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v.media.daum.net/v/20170706153103104
12년 동안 531명 사망, 시신은 의대 실습용으로
[오마이뉴스 글:이민선, 편집:성낙선]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 천막에서 생활하며 산을 깎아 건물을 짓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3년 6개월 동안 건물 약 18채가 세워졌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
'따닥'하는 소리가 나자 소년 홍장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넝마주이가 들고 다니는 집게가 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넝마주이는 다짜고짜 소년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소년이 "왜 그래요, 왜 그래요" 하며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자 넝마주이는 자신의 발뒤꿈치로 소년의 발등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소년은 아픈 발을 만질 새도 없이 깨금발을 한 채 넝마주이 손에 질질 끌려갔다.
소년이 끌려간 곳은 서울역 앞 창녀촌 인근에 있는 근로 재건대 4소대라는 넝마주이 본거지다. 까불이라는 별명의 넝마주이가 대장이었다. 앵벌이 소년·소녀와 넝마주이 40여 명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소년에게 그곳은 아주 낯선 세상이었다.
"앵벌이를 나가기 전에 교육을 하는데, 외울 게 정말 많았어요. '어머니는 날 낳으시고 3일 만에 죽고...' 42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이거 한 다음에 '타박네야' 같은 노래 몇 곡 부르고, 그 다음에 손을 내미는 거지. 부끄럼을 떨치게 하려고 일주일 넘게 소주를 한 대접씩 강제로 먹였는데, 토하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그 일(앵벌이)이 꼭 100년 전부터 내가 했던 일처럼 익숙해져 버려요."
앵벌이에게는 할당이 있었는데, 하루 5천 원이었다. 그 돈을 바치지 않으면 몽둥이가 날아왔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발을 주로 때렸는데 발바닥도 아프지만, 발가락, 특히 새끼발가락을 맞을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소질이 있었는지, 소년 홍장희는 돈을 아주 잘 버는 앵벌이로 커갔다. 그가 구슬픈 멘트를 날리고 노래를 부르면 한 달 내내 공장에서 먼지 마시며 번 돈을 봉투째 손에 쥐여주는 누나도 있을 정도였다. 차마 그 돈을 받을 수 없어 '주지 말라'고 속삭였다가 감시자인 '야방이'에게 들켜 일주일 내내 죽도록 맞은 적도 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절제해야 했다. 덜 슬프게 이야기하고, 덜 슬프게 노래하는 절제를.
12살 어린 나이에 몸을 팔아야 한 앵벌이 소녀들
▲ 한국 최대 인권유린 사건으로 손꼽히는 '형제복지원', 그곳에 한종선씨가 1984년 입소할 당시 찍은 사진이다. 당시 한씨의 나이는 아홉살이었다. |
ⓒ 한종선 |
"손님을 받고 나면 몇 푼 떨어지는 돈으로 과자도 사주고, 심하게 맞으면 말려주기도 하는 착한 누나들이었는데. 어떤 누나는 내가 하도 맞으니까 그만 때리라고 대들다가 맞아서 눈알이 빠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름도 모르고!"
내 얼굴에서 불신이 엿보인 것일까! 그는 "믿기 어렵겠지만, 공장에 돈 벌러 온 여자 붙잡아서 윤간한 다음 창녀촌에 팔아먹고, 남자는 잡아서 새우젓 배에 팔고, 어린 애들은 관절 부러뜨려서 앵벌이 시키고 하던 그런 시절 이야기"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앵벌이 생활이 싫어 여러 번 도망을 쳤지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10살 꼬마가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청량리로 도망쳐도 성북동으로 도망쳐도,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넝마주이)은 귀신같이 찾아냈다. 어느 날인가는 넝마주이가 아닌 경찰이 소년 홍장희를 붙잡았다. 경찰은 그를 응암동 '소년의 집'에 넘겼는데, 그곳은 근로 재건대보다 더 험한 곳이었다.
"거기 가니까 이상한 놈들이 더 많은 거예요. 열대여섯 살 먹은 놈들인데 길거리에서 닳고 닳은 악마 같은 놈들이라 인간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다 시키는 거예요. 항문성교는 기본이고 입으로 그곳을 빨게 하고, 밥도 뺏어 먹고. 수사, 수녀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들도 두려웠어요. 걸핏하면 탁구채 같은 거로 때리니까요. 제일 힘든 거는 갇혀 있다는 것이었고요. 앵벌이 할 때는 그래도 내 발로 어디든 걸어 다닐 자유는 있었거든요."
소년 홍장희는 이때부터 탈출하고 붙잡히기를 반복한다. 소년의 집을 탈출했다가 근로 재건대에 붙잡혀 죽도록 맞은 다음 다시 앵벌이를 하고, 그러다가 경찰에 붙잡혀 다시 소년의집에 갔다.
부랑인 청소, 철권통치로 무너진 정권의 정당성 회복
▲ 태장희, 산을 여행하다 문막에 있는 기천문에 입문, |
ⓒ 태장희 |
그 이유는 그 당시 박정희 정권이 영구 독재를 하기 위한 철권통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거리의 소년 홍장희가 경찰에게 툭하면 붙잡힌 75년 당시는 유신독재의 절정기인 이른바 긴급조치 시대였다. 긴급조치는 대통령 명령 하나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초헌법적 조치다.
이렇게 전 사회적으로 통제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시행된 게 부랑아 등을 잡아 가둘 수 있는 근거인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아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다.
그렇다면, 부랑아를 잡아 가둠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얻을 수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철권통치로 인해 무너진 '정권의 정당성과 존재 이유회복'이었을 것이다. 역대 독재 정권이 민심을 얻기 위해 부랑인 청소, 범죄 척결 등을 단골로 써먹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쓰였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내무부 훈령 10조에서 정의한 부랑아의 정의를 보면 알 수 있다. 해석에 따라 거의 모든 시민이 부랑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부랑인의 범위가 넓다.
부랑인 :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 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방해하는 자."
부랑인에 준하는 자 :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
▲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들이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집단 삭발하고 있다. |
ⓒ 남소연 |
"때리는 것도 차원이 달라요. 아무리 세게 맞아도 신음조차 낼 수 없어요. 앗! 소리라도 나오면, 그건 죽음이에요. 말 안 들으면 결핵 환자가 있는 결핵 소대에 집어넣어요. 10일이면 결핵 다 옮아요. 병에 걸려 죽으면 그만이고요. 맞아 죽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죽으면 병원에 의학 실험용으로 팔았고요. 먹는 건 또 어떻고요. 깡보리에 배추 소금국. '쇼팅(쇼트닝)'이라는 기름을 꼭 먹어야 했어요. 그걸 먹어야 얼굴에 기름기가 흐른다며, 강제로 먹였는데, 정말 니글니글합니다. 그거 안 먹어 봤으면 형제복지원 사람 아닌 거예요."
형형제복지원에 관한 그의 기억은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주)'가 지난 2013년 펴낸 '한국의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라는 사건 사례집에 그 참상이 잘 기록돼 있다.
"형제복지원은 전국 최대 부랑아 수용 시설로 지난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맞아 죽고 35명이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여 암매장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12년 동안 531명이 죽었다.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 해부 실습용으로 팔려 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원장 박인근은 매년 20억 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음식을 제공하여 막대한 금액을 착복했다.
또한, 자신의 땅에 운전 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직원 5명이 구속되었다." - 사례집에 수록된 국가기록원 기록
그러나 이렇듯 천인공노할 일을 저지른 박인근 원장에 대한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의 비호 아래 그는 수감 중에도 사우나를 하는 호사를 누리다가, 2년 6개월이라는 짧은 형을 받았다. 추징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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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media.daum.net/v/20170706152912992
"그 여자 슬리퍼 끄는 소리, 무서워 숨이 턱 막혔어요"
[오마이뉴스 글:이민선, 편집:성낙선]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 막사, |
ⓒ 이민선 |
이 말에 무심코 "네!"라고 대답했다가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그럼 그만합시다. 믿지 못하는 사람한테 말해서 뭐해!"라며 실망스러운 듯 입 언저리를 씰룩거렸다. 다행히 잠시 뒤 감정을 추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증거가 될 만한 서류 같은 거 없나요? 저는 사실만을 써야 하니까요!"
이렇게 말했다가 또 대화가 끊길 뻔했다. 그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실수하셨네!"라며 다시 입을 닫았다. 급히 '그런 뜻이 아니고, 증거가 있으면 더 신뢰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불쾌했다면 사과합니다'라고 수습 멘트를 날렸다. 그는 "뭐 그렇다고 사과할 일은 아니고"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바쁘시겠지만, 내 평생 한이니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죽음으로 증명하라고 하면 나 죽어 드릴게."
내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던 것일까! 아니면 조급함이 서렸던 것일까. 그가 소리치듯 한 느닷없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잘 듣고 있어요'라고 해야 하는데,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터뷰가 5시간 넘게 이어지면서 나 또한 지쳐가고 있었던 탓이다. 소리를 한 번 치고 난 뒤에 속이 후련해졌는지, 그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처절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지옥의 소년 수용소 안산 '선감학원'과 한국의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부산 '형제복지원'을 모두 거친 태장희(52세)씨와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7시간 넘게 이어졌다.
인터뷰를 정말 힘들게 한 것은, 이러다가 숨이 멎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그의 열악한 건강 상태였다. 갑자기 힘이 몽땅 빠져 나가 버린 듯 목소리가 잠겨 들기도 했고 폐가 찢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기침을 해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공연한 일을 벌여,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육신은 죽어 가는데 정신은 놀라울 만큼 명료
▲ 태장희씨 다리, 지금은 훨씬 더 상태가 안좋다. |
ⓒ 태장희 |
그를 괴롭히는 병마는 뇌종양, 심부전 등 듣기만 해도 혀를 차게 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다. 그가 내민 진단서(2013년 발급)에는 '고혈압, 당뇨, 통풍, 심부전, 진폐증, 뇌종양'이라는 병명이 적혀 있었다. '호흡곤란 등의 증상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급사의 위험이 있다'라는 의사의 소견도 있었다.
이 병마와 그는 수년째 함께 살고 있다. 의사는 이미 진단서를 발급한 지난 2013년에 길어야 3~6개월 정도 살 수 있으니 (삶을) 정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있다. 더군다나 그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했다.
"내 몸은 이미 죽어 있어요. 그때(2013년)는 그래도 시력은 있었는데, 지금은 시력도 거의 없어요. 누우면 숨을 쉴 수가 없어 눕지도 못해요. 이 상태로 수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치를 이미 넘어 섰어요. 어째서 저에게 24시간 고통 받으면서, 잠 한 번 편히 잘 수 없는데, 이토록 명료한 의식을 지금까지 주시는지! 이 몸을 가지고 버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한다는 것만 알면 좋겠어요."
이 말과 함께 그의 처절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돈암동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네 살 터울 그의 형과 그를 잠시 이모가 맡아 길렀지만, 생활이 어려웠던지 어느 날 그를 홍씨 성을 가진 아들 없는 종갓집 '업둥이'로 보내 버렸다. 포대기에 싸서 홍씨 대문간에 버린 것이다.
이것도 장성한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해 한때 잘 나갈 때 사설탐정을 고용해 알아낸 사실이다. 그 전에는 이마저도 알지 못했다.
치매 걸린 할머니 송곳으로 찌르라 강요, 갈가리 찢긴 동심
▲ 태장희 씨 어릴적 사진. |
ⓒ 태장희 |
"누군가 저를 안아준 기억이 없어요. 늘 맞을까 봐 두려웠고요. 그곳에서 10살, 광명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도망쳤는데, 지금도 도망치던 날 기억이 생생해요. 어렸을 때는 그 날 일이 악몽이 되어 자주 나타나기도 했고요."
그를 심하게 학대한 것은 양어머니였다. 학대는, 그의 양할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완전히 역전이 된 거죠. 논 두 마지기에 팔리듯 시집와서는 아들 못 낳는다고 시어머니한테 엄청난 학대를 받다가, 치매에 걸리자마자 복수를 시작한 거예요.
툭하면 아무 이유 없이 할머니를 꼬집고 깨물고. 전 무서워서 말릴 수도 없었어요. 나중엔 송곳으로 찌르기까지 했는데, 언제부턴가 저한테 찌르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하지 않으면 그 송곳으로 저를 찔렀고요. 무서움에 덜덜 떨며 할머니를 찌르면서 제 동심은 갈가리 찢어졌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양어머니의 학대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남편이 툭하면 새벽에 들어왔는데, 그때까지 저를 무릎 꿇려 놓는 거예요. 밥도 못 먹게 하고요. 힘들어서 다리를 풀면 그 두꺼비 같은 손으로 '빡' 그러면 저는 그냥 날아가요.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여자 슬리퍼 끄는 소리였어요. 그 소리만 나면 저는 숨이 막혔어요. 넥타이를 제 목에 감고 발로 제 어깨를 누른 뒤 당겼는데, 혀가 다 빠져 거품 물고 죽게 될 정도가 되면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거예요. 이거 한참 하다 지치면 돌아가요. 그러니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지요. 너무 어리니 대항할 수도 없고 분노할 줄도 모르고. 그저 두렵기만 한 거죠. 도망칠 때까지 제 일상이 이랬어요."
어느 날, 어린 홍장희가 '(학교에서) 엄마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말하자, 양어머니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양어머니의 손에는 불에 벌겋게 달궈진 연탄집게가 들려 있었다. 그의 몸을 숱하게 아프게 했던 무서운 연탄집게였다. 그가 10살 된 겨울에 벌어진 일이다.
"5원짜리 동전을 꺼내려고 학교 스케이트장 얼음을 깬 적이 있는데, 그 일로 학교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고, 엄마 모시고 오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말을 전하자 그 시뻘건 연탄집게로 제 배를 인정사정없이 찔러 버렸어요. 갈 데까지 간 거죠. 가학증은 갈수록 심해지잖아요."
개밥 뺏어 먹으며 서울역까지
▲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극한의 강제 노역 또한 수행해야 했다. |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
소년은 그 길로 버스를 얻어 타고 서울 관악구 신림동까지 도망쳤다. 시장통에 떨어져 있는 배추 잎사귀를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그 잎사귀에서 나온 즙으로 살에 눌어붙은 옷을 떼어냈다. 그러나 세상은 10살 어린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는 시장 경비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 신림동 파출소를 거쳐 봉천동에 있는 한 아동 보호소에 가게 된다.
그곳은 천국이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여자 선생님이 있었고 먼저 말을 걸어준 예쁜 여자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친절한 여자 선생님은 집 전화번호를 대라고 끈질기게 설득했고, 그는 결국 집 전화번호를 말해 버렸다. 다음 날 그의 양부모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혔다. 끌려가면 죽는다는 두려움이 목을 죄었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뒷산으로 뛰었다. 밤낮없이 뛰다 보니 서울 동작구 흑석동이 나왔고 한강 다리를 넘자 서울역이라는 곳이 나타났다. 서울역까지 가는 동안의 배고픔은 견공들이 해결해 줬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미안해' 하자 인심 좋게도 견공들은 자기의 밥을 뺏어 먹는 소년을 물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와 양부모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먼 훗날 마흔 줄이 넘은 홍장희가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딱 한 번 홍씨 일가와 연락이 닿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독한 악연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일이었을 뿐이다. 양부모인 홍씨 집안에 연락을 한 것은 병원이었다. 호적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씨 측에서는 매정하게도 병마에 휩싸인 홍장희에게 '그런 아들 없다'며 '유산 상속 문제도 있으니 호적을 파가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그의 이름이 홍장희에서 태장희로 바뀐 이유다.

역대 대통령들의 전생 이야기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로 지금까지 아홉 명의 대통령이 있다.
그들은 과거생에서도 깊은 통찰력을 가진 영혼들로서 우리 민족과의 깊은 인연법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나라의 국운을 정화시키고 이끄는 앞선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깊은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영혼체들이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통치자로서의 모습에서는 각각 다른 의미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 소개하는 그분들의 전생의 모습은 역사가 평가하는 인간적인 삶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고 심오한 영적 의미에 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분들과 우리나라와 민족이 경험해야 하는 카르마적 상호작용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다시 풀이해서 설명한다면 그들의 통치행위는 자신의 이념적 사고에 따른 개인의 일이 아니라 거대한 국운의 흐름에 따른 시대적 역할에 더 많은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의 뜻은 그 통치자가 독재자의 역할을 했다면 그것 또한 그 시대의 국운이 원했던 역할이었고, 그 반대의 훌륭한 업적을 남겼던 통치자는 그 역할의 시기가 긍정적인 국운의 시절과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통치행위를 두고 세속적인 평가로 논제하고 비판하는데, 그것은 인간 차원의 삶에서 그 통치행위가 역사가나 국민들에게 각각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적 의미에서의 관찰은 분명 다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분들은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우리나라가 가야 할 영적 차원의 진화와 발전을 위해 각각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아래 글에서는 그분들이 우리나라의 통치자로 살게 된 복합적인 원인을 가진 여러 과거생 중에서 가장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나의 과거생을 찾아 옮겨본 이야기다.
1) 이승만
첫 번째 우리나라 초대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전생에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의 영혼과 일치된다.
쿠빌라이 칸은 살아 생전에 고려를 원나라의 지배 하에 종속시키기 위해 많은 침략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는 고려를 완전하게 정복하기 전에 사망하게 된다. 그때 쿠빌라이 칸은 고려에 대한 집착이 강했으며, 그 정복욕이 원념으로 남아 있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 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에 대제국이 되었고 몽골제국은 종주권을 계승한 그는 고려의 종주국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때의 삶에서 쿠빌라이 칸이 이루지 못했던 고려라는 나라에 대한 집착이 그가 원나라를 건국했듯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이승만의 영혼적 인연과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리딩은 전한다.
2) 윤보선
두 번째 지도자였던 윤보선 대통령은 조선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과 영적 자아의 동일체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의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인 안목이 높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지역(아산과 온양)에서 태어났는데, 어질고 착한 성품과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 지도자로서 자질적 소양 등 비슷한 점이 많다.
3) 박정희
세 번째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의 분령과 연결되어져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나라가 혼란하고 어지러울 때 구국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켰던 점이 닮아 있지만,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국운의 배경과 국가의 가치관에 따라 그 공적이 다르게 평가되고 있을 뿐이다.
4) 최규하
네 번째 지도자였던 최규하 대통령의 전생은 고려 시대 때 62년 동안 최씨 무신정권을 세웠던 최충헌의 삶과 연결되어져 있다. 그때 최충헌은 당시의 권력자인 이의만을 제거하여 권력을 잡게 되고, 그 이후에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세습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그때의 부적절한 카르마(무신정변)가 현생의 삶과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 직을 승계한 최대통령은 현생에서 12·12 사태로 권력을 잡은 군부로부터 축출 당하는 수모를 겪음으로서 그때 자신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카르마 정화시키는 삶으로 살아야 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뒤, 그의 묘비 뒷면에 기재된 최 전 대통령의 일대기에는 ‘최 대통령은 평생 정당에 가입한 일이 없이 직업 공무원의 길을 걸어 대통령이 된 헌정사상 최초의 국가 원수’ 라고 기록돼 있다. 최 전 대통령을 보필했던 사람들이 쓴 추모비 글에는 ‘최 전 대통령이 국가보위와 경제발전에 헌신봉사하고, 선공후사와 근검절약으로 온몸으로 실천해 국민 모두의 귀감이 됐다’고 적고 있다.
또 12·12사태 등과 관련 ‘국가변란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가원수의 사명의 짐을 지고 국권수호에 전력했으며 세속의 세찬 바람에는 태산같이 의연함을 보였다.’고 새겼다. 그가 국무총리로 재직했을 때 그를 기리는 추모 글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 외교의 거목으로 국위선양에 기여하고, 총리로 확인 행정을 통해 국민과의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는 공직자로였고, 40년 간 하루도 결근하지 않는 근면성과 청렴결백의 미덕은 국민의 표상”이라며 “고매한 인품에 기개 있는 선비요, 큰 어르신” 이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앞의 이야기를 카르마의 법칙에 준하여 정리해보면, 이번 생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그때 최충헌의 삶에서 자신의 부적절한 카르마를 정화시키기 위해 현생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대통령 직에 머물렀으며 그때 이루지 못한 최고 통치자로서의 삶을 훌륭하게 채우기 위해 이 삶에 왔는지도 모른다.
5) 전두환
다섯 번째 지도자인 전두환 대통령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전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려시대 말의 장군으로 요동 정벌에 대해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이성계는 그때의 삶에서도 최영 장군의 수하에 있다가 항명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었던 무장 출신의 왕이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와서도 군인의 신분으로 항명하여 12·12사태를 통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 정황이 그때의 이성계와 흡사하게 닮은 점이 많다.
6) 노태우
여섯 번째 지도자인 노태우 대통령은 전생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를 중창하신 심지 대사였다. 그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인 헌덕왕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헌덕왕의 사후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숙부인 흥덕왕에게 왕위를 양보했던 심지는 정치에 회의를 품고 인생무상을 느끼며 출가했다고 전한다.
7) 김영삼
일곱 번째 지도자인 김영삼 대통령의 전생은 조선시대의 문신 남익훈으로 형조판서를 지냈고 동래 부사로 있을 때 부산에 거주하던 왜인들의 작폐가 심하자 대마도주와 교섭하여 옛날의 협약 준수를 촉구하고 왜관에 비를 세워 불법행동을 금지시키고 단속을 엄하게 하였다.
8) 김대중
여덟 번째 지도자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전생은 강증산의 분령체와 일치된 영적 사이클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식과 집단의식은 언제나 개인과 그룹으로 나누어진, 보다 더 거대한 우주의식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그 시대의 삶에서 지도자가 다시 환생의 주기를 따라 태어나는 같은 시대에 같이 태어나 그 지도자를 섬기는 경우가 있다고 리딩은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교조적 카리스카는 그 시대적 역할에 있었서는 그때(강증산)의 미완성을 이 시대에 와서 완성시키는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9) 노무현
아홉 번째 통치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전생은 조선조 말의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최제우와 연결되어져 있다. 최제우는 동학의 창시자로서 외세에 대항하여 유·불·선의 교리를 토대로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를 만들고자 하였고, 그 중심사상으로 퇴폐한 기존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고, 선민사상을 토대로 만민평등을 주창했었다. 그로 인해 기존의 질서가 흔들릴 것을 불안해하던 기존의 양반세력으로부터 제거되었던 인물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최제우가 주창한 바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의 정신과 많은 점이 닮아있다.
환생의 전통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자아탐구의 열풍, 즉 ‘나는 과거에 어떤 존재였으며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하는 탐구의 흐름 속에서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나라의 통치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과연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지도자가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과연 자신의 과거생과 연결된 어떤 숙명적 근원에 의해 그 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증명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환생설에 의하면 그들의 통치 행위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국가의 카르마와 무관하지는 않다는 설만 추측할 뿐이다.
한 나라의 통치자의 행위는 한 개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국운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민족의 흥망성쇠에 관한 재료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도 하지만 극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 국가의 카르마에 의해 조절되고 영향을 받은 부분도 적지 않을 수 있다고 리딩은 지적한다.
내용출처 : 또 다른 이가 나를 낳으리 (박진여·최영식)
박진여
병리학을 공부하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그녀는 1999년 5월 파동명상연구소를 방문하고 난 뒤 자신에게는 뛰어난 영적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하여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향상시켰고, 그 결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의 전생까지 읽게 된다. 이때부터 현실에서는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 낙담하고 비관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전생을 읽는 여자』가 있다. 현재 동방파동명상연구소, 박진여 전생연구소 운영 중.
최영식
박진여를 영적인 세계로 이끈 스승이다.
현재 한국산업카운슬러협회 회원, 한국초능력협회 회원, 세계아미포기공 회장,
법운최면연구소 소장, 동방파동-명상연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여러차례 방송에 출연하였으며(1996년 PSB ‘생방송 출발 새아침’ 출연, 2001년 10월 SBS 호기심 천국 ‘최면술의 놀라운 진실’ 출연, 2002년 4월 KBS VJ 특공대 ‘최면의 세계’ 출연, 2003년 3월 I-TV 위험한 초대 ‘그 아이의 목소리’ 출연 (2002년 12월에 발생한 사하구 어린이 유괴 살해 암매장 사건 내용), 2004년 8월 SBS ‘세상발견 유레카’ 출연, 2004년 10월 PSB 현장 추적 ‘싸이렌’ 출연, 2005년 PSB ‘세상발견 유레카’ 출연, 2006년 KNN ‘세상발견 유레카’ 출연, 2007년 TVN ‘리얼리스트 묘(描)-태몽(胎夢)’), 경찰 수사에 협조한 바 있다(서울·부산·평택·삼척 경찰서 등). 2002년 12월에는 부산에서 발생한 ‘어린이 유괴 살해 암매장’ 사건을 파동명상요법으로 해결한 공로로 2003년 제 58회 경찰의 날을 맞아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으며,
현재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파동명상요법’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들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빙의, 그 영혼의 노숙자』, 『전생을 읽는 여자』가 있다

http://zum.com/?af=ay#!/v=2&tab=society&p=6&cm=newsbox&news=0352017070939027245
법을 이용한 국가폭력 손배소, 계속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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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zum.com/?af=ay#!/v=2&tab=politics&p=6&cm=newsbox&news=0022017070939035328
이언주 “조리사는 밥하는 아줌마, 왜 정규직 돼야하냐”
이 의원은 지난달 29일 국민의당 원내정책회의에서 “파업은 헌법정신에 따른 노동자의 권리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밥 먹을 권리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권리주장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9~30일 이틀간 급식 조리원, 영양사, 상담사 등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직무수당 인상, 정규직과의 차별해소를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다.
문제는 회의 후였다. SBS에 따르면 이 의원은 복도에서 일부 기자들과 만나 파업 노동자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후 SBS와의 통화에서는 파업 노동자들을 "미친놈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조리사는 별 게 아니다.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화가 돼야 하는 것이냐”고 했다고 SBS는 전했다.
이 의원은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부가가치나 생산성이 높아지는 일이 아니다. 정규직화를 해야할 이유가 없다. 미래에 학생이 줄어도 해고할 수 없게 된다”며 “현실적으로는 5년 내지 10년자리 계약직을 도입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9일 오전 국회 기자간담회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포퓰리즘 독재, 이미지 독재정부의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 인상 문제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모 대기업 사업장 노동자의 연봉은 성과급을 포함해 4500만원이 넘는다. 최저임금이 1만원으로 인상되면 이들의 연봉이 6000만원을 넘을 것이라고 하는데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등 한계선상에 있는 분들은 감당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친놈들'이라고 표현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이 의원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자신의 SNS에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입법권력자 국회의원이 힘들고 아파서 파업하는 국민에게 막말 비하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 측은 "현재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5년 내지 10년짜리 계약직에 호봉제가 아닌 직무급제 도입 법안을 준비하고
이 의원의 발언은 온라인커뮤니티에 퍼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표창원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SBS기사의 링크를 걸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입법권력자 국회의원이 힘들고 아파서 파업하는 국민에게 막말 비하 매도하는건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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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PMO***은 “우리 엄마 조리사였고, 이언주식으로는 밥 하는 아줌마였는데 얼마나 힘들게 일 하는 줄 아냐? 나는 엄마가 일한 만큼 대우를 받길 원했다. 그런데, 국회의원 이언주는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의 자세도 없다. 이언주 같은 사람은 국회의원 하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이언주 수석부대표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앞두고도 “지금은 안보 현안이 중요한 만큼 이번에는 국방을 잘 아는 남자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해 ‘외교장관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말로 성차별 논란이 일었다.

http://v.media.daum.net/v/20170711100505779
신체나이 80세 조로증소년 "스무살까지 살 수 있다면.."
http://news1.kr/articles/?3043614
"한잔 하자" 거절에 70대 폭행한 50대 공무원
술 취해 버스 안에서 폭행해 하반신 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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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media.daum.net/v/20170711060031859?d=y
서울 유학 보내느니 차라리 日 유학? 그럴만한 이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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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민정수석은
대선전 이미 알고 있었다 [안철수의 종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32733&CMPT_CD=RDAUM&utm_campaign=daum_news&utm_source=daum&utm_medium=related_news
"이게 다 박정희 독재 정권 때 일어난 일이에요"
[선감도의 비극⑥-3]
국가폭력,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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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맞으며 물고문까지 당했지만, 자유를 향한 소년 임용남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의 마지막 탈출은 몇 달 뒤인 1966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바다에 물이 빠지는 시기와 수심이 얕은 곳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탈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탈출은 그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 친구와 함께 했다. 소년 임용남이 수영대회에서 6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둘 때 1등을 한 친구다. 탈출에 성공한 뒤 둘은 헤어졌다. 친구는 고향 군산으로 갔고, 소년 임용남은 무작정 서울 동대문 쪽으로 향했다. 서울로 간 이유는 두 번이나 붙잡힌 수원에서 되도록 멀리 가고 싶어서다.
"그때부터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나지를 않았어요.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증오로 변해서, 만나게 되면 복수해야겠다고 작심하는, 정말 독한 사람으로 변한 거예요. 물론 엄마를 찾을 마음도 없어졌고요. 선감도에서 겪은 그 모진 일이 저를 그렇게 만든 거죠."
탈출해서 자유를 찾기는 했지만, 서울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신분이 불분명해 취직할 수도 없었고 신분 증명이 필요 없는 허드렛일을 하려 해도 배운 기술이 없어 여의치 않았다. 그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거지가 되어 한뎃잠을 자며 밥 얻으러 다니는 것이었는데, 다시 그 생활을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깡패를 하든지 소매치기를 하든지 선택해야 했어요. 집도 절도 없는 고아들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죠. 저는 사람 두들겨 패는 깡패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소매치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제가 배짱이 좋고 손기술도 있었나 봐요."
소매치기 몇 년만에 임용남은 그 계통에서는 꽤 알아주는 '꾼'이 되었다. 집념이 강하고 타고난 손기술이 좋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연습 덕분이기도 하다. 면도칼로 신사복 찢는 연습만 수천 번을 했다.
그에게는 독종이라는 소문도 따라다녔다. 선감학원에서 당한 지독한 고통이 그의 눈물을 말린 탓이다. 소매치기하다 형사에게 붙잡혀 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고도, 머리에 칼을 맞아 생살이 떨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음 한번 내지 않을 정도로 그는 독했다.
뒷골목 소매치기 인생이 목사로 변신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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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 인생 5년 차로 접어든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뿌리부터 뒤바꿔줄 사건이 벌어졌다.
"3대째 깡패를 하는 집안 아들이었어요. 할아버지, 아버지도 깡패인 거죠. 나이는 저보다 4~5살 많았고요. 영화 보러 혼자 극장에 갔다가 그 패거리를 만났어요. 저를 극장 뒤편으로 끌고 가더니 '돈 좀 나눠쓰자'고. 싫다고 했더니 주먹이 날아왔어요. 당시 저는 다리에 칼을 하나 차고 다녔어요. 제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찌르겠다는 각오로 살 때였거든요. 그 칼로 그놈을 찔렀어요."
이 일로 임용남은 경찰과 깡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경찰에 붙잡혔다. 그를 면회 온 깡패들은 '창자에 구멍이 3개나 났으니, 나오면 우리가 죽인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야 그 깡패를 3번이나 찔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경찰서에서 임용남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옛 동료를 만난 것이다. 그를 통해 임용남은 그가 살던 곳이 경기도 양평이었다는 사실,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 등 자기 일가의 내력을 알게 된다. 또한, 자기를 버린 어머니도 그의 도움으로 만나게 된다.
"1년 6개월 형을 마치고 나와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저는 어머니가 저를 만나면 무조건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죽이려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하다 말고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해야 하는데 그 용서라는 게 참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었어요."
그러나 용남씨는 결국 어머니를 용서했다. 신앙의 도움이 컸는데, 그 튼실한 신앙의 싹은 감옥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성탄절이었는데 어떤 목사가 신자들을 데리고 와서 노래를 하는 거예요. 귀 기울여 들어봤더니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 말 듣고는 코웃음을 쳤어요. 생각해 보세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제가 신이 있다고 믿었겠어요? 그래서 속으로 '주려면 수천만 원을 주지 고작 9원이 뭐야!' 이런 식으로 조롱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마음이 끌리는 거예요. 믿으면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요. 그래서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23살에 감옥에서 나온 용남씨는 어둠의 세계와 완전히 발을 끊었다. 그 대신 미친 듯이 성경을 공부해 우여곡절 끝에 신학대학에 들어가 전도사가 되었다. 여의도 대규모 기독교 집회에서 만난 부인과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예쁜 딸도 얻었다. 38살 무렵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 딸을 목숨 걸고 사랑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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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얻고 난 뒤에 용남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딸을 제발 목숨 걸고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어린 시절 학대를 받고 자란 자신이 행여나 자기 딸에게 그것을 돌려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도가 통했는지 딸을 정말 애지중지 키웠어요. 기도대로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죠. 제 인생을 통틀어 참 잘한 일을 꼽으라면 바로 이거예요. 딸을 사랑한 것. 받은 대로 돌려준다고 제 딸도 자기 딸한테 아주 잘합니다. 저한테는 손녀딸이죠."
임용남 목사가 성장기에 겪은 일은 사실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지난 일을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했다.
그의 인생 여정은 긴 독재의 터널을 지나온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선감학원은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 세워져 1982년까지 존재했다. 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다 박정희 독재 정권 때 일어난 일이예요. 군사 쿠데타 이후에 가장 많이 끌려갔으니까요. 국가 폭력인 거예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국가가,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선감학원에서 죽은 아이들이 묻힌 공동묘지(산감묘역)에 와서 사과를 해야 합니다.
박정희, 육영수, 박근혜 모두 비극적인데 너무 많은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 그럴 수 있어요.
선감학원도 그렇고 뻑 하면 남산으로 끌고 가서 죄 없는 사람 죽인 것도 그렇고. 성경에 보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하나님한테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게 나와요. 그 소리 듣고 하나님이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한테) 벌을 주었을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