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지구 메세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존재하는가?/ 당신의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물론, 영혼[SOUL]을 가진 모든 개개인들이 그 답을 찾아야 할 문제들입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표현 상태에 있어서, 오직 ‘영혼이 없는 자들[soulless]’, 혹은 ‘거의 영혼이 없는 자들[near-soulless]’만이 자신들의 삶의 궁극적인 탐구 과정상에 있어서 이러한 의문들을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는 내가 처한 위치에 대해서도, 내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중심과 축을 잡아주는 “적절한” 영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는 모든 일이 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는 “인간”이라 불리우는 ‘화학적 구성체[mechanical fabrication]’가 아닐 수도 있고, 또는 그 자의 경우, ‘영혼’이 그 사람의 중심이 되는 에너지 형태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단순하게 기능하는 혹은 로보트같은 화학적 개체[mechanical robotic entity]라고 하는 편이 아마 더 맞을 것입니다. 이같은 자들은 인간의 표현 양상 가운데 오직 “육체적인 것”에만 중심이 잡혀진 채로 나아가게 될 뿐이며, 대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어떤 대상, 혹은 “나쁜” 생각에 근거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항상 ‘균형’과 ‘조화’와 ‘평화’와 ‘진실’을 추구합니다.---항상 그렇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그리고 하나님의 (공공연한) 현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살아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신조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웃과 동료들에게 친절할 것이고, 늘 베풀고자 할 것이며, 또 사랑을 표현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베푸는 ‘따뜻함’이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는, 자신 속에 내재한 빛의 서광에 따라, 타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비밀스럽게 타인을 학대하지 않을 것입니다.---심지어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도 그리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도’라는 부분을 나는 지금 특히 강조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권능”을 찾으려 할 것인데, 이를 ‘물리적인 힘[the physical force]’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 속에 내재한 힘과 지혜[his inner strength and wisdom]’로부터 이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성숙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만큼은, 스스로로 하여금, 창조주의 “인간”[Creator’s “man”]이 갖게 되는,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빛의 “선의”가 스스로에게 모범으로 제시해 주는 행동들을 추구해 나가도록, 늘 종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라고 할지라도 ‘진실’로부터 멀어져 길을 잃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은 늘 자기자신에게 많은 교훈들을 남겨 줄 것이며, 결국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의도[the intent of God] 속으로 다시 되돌아 오도록 유도되어질 것입니다.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그렇더라도 이러한 배움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하나님을 부인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인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과 우주와의 관계,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인간들의 대표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들은 오직 순간적인 “어떤 것들”만을 추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들은 무력과 기만을 통해서 권력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이러한 행동이 어떤 여파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개 이 “여파”라는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은 인간의 감각이 갖게 되는 욕구들을 채워나가기 위한 노력 속에서, 악마적인 동물성[the Satanic Beast]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힘의 근원은, 무자비한 명령 속에서, 완력을 통해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인간의 역량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들은 항상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힘[THAT power]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는 진실에 이르는 길[a way to KNOW Truth]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또 무엇이 진실인지[What is Truth]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그는 또한 ‘균형’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양쪽 모두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러한 교환관계를 반영해 주는 ‘거래’를 맺으려고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종교들과 종교적 교리들이 존재합니다.---그리고 그러한 가르침들 가운데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선[goodness]에 대한 계율들입니다.---그렇지만, 선이란 늘 베일에 가려진 채로 있고, 선를 추구하는 일이란, 마치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짙은 안개 속을 배회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짙은 안개 속에서 선을 찾아 나서는 탐색은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앎[the KNOWING]’이란 바로 ‘그 발견[the FINDING]’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상의 목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알게 되었을 때,---당신은 빛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어둠의 통로 속을 거치는 자신의 탐색 과정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곧 ‘불균형’ 속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렇게 추락하다가도, 균형을 되찾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게 된다면, 그는 이내 균형을 되찾을 것입니다.---그렇지만, 너무나도 자주 인간들은 ‘육체적인 감각들이 내뻗는 손[the offered hand of the physical senses]’을 움켜쥐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가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자신이 구조를 받는데, ‘육체적인 감각의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손 치더라도, ‘아직도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 구조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 행하게 되는, 내면적이고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항상 자신의 “형제들”을 위한 기도이자, 자기 자신의 역량을 위한 기도입니다.---이 역량이란 대단한 물질적인 “어떤 것들”을 달성해 내는데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바로 자신에게 내재한 무한한 빛 속에서,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통로를 감추어, 자신의 눈을 덮고 있는, ‘베일’의 제거를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항상 그와 같은 노력은 있어 왔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이 ‘대답되어지지 않은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앎[KNOWING]’ 속에서만이 마침내 알려지고, 또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들은 왔다가 가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순환되는 주기 속에서 진행됩니다.---항상 이러한 주기를 통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매번 주기가 바뀔 때면, 인간은 “존재[beingness]”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며, 이러한 이해는 인류를 보다 고양된 “존재”의 상태로 변모시켜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들은 가장 ‘계몽적인 주기들[enlightening cycles]’ 가운데 한 주기에 임해 있습니다.---이는 지금 진행 중인 것입니다.
의식 속에 중심이 잡혀 있는[centered in the consciousness] 인간은 자신의 ‘항존하는 앎[ever-present KNOWING]’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그는 순식간에 이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앎[KNOWING]’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다시금 기억해 내기 위한 행위들, 축적된 정보들의 재활성화를 위한 행위들을 새롭게 경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omniscience]와 전재(全在)[omnipresence]와 전능(全能)[omnipotence]은 ‘개개의 인간들이 가진 의식의 중핵 속에[at the very core in every person’s consciousness]’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의 행동을 가이드해 주는 것은 바로 “양심[conscience]”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우주적 자아-영혼과 함께 하는[being WITH the Universal Self-Soul] 존재’로서의 ‘자기자신들의 자아-영혼[their own self-soul]’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경험의 “주기[cycle]”는, 인간을 ‘자아의 근원인 빛과의 하나됨[his ONENESS with the Light of his Self-Source]’에 대한 ‘이해[awareness]’의 가장자리까지 데려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을 ‘인식’ 속에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대개 수많은 천년기들[many millennia]을 보내야 하며, 또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해 내는 데에는, 또다시 거의 같은 정도의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사실상 “결과[EFFECT]”의 세상 속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원인과 결과에 대해 다루었던 어제의 글들을 부디 다시 읽어 보십시오. 당신들의 “세상”은 아직 인간들이 그 원인[CAUSE]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결과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가, 인간들 전체의 집합 의식 상에서는 이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것을 차단하려고 드는, 마찬가지의 노력들이 또한 동시적으로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거의 무한한 것 같아 보이는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단순한 균형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진실’이 갖는, 많은 각도들과 측면들과 국면들이 그들 간의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때까지, 또한 이들과 인간 자신과의 균형마저도 잃어버리고 말게 될 때까지, 진실을 그저 복잡하게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균형은 간단합니다. 진실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간단한 것 속에 복잡성을 주입해 넣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는 것입니다. 비단 자연 현상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 속에서도, 대칭적인 쌍으로 나타나는 모든 표현들 사이에 있어서, ‘리듬감 있는 방식 속에 전개되는 균형잡힌 상호 교환[balanced interchange in rhythmic measure]’, 바로 이것이야말로,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우주[God’s universe]’가 펼쳐내는 가장 놀라운 걸작품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벽함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 법칙[THE law]’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일의 우주적 법칙[singular Universal LAW] 속에,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God’s “electric” wave universe]’안에 내재한 ‘모든 창조적인 표현들이 갖는 균형잡힌 연속성[the balanced continuity of all creative expression]’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란, ‘두가지로 달리 조건지워진 빛들[two conditioned lights]’이 빚어내는 우주이자, ‘창조라는 하나님의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God’s ONE whole Idea of Creation]’을, 이 단일 생각으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이 분리된 조각들이, ‘겉보기에 움직임처럼 보이는[in seeming motion]’ 방식 속에서 저마다 남기게 되는 기록들을 통해, 표현해 내는 우주인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우주가 갖는 “전기적” 특성’ 속에 담긴 의미, 그리고 “쌍을 이루는 표현들”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두가지로 달리 조건지워진 빛들”, “겉보기에 움직임처럼 보이는 것” 기타 등등의 의미들에 대해서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어제 내가 남긴 글들을 부디 다시 참조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같은 표현 방식 속에서, 했던 말들을 또다시 되풀이할만한 시간이나 공간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우리는 이미 앞선 책들에서 다 이야기했었지만, 모두가 금서 조치되고 말았기에, 고스란히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시 다룸에 있어서, 대단히 주의깊은 접근을 해야 할 입장이며,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법정의 뜻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주제를 다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또 동시에 우리는, 저메인[Germain]이 앞서 설명한 내용들과, 지금 내가 다시 설명하는 내용들 간에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의 설명이 더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건 바로,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해지는 폭력, 협박, 또는 비난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치의 일환으로, 불가피하게 취할 수 밖에 없는 설명 방식으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오직 하나의 진실[ONE Truth]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하나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성격상 순수하게 “물리적인” 사실을 다루는 문제일 경우에는, 바로 그 동일하고 실제적인 하나의 답을 “달리” 표현해 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미 1더하기 1은 2라고 이야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요? 아마 나는 1/2 + 1/2 + 1/2 + 1/2 = 2라고 말하거나, 혹은 1/4 + 1/4 + ... 기타 등등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같은 주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문제에 있어서, 기존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설명한 것들을 전혀 되풀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1 더하기 1은 2라는 사실을, 내가 달리 설명해 내기란 힘들 것입니다. 어떠한 설명 방식을 취한다손 치더라도 1 + 1은 2와 같다는 사실 혹은 정답을 변경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원성[duality]”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틀 크로우[Little Crow](1810 -- 1863, 본명 : 타오야테두타[Taoyateduta]. 므데와칸톤 다코다 시우스[Mdewakanton Dakota Sioux] 인디언 부족의 추장. 서부개척 시대, 미네소타 지역에서 백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다코다 전쟁을 이끔---역주)도 동일한 것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고, 나는 그가 한 표현과 설명들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답이 하나인 진실’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서기는 그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리틀 크로우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금지되어져 있는 세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리틀 크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이원성의 세상---당신은 선을 갖고 있고, 또 그 반대되는 것도 갖고 있다. 창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 마찬가지인 사실이다. 어떻게 아닐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다를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은 모든 창조물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 반대되는 측면들을 갖고 있으며, 부정적인 양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반대되는 양상과 마찬가지의 자유와 풍부함을 가지고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그 곳보다, 더 성스러운 장소나 덜 성스러운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톤 : 이 같은 이해는, 자신만이 비밀을 간직한 채, 진실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이 ‘앎[KNOWING]’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다른 민족들과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의 참된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침묵의” 목소리
모든 존재물들 속에는 시간을 초월한, 침묵의 목소리[timeless, silent voice]가 내재해 있습니다.---심지어, 식물이나 동물, 기타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식물들 조차도 이 “침묵의 목소리[silent voice]”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목소리가 지시사항들을 전해 주고, 그 식물이 현현해 내게 될 표현을 가이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침묵의 목소리는 결코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들도 항상 제시합니다. 모든 인간들 속에 내재한 침묵의 목소리는 인간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끝없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생겨나는 ‘모든 의문들’은 ‘근원[the Source]’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으로서, 당사자가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인 질문이라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이에 대해 희미한 대답이라도 듣는 사람들의 수는 더 적으며, 정말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도 훨씬 더 적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mind]’이자 자신의 ‘개인적인 자아[personal self]’라고 잘못 알고 있는, ‘전기적으로 조건지워진 감각의 육체[electically conditioned sensing body]’가 갖게 되는 감각들을 통해, 자신의 ‘의식[consciousness]’이 그 ‘근원[Source]’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지내 왔지만, ‘준비의 시대[the ages of preparation]’를 거치면서, 마침내 인간은 내재한 목소리를 깨닫기 시작하고, 또 듣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객관적인” 마음[“objective” mind] 속에는 오직 ‘전기적 감각[electric sensations]’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사고[thinking]”라고 착각하지만, 실상 이것은 오직, 감각된 것들이자, 자신의 두뇌 속 세포 속에 기록된 것들에 대한 “전기적” 지각[“electric” awareness]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바로 “기억[memories]”이라 명명된 기제를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될 따름인 것입니다. 마치, 녹음 테이프 속에 뭔가가 녹음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테이프 자체가 녹음된 소리의 근원이 되는 것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듯이, 인간이 갖는 기억의 경우에도, 인간 속에 내재한 ‘우주적 마음이 갖는 지식[knowledge of Universal Mind]’과 인간의 이 ‘기억’ 간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살아 있는” 육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실상 ‘전기적으로 동기화된 기계[electrically motivated machine]’로서(화학적으로 동기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영혼[its centering self-soul]으로부터 육체 쪽으로 확장된 ‘움직임들[motions]’을 통해 삶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전기적으로 동기화되는 것이지, 화학적으로 동기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름답고 귀한 보석과 금속들로 시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시계의 시간이 가도록 만들어 주는 데에는 전기적 힘이 요구되듯이, 화학적 구성 물질들의 조합으로 인간의 육체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 육체를 살아 있게 만들어 주는[COMES ALIVE] 데에는 바로 ‘전기적 자극[electric stimuli]’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시계의 근본적인 목적인 이상, 만약 어떤 시계가 아무리 멋지더라도, 그 시계가 시간을 표시해 줄 수 없다면, 그것이 “시계”로서 어떤 가치를 갖겠습니까? 전력원이 없는 이상, 그 시계는 그저 장식품이나 팔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마음”
인간의 ‘주관적인 마음[subjective mind]’은, ‘자신의 의식[his consciousness]’이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권능을 갖고 있으며, 모든 곳에 존재하는 자신의 영적 저장고[his spiritual storehouse of all-knowing, all-power, and all-presence]’인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의식’이 ‘자신의 자아[his SELF]’이자, 또한 ‘자신의 영구적인 자아[his ETERNAL SELF]’인 셈으로, 이를 통해 자신의 전지(全知)와 전재(全在)와 전능(全能)이 표현되게 되는데, 다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자신 속에 현존해 있음을 알아가게 될 때에 한하여, 그리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전기적으로 진동하는 신경들(전선들)[the electrically oscillating nerves(wires)]’은, 거의 전적으로, 자동적인 반응 양식과 본능적인 통제 수완을 따라 움직이며, 아주 좁은 수준에 있어서만, ‘정신적인 결정[mental decisions]’에 따라 작동하는 것입니다. 육체상의 모든 세포들과 기관들은 저마다의 존재 목적에 대한 ‘전기적 자각상태[electrical awareness]’ 속에 있으며, 그 육체를 점유하고 있는 ‘지능체[the Intelligence]’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작용[mental action]’이 없이도, 자신들의 목적을 원활히 수행해 냅니다. 예를 들어, 심장은 순수하게 자동적으로 뛰는 것입니다. 적혈구들은 신체의 각 부위로 산소를 운반하고, 백혈구들은 신체 내 손상된 부위를 복구하려고 달려들며, 대식세포들[macrophages]은 외부로부터 온 침입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입니다.---이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스위치를 켰을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기적 기록을 남기는 두뇌[electric recording brain]’를 가진, 단순한 “육체[body]”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 안에서, 그리고 ‘전기적 기록 기능을 갖는 두뇌’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사고하고”, “살아가며”, “경험하고”,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 의식적이며, 자신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의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인간은 설령 “수면”이라 불리는 상태 속에서 감각이 정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 상태 속에서, ‘무의식[unconsciousness]’과 같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손가락을 마취시킨다면 손가락이 ‘무의식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려 하십니까? 그럼 치아는 어떻습니까? 치과의사가 얼마동안 신경을 죽이게 되면, 치아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까? 여기 흥미로운 모순점이 한가지 있다면, 인간은, 치아가 ‘의식적’일 수는 없으며, “육체”도 육체 자체가 ‘의식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의식”이란 결코 잠들지도 않으며,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의식이란, ‘인간의 불멸성[his immortality]’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불멸성’은 인간의 ‘앎’을 표현해 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로 이 ‘의식’이, 인간이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늘 찾고만 있는[unknowingly seeking] 그 ‘빛’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두뇌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서만이 자신이 ‘사고’하고 있는 줄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틀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이제서야 겨우 칠흑 같은 어둠의 황무지로부터 빠져 나오려 하고 있기에,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워 보일 것입니다. 지난 주기들에 걸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성장과정 상에 있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증거로서, 그리고 앎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것들에 대한 증거로서, 감각[sensation]에만 의존해 왔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성장 시퀀스에 있어서, 다 해 봐야 불과 몇 해 안 되는 주기들에 걸쳐서만, 자신들 속에 내재한 ‘영혼[the spirit]’의 존재를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같은 새로운 앎에 대해 너무나 생소하고, 그 최초의 “입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신 속에 내재한, ‘마음’이 무엇인지, ‘의식’은 무엇인지, 그리고 또 ‘감각’은 무엇인지 등을 이해함에 있어서, 모든 것들이 그저 혼동스러울 따름인 것입니다.
육체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자아[centering self]’를 표현해 내는 자기-창조적 메커니즘[self-created mechanisms]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아[self]’란 그 자아와 더불어 ‘하나’인 ‘하나님’[God as One with it]을 현현해 낸다는 사실을,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나아가, 인간은, 육체란 살지도 죽지도 않는 것이며, 오직 ‘마음이 갖는 모든 생각들[all idea of mind]’이 되풀이 되듯,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되풀이될 뿐이라는 사실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퀴를 예로 들기를 좋아합니다. 바퀴는 가장자리가 있고, 살이 있으며,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있습니다. 바퀴가 굴러갈 때, 그 어떤 순간에라도, 바퀴의 가장자리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이 땅에 닿으며, 땅을 ‘느끼고’, 땅을 ‘떠납니다.’ 땅에 닿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이, ‘바퀴의 가장자리’와 ‘바퀴의 살’과 ‘땅’을 서로 연결해 주지만, 그 접촉은 곧 사라집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사라질지언정, 그 똑같은 국면들은 회전의 주기가 계속되는 한, 반복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인간에게 적용되었을 때, 우리는 “한 인간이 태어났고, 살았으며, 그러다가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똑같은 일이 과일에 적용되었을 때, 불꽃에 적용되었을 때, 또는 어떤 한 식물에 적용되었을 때에도, 역시 당신은, “과일이 누군가에게 먹혀서 사라졌고, 불꽃이 꺼졌으며, 식물은 죽어 부식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러한 예를 굳이 드는 이유는, 당신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무가 죽는다거나, “불꽃이 죽는다(꺼진다)”고 할 때의 그 “죽음”의 개념은, 인간의 죽음에서 말하는 “죽음”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가 궁금하십니까? 지금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감각 범위 안에서 생겨나는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의 생각[idea]’이 구성하는 전체 주기 상에서 볼 때에는,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퀴의 땅에 닿는 부분보다 훨씬 더 큰 부분들이 땅에 닿지 않은 채로 있듯이, 그 어떠한 순간에 있어서라도, 주기상의 훨씬 더 큰 부분들은 당신의 감각 범위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퀴가 둥근 원 모양으로 계속 반복되는 주기를 그리는 것처럼, “모든 생각들[ALL IDEA]”이 갖는 주기들의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바퀴만큼이나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과일이든 간에, 그 과일이 갖는 주기의 양성적 절반[positive half]은, 즉 당신 손 안에 쥐어진 상태로 만져볼 수 있는 상태의 과일은, ‘태양과 지구로부터 와 닿는 빛[light reaching from the sun and earth]’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그 과일이 갖는 주기의 음성적 절반[negative half]은, 즉 과일이라는 ‘영구적인 생각[eternal idea]’을 다시금 구현해 내게 될 반복적 재생을 위한 준비 상태 속에 있는 과일은, ‘태양과 지구로 되돌아 가는 빛[light returning to sun and earth]’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식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그 밖의 어떠한 것이라도, ‘전체로서 하나인 창조의 생각[ONE WHOLE IDEA OF CREATION]’이 펼쳐내는 창조물들에게는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꽃은 당신의 감각 앞에서는 “사라져 버리지만”, 여전히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식물도, 나무도, 숲도, 산도, 행성도, 저 먼 천체의 성운도,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지만, 분명코 다시 나타납니다. 꼭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간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고 하길 무한한 주기들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며, 인간이 갖는 주기 가운데, ‘육체를 통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시기에 해당하는 구간’의 영원한 반복 속에서, 그 ‘영혼이 갖는 영구적인 삶[eternal life of the spirit]’이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영원[eternity]’이 연속적이듯, ‘인간’도 연속적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볼 수 있는’ 혹은 ‘알 수 있는’ 그러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실은 인간의 육체는 “살지도[live]” 않고, 또 “결코 살았던 적도 없기에[having never lived]”, 분명코 ‘죽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의 영혼[the spirit]만이 사는 것입니다. 육체는 단지 그 영혼을 구현해 낼 뿐입니다. 당신이, 인간이 영혼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육체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만드는 과정을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육체가 만들어 내는 ‘행위들’은, 그 육체의 ‘중심을 잡고 있는 영혼[centering SOUL]’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들로서, 육체 자체가 동기적인 권능을 가진다거나, 지능을 가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며, 육체는 오직 ‘전지, 전재, 전능한 지성체[omniscient, omnipresent and omnipotent intelligence]’가 육체로 확장됨을 통해 동기화되는 기계일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직 그 이해에 있어 ‘유아기’에 있기 때문이며, 이제야 비로소 ‘빛[LIGHT]’과 ‘근원[SOURCE]’에 대해서 막 알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 근원[THAT Source]’으로부터 온 메신저들이자, 또 당신들보다 앞서 살았던 형제들로서,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진실을 당신들과 함께 공유해야 하는 과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탐색
인간은, 자신의 ‘육체’라는 ‘황무지’로부터, ‘깨어나는 영혼’의 ‘산꼭대기’에까지 이르는, 이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로 속에서, 자신을 가이드해 줄 ‘빛’을 끊임없이 그리고 치열하게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그 빛을 찾고 있으면서도, 그 빛을 발견하게 되면, 이내 다른 존재로 변모되길 영원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항상, 부지런하고 경건한 진실 탐구자에게만이, ‘발견’이라는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빛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서서히 ‘자기자신의 자아[the Self of himself]’도 더불어 발견하게 되는데, 실은 이 ‘자아’가 바로 빛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가 점점 더 ‘깨어나는 자아[awakening Self]’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빛[the God-LIGHT]’에 의해 변모되어져 감에 따라, 그는 어둠이 내리 깔린 황무지를 저 아래로 남겨둔 채 그 곳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빛을 찾긴 찾지만, 도저히 이 빛을 발견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낙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빛을 영원히 계속해서 찾아오고 있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빛을 발견했을 때조차도, 단순히 이를 인정하지 못할 뿐입니다.---그리고는 항상 다른 어떤 것을 다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전능(全能)과, 전지(全知)와, 전재(全在)의 빛이 어둠 속에 번뜩이는 섬광처럼, 한 순간에 찾아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산꼭대기에 거의 이르게 된 경우가 아니고서야, 빛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산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바로 그 순간에 조차도, 항상 어디선가 교란자[Interceptor]가 나타나서 ‘앎[KNOWING]’에 이르는 이 마지막 영광의 순간이 허락되지 않도록 방해하며, 그 때 생겨나는 ‘의심들’은 이 자를 다시 방황의 들판 아래로 끄집어 내리는 것입니다. 영혼의 완성을 방해하는 그 같은 교란자는 온갖 형상으로 다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여전히 새롭게 주어지고, 또 황무지가 늘 가까운 곳에 있기에, 한 번에 ‘모든 빛’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해 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황무지를 벗어났던 모든 이들은, 실상 어둠의 궁지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밝혀줄 ‘충분한’ 빛을 이미 진작에 발견했던 것입니다.---그들이 단지 그 빛을 따라 계속 나아가기를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황무지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빛을 찾고 있고, 이 ‘탐색 과정’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롭게 변모되어져 또다시 빛을 찾아 나서는 일을 영원히 계속하게 됩니다.
인간은 단 한 순간도, ‘빛으로 조명된 앎[lighted knowing]’에 이르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 내기 위한, 이 탐색 과정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깜빡할 새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저 아래쪽에 있는 어둠이 자신을 다시 어둠의 공포 속으로 몰고가, 그 한 복판에 던져 넣어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영감[inspiration]’을 주는 빛이 비춰지는 위쪽을 바라다 보십시오. 바로 그 곳에, ‘두려움을 모르는 전지(全知)의 탐색자들[the fearless all-knowing seekers]’에게 ‘미[beauty]’와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를 안겨다 줄 영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와 ‘균형’과 ‘조화’란 바로 ‘우주적 빛의 순수성[the purity of the Universal Light]’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빛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사람에게 빛은 항상 다가올 것이고, 또 그렇게 빛을 발견하게 된 자는 빛을 통해 새롭게 변모되어지길 영원히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황무지로부터 영광의 산꼭대기까지 이르는 길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 있는 한은, 어둠이 조금씩 가셔지고 주위는 점점 더 밝아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올라가는 길은 항상 영광의 길이 될 것이며, 모든 이들은 제각각 이 ‘등반의 여정’을 수행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도와 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아무도 남을 대신해서 이 등반을 수행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어둠으로부터 빛을 향해 나아가는 등반의 여정은, 물리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각각의 태양들과 그 태양들이 보유한 행성들 위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반복되는 연극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인류가 다 빛을 발견하게 될 경우, 이 연극은 단순히 종료되어 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그 행성은 인간의 거주지로서의 공간이기를 끝맺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행성 위에 세워졌던 무대들은 철거되고, 해당 행성은 팽창적인 궤도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는 반면, 주어진 태양계 안의 또 다른 행성 위에, 상승을 위한 인간들의 연극을 재상연하기 위한 무대가 새롭게 갖춰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극 배우들인 우리들 모두는, 전체 연극의 스토리 라인 상에서, 조명(빛)과 더불어 점차 드러나게 되는, 우리들 각각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계속적으로 주기가 바뀜에 따라 변화되는 역할들에 기쁜 마음으로 임해야 하며, 막과 막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역할들을 더 잘 이해하고, 보다 가치롭게 이를 수행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연극이 상연되게 되면, 무대 위의 모든 배우들은 ‘경험’이라는 연기를 펼쳐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모든 경험들이 이 연극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경험들이란, 결국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저마다의 여행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경험들은 영광의 산꼭대기로 향하는 이 경이로운 여행에 있어서 각자각자가 내딛는 ‘걸음과 걸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경험들은 “좋은” 경험들입니다. ‘악’도 “좋은” 것으로 표현되는 경험의 한가지로 변모되어져야 합니다.---그 때 악,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연극에는 오직 ‘삶’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죽음은 거기 없습니다. AHO.
그런데, 빛으로 향하는 여정에 있어서 그 방향을 찾으려는 시도의 한가지로서, “예언”에 관한 논의가 종종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언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해하게 된 바에 대해 확신을 못 가지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항상, 자신의 여행에서 자기가 이해한 것에, 확신을 더해 줄 수 있는 스승들이나 기록들을 찾곤 합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사항들을 자기가 ‘기억[remembering]’해 내는 데에 있어서, 예언이 자기를 일깨워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희망에 부풀어, 그러한 예언이 감춰진 빛을 드러내어 자신 앞에 그 빛이 펼쳐지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그런데 실은 그 반대입니다.
잠깐 태양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태양은 ‘그 정수 속에서[in its very essence]’ 빛을 형성하고, 또 빛을 쏟아 내는 거대한 에테르적 진공체[a great etheric vacuum]로서, 눈으로 관찰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진동 수준’이 충분히 높은 상태에 있다면, 그는 문자 그대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태양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놀랍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왠지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 그러한 것을 경험할 정도의 수준으로부터, 다시 말해, 산의 최정상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그런 깨달음의 수준으로부터, 당신 자신이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러한 영광의 경험을 성취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지껏 당신에게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왔던 것입니다. 실상 이것은 무슨 신비한 마술 같은 것이 아니라, ‘우주 법칙의 물리학[physics of Universal LAW]’일 뿐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태양과 같은 에테르적 진공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바로 거기서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이 그 근원으로부터, 역으로 반영된 것들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행동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미래란 그 성취가 보류된 현재인 것입니다.---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태양은 해당 태양계 안의 모든 행성들 위에 발생하는 우주적 사건들에 있어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와 같은 태양은 ‘방사[radiating]’뿐만 아니라, 방사되었던 것들을 역으로 재수집[collecting backwards]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방사란 역방향의 움직임도 갖는 것으로서, ‘빛’이란 ‘되튀어 나오는 생각[thought rebounding]’에 의해, ‘에테르-파장[ether-wave]’ 위로 가 부딪히는 또다른 ‘에테르-파장[ether-wave]’의 충격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것들이 다 ‘투사[projection]’되기만 하다면, 어떠한 ‘투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경우, ‘투사되는 것들’은 비교가 가능한 표준적인 꼴을 갖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생각[thought]’은 ‘투사되는 것’을 파악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에 있어서든, ‘주기와 재주기[cycle and recycle]’에 있어서든, ‘튀어 나오는 것[bounding]’이 없다면, ‘되튀어 나오는 것[rebounding]’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당신의 시각 상에 “빛”처럼 보이는 것이 느껴질 때, 당신은 무엇을 인식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주파수가 에테르적 교란 상태[ether disturbance in frequency]’에 있는 파동 위로 또 다른 파동들이 부딪쳐 나타나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는 태양이라는 진공체 ‘안으로 들어가고’, 또 ‘거기서 나오는’ “생각[Thought]”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진공체 속에 감금되고, 또 거기서 충돌하는[impounding and impacting]’ “생각”으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에테르가 적절히 응고[proper coagulation of ether]되는 가운데, 적절한 페이스[proper pace]에 맞춰, 이러한 과정이 펼쳐질 때 생겨나는 ‘백열(白熱)[incandescence]’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seeing]”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앎[KNOWING]’ 전체가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앎’도 결국은 당신이 “보는” 만큼, 당신이 인식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몇 가지 설명들을 통해 당신은 예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은 에테르적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되돌아 온 ‘역사’를 거꾸로 기록하는 일일 뿐입니다. 모든 것들은 현재 다 존재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다 인식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를 서서히 인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일정 수준 옮겨 간 다음, 이를 ‘변화’라고 부릅니다.---그렇지만, 이는 전혀 ‘변화’가 아닙니다. 변화는 인간의 감각을 무시합니다. 변화는 인간이 꽤나 우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항상 그리고 영구적으로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라고 여겨지는 것은 오직 ‘인식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예언”과 같은 것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는 훨씬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상태라면, 적절한 통로를 찾기가 분명히 더 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실상 인간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각각의 행동을 통해, 그리고 그 행동들 속에서, ‘영광’이 성취되길 “기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빛이고, ‘하나님 자신의 빛의 생각[His Lighted Thought]’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창조의 한가지 표현인, ‘당신’ 역시 빛인 것입니다.---당신이라고 해서, 그리 되어 마땅할 어떤 것을 창조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만약 당신이 못한다면? 그럼 누가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무엇입니까? 왜 당신은 존재합니까? 당신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진실은 무엇입니까? 빛은 무엇입니까? 우주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인류과 당신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모두가 영원한 질문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이 깨어나기만 한다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당신들이 가장 자주 잊고 있는 진실 한가지를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
기도를 할 때, 오직 당신 자신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당신 자신만을 빼고 모두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당신이 그토록 바라고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당신에게 주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인 간직하고 있던 이 비밀을 이제 당신이 알게 되었다면, 당신은 바로 삶의 비밀을 터득한 셈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얻게 되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Gyeorgos Ceres Hatonn ,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74권, “Mysteries Of Radiance Unfolded”, Relative Connections Vol. II., 제 2장, pp. 29-40.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글 수 1,190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왜 존재하는가?/ 당신의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물론, 영혼[SOUL]을 가진 모든 개개인들이 그 답을 찾아야 할 문제들입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표현 상태에 있어서, 오직 ‘영혼이 없는 자들[soulless]’, 혹은 ‘거의 영혼이 없는 자들[near-soulless]’만이 자신들의 삶의 궁극적인 탐구 과정상에 있어서 이러한 의문들을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는 내가 처한 위치에 대해서도, 내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자신의 중심과 축을 잡아주는 “적절한” 영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는 모든 일이 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는 “인간”이라 불리우는 ‘화학적 구성체[mechanical fabrication]’가 아닐 수도 있고, 또는 그 자의 경우, ‘영혼’이 그 사람의 중심이 되는 에너지 형태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단순하게 기능하는 혹은 로보트같은 화학적 개체[mechanical robotic entity]라고 하는 편이 아마 더 맞을 것입니다. 이같은 자들은 인간의 표현 양상 가운데 오직 “육체적인 것”에만 중심이 잡혀진 채로 나아가게 될 뿐이며, 대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어떤 대상, 혹은 “나쁜” 생각에 근거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항상 ‘균형’과 ‘조화’와 ‘평화’와 ‘진실’을 추구합니다.---항상 그렇습니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그리고 하나님의 (공공연한) 현존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살아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신조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웃과 동료들에게 친절할 것이고, 늘 베풀고자 할 것이며, 또 사랑을 표현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베푸는 ‘따뜻함’이 되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는, 자신 속에 내재한 빛의 서광에 따라, 타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비밀스럽게 타인을 학대하지 않을 것입니다.---심지어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도 그리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도’라는 부분을 나는 지금 특히 강조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권능”을 찾으려 할 것인데, 이를 ‘물리적인 힘[the physical force]’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 속에 내재한 힘과 지혜[his inner strength and wisdom]’로부터 이를 구하려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항상 성숙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만큼은, 스스로로 하여금, 창조주의 “인간”[Creator’s “man”]이 갖게 되는,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빛의 “선의”가 스스로에게 모범으로 제시해 주는 행동들을 추구해 나가도록, 늘 종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라고 할지라도 ‘진실’로부터 멀어져 길을 잃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은 늘 자기자신에게 많은 교훈들을 남겨 줄 것이며, 결국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의도[the intent of God] 속으로 다시 되돌아 오도록 유도되어질 것입니다.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그렇더라도 이러한 배움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하나님을 부인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인될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과 우주와의 관계,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영혼이 없는 인간들의 대표적인 특성이 있다면, 그들은 오직 순간적인 “어떤 것들”만을 추구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들은 무력과 기만을 통해서 권력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이러한 행동이 어떤 여파를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개 이 “여파”라는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은 인간의 감각이 갖게 되는 욕구들을 채워나가기 위한 노력 속에서, 악마적인 동물성[the Satanic Beast]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힘의 근원은, 무자비한 명령 속에서, 완력을 통해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인간의 역량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들은 항상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힘[THAT power]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는 진실에 이르는 길[a way to KNOW Truth]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또 무엇이 진실인지[What is Truth]를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그는 또한 ‘균형’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입니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양쪽 모두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러한 교환관계를 반영해 주는 ‘거래’를 맺으려고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종교들과 종교적 교리들이 존재합니다.---그리고 그러한 가르침들 가운데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선[goodness]에 대한 계율들입니다.---그렇지만, 선이란 늘 베일에 가려진 채로 있고, 선를 추구하는 일이란, 마치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짙은 안개 속을 배회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짙은 안개 속에서 선을 찾아 나서는 탐색은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앎[the KNOWING]’이란 바로 ‘그 발견[the FINDING]’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상의 목적은 없습니다. 당신이 알게 되었을 때,---당신은 빛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어둠의 통로 속을 거치는 자신의 탐색 과정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때, 곧 ‘불균형’ 속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렇게 추락하다가도, 균형을 되찾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게 된다면, 그는 이내 균형을 되찾을 것입니다.---그렇지만, 너무나도 자주 인간들은 ‘육체적인 감각들이 내뻗는 손[the offered hand of the physical senses]’을 움켜쥐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가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자신이 구조를 받는데, ‘육체적인 감각의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손 치더라도, ‘아직도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 구조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영혼을 가진 존재들이 행하게 되는, 내면적이고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항상 자신의 “형제들”을 위한 기도이자, 자기 자신의 역량을 위한 기도입니다.---이 역량이란 대단한 물질적인 “어떤 것들”을 달성해 내는데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바로 자신에게 내재한 무한한 빛 속에서,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통로를 감추어, 자신의 눈을 덮고 있는, ‘베일’의 제거를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항상 그와 같은 노력은 있어 왔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의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이 ‘대답되어지지 않은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앎[KNOWING]’ 속에서만이 마침내 알려지고, 또 인식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들은 왔다가 가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순환되는 주기 속에서 진행됩니다.---항상 이러한 주기를 통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매번 주기가 바뀔 때면, 인간은 “존재[beingness]”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며, 이러한 이해는 인류를 보다 고양된 “존재”의 상태로 변모시켜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당신들은 가장 ‘계몽적인 주기들[enlightening cycles]’ 가운데 한 주기에 임해 있습니다.---이는 지금 진행 중인 것입니다.
의식 속에 중심이 잡혀 있는[centered in the consciousness] 인간은 자신의 ‘항존하는 앎[ever-present KNOWING]’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기억하지 못합니다.---그는 순식간에 이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앎[KNOWING]’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다시금 기억해 내기 위한 행위들, 축적된 정보들의 재활성화를 위한 행위들을 새롭게 경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omniscience]와 전재(全在)[omnipresence]와 전능(全能)[omnipotence]은 ‘개개의 인간들이 가진 의식의 중핵 속에[at the very core in every person’s consciousness]’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의 행동을 가이드해 주는 것은 바로 “양심[conscience]”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우주적 자아-영혼과 함께 하는[being WITH the Universal Self-Soul] 존재’로서의 ‘자기자신들의 자아-영혼[their own self-soul]’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경험의 “주기[cycle]”는, 인간을 ‘자아의 근원인 빛과의 하나됨[his ONENESS with the Light of his Self-Source]’에 대한 ‘이해[awareness]’의 가장자리까지 데려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을 ‘인식’ 속에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대개 수많은 천년기들[many millennia]을 보내야 하며, 또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해 내는 데에는, 또다시 거의 같은 정도의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사실상 “결과[EFFECT]”의 세상 속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원인과 결과에 대해 다루었던 어제의 글들을 부디 다시 읽어 보십시오. 당신들의 “세상”은 아직 인간들이 그 원인[CAUSE]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결과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해가, 인간들 전체의 집합 의식 상에서는 이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것을 차단하려고 드는, 마찬가지의 노력들이 또한 동시적으로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거의 무한한 것 같아 보이는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단순한 균형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진실’이 갖는, 많은 각도들과 측면들과 국면들이 그들 간의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때까지, 또한 이들과 인간 자신과의 균형마저도 잃어버리고 말게 될 때까지, 진실을 그저 복잡하게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균형은 간단합니다. 진실도 간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간단한 것 속에 복잡성을 주입해 넣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는 것입니다. 비단 자연 현상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 속에서도, 대칭적인 쌍으로 나타나는 모든 표현들 사이에 있어서, ‘리듬감 있는 방식 속에 전개되는 균형잡힌 상호 교환[balanced interchange in rhythmic measure]’, 바로 이것이야말로,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우주[God’s universe]’가 펼쳐내는 가장 놀라운 걸작품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벽함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 법칙[THE law]’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일의 우주적 법칙[singular Universal LAW] 속에,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God’s “electric” wave universe]’안에 내재한 ‘모든 창조적인 표현들이 갖는 균형잡힌 연속성[the balanced continuity of all creative expression]’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기적” 파동의 우주’란, ‘두가지로 달리 조건지워진 빛들[two conditioned lights]’이 빚어내는 우주이자, ‘창조라는 하나님의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God’s ONE whole Idea of Creation]’을, 이 단일 생각으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셀 수 없이 많이 분리된 조각들이, ‘겉보기에 움직임처럼 보이는[in seeming motion]’ 방식 속에서 저마다 남기게 되는 기록들을 통해, 표현해 내는 우주인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우주가 갖는 “전기적” 특성’ 속에 담긴 의미, 그리고 “쌍을 이루는 표현들”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두가지로 달리 조건지워진 빛들”, “겉보기에 움직임처럼 보이는 것” 기타 등등의 의미들에 대해서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어제 내가 남긴 글들을 부디 다시 참조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같은 표현 방식 속에서, 했던 말들을 또다시 되풀이할만한 시간이나 공간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을, 우리는 이미 앞선 책들에서 다 이야기했었지만, 모두가 금서 조치되고 말았기에, 고스란히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시 다룸에 있어서, 대단히 주의깊은 접근을 해야 할 입장이며,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법정의 뜻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주제를 다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또 동시에 우리는, 저메인[Germain]이 앞서 설명한 내용들과, 지금 내가 다시 설명하는 내용들 간에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지금의 설명이 더 모호하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건 바로,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가해지는 폭력, 협박, 또는 비난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치의 일환으로, 불가피하게 취할 수 밖에 없는 설명 방식으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오직 하나의 진실[ONE Truth]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하나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 길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성격상 순수하게 “물리적인” 사실을 다루는 문제일 경우에는, 바로 그 동일하고 실제적인 하나의 답을 “달리” 표현해 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미 1더하기 1은 2라고 이야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같은 것을 설명하는 데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요? 아마 나는 1/2 + 1/2 + 1/2 + 1/2 = 2라고 말하거나, 혹은 1/4 + 1/4 + ... 기타 등등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같은 주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문제에 있어서, 기존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설명한 것들을 전혀 되풀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1 더하기 1은 2라는 사실을, 내가 달리 설명해 내기란 힘들 것입니다. 어떠한 설명 방식을 취한다손 치더라도 1 + 1은 2와 같다는 사실 혹은 정답을 변경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원성[duality]”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장황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리틀 크로우[Little Crow](1810 -- 1863, 본명 : 타오야테두타[Taoyateduta]. 므데와칸톤 다코다 시우스[Mdewakanton Dakota Sioux] 인디언 부족의 추장. 서부개척 시대, 미네소타 지역에서 백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다코다 전쟁을 이끔---역주)도 동일한 것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고, 나는 그가 한 표현과 설명들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답이 하나인 진실’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서기는 그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리틀 크로우의 설명을 인용하는 것이 금지되어져 있는 세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리틀 크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이원성의 세상---당신은 선을 갖고 있고, 또 그 반대되는 것도 갖고 있다. 창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 마찬가지인 사실이다. 어떻게 아닐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다를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은 모든 창조물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 반대되는 측면들을 갖고 있으며, 부정적인 양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반대되는 양상과 마찬가지의 자유와 풍부함을 가지고 존재한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그 곳보다, 더 성스러운 장소나 덜 성스러운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톤 : 이 같은 이해는, 자신만이 비밀을 간직한 채, 진실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이 ‘앎[KNOWING]’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다른 민족들과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의 참된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침묵의” 목소리
모든 존재물들 속에는 시간을 초월한, 침묵의 목소리[timeless, silent voice]가 내재해 있습니다.---심지어, 식물이나 동물, 기타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식물들 조차도 이 “침묵의 목소리[silent voice]”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목소리가 지시사항들을 전해 주고, 그 식물이 현현해 내게 될 표현을 가이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침묵의 목소리는 결코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들도 항상 제시합니다. 모든 인간들 속에 내재한 침묵의 목소리는 인간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끝없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생겨나는 ‘모든 의문들’은 ‘근원[the Source]’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으로서, 당사자가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인 질문이라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이에 대해 희미한 대답이라도 듣는 사람들의 수는 더 적으며, 정말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도 훨씬 더 적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mind]’이자 자신의 ‘개인적인 자아[personal self]’라고 잘못 알고 있는, ‘전기적으로 조건지워진 감각의 육체[electically conditioned sensing body]’가 갖게 되는 감각들을 통해, 자신의 ‘의식[consciousness]’이 그 ‘근원[Source]’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지내 왔지만, ‘준비의 시대[the ages of preparation]’를 거치면서, 마침내 인간은 내재한 목소리를 깨닫기 시작하고, 또 듣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객관적인” 마음[“objective” mind] 속에는 오직 ‘전기적 감각[electric sensations]’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사고[thinking]”라고 착각하지만, 실상 이것은 오직, 감각된 것들이자, 자신의 두뇌 속 세포 속에 기록된 것들에 대한 “전기적” 지각[“electric” awareness]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바로 “기억[memories]”이라 명명된 기제를 통해 반복적으로 사용될 따름인 것입니다. 마치, 녹음 테이프 속에 뭔가가 녹음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테이프 자체가 녹음된 소리의 근원이 되는 것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듯이, 인간이 갖는 기억의 경우에도, 인간 속에 내재한 ‘우주적 마음이 갖는 지식[knowledge of Universal Mind]’과 인간의 이 ‘기억’ 간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살아 있는” 육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실상 ‘전기적으로 동기화된 기계[electrically motivated machine]’로서(화학적으로 동기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영혼[its centering self-soul]으로부터 육체 쪽으로 확장된 ‘움직임들[motions]’을 통해 삶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전기적으로 동기화되는 것이지, 화학적으로 동기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름답고 귀한 보석과 금속들로 시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시계의 시간이 가도록 만들어 주는 데에는 전기적 힘이 요구되듯이, 화학적 구성 물질들의 조합으로 인간의 육체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 육체를 살아 있게 만들어 주는[COMES ALIVE] 데에는 바로 ‘전기적 자극[electric stimuli]’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시계의 근본적인 목적인 이상, 만약 어떤 시계가 아무리 멋지더라도, 그 시계가 시간을 표시해 줄 수 없다면, 그것이 “시계”로서 어떤 가치를 갖겠습니까? 전력원이 없는 이상, 그 시계는 그저 장식품이나 팔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마음”
인간의 ‘주관적인 마음[subjective mind]’은, ‘자신의 의식[his consciousness]’이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권능을 갖고 있으며, 모든 곳에 존재하는 자신의 영적 저장고[his spiritual storehouse of all-knowing, all-power, and all-presence]’인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의식’이 ‘자신의 자아[his SELF]’이자, 또한 ‘자신의 영구적인 자아[his ETERNAL SELF]’인 셈으로, 이를 통해 자신의 전지(全知)와 전재(全在)와 전능(全能)이 표현되게 되는데, 다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자신 속에 현존해 있음을 알아가게 될 때에 한하여, 그리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전기적으로 진동하는 신경들(전선들)[the electrically oscillating nerves(wires)]’은, 거의 전적으로, 자동적인 반응 양식과 본능적인 통제 수완을 따라 움직이며, 아주 좁은 수준에 있어서만, ‘정신적인 결정[mental decisions]’에 따라 작동하는 것입니다. 육체상의 모든 세포들과 기관들은 저마다의 존재 목적에 대한 ‘전기적 자각상태[electrical awareness]’ 속에 있으며, 그 육체를 점유하고 있는 ‘지능체[the Intelligence]’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작용[mental action]’이 없이도, 자신들의 목적을 원활히 수행해 냅니다. 예를 들어, 심장은 순수하게 자동적으로 뛰는 것입니다. 적혈구들은 신체의 각 부위로 산소를 운반하고, 백혈구들은 신체 내 손상된 부위를 복구하려고 달려들며, 대식세포들[macrophages]은 외부로부터 온 침입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입니다.---이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스위치를 켰을 때만큼이나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기적 기록을 남기는 두뇌[electric recording brain]’를 가진, 단순한 “육체[body]”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 안에서, 그리고 ‘전기적 기록 기능을 갖는 두뇌’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이 “사고하고”, “살아가며”, “경험하고”,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 의식적이며, 자신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의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인간은 설령 “수면”이라 불리는 상태 속에서 감각이 정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 상태 속에서, ‘무의식[unconsciousness]’과 같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손가락을 마취시킨다면 손가락이 ‘무의식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려 하십니까? 그럼 치아는 어떻습니까? 치과의사가 얼마동안 신경을 죽이게 되면, 치아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까? 여기 흥미로운 모순점이 한가지 있다면, 인간은, 치아가 ‘의식적’일 수는 없으며, “육체”도 육체 자체가 ‘의식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의식”이란 결코 잠들지도 않으며,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의식이란, ‘인간의 불멸성[his immortality]’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불멸성’은 인간의 ‘앎’을 표현해 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로 이 ‘의식’이, 인간이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늘 찾고만 있는[unknowingly seeking] 그 ‘빛’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두뇌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서만이 자신이 ‘사고’하고 있는 줄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틀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이제서야 겨우 칠흑 같은 어둠의 황무지로부터 빠져 나오려 하고 있기에,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워 보일 것입니다. 지난 주기들에 걸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성장과정 상에 있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증거로서, 그리고 앎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것들에 대한 증거로서, 감각[sensation]에만 의존해 왔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성장 시퀀스에 있어서, 다 해 봐야 불과 몇 해 안 되는 주기들에 걸쳐서만, 자신들 속에 내재한 ‘영혼[the spirit]’의 존재를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같은 새로운 앎에 대해 너무나 생소하고, 그 최초의 “입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신 속에 내재한, ‘마음’이 무엇인지, ‘의식’은 무엇인지, 그리고 또 ‘감각’은 무엇인지 등을 이해함에 있어서, 모든 것들이 그저 혼동스러울 따름인 것입니다.
육체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자아[centering self]’를 표현해 내는 자기-창조적 메커니즘[self-created mechanisms]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아[self]’란 그 자아와 더불어 ‘하나’인 ‘하나님’[God as One with it]을 현현해 낸다는 사실을, 인간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나아가, 인간은, 육체란 살지도 죽지도 않는 것이며, 오직 ‘마음이 갖는 모든 생각들[all idea of mind]’이 되풀이 되듯,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되풀이될 뿐이라는 사실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퀴를 예로 들기를 좋아합니다. 바퀴는 가장자리가 있고, 살이 있으며,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있습니다. 바퀴가 굴러갈 때, 그 어떤 순간에라도, 바퀴의 가장자리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이 땅에 닿으며, 땅을 ‘느끼고’, 땅을 ‘떠납니다.’ 땅에 닿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이, ‘바퀴의 가장자리’와 ‘바퀴의 살’과 ‘땅’을 서로 연결해 주지만, 그 접촉은 곧 사라집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사라질지언정, 그 똑같은 국면들은 회전의 주기가 계속되는 한, 반복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인간에게 적용되었을 때, 우리는 “한 인간이 태어났고, 살았으며, 그러다가 죽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똑같은 일이 과일에 적용되었을 때, 불꽃에 적용되었을 때, 또는 어떤 한 식물에 적용되었을 때에도, 역시 당신은, “과일이 누군가에게 먹혀서 사라졌고, 불꽃이 꺼졌으며, 식물은 죽어 부식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러한 예를 굳이 드는 이유는, 당신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무가 죽는다거나, “불꽃이 죽는다(꺼진다)”고 할 때의 그 “죽음”의 개념은, 인간의 죽음에서 말하는 “죽음”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가 궁금하십니까? 지금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감각 범위 안에서 생겨나는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의 생각[idea]’이 구성하는 전체 주기 상에서 볼 때에는,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퀴의 땅에 닿는 부분보다 훨씬 더 큰 부분들이 땅에 닿지 않은 채로 있듯이, 그 어떠한 순간에 있어서라도, 주기상의 훨씬 더 큰 부분들은 당신의 감각 범위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퀴가 둥근 원 모양으로 계속 반복되는 주기를 그리는 것처럼, “모든 생각들[ALL IDEA]”이 갖는 주기들의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바퀴만큼이나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과일이든 간에, 그 과일이 갖는 주기의 양성적 절반[positive half]은, 즉 당신 손 안에 쥐어진 상태로 만져볼 수 있는 상태의 과일은, ‘태양과 지구로부터 와 닿는 빛[light reaching from the sun and earth]’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그 과일이 갖는 주기의 음성적 절반[negative half]은, 즉 과일이라는 ‘영구적인 생각[eternal idea]’을 다시금 구현해 내게 될 반복적 재생을 위한 준비 상태 속에 있는 과일은, ‘태양과 지구로 되돌아 가는 빛[light returning to sun and earth]’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불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식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그 밖의 어떠한 것이라도, ‘전체로서 하나인 창조의 생각[ONE WHOLE IDEA OF CREATION]’이 펼쳐내는 창조물들에게는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꽃은 당신의 감각 앞에서는 “사라져 버리지만”, 여전히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식물도, 나무도, 숲도, 산도, 행성도, 저 먼 천체의 성운도,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지만, 분명코 다시 나타납니다. 꼭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간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고 하길 무한한 주기들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며, 인간이 갖는 주기 가운데, ‘육체를 통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시기에 해당하는 구간’의 영원한 반복 속에서, 그 ‘영혼이 갖는 영구적인 삶[eternal life of the spirit]’이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영원[eternity]’이 연속적이듯, ‘인간’도 연속적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볼 수 있는’ 혹은 ‘알 수 있는’ 그러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면, 실은 인간의 육체는 “살지도[live]” 않고, 또 “결코 살았던 적도 없기에[having never lived]”, 분명코 ‘죽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인간의 영혼[the spirit]만이 사는 것입니다. 육체는 단지 그 영혼을 구현해 낼 뿐입니다. 당신이, 인간이 영혼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자신의 의지를 통해 육체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만드는 과정을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육체가 만들어 내는 ‘행위들’은, 그 육체의 ‘중심을 잡고 있는 영혼[centering SOUL]’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들로서, 육체 자체가 동기적인 권능을 가진다거나, 지능을 가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며, 육체는 오직 ‘전지, 전재, 전능한 지성체[omniscient, omnipresent and omnipotent intelligence]’가 육체로 확장됨을 통해 동기화되는 기계일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직 그 이해에 있어 ‘유아기’에 있기 때문이며, 이제야 비로소 ‘빛[LIGHT]’과 ‘근원[SOURCE]’에 대해서 막 알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 근원[THAT Source]’으로부터 온 메신저들이자, 또 당신들보다 앞서 살았던 형제들로서,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진실을 당신들과 함께 공유해야 하는 과업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탐색
인간은, 자신의 ‘육체’라는 ‘황무지’로부터, ‘깨어나는 영혼’의 ‘산꼭대기’에까지 이르는, 이 길고도 고통스러운 행로 속에서, 자신을 가이드해 줄 ‘빛’을 끊임없이 그리고 치열하게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그 빛을 찾고 있으면서도, 그 빛을 발견하게 되면, 이내 다른 존재로 변모되길 영원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항상, 부지런하고 경건한 진실 탐구자에게만이, ‘발견’이라는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빛을 발견하게 되면, 그는 서서히 ‘자기자신의 자아[the Self of himself]’도 더불어 발견하게 되는데, 실은 이 ‘자아’가 바로 빛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가 점점 더 ‘깨어나는 자아[awakening Self]’ 속에 내재한 ‘하나님의 빛[the God-LIGHT]’에 의해 변모되어져 감에 따라, 그는 어둠이 내리 깔린 황무지를 저 아래로 남겨둔 채 그 곳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빛을 찾긴 찾지만, 도저히 이 빛을 발견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낙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빛을 영원히 계속해서 찾아오고 있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빛을 발견했을 때조차도, 단순히 이를 인정하지 못할 뿐입니다.---그리고는 항상 다른 어떤 것을 다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빛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전능(全能)과, 전지(全知)와, 전재(全在)의 빛이 어둠 속에 번뜩이는 섬광처럼, 한 순간에 찾아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산꼭대기에 거의 이르게 된 경우가 아니고서야, 빛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산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바로 그 순간에 조차도, 항상 어디선가 교란자[Interceptor]가 나타나서 ‘앎[KNOWING]’에 이르는 이 마지막 영광의 순간이 허락되지 않도록 방해하며, 그 때 생겨나는 ‘의심들’은 이 자를 다시 방황의 들판 아래로 끄집어 내리는 것입니다. 영혼의 완성을 방해하는 그 같은 교란자는 온갖 형상으로 다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여전히 새롭게 주어지고, 또 황무지가 늘 가까운 곳에 있기에, 한 번에 ‘모든 빛’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해 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황무지를 벗어났던 모든 이들은, 실상 어둠의 궁지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을 밝혀줄 ‘충분한’ 빛을 이미 진작에 발견했던 것입니다.---그들이 단지 그 빛을 따라 계속 나아가기를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황무지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빛을 찾고 있고, 이 ‘탐색 과정’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빛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롭게 변모되어져 또다시 빛을 찾아 나서는 일을 영원히 계속하게 됩니다.
인간은 단 한 순간도, ‘빛으로 조명된 앎[lighted knowing]’에 이르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 내기 위한, 이 탐색 과정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깜빡할 새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저 아래쪽에 있는 어둠이 자신을 다시 어둠의 공포 속으로 몰고가, 그 한 복판에 던져 넣어 버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항상 ‘영감[inspiration]’을 주는 빛이 비춰지는 위쪽을 바라다 보십시오. 바로 그 곳에, ‘두려움을 모르는 전지(全知)의 탐색자들[the fearless all-knowing seekers]’에게 ‘미[beauty]’와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를 안겨다 줄 영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와 ‘균형’과 ‘조화’란 바로 ‘우주적 빛의 순수성[the purity of the Universal Light]’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빛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사람에게 빛은 항상 다가올 것이고, 또 그렇게 빛을 발견하게 된 자는 빛을 통해 새롭게 변모되어지길 영원히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황무지로부터 영광의 산꼭대기까지 이르는 길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에 있는 한은, 어둠이 조금씩 가셔지고 주위는 점점 더 밝아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올라가는 길은 항상 영광의 길이 될 것이며, 모든 이들은 제각각 이 ‘등반의 여정’을 수행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도와 줄 수는 있습니다.---그러나 아무도 남을 대신해서 이 등반을 수행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어둠으로부터 빛을 향해 나아가는 등반의 여정은, 물리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각각의 태양들과 그 태양들이 보유한 행성들 위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반복되는 연극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인류가 다 빛을 발견하게 될 경우, 이 연극은 단순히 종료되어 버립니다. 그와 동시에 그 행성은 인간의 거주지로서의 공간이기를 끝맺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행성 위에 세워졌던 무대들은 철거되고, 해당 행성은 팽창적인 궤도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는 반면, 주어진 태양계 안의 또 다른 행성 위에, 상승을 위한 인간들의 연극을 재상연하기 위한 무대가 새롭게 갖춰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극 배우들인 우리들 모두는, 전체 연극의 스토리 라인 상에서, 조명(빛)과 더불어 점차 드러나게 되는, 우리들 각각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계속적으로 주기가 바뀜에 따라 변화되는 역할들에 기쁜 마음으로 임해야 하며, 막과 막이 바뀔 때마다 자신의 역할들을 더 잘 이해하고, 보다 가치롭게 이를 수행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연극이 상연되게 되면, 무대 위의 모든 배우들은 ‘경험’이라는 연기를 펼쳐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모든 경험들이 이 연극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경험들이란, 결국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저마다의 여행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경험들은 영광의 산꼭대기로 향하는 이 경이로운 여행에 있어서 각자각자가 내딛는 ‘걸음과 걸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경험들은 “좋은” 경험들입니다. ‘악’도 “좋은” 것으로 표현되는 경험의 한가지로 변모되어져야 합니다.---그 때 악,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연극에는 오직 ‘삶’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죽음은 거기 없습니다. AHO.
그런데, 빛으로 향하는 여정에 있어서 그 방향을 찾으려는 시도의 한가지로서, “예언”에 관한 논의가 종종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언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해하게 된 바에 대해 확신을 못 가지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항상, 자신의 여행에서 자기가 이해한 것에, 확신을 더해 줄 수 있는 스승들이나 기록들을 찾곤 합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사항들을 자기가 ‘기억[remembering]’해 내는 데에 있어서, 예언이 자기를 일깨워 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희망에 부풀어, 그러한 예언이 감춰진 빛을 드러내어 자신 앞에 그 빛이 펼쳐지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그런데 실은 그 반대입니다.
잠깐 태양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태양은 ‘그 정수 속에서[in its very essence]’ 빛을 형성하고, 또 빛을 쏟아 내는 거대한 에테르적 진공체[a great etheric vacuum]로서, 눈으로 관찰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진동 수준’이 충분히 높은 상태에 있다면, 그는 문자 그대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태양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놀랍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왠지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 그러한 것을 경험할 정도의 수준으로부터, 다시 말해, 산의 최정상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그런 깨달음의 수준으로부터, 당신 자신이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러한 영광의 경험을 성취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지껏 당신에게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왔던 것입니다. 실상 이것은 무슨 신비한 마술 같은 것이 아니라, ‘우주 법칙의 물리학[physics of Universal LAW]’일 뿐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태양과 같은 에테르적 진공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바로 거기서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이 그 근원으로부터, 역으로 반영된 것들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행동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미래란 그 성취가 보류된 현재인 것입니다.---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태양은 해당 태양계 안의 모든 행성들 위에 발생하는 우주적 사건들에 있어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와 같은 태양은 ‘방사[radiating]’뿐만 아니라, 방사되었던 것들을 역으로 재수집[collecting backwards]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방사란 역방향의 움직임도 갖는 것으로서, ‘빛’이란 ‘되튀어 나오는 생각[thought rebounding]’에 의해, ‘에테르-파장[ether-wave]’ 위로 가 부딪히는 또다른 ‘에테르-파장[ether-wave]’의 충격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것들이 다 ‘투사[projection]’되기만 하다면, 어떠한 ‘투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경우, ‘투사되는 것들’은 비교가 가능한 표준적인 꼴을 갖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생각[thought]’은 ‘투사되는 것’을 파악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원인과 결과[cause and effect]’에 있어서든, ‘주기와 재주기[cycle and recycle]’에 있어서든, ‘튀어 나오는 것[bounding]’이 없다면, ‘되튀어 나오는 것[rebounding]’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당신의 시각 상에 “빛”처럼 보이는 것이 느껴질 때, 당신은 무엇을 인식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주파수가 에테르적 교란 상태[ether disturbance in frequency]’에 있는 파동 위로 또 다른 파동들이 부딪쳐 나타나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는 태양이라는 진공체 ‘안으로 들어가고’, 또 ‘거기서 나오는’ “생각[Thought]”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진공체 속에 감금되고, 또 거기서 충돌하는[impounding and impacting]’ “생각”으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에테르가 적절히 응고[proper coagulation of ether]되는 가운데, 적절한 페이스[proper pace]에 맞춰, 이러한 과정이 펼쳐질 때 생겨나는 ‘백열(白熱)[incandescence]’과 더불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seeing]”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앎[KNOWING]’ 전체가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앎’도 결국은 당신이 “보는” 만큼, 당신이 인식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몇 가지 설명들을 통해 당신은 예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은 에테르적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되돌아 온 ‘역사’를 거꾸로 기록하는 일일 뿐입니다. 모든 것들은 현재 다 존재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다 인식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를 서서히 인식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일정 수준 옮겨 간 다음, 이를 ‘변화’라고 부릅니다.---그렇지만, 이는 전혀 ‘변화’가 아닙니다. 변화는 인간의 감각을 무시합니다. 변화는 인간이 꽤나 우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항상 그리고 영구적으로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라고 여겨지는 것은 오직 ‘인식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예언”과 같은 것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는 훨씬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미리 준비되어 있는 상태라면, 적절한 통로를 찾기가 분명히 더 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실상 인간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각각의 행동을 통해, 그리고 그 행동들 속에서, ‘영광’이 성취되길 “기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빛이고, ‘하나님 자신의 빛의 생각[His Lighted Thought]’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창조의 한가지 표현인, ‘당신’ 역시 빛인 것입니다.---당신이라고 해서, 그리 되어 마땅할 어떤 것을 창조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만약 당신이 못한다면? 그럼 누가 한단 말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무엇입니까? 왜 당신은 존재합니까? 당신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진실은 무엇입니까? 빛은 무엇입니까? 우주와 당신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인류과 당신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이 모두가 영원한 질문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이 깨어나기만 한다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나는 당신들이 가장 자주 잊고 있는 진실 한가지를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
기도를 할 때, 오직 당신 자신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그렇게 당신 자신만을 빼고 모두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그렇게 할 때에만, 당신이 그토록 바라고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당신에게 주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인 간직하고 있던 이 비밀을 이제 당신이 알게 되었다면, 당신은 바로 삶의 비밀을 터득한 셈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얻게 되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Gyeorgos Ceres Hatonn ,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74권, “Mysteries Of Radiance Unfolded”, Relative Connections Vol. II., 제 2장, pp.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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