나님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고, 부활하여 승천할 때에도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다른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증명하고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방법을 피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증명하러 온 분이 증명할 기회를 무척이나 많이 놓쳤다. 왜 그랬을까? 예수가 언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됐는가 하는 문제는 초창기에 많이 논의되었던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그리고 예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일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여러 면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요셉의 막대한 재정적 후원과 교육이 있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예수가 다윗의 직계손이라는 혈통관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타지에 있다가 장성한 후 갑자기 고향에 돌아왔고, 그 길로 국민의 존앙을 받기 위해 메시아 행세를 했으며, 유대인의 지도자 역을 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 인류를 상대로 복음을 전하러 왔는지, 아니면 다만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내려왔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유대인 세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을 전 인류에 적응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비약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을 취급한 장에서 보듯 하나님은 유대인 중에서도 유대 부족과 이스라엘 부족만 자기 민족으로 선택했고, 그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을 가능한 한 많이 학살하도록 강조했고 약탈하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란 존재나 예수의 존재가 전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선택한 유대 민족에게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다만 피지배민족의 일원으로 민족의 지도자가 우선되고, 과거에 잃었던 다윗 왕의 계보를 계승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배다른 형의 재력을 고려할 때, 이러한 계획이 그 때나 지금이나 돈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 예수가 전 인류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러 왔다는 신학론은 예수가 가고 난 다음 피지배민족에서 벗어나 지배민족으로 탈바꿈하는 세계정복의 방법을 군사적 방법 대신 신앙을 무기로 하는 방법으로 꾀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예수를 죽인 책임을 오히려 유대인 부족에게 씌웠고, 신학론을 뜯어 고쳤다. 이러한 일은 안티오크나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 방법은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고, 정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혹자는 종교로 세계정복을 한다는 일이 의아스럽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일이나, 신앙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일이나,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일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거의 완력으로만 옆 나라를 정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이 전 유럽을 마음대로 통치했다는 것 정도는 모두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이것이 정복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경제력으로 정복한다는 말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필경 경제적 정복은 가장 완벽한 정복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 정복되는 줄도 모르고 정복당하기도 하려니와, 이것은 밥통을 꽉 걸머진 완전무결한 정복방법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과연 예수가 인류의 평화를 위하고 인간의 구제를 위해 왔는가, 아니면 다만 유대민족의 독립을 위한 혁명가로 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전에 예수가 사람인가 신인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다.
동정녀 성모 마리아
성경의 여러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았다는 내용도 여러 가지로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교 이전에 여러 신화에서 소개되는 동정녀 성모의 근원을 찾아보는 일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교의 성모와 다른 종교의 성모를 비교하여 고찰하는 것이 또 한 방법이며, 셋째는 성서학자들이 성경을 위주로 해석하는 것이 또 하나의 다른 방법이다.
우선 신화를 근거로 관찰할 때, 성경의 동정녀 마리아의 이야기는 희랍의 문명에 근거를 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동정녀의 임신을 말한 대목은 누가복음에서의 이야기이다. 누가는 희랍 사람으로 희랍어로 글을 썼으며, 당연히 그는 희랍 문화의 소산이었다. 희랍 문화는 신화로 가득 차 있다. 신(神)들은 자식을 낳고 이 자식들도 역시 신이 된다. 그러나 자식 신들이 태어날 때에는 성교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제우스(Zeus)가 뱀의 형상으로 페르세포네(Persephone)를 방문하여 동정녀로 구세주 디오니소스(Dionysos)를 잉태하게 되고, 조로아스터(Zoroaster)도 아들 사오샨트(Saoshyant)를 구세주로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동정녀의 몸을 이용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경쟁상대였던 솔 인빅투스의 신 미트라(Mithra)도, 아도니스(Adonis)도 모두 동정녀에 의해 태어났으며, 또 슈메르(Sumer)를 거쳐 히브리로 내려온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서 이브의 어머니 소피아(Sophia)도 역시 동정녀로 이브를 갖는다. 이러한 사회환경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종교로서 자라기 위해서는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정녀로부터의 출산이 반드시 필요했다. 또 이러한 양상은 서양에서만이 아니다. 인도의 문화에서도 동정녀가 존재한다. 인도 철학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일곱 개의 차크라(chakra) 중에서 첫째 항문, 둘째 성기, 셋째 배꼽은 모두 골반에 위치하고 동물적임에 반하여 넷째 심장의 차크라 아나하타(Anahata)는 사랑과 인자(仁慈)함을 나타내며, 둘째 차크라에서의 남녀 성기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넷째도 남녀의 성기가 결합되었지만 이는 금(金)의 결합인 것이며, 여기에서 잉태하는 것이 바로 동정녀 출산(Virgin Birth)이다. 그러한 이유로 부처는 넷째 차크라가 있는 옆구리로 태어나게 되고, 마땅히 부처의 어머니도 동정녀였다. 또 힌두교 크리슈나(Krishna)의 어머니도 동정녀이고, 이집트에도 동정녀가 있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는 죽은 남편 오시리스(Osiris)의 형상을 나무로 만들고 그 나무인형과 동침하여 아들 호루스(Horus)를 낳게 된다. 동정녀가 신의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는 찾기 시작하면 수없이 많이 있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예수가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별로 특별한 일이 못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동정녀 출산이라는 것은 단지 상징적으로 영적(靈的)인 출산일 뿐이지 실제로 동정녀가 출산했다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다른 종교에서의 동정녀와 성모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 보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경우에는 열 세 살 정도 때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로 처녀임신을 하고 열 네 살이나 열 다섯 살에 예수를 동정녀로 낳았다고 한다. 인도 힌두교에서 구세주 예수에 해당하는 크리슈나(Krishna)의 경우를 보면 그도 신으로서 동정녀를 통해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도 목수였으며, 그도 예수처럼 원죄가 없는 존체였고,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그도 최후의 심판과 말세를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부처님의 경우는 동정녀의 옆구리를 통해 태어났으며, 그는 태어나는 길로 사방 일곱 걸음을 걷고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하늘과 땅에 나와 같은 이 없도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이미 부처님이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그대로 물리적으로 있었던 일로 수긍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예수나 크리슈나나 부처가 이렇게 태어난 일을 모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옳지 않을까? 또 한 가지 관심사는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이 마리아 섬기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점이다. 아마도 예수라는 신을 낳은 어머니를 인간으로 대우할지, 아니면 신으로 대우할지 하는 점도 문제이려니와, 만약 신으로 취급한다면 마리아도 섬겨야 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다만 육신을 빌린 정도로 그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파티마를 위시하여 세계 각지에서 기적을 행하는 마리아 상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이 나타났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매번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마리아 상을 해 놓은 결과인지, 아니면 요셉 상을 만들지 않은 결과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성서적으로 관찰해 보자. 처음 출판된 마가복음에는 동정녀 출산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귀띔을 주는 정도로 취급되었고, 요한복음에서는 완전히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동정녀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단 말을 할 때에는 몇 장 몇 절이란 표현보다 “성경에 말하기를…” 하는 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처녀라 하였지만, 마가복음에서는 그런 말이 없고,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언급이 없는 구유(manger)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735년 예루살렘이 시리아로부터의 침공위협을 받고 있을 때, 예언자 아사야가 다윗의 자손답지 않은 유다 왕 아하즈(Ahaz)에게 한 말이 구약성경 이사야 7장 13~14장에 “다윗의 가문이여 들어라.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적혀 있다. 이 구절의 원문을 보면 처녀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알마(ha'almah)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이를 희랍어 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희랍어로 옮기면서 파테노스(parthenos)라고 번역하였다. 이 희랍어 번역판을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판이 정확치 않아 후에 아킬라(Aquila), 데오도션(Theodotion), 루시엔(Lucien) 등이 다시 희랍어로 번역하게 되었고, 이들은 파테노스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알마라는 말은 이사야서뿐만 아니라 창세기 24장 43절에 청년여자라는 말이 원서에는 알마로 되어 있고, 출애굽기 2장 8절에서도 역시 알마라는 단어가 소녀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생리적인 처녀라는 뜻은 찾을 길 없으며, 히브리어 자체에서도 원말의 뜻이 성경험에 상관없이 결혼하지 않은 성장한 여자로서 아직 가장인 아버지의 관리하에 있는 여자란 뜻일 뿐이다. 만약 알마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동정녀를 뜻하기 원했다면 파테노스(parthenos), 유대아어 알마(almah), 라틴어 버고(virgo)의 어미에 라틴어의 형용사 인탁타(intacta)라는 말을 붙여 ‘virgo intacta’ 식으로 표현했어야 옳았을 것이라 한다. 그 반면에 성경험 없는 처녀를 뜻하는 말은 베툴라(betulah 또는 bethulah)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베툴라라는 단어는 창세기 24장 16절, 레위기 21장 14절, 신명기 22장 15~19절, 이사야 62장 5절에서 사용되었다. 또 이사야 7장에서 이사야가 아하즈 왕에게 한 말은 아하즈 왕 때의 이야기였지 7백여 년 후에 예수가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귀띔을 해 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적 큰 오차 또는 아전인수 격의 이야기는 성경에 흔히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하퍼 성경사전(Harper's Bible Dictionary)’ 419쪽에 해설한 글도 나온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 한 말은 수세기 후 기적적으로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아하즈에게 말한 임마누엘 징조는 아하즈와 이사야가 알고 있는 당시 살아 있는 어떤 여자에게서 태어날 사람을 말한 것이며, 그 때에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징조를 보여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사야 8장 3~4절에 징조 이야기가 나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즉, 어느 특정한 여자 예언자가 하나님이 임마뉴엘이라고 한 아들을 낳게 된다(한글 NIV에서는 이사야의 아내가 동침에 의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번역하였으나 다른 성경에는 여자 예언자라 하였고, 그녀가 동침했다는 말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이 여자는 동정녀로 아들을 낳은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다른 말로 번역되면서 뜻이 둔갑한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또 이사야의 예언이 마리아와 예수를 뜻하지 않았다는 점은 신약에 예수 임마뉴엘이란 말이 없음에서도 알 수 있다. 서기 70년에 제일 먼저 씌어진 마가복음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책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 후에 씌어진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를 삽입하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태(Matthew)가 복음서를 쓸 때에는 유대인 사회에 있는 예언을 기회 있는 대로 그리스도교의 전설로 만들려고 노력했음이 틀림없다. 마태는 사도도 아니었고 다만 시리아의 안티오크 가까이에 살던 희랍어를 하는 유대인 크리스천이었으며, 예수 사후 약 2세대가 지난 서기 90년대에 글을 썼고, 필경 그는 70인역 성경의 이사야에 익숙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감하고 있는 터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첫 두 장과 누가복음의 첫 세 장은 2세기에 와서 희랍어를 하는 유대인들이 삽입한 것이라 한다. 이들의 생각은 그들의 구세주가 다른 토속종교의 신보다 신비성이 적으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여러 점을 고찰할 때 마태가 구약에 있는 이사야의 예언을 끄집어내어 신약 속에 삽입시킨 것이나, 누가가 희랍의 구세주와 최소 동격으로 격상시킨 일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짜 놀랄 일은 이러한 내용을 아직도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이념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큰 오차 또는 아전인수 격의 이야기는 기독교에 흔히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가보(家譜)도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이 서로 짝이 맞지 않는다. 이런 사소한 데서부터 성경이 불완전함을 말해 주는 좋은 예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면 마리아가 동정녀가 아니었다면 과연 예수의 친아버지는 누구였을까? 마리아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다윗 왕의 후손인 요아킴(Joachim)과 안나(Anne)의 딸이며, 마리아는 어릴 때부터 사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사원의 원장 격인 대제사장의 이름은 자카리아스(Zacharias)이고, 그의 부인 엘리사벳(Elizabeth)은 마리아와 사촌간이며, 엘리사벳도 천사장 가브리엘(Ganriel)의 주선으로 잉태하여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을 낳게 된다. 그리고 반년 후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낳았다. 남편 요셉(Joseph)에게는 마리아가 두 번째의 부인이 되며, 요셉은 이미 리디아(Lydia)와 리시아(Lysia)라는 딸이 둘 있었고, 그들은 이미 결혼하여 출가한 상태였다. 그리고 야고보(James)와 시몬(Simon) 두 아들을 가진 홀아비였다고 어느 학자들(Victor Dunstan, Glenn Kimball 등)은 말하고 있다. 여하튼 남편 요셉은 나이가 아주 많아 최소 마리아의 아버지뻘이 될 수 있는 처지였지만 과연 그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렇다면 야고보는 예수의 형이 되는 꼴이다. 그러나 홀리 그레일(Holy Grail)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즉 예수의 혈통을 유지해 온 스코틀랜드계 영국의 스튜어트(Stewart) 왕가로부터 작위를 받은 홀리 그레일 학자 로렌스 가드너(Sir Laurence Gardner) 경의 주장에 따르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지고 좀더 구체성을 띤다. 우선 스튜어트 왕조는 후손이 없는 이유로 현재의 독일계 하노버(Hanover) 왕조로 왕좌를 넘겨 주게 되었다. 가드너의 주장으로는 1세기 유대인의 독립전쟁 때부터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 유럽의 왕가와 심지어 하노버 왕가도 모두 합세하여 현재까지도 예수의 후손들에 대하여 박해를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의 이야기로는 야고보는 예수보다 6년이나 어린 동생이었다고 하면서, 에세네 사회의 결혼풍습도 대단히 엄격하고 복잡한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가드너 씨는 이러한 에세네의 풍습에 따라 마리아가 어떻게 처녀로 정의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태복음 1장 18절과 누가복음 2장 5절에서 둘 다 마리아가 요셉의 부인이 되도록 정혼하였다고 했다. 정혼했다는 말은 약혼했다는 말도 아니고, 물론 결혼했다는 말과도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만약 결혼을 해서 부인이었다면 임신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의 환경은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남편 될 사람이 다윗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 될 사람은 옛 한국의 왕자 부인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규율로 다스려졌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원에서 엄격하게 관리되었고, 물론 성생활은 금물이었다. 그래서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발견했을 때 몹시 난처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던 사람은 최고의 승려 아비아달(Abiathar, 사무엘하 20장 25절 참조) 제사장뿐이었다. 당시의 제도로는 다윗 왕이 정치적 책임자였지만, 신앙을 다스리는 편에는 제사장 미카엘(Michael)을 대신하는 사독(Zadok)의 가계(dynasty)가 있어 최상급이었고, 제사장 가브리엘(Gabriel)을 대신하는 아비아달(Abiathal)의 가계가 있어 둘째 상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왕과 동격인 최상의 승려계급이었다. 이런 지위는 바티칸의 교황이 사도 베드로(Peter)를 대신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며, 모세(Moses) 때도 모세는 정치적 지도자였고 아론(Aaron)은 종교적 지도자였다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면서 모세 혼자 정치와 종교 양쪽을 모두 관장하는 지도자로 변환되었던 것을 참고로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담의 7대 후손 에녹이 쓴 구약성경 최대의 외서라 하는 ‘에녹서(Book of Enoch)’ 4장 9절과, 사해 제1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30년에서 기원후 20년 사이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쟁의 서(War Scroll)’ 9장 15~17절에 설명되어 있다. ‘전쟁의 서’는 광명의 아들들(Sons of Light)과 어둠의 아들들(Sons of Darkness)이 말세가 왔을 때 어떻게 전쟁을 하는가 하는 전쟁계획서라 할 수 있는 책이며, 또 위의 두 책에는 천사장 미카엘과 가브리엘, 오리엘(Auriel), 라파엘(Raphael) 등의 본질과 직책과 순위 등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잉태할 때의 미카엘 천사장 사독(Zadok)이란 직책은 사원의 주제사장이며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의 남편인 자카리아(Zacharias)였으며, 그의 바로 밑에 가브리엘 천사장 직명은 아비아달(Abiathar)로서 부제사장이었던 사람은 에세네의 시므온(Simeon)이었다. 마리아를 이 사원에 있도록 허락한 사람이 바로 시므온이었던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의 지위가 왕이 될 태자와 왕후가 될 사람의 사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에 대한 율법은 다른 유대인들과 달라 정식 결혼을 할 때까지 더욱 엄격한 규칙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두 사람 사이의 정혼이 확정된 다음 3개월 후인 9월에 1차 혼인선언을 하고, 12월 첫 보름 동안만 두 사람의 동침이 허락되었다. 그 이유는 혹시 메시아, 즉 구세주를 낳게 되면 기름부음의 달 9월에 출산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만약 신부가 그때 잉태하지 못한다면 다음 해 12월 첫 보름 동안으로, 1년 후로 동침이 연기되었다. 그러나 바로 잉태를 하면 정식으로 혼인을 선언하고 절차를 밟아 식을 올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신부는 두 번째 혼인선언을 하고 정식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알마’라고 불렀다. 따라서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기술에 의하면, 이러한 결혼식을 올릴 때에는 항상 신부가 임신 3개월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신부가 유산을 할 것을 고려해서이기도 했고, 만약 후손을 낳아야 할 부인 될 사람이 자식을 못 낳을 경우 합법적으로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두 번째 결혼선언은 3월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의 경우에 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기원전 7년 3월 1일 일요일에 아이(예수)를 낳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셉은 제사장이 명령한 12월 초순까지 기다리지 않고 기원전 8년 6월에 이미 동침을 한 것이다. 그 시기는 첫번째 결혼선언을 하기 3개월 전이었고, 다만 정혼을 공포한 때였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정혼하자마자 동침을 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알마로서 임신을 했고 알마로서 출산을 했다.
이렇게 마리아가 율법을 어긴 임신을 하게 되자 제사장은 요셉에게 혼인을 파기할 선택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난처해진 요셉은 망신당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 마태복음 1장 19~20절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사원에 맡길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태어나는 아이는 통상적으로 사원에서 승려들이 키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만약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는 다윗 왕의 장손이 되는 터인데 그런 아이를 아비 모르는 고아로 사원에서 키우고, 대신 다음 아들이 대를 잇게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의 경우는 특별히 취급하기로 결정을 해 천사장 가브리엘이 요셉에게 충고하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득남을 하게 되자 하나님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한다. 가드너 씨는 이러한 천사장의 이야기와 꿈의 이야기와 일의 진행순서 따위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재량에 의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었던 일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