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전님이 읽을 꺼리를 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저는 본래 성격이 호기심 강하고 정신분석학자 C.G.융 처럼 내향성이면서 조용하면서 순진한 스타일이었지만, 이런 영성계 활동하면서도 뭐라도 집중해야 하루의 삶이 정리 되지 않겠습니까.
수년전부터 성에 대해서도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성적인 상상이나 생각 성적인 반응이 사라지는 것은 그동안 영성과학적 세포수준에서 기억이 지워지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단순히 물질적으로 보면 습관성이 체질이 변해 남성호르몬 테스테론치가 생성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래는 의학적으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면 성인병의 원인중 일부가 있기도 합니다.
감정도 둘숙날숙 하지 않고 차분하고 고요한 것에 더 발달되어 보입니다. 반대로는 퇴화 된다가 되겠지요. 기쁘고 슬프고 재미있고 게롭고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창피하고 열정 행복 호기심 감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반응 몇칠전에 누구간 영성인중 '중립적인 내면의 상태'라는 언급을 통해 자신이 지금 그 상태에 놓여있다고 놀라 합니다. 나보다 표면적으로 들어나는 영적인 힘은 비교 않될만큼 탁월한 분이 생소한 무심 감정반응에 놀라합니다. 그반응이 지금 저는 일상적으로 수년전 부터 점점 무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행쪽에 언급한 어떤 성질의 경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식용도 왕성하지 않고 하루 한끼나 한끼 반으로 살지만, 요세 기력이 부족하지만, 몸도 좀 피고한고 아래는 몸이 氣력이 없는듯 상태가 등쪽이 그런데 5톤트럭이 밧데리가 방전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 입니다. 고물상 사장이 차를 불러 시동을 걸었지만, 또 방전되었습니다. 또 결국은 밧데리를 새로 교체하였습니다. 신문 나르다가 맨몸으로 이동중 왼쪽 발목이 삐끗했습니다. 다행이 부상은 없지만, 그날 5톤 트럭이 사장이 고철 실다가 뒤부분 우측 받침대가 않에 부품이 뿌러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주위에 나와 연관되 사물들이 말할 수 없는 동시성 현상이 발생 합니다. 아무튼 나는 뭔가 이상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진분홍 글 김경호 검정 글을 읽으신분은 분홍글만 취득하시면 됩니다. 사실상 우리가 깨달음의 天道 세계에 가고 있지만, 저의 반생을 통한 자각은 깨달는 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인지도 그렇게 좋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쩔 수 없는 행보 본래로 돌아가는 여정은 그 길밖에 없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에 수조년을 반복하던 그 높은 세계에 출입하던 두가지 길중 선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가 아닌 순수한 혹은 무심 감정없는 판단 입니다.
윤회의 개념이나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경우,세속적인 인간들은 대부분 <지금 좋은 일 해서 나중에 좋은 곳에 태어나야지>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이 좋은 <곳>이라는 게 최근 10년 사이에 크게 확장되었다.
에오는 철학자로 타고난 인물 같습니다. 저는 물질적인 이 세계에 모든 놀이가 한정된 제한적인 공간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단순하다고 하는 세계로 인식 합니다. '관음부처 칭하이 무상사'님의 글을 전체 다 설렵하지 않아지만, 이분 글과 관련없는 다른 이재까지 보아온 영적인 길에 대해 습득한 주제로 다시 저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저의 이해에는 우리는 태초 창조의 과정이 발생하면서 본래 부처였으며 우리 존재는 창조된 세계에 우리가 축복을 주고 풍요를 주다가 우리가 그곳에 빠져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이 묶여 있다가 윤회를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체로써 동일인이었지만, 깨달은 존재들로 거듭나는 존재들은 단일 하면서도 제각각 특질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태초에 없던 습이 새로운 습으로 거듭나고 부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저 세상을 추상적으로 말하기가 상당히 아직 골란 합니다. 우리는 물질 시간으로 수 조년을 삶을 통해 배우고 깨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저의 생각으로 어떻게 보면 3계와 100세계 넘어 모든 풀어진 암호를 삶과 생을 통해 재복습하는 과정 같아 보입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할때 태초의 100암호를 알필요는 없고 단지 10암호를 배우고 앎을 통해 알아도 그곳으로 여전히 복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질적인 시간으로는 기나긴 세월동안 만물이 순환을 통해 배워 긍극에 깨우쳐 부처나 크라이스트가 됩니다. 근본 무극 정지된 세계 이외 환상 창조는 어쪄면 신성한 목적이 기반하여 창조되었으리라 예상 합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인식하는 느낌으로 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4살 유아기때 나와 우주 만물에 대해 상실감을 가진 암울하면서도 정적인 호기심으로 부터 절대 알수 없는 진리에 대해 생각해왔습니다. 지금의 현재 시간에 나는 영성계에서 이런 주제들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합니다. 결코 넘을 수 없던 방대한 세계에 대해 우리 혹은 나는 조그마한 세계에서 그것을 막 인식해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때 참으로 다행이라고 봅니다. 그나마 이런 세계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당행중 다행으로 봅니다.
우리는 수많은 윤회나 저 3중 중간 세계를 통해 깨달음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기전에 영적인 질에 따라 중간세계에서 개속 깨달음의 길을 가던가 윤회를해서 사명따위나 자신에게 이롭은 체험을 하기로 약속합니다. 먼저 중간 세계에서 영혼 사자가 제한적인 망각 완전한 각성이 아닌 영혼으로써 하위단계인 제한 적인 기억을 가진 영은 윤회를 선택할때 빛의 존재는 왜 왜 묻습니다. 무엇때문에 당신이 그 삶을 선택하나요. 그것이 긍정적으로 필요한 삶인가요 물론 빛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제한적인 영혼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이야기 하는 쌍둥이 영혼 자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화신이나 분신이나 분열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남녀 성을 말하는 동일한 자신의 의식 측면을 말합니다. 사실상 깨달음과 완성 무극에서는 영혼의 남녀가 없습니다. 다른말로는 통합된 존재이면서도 완전한 의식 순수한 영 입니다. 여러분중 98%다수가 결혼을 통해 동반자와 만나 2세 아이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동반자는 제각각 영혼들로 카르마에 의해서도 인연과 관련해서도 또 서로 극 중 배역을 맞아 서로 이생에 태어나 깨달음의 길에 동반자적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남녀를 반복해서 서로 교환해 태어나 생을 경험하고 아이 역도 동등한 영혼으로써 배역을 맞아 그들이 함께 가족을 구성하여 연극을 통해 삶을 배워갑니다. 물론 삶에서는 영혼이 체험하고자 하는 감각과 감정이 있고 또 근본적인 순수한 목적 깨달음에 연결하는 생의 드라마를 살기도 합니다. 칭하이 부상사님은 영혼이 여성으로 태어나는 선택 길은 그중에서도 완숙한 여성적 자질이 있는 영혼에게 아주 세심하고 배려있고 여성적 속성이 녹아있는 존재에게 여성으로 태어날 수있는 기질을 받는 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지금 3차원 인간 남녀를 볼때 대중의식들의 의식을 살펴보면 여성이나 남성이나 악질이 많습니다. 대단히 무서울정도로 오염이 심각합니다. 대부분 악역을 남자가 다하지만, 여성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말 또 한 이세계를 창조해가는 되 일원이이기때문에 물질적인 상해를 입히지는 않치만 부정적인 에너지와 상념체를 창조해나가는되에서 여성이 독기가 많습니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나약하기때문에 진화와 삶을 통해 여우 같은 속성을 악녀적인 마음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에오이즘은 전혀 다르다.당신은 사후에 갈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멋대로 상상한다.더욱 고차원의 다른 세계나 다른 우주의 혹성,다른 차원의 세계나 천계 등,나아가 세속적인 것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좋은 집안에 태어나고 싶다,더 멋있는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더 유복하게 태어나고 싶다,더 정신적인 탐구를 할 수있는 지역에서 태어나고 싶다>라든가 <아트만의 자각이나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로 가고 싶다> <이 다음에 태어나면 더 재미있는 생명체로 태어나고 싶다> 등등 온갖 기대와 상상이 어우러져 있다.이렇게 <죽은 다음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당신의 그 모든 희망을 철저하게 <때려부순> 것이 에오이즘의 우주론이다.
어느 차원의 세계에 가더라도 <똑같다>.모습은 바뀌어도 하는 일은 똑같다.우주의 다른 차원의 세계든 고차원의 세계든 어디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하는것은 우리들이나 다른 차원의 지적 생물,우주인,그리고 신들을 포함해서 만약 우리들이 즐기기 위해서 살고 있다면,생물에게는 <고통 회로> 같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들이나 차원의 존재들에게는 여러 가지 고(苦)가 있다.우리들한테는 심리적인 고나 병리적인 고도 있다.그것은 몇 만 년이 지나도 전혀 개선된 적이 없는 것이다. 물질적인 시간 속에서 기나긴 세월 입니다. 깨달은의 수행도 수많은 생중에 무수히 반복했던 개인적인 삶들도 있습니다. 정도 우리가 삶이 수행이지만, 본격적인 수행을 경험하는 것은 수많은 윤회중 몇부분 역활을 선택합니다. 사제나 종교인 또는 수행자 무수히 많습니다. 제한적인 영혼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때로는 카르마에 의해 그 시스템을 풀기위해 선택이 필요하기도 하고 생을 반복하면서도 깨달음의 도스 레벨이 높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순환을 반복하는예도 있습니다. 물질적인 에고의식이 나는 다음생에 어떻게 태어날 거야 하는 선택권은 없습니다. 죽은사자가 되어 극중 연극배역에서 수정을 통해 제한적으로 선택을 받습니다.
진화 흔적 지극히 그럴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는 에오의 글을 통해 본 사실을 볼때 내가 상상했던 것을 에오도 했다는 것 반대로 에오가 언급한 사실을 나도 그와 같은 상상을 했다는 것 아무튼 동지애가 느껴집니다.
일부 에오의 주장에 동의 하는 봐입니다. 환상 우주의 시스템이 논리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몇부분 직감적으로 잡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예의 시스템이 갇추어져 있습니다. 혼돈 질서 그와 수많은 프로그램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설켜있다는 것 입니다. 우리의 인식을 통해 보면 우주가 아주 난잡하게 보입니다. 사실상 깊은 꿈속에 또 꿈속에 또 꿈속에 반복하여 꾸고 있는 우리들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진아 쪽에서는 우리가 꿈꾸고 있기때문에 고통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주목받지도 못 합니다. 너는 꿈일뿐이야 하면서 군소리 말라고 하면서 말이죠 지극히 이해가 갑니다.
우리는 사후세계에서도 완벽한 영이 아니기때문에 영혼으로써 제한적인 의식만이 깨어있습니다. 또 태어날때 완전 윤회의 기억도 망각한체로 태어납니다. 망각을 해야 연극이 된다는 높은 의식이 말한 어떤 수긍가는 주장도 있지만, 마치 사고친 병사가 다른 부대에 복귀 하듯 말이죠. 쫄병이 계급이 상병보다 높다가 다른 부대로 이전시키듯 말이죠.^^ 우리는 저의 상상계념과 줄고 우주 법칙을 이해한 후로 생각한 '초고차원 물질 보전 법칙'으로는 꿈의 세계에서 여러 수많은 에너지와 정보 전력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밥을 않먹으면 굶어죽듯이 저 근원에서부터 다단계 내려오면서 여러가지 에너지를 받습니다. 그 높은 에너지는 물질세계에서 몸에 흡수하여 여러모로 쓰여지면서 흘러보내게 됩니다. 우리 몸을 통해서 우리와 재질이 다른 큰생물이거나 작은 생물에게 전달 되기도 합니다. 의식레벨에 따라 때로는 에너지가 부정적으로 변형되어 가기도 하고 옳게 긍정적으로 정화되어 다시 내보내기도 합니다. 다시 그 에너지는 근원에 가서 바뀌던가 높은 차원에서 바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체를 보면 혈액 에너지 정화나 공기중 여러 물질 산소나 이산화탄소 변형 서로 생물간 호흡을 통해 이롭게 변형되어 구성하듯 자연계에 인간이 지구 가이아 시스템속에서 공존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순환을 거치게 되고 되돌아오게 됩니다.
죽고 싶어진다 아무 감정이 미약할때는 아무 감정을 못 느낄때 다시말해 중립적 내면 상태로 볼때는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대중의식의 표면의식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죽음에 관심이 없답니다. 내면 중간 영혼만이 좀 심각성을 알겠지만, 표면 대중의식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답니다. 돌이나 먼지따위 나무 무생물들 작은 벌래나 바이러스 박테리아 수준에서 늘 작은의식으로 프로그램되로 움직이듯 그내들도 아주 미소한 에너지 자각으로 움직일 뿐 입니다.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들도 개체가 전체의식으로 시스템 프로그램으로 연결이 되어 움직이지만, 사실상 인간 사고체만이 조금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적 세계에서 먹는 것과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질서면에서 나타나는 여러 차원으로 부터 상호연결성과 에너지 동력 공급과 정보 공급을 받습니다. 하물며 꿈을 꾸는 것도 복잡하게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세계에 기적같은 사람들중 40년 동안 물만 먹고 사는 수녀나 어떤 국내 분이나 다른 구절에 나온 기적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능력에서도 잘 나타나는 벽을 통과한다든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우주만물과 전체 상호연결이 되어 움직 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체 감정체 정신체 딱딱한 육체를 통해 서로 구조화하고 시스템화 하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가만이 수년동안 앉아있으면 몸이 마비가 옵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없는 그냥 있다면 여러분은 특이한 다른 것을 격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수 많은 깨달음에 들기위해 많은 수의 수행중에 이런 비이상적인 수행들이 세속적인 영역과는 별개로 다른방식으로 작용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마음공부와 비움을 통한 부가적으로 주기적 100일 단식을 통한 방법들도 있고 티벳트의 수행꾼들이 몇가지 능력을 깨우쳐 몸에 氣를 이용해 열을 내거나 의식으로 물질적 현실을 제어하여 히말라야에서 수행중에 영하 40~45도에서 몸에 얇은 천에 물만 뭍치고 명상하듯 잠을 기적이나 최소한의 단식을 통해 장기간 야생의 풀만 섭취하는 방식이나 도인들의 생활방식이 다릅니다.
무엇인가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가 눈뜨지 않는다면 않될 것입니다. 눈을 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에오가 주장하는 면과 읽기 배우기 관련이 있습니다. 단지 생존방식만 체워진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아무것도 하지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느다면 아마도 깨달음에 더 수월하게 가질 않겠나 비상하지 않겠나 봅니다. 오로지 내면에 반응이 일어날 것 입니다.
물질적인 세계에서 몸에 그와 같은 반응을 주지 않으면 퇴화 되기 마렵니다. 동물의 경우 고립되거나 진화가 퇴보하거나 향상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저는 감정이 거의 고장난 것 같은데 ㅎ ㅐ ㅎ ㅐ 아스트랄체가 쇠약해졌나봐요.^^ 단지 뇌만 움직여 멘탈체만 강해지나봐요.ㅋㅋ
인간적인 생각으로 지극히 에오의 주장에 동의 하는 봐 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조잡한 만물이 대답해줄일은 없겠지만, 웃끼는 세상이지요.
에오의 주장에 저도 왜 이런 반복을 하는가 의문을 가졌습니다만, 에오의 주장이 꼭 내가 품고 있던 생각과 같다는 생각이 문듯 듭니다. 아무튼 인간적인 제한적인 생각으로 만물에 대해서 왜 존재의 양식을 갇추고 왜 작용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왔기때문에 지극히 에오의 주장에도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다른 세계에 태어나도 생명은 그것을 되풀이한다.물론 다른 세계에서의 생명 체험은 다를 것이고 거기에서 받는 쾌락도 인간 노릇을 하고 있을 때보다 클 것이다.하지만 거기에 <반드시 끝이 찾아온다>. 그러면 당신은 또 다른 쾌락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부분에서는 수년 전부터 생각해오던 저의 생각과 같습니다. 인간의 집착이나 어떤 감정 작용 속에서 우리가 무엇에 매여있고 집중하지 않으면 무료하고 무미건조한 허탈 공허한 감정을 동반합니다. 또 이 인간적인 감정을 높은 세계 불보살 세계나 그보다 초월한 근원 속에 녹아있는 부처나 크라이스트 세계에서 인간적인 감정으로 본다면 공허합니다. 공허는 정말 게로운 것이고 인간이 생각하면 무섭은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에 인간이 갈 수 없지요 인간이 온 갖 것을 비워 마음을 비워 깨끗히 하여 그 수준이 되어야 그곳에 도달하게 됩니다. 물론 단지 단편적으로 생각해도 감정을 떠나 의식을 떠나 추상적인 절대를 떠나 단지 제한적인 인간적인 수준으로 생각해볼때도 중립적 시각으로 보면 높은 세계나 근원이나 이 삼계이내 현실이나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잡지 못합니다. 영원히 우리가 존재 삶에 대해 미스터리를 품고 영원히 살지 알 수 없는 것 입니다. 지극히 무묘앙 에오가 주장하는 면중에 아주 추상적인 근거들은 존재 삶에 대해 신도 인간도 아닌 중립적인 시각 판단으로 우리는 왜 이런 만물에 그런 형태 시스템을 취하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반응하고 구조화 해야 하는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일지도 모릅니다. 부처들은 인간에게 설하기를 영은 영원히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왜 영원히 존재할까요 사실상 우리가 무하는 판단은 인간계념으로 만들어진 창작된 계념일 수도 있습니다. 왜 존재할까요? 왜 모든 것이 있을까요 無무라는 것이 없다면 없다는 수준이 인식할 수는 없지만, 중립적인 관찰자로써 무와 존재를 떠나 추상적인 이 만물들이 없거나 있거나 하는 사뭇 게로운 왜 존재해야 할까요 왜 없을 까요. 왜 끝이 없을까요 왜 끝이 있을까요? 참으로 미스터리하지만, 일반 대중의식이 이이야기를 이해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입니다. 마치 미생물의 단순 의식만이 있는 세계에서 인식을 할 수 없는 그런 것 입니다.
인식 인식 인식 인식 인식 색체 인지 감정인식 감각인식 의식인식 인식인식 왜왜왜 존재 존재 존재 무 무 무 왜 왜 왜 왜냐고요.??? 인간은 그나마 바이러스 인식 수준보다 높지만,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지만, 중립적인 인식으로 보아 만물은 무엇 일까요 내가 말하는 것은 우주의식도 神신도 에너지도 리듬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왜 만물은 왜 존재하고 왜 無하거나 여타 무엇이라고 주장해야 할까요??? 왜 왜 왜 인식의 너머 초월이나 여타 수준 미달이 왜 왜 왜 인간의 언어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물이 神신 혹은 부처 나 크라이스트 의식 만물 의식이라고 해도 왜 그런 모습을 존재 취해야 하나요 또 無라고 할때 왜 無해야 할까요. 왜 우리는 神신이나 높은 상승마스터나 인간이나 박테리아 수준 혹은 바이러스나 아주 미약한 분자나 원자나 초끈이나 리듬이나 왜 왜 형태 무형태 에너지 양식을 갇춘 존재와 無일까요. 왜 왜 왜 미스터리 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말뜻은 우주의식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식할 수 있나요. 내말 뜻을 .....
....(중략)....
따라서 사인선 문하에서의 고(苦)란,죽는 것에 대한 고(苦)도 아니며,지옥행 공포에서 오는 고도 아니다.우리들의 고란,<똑같은 곳으로 되돌아와,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다.결국은 빙글빙글 똑같은 생명 활동이라는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에게 <김 새는 것>,그것이야말로 불교의 고다.
당신이 죽어도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죽고 싶어도 영원히 죽을 수조차 없다.
뫼비우스띠에 영원히 풀려나지 못하는 우주의 감옥 저승 3계나 이우주 넘어 삼계나 4세계나 아스트랄100세계나 상념계 너머 근원 사이에도 환상마야의 꿈과 神신의 세계는 밖이 존재 하지 않는 의식의 세계 영원한 감옥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내가 판단하는 神신과 인간이 내가 중립적인 위치에서 생각해볼때 꺼끄럽지만, 영원한 감옥이다 감옥은 자신이 감정이나 의식따위로 감옥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감옥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당신들은 그것을 인식 주장하는 것 자체가 진리는 아니지만, 감옥이라고 생각하면 감옥일 수도 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립적인 시각으로 보면 감옥이나 다름 아니다. 감정 기반으로 받아드리면 끔찍할 수도 있다 당신들이 감정이 없는 존재라해도 해도 의식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감옥이나 다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감각의 판단에 기반한다. 깨어있는 의식도 감각의 한 원초 형태일 뿐이다. 초월철학으로는 감옥도 뫼비우스띠도 공허도 환히도 아닌 감각에 기반한다. 당신들의 감각에 의해 감각으로 판단한다. 영원히 감각에 벚어날 수없고 감각 아니것에 판달할 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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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식의 주체인 우리가 스스로 앎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르게 되어 환상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질에 대해 재기억을 하고...
스스로 창조자인 주체로 활동하게 될 때엔 자신의 앎과 창조력에 대한 체험,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활동하는 객체들로부터의 자신외의 분리된
인식으로 체험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자신외의 분리된 인식으로 체험하는 것들에 대한 총합이 그 폭과 깊이면에서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그 확장된 체험으로 인하여 창조주의 자기 인식이 확장되어
새로운 자기로 계속 규정해나가는
그야말로 매 현재의 싯점이 가슴설레이는 호기심과 함께 그에 대한 체험,
그리고 새로운 자기규정에 대한 설레임....
창조주로서의 자기 체험과 그리고 자기로부터 분리된 객체아닌 객체들이 앞으로
나아가며 체험하는 것들의 총합과 하나이면서..
그로부터 생겨나는 연민과 자비와 사랑..
본래의 자신의 연민과 자비와 사랑이나 그들을 통하여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연민과 자비와 사랑..을
자신이 환상의 틀을 벗어나 창조자의 의지와 함께하는 중간 창조자의 일원이
되던 아니면 스스로 합일하여 창조주로서 행하던..
이것이 의미없는 따분한 일이지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며
작은 나를 큰나로 잠시 가상적으로 확장하여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