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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즉신성불이라 합니다.
일본에서는 즉신성불을 위해 몸 자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자살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미스터리를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바 있는 이 수행은
행자가 곡기를 서서히 끊어가면서 나무껍질과 식물을 먹으면서 몸의 지방과 단백질을 제거해 갑니다.
그리고 구덩이나 탑 안에 들어가서 몇날 며칠을 염불하다가 굶어죽는(?) 수행(?)을 합니다.
그러면 미이라 모양의 시체가 되는데 그것에 가사를 입혀놓고 즉신불이라 말합니다.
공해대사가 그런 수행을 주장했을리 없습니다.
일본의 불교계는 후대에 이르러 즉신성불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한 것일 뿐...
세포 하나하나는 세포의 기능이 있고 기능을 총족시키는 감각이 주어져야 자신의 몫을 다합니다.
이 세포 하나하나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세포의 의지...그것은 에너지이며 동시에 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파동인 것입니다.
미세자아....그것은 세포 수준에서도 있는 것입니다.
이 미세자아의 떨림을 뇌가 갖고 있는 수행적 관념으로 억제하고 말려죽이는 것이
일본의 즉신성불의 수행인 것입니다.
뇌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작용으로 세포 수준의 미세자아를 억압해서 세포들에게 독재정치를 하는 것!!
결국 나중에서야 세포 차원의 해원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즉신성불은
정신으로 내 몸을 독재정치하듯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신이 원하는 해탈상태로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포 하나하나에서 대자유를 얻게 하는 것.
미세자아들의 대합창이 바로 진정한 즉신성불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나는 에너지의 파동이며 찰나적 에너지의 연속체를 그냥 묶어서 편의상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찰나적 연속체의 파장이고 외부 에너지에 영향 받는 '개방체계'이기도 하고
신명의 파동이 곧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퇴행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강증산의 신명이기도 했는데 전생퇴행시 강증산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강증산의 신명이 강증산 개인의 인격의 일부로서...어쩌면 강증산 자아의 그림자 혹은 분신으로서 존재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파장의 연속체이자 미세자아들이 스크린 위에 떠오른 바다입니다.
수많은 물 분자들이 바다를 이루듯
자아의 속성을 지닌 분자들이 의식의 스크린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는 자아의 속성을 가졌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불교의 오온설과 유사해집니다. 오온설은 입자 하나마다 자성(자기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용수보살이 대표격인 중관학파에 의해 맹공격을 받은 불교 학설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입자로 환원시킨 것이기에 미세자아라는 말은 언어가 곧 실상인 이 현실세계에서는 과도한 표현인 것입니다.
나를 입자로 환원시켜 작은 나들이 모여 큰 나를 이룬다는 오온설은 에고를 쪼개어 에고로 이루어진 자의식을 말함입니다.
그러나 결론으로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파장이자 미세자아들의 집합이나 고정체계 내에서의 실체는 아닙니다.
우주와 숨쉬고 교감하기에 곧 우주의 총합이자 우주 자체인 파동인 것입니다.
오온설은 나라는 존재를 나누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나눈 것에 실체성을 부여하고 외부와 고립된 고립체계의 자아를 만든 것이 단점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자아는 실체의 모습을 띈 모두인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불교에서는 무아설을 말하곤 하는데 무아설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상하기에 무아이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며 내가 있다고 하면 내가 있다고 하는 분별에서 기인하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늘 변하는 찰나적인 존재이기에 무상한 것이기에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 안의 수많은 '나들'-분노하는 나, 짜증나는 나, 평안한 나, 기뻐하는 나
은 특정의 에너지 파형이며 카르마가 풀린다거나 해원의 과정을 통해 이 나들의 에너지 파형이 점점 가라앉게 됩니다. 전생부터 쭈욱 만들어온 '나'들의 에너지들..즉 캐릭터의 에너지들이 잠재워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저는 수행이라는 관념에 절은 사람을 수행꾼이라 부릅니다. 그 수행자가 이들 나들의 에너지를 모두 풀어내지 않았다면 경력 20년의 삼매의 힘으로 나들을 억압해낸 것에 성공했을 뿐입니다.
수행경력 20년은 윤회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강한 캐릭터를 만든 것이지 이전부터 삶 속에서 축적한 '나'들의 에너지를 풀어내지 못함입니다.
워크인....신명......복합령.....미세자아들.....
등등의 이름으로 우리의 의식체에는 여러 존재들이 거하고 있습니다.
의식체는 정류장과 같아서 우리의 영적 각성을 통해 많은 존재들이 해탈하고 있습니다.
ooo이라는 운동장에 여러 존재들이 어울려 놀고 있고 자신들의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존재가 얻을 정보는 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나 매일 먹는 물들도
우리의 몸을 거쳐 나오게 되면 자각을 하고서 나옵니다.
물과 공기 역시 생명의 또다른 형태이기에 그들도 우리의 에너지체(육신이라는 에너지체)를 통해 자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존재성은 그러하기에 어디에 '나'라고 규정지을 것 없는 것입니다.
공기와 물과 집안의 기운과 매일 먹는 음식에 특정의 에너지 파형인 '나'들을 구성하는 에너지들이 있기에 모두가 '나'의 기운인 것입니다....
지금 글을너지 파형인 '나'들을 구성하는 에너지들이 있기에 모두가 '나'의 기운인 것입니다....
지금 글을 적으면서 대행스님이 생각났습니다.
대행스님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네요...사실 위의 내용은 제가 자각한 것이지 책을 보고서 짜낸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선배님들 중 어느 분이 저와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을 상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행스님은 주인공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
일본에서는 즉신성불을 위해 몸 자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자살하는 수행이 있습니다.
미스터리를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바 있는 이 수행은
행자가 곡기를 서서히 끊어가면서 나무껍질과 식물을 먹으면서 몸의 지방과 단백질을 제거해 갑니다.
그리고 구덩이나 탑 안에 들어가서 몇날 며칠을 염불하다가 굶어죽는(?) 수행(?)을 합니다.
그러면 미이라 모양의 시체가 되는데 그것에 가사를 입혀놓고 즉신불이라 말합니다.
공해대사가 그런 수행을 주장했을리 없습니다.
일본의 불교계는 후대에 이르러 즉신성불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한 것일 뿐...
세포 하나하나는 세포의 기능이 있고 기능을 총족시키는 감각이 주어져야 자신의 몫을 다합니다.
이 세포 하나하나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세포의 의지...그것은 에너지이며 동시에 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파동인 것입니다.
미세자아....그것은 세포 수준에서도 있는 것입니다.
이 미세자아의 떨림을 뇌가 갖고 있는 수행적 관념으로 억제하고 말려죽이는 것이
일본의 즉신성불의 수행인 것입니다.
뇌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작용으로 세포 수준의 미세자아를 억압해서 세포들에게 독재정치를 하는 것!!
결국 나중에서야 세포 차원의 해원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즉신성불은
정신으로 내 몸을 독재정치하듯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신이 원하는 해탈상태로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포 하나하나에서 대자유를 얻게 하는 것.
미세자아들의 대합창이 바로 진정한 즉신성불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나는 에너지의 파동이며 찰나적 에너지의 연속체를 그냥 묶어서 편의상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찰나적 연속체의 파장이고 외부 에너지에 영향 받는 '개방체계'이기도 하고
신명의 파동이 곧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퇴행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강증산의 신명이기도 했는데 전생퇴행시 강증산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강증산의 신명이 강증산 개인의 인격의 일부로서...어쩌면 강증산 자아의 그림자 혹은 분신으로서 존재했다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파장의 연속체이자 미세자아들이 스크린 위에 떠오른 바다입니다.
수많은 물 분자들이 바다를 이루듯
자아의 속성을 지닌 분자들이 의식의 스크린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는 자아의 속성을 가졌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불교의 오온설과 유사해집니다. 오온설은 입자 하나마다 자성(자기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용수보살이 대표격인 중관학파에 의해 맹공격을 받은 불교 학설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입자로 환원시킨 것이기에 미세자아라는 말은 언어가 곧 실상인 이 현실세계에서는 과도한 표현인 것입니다.
나를 입자로 환원시켜 작은 나들이 모여 큰 나를 이룬다는 오온설은 에고를 쪼개어 에고로 이루어진 자의식을 말함입니다.
그러나 결론으로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파장이자 미세자아들의 집합이나 고정체계 내에서의 실체는 아닙니다.
우주와 숨쉬고 교감하기에 곧 우주의 총합이자 우주 자체인 파동인 것입니다.
오온설은 나라는 존재를 나누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나눈 것에 실체성을 부여하고 외부와 고립된 고립체계의 자아를 만든 것이 단점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자아는 실체의 모습을 띈 모두인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불교에서는 무아설을 말하곤 하는데 무아설은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상하기에 무아이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며 내가 있다고 하면 내가 있다고 하는 분별에서 기인하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늘 변하는 찰나적인 존재이기에 무상한 것이기에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우리 안의 수많은 '나들'-분노하는 나, 짜증나는 나, 평안한 나, 기뻐하는 나
은 특정의 에너지 파형이며 카르마가 풀린다거나 해원의 과정을 통해 이 나들의 에너지 파형이 점점 가라앉게 됩니다. 전생부터 쭈욱 만들어온 '나'들의 에너지들..즉 캐릭터의 에너지들이 잠재워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저는 수행이라는 관념에 절은 사람을 수행꾼이라 부릅니다. 그 수행자가 이들 나들의 에너지를 모두 풀어내지 않았다면 경력 20년의 삼매의 힘으로 나들을 억압해낸 것에 성공했을 뿐입니다.
수행경력 20년은 윤회의 과정에서 또 하나의 강한 캐릭터를 만든 것이지 이전부터 삶 속에서 축적한 '나'들의 에너지를 풀어내지 못함입니다.
워크인....신명......복합령.....미세자아들.....
등등의 이름으로 우리의 의식체에는 여러 존재들이 거하고 있습니다.
의식체는 정류장과 같아서 우리의 영적 각성을 통해 많은 존재들이 해탈하고 있습니다.
ooo이라는 운동장에 여러 존재들이 어울려 놀고 있고 자신들의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존재가 얻을 정보는 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나 매일 먹는 물들도
우리의 몸을 거쳐 나오게 되면 자각을 하고서 나옵니다.
물과 공기 역시 생명의 또다른 형태이기에 그들도 우리의 에너지체(육신이라는 에너지체)를 통해 자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존재성은 그러하기에 어디에 '나'라고 규정지을 것 없는 것입니다.
공기와 물과 집안의 기운과 매일 먹는 음식에 특정의 에너지 파형인 '나'들을 구성하는 에너지들이 있기에 모두가 '나'의 기운인 것입니다....
지금 글을너지 파형인 '나'들을 구성하는 에너지들이 있기에 모두가 '나'의 기운인 것입니다....
지금 글을 적으면서 대행스님이 생각났습니다.
대행스님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네요...사실 위의 내용은 제가 자각한 것이지 책을 보고서 짜낸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선배님들 중 어느 분이 저와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을 상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행스님은 주인공 이야기를 많이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