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가 그리 말한것은 그것이 진리에 기초한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번뇌와 괴로움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그런것이 아니요. 좀 괴롭고 힘들면 어떻소? 거기서도 배워가는게 있소.
진리에 기초한 번놔와 괴로움은 의로운것이며 아름다운것이요.
무신론자들 불신자들 눈에 보이는 것외엔 믿지 못하겠 다는 불가지론자들 이것이 님들의 정체요. 님들은 불도 수행자들이 아니요.
믿음에 대한 용기가 없음. 우리 사는 지구와 공동 사회에 대한 무관심
자신의 불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 혹은 사회적 협력이나 일에 대해 귀찮아하는 것을 그럴듯한 불교식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지 말아야 할것이오. 혼자서 가는 수행이란 없는 것이요.
내 깨달은바 상위차원과 실질적 접촉이 없는, 저희들끼리만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는 저 좋아라 하는 저희들끼리만의 취미이지, 남주는 것이 아니오.'인간 능력의 무한한 확장'이라? 그것은 위(상위차원)로도 아래로도(삶) 출구가 없는 것이요. 단지 저 좋아서 하는 남들하고는 상관없는 저희들끼리의 비즈니스 사업이며 취미에 불과하오.
그것은 삼차원에서 무의 경지를 흉내낸것에 불과하며, 실질적 영혼 시스템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지는 못한다오.그들은 죽어서 다시 영혼을 만나고 윤회를 해야 하는 것이오. 죽음을 초월하는 것(승천-해탈-니르바나)이 진짜 수행이요. 이것은 실질적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오.
진정한 수행은 괴로움이든 고통이든 쾌이든 기쁨이든 삶 자체를 포용하고 남과 더불어함께 살아가는 일에서 배움을 얻는 것이 본류이며.
정신계는 하나의 우주요 조직이요 사회요. 사회를 위한 일이 되어 야 하오. 이것이 실질적 시스템이요.
일상에서 얻는 작은 것들을 통해서 배움이 더 크오. 여러분들이 기쁘든 슬프든 눈물을 일상의 작은 것으로부터 흘리고 감동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면 이런 본류로부터 큰 배움을 얻지 못할 것이요.
그것은 각 존재에게 생명을 주는 영혼을 존중하고 '희생의 사랑'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오.
생명의 근원이 되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냉동인간에 불과한것이요. 자연에 대한 경외심조차 없는 것이요. 근원 뿌리와 삶들의 연결고리인 그 사람이나 생명체의 영혼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사람과 생명체와 그들의 삶을 사랑한다고 할수 있겠소?
여러분들은 내부로의 침잠과 수행하는 이유가 외부세계를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책임을 모면하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조차 지기 싫어하여 이름있는 권위있는 유명하다는 수행을 찾고 체계를 찾고 스승을 찾고 집단을 찾고 종교를 찾고 거기로 숨어들어가 존재로서의 개인 책임을 전가하려 하오. 그 모두는 자기에서 떠난 권력 추앙에 지나지 않는다오. 그것은 이기적인 호사이고 취미인 것이오. 개인 그릇수준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소.
당신들은 지구에 빚을 지고 있소.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남을려 하오?
진정한 수행은 손에 쥔 차 숟갈에 담긴 물(근원)을 한방울도 떨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외부세계와 풍경이 무엇이 있나 하나 하나 관심을 두고 기억하고 들여다 보기 위해 걷는 일이라고 하오. 그 둘다 동시에 중요한것이요.
전자는 근원이며 후자는 그 근원이 바로 원하는 바 근원의 뜻이기 때문이요. 근원을 사랑한다면서 근원이 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사랑도 봉사(삶 그 자체)도 하지 않는 자들이 많소. 이런것은 정작 아버지가 하는 일은 깊이 사랑하지 않고 그 뜻을 이어받지도 않고 내려 받지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아버지 굵은 팔둑에만 매달리려는 어린애처러 미숙한 것이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가 실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아는 일 그것이 니르바나요. 예전에 경전에서 나오는 구름위에 앉어 있는 신들이 오늘날엔 '외계생명체'나 영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것이 깨달음이요. 그것은 그 나름(차원-밀도-진동수준)에서 물질이며 실질적인것이요.비물질적인것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세계란 없소. 가만히 앉어서 하는 공사상 무아론이란 화재 현장에서 아이를 구해 내오는 소방관이 하는 일 만큼이나 스스로(근원에) 배움을 주지도 얻지도 못한다오. 저희끼리의 취미 생활도 못한 것이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떤가...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 그러저럭 사는 일이 '중용'이 아니요. 그런것으로 자기를 위장하지 마시오. 그것은 자기 책임을 스스로 지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되어 앞에 나오는 것을(재탄생) 두려워하는 일에 불과하오. 그럴만한 용기있는 자가 어디에 있소? 중용은 일을 함에 필요한 도구일뿐이요 이성적인 것이요. 당신의 가슴들은 뜨거워야 하는 것이요. 인간의 가슴으로. 휴머니즘으로.
인간이 무생물이나 무기물이 되는 것이 부처요 진리라고 보면 오산이요.
각자 그 고유의 목적을 가지고 근원으로부터 나온 인간과 동물인데, 사랑은 서로의 각자 자리를 존중하며 서로의 영역을 넘보지 않소. 그것이 신(근원)에 대한 경배이고 존중이기 때문이요. 인간의 영혼이 동물로 태어나고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하는 혼돈과 질서가 자비가 아니라는 것이요. 그것은 짐승의 피의 제사를 올리는 것과 같은 부정하고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며, 그것이 나(자아)를 없애는 것이나 겸손과 평등이니 진리라고 알고 있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무지한 어리석음과 위선이라오.
겸손과 사랑과 희생과 생명은 진리와 동의어요.
그것은 행동이지, 저 하나 관심을 두지 않는 일, 편의주의가 아니라오.
진정한 수행은 괴로움이든 고통이든 쾌이든 이성으로는 분별하되, 마인드로는 포용력을 갖추는 일 둘다인 것이요. 분별과 포용력이 혼잡을 일으킬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을 더 잘 도모하기 위한 전략일뿐이기에, 일을 할때는 마인드와는 다르기 때문이요.
골든네라
- 2010.01.22
- 16:50:22
- (*.34.108.80)
베릭
- 2010.01.24
- 21:22:40
- (*.100.91.102)
쓴소리... ] / 골든네라 2010.01.21
부처가 그리 말한것은 그것이 진리에 기초한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번뇌와 괴로움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그런것이 아니요.
좀 괴롭고 힘들면 어떻소? 거기서도 배워가는게 있소.
진리에 기초한 번놔와 괴로움은 의로운것이며 아름다운것이요.
무신론자들 불신자들 눈에 보이는 것외엔 믿지 못하겠 다는 불가지론자들
이것이 님들의 정체요. 님들은 불도 수행자들이 아니요.
믿음에 대한 용기가 없음. 우리 사는 지구와 공동 사회에 대한 무관심
자신의 불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 혹은 사회적 협력이나 일에 대해 귀찮아하는 것을
그럴듯한 불교식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지 말아야 할것이오. 혼자서 가는 수행이란 없는 것이요.
내 깨달은바 상위차원과 실질적 접촉이 없는, 저희들끼리만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는
저 좋아라 하는 저희들끼리만의 취미이지, 남주는 것이 아니오.
'인간 능력의 무한한 확장'이라? 그것은 위(상위차원)로도 아래로도(삶) 출구가 없는 것이요.
단지 저 좋아서 하는 남들하고는 상관없는 저희들끼리의 비즈니스 사업이며 취미에 불과하오.
그것은 삼차원에서 무의 경지를 흉내낸것에 불과하며, 실질적 영혼 시스템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지는 못한다오. 그들은 죽어서 다시 영혼을 만나고 윤회를 해야 하는 것이오.
죽음을 초월하는 것(승천-해탈-니르바나)이 진짜 수행이요. 이것은 실질적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오.
진정한 수행은 괴로움이든 고통이든 쾌이든 기쁨이든 삶 자체를 포용하고
남과 더불어함께 살아가는 일에서 배움을 얻는 것이 본류이며.
정신계는 하나의 우주요 조직이요 사회요. 사회를 위한 일이 되어 야 하오. 이것이 실질적 시스템이요.
일상에서 얻는 작은 것들을 통해서 배움이 더 크오.
여러분들이 기쁘든 슬프든 눈물을 일상의 작은 것으로부터 흘리고 감동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면
이런 본류로부터 큰 배움을 얻지 못할 것이요.
그것은 각 존재에게 생명을 주는 영혼을 존중하고 '희생의 사랑'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오.
생명의 근원이 되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냉동인간에 불과한것이요.
자연에 대한 경외심조차 없는 것이요.
근원 뿌리와 삶들의 연결고리인 그 사람이나 생명체의 영혼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사람과 생명체와 그들의 삶을 사랑한다고 할수 있겠소?
여러분들은 내부로의 침잠과 수행하는 이유가
외부세계를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책임을 모면하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조차 지기 싫어하여 이름있는 권위있는 유명하다는 수행을 찾고 체계를 찾고
스승을 찾고 집단을 찾고 종교를 찾고 거기로 숨어들어가 존재로서의 개인 책임을 전가하려 하오.
그 모두는 자기에서 떠난 권력 추앙에 지나지 않는다오.
그것은 이기적인 호사이고 취미인 것이오. 개인 그릇수준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소.
당신들은 지구에 빚을 지고 있소.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남을려 하오?
진정한 수행은 손에 쥔 차 숟갈에 담긴 물(근원)을 한방울도 떨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외부세계와 풍경이 무엇이 있나
하나 하나 관심을 두고 기억하고 들여다 보기 위해 걷는 일이라고 하오. 그 둘다 동시에 중요한것이요.
전자는 근원이며 후자는 그 근원이 바로 원하는 바 근원의 뜻이기 때문이요.
근원을 사랑한다면서 근원이 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사랑도 봉사(삶 그 자체)도 하지 않는 자들이 많소.
이런것은 정작 아버지가 하는 일은 깊이 사랑하지 않고 그 뜻을 이어받지도 않고 내려 받지 않고
보존하지도 않으면서 아버지 굵은 팔둑에만 매달리려는 어린애처러 미숙한 것이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가 실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아는 일 그것이 니르바나요.
예전에 경전에서 나오는 구름위에 앉어 있는 신들이 오늘날엔 '외계생명체'나 영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것이 깨달음이요.
그것은 그 나름(차원-밀도-진동수준)에서 물질이며 실질적인것이요.
비물질적인것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이상학적인 세계란 없소.
가만히 앉어서 하는 공사상 무아론이란 화재 현장에서 아이를 구해 내오는 소방관이 하는 일 만큼이나 스스로(근원에) 배움을 주지도 얻지도 못한다오. 저희끼리의 취미 생활도 못한 것이요.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떤가...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 그러저럭 사는 일이 '중용'이 아니요.
그런것으로 자기를 위장하지 마시오. 그것은 자기 책임을 스스로 지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되어 앞에 나오는 것을(재탄생) 두려워하는 일에 불과하오.
그럴만한 용기있는 자가 어디에 있소? 중용은 일을 함에 필요한 도구일뿐이요 이성적인 것이요.
당신의 가슴들은 뜨거워야 하는 것이요. 인간의 가슴으로. 휴머니즘으로.
인간이 무생물이나 무기물이 되는 것이 부처요 진리라고 보면 오산이요.
각자 그 고유의 목적을 가지고 근원으로부터 나온 인간과 동물인데,
사랑은 서로의 각자 자리를 존중하며 서로의 영역을 넘보지 않소.
그것이 신(근원)에 대한 경배이고 존중이기 때문이요.
인간의 영혼이 동물로 태어나고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하는 혼돈과 질서가 자비가 아니라는 것이요. 그것은 짐승의 피의 제사를 올리는 것과 같은 부정하고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며,
그것이 나(자아)를 없애는 것이나 겸손과 평등이니 진리라고 알고 있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무지한 어리석음과 위선이라오.
겸손과 사랑과 희생과 생명은 진리와 동의어요.
그것은 행동이지, 저 하나 관심을 두지 않는 일, 편의주의가 아니라오.
진정한 수행은
괴로움이든 고통이든 쾌이든 이성으로는 분별하되, 마인드로는 포용력을 갖추는 일 둘다인 것이요.
분별과 포용력이 혼잡을 일으킬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을 더 잘 도모하기 위한 전략일뿐이기에, 일을 할때는 마인드와는 다르기 때문이요.
.
=이것에 반대하는 분은 없습니다..
=방법론<걸어온 인생행로>이 제각각 달랐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