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 기원은 전두환 신군부…
5공 옹호세력·지만원 등 재생산"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두환 신군부에 맞선 시민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항쟁은 '12·12 및 5·18 사건' 대법원 판결에서도 부당한 국가 폭력에 맞선 정의로운 저항으로 정의됐다.
'12·12 및 5·18 사건' 선고공판에 선 전두환 전 대통령(오른쪽). |
1980년 5월 당시 주요 사건과 역사 흐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북한'은 어쩌다가 5·18을 왜곡하는 주요 프레임이 되었을까.
전남대학교 5·18연구소는
왜곡의 기원을 학살 당사자인 신군부 세력이라고 지목했다.
5·18연구소에 따르면 '폭동', '사태', '소요' 등 최초로 항쟁에 대한 거짓 정보를 만들어 유포한 주체는 계엄군을 지휘했던 전두환 신군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5·18 때 학살도 발포명령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등 신군부 핵심 책임자로서 참회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왜곡은 1989년 국회 청문회, 1995년 검찰 조사, 1997년 대법원 판결, 1998년 특별법 제정을 거쳐 5·18 진실규명이 본격화하자 5공화국 정통성 옹호에 나선 일부 세력에 의해 확대됐다.
왜곡은 이후 호남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인터넷 콘텐츠와 결합해 5·18 희생자 시신이 담긴 관을 '홍어 택배'로 조롱한 인터넷 게시물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신군부 논리를 재생산한 지만원(75)씨는 '폭동을 일으킨 북한특수군이 요직을 차지했다'며 5·18이 기획·연출된 폭동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5·18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는 지만원씨. |
5·18기념재단이 올해 초 전문기관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10명 가운데 1명은 5·18 민주화운동이 북한과 연결됐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서 성인 11.9%, 청소년 8.4%가 '5·18이 북한과 연결됐다'는 질문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성인 13.3%, 청소년 12%는 '5·18이 불순 세력이 주도한 폭력사태'라는데 동의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한 '5·18정신 헌법 전문 수록'은 왜곡 대응 차원에서도 실질적인 방안이 될 것"이라며 "5월 정신이 헌법 전문에 들어간다면 5·18 왜곡은 헌법 정신 부정이 된다"고 말했다.
중·고생도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노찾사-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원곡)
http://v.media.daum.net/v/20170629202506083
'제보 조작' 수사망 좁혀오자 安 독대한 이준서..왜?
- 가짜 보수 (내 인생이 먼저다.) 돼지발정제 주적타령 노룩패스 음주운전전과 1+1 갑질
- 진짜 보수 (군부 독재에 맞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를 수호)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유시민, 안희정
전두환 체제에서 자신의 스펙을 쌓느라 국민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했으면서
이제와서 표를 구걸하기 위해 광주에 기웃거리는 것들을 정치판에서 깨끗이 몰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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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하루 100여구의 시체를 셌다.(···중략···)
전문적 군사 작전이었다."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오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정부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 시민들의 시신이 안치된 상무관 모습. 2017.05.14.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광주를 직접 취재했던 테리 앤더슨 전 AP통신 특파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5·18기념재단이 1일 공개한 유엔 5·18국제학술대회 발언록에 따르면 앤더슨은 5·18때 택시를 타고 광주에 들어와 취재를 진행했다.
앤더슨은 "정부가 1명 사망했다던 그날, 전 시내를 돌며 시체를 세었다.
그날 하루만 100구를 셌다. 그 다음 날도 100구 가까운 시체를 셌다"고 회상했다.계엄군이 도청에 다시 진입하던 5월27일 새벽,
그는 인근 관광호텔 창밖으로 군사작전을 목격했다.
그는 "전문적 군사 작전이었다.
도청은 공수부대가 옥상부터 차례차례 탈환해 나갔다.
전형적인 시가지 전법"이라며 "
몰래 사진을 찍으려다 저격수의 총격을 받았다.
외국기자 인줄 알면서도 사격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계엄군이 한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
그러다 윤상원(당시 시민군 대변인)의 불탄 시체를 봤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광주에서 시작했다.
최근의 촛불 탄핵에서 결실을 맺었다"고 덧붙였다.
5·18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폭력적인 시위대에 공수부대 같은 전투부대를 투입하면 어떤 결과를 빚을지 미국은 잘 알고 있었다"며 "20사단도 (투입을)승인했다. 미국은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술대회에 참여한 국제 정치학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도 "광주항쟁의 큰 의의는 미국이 민주주의 수호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국인들이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20사단 승인 등 광주와 대한민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
광주는 물론 미군정 아래 자행된 (제주)4·3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전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 CIA 문건에서도 그런 증거는 없다"며 "최근 한국 여행 중 한 중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북한이 광주는 물론 제주 4·3, 4·19혁명도 다 개입했다'고 주장하더라. 그런 사람들은 못하는 게 없는 북한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5·18은 물론 4·3때도 조용히, 남한에 대한 아무런 (군사적인)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http://zum.com/#!/v=2&tab=home&p=3&cm=newsbox&news=0032017060738388781
5·18단체, 12일 법원에 '전두환 회고록' 출판·배포금지 신청
지만원씨 '5·18 영상고발' 화보 발행·배포금지도 같은 날 신청
7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고 조비오 신부 유족이 소송에 참여한다.
5월 단체와 조 신부 유족은 '전두환 회고록' 가운데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 서술한 대목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발행·인쇄·복제·판매·배포·광고를 금지하도록 법원에 임시처분을 구한다.
재단 등이 지적한 내용은 1권에서 535쪽 등 18곳에 걸친 폭동·반란·북한군 개입 주장, 379쪽 등 4곳에 걸친 헬기사격 부정, 382쪽 등 2곳에 걸친 발포 부정이다.
'전두환 회고록' |
5월 단체는 관련 내용이 허위임을 입증하고자 '12·12 및 5·18 사건' 법원 판결문, 1980년 5월 당시 헬기사격 정황을 입증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안전감정서 등을 첨부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이 이를 어기면 1회당 500만원씩 배상 명령도 신청에 포함한다.
신청서는 8일 최종 법률자문을 거쳐 12일 오전 광주지방법원에 제출할 계획이다.
재단과 5월 3단체는 지만원(75)씨가 발간한 '5·18 영상고발' 화보 발행과 배포를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서도 법원에 함께 제출한다.
5·18이 북한 대남공작이라고 주장하는 지만원씨. |
화보집에서 5·18 당시 폭동을 선동한 북한특수군으로 지목당한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씨 등 광주시민이 가처분 신청인으로 나섰다.
지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5·18 배후에 북한군' 주장을 펴왔고, 5·18 단체 및 당사자와 민형사상 소송을 벌이고 있다.
http://v.media.daum.net/v/20170612085802467?rcmd=r
[신율의출발새아침]
故조비오 신부 조카 "전두환 회고록, 손으로 해를 가릴 순 없어"
입력 2017.06.12. 08:58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7년 6월 12일 (월요일)
□ 출연자 : 조영대 광주 용봉동 주임신부 (고 조비오 신부 조카)
- 전두환 회고록 가처분 신청, 5.18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위해 필요
- 전두환 회고록 가처분 신청,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 하는 일
- 전두환 전 대통령 측, 양심 대변하는 조비오 사제 싫었을 것
- 고 조비오 신부, 5.18 헬기 기총 소사 여러차례 자주 증언
- 고 조비오 신부, 5.18 진상 규명 위해 일신의 위험 무릅써
- 헬기 사격, 조비오 신부뿐 아니라 피터슨 목사, 많은 시민들 증언 있어
- 전두환 측, 5.18 치유 위한 씻김굿의 제물? 어이없어
- 전두환 회고록, 광주 시민들이 다시 발포 받는 심정
- 전두환 회고록, 아예 출판금지 해야 한다고 생각
- 5.18 진상규명, 진상 제대로 드러나지 못해 곡해되는 측면 있어
- 새 정부, 5.18 진상규명으로 새 역사 써 주길
◇ 신율 앵커(이하 신율): “37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당한 기분이다.” 지난 4월 출간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한 5·18 단체의 평입니다.
특히 고 조비오 신부에게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비난해서 고 조비오 신부의 유가족이 법적 대응에 나서기도 했는데요. 잠시 후,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가처분 신청에도 나선다고 합니다. 직접 입장 들어보겠습니다.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시죠. 광주 용봉동 성당의 조영대 주임신부,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조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 조영대 광주 용봉동 주임신부(이하 조영대): 네, 안녕하세요.
◇ 신율: 잠시 후에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에 대해서 출판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신다고 그러죠?
◆ 조영대: 네. 11시에 가처분 신청을 하기로 했습니다.
◇ 신율: 그 이유도 좀 말씀해주시죠.
◆ 조영대: 당연히 광주 5·18에 대해서 이렇게 역사적으로 왜곡하고 광주 시민을 폭도로 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명예를 훼손시키고, 더욱이나 거룩한 성직자인, 지금은 고인이 되셨으나 조비오 신부에 대해서 명예훼손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대로 있어서는 아니 되죠. 그러므로 이 차제에 5·18에 대한 진상 규명을 제대로 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단순히 한 개인의 감정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차원에서 이번에 이 회고록에 대해서 가처분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
◇ 신율: 고 조비오 신부님에 대해서 이렇게 가면을 쓴 사탄이다, 거짓말쟁이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 조영대: 당연히 자신들이 5·18의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이고 광주 시민들에게 발포 명령을 했던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죄상이 드러나는 게 당연히 싫었겠죠. 그러니까 자신들은 결코 죄를 저지른 바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 그래서 자신들에 대해서 자기들의 죄를 들춰내는 조비오 사제에 대해서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러니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단 말이 있나요. 그래서 감히 사제, 양심을 대변하는 사제에 대해서 그렇게 ‘성직자의 탈을 쓴 새빨간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명예를 훼손시켜 가면서까지 자신의 거짓을 감추려고 하는 거겠죠.
◇ 신율: 본인들은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단 얘기를 하고 있죠.
◆ 조영대: 그렇죠. 네.
◇ 신율: 그런데 고 조비오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죠.
◆ 조영대: 신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공적으로나 우리 가족들과의 만남 중에도 사적으로나 정말 5·18 헬기 기총 소사에 대해서 정말 사제들이 양심을 갖고서 자주 증언하셨죠. 그 신부님께서 무슨 발언, 개인적인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5·18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증언한 것이죠.
◇ 신율: 국과수에서 지난 1월이었었죠. “광주 전일빌딩에 남은 탄흔은 헬기 사격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도되고 있는데요. 그러면 고 조비오 신부님께서 증언한 상황에 대한 증거가 나왔다.
◆ 조영대: 그런 거죠. 네, 맞습니다.
◇ 신율: 그렇죠.
◆ 조영대: 이것은 조비오 신부님만이 증언한 게 아니라 피터슨 목사님도 사진도 제출해주셨고요.
그 외에도 많은 시민들의 증언이 있고 목격자들이 많이 나와 있잖아요? 다만 무엇보다도 우리 사제는 그 누구보다도 양심적으로 정말 하느님 앞에서 한 점 거짓 없이 진상 규명을 위해서 증언하신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죠.
◇ 신율: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자신은 5·18과 관련이 없다, 5·18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 됐단 얘기도 있고요. 그 부인이신 이순자 씨도 우리 내외도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 조영대: 참으로 너무나도 정말 파렴치합니다.
어떻게, 손으로 해를 어찌 가릴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이 역사에 자기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은 아무리 무슨 회고록을 낸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인데요. 그렇게 자기들이 광주 시민들에게 무차별로 난사하고 그렇게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희생제물이라는 말을 했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요. 오히려 그런 말들 때문에 광주 시민들은 정말로 더욱 더 분노를 감출 수 없고요. 정말 그렇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다시 발포를 받는 심정입니다.
◇ 신율: 직접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 조영대: 당연히, 정말 사과를 이미 했어야 하고요. 이제 나이도 그렇게 들었으니까, 이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진실로 회개하고, 그렇게 해서 정말로 역사와 국민 앞에서 사죄하고 그래야 할 판에 오히려 그렇게 온갖 거짓을 말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신율: 왜 그렇다고 보세요?
◆ 조영대: 그게 바로, 이게 바로 사악한, 악한 세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악마라는 단어를 쓰면 싫어하실지 모르지만, 분명히 악마는 존재하고 그런 악마에 점유당한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는 그런 거짓이 끊임없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전두환, 악당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사악한 악의 세력에 의해서 그 영혼이 점령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신율: 지금 회고록 중에서 어떤 부분이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 조영대: 헬기 사격이 없었다든가, 5·18은 폭동이라고 하는 말이라든가, 또는 북한 간첩이 개입해서 광주 시민들이 선동돼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든가, 무차별 민간인 살상은 없었다, 계엄군 발포 명령은 없었다, 자신이 씻김굿의 제물이었다, 거의 10가지가 넘는 허위사실을 다 고쳐야 하고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 회고록을 아예 출판금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신율: 지금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뤄졌다고 파악하십니까?
◆ 조영대: 사실 진상 규명이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다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그때 정부 하에서, 그리고 공안 시절에 모든 관련 자료들이 제거되거나 혹은 왜곡되거나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그 진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안타깝게도 저기 다른 동네에서는 아직도 5·18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고요. 그리고 오히려 그들의 거짓 증언대로 알고서 곡해하고 있는 상황도 진행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차제에 그런, 참으로 이제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으니까 올바로 진상규명이 돼서요. 정말 5·18 민주항쟁이 이 나라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참된 민주화를 위한 횃불이었고,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라 참으로 질서 있게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진정으로 피를 쏟아 싸웠다는 것을 밝혀내는 새 역사가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신율: 진상 규명, 이 부분이 더 확실하게 돼야겠단 말씀이신데요. 그렇죠?
◆ 조영대: 네네.
◇ 신율: 그런데 이번 5·18 기념식,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도 이뤄졌고요. 대통령의 진상 규명에 대한 확고한 의지도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하시는 분들도 많은데요. 그러면 새 정부에 꼭 바라는 점이 있다면, 진상 규명, 이 부분부터 좀 확실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게 있으시면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죠.
◆ 조영대: 정말 감동스럽고 문재인 새 대통령은 저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정말 여러 적폐들이 많이 청산돼야겠습니다만, 특별히 이 5·18 관련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 잘 드러나 있듯이, 참으로 잘, 이 진상 규명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새 정부에서 정말 많이 노력해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신율: 잘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럼 오늘 가처분 신청을 하시고요. 명예훼손 고소를 지금 하신 거예요?
◆ 조영대: 네.
◇ 신율: 네, 잘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조영대: 감사합니다.
◇ 신율: 지금까지 고 조비오 신부님의 조카시죠. 조영대 신부와 함께 했고요. 저희가 이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입장이 있다면, 저희가 또 한 번 거기에 대한 입장을 들어보는 시간도 가능하면 갖도록 하겠습니다.
http://v.media.daum.net/v/20170805120952177
1980년 5월, 나는 광주의 택시운전사였습니다
2017.08.05
“정말 그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참상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는 훗날 광주시민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광주시내 곳곳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과 이에 맞서 무장을 시작한 시민들의 모습을 목격한 그는 “그때 사람들의 구호는 ‘싸우다 죽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8월 2일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는 1980년 5월 ‘고립된 섬’이었던 광주로 잠입한 독일 기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광주로 향한 서울의 택시운전사 김사복씨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영문조차 모른 채 택시비 10만원을 벌기 위해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무작정 광주로 향한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이 목격한 1박 2일간의 참상과 항쟁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그들은 광주의 토박이 택시운전사 황태술(유해진)과 대학생 구재식(류준열)의 도움으로 취재를 마치고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오고, 그곳에서 자행된 일들을 세상에 알린다. 힌츠페터는 생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김사복씨를 찾았지만, 그의 행방은 현재까지 묘연하다. 영화 속에서는 김씨가 가명을 쓴 것으로 그려졌다. 결국 힌츠페터는 김사복씨와 재회하지 못한 채 지난해 1월 눈을 감았다.
영화는 서울의 택시운전사와 독일 기자라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광주의 참상을 다루지만, 광주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조력했던 영화 속 ‘조연’들은 실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이끈 항쟁의 ‘주연’들이었다. 생계의 전부인 택시를 무기 삼아 “정말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 1980년 5월 광주의 택시운전사들이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한 8월 2일,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광주의 택시운전사들을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폭력이 아니라 살인이었어요.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두 눈으로 목격한 겁니다. 그날 광주 곳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이행기씨(66)는 그때 스물아홉의 택시운전사였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던 1980년 5월 19일, 그는 광주 북구 무등경기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밀려 들어오면서 시외버스들은 시내의 공용버스터미널로 진입하지 못한 채 무등경기장에 승객을 내려줬다. 손님을 태우기 위해 택시들이 모여들었고, 택시운전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목격담’이 오갔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위축됐던 시위의 불씨를 살린, ‘5·20 차량시위’의 시작이었다.
“계엄령 확대 이후, 대학생들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 있었어요. 공수(공수부대원)들이 보고 있다가 앞줄에 있는 주동자들을 딱 찍으면, 끝까지 따라가 기어코 잡습니다.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택시들이 그럴 때 문 열어놓고 기다리다가 학생들을 많이 피신시켜 줬어요. 한번은 도망치는 학생을 태우고 출발하는데, 쫓아온 공수가 대검으로 찔러 칼이 택시 문 틈에 끼인 채 총을 달고 달린 적도 있습니다.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정말 많이 실어날랐죠. 그
래서 택시가 (계엄군에) 미운털이 많이 박혔어요. 시내에서 운전하다 보면 계엄군이 택시, 버스할 것 없이 세운 다음 무조건 끌어내립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이 타고 있으면 무조건 끌어내린 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때렸습니다. 우리가 항의하면 기사들도 때리고…. 우리는 하루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운전을 하잖아요. 그래서 다 목격한 겁니다.”
분노한 택시운전사들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미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헬기까지 동원됐고, M16 소총에 착검까지 한 공수들이 마치 ‘살인면허’라도 받은 듯 거리 곳곳에서 마구잡이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계엄군은 부상자를 싣고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를 발견하면, 차를 세워 또다시 부상자와 운전사를 때리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계엄군이 경찰을 구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날 오후 4시50분, 조대부고 3학년 학생이 계엄군의 총에 맞았다. 첫 발포였다. 국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는,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광주의 이런 상황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학생시위는 광주시민들의 항쟁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선 거죠. 우리 기사들은 차가 있으니, 우리가 시민들의 방패가 되어주자고.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고.”
약속한 5월 20일 저녁 6시, 무등경기장에 택시들이 집결했다. 소문을 듣고 모인 택시는 200대를 넘어섰다. 태극기를 앞에 걸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의 전부인 택시에 올라탔다. 당시 스물여덟의 택시운전사였던 장훈명씨(65)는 광주역에서부터 차량시위 행렬에 합류했다. “(계엄군이) 광주를 몰살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본 것들이 그랬습니다.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컸습니다.”
택시들은 일제히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으로 향했다. 가장 앞줄에는 대형트럭과 버스가 서고 뒤에는 택시 수백대가 뒤따랐다. 시내 곳곳에 설치됐던 계엄군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졌다. 택시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계엄군의 철통 같은 저지선 앞, 교착 상태에 있던 시위가 새 국면을 맞는 순간이었다. 장씨는 “평생 그런 환호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우리 일생에”라고 말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역사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저)는 당시 택시운전사들의 차량시위를 “항쟁의 결정적 비약이 이뤄지는 두 번째 계기”라고 평가한다. 첫 번째 계기가 됐던 5월 19일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 시민들의 시위가 “즉흥적이고 비조직적”인 시위였다면, 이날 차량 행렬은 “즉흥적으로 이뤄진 시위였지만 운수노동자들의 강력하고 일체화된 행동에 강한 폭발력이 응축돼 있었던” 조직적 시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엄군의 진압은 잔혹했고, 차량시위의 대가 역시 평생 가혹했다. 시위 차량이 금남로의 계엄군 저지선에 이르자, 계엄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아대며 이들을 진압했다. 방독면을 쓴 공수들이 뛰어들어 차량 유리를 부수고, 운전사를 끌어내려 집단 구타했다.
이행기씨는 그날 계엄군에 잡혀 도청으로 끌려갔다. 계엄군이 21일 집단 발포 후 도청에서 퇴각하면서 가까스로 풀려나올 때까지, 무자비한 폭행이 이어졌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계엄군의 군홧발에 찍혀 척추뼈가 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치료를 받은 곳은 산부인과였다
.
“거의 3분 간격으로 사람들이 끌려 들어왔어요. 알고 보니 친구가 같은 방에 있었는데, 그때는 서로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얼굴이고 몸이고 온통 피곤죽이 되어버려서,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고 얼굴이 피범벅이라 알아보기 힘든 겁니다. 그때 공수가 했던 말을 기억해요. ‘나는 너희들 따위 평생 불구로 만들거나 죽여버려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군홧발 뒤축으로 엎드린 사람들의 척추를 찍어 누르고, 야구방망이 크기의 곤봉으로 머리를 강타했어요. 가랑이 속으로 머리를 박고 앉아 있었는데, 공수가 들어오면 앞 사람의 몸이 좌우로 벌벌벌 떨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광주의 택시운전사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전영도씨(가명·65)는 그날 차량시위에 참여했다가 금남로에 닿기도 전 신안사거리에서 계엄군에 체포됐다. 전씨는 “나는 두들겨 맞고 전남대로 끌려간 이후, 기억이 별로 없다”면서도 공수들의 그 ‘눈빛’만은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건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어. 그때 군인들에게 술만 마시게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건 술이 아니라 약을 먹어 약에 취한 눈빛이었어. 모두 흐리멍텅하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것이…. 사람이면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못해요.”
그날 이후 37년, 여전한 트라우마
광주의 ‘황태술’들은 영화 <택시운전사>를 어떻게 봤을까. 장훈명씨는 “영화 만들기 전에 장훈 감독을 만나 몇 시간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면서 “그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가 많이 있었지만, 우리 택시기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더 반가웠다”고 말했다.
그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화 끝부분 검문소에서 서울 번호판이 적발됐는데 하사관 한 명이 눈 감아줘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서 “당시 운동의 불씨를 다시 살린 기사들의 차량시위가 영화에 나오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웠다”고 말했다.
영화 속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은 기사들을 응원하며 주먹밥을 나눠주는 시민들과 만나고, “광주에서 택시는 다 공짜”라며 무료로 기름을 넣어주는 주유소에서 놀라기도 한다. 1980년 택시운전사로 항쟁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했던 김동희씨(77)는 “당시 광주시민은 모두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양동시장에서 시민들한테 음식 나눠주고, 버스고 택시고 할 것 없이 시민들 태우고 돌도 나르고…. 그때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돼 있었지만, 우리는 똘똘 뭉쳐서 모두가 한마음이었어요.”
매년 5월 20일이 되면 ‘5·18 민주기사의 날’을 맞아 무등경기장부터 금남로까지 당시의 차량시위를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80년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버스·택시기사들이 주축이 된 ‘5·18 민주기사동지회’가 1986년부터 매년 차량 행진을 주도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재현’조차 쉽지 않았다.
민주기사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행기씨는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하면 거기서부터 막혀서 금남로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경찰이 매번 막아 문민정부 때가 되어서야 금남로까지 재현 행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동지회 회원은 30여명 남짓이다.
이씨는 “과거 정권의 끊임없는 와해 시도와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초반에는 회원이 많았지만 점점 빠져나갔다”면서 “37년이란 세월이 흐르다 보니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37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때의 기억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생존자들에게 남은 것은 신체에 각인된 고통,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트라우마다. 전영도씨는 “몇 년간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 나를 때리던 공수놈의 눈빛, 내 앞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선명해. 교도소로 이송될 때 공수들은 밀폐된 이송트럭에 최루탄을 터트렸어요.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때 트럭 안에서 여럿이 죽었어요. 5월 20일에 체포돼 교도소에서 16일인가 있다가 각서 쓰고 나왔는데, 아버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한국전쟁도 겪었지만 이렇게 잔인한 건 본 적이 없다고, 9남매가 아버지 눈물을 그 때 다들 처음 봤어요. 어머니는 몇날 며칠을 내 속옷을 빨아도 피가 안 빠진다면서 우시고…. 트라우마센터에도 가봤지만, 이게 나을 병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때 일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이행기씨는 계엄군의 폭력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폭력이 아니라 살인이었다”고
못 박으면서도 “트라우마 치료는 우리뿐만 아니라 계엄군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옛날 일이지만 항쟁 이후에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찾아오던 공수들이 있었어요. 그 어린 군인들도 누군가 시켜서 사람을 죽인 건데, 자꾸 떠오르고 살 수가 없으니까 광주에 다시 찾아온 겁니다. 부들부들 떨며 울면서 증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누가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건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각보다 위험한 왜곡 영화 <택시운전사>는 철저히 ‘외부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한다”며 투덜거리던, 서울의 평범한 택시기사의 눈으로 본 광주의 이야기다.
장훈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면서 “광주에 살지 않아 그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을 만섭이 대변해야 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영화는 흥행을 이어가고 있지만, 80년 광주라는 비극적 소재를 저항보다 피해의 서사로만 다루는 이런 전형성 탓에 평단에선 “어리둥절한 외부인의 시선 이상의 것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황진미 평론가)라는 따가운 평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외부인의 시선’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월 광주를 왜곡하는 현실로 인해 여전히 유효한 장치로 기능한다. 장훈 감독 역시 “여전히 광주민주화운동 자체를 왜곡해서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가 작은 변화를 일으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영화는 서울에서 온 택시기사의 시선으로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비추지만, 영화 속 ‘조연’인 광주의 택시운전사 황태술(유해진)은 실제 5월 항쟁의 ‘주역’이었다
80년 5월, 광주의 택시운전사들도 망각보다 위험한 ‘왜곡’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훈명씨는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사를 보면서 온 가족이 울음을 터트렸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말처럼 그만큼 진실은 오랫동안 은폐되고 왜곡됐으며, 그래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가 5월 광주였다.
이행기씨는 “항쟁은 열흘이었지만, 고통은 37년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몸의 상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상처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아직도 우리를, 그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광주시민들을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 북한군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어요.
이제는 유공자라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고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돕니다.
이제 지나간 세월이 곧 40년이에요. 20대 택시기사가 이제 60대 노인이 됐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 감을 때는 명예로울 수 있게, 80년 광주를 폄훼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http://v.media.daum.net/v/20170822114401501
'5·18 광주 폭격을 저지시켰다' 다시 주목받는 증언들
배동민 입력 2017.08.22. 11:44 댓글 2085개
1980년 5월18일 이후 광주를 향한 공군의 출격 대비 명령이 내려졌고, 전투기에 땅으로 쏟아붓는 공대지폭탄을 장착하고 대기했다는 전투기 조종사의 증언이 나오면서 5·18 당시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던 미국인들의 증언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22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5·18 당시 광주와 인근에서 활동한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Tim Warnberg)는 지난 1987년 자신이 작성한 일지와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광주항쟁 : 목격자의 견해The Kwangju Uprising : An Inside View)'라는 논문 형식의 종합적인 보고서를 하와이 대학의 한국학 전문잡지(Korean Studies)에 발표했다.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1980년 5월18일 이후 광주를 향한 공군의 출격 대비 명령이 내려졌고, 전투기에 땅으로 쏟아붓는 공대지폭탄을 장착하고 대기했다는 전투기 조종사의 증언이 나오면서 5·18 당시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던 미국인들의 증언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22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5·18 당시 광주와 인근에서 활동한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Tim Warnberg)는 지난 1987년 자신이 작성한 일지와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광주항쟁 : 목격자의 견해The Kwangju Uprising : An Inside View)'라는 논문 형식의 종합적인 보고서를 하와이 대학의 한국학 전문잡지(Korean Studies)에 발표했다.
팀 원버그는 5·18 당시 전남대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했으며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이후에는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보고서에서 '5월26일 늦은 오후에는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의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 기자를 만났다. 그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설득해 광주를 폭격하는 것을 저지시켰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팀 원버그는 보고서에서 '광주항쟁이 외부의 정치 선동가들이나 공산주의자와 같은 불순 세력들에 의해 사전에 공모되고 계획된 게 아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학살에 따른 자연발생적이고 자발적인 시민 저항이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아놀드 피터슨도 1994년 펴낸 책 '5·18 광주사태'에서 "미군 하사로부터 '한국 공군이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외에 "(1980년 5월)21일 오후 3시15분쯤 헬기가 거리의 군중을 쏘기 시작한 이후 병원에 환자들이 몰려들었다"며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는 "그 동안 폭격설 등이 몇 차례 언급이 됐는데 공군의 작전이 확인된 적이 없어 낭설로만 생각했었다"며 "1980년 당시 광주에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소문으로 나갔던 공군 폭격설을 공군사관학교 출신 공군 조종사가 첫 증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군이 당시 어떤 식으로 광주에서의 작전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입증한 전일빌딩의 총탄 흔적을 포함해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의 조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며 "발포 명령을 포함해 누가 그것을 명령했는지 추적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
한편 JTBC는 1980년 수원 제10전투비행단 101대대에서 근무했던 F-5E/F 전투기 조종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5·18 사나흘 뒤인 5월 21일에서 22일 사이 비행단 전체에 출격 대기 명령이 내려졌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당시 '전투기에서 땅으로 쏟아붓는 공대지폭탄을 장착하고 (광주 출동을)대기했다'고 증언했다.
http://v.media.daum.net/v/20170919030438523
5·18 행불자는 어디에.. 암매장 장소 제보 잇달아
2017.09.19
.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지만 최근 5·18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잇달아 발의됨에 따라 발포명령자와 암매장 의혹 장소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5·18 행불자를 찾기 위한 암매장 의혹 장소 발굴은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 이뤄졌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18기념재단은 추석 전 행불자 암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계엄군 장교 메모 토대로 진행 방침
[동아일보]
5·18기념재단은 광주 북구 각화동 옛 광주교도소에 행방불명된 5·18희생자들이 암매장됐을 것이라는 의혹제보가 잇달아 발굴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18일 밝혔다. 사진은 옛 광주교도소 전경. 광주시 제공 |
5·18민주화운동 관련 집회에서 빠지지 않고 불리던 민중가요 ‘오월의 노래’ 구절이다. 노래에는 광주시민들이 1980년 5월 후 발포명령자와 희생자 암매장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이 담겼다.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지만 최근 5·18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잇달아 발의됨에 따라 발포명령자와 암매장 의혹 장소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암매장 의혹 장소로 거론되는 옛 광주교도소 터와 광주 동구 주남마을 등에서 진실이 드러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 행불자는 어디에
광주시는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은 인원이 사망 155명, 행방불명 82명, 부상(상이) 후 사망 111명, 부상·구금·연행 등 5420명을 포함해 총 5768명이라고 18일 밝혔다. 5·18 관련자 보상은 1990년부터 시작해 올 연말까지 7차 심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행방불명자는 5·18 당시 행방이 묘연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난해 심사과정에서 행불자 1명이 추가됐다. 이 행불자는 5·18 당시 고교 2학년 또래다. 광주시 관계자는 “행불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고교 학적부나 병적기록에 5·18 당시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5·18민주묘지에는 현재 무명열사의 묘 5기, 행불자 묘 67기가 남아있다. 광주시 관계자는 “행불자 일부의 가족이 묘지 안장을 원치 않아 숫자가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5·18 직후인 1980년 5, 6월경 시민들이나 가족들이 암매장 장소에서 희생자 시신을 찾은 곳은 4곳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암매장으로 발견된 시신은 옛 광주교도소 터와 주변에서 11구, 전남대 공대 뒷동산에서 3구, 주암마을에서 2구, 남구 노대동에서 1구였다. 5·18 후 광주 남구 송암동과 북구 일곡동 주민은 암매장되거나 군용 트럭에 옮겨지는 시신을 봤다고 주장했지만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5·18 행불자를 찾기 위한 암매장 의혹 장소 발굴은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 이뤄졌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18기념재단 관계자는 “의혹이 제기된 곳을 발굴했지만 도시개발 등으로 지형이 대부분 변화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 암매장 의혹 장소 4차 발굴
암매장 의혹 장소로 유력하게 주목받은 곳은 옛 광주교도소와 주암마을이다. 옛 광주교도소는 1980년 5월 21일부터 나흘 동안 3공수여단이 체류하면서 발포를 해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정수만 전 5·18 유족회장은 “5·18 당시 광주교도소와 그 주변에서 희생된 인원에 대해 계엄사령부 발표는 27명, 보안사령부 기록은 28명으로 돼 있다”며 “하지만 5·18 발생 한두 달 이후 광주교도소에서 시신이 확인된 희생자는 11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주남마을 사건은 1980년 5월 23일 11공수여단 병력이 광주∼화순을 오가는 차량들에 사격을 가해 탑승자들이 숨진 사건이다. 5·18기념재단은 주남마을 사건 당시 일부 희생자들이 암매장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5·18기념재단은 추석 전 행불자 암매장 장소로 추정되는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5·18기념재단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 장교가 작성한 메모를 토대로 행불자 발굴 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다. 4차 발굴 작업은 광주시 등의 지원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양래 5·18재단 상임이사는 “최근 암매장 의혹 제보가 7건 접수됐는데 화순 너릿재 등은 발굴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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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v.media.daum.net/v/20170824075503509?rcmd=rn
[인터뷰]"내 아버지가 택시운전사 김사복, 증거 있다"
CBS노컷뉴스 김정훈 기자·강민주PD 입력 2017.08.24. 07:55 수정 2017.08.24. 09:19 댓글 1553개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김정훈 기자
◆ 김정훈> 어제 오후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를 만났습니다. 김씨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영화 '택시운전사' 속 김사복씨이고, 1984년 세상을 떠났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 김승필씨를 직접 만나본 겁니다.
김승필씨 트윗 내용. (사진=트위터 캡처)◆ 김정훈> 김승필씨의 말로 직접 들어보실까요?
[녹취]"아버님 (이름이) 김사복씨. 선비 사(士)에 복 복(福)자. 저는 사력을 다해서 아버님이 김사복씨, 피터씨와 다녀오신 분이다 하는 걸, 온 국민이 알게끔..."
◇ 김현정> 그런데 트위터 글을 두고도 진짜 김사복씨의 아들 맞느냐는 진실 논란이 벌어졌거든요. 김사복씨가 김승필씨의 아버님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 김현정> 그동안 영화 제작사, 또 언론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김사복씨를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왔거든요. 그렇게 노력했어도 김사복씨를 안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잖아요?
◆ 김정훈> 그동안 김사복씨를 찾는 단서는 '택시운전사'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도 그 당시 택시운전사들을 추적해왔습니다. 택시운송사업조합, 개인택시운송사업조합, 도로교통공단 등을 모두 취재해봤지만 1980년에 택시운전대를 잡았던 김사복씨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사복씨는 번지수가 잘못됐다고 말합니다. 김사복씨는 일반적인 택시운전사가 아니었다는 게 김승필씨의 설명입니다. 들어보시죠.
[녹취]"두 대는 호텔 명의로 된 영업용 호텔택시고 하나는 자가용. 아버님이 그때 호텔택시 두 대랑, 아버님 자가용 한 대까지 석 대 가지고 계셨어요. 그 중 한대로 광주 가신 거에요."
◆ 김정훈> 실제로 1980년대에는 호텔택시라는 게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1978년 도입됐는데, 호텔에 소속된 형태로 예약을 받아 손님을 태우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실어주는 것이죠. 일반 차량과는 번호판 색깔만 다를 뿐, 지붕 위 캡도 없어서 여느 고급 승용차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특성상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영업을 했고요.
◇ 김현정> 그래서 개인택시든 회사택시든, 택시운전사 명단 어디에서도 김사복씨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거네요?
◆ 김정훈> 네. 김승필씨 주장에 따르면, 김사복씨가 영어도 썩 잘해서 많은 외신 기자들이 그를 단골 삼았다고 합니다. 힌츠페터는 독일 TV방송사의 일본 특파원 아니었습니까? 그가 한국에 오려고 마음을 먹고는 한국 주재 외신기자를 통해 김사복씨를 소개받았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그래서 힌츠페터가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김승필씨의 호텔텍시를 타고 광주를 향했다는 것이죠.
◇ 김현정> '택시운전사' 영화 내용과는 다른데,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가 1959년생이면 1980년엔 20대였겠네요. 그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던가요?
◆ 김정훈> 그가 22살이었을 때였는데, 광주의 참상을 직접 보고온 아버지 김사복씨가 울분을 터뜨리고 술도 많이 드셨다 하네요. 직접 들어보시죠.
인터뷰 중인 김승필 씨.◆ 김정훈> 다행히 군부로부터 고초를 겪지는 않으신 걸로 알고 있다 하고요, 그로부터 4년 뒤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셨다는 게 김승필씨의 설명입니다.
◇ 김현정>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의 진실을 알린 김사복씨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무나 뒤늦게 그 노력들이 알려지네요.
◆ 김정훈> 김승필씨는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아버지의 행적을 말할 수 없었고 그 이후에는 스스로도 잊고 살았다고 하는데요, 영화를 보고 아버지의 이야기임을 확신하고는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고 합니다. 또 바람도 있다는데, 이 부분 들어보시죠.
[녹취]"영화가 붐일 때 국민들이 잠깐 기억하고 마는 아버님 모습이라면, 그건 자식된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피터 아저씨가 망월동 묘지에 가 계시잖아요. 저는 영원히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망월동 옆에 피터(힌츠페터) 아저씨 옆에 모셨으면 합니다."
◆ 김정훈> 또 김사복씨를 두고 일각에서 북한의 첩자 아니냐는 설까지 유포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덧붙였습니다.
◇ 김현정> 숨겨진 영웅을 둘러싼 어처구니 없는 논란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사실 관계가 드러나야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분이, 영화 속 그 김사복씨의 아들인지는 아직 100% 단정할 수 없지 않나요?
◆ 김정훈> 김사복씨가 동명이인일 수도 있고, 실제 호텔택시를 몰았는지도 확인해 봐야겠죠. 그 때문에 김사복씨 행방을 찾아온 영화 제작사 측은 김승필씨의 이야기를 접하고도 며칠째 '확인중'이라는 신중한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정황 증거들도 보여지는데요, 그러한 점들은 CBS 노컷뉴스를 통해 그리고 내일 이 시간 <훅!뉴스>를 통해 더 자세히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http://v.media.daum.net/v/20170601133737707
멀쩡한 시민 죽여놓고는 할말없으니 핑계라고 한게 북괴군이란다. 개놈들..
북한 개입설 씨부리는 일베들은 현장에 있었던 외신기자의 말도 안 믿지
DAUM 바로가기라쇼몽
광주에 북한군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놈들이야말로 국민을 우민화시키는 진정한 빨갱이들이다.
테토
나는 한때 김대중을 존경했었다. 허나 자기를 납치해 죽이려했던 다카키마사오와 자신을 탄압하고 자택연금 투옥시킨 전대갈을 살려두는 역사적 실수를 한것이다. 그들을 살려둠으로서 그는 정치보복을 안하는 대인배 대통령이 될수 있었지만 지금의 국민들에겐 똥덩어리 여러개를 남겨놓고 잠든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과오가 아닐수없다. 집권후에 전두환에서 사형, 박정희 후손에 대한 대대적 사정을 가해 불법재산을 환수했다면 현재의 국정농단과 전대갈 회고록 개소리가 있겠는가? 할일은 욕을 먹더라도 해야 그 후손들이 덜 힘들다. 꼭 적폐청산하자!
DAUM 바로가기온달이
이 나라의 수구세력이 득세했을때... 얼마나 많은 시민이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갔는지... 그분들께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어벤져스
이런 미국도 518을 알고 군대를 승인했었군.. 미국도 공범 이네
엘지트윈스
20사단 출신으로써 참 부끄럽고 할말없다 그 당시 우리 언론은 뭐했나? 쥐박이 닭년 빨던것처럼 그 ㅈㄹ했지 기레기색히덜
sarangha
한반도에 전라도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항상 전라도가 국가의 존재를 위해 희생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을 하였다. 동이족의 순수한 피를 가진 전라도가 있기에 한국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멘토링\\
저들의 관을 다 태극기로 덮은거 보이냐? 탄기국 따위가 흔들고 다닐 태극기가 아니라 말이다
오리시스 파렴치 판 검사 잡는다
그때 담양에 존재하던 7공수인가 5공수인가 하는 부대도 동원이 되었는데 하여간 전두환 개색캬가 인간을 살육하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런 인간 백정이 정권을 잡고 떵떵 거리고 살고 있지 몽둥이로 패서 죽여야 할 것이다
젬마
미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과연 몇명이나 자각하고 있을까요?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관심이 없다. 자국의 이익뿐이다. 보수는 이제 안보로 미쿡을 들먹이지마라.. 사드는 깡통 무기 장사일 뿐이다.
어나
경상도 개노답들은 지금도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명절날 좀 출세한 놈들(고위 공무원, 정치인 등)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은 것이다. 유언비어를 뿌린 핵심은 김기춘과 같은 박정희의 끄나풀이다. 난 경상도 출신이고 평생 경상도에 살면서 이런 무지랭이들 때문에 진저리를 낸다. 무식하면 입이라도 좀 다물던지.. 지금도 박정희가 영웅이래 그래서 그 멍청한 년을 대통령으로 뽑아줬지 대통령이면 옛날 임금인 줄 안다니까.
박사모들아~~ 이것이 팩트다~~ 우리의 주적이 어디 인지 잘 생각해 봐라~~
관민
지금도 사망자 공식집계가 2백명이 안돼 ~!! 근데 우리 광주시민들은 도로에 널려있는 시신들을 너무나도 많이 봤거든~!! 비공식 집계가 2천명쯤이야 이게 맞아~!! 시신 못찾으면 사망 아니냐? 대부분 암매장 했는데~!!
정의로운 사회
"이제 그만 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시오 전시도 아니고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다니 그것도 수 백명씩이나 그러고도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5.18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는 이 땅에 화해란 없으리라
몽블랑
끝까지 북한군개입을 우겨대는 지만원이는 책자까지만들어서 배포하고있다 광주시민이양살로 폭도라면서 !
지그재그
대략 수천명이상돌아가셨다고보면은될것같음. 그당시 계엄군이 광주시민다죽인다고 난리났었슴 나도귀동냥ㅇ8로들었지만... 광주에서 100리길을 걸어서 피난떠났다함
Fred
계엄군 우두머린 다름 아닌 전두환 일당이고 그들이 세운 정당이 민정당이었다. 그 민정당 후신이 다름 아닌 현 자유한국당이다. 한마디로 한나라 새누리 자유당의 뿌리는 군부독재 아니겠나? ㅉ
GS
전 제주출신 입니다 4.3사건때 저희 작은 아버님 누님이 (두살)때 총에 맞고 죽었읍니다. 아무련 보상과 사과도 없읍니다.ㅜㅜ
도울 세상
애써 외면하고 전라도의 문제라고 빨갱이의 소행이라고 남의 희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비양식 비민주적인 일반 시민들도 정말 반성해야 한다
낯선변기
5. 18 북한군 개입. .등등 유가족 폄훼 한 전두환 . 지만원. 정미홍 . . 등 모두 고발하여 죄를 물어야 함 !.
skatksthskan
모든 정황이 북한군 개입이 말도 않되는 허구라는게 확실한데다 당시 군수뇌부와 미국 모두 북한이 개입은 없었다고 하는데도 북한 개입설을 퍼트리는 것은 박근혜가 무죄라며 태극기를 흔들어대는 저들의 행태와 너무도 닮아 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거짓을 창조하고 그 것이 사실인양 주장하는 더러운 족속들
코스모스
망월동 묘지에 묻힌 사람보다 행방불명 된 사람 또한 많지.
oys0815
전두환과 그 자식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물쓰듯 쓰면서 호화생활을 하는게 이게 정상인가? 4천만원이 넘는 시계를 술집여성한테 선물한 전두환의 삼남이 질질 흘리고 뿌리고 다니는 돈은 광주시민들의 피의 댓가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전두환 살인마와 그의 일족을 우리는 언제까지 두고 봐야하는가? 감옥에서 죽어서나 나와야할 살인마를 왜 국가는 연희동 대궐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게 내버려두는가????? 망월동의 혼령들이 아직도 울부짖고있다!!!!
달님사랑이 곧 노통사랑
광주는 국가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쿠테타세력에 대항에 시위했지 그런 광주를 전두환은 총칼로 진압했고 이 쿠테타정권의 총칼에 저항에 광주가 무장한거지 전두환정권은 쿠테타세력이야 알간 일베충들아??
임기현
살인마를대통령님이라고 칭송하고 팬카페 까지 있는 비정상적인 나라 살인마 일가는 떵떵거리며 살고자서전 까지 내는 나라
독설가
전세계가 다알고 있는것을,,,,,,,,, 대한민국의 개,돼지들은 모르고 있다~!!!!!
지금 당시 공수부대원중 단 한명도 양심선언이 없다는건 이걸 발설하는 순간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 배후엔 미국이 있다는거네....
천상천하
모두가 전지전능한 북의소행이라고믿는 멍청한여자를 외신기자는 어떤시선으로 바라봤을까~?
guru
미국넘들이 군지휘권을 갖고 있다 미국넘들이 광주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다
DAUM 바로가기school
이런나라가 수십년 안정이 유지되고 하려니 얼마나 공작이 심했을까? 사람을 수천을 죽이고도 자서전을 써대는 살인마. 좋은거 먹고 편히살아서 명도 길다.
민족화합한반도평화
그당시 개돼지들은 전두환을 각하 각하 하고 따르니까 보다 못한 주미대사 글라이스틴 말씀이 한국민들은 들쥐 근성이 있어서 한마리가 나가면 나머지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다고 지적을 하자 미대사관 앞에서 개돼지들이 혈서 쓰고 데모하고 그랬다 518은 전두환 하나만 저지런 만행이 아니고 다수의 개돼지 만치도 못한 국민들이 저지런 만행이다 40여년을 폭도 라며 손가락질 했던 개돼지 국민듫이었다
DAUM 바로가기김씨
전두환은 대대로 잘먹고 잘살고 있고 친일로 부터 자유당, 공화당 ... 민정당 ...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민족 반역의 무리와 그 후손은 막대한 부를 쌓아 역시 잘먹고 잘살고 있다. 이번이 이것을 청산하고 정리할 마지막 기회라고 본다.
빈
살인자는 아직도 버젓이 잘 살고있고 희생자 들은 아직도 고통에 살고있다.
흐르는저강물은
전두환 이 악마새끼의 뒤에는 미국 쓰레기가 있는건가?
어나
경상도 개노답들은 지금도 북한이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명절날 좀 출세한 놈들(고위 공무원, 정치인 등)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은 것이다. 유언비어를 뿌린 핵심은 김기춘과 같은 박정희의 끄나풀이다. 난 경상도 출신이고 평생 경상도에 살면서 이런 무지랭이들 때문에 진저리를 낸다. 무식하면 입이라도 좀 다물던지.. 지금도 박정희가 영웅이래 그래서 그 멍청한 년을 대통령으로 뽑아줬지 대통령이면 옛날 임금인 줄 안다니까.
세월호 살인마 뽕닭 사형
2014년 세월호 4.16(수) 최태민 20주년 제사 4.18(금) 부활절 4.20(일)
유병언 김기춘은 구원파, 구원파는 물에 온몸을 담그는 의식 세월호는 세상 저 너머라는 뜻, 저승, 내세를 말함, 섬뜩한 단어임 최순실의 본명은 최서원, 서원이란 제물을 바친다는 뜻, 섬뜩한 이름임, 제물은 어린 남녀라야 되고, 300명이라야 됨 살육당일 생존자 숫자만 계속 카운팅, 남은 인원이 304명 될 때 살육 이 무당 년이 애들을 제사상에 올리려면, 병풍이 필요하므로, 항로를 벗어나서 병풍도 앞에서 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