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달러짜리 거짓말, 홀로코스트 Part I.



민족주의 억압


정치적인 협잡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6백만명의 유태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은, 단순히 유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가들의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 보다 깊은 함의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왜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도대체 그 목적은 무엇인가?
가장 우선적으로, 이는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든 간에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용도로 거리낌없이 사용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국가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이 시대에 있어서, 영국 국민이든, 혹은 그 어떤 다른 유럽 국가 국민이든 간에 자신들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그들만의 국가적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가 생기면, 이에 대해서는 “네오-나치[neo-Nazis]”라는 오명이 손쉽게 갖다 붙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치즘이 바로 하나의 민족주의였고, 당신들 모두가 잘 알다시피, 그 당시 일어났던 일이란—‘바로 6백만명에 이르는 유태인 학살’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화가 계속해서 명맥을 유지하는 한, 세상 어디에 존재하는 민족들이건 간에, 그들이 민족주의를 표방하려 할 때면, 늘 그 곤란함 속에 구속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유를 보장해 주는 기제이기도 한, ‘민족국가주의[nationhood]’가 완전히 폐지되는 그 날까지, 이러한 사상에 대한 국제적인 관용과 이해의 정서는 바로 유엔[the United Nations]에 의해서 맹렬히 공박당하게 될 것입니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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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전


(독일의 대 유태인 정책)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든, 그른 판단이었든 간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독일은, 유태인들이 비단 독일 문화에 퇴폐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들은 애국심이 없으며, 탐욕스런 존재들인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특히 지난 바이마르 시대[Weimar period] 이후로, 유태인들은 전체 국민의 채 5%밖에 되지 않았지만, 독일 법조계, 금융계, 그리고 언론계에서 놀랄만한 힘과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들은 죄다 차지하고 있었기에, 국가적 건전성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칼 맑스[Karl Marx]가 바로 유태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ourg](1870-1919, 막시스트 혁명가—역주)나 칼 리베크네히트[Karl Liebeknecht](1871-1919, 사회주의자, 독일공산당 창립자—역주)와 같은 독일 내 혁명 운동의 지도자들도 역시 유태인들로서, 국민구성 비율에 맞지 않을 정도로 대표되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은 나치즘에다 강력한 국제주의적 색채를 더하려고 했고,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유태 민족 자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양상을 불어 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정작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태인들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옳았느냐 옳지 않았느냐 하는 것도, 혹은 유태인들의 이익에 반하는 각종 독일내 입법 조치들이 정당했느냐 정당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단순히, 유태인들의 행태에 직면하여, 나치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것은, 다양한 입법활동을 통하여, 독일 국가 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치 중의 하나는 바로 유태인들 모두를 독일 영토 밖으로 이주시켜 보내는 일을 권장했다는 것입니다.
1939년까지 다수의 독일계 유태인들이 독일을 떠났고, 그들 모두는 상당량의 자산을 함께 가지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치의 지도부들이 그들을 대상으로 대량학살[genocide]과 같은 일을 고안해 냈던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이주[Emigration]’를 ‘제거[Extermination]’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유태인들은 이 같은 독일의 국내적 차별 정책을 ‘제거’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했는데, 이는 대단히 우려할만한 시각이었습니다. 1936년, 레온 포이히트방거[Leon Feuchtwanger]와 다른 몇몇이 함께 출간한 반독일 선전용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 : “노란 얼룩 : 500,000명의 독일계 유태인들의 제거[Der Gelbe Fleck : Die Ausrotung von 500,000 deutschen Juden (The Yellow Spot: The Extermination of 500,000 German Jews, Paris, 1936)]”이 붙여진 적이 있고, 이는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었으나, 그 첫페이지에서부터 ‘유태인들의 절멸[the annihilation of the Jews]’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졌습니다—‘이주’ 자체를 독일계 유태인들의 물리적인 “제거”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정치범들을 위한 수용소도 잠재적인 대량학살을 위한 도구로 여겨졌으며, 특히 1936년 다하우[Dachau] 수용소에 있던 100명의 유태인들, 그 중 60명은 1933년부터 감금되어 오기도 했던, 이들 유태인들이 집중 조명 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독일계 유태인 공산주의자였던 한스 바이믈러[Hans Beimler]가 쓴 선정적인 책으로, ‘히틀러의 지옥의 사냥개들에게 포위된 채 보낸 4주 : 다하우의 나치 살인 캠프 [Four Weeks in the hands of Hitler’s hell-Hounds : The Nazi Murder Camp of Dachau]’라는 제목으로, 1933년 초 뉴욕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다하우가 죽음의 수용소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막시스트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던 그는, 자기 자신의 동의 아래 그 곳에 수용되었었고, 또 불과 한 달만 머물다가 이내 풀려났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동독 정부는 공산주의 활동을 한 공로자들에게, 한스 바이믈러 상[Hans Beimler Award]을 수여해 왔던 것입니다.


요컨대, 반나치 대량학살 선전물들은 그러한 주장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던, 이 같은 초기부터 인종적, 정치적 편견을 가진 자들에 의해 유포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들은, 독립적인 시각을 가진 관찰자들이, 전시에 발생한 일들이라 주장되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될 때면,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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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통계와 이주


유태인 인구와 관련된 통계자료들은 어디에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넓게 분포된 다양한 국가들로부터 추정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을 뿐이고, 특히 1939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정확히 몇 명의 유태인들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몇 명의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감금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주’와 관련해서는 신뢰할만한 통계자료들이 남아 있고, 바로 이를 통해서 보더라도 결코 6백만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이 전쟁 기간동안 제거되었을 수는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입증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가, 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수를 한 번이라도 검토해 보게 되면, 6백만명의 학살이란 지지될 수 없는 주장임이 드러납니다. 체임버스 백과사전[CHAMBERS ENCYCLOPEDIA]에 따르면, 전쟁 이전 유럽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총 수는 6,500,000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그렇다면, 유럽에 살던 유태인들 거의 모두가 다 학살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중립국 스위스의 간행물이었던 ‘바젤러 나흐리히텐[Baseler Nachrichten]’이 유태인 관련 통계자료를 인용하여 밝혀낸 바에 따르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1,500,000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영국, 스웨덴, 스페인, 포르투갈, 호주, 중국, 인도, 팔레스타인, 미국 등지로 이주해 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태계 저널리스트였던 브루노 블라우[Bruno Blau]가 뉴욕의 유태인들의 잡지였던 ‘아우프바우[Aufbau]’지, 1948년 8월 13일자에서 동일한 숫자를 인용함을 통해 재확인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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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처럼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동안 있었던 유태인들의 엑소더스[exodus]는 유럽지역에 머물던 유태인들의 숫자를 약 5백만명으로 줄이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1939년 이후 소련으로 달아나서, 독일의 침략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 너머로 철수했던 유태인들의 숫자도 더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 중 대부분은 폴란드로부터 이주해 온 1,250,000명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라이트링거[Reitlinger]는 폴란드를 제외하고도, 다른 유럽 지역의 유태인 약 300,000명이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소련 영토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련으로 간 유태인들의 총 수는 1,550,000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1945년 6월 9일자 ‘콜리에르[Colliers]’지에서 프라일링 포스터[Freiling Foster]는 러시아로 간 유태인들에 대한 기사에서, “1939년 이후로, 2,200,000명의 유태인들이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낮은 수치의 자료들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 모를 일입니다.


결국, 소련으로 간 유태인들까지 다 고려해 볼 때, 독일 점령지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의 수는 약 350만명, 보다 정확하게는 약 3,450,000명 정도였던 것입니다. 여기에다 또 유럽 내 중립국가들에 거주하고 있어서 전쟁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유태인들의 수는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1942년도 세계 연감[WORLD ALMANAC] 594페이지에 따르면, 지브롤터,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터키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의 수는 413,128명이었습니다.
pp.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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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6백만명’이라는 숫자는 사실이 아닙니다.


분명코, 독일이 그들의 통제아래 두었다가 제거했다고 주장되는 유태인들의 수는 6백만명이나 될 수가 없습니다. 소련 지역을 제외하고, 이주의 물결이 있었던 이후, 나치 점령 지역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의 수는 겨우 3백만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며, 또한 결코 이들 모두가 수용소에 수용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당시 유럽에 살던 이 3백만명의 유태인들만큼은 모두가 다 제거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유태인들은 1945년 이후에도 유럽에 살아남아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필립 프리드만[Philip Friedmann]은 자신의 책, ‘그들의 형제들의 간수들[THEIR BROTHER’S KEEPERS]’(뉴욕, 1957년. p.13.)에서 “최소한 백만명의 유태인들이 나치 지옥의 혹독함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고 쓰고 있고, 다른 한편, 유태 연합 분포 위원회[the 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의 공식적인 수치에 따르자면, 그 수는 1,559,600명이었습니다. 그럼, 이 두번째 수치를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전쟁 중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는 많아 봐야 150만명을 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결론은 바로 중립국 스위스의 저명한 잡지 ‘바젤러 나흐리히텐[BASELER NACHRICHTEN]’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는 몇 명이나 되는가?[Wie hoch ist die Zahl der judischen Opfer?]”(“How high is the number of Jewish victims?”, 1946년 6월 30일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잡지는 상기 언급된 이주와 이민 통계 자료에 바탕하여, 그 최대치라고 해도 약 150만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수는 실상 훨씬 더 낮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왜냐하면 ‘바젤러 나흐리히텐’은 유태 연합 분포 위원회가 전후 생존자 수로 제시한, 1,559,600명을 받아들였기에 그런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지만, 당신들도 곧 보게 되겠거나와, 전후 보상을 요구한 유태인 생존자들의 수는 바로 그 수의 두 배가 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후자의 정보는 1946년 스위스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p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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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출생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는, 전후 세계 유태인 인구 통계 자료로부터도 도출될 수 있습니다. 1938년도 세계 연감[The World Almanac]에 나와 있는 전 세계 유태인들의 수는 16,588,259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지난 후인, 1948년 2월 22일자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지에 따르면, 전 세계 유태인들의 수는 최소 15,600,000명에서 최대 18,70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러한 숫자들만 놓고 보자면, 전쟁 기간 동안 유태인 희생자들의 수가 경우에 따라서는 불과 ‘수천명’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에, 분명코 6백만명이나 희생되었다는 주장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1938년도에 1600여만명에 이르던 유태인들 수에서 6백만명을 빼고 나면 천만명이 남습니다 : 그런데, 뉴욕 타임즈지가 보도한 숫자가 맞다면, 불과 10년 동안, 약 7백만명의 신생아들이 태어났으며, 그동안 유태인들의 수는 거의 두 배로 불어났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정말이지 허무맹랑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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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과장들


지금껏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유럽에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이유로, 독일을 상대로 그 첫번째 비난의 화살을 던진 사람은 폴란드계 유태인 라파엘 렘킨[Rafael Lemkin]으로, 이러한 내용을 다룬 그의 책, ‘유럽 점령지에서 동맹국들의 통치[AXIS RULE IN OCCUPIED EUROPE]’는 1943년 뉴욕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점에, 렘킨은 이후, “인종차별주의[racialism]”를 금지하는 U.N. 제노사이드 협약[U.N. Genocide Convention]을 기안했습니다. 자신의 책에서 그는 말하기를, 나치는 수백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으며, 그 수는 어쩌면 6백만명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책이 출간된 1943년의 시점에서 보자면,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학살 행위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은 단지 1942년 여름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비율로 학살이 계속되었더라면, 1945년까지는 전세계에 있는 모든 유태인들을 다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이후, 그러한 과장은 점점 더 심해져서 놀라운 수치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반나치주의자이자, 한 때 자신이 독일 비밀 경찰 조직[the S.S.] 안에 몰래 잠입해 들어갔었노라고 주장하던, 커트 거슈타인[Kurt Gerstein]이라는 자는, 레이몽 까르띠에[Raymond Cartier]라는 프랑스 심문관에게 말하기를,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어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4천만명이라는 숫자를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들 가운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1945년 4월 26일, 자신이 첫번째로 내놓은 비망록에서 그는 이 수치를 2천 5백만명으로 줄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가 일반적인 프랑스 사람들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았기에, 1945년 5월 4일, 로트바일[Rottweil]에서 출간한 자신의 두번째 비망록에서는 다시 6백만명 정도로 하향 조정했고,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Nuremberg Trials]에서도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거슈타인의 누이는 선천성 정신 이상을 앓았고, 안락사로 사망했는데, 이는 거슈타인 자신에게도 어쩌면 정신 이상 증세가 발병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갖게 해 줍니다. 하지만 이는 물론 순수한 추정에 불과할 뿐입니다.—어쩌면 그가 단지 숫자를 잘 셀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는 1936년에는, 우체국에 이상한 우편물을 보낸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위의 두 번의 “자백”을 한 후, 파리의 ‘셰르셔 미디 프리종[Cherche Midi Prison]’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그렇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는 계속 살아 남았습니다.


거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에 그는 유태인 학살에 관한 정보를 한 독일 남작을 통해 스웨덴 정부에 알렸지만, 몇 가지 설명할 수 없는 원인들로 인해, 자신의 보고서가 “날아가고 잊혀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1942년 8월, 베를린에 온 교황 사절단[the Papal nuncio]에게 이 “학살 프로그램”의 전모를 알렸지만, 당시 참석해 있던 성직자로부터 들은 말이란 오직 “나가시오”라는 대답 뿐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거슈타인의 주장들 가운데는 엄청난 규모의 대량 학살(벨제크[Belzec]에서 하루에 만2천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등)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이야기들로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두번째 비망록에서 서술한 내용의 일부이기도 한, 1942년 6월 6일 히틀러가 폴란드에 있는 한 강제 수용소에 직접 방문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 무근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도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미국에서 선거가 임박한 10월달에 선거에 영향을 미칠 의도로 전하는 놀라운 뉴스를 가리키는 말—역주)”의 일종인가요!?


거슈타인의 이 환상적인 과장들이 미친 영향은 미미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들은 대량 학살에 관한 주장들을 불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베를린의 복음주의 주교[Evangelical Bishop]였던 빌헬름 디벨리우스[Wilhelm Dibelius]는 그의 비망록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폄하했습니다. (H. 로트펠스[H. Rothfels], “가스실 대량 학살에 관한 목격자 보고[Augenszeugenbericht zu den Massenvergasungen]”, “현대사 계간[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hichte]”, 1955년 4월호.) 다만, 거슈타인이 “목격자들 가운데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의미를 가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폄하에도 불구하고, 1955년 독일 정부는 거슈타인의 두번째 비망록을 독일의 각급 학교에 배포하였습니다. (가스실 대량 학살에 관한 문서[Dokumentation zur Masenvergassung], 본[Bonn], 1955). 그리고 이 배포 자료상에는, 디벨리우스[Dibelius]가 특히 이에 대한 신뢰를 표했다는 언급과 함께, 비망록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치의 대량 학살에 대한 근거없는 주장이 독일에서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특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자료로 채택된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전쟁 중 6백만명에 이르는 유태인 학살의 이야기가 최종적인 신뢰성을 얻게 된 것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중 빌헬름 홰틀 박사[Dr. Wilhelm Hoettl]의 진술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아이히만[Eichmann]의 조수로서 일했지만, 실상은 미국 정보 기관을 위해 일했던 수상한 인물이었으며, 발터 하겐[Walter Hagen]이라는 가명으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홰틀은 또한 동시에 소련의 첩자로도 활동했으며, 페르거[Perger]와 페르버[Verber]라는, 비엔나 출신의 두 명의 유태인 이주자들과도 공모관계에 있었습니다. 한편, 이 둘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예비 심문 과정에서 미군 장교들로 활동했습니다.

이 지극히도 정체가 모호한 인물이었던 홰틀이라는 자의 증언이, 6백만 유태인 학살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1945년 11월 26일에 한 진술에 따르면, 자기가 알고 있던 사항은 아니었지만, 1944년 8월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아이히만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도합 6백만명의 유태인들이 제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아이히만은 자신의 재판에서 이러한 주장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홰틀은 전쟁 후반부 전기간에 걸쳐서, 미국의 첩자로 활동했었기에, 그가 하이드리히[Heydrich]와 아이히만[Eichmann]의 직속에 있었으면서도, 애초에 유태인 학살 정책에 대해서 미국인들에게 최소한의 힌트조차 준 적이 없었다는 점 역시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증거 부재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고의로 학살하려고 의도했다거나, 혹은 이를 수행했다는 것을 입증해 줄만한 단 한 건의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폴리아코프[Poliakov]와 불프[Wulf]가 쓴, ‘제 3제국과 유태인 : 문서와 서류들[Das Dritte Reich und die Juden : Dokumente und Aufsatze]’이라는 책(베를린, 1955년)에서, 그들이 수집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자료들은 전쟁 후, 홰틀[Hoettl]이나 올렌도르프[Ohlendorf] 그리고 비슬리세니[Wisliceny]와 같은 인물들의 진술로부터 얻어진 것으로, 특히 비슬리세니가 한 진술의 경우는 소련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어떠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폴리아코프는 다음과 같이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유태인들의 완전한 제거를 계획하는데 참여했던 서너명의 주요인물들은 모두 사망했기에, 어떠한 문서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는 아주 손쉬운 합리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코, ‘계획’이라는 것도, “서너명”의 인물들이라는 것도 모두 저자의 막연한 가정에 불과한 것들이고, 그 어느 것도 입증될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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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벨[Manvell]과 프랑클[Frankl](‘하인리히 힘믈러[HEINRICH HIMMLER]’, 런던, 1965년)에 따르면, 대량 학살 정책은 히틀러[Hitler]와 힘믈러[Himmler] 사이의 “비밀 논의[secret discussions]” 끝에,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seems to have been arrived at]”고 합니다. 비록 그들이 이를 입증하는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트링거[Reitlinger]와 폴리아코프[Poliakov]는 이를 토대로 유사한 “구두[verbal]” 명령 라인[lines]만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며, 그 때문에 어떠한 기록도 남겨질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창작으로서, 심지어 히틀러와 힘믈러 간의 그같은 기이한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만한 증거조차 단 한 가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윌리엄 쉬어러[William Shirer]는 대단히 개괄적이고도 무책임한 서술로 일관한 자신의 책, ‘제 3제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에서, 역시나 마찬가지로, 문서화된 증거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 버립니다.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이 언급할 따름입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명령은 결코 문서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최소한 이에 대한 단 하나의 사본 조차도 지금껏 발견된 적이 없다. 이 명령은 아마도 구두로 괴링[Goering], 힘믈러[Himmler], 그리고 하이드리히[Heydrich]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이고, 이 후 명령체계를 따라 아래로 하달되었던 것이다...”(p. 1148)
pp.10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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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된 법리주의 원칙들


만약 누군가 유태인들의 학살이 이미 뉘른베르크[Nuremberg] 재판정에서 “증거”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믿고 있다면,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 자체의 성격에 대해서 재고해 봐야 될 것인데, 왜냐하면, 당시의 재판은 건전한 법리주의 원칙들이 완전히 무시된 채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고소자들이, 동시에 검사이자, 재판관들이며, 또한 형벌 집행인들로서 활동했습니다.
(판사들 가운데는 물론 러시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저지른 무수한 범죄 가운데는 15,000명에 이르는 폴란드 장교들의 학살 사건도 있었고, 사망자들의 시신 가운데 일부는 스몰렌스크[Smolensk] 근처 카틴 숲[katyn Forest]에서 독일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출신 검사들은 바로 그러한 학살행위조차도 모두 독일측에 떠넘기려고 시도했습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바로 소급 법리[ex post facto legislation]가 만들어졌는데, 말하자면, 누군가가 일련의 행위를 이미 완료한 후에라도, 그것이 범죄행위였던 것으로 추후에 선언된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 가장 기본이 되는 법리상의 원칙이 있었다면, 그건 범법행위 당시 유효했던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을 때에, 오직 그러한 행위 당사자만이 기소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법률없이 형벌없다[NULLA POENA SINE LEGE]”는 원칙(죄형법정주의).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수준의 명확성을 갖고서 옳은 구형이 내려질 수 있도록, 지난 수세기에 걸쳐 발전되어온 영국의 법리 체계인 ‘증거 재판 주의[The Rules of Evidence]’ 역시 뉘른베르크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재판정은 증거재판주의의 기계적인 적용에 구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선언되었고, “증거 제시력을 갖춘 어떠한 증거”라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바로 유죄판결만을 용이하게 만들어줄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설에 따른 증거나 문서들도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이러한 자료들은 정상적인 재판 과정에서라면 신뢰할 수 없는 증거로 간주되어 항상 기각의 대상이 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거들 조차도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심각한 문제점을 낳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대량 학살이라는 전설이, 그저 위조된 몇가지 “진술서들[written affidavits]”을 근거로도 얼마든지 입증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 과정 동안에 오직 240명의 증인들만 소환되었을 뿐이고, 비록 유죄를 입증해 줄만한 “진술서들”은 30만장이나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모두 선서를 하고 난 뒤 작성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어떠한 유태인 추방자들이나 수용소에 감금되었던 자들이라도 저마다 원하는 만큼 보복적인 진술과 주장들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 믿기지 않는 일 가운데 한가지는,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의 방어측 변호사들에게는 기소측 증인들에 대한 상호 검증[cross-examine]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공정한 일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 과정에서도 만연하였는데, “만약 관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아이히만의 변호사의 발언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중단 명령이 내려질 수 있었고, 이는 결국 그가 아이히만의 무죄를 입증하기 시작할 때면, 번번히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내막이 공개된 것은, 미국 출신의 판사이자, 당시 펼쳐졌던 여러가지 재판들 가운데 한 사건의 재판장 역할을 맡았던, 베너슈투름[Wenersturm] 판사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는 진행되던 재판과정들이 너무나도 역겹게 느껴져서 곧 자리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되돌아 갔으며, 자신이 왜 그 재판에 대해 반대하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열거한 내용들은,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cf. 마크 라우트른[Mark Lautern], 뉘른베르크에 대한 최근 언급[Das Letzte Wort über Nürnberg], p. 56.) 그가 제시한 사유들 가운데, 3항에서 8항까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3. 검사국[the department of the Public Prosecutor] 위원들은 재판의 기초가 될 법리 원칙들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개인적인 야망과 복수심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4. 기소측은 방어하는 측에서 재판을 준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고, 증거 제출도 불가능하도록 막았다.
5. 테일러 장군[General Taylor]에 의해 주도되었던 한 기소에서, 그는 자신의 직권을 이용해 군사 재판정에서 만장일치 판결이 나오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고, 미국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문서화된 증거자료들이 법정에 제출되는 것도 막기 위해, 워싱턴에 이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갖은 애를 다 썼다.
6. 뉘른베르크 재판정에 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 90퍼센트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에 있어 편견을 가진 자들이었고, 이들이 소송을 주도했다.
7. 군사 재판정에서 공식적인 직위를 차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미국으로 귀화한 것을 증빙하는 서류들을 방금 막 만든 채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맡은 일이 행정적인 서비스였건, 번역 업무였건 간에, 모두 기소된 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8. 뉘른베르크 재판의 실제 목적은 바로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총통[Führer]이 저지른 범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목적은 동시에, 재판이 명령에 따라 진행되도록 만들어 주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만약 내가 뉘른베르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7달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pp.1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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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아래 이루어진 ‘자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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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묘사된 것과 같은 협박 방식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Frankfurt-am-Mein]에서의 재판에서도, 다하우[Dachau]의 재판에서도 계속 반복되었으며, 상당수의 독일인들은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했다는 자백만으로도 학살행위들에 대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다하우 공판에서 사용된 심문 방법을 조사할 목적으로 구성된, 심슨 육군 위원회[Simpson Army Commission]의 3인의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미국인 판사, 에드워드 L. 반 로덴[Edward L. van Roden]은 이에 대한 실태를 1949년 1월 9일자, 워싱턴 ‘데일리 뉴스[Daily News]’지를 통해 알렸습니다. 그의 증언은 또한 영국 신문, ‘선데이 픽토리얼[Sunday Pictorial]’지, 1949년 1월 23일자에도 실렸습니다. 그가 묘사한 방식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그들은 마치 교회 목사들 마냥 자백을 듣고 나면, 사면을 시켜 줄 것처럼 행동했다 ; 하지만 불붙은 성냥을 수감자들의 손톱 밑에 쑤셔 넣는 고문을 가했고 ; 치아와 턱을 부러뜨렸으며 ; 독방에 감금한 채 거의 아사 직전에 이를 정도의 배급만을 공급하곤 했다.” 반 로덴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증거로 채택되었던 진술들은 독방에, 석달, 넉달, 그리고 다섯달씩 감금되었던 사람들로부터 얻어졌다... 심문관들은 피고인들의 머리에 검은 두건을 뒤집어 씌운 후, 쇠로된 넉클[brass knuckles]을 감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발로 차고, 고무 호스로 그들을 후려쳤다. 우리가 조사한 139명의 사례 가운데,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고환을 걷어 차인 상태였다. 이것은 미국인 심문관들이 행한 가장 보편적인 조사과정의 일부였다.”

당신들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아직도 이스라엘 유태인들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가 멋진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일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습니까?
pp.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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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잠시 글을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Auschwitz]와 폴란드계 유태인들[Polish Jewry]에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기 전에, 상기 재판들 이외의 다른 재판 과정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어지는 주제들로 넘어가기 전에 당신들에게 꼭 한가지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결론들[conclusions] 혹은 이에 대한 분별[discernment]은 오롯이 당신들 독자들의 손에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 문제에 관한, 실존하는 자료와 문서들을 당신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또 한가지 기억해야 될 사항이 있다면, “유태인[Jew]”이라는 단어 자체는 왜곡된 표현이며, 특히 당신들 가운데 실제로 이 진정한 유태 핏줄[the beloved lineage of the Judeans]을 타고난 사람들은 더한층 지금 주어지는 정보들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자리안 시오니스트들[KHAZARIAN ZIONISTS], 탈무드 프로토콜[THE TALMUDIC PROTOCOLS](시온의정서—역주)에 기반하고, 소위 말하는 공산주의 소비에트인들[THE SO-CALLED COMMUNIST SOVIETS]과도 동맹 관계 속에 있는, 이들 시오니스트들의 손에 의해 맨 먼저 파멸을 겪게 될 자들은 바로 이 ‘진짜 유태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전체를 노예화하려는 자들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순수 독재 사회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ANTICHRIST]”이자 파괴자들입니다. 이제야말로 당신들이 정말로 진실에 직면해야 될 시기입니다. 더 늦어지게 된다면, 그 때 당신들은 더 이상 다른 견해를 표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압제 속에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상기 묘사되어져 있는 것과 같은 전술들은 여지껏 단 한 치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주목하십시오. 당신들 미국의 법정들은 오늘날 뉘른베르크의 만행보다 조금도 더 나을 바가 없을 만큼, 불공정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시온의정서에 나와 있는 다음 사항을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재판정과 법률 체계를 지배하라.” “소송에서 이기는데 필요한 증거와 목격자들을 제공하라.” “그들이 실제 증인들이든 아니든 간에..” 심지어 “다르마[Dharma](피닉스 저널을 받아 쓰는 자—역주)”의 자산과 관련된 이 작은 소송(피닉스 저널 출판과 관련하여, 재산 몰수 문제와 연계된 소송—역주)에서 조차, 시오니스트들이 지금껏 해온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그렇지만 이번엔 그들이 되레 역풍을 맞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들은 심각한 수준의 위험 속에 놓여 있습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자유를 다시 되찾고 싶다면, 당신들은 반드시 진실에 직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사항도 기억하십시오. 미국 내 유태인 단체들은 거국적인 노력을 통하여,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그것이 정확한 사항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조차도 이미 불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ILLEGAL TO EVEN QUESTION THE POSSIBILITIES OF INACCURACIES REGARDING THE HOLOCAUST].

그 같은 문제 제기(예를 들면 위와 같은 방식으로 관련 자료들을 제시해 보이는 것. 하지만 이는 미국 헌법 제 1조[First Constitutional Amendment]에 의해서 명백히 보호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사항입니다.)는 프랑스, 독일, 영국을 위시로 한 기타의 유럽 국가들, 그리고 캐나다, 소련에서도 이미 불법입니다.

하지만 이들 나라 가운데 어떤 나라도 당신들이 가진 것과 똑같은 권리 장전[Bill of Rights](미국 헌법—역주)을, 그리고 그 특징적인 헌법 제 1조를, 바로 전제정과 압제[tyranny and oppression]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명민했던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선적으로 제시해 두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조항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당신들이 이에 대해 이견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존엄한 헌법에 근거하여, ‘모든 문제들은 공개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 맞서야만 할 것입니다. ‘강요된 비밀의 커튼’ 뒤로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자명해지지 않았습니까? 어떤 말보다도 실제적인 행동이 더 큰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pp.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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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와 폴란드계 유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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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Auschwitz]에 대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 곳은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공업지대를 이루었던 수용소로서, 군수 산업과 관련된 거의 모든 물자들을 만들어 내던 곳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는 I.G. 화벤 공업사[I.G. Faben Industries]의 합성 석탄 및 고무 공장들이 들어차 있었고, 수감자들은 이 곳에서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는 또한 연구소들이 딸린 농업 연구 센터, 묘목 재배소, 가축 사육 시설, 그리고 크루프 군수 공장[Krupp’s armament works]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류의 활동들이 이 수용소의 주된 기능이었음을 우리는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습니다. 모든 주요 공장들은 저마다의 부속 기관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심지어 비밀 경찰들[The S.S.]도 자신들만이 운영하는 공장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놀랄만한 사항이 한가지 있다면, 그 곳의 군수산업단지들이 실은 거의 모두 유태인 소유였다는 것입니다!


힘믈러[Himmler]가 이 곳을 방문한 것과 관련된 증언들은, 그의 주된 방문 목적이 이 산업 단지를 시찰하고 그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941년 3월, 그가 I.G. 화벤사의 고위 관계자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수감자들의 수용 시설에 관해서는 거의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I.G. 화벤사의 노동력 수급을 위해 10만명 정도의 수감자를 더 수용할 수 있도록 수용소를 확장하라고만 명령했습니다. 이는 수백만명의 수감자를 학살하는 정책과는 실상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백만명, 그리고 또 수백만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용소 한 군데에서만 3백만의 유태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습니다. 또 어떤 저자들은 4백만에서 심지어 5백만명 가까이가 여기서 죽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4백만명이란 참으로 센세이셔널한 숫자로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이 곳 수용소를 “검사”한 뒤, 소련 정부에 의해 주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적인 시점에, 그들은 카틴[Katyn] 숲 학살 사건을 독일측에 떠넘기려고 시도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라이트링거[Reitlinger]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다른 동부지역 수용소들에 관한 그 같은 정보들은, 전후 공산주의 체제하의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 “폴란드에 있던 죽음의 수용소들에 관한 증거자료들은 주로 전쟁 이후, 폴란드 국가 위원회[Polish State commissions] 또는 폴란드 중앙 유태 역사 위원회[the Central Jewish Historical Commission of Poland]로부터 제공된 것이었다.”(‘마지막 해결책[THE FINAL SOLUTION]’, p. 631).


그렇지만, “가스실 학살[gassings]”과 관련하여, 그 곳에서 살아남은 진짜 목격자에 의한 증언이나 확언은 결코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3년을 포함하여, 총 7년간 수용소 생활을 경험한 베네딕트 카우츠키[Benedikt Kautsky]는 자신의 책 ‘악마와 저주받은 자[Teufel und Verdammte](Devil and Damned, 취리히[Zurich], 1946)’라는 책에서 “적어도 350만명의 유태인들”이 그 곳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썼습니다.
이는 정말이지 놀라운 진술인 것이, 저자 본인은 스스로도 단 하나의 가스실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같은 책에서 함께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나는 거대한 독일 수용소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있는 동안, 단 한 차례도 가스실과 같은 시설물을 본 적은 없었다.”(p. 272-3). 그가 실제로 목격했던 유일한 살해의 예는, 두 명의 폴란드인 수감자들이 두 명의 유태인 수감자들을 죽인 것에 대한 형벌로서 사형에 처해진 것이 전부였습니다.

1942년 10월 부헨발트[Buchenwald]에서 아우슈비츠-부나[Auschwitz-Buna]로 이송되었던 카우츠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시 공업지대에서는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수용소 유지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국 그는 바로 이러한 사실과, 추정되는 유태인 학살 정책이 동시에 양립되게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은 1942년 3월에서 1944년 10월 사이에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간동안 3백만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32개월에 걸쳐, 매월 9만 4천명씩을 죽여야 되고, 밤낮 가릴 것 없이 매일 3350명씩을 2년반동안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것으로서, 거의 논박할 가치조차 갖질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트링거는 꽤나 진지하게, 아우슈비츠는 하루에 적어도 6000명씩을 처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매일 6천명씩이라는 라이트링거의 주장대로라면 1944년 10월까지 그 수치는 도합 5백만명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같은 추정도 올가 렝겔[Olga Lengyel]이 자신의 책 ‘5개의 굴뚝들[FIVE CHIMNEYS](런던[London], 1959)’에서 보여준 황당한 공상에 비하면 무색해지고 맙니다.
이전에 아우슈비츠의 수감자였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수용소에서는 “매시간당 750명, 하루 17,280명에 해당하는 송장들”을 소각시켰다고 단언합니다. 이에 더해, 그녀는 매일 8천명의 사람들이 “죽음의 구덩이[death-pits]” 속에 처박힌 채, 불태워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대체적으로 볼 때, 매일 처리된 송장들의 숫자는 모두 24,000구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해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850만명이 넘는 수치입니다.
따라서, 1942년 3월부터 1944년 10월까지를 고려해 볼 것 같으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은 2100만명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단지 6백만명을 넘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태인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습니다. 좀 너무 많은 것 같군요. 내 생각에, 아마도, 그녀가 ‘쉬는 날’등과 관련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 걸 미처 빼먹은 것 같습니다.


비록 아우슈비츠에서만 수백만명이 죽었다고 가정한다손 치더라도, 1940년 1월부터 1945년 2월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수용소에 등록된 수감자들의 총 수는 363,000명이었다는 사실(‘비밀 경찰, 국가적 알리바이[The S.S., ALIBI OF A NATION]’, p.268 ff.)을 라이트링거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그들 모두가 다 유태인들이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감자들이 다 등록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또 설령, 등록된 숫자만큼이나 등록되지 않은 숫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총 수감자들의 수는 겨우 75만명에 불과하게 됩니다.—3백만명 혹은 4백만명의 학살에는 너무나도 부족해 보입니다. 게다가 다수의 수감자들은 전쟁 중 풀려나거나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으며, 1945년 1월, 러시아인들이 들이닥치기 이전에, 80,000명의 수감자들은 서유럽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pp.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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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아웃, “처칠”


이라크의 민가와 여자들과 아이들을 향해서 폭탄을 퍼붓는, 그런 멋진 아이디어를 당신들은 어디서 얻었다고 생각합니까? 군사 시설들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인가요? 그런 건가요? 당신들의 설명을 한 번 들어보라구요? 정확한 외과수술적 폭격이었기에, 남겨져 있는 모든 건물들은 온전하고 쓸 수 있는 상태라구요? CNN을 통해 보도되는 공습들 속에서, 당신들의 비행기들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때때로 당신들은, 이라크 민간인들에게 “비밀을 털어 놓고 있던[spill the beans]”, 당신들의 병사들도 함께 포함해서 모조리 폭격하고 총을 갈겨 댔습니다!


이러한 전술은 독일을 상대로 ‘훌륭한[FINE]’ 군사적 계산을 통해 작전을 펼쳤던 선례를 따른 것입니다. 처칠[Churchill]은 자신의 참모에게, 독일을 점령하려면,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을 죽이고 일반 시가를 파괴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물었고, 이에 대해 그가 들은 대답은 “65%”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부터, 모든 공격들은 오직 민간인들을 향해서만 감행되었습니다.—드레스덴[Dresden]은 군사 시설들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전부 다 파괴되었습니다.(드레스덴은 단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65%에 이르는 민간 시설물들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선언되었을 때,—그 때, 전쟁도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넘어 가게 된 것은 독일인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전쟁으로


전쟁이 2년 이상 더 끌어질 수 있도록 루즈벨트[F.D.R]와 처칠(역사상 최초, 최악의 전범)에게 조언한 것은 바로 아이젠하워[Eisenhower]였습니다. 그 결과로 양쪽 진영 모두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상자들이 발생했고, 아이젠하워의 동족인 시오니스트 형제들이자, 국제 은행가들은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 그들은 양쪽 진영 모두에 자금을 댔습니다—늘 그래왔던 것처럼.

만약 당신이 충격을 받았다면, 난 진주만[Pearl Harbor] 공습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바로 거기서 루즈벨트는 진주만 파괴 계획을 주도했습니다!

1943년 초, 패튼 장군[General Patton]과 영국의 사령관 몽고메리 장군[British Commander, Gen. Montgomery]은 “유럽의 취약 지점[soft underbelly of Europe]”을 통해 유럽을 공략하고자 하는 계획을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제시하였습니다. 이 계획이 성공하게 될 경우, 모든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고, 1943년에 이미 전쟁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누차에 걸쳐 그러한 증오를 표출하길 마다하지 않아 왔던 아이젠하워는, 가능한 한 많은 수의 독일인 사상자들이 발생하길 바랬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다음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미 1902년도에, 국제 “시오니즘[Zionism]”은 유럽에서 “기독교 세력[Christianity]”으로 간주되는 지역의 파괴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우선적으로 차르 러시아(제정 러시아)[Czarist Russia](내가 지금 “하자리안 시오니스트 러시아[Khazarian Zionist Russia]”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하십시오.)의 파괴를 필요로 했고, 이 일은 세계대전에 돈을 댄 바로 그 똑같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1917년에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 20억달러(당시의 이 돈은 실로 엄청난 거금이었습니다!)에 이르는 전쟁 기금은 바로 향후의 목적을 위해 이 때 미리 준비되어졌고, 이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는 자가 무대 위에 등장하기에도 한참 전의[LONG BEFORE] 일이었습니다.


처칠과 루즈벨트는 그들의 훌륭한 군 지휘관들의 조언을 듣는 대신, 스탈린[Stalin]의 조언을 들었고, 그에 따라 스탈린이 동유럽에서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2년 정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오늘날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Warsaw Pact Nations]로 이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의 배신 행위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데, 1945년 패튼의 장갑차 부대가 독일을 점령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베를린으로는 진격해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게 되었고, 심지어 독일 서부 전선에서 철수하라는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바로 그러는 틈을 타 소련의 군대는 독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밥값도 못하는[worth their salt]” 어떠한 군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그 때 당시 패튼이 독일 동부 전선으로 갔었더라면 진작에 전쟁을 끝낼 수 있었으며, 또 그 결과로 독일이 결코 분단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바로 이 때 패튼은, 휘하의 장병들에게 승리의 영예가 돌아가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이 방해받게 되는 데에는, 전쟁을 지휘하는 최상층부에 일련의 음모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에게 정신적인 외상을 입힐만큼 충격적인 교훈이 되었는데, 바로 그 똑같은 느낌을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General Douglas MacArthur]은 한국에서 다시 받아야만 했습니다. 압록강[the Yalu River] 너머로 북쪽에 위치해 있던 적들을 목전에 두고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 역시 음모의 존재를 눈치챘던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에 관해서 조사해서 볼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자료들은 구해 볼 수 있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권하는 않는 것이 있다면, 부디 아이젠하워의 비망록만큼은 참조하지 말길 바랍니다. 적어도 당신들이 진실을 알길 원한다면...



다른 계획들


워싱턴D.C.와 런던에 자리잡고 있던 단일 세계정부주의자 그룹들은 꽤나 다른 계획들을 갖고 있었고, 또 스탈린이 동유럽 지역과 독일을 약탈하는 것을 도와 줬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히틀러의 (소위 말하는) 죽음의 수용소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을 거론하게 된다면, 당신들은 또 다른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학살 수용소일지도 모르는 것으로 추정되던 수용소들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아래에 있던 영토 내에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 말미, “지독한 스웨덴계 유태인[terrible Swedish Jew]”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모든 독일인들을 향한 공개적인 증오감 속에, “킬홀 작전[Operation Keelhaul]”이라는 것을 도모하여, 미국 군대 앞에 항복한 독일인들 가운데, 수천명에 이르는 반공산주의 투쟁가들[anti-Communist fighters]을, 억지로 ‘자비로운’ 공산주의자들의 손 아래 도로 떠넘겨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수천명은 즉각적으로 살해되었으며, 나머지는 ‘러시아의 군락[Gulags of Russia]’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당신들이 너무나 잘 기억하겠지만, 내가 이미 누차 이야기해온 바대로, 한국에서 행방불명된 많은 사람들은 바로 소련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지금 이 순간에도(아직 생존해 있는 채로)!

아이젠하워가 미국으로 되돌아 갔을 때, 통제된 채로 움직이던 비열한 미국 언론들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유히 배신해 왔던, 바로 그 대중들 앞에서의 그의 인기는 너무나도 높아서, 결국 그는 1953년 제 3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또 한가지 당신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 나는 당신들의 오늘날의 “통제된 언론 매체들”에 관한 증거자료들도 보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을 쓸 때, 한 번 이야기할까 합니다.


아이젠하워는 종전에 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 “나는 전쟁을 혐오합니다. 바로 그 전쟁 속에서만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을 혐오하며, 또 그 잔인함과 그 무익함과 그 어리석음을 직접 목격해 온 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전쟁을 혐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독일인들을 혐오하는 것만큼 전쟁을 혐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전쟁이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백만명이 넘는, 항복한[SURRENDERED] 독일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지독한 ‘탈무드 시오니스트식 보복[Talmudic Zionist’s revenge]’을 가했던 것입니다.
언론을 통해 칭송받고, 역사가들로부터 “보호받았던” 이 자는, 소위 말하는 문명화된 인간과 그들이 펼쳐온 전쟁사 속에서, 가장 비난받아 마땅할만한 행위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훈족의 아틸라[Atilla the Hun](5세기 전반, 게르만족 대이동기, 유럽에 대제국(훈제국)을 건설한 인물.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점령지를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했으며, 유럽인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각인됨—역주)나 그 밖의 완전한 야만인들과 동급으로 봐야 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1945년, 완전히 패망한 독일에게 ‘강요된 평화’ 프로그램은 ‘모겐소 플랜[Morgenthau Plan]’이라 불렸습니다. 이는 바로 또 한 명의 시오니스트이자,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말하기를, 대부분의 아이디어들은 아이젠하워가 직접 제안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모겐소 플랜


이제, 지난 20여년 간에 걸친 엄청난 연구 노력 끝에, 미군 병력을 지휘했던 시오니스트 지휘관이자, 제 34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자에 관한 진실들이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자료들도 축적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눈에 띄진 않지만 큰소리 치는 사람들의 말을 아무 생각없이 “단순히 다 믿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은 워싱턴 D.C.에 자리잡은 소수의 막강한 시오니스트들의 손에 따라 좌우되었습니다. 지난 50여년간 미국을 통제해 온 이 보이지 않는 비밀 정부는, 그 무렵에는, 허버트 레만[Herbert Lehman] 상원 의원,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 대법관, 그리고 헨리 모겐소[Henry Morgenthau] 재무장관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청사진”을 그렸고, 이는 열정적인 아이젠하워에 의해 유럽에서 수행되었으며, 이는 문명화된 인간 역사상 가장 가공할만한 증오와 복수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이 정책은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까지 수행 중에 있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고, 심지어 만들어 내기조차 하는 언론계 거물들의 지원 속에, 이미 70대와 80대의 노년에 이른 유럽출신 전쟁 베테랑들을, 50년 전에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되는, 추정적인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끝없이 뒤쫓고, 괴롭히고, 또 체포해 왔던 것입니다.


다음 사실들은,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복무했던, 미국출신 베테랑들과 장병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할 사항들입니다. 당신들은, 바로 국제주의자들[the Internationalists]의 이득을 위해, 당신들이 어떻게 속임수를 당해 왔으며, 어떤 방식으로 유린당해 왔던 것인지를 알아야만[KNOW]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해외 참전 용사 재향 군인회[Legion and Veterans of Foreign War Post]’ 소속의 모든 베테랑들은 이 글을 반드시 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같은 소속원들과 관련 단체들을 통해서 여기 나와 있는 내용들이 정말로 사실인지를 조사해봐야만[RESEARCH] 할 것입니다.

당신들도 알게 되겠지만, 똑같은 방식의 배신행위들은 한국에서도 발생했고, 나중에 베트남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라오스에서도,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도, 그리고 “폭풍의[Storm]” 걸프만에서도 계속되고, 또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특히 당신들, 미국의 베테랑들이여, 당신들이야말로 반역자들에 관한 진실을 맨 먼저 알 권리[the first RIGHT TO KNOW]가 있습니다. 당신들의 동료 전우들의 살해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 수백, 수천명에 이르는 불구자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 나아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 조차도 당신들의 아들과 딸들을 제 3차 세계대전(제 1차 핵전쟁)에 내 보내기 위한 준비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에 관한 진실을 알 권리가 당신들에겐 있는 것입니다.


워싱턴 D.C.의 국립 문서 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에는, 1945년 9월 8일자, “전쟁 포로와 무장 해제한 적 병력에 관한 주간 보고서[Weekly Prisoner of War and Disarmed Enemy Forces Report]”라고 불리는 공식 문서가 있습니다.

이 서류에 따르면, 유럽의 전쟁터에서 미육군 통제 하에, 1,056,482명에 이르는 독일인 수감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중 692,895명은 ‘전쟁 포로[POW’s (Prisoners of War)]’로 분류되었고, 나머지 363,587명은 ‘무장해제 적 병력[DEF’s (Disarmed Enemy Forces)]’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무장해제 적 병력’이라는 분류 체계는 국제법 하에서 볼 때 불법이었고, 미국과 독일 양국이 모두 서명한 ‘제네바 협약[the Geneva Convention]’에 비추어 보더라도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DEF’s(무장해제 적 병력)”으로 지정된 독일군 병사는 음식도, 거처도, 물도—사실상 아무것도, 공급받을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구비되지 못했기에, 그들은 이내 수일 안에 죽어 나갔습니다.


1945년 9월 첫째 주에, DEF지정 363,587명의 독일인들 가운데, 13,051명이 죽었고, 이들은 장부상에는 “기타 인명 손실[other losses]”이라는 제목 아래 비밀스레 기재되었습니다. 주당 사망률은 3.6%에 달했습니다. 그러한 비율로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게 될 경우, 남아 있는 350,536명의 DEF들은 적어도 28주 안에는 모두 사망하게 될 것이었습니다—다가오는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일 내 미군 통제 수용소들 바깥 지역에서의 민간인 사망률은 년간 약 2%였는데, 대부분의 민간들이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는 수용소 안에서의 사망률보다가 거의 100배나 낮은 수치였습니다. 그렇지만, 수감자들에게 필요한 공급물들은 항시 조달되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망률은 전적으로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POW’s(전쟁 포로)라고 거짓 분류되었던 692,895명의 독일 병사들도, 실은 이미 한 달 전인 8월 4일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령에 따라, POW에서 DEF로 지위가 바뀌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경우에도, 사망률이 수주 안에 신속히 4배로 불어나, 처음에 주당 사망률, 0.2%이던 것이 이내 0.8%로 바뀌었습니다. 소위 POW’s로 분류되었던 자들 가운데, 5,543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9월 첫째 주말이 끝나기 전까지 미국인들의 손아래 사망했던 것입니다.—그런 식으로라면 적어도 2년 안에는 전원이 사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DEF’s로 지정된 사람들의 주당 사망률 3.6%에 비해 POW’s에서 DEF’s 지위가 바뀐 자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망률을 보인 이유는, 단순히 처음부터 DEF’s로 지정된 사람들에게는 보다 가혹한 조치가 누적적으로 취해졌기 때문이며, 또한 몇몇 미군 부대에서는 그 같은 야만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상부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 베테랑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점령지 관리 임무를 부여 받았었던, 1945년의 겨울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 유사한 명령이, 당시 일본인들에 대한 증오로 유명하던 미군 지역 군 사령관으로부터 하달되었습니다. 그것은 맥아더의 도쿄 본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인 민간인들이 거의 아사 직전에 있었지만, 그들에게 음식물을 공급하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한 미군 장교는, 오사카[Osaka] 남쪽으로 80마일 떨어진 니스키야하마[Niski’ya’hama]라는 소도시에서, 병참 기지 관리를 위해 28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파견대를 지휘했던 일을 상기합니다. 당시 창고의 음식물들은 말그대로 썩어나가고 있었지만, 당신들은 이를 일본의 민간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 보급품으로 이 파견대에는 8마리의 양고기와 28마리의 칠면조가 보급되었지만, 적당한 냉동 보관 시설은 없었습니다. 결국, 음식물들이 상하는 걸 지켜보는 대신에, 이 장교는 이를 굶주리고 있던 민간인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새어나가게 되어, 결국 그는 군사법정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맥아더의 도쿄 본부로부터 파견된 한 고위 관리 덕택에, 그는 겨우 목숨만은 살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장교의 이름을 익명으로 유지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들은 독일에서도 끝없이, 끝없이 반복되었고, 많은 미군 장교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의 배급품을 굶주리는 독일인들에게 나눠줬다는 죄목으로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집에 어린 아이들을 두고 있는 젊은이라고 한다면, 적군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아이들을 떠올렸을 이 미군들, 적어도 자신들의 정부가 뭔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을 이 몇몇 미군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관대했던 미군 병사들에게 있어서, 적군의 아이들은 결코 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바로 당신 자신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바로 이 같은 사악한 행위들, 거의 정신병에 이를 만큼의 공포의 기억들이 바로 당신들의 양심과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도록 강요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독일인들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증오로 가득찼던 아이젠하워는, 8월 4일자 명령을 통해, 유럽 땅에서 미군 통제하에 있던 독일 전쟁 포로들을 향한 그 같은 호의적인 행위들[bona fide]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대신에 그는 허허벌판, 진흙탕에다, 질병이 들끓는 환경의 거대한 강제 수용소들을 만들어, 그곳에서 사람들(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하여)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뒀습니다.

1945년 11월, 아이젠하워가 워싱턴으로 돌아가고 나자, 약 한 달 후, 얼마간의 여유가 찾아 왔습니다. 조지 패턴 장군[General George Patton]과 같이 양심적이었던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전쟁터에서는 독일 병사들을 죽이는 데 있어서 어떠한 관용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젠하워에 의해 주도되던 의도적인 살해 정책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그가 나중에 뜻밖의 순간에 이상한 죽음을 맞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오래된 기록물들로부터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쟁 범죄”는 결코 독일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이 아니며, 시오니스트 언론매체들과 역사가들이 미국 내에서 “선의의 전쟁[good war]”이라고 칭해온 바로 그 전쟁이, 실은 역사상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 지독한 “악의의 전쟁”이기도 했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pp.14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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