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만들어 내기[INVENTING GOD]


지난 2천년에 걸친 역사를 한꺼번에 고찰하는 이점을 안고서 본다면, 당신들은 예수가 “단지 우연히” 유대인들[the Judeans] 사이에 태어나게 되었던 바로 그 땅이, ‘반대되는 두 문화 바람들’이 만난, 정확한 교차 지점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자르인들이 로마 제국 안에서 사소한 마찰만을 불러 일으켰을지라도, 그들은 ‘조작된 대중 문화권 날씨 전선’ 형성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뚜렷하게 부각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지구 상의 어떤 다른 민족들 보다가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조작된 대중 문화가 만들어 낸 전형적인 사례에 부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지구상의 어떤 다른 민족들 보다가도 훨씬 노골적으로 이 문화를 옹호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의도적으로, 자연에 반대되는 “신”을 만들어 내어[inventing a “god” who opposed Nature], ‘원시 문화[the primitive culture]’가 지향하는 중핵적인 방향성을 공식화해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하자르인들(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을 소위 유태인들이라 지칭하는 자들)은 더 이상 그러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그들의 목표는, “자연을 눌러 이기는 승리[victory over nature]”이자, 자신들의 반-자연적인 “도덕률”[anti-Nature “morality”]의 옹호이며, 이러한 목표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신”에 의해 주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혹은 이러한 목표들이 그들이 지향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atheistic communism]’에 논리적으로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목표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잘 조화를 이루는 그들만의 행위 원칙들로서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들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신”을 옹호하는 대변인들에 따르자면,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며, 그들이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조작하는 자들”로서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자연과의 접촉[contact with Nature]’의 필요성도 거부합니다. 그들의 대변인들에 따르자면,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어떠한 ‘자연과의 접촉’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낸 ‘젖과 꿀’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는 그처럼 자연에 대한 완전한 ‘경외심 부족’과 ‘인식 부족’ 상태의 사람들을 양성해 왔고, 그들이 목표로 삼는 “자연을 눌러 이기는 승리[victory over nature]”라는 것은, 퇴보해 가는 곤충들이 “성취해 내고자 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성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완전한 무지 상태 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지점’ 너머로 전체 인간 종들이 퇴보해 나가도록 밀어 붙이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문화적 폭풍우’가 형성되었을 때, 하자르인들의 문화와 대척점을 이루던 문화는 북유럽에 격리된 채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스인들이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이었다고는 하나, 대중 조작 문화 속에 양성된 자들을 통제해 나가려는 노력 속에, 그들은 이 문화와 타협해 왔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문명의 모범적인 예에 따라 설계된 13개의 도시국가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도시들이 바로 예수가 태어난 지역을 둘러싼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원래의 정신이 얼마간 퇴색되거나, 혼재적 성격을 띠었던 도시들, 또 특정의 색깔이나 경향이 더 가미된 도시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조작된 대중 문화에 맞서는 대안적인 문화들이 이 지역에 전반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문화적 색상’을 감지해 내고, ‘가벼운 미풍’을 느끼고, 또 이 ‘가벼운 미풍’으로 인식되는 문화가 완전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시각화시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하자르인들)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예리한 분별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타협으로 상당히 약화되어 온 문화지만, 대중 조작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로서의 힌트가 될 수 있었던 ‘가벼운 바람들’이자, 개인 주권 문화와 같은 방향성을 띤 문화들은, 전체 자연의 큰 흐름이라는 맥락 아래 판별될 수 있었습니다. 이 ‘가벼운 문화적 바람들’은 자연을 지지하는 문화이자, 또 자연으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는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정도가 미소하다고는 할지라도, 대중 조작 문화와는 전혀 다른 문화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제안들’은, 당시 지배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던 두 개의 다른 문화 세력들(이 때, 이 지역에 존재했던 두가지 다른 문화 세력들은 모두 대중 조작 문화의 다른 형태들에 불과했습니다.)의 주창자들이 펼쳐내던 갖가지 ‘잔 기술들[squeeze play]’ 속에 둘러싸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분별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하자르인들을 상대로 지배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공개적으로는 로마인들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비밀리에는 이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the Judeans] 사이에 태어났던 예수는, 대개 로마인들에 맞서는 하자르인들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하는 압력을 받았지만, 그는 양쪽 모두가 같은 문화적 방향성을 띤 채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양쪽 모두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이 “비폭력[non-violence]”으로 해석하는 예수의 가르침들은, 사실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주창하고 실제로 행했던 정책은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둘 모두 ‘대중 조작’이라는 동일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이러한 태도는 후에 에세네파[the group of Essenes]와의 접촉 시에도 마찬가지로 견지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예수의 지지를 부탁하며, 그가 자신들의 특정 공동체에 함께 참여하기를 요구했던 것입니다.—바로 이 때, 예수는 신속하면서도 완전하게, 그리고 또 철저하게, 그들을 떠나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은 자신이 그들 중의 하나가 되기를 요구하기에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와 더불어 당신들이 한가지 더 이해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예수[Jesus]”라는 명칭은 사실상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엠마누엘[ Emmanuel ], 이.수.[Esu] 기타 등등의 이름으로 불렸지, 예수[Jesus]라고 불렸던 적은 없습니다. 이는 바울[Paul]이 나중에 그리스 여행을 다녀 온 후, 이 마스터 스승에게 붙일 타이틀로서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역사에 대해서, 또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당신들이 찬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너무나도 자주, 당신들은 거짓된 것들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1계명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건네는 첫번째 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들을 갖지 말라”인 것은(‘하나님과 창조의 법칙’ 참조—역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삶, 그 자체의 정수로서, 그 분은, 경험의 시작 지점부터 경험의 끝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너머 영원에 이르기까지, 각자각자의 안에 살아 계시며, 그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입니다.—당신들이 어떤 명칭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숭배하지 않을 때, 그 때 비로소, 언어 조작자들에게 휘둘려 판단의 착오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수.[Esu]는, 둘 중 어느 쪽에 대해서도, 어떠한 능동적이고 물리적인 조력을 건네는 일을 옹호하지 않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둘 중 어느 쪽에 대해서도, 어떠한 능동적이고 물리적인 반대를 행사하지도 않음을 의미했습니다.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수.는 유대인들의 문화에 대해서 큰 염려를 표했는데, 왜냐하면 하자르인들/유대인들[the Khazars/Judeans]이 형성해 왔던 문화는 대중 조작 문화이자, 말로서[in WORDS], 자연에 반대되는 “도덕률”[Nature-opposing “morality”]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화가 갖는 ‘공식화된 언어적 진술들’에 대해서, 이.수.는 ‘인간들의 말들’을 이용하여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 3년간 이러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자르인들은, 자연에 반하는 행동을 부추기는 말들, 바로 이 문화권의 특색이 가장 뚜렷하게 반영되는 말들을 했습니다. ; 그들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런 다음, “신”은 자신이 한 창조에 대해 “후회했다”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이에 반대되는 문화적 바람의 미풍을 느낄 수 있었던 자들, 바로 미풍에 따라 흐르는 자연의 옮은 방향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자들은, 이러한 진술이 분명코, 반-자연의 “신”[an anti-Nature “god”]을 떠받드는 “예언자들과 그들이 만든 법률”에서 주장되는 방향성을 띠고 있는 것임을 판별해 낼 수 있었고, 또 그 방향성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화를 지지하는 모든 옹호자들을 불가피한 파멸의 길로 이끌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원시 반-자연 문화[the primitive Nature-opposing culture]는 단순히 공고화된 형태를 띠고 있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이 문화는 하자르인들이 만든 복잡한 법률 체계를 통해, 또 말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자랑스레 지켜 왔다고 주장하는, 교활한 속임수의 역사 속의 무수한 행동 사례들을 통해,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수.는 이들에 대항하여, 가장 단순한 방식의 말들로 설파하며, 이들과는 뚜렷이 대조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수.가 말하는 주권


이.수.는 자연[Nature]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들판에서 백합의 옷을 입고 계신 ‘하나님[God]’이자, 가장 작은 참새 속에 깃들어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수.는 예언자들과 율법들을 비판했으며, 창조물 바깥에 존재한다고 하는 하자르인들의 상상의 “신[god]”을 무시했습니다. 이.수.는 모든 것 안에 내재해 계신 다른 신(하나님)[God]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창조물들의 아버지[Father to His creations]’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수.는 사람들이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아버지의 자녀들임[they were of the Father]’을 깨닫길 요구하는 메시지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율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그러한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하여 행동해도 되고, 그러한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들 안에 내재해 계신 신성한 영혼(정령)[the Holy Spirit that was WITHIN them]’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하고, 투박하며,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로는, 결코 개인 주권에 대한 보다 명쾌한 언급이 제시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수.는, 메시아를 찾던 대중들, 조작된 대중의 지도자이자 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에 대한 새로운 대변인을 찾고 있던 대중들, 바로 이들에 의해 형성된 ‘날씨 전선’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대중 조작 문화 가운데 한가지인 로마 문화에 맞서 싸울 생각만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들의 문화는 로마 문화보다도 더 극단적인 대중 조작 문화였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언어는 이.수.가 말하고자 했던 중요한 어떤 것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부적절했습니다.

그가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말하고 났을 때, 그는 언어만으로는 하나의 문화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 ‘쓰디 쓴 잔’을 받아 마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용감하게 이를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파멸로 이끌 수 밖에 없는 문화에 반대되는 문화(개인 주권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그는 ‘신성한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혹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곧 ‘자신 안에 내재해 계신 그 분’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전히 ‘완전한 진술[full statement]’을 펼쳐 보일 수 있었는데,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the REAL GOD]—‘자연의 신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Nature’s God]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간은 다되어 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수.는,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편을 이뤄 싸울 수 있는, 어떤 전투에 뛰어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가서 너희 외투를 팔아, 검을 사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수.는 대중 조작자들이 세워둔 구체적인 법률들 가운데 어떠한 사항도 어기지 않았지만(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전체 문화를 늘 비판해 왔습니다.), 향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완전히 인식하는 상황에서, 이 대중 조작자들에 공개적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개인 주권을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 명의 개인의 위치에 둔 다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중 조작 문화들 가운데 가장 첨예한 대중 조작 문화를 상대로 의도적인 대결을 펼쳤던 것입니다. ‘예언가들과 그들의 율법’을 거부하는 자를 결코 관용하지 않는 문화이자, ‘내재해 계신 신성한 영혼[the Holy Spirit within]’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문화를 상대로 ‘결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일이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 속으로 일부러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상황들은, 공존할 수 없는 두 문화들 간의 운명적인 대립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황들이었습니다.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습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두 문화들 간의 대립은, 영원한 문제이자, 모두의 생사가 달린 문제임을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두 문화들 간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고, 극단적인 대칭을 이루는 두 가지 방향성 가운데, 반드시 어느 한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임을 그는 ‘그러한 언어’로 주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 저널이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제 2권으로 명명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하지만,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시리즈(총 8권 : 피닉스 저널 제 30-37권)와는 별도의 책(피닉스 저널 제 28권)으로 출간됨—역주) 이 저널은 ‘문화’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조작도 없이 진실에 대한 가르침만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내용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형제들’로부터 전해지는 가르침들입니다.

나아가, 이제쯤 당신들은, 왜 조작자들[the manipulators]이 진실전달자들[the Truth-Bringers]의 입을 가로막는 일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정보는 조작자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내용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오늘날 당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국가, 즉 개인 주권이라는 기반 위에 건립된 국가임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조작자들은 당신들을 노예화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강제적 조치들을 아직 다 완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하려는 목표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들은 주권 국민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개개인들이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해 나갈 가능성은 거의 다 차단되었습니다. 반면, 중앙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단일 세계 질서[One World Order]’ 내의 부속품들과 같은 존재들로 전락해 가고 있으며, 이 일은, 그 배후의 조작자들에 의해 거의 ‘완성된 역사’로서 기술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인간들은 ‘11시’가 넘어서도 깨어날 수 있을 것이기에, 결코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우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조악하고 부정확한 인간들의 언어들로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부터가 수월찮은 일이며, 완전하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좀처럼 힘든 일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수.는, ‘자연과 자연의 신의 우주적 언어’를 이용하여, 전체 인간 종들 모두를 상대로, 가장 의미심장하고, 가장 웅변적인 ‘진술’을 했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은 이.수.의 그러한 진술을 무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지만, 곧 그들은 단순히 이를 무시해 버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진술’의 의미를 지적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모조리 죽여 버리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로마인들 역시 그 진술의 의미를 알게 되어, 하자르 갱단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모두 제거해도 좋다는 ‘면허증’을 발급해 줬던 것입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하자르 ‘도살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타르소의 사울(사도 바울)[Saul of Tarsus]은 이야기들을 거꾸로 왜곡시켜, 이를 오히려 하자르 대중 조작 문화를 지원하는 용도로 삼으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바울[Paul]이여. 허나, 아들이여, 오늘날 ‘테이블’ 위에 올려져야 할 것들을 정작 가지고 왔던 자가 바로 당신임을 알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지금 현재, 인간들로서 경험을 겪어 나가고 있는 대중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형태, 모든 방식의 반박과 비난들이 당신 위로 쏟아질 것이고, 이는 당신을 더더욱 옭아 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당신도, 단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낼 비난의 융단 폭격의 가혹함으로 인하여, 속박감을 느끼는 상황을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평화로 인도하고, 또 그 속에 머무르게 만들어 줄 다른 상황들도 맞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가 이제는, 제각각, 경험의 역사 속에 저질러 온 오류들을 바로잡는 일에 임함에 있어, 능동적인 역할을 맡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몇몇은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르인들이 만들어 냈던, 상상의 산물이자 원시의 “신[god]”은, 그들의 “원죄[sins]”를 용서해 주기에 앞서, 그 대가로, 가장 먼저 태어났고, 가장 훌륭한 자를, ‘피흘림의 희생물’로 요구한다고 주장되었습니다. 한편, 모든 사람들은, 이.수.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라고 했던 말을 다 들었었고, 이를 두고 많은 자들은, 이.수.가 자신이 하나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이해해 온 터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은 이.수.가 바로 하자르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못박힘은, 상상의 신이 정해 둔 법률에 따라, 이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구원에 대한 대가로서, 일종의 희생에 해당하는 것임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한 송이 장미...?


이제 나는, 지금껏 내가 계속해서 ‘하자르[Khazar]’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에 당신들이 주목해 봐 주었으면 합니다.—그런데 이 표현은 사실상 이 글 안에서는 적절한 명칭이 아닙니다. 이.수.가 왔던 시기에, ‘하자르인들(정확히 이 명칭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유럽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당신들이 짚고 넘어가야 될 사항이 있다면, “하(카)자르[KHAZAR]”는 그 의미상, “가즈[gaz]” 혹은 “돌아다니다[to wander]”라는 뜻으로, 달리 말하자면, “유목민들[nomads]”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두고, ‘하자르인들’이라고 지칭하는, 그 첫번째의 실제적인 언급은 “제카리아 렉터[Zacharia Rhector]”의 ‘시리아 연대기[Syrian chronicle]’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기적으로는 6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꾸만 ‘하자르’라고 할 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요? 나는 바로, 이 하자르인들의 “문화[culture]”가 이미 그들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심지어 당신들이 “그리스도[Christ]”라고 부르거나 받아들이는 자가 오기 이전부터도, 그들의 이 “문화”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의 문화로서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이 이야기 속의 ‘그들’이 뭐라고 불렸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Canaaites]—저주받은 카인의 후예들[descendents of Cai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르면, 정작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혼선만이 생기기에, 다른 주제로 빗나가지 않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또한 당신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당신들의 교회에서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바리새인들[Pharisees]’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기회에 다시 다루게 될 것입니다.—다만, 당신들이 명확히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하자르인들[Khazars]’이라고 말할 때, 나는, 오늘날 스스로 자신들이 소위 “유태인들[Jews]”이라고 ‘자처하는[self-styled]’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수.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바울)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그의 ‘정신(영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crucifying the spirit]’이었습니다. 니체[Nietzsche]는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니체의 저서, 1888년작.—역주)에서 바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유태인 사제로서의 본능은, 역사를 향해, ‘그 동일한 전문가다운 범죄’를 한 번 더 수행하게 만들었다.—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어제와 그보다 더 먼 과거의 유산을 파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기독교사’의 출발점을 만들어 냈다. 이 복음 전도사(바울, 타르소의 사울[Paul, Saul of Tarsus])가 증오 앞에 희생시키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실상, 구세주의 모습 너머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십자가’ 위에 못박았던 셈이다.”
(이.수.가 남긴) ‘정신’이라는 측면에 있어서[In spirit], 이.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제리 팔웰[Jerry Falwell](그는, “나는 내가 시오니스트[Zionist]임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자르/엘리트[KHAZAR/ELITIST]입니다.)과 같은 저명 인사들은, 오늘날의 조작된 대중들로 하여금, 그 위에 더 많은 못을 박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종한” 바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수” 이야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 각지에 교회 ‘분점들’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수.가 남긴 ‘진술’이 갖는, 분명하고도 위엄있는 웅변의 가치를 알아 봤고, 또 이를 잘 이해했습니다.그들은 이것이 소크라테스[Socrates]가 남긴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극적인 영향력[dramatic impact]’에 있어서도, ‘의미의 명확함’에 있어서도, 분명히 더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 일구어 왔던 ‘개인 주권 문화’를 새롭게 중흥시키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의 문화의 씨앗을 새롭게 파종했던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두가지 다른 이야기(해석)들 간에는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논의들, 반대편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들, 화해할 수 없는 자와 화해하려는 시도들, 이런 모든 양상들은 엄청난 수준의 언어 폭력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지 백 년이 지났을 때, 이미 백 개도 넘는 기독교 교파들이 생겨났고, 저마다가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 불렀습니다.

언어 폭력들은 교리의 명분을 얻어 내기 위한 준비 작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수용한다는 건, 대중 조작 문화를 수용하는 셈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틴[Roman Emperor Constantine](274-337, 콘스탄티누스 1세—역주)은 “예수”에 대한 관점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 ‘충돌의 쓰레기장’ 속에서, ‘대중 조작의 잠재력[the potential for mass manipulation]’을 알아 봤습니다.
  (나는 여기서 잠깐만 내 역사담당 (자료검색) 업무를 맡고 있는 노라[Nora]에게 묻고 싶습니다.—내 설명들이 괜찮은 것 같습니까? 내가 사건들의 선후 관계를 나열함에 있어서, 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보조해 주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나 하톤은 큰 빚을 지고 있군요. 나는 당신들의 역사가 지루하고, 또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내용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만, 어쨌거나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A.D. 314년, 황제는, 저마다의 가르침들을 검토해 보기 위해서, 다양한 “기독교” 분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A.D. 325년, 이어지는 회의에서, 그는 ‘공인용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몇몇 교리들의 추종자들을 선발했습니다.—이는, 그들이 나머지 교파들을 흡수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통과권


기본적으로 “공인 기독교[official Christianity]”라는 것은, 한 로마 황제가, 유순하면서도, 교리를 이용하여 통제하기 쉬운 백성들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적그리스도 도살자[the anti-Christ butcher]’에 의해 꾸며지고, 완전히 거꾸로 왜곡된 예수 이야기에 바탕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가지 인간들의 인간 문화들’ 사이에 펼쳐지는, ‘생사가 걸린 대립’에 관한, ‘가장 웅변적인 진술’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수.의 ‘뜻깊고도 웅변적인 진술’은 ‘자연과 자연의 신의 언어’를 이용하여 했던 것으로, 여전히 살아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던 그 진술’에 대해서 잘 아는, “공인 기독교”의 사제들은, 이를 ‘여권’ 삼아, 북유럽, 개인 주권 문화가 지켜지는 땅에 진출 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이 ‘극적인 진술’은, 자기 자신들의 문화를 지탱해 주는 것이자, 자신들이 비판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것으로, 한 영웅적인 개인이, 자신들의 땅에서도 아닌 외국의 땅에서 이뤄낸 것이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는 ‘진술’이었습니다. 이 진술이 갖는 웅변성은 ‘개인적 영웅주의[individual heroism]’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개인적 영웅주의’는, 그것이 어느 땅에서 펼쳐지는 것이든 간에, 그들에게는 감탄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사제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감히 아무런 무기도 없이 ‘용’(혹은, 이.수.가 공명정대하지 못한 하자르인들을 부를 때 쓴 표현인 ‘뱀’도 될 것입니다.)에 맞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뱀 혹은 용에 치명적인 대치를 이루는 ‘개인 주권’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준 그러한 영웅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때, 가공되지 않은 진솔한 예수의 이야기는 ‘여권’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통과권을 얻어 낸 다음, 이 사제들은 서서히, 이.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에 입각한 기독주의를, 바울의 적그리스도적 “기독주의”라는 혼동스러운 오물로 슬그머니 바꿔치기 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후엔, ‘원시 대중 조작 문화’ 전파를 위한 하자르의 공식화된 교리를 조금씩 조금씩 더 주입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북유럽인들은, 비록 개인 주권 문화 속에서 의도적으로 길러졌고, 또 그 문화를 위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들 자신들의 손으로, 수백만에 수백만을 더한 자신들의 동포들에 대한 학살행위들을 감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은 소위 말하는,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가 “동전의 앞면”에 등장했을 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혼동스러운 사람들’ 사이의 ‘조작된 전투’는 너무나 많은 단면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 내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 똑같은 전투는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서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개인 주권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로 하여금 그 동일한 문화 속에 길러진 자들을 파멸시키도록 조장하고 있는 요인은, 지금도 여전히 그 똑같은 ‘양면 동전’인 것입니다.
대중 조작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혼돈과 파괴를 조장하여, 이러한 상황이 계속 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혼동스러운 오물’이 건네진 후, 억지로 떠먹여지는 상황을 두고, 로마의 우두머리 조작자들에 대항했습니다. 교묘히 북유럽인들에게 주입되었던 이것, 이 도저히 ‘양립불가능한 외부적 요소’를 도처에서 토해 내려고 하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루터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칭 유태인들, 바로 문제의 근원이 되었던 자들의 ‘공식화된 원시적 교리[the formalized primitive dogma]’일 뿐만 아니라, 그 동일한 ‘기독교 동전’의 다른 한 쪽 면은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 자신들에게 ‘훌륭한 여권’으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환멸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가톨릭 교회가 수행했었던, ‘이 새롭고도 영리한 속임수’에 대해,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부러운 눈으로 감탄해마지 않았었는데, 교회가 반대되는 문화권에 속한 자들을 제거할 때 썼던 이 방식은, 바로 유태인들 자신들의 대중 조작 방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형상’대로 만들어 내었던 이 반자연의 “신”[the anti-Nature “god”]을 다시금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말하자면, 유태인들은 가톨릭 교회 뒤를 따라다니면서, 가톨릭 교회가, 자부심 높고, 역량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는 북유럽인들을 상대로 얻어낸 권력을 빼앗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북유럽인들이 “하자르의 신”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만듦으로써 그렇게 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하자르인들, 소위 말하는 유태인들은, ‘사자의 먹이’ 주위로 몰려들어 배를 채우는 재칼들[jackals]과도 같았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였고, 또 이렇게 뚜렷이 식별되는 행태를 가진 유태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개인과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길 원하는 ‘개인(주권)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조작자들은 끊임없이 힘을 그러 모으고, 패거리를 만들어 당신들 위에 군림하고자 합니다.—하지만 당신들에게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은 최고의 ‘우두머리 조작자[head manipulator]’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결코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당신들로 하여금, 행동과 변화를 취할 시간을 벌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인간[MAN]’이 자신의 “이성[REASON]”을 되찾는 한, ‘그’는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던 건, 바로 ‘그 인간 개인[THAT INDIVIDUAL MAN]’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그리 될 것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28권, “OPERATION SHANSTORM : Counter Attack From Behind The Feathered Curtain”, 제 12-14장, pp. 110-129.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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