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일본의 철저하고 치밀한 역사왜곡에 서울대 총장 할배까지
서희건 기자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에 일본의 역사왜곡이 잘 나와있습니다.
빨리 통일을 해서 시효지나기 전에 땅찾기 해야 됩니다.
백두산-녹둔도,일제의 조작은 어디까지 ( 성훈 칼럼 )
민족의 성산 백두산의 위치와 두만강 하구 녹둔도의 위치도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눈길을 끌었다. 아래는‘간도되찾기운동본부’(www.gando.or.kr)의 자료실에 게시되어 있는 내용에서 일부 발췌했다.
(1)“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백두산 위치도 조작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짜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닌 핑딩산(平頂山 1,429m)이며 우리 선조가 잃어버린 북방영토의 넓이가 69만㎢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방영토란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며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나, 과거 청나라와 일제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의해 빼앗긴 연해주와 간도지역으로서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다.
진짜 백두산은 핑딩산
현재의 백두산은 평안도 묘향산으로 추정되며, 실제 백두산은 중국 하얼빈 동북쪽 만주평야에 있는 핑딩산 일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록의 근거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서문과 만주원류고 지리지, 성종실록 등의 백두산 관련 기록을 들었다.
▲ 압록강은 현 요하, 두만강은 현 아무르강, 백두산은 현 핑딩산, 녹둔도는 현 사할린이다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백두산은 “큰 거친들 가운데 산이 있고 정상에 위치한 큰 못의 둘레가 80리, 높이는 200리, 가로 길이가 1,000리로 앞쪽이 무너졌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나라 한림원에서 발간한 만주원류고 지리지 장백산편에는“거친 들판 가운데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 있고, 성종실록에는“우리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의 남쪽에 있어서…지역의 넓이가 만리나 된다”고 서술되어 있다.
인공위성 영상을 통해 분석한 결과 핑딩산은 만주벌판 한 가운데 위치해 있고 산 앞쪽 부분에 무너진 흔적이 있는데다 정상에는 둘레 80리 정도의 커다란 못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백두산은 들녘 한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지역을 찾을 수 없다. 천지 둘레가 20리에도 못 미쳐 고서의 백두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백두산 왜 바뀌었나
일제 식민지시대 일제가 반도사관을 조작하기 위해 우리 고대사를 왜곡했고 대륙의 조선을 한반도로 옮겨 놨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보고서는 일제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 20만권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됐고, 대동여지도 역시 193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잴. 황선은 국경선으로 백두산이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앞으로는 북한 직항로로도 갈 수 없다(?) 전 세계(특히 미국)은 이미 중국의 동북공정대로 교과서를 만들었고, 이런 위성사진에서도 중국 편을 들고 있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압록강은 옛 사서 기록에 요하가 압록수로 불리었으니 요하를 의미하는 것이며, 두만강은 현 송화강과 연결되는 아무르강을 이르는 것이며,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는 현 사할린 섬을 이르는 것이다.
(2) 두만강은 아무르강, 녹둔도는 사할린?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북경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로 넘어간 우리 땅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항의하나 묵살 당한다. 역설적인 증거로는 연해주가 당시 조선의 땅이 아니었다면 조선 정부가 나중에 항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백두산이 위와 같이 조작된 것이라면 분명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되는 강이니 아무르강(흑룡강)이 필경 두만강일 것이며 연해주는 당연히 우리 땅이다. 인터넷상에 게시되어 있는 출처 미상의 아래 글은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두만강 = 아무르강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또 “여진 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하나로 합류되는 것이 두만강이다. 또한 남으로 압록강(요하)이 흐르고,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여러 지류에 해당된다. 이 지류가 다시 동으로 흘러 하나로 뭉쳐 바다로 흘러간다고 하였다. 바로 두만강(아무르강)을 말하는 것이다. 두만강은 만주강을 말하며 만주 일대를 가득 채우는 강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흑룡강이라는 별칭이 붙는 것은 동이족의 상징색이 흑색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인 것이다.
이순신이 여진족과 싸운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는 어디인가!
녹둔도는‘불멸의 이순신’드라마에서 이순신이 여진족의 습격을 막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녹둔도를 사수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유명해진 지명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된 바 있다.
두만강이 현 두만강이 아니고 아무르강이라면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도 아무르 강 하류로 가야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여기에 공주를 거쳐 동류해 25리에 이르면 사차마도에 도달하고, 여기서 강물이 나누어져 5리쯤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되어 있다. 세조 원년(1455년) 8월에는 이전까지 사차침도, 사차마도라 하던 것이 녹둔도 또는 녹도로 명명된다.”
현 두만강 하류에 삼각주로 된 지명이 녹둔도라고 한다. 두만강 하구에 있는 둘레가 8키로인 타원형의 자그마한 땅이다. 직사각형으로 환산하면 가로 세로 2km에 해당한다. 과연 그곳이 녹둔도인가! 얼마가 그곳이 중요하기에 여진족이 목숨을 걸고 침범하였으며 얼마나 중요하기에 그 안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했으며, 그 작은 섬 때문에 조산만호라는 벼슬을 파직했단 말인가!
▲ 위성으로 본 두만강 하류. 황선은 현 국경선으로 북한쪽으로 붙어있는 섬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다. 현재 녹둔도는 육지와 붙어 더이상 섬이 아니다. 이런 곳이 녹둔도이었을까? 여진족이 여기까지 뭐하러 왔을까?
아무르강을 현 두만강으로 옮기다 보니 아무르 강 하구에 있는 사할린 섬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 이런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우기는 식민사학이나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일반인이나 다 마찬가지다. 녹둔도는 현 두만강 하류의 작은 섬이 아니라 아무르 강 하류의 사할린 섬이다.
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는 역사적 기록과 정황으로 보면 절대 녹둔도가 될 수 없다.
여진족은 후에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며 나중에 청나라로 발전하는 강력한 유목집단이다. 그런 민족이 아주 작은 척박한 한반도 함경도를 가지려고 두만강을 노리겠는가! 만주일대는 넓은 평야로 한반도 보다 몇 배 넓은 농경지와 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주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절대로 한반도로 넘지 않으며 넘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드넓은 화북평야와 송화강과 아무르강 그리고 흑룡강의 농경지와 목축지를 놔두고 한반도로 가서 그것도 아주 작은 섬 녹둔도를 노린단 말인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 세종 때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여기서 녹둔도가 두만강 내에 섬이라면 성을 쌓고 군대가 상주하고 그리고 농사를 지을 땅 면적이 나오는가! 그것도 직경 2키로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사할린 섬이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녹둔도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자주 언급을 한다.
“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과 도사 강효문에게 조산구자(造山口子) 녹둔도 농민이 들에서 일할 때 야인들이 배를 타고 침입하여 약탈할 것이 우려되므로 진장(鎭將)과 만호들에게 엄중히 방비하라는 밀유(密諭)를 내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중종 9년(1514년)에는 봄철 농사를 지을 때면 조산보의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감으로 본보가 빌 정도라고 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할린이 왜 녹둔도(鹿屯島)인가!
녹둔도는 한글로 풀어보면 <사슴 + 언덕 + 섬>이다. 과연 사할린이 사슴언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사할린 남서안의 홀름스크라는 항구도시는 인구가 약 5만 2,000명이다. 러시아어로 홀름이 언덕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홀름시 뒤에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홀름->할림->할린 이니 같은 음운 계열이다.
그리고 스크는 섬을 의미하니 홀름(할림->할린-언덕)+스크(섴->섬-도)이니 언덕섬(둔도-屯島)가 된다. 그러므로 사할린의 할린은 언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샤(사슴)+할린(언덕)이 된다면 샤가 사슴이라는 말인가!
샤할린은 영어로 Sakhalin(Sak+hill+lin)으로 표현되며 사슴이나 양 소고기를 뜻하는 영문은 다음과 같다.sheep(숫양) Stag(숫사슴)Caribou(순록)Steak(쇠고기)로 발음된다. 일본어로 보면 鹿しか(시카)로 발음된다. 즉 한글은 사슴이며 일본은 시카이며 영어는 샤가 공통으로 발음된다. 그러므로 샤는 사슴을 말한다. 샤할린은 사슴언덕이 되며 완벽한 녹둔이 된다.
그리고 사할린은 목축으로 소와 사슴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사슴섬으로 부른 것이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지을 때에는 지역의 특성을 보고 지은 것인데 현 두만강 녹둔도는 전혀 사슴과 언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녹둔도는 사할린 섬이다. 이순신의 젊은 시절 숨결이 묻어 있으며 우리 조상이 개척한 땅이다. 지금 사할린은 유전지대로 탈바꿈되어 황금의 땅이 되었다. 특히 사할린의 북쪽은 천연가스가 풍부하며, 1999년 7월부터는 원유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러시아의 보고로 통하는 지역이다.
사할린은 육지와 8키로 정도로 떨어져 있으며 겨울철에는 바다가 얼어 걸어서 사할린까지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여진족이 겨울철에는 말을 타고 섬에 침공이 가능하며 평상시에는 배로 침공이 가능하다. 사할린과 연결된 콤소모몰스크와 하바로프스키가 6진 중에 하나인 경흥인 것이다. 그 곳에 조산만호 이순신 장군의 근무지가 존재한다. (인용 끝)
▲ 위성으로 본 잃어버린 북방영토. 왼쪽은 산해관 이동으로 부터 오른쪽은 사할린까지로 현 요하와 아무르강 이남이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한 사문난적(斯文亂賊)과 일제시대의 반도사관으로 왜곡되어진 우리 역사는 대륙에서 전부 한반도로 이사오게 된다. 위대한 고조선의 역사는 자취를 감추게 되며, 대륙의 동부를 지배했던 백제/신라/고려의 영역은 한반도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이전하게 되며, 고구려/발해의 영역 역시 훨씬 동쪽으로 물러나 많이 축소되어 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고려/조선의 국경선이 한반도 안으로만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발해를 이어 고려는 대륙과 만주를, 조선은 만주를 통치하고 경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조선의 만주(간도)를 중국에 넘기고 일제는 반대급부로 경제적인 이득을 챙기기 위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은 것인데,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제3자가 맺은 간도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 땅은 원래 주인인 한국에게 반드시 되돌아 와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간도 되찾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시효 만기 전에 추인부터 하기를돌아 와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간도 되찾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시효 만기 전에 추인부터 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지금 당장은 간도 되찾기가 힘들다 하더라도 나중에 후손들이라도 나서서 되찾을 것이 아니겠는가? 당장 중국과 외교적인 마찰과 그로 인한 경제적 불이익 때문에 추인을 포기하려는 것은 후손들에게 엄청난 큰 죄를 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글 수 17,623
일본의 철저하고 치밀한 역사왜곡에 서울대 총장 할배까지
서희건 기자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에 일본의 역사왜곡이 잘 나와있습니다.
빨리 통일을 해서 시효지나기 전에 땅찾기 해야 됩니다.
백두산-녹둔도,일제의 조작은 어디까지 ( 성훈 칼럼 )
민족의 성산 백두산의 위치와 두만강 하구 녹둔도의 위치도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눈길을 끌었다. 아래는‘간도되찾기운동본부’(www.gando.or.kr)의 자료실에 게시되어 있는 내용에서 일부 발췌했다.
(1)“잃어버린 북방영토 한반도 3배 크기… 백두산 위치도 조작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짜 백두산(白頭山)은 지금의 백두산이 아닌 핑딩산(平頂山 1,429m)이며 우리 선조가 잃어버린 북방영토의 넓이가 69만㎢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방영토란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며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나, 과거 청나라와 일제가 체결한 간도협약에 의해 빼앗긴 연해주와 간도지역으로서 현재는 중국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다.
진짜 백두산은 핑딩산
현재의 백두산은 평안도 묘향산으로 추정되며, 실제 백두산은 중국 하얼빈 동북쪽 만주평야에 있는 핑딩산 일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록의 근거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서문과 만주원류고 지리지, 성종실록 등의 백두산 관련 기록을 들었다.
▲ 압록강은 현 요하, 두만강은 현 아무르강, 백두산은 현 핑딩산, 녹둔도는 현 사할린이다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백두산은 “큰 거친들 가운데 산이 있고 정상에 위치한 큰 못의 둘레가 80리, 높이는 200리, 가로 길이가 1,000리로 앞쪽이 무너졌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나라 한림원에서 발간한 만주원류고 지리지 장백산편에는“거친 들판 가운데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 있고, 성종실록에는“우리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의 남쪽에 있어서…지역의 넓이가 만리나 된다”고 서술되어 있다.
인공위성 영상을 통해 분석한 결과 핑딩산은 만주벌판 한 가운데 위치해 있고 산 앞쪽 부분에 무너진 흔적이 있는데다 정상에는 둘레 80리 정도의 커다란 못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백두산은 들녘 한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지역을 찾을 수 없다. 천지 둘레가 20리에도 못 미쳐 고서의 백두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백두산 왜 바뀌었나
일제 식민지시대 일제가 반도사관을 조작하기 위해 우리 고대사를 왜곡했고 대륙의 조선을 한반도로 옮겨 놨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보고서는 일제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고문서와 고지도 등 50여종 20만권이 서울 남산에서 소각됐고, 대동여지도 역시 193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잴. 황선은 국경선으로 백두산이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앞으로는 북한 직항로로도 갈 수 없다(?) 전 세계(특히 미국)은 이미 중국의 동북공정대로 교과서를 만들었고, 이런 위성사진에서도 중국 편을 들고 있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압록강은 옛 사서 기록에 요하가 압록수로 불리었으니 요하를 의미하는 것이며, 두만강은 현 송화강과 연결되는 아무르강을 이르는 것이며,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는 현 사할린 섬을 이르는 것이다.
(2) 두만강은 아무르강, 녹둔도는 사할린?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에 북경조약으로 인해 러시아로 넘어간 우리 땅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항의하나 묵살 당한다. 역설적인 증거로는 연해주가 당시 조선의 땅이 아니었다면 조선 정부가 나중에 항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백두산이 위와 같이 조작된 것이라면 분명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되는 강이니 아무르강(흑룡강)이 필경 두만강일 것이며 연해주는 당연히 우리 땅이다. 인터넷상에 게시되어 있는 출처 미상의 아래 글은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두만강 = 아무르강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또 “여진 말로 만(萬)을 두만(豆滿)이라고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하나로 합류되는 것이 두만강이다. 또한 남으로 압록강(요하)이 흐르고, 북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여러 지류에 해당된다. 이 지류가 다시 동으로 흘러 하나로 뭉쳐 바다로 흘러간다고 하였다. 바로 두만강(아무르강)을 말하는 것이다. 두만강은 만주강을 말하며 만주 일대를 가득 채우는 강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흑룡강이라는 별칭이 붙는 것은 동이족의 상징색이 흑색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인 것이다.
이순신이 여진족과 싸운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는 어디인가!
녹둔도는‘불멸의 이순신’드라마에서 이순신이 여진족의 습격을 막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녹둔도를 사수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유명해진 지명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된 바 있다.
두만강이 현 두만강이 아니고 아무르강이라면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도 아무르 강 하류로 가야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여기에 공주를 거쳐 동류해 25리에 이르면 사차마도에 도달하고, 여기서 강물이 나누어져 5리쯤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되어 있다. 세조 원년(1455년) 8월에는 이전까지 사차침도, 사차마도라 하던 것이 녹둔도 또는 녹도로 명명된다.”
현 두만강 하류에 삼각주로 된 지명이 녹둔도라고 한다. 두만강 하구에 있는 둘레가 8키로인 타원형의 자그마한 땅이다. 직사각형으로 환산하면 가로 세로 2km에 해당한다. 과연 그곳이 녹둔도인가! 얼마가 그곳이 중요하기에 여진족이 목숨을 걸고 침범하였으며 얼마나 중요하기에 그 안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설치했으며, 그 작은 섬 때문에 조산만호라는 벼슬을 파직했단 말인가!
▲ 위성으로 본 두만강 하류. 황선은 현 국경선으로 북한쪽으로 붙어있는 섬도 러시아의 영토로 되어 있다. 현재 녹둔도는 육지와 붙어 더이상 섬이 아니다. 이런 곳이 녹둔도이었을까? 여진족이 여기까지 뭐하러 왔을까?
아무르강을 현 두만강으로 옮기다 보니 아무르 강 하구에 있는 사할린 섬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 이런 코미디를 연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우기는 식민사학이나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일반인이나 다 마찬가지다. 녹둔도는 현 두만강 하류의 작은 섬이 아니라 아무르 강 하류의 사할린 섬이다.
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는 역사적 기록과 정황으로 보면 절대 녹둔도가 될 수 없다.
여진족은 후에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며 나중에 청나라로 발전하는 강력한 유목집단이다. 그런 민족이 아주 작은 척박한 한반도 함경도를 가지려고 두만강을 노리겠는가! 만주일대는 넓은 평야로 한반도 보다 몇 배 넓은 농경지와 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주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절대로 한반도로 넘지 않으며 넘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드넓은 화북평야와 송화강과 아무르강 그리고 흑룡강의 농경지와 목축지를 놔두고 한반도로 가서 그것도 아주 작은 섬 녹둔도를 노린단 말인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 세종 때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섬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여기서 녹둔도가 두만강 내에 섬이라면 성을 쌓고 군대가 상주하고 그리고 농사를 지을 땅 면적이 나오는가! 그것도 직경 2키로 안에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사할린 섬이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녹둔도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역대 왕들은 자주 언급을 한다.
“세조는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과 도사 강효문에게 조산구자(造山口子) 녹둔도 농민이 들에서 일할 때 야인들이 배를 타고 침입하여 약탈할 것이 우려되므로 진장(鎭將)과 만호들에게 엄중히 방비하라는 밀유(密諭)를 내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중종 9년(1514년)에는 봄철 농사를 지을 때면 조산보의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감으로 본보가 빌 정도라고 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할린이 왜 녹둔도(鹿屯島)인가!
녹둔도는 한글로 풀어보면 <사슴 + 언덕 + 섬>이다. 과연 사할린이 사슴언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사할린 남서안의 홀름스크라는 항구도시는 인구가 약 5만 2,000명이다. 러시아어로 홀름이 언덕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홀름시 뒤에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홀름->할림->할린 이니 같은 음운 계열이다.
그리고 스크는 섬을 의미하니 홀름(할림->할린-언덕)+스크(섴->섬-도)이니 언덕섬(둔도-屯島)가 된다. 그러므로 사할린의 할린은 언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샤(사슴)+할린(언덕)이 된다면 샤가 사슴이라는 말인가!
샤할린은 영어로 Sakhalin(Sak+hill+lin)으로 표현되며 사슴이나 양 소고기를 뜻하는 영문은 다음과 같다.sheep(숫양) Stag(숫사슴)Caribou(순록)Steak(쇠고기)로 발음된다. 일본어로 보면 鹿しか(시카)로 발음된다. 즉 한글은 사슴이며 일본은 시카이며 영어는 샤가 공통으로 발음된다. 그러므로 샤는 사슴을 말한다. 샤할린은 사슴언덕이 되며 완벽한 녹둔이 된다.
그리고 사할린은 목축으로 소와 사슴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사슴섬으로 부른 것이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지을 때에는 지역의 특성을 보고 지은 것인데 현 두만강 녹둔도는 전혀 사슴과 언덕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녹둔도는 사할린 섬이다. 이순신의 젊은 시절 숨결이 묻어 있으며 우리 조상이 개척한 땅이다. 지금 사할린은 유전지대로 탈바꿈되어 황금의 땅이 되었다. 특히 사할린의 북쪽은 천연가스가 풍부하며, 1999년 7월부터는 원유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러시아의 보고로 통하는 지역이다.
사할린은 육지와 8키로 정도로 떨어져 있으며 겨울철에는 바다가 얼어 걸어서 사할린까지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여진족이 겨울철에는 말을 타고 섬에 침공이 가능하며 평상시에는 배로 침공이 가능하다. 사할린과 연결된 콤소모몰스크와 하바로프스키가 6진 중에 하나인 경흥인 것이다. 그 곳에 조산만호 이순신 장군의 근무지가 존재한다. (인용 끝)
▲ 위성으로 본 잃어버린 북방영토. 왼쪽은 산해관 이동으로 부터 오른쪽은 사할린까지로 현 요하와 아무르강 이남이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한 사문난적(斯文亂賊)과 일제시대의 반도사관으로 왜곡되어진 우리 역사는 대륙에서 전부 한반도로 이사오게 된다. 위대한 고조선의 역사는 자취를 감추게 되며, 대륙의 동부를 지배했던 백제/신라/고려의 영역은 한반도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이전하게 되며, 고구려/발해의 영역 역시 훨씬 동쪽으로 물러나 많이 축소되어 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고려/조선의 국경선이 한반도 안으로만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발해를 이어 고려는 대륙과 만주를, 조선은 만주를 통치하고 경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조선의 만주(간도)를 중국에 넘기고 일제는 반대급부로 경제적인 이득을 챙기기 위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은 것인데,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제3자가 맺은 간도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 땅은 원래 주인인 한국에게 반드시 되돌아 와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간도 되찾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시효 만기 전에 추인부터 하기를돌아 와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간도 되찾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시효 만기 전에 추인부터 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지금 당장은 간도 되찾기가 힘들다 하더라도 나중에 후손들이라도 나서서 되찾을 것이 아니겠는가? 당장 중국과 외교적인 마찰과 그로 인한 경제적 불이익 때문에 추인을 포기하려는 것은 후손들에게 엄청난 큰 죄를 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조강래
- 2007.12.18
- 09: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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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부수고 민족사관정립한 윤내현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플러스코리아
▲ 윤내현 교수
윤내현(尹乃鉉, 1939년 6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생이다. 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역사학자 학술 교류 및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약력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박사과정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
수상
'오늘의 책'상,
일석학술상
금호학술상
국무총리 표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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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2003년 기록
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사학계의 통설을 뒤엎으며 끝내 국사교과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정년을 앞둔 노학자로부터 한국 고대사 연구 30년을 듣는다.
평소 윤내현 교수(64·단국대 대학원장·동양사)는 말을 아끼고 몸을 낮추는 스타일이다. 30년 가까이 한국 고대사에 매달리면서 ‘비정통 역사학자’ ‘국수주의자’ ‘과도한 민족주의자’ 심지어 ‘북한 추종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몸에 밴 조심성이리라 짐작된다. 그런 윤교수가 요즘 부쩍 말수가 늘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정년퇴임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추죄한 학술회의에 참가해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윤교수는 “우리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자신감 부족 아닌가”라며 “초창기에는 우리 학문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학계의 통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윤교수가 주장해온 ‘한민족 자생설’은 한민족이 외부에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지역 토착인들이 연합해 우리 민족과 문화를 형성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끊임없이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찾아온 ‘한민족 외래설’ 혹은 ‘민족이동설’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다. 최근 윤교수는 ‘우리 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라는 책도 내놓았다. 1978년 첫 저서 ‘상왕조사(商王朝史)의 연구’를 발표한 이래 ‘상주사(商周史)’ ‘한국 고대사 신론’ ‘고조선 연구’ 등 중국사와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과 논문을 썼지만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그 책이 발매 몇 주 만에 2쇄에 들어갔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대사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질타와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묵묵히 감내하며 학문적 홀로 서기에 매진해온 한 노학자의 삶이 담겨 있다. 책에서 윤교수는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주장을 한 학자는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윤교수의 홀로 서기는 길었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다.
그의 견해에 동조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실에서 윤내현 교수와 마주했다. 요즘 그가 무엇보다 비중을 두는 일이 북한 역사학계와의 교류다. 지난 10월 개천절을 맞아 평양에서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윤교수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한의 ‘단군학회’와 북한의 ‘조선력사학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1년 전 제1회 행사 때는 “평양에서 남북한이 공동 개최한 최초의 학술대회”라며 언론의 반응이 야단스러웠던 것에 비해 2회는 소문 없이 지나갔다. 윤교수는 첫 행사가 물꼬를 튼 수준이라면 이제야 남북한이 서로 말문을 텄는데 막상 관심 갖는 이가 별로 없다며 아쉬운 기색이다.
남북한 공동발굴 기대
“각자 준비해간 논문을 발표하고 끝난 1회 때와 달리 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남측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1993년 발굴한 단군릉이죠. 알다시피 단군릉의 발굴로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서 평양으로 수정됐고, 고조선 건국 시기도 기원전 3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또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들의 연대가 기원전 3000~2800년이라고 발표됐는데 우리 쪽에서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연대를 올린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해요. 실제 이번 학술대회에서 남측 학자들이 ‘당신들이 제시한 연대에 의문을 갖고 있다,
방사선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시 조사할 생각은 없느냐, 객관성을 위해 외국기관에 의뢰하는 것은 어떠냐’ 등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우리는 방사성탄소 측정시설이 없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료 채취과정에서 뼈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지 않느냐, 대신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2개 기관에서 각각 24번, 30번씩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은 확보됐다고 본다’고 답했죠. 이번 학술대회의 수확은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북측에 의문이 있으면 함께 풀어보자, 어렵더라도 발굴현장을 직접 답사할 기회와 발굴보고서를 제공해달라고 했습니다.”
윤교수는 또 북한측 학자들이 예상외로 남한의 연구 동향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전한다. “김일성대학의 한 젊은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내용 중에 ‘천문학을 이용해 ‘환단고기’ 기록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지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9월1일부터 고등과학원 물리학부로 옮김)가 쓴 책의 내용이거든요. 아, 저 사람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천문학자의 연구까지 벌써 읽었구나 하고 감탄했죠. 북한 학자들은 남한 학자들의 연구방향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어 만나면 금방 알아봅니다. 처음 만난 북한 학자가 내 책을 읽었다기에 어떻게 보았느냐고 했더니 강인숙, 손영종 교수 등 선생님의 책을 빌려보았다는 거예요.
예전에 그분들을 만났을 때 직접 책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사실 북측은 연구비에 관심이 많아요. 재정 지원만 약속하면 공동 발굴도 가능하다고 봐요.” 윤교수는 단군릉 발굴과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설령 체제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어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무조건 의심하기보다 남북한 공동연구를 통해 상고사 연구의 과학성과 실증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로 인해 한때 윤교수에게는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을 말하면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윤교수는 자신의 고대사 연구 30년을 이렇게 자평한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우리 고대사’에서)
갑골문 연구에서 한국고대사로
원래 그의 전공은 동양사, 그 중에서도 중국고대사였다. 1960년대에 동양 고대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귀해서 그는 일본, 홍콩, 방콕을 드나들며 자료를 긁어모아 논문을 썼다. 석사논문 제목은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고 박사논문은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다. “당시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하셨는데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이 분야가 얼마나 생소했는지 알 수 있죠.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는 미진해서 다시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을 보는데 한국 관련 부분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겁니다.
특히 기자(箕子)에서 눈을 뗄 수 없더군요. 조선시대까지는 기자조선을 인정했어요. 오히려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의 기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자동래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가운데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됐죠. 곧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꾸며낸 이야기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갑골문에 엄연히 기후(箕侯)라 해서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윤교수는 ‘중국의 원시시대’와 ‘상주사’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자’와 한국 고대사 문제에 파고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중국 ‘사기’의 ‘송미자세가’를 보면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고 되어 있다. 그동안 이 문구는 기자가 제후에 봉해져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됐다. 그러나 윤교수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국경이 요동지역까지라고 기술된 부분을 떠올렸다. 당시 요동의 경계는 북경 바로 옆 갈석산이었다. 만약 그곳이 국경이었다면 갈석산 동쪽지역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조선의 강역(疆域·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을 설정해놓고 보니 다음 이야기들이 딱딱 아귀가 맞았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은 중심지인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이었다.
기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주 무왕의 동생 소공이 다스리는 연나라(제후국)와 접해 있던 고조선의 변방을 망명지로 택한 것이다. 물론 여차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기자는 ‘고조선 변방의 제후’가 됐던 것이다. 윤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학설을 정리해 1982년 ‘기자신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사 전공자의 외도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후 학계의 역풍이 몰아쳤다. “제 학설이 자꾸 문제가 되니까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현종 선생께서 ‘내친김에 중국 고대문헌에 고조선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게 됐죠. 그런데 대선배 교수 한 분이 ‘오늘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농담인 줄 알고 그냥 쓴 대로 읽었어요. 토론시간이 되자 그 분이 책상을 마구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北 추종자라는 비난
▲ 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대한 글을 발표하는 윤내현 교수(오른쪽).
이때 윤교수는 결심했다. ‘기자만 연구하고 한국사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나머지 문제까지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여기서 그냥 물러서면 내 주장이 잘못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겠는가.’ 그 뒤로 중국사를 제쳐두고 한국 고대사를 집중 연구했다. 물론 중국사 전공을 십분 이용해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경 기록을 샅샅이 조사했고 이어 고조선의 사회구조, 통치조직 등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학계에서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인데, 해방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죠. 물론 그분들의 연구에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는 ‘고조선의 국경은 고려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헌에는 도대체 ‘고려하’란 지명이 나오질 않아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고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이라고 하는데 헌우락이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아예 무시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 문헌을 찾다 보니 ‘요사(遼史)’에 헌우락이 나오더군요. 또 옌칭에서 중국 고지도를 뒤지다가 ‘고려하’라는 강명을 발견했습니다. 대능하에서 북경으로 조금 가면 ‘고려하’가 있고 상류에 고려성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만주에 살던 분들께 물어보니 고려성터가 있고 일본이 세운 팻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채호, 정인보 선생은 현지답사도 하고 문헌도 보았던 겁니다.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는 동안 북한이 그 학설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무렵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하는 ‘한국사휘보’에 그를 비방하는 글이 실렸다. ‘북한의 어용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자’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정보기관에 “고대사 분야에서 북한학설을 유포하는 자가 있다”고 고하는 바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까지 생겼다.
이처럼 윤교수는 동양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지만 한국사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동양사로 가면 강단사학자, 한국사로 가면 재야사학자가 되는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역사학의 역사’(지식산업사)에서 1980년대 윤내현 교수의 활동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고대사의 첫 장에 해당하는 고조선 연구는 1980년대에도 부진했다. 문헌이 빈약하고 고고학적 성과도 북한이나 중국과 관련되어 있어서 현장감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학설을 내세운 것은 윤내현 교수다.
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거하여 고조선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23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그 도읍은 지금의 평양에서 시작해서 중국 난하 유역으로 팽창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한 뒤 한나라 무제에 의하여 망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고조선 연구는 1994년 ‘고조선연구’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한교수는 덧붙여 “윤내현의 연구는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으로 학계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고 적었다.
고조선 재평가 열풍
그러나 학계의 반발이 크면 클수록 고조선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은 고조됐다. 이 무렵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윤교수의 특강에 1500여 명의 일반관중이 몰려들 만큼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불었다. 1986년 3월 윤교수는 ‘사학지’를 통해 ‘위만조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종래 사학계의 통설은 한반도 북부 평양지역에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윤교수는 위만조선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고조선과 병존했던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즉 기원전 195년 서한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자의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 세운 나라가 위만조선이며, 훗날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까지 침략해 지금의 요서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 학설대로라면 고조선-준왕(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여러 나라 시대(열국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되어 있던 고대사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는 맞지만 이는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와는 별도로 고조선-열국시대(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삼한 등)-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남북국시대(신라, 발해)의 체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1986년 11월 당시 문교부는 국사교육심의회(위원장 변태섭)를 발족하면서 단군조선을 비롯, 일제의 의해 조작·왜곡된 한국사를 복원해 새 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윤교수는 30여 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가장 젊은 40대 위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대동강 유역으로 제한된 고조선의 강역만큼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생님뻘 되는 다른 심의위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고칠 필요가 있더라도 천천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교수는 마음이 바빴다. 고조선 땅의 넓고 좁고의 문제를 떠나 고조선 역사를 바로 세워야 다음 시기의 혼란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흑룡강성 지역에는 부여, 연해주에 읍루,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남쪽에는 삼한 등이 있었습니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그 중 하나이고 다만 조금 먼저 세워진 나라일 뿐이죠. 그러나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하면 고조선 붕괴 후 지방세력이 독립해 여러 나라로 갈라서는, 역사체계 자체가 달라집니다. ‘삼국사기’에는 경주에 신라를 세운 사람들이 조선의 유민(遺民)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유민(流民)이 아니라 유민(遺民)인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흘러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잔류한 백성이라는 것은 고조선이 한반도 남쪽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죠.” 하지만 심의위원 가운데 윤교수의 주장에 동의한 사람은 단 두 명(손보기, 박성수)뿐이었다.
윤교수는 그날로 심의위원직을 사퇴하고 학생들과 강원도로 답사를 떠났다. 그런데 언론이 윤교수의 사퇴 이유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야단이 났다. 결국 변태섭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개편되는 중·고교 국사교과서(중학교는 1989년, 고등학교는 1990년)에 고조선 초기의 정치·문화적 중심이 요령지역이었음을 명기하겠다고 밝히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 고대사에서 ‘학문의 국수주의화’냐 ‘식민사관의 청산이냐’는 논쟁은 계속됐다. 윤교수는 그때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의 영토는 넓게 그려졌지만 여전히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서술된 점에 대해 불만이 많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위만이 준왕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해 고조선의 뒤를 이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사료의 비판적 해석 필요
“이 서술대로라면 우리 민족은 기자가 망명한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낙랑군이 축출된 기원 313~315년 무렵까지 무려 14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돼요. 일제 35년은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하면서 1400년 중국의 지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되는 해인 기묘년에 서주 무왕이 즉위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해석해야 해요. 지금까지는 단군조선이 건국 후 1500년 되던 해에 끝이 나고 통치자가 기자로 바뀌었다고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시기에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겨 그대로 존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이런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이 망한 뒤 기자가 조선에 와서 통치자가 됐다고 기록한다. “이승휴 선생은 유학자로서 중국을 숭상한 분입니다. ‘제왕운기’가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권이 중국역사고 하권만이 한국사입니다. 즉 중국사를 죽 서술하고 그 밑에 한국사를 붙인 것인데 이는 유가의 기본사상인 천하사상-중국 천자가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죠. 이승휴 선생의 학설이 광복 후까지 비판 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길을 잃었을 때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윤교수가 30년 가까이 고조선에 몰두한 이유도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가 대부분 분열의 시대인 삼국시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한 나라입니다. 2000년이면 신라가 건국한 이래 오늘날까지를 합친 만큼 오랜 시간이에요. 고대사회라 지금처럼 조직적인 중앙통치가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이루고 그만큼 오랜 세월을 존속했다면 민족공동체의식이 형성되지 않았겠습니까. 그후 사국(윤교수는 가야를 합쳐 사국시대를 주장한다)으로 갈라졌다 해도 끊임없이 공동체 복원을 바라고 통일은 당연한 과업이었을 겁니다.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한 국가였다면 자연스럽게 부여나 고구려, 발해가 우리 역사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국가였다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역사에 편입된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슬쩍 윤교수에게 “그동안 역사가 정치에 이용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의미심장한 답이 돌아왔다. “정치하는 분들이 필요에 따라 역사를 이용했지요. 사실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한심스러운 것은 아예 역사에 관심이 없거나 이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죠.” 정년을 앞두고 윤교수는 칭찬보다는 매가, 격려보다는 비난이 돌아오기 일쑤인 고대사 분야에 관심을 갖는 후학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나마 고고학을 빼면 문헌사 분야에서 삼국시대 이전 상고사를 전공하는 박사급 연구자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논문을 썼을 때 칭찬받으면 좋겠지만,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성공한 것이죠. 반론도 칭찬도 없는 논문이 제일 가치가 없어요. 저는 제자들에게 제 학설을 따라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내 것을 뛰어넘어야지, 이미 내가 다 해놓은 것을 따라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학문은 스스로 틀을 깨는 작업입니다. 내가 쓴 논문이라도 세월이 지나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남이 지적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고치는 것이 학자의 도리입니다.” (끝)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발행일: 2003 년 12 월 01 일 (통권 531 호)
쪽수: 414 ~ 422 쪽
▲민족사왜곡의 주범 식민사관의 거두-이병도
▲ 단군의 실존을 인정한 이병도의 양심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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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부수고 민족사관정립한 윤내현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플러스코리아
▲ 윤내현 교수
윤내현(尹乃鉉, 1939년 6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생이다. 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와 남북역사학자 학술 교류 및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약력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박사과정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
수상
'오늘의 책'상,
일석학술상
금호학술상
국무총리 표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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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탐구]
2003년 기록
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사학계의 통설을 뒤엎으며 끝내 국사교과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정년을 앞둔 노학자로부터 한국 고대사 연구 30년을 듣는다.
평소 윤내현 교수(64·단국대 대학원장·동양사)는 말을 아끼고 몸을 낮추는 스타일이다. 30년 가까이 한국 고대사에 매달리면서 ‘비정통 역사학자’ ‘국수주의자’ ‘과도한 민족주의자’ 심지어 ‘북한 추종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몸에 밴 조심성이리라 짐작된다. 그런 윤교수가 요즘 부쩍 말수가 늘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정년퇴임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추죄한 학술회의에 참가해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윤교수는 “우리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자신감 부족 아닌가”라며 “초창기에는 우리 학문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학계의 통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윤교수가 주장해온 ‘한민족 자생설’은 한민족이 외부에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지역 토착인들이 연합해 우리 민족과 문화를 형성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끊임없이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찾아온 ‘한민족 외래설’ 혹은 ‘민족이동설’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다. 최근 윤교수는 ‘우리 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라는 책도 내놓았다. 1978년 첫 저서 ‘상왕조사(商王朝史)의 연구’를 발표한 이래 ‘상주사(商周史)’ ‘한국 고대사 신론’ ‘고조선 연구’ 등 중국사와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과 논문을 썼지만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그 책이 발매 몇 주 만에 2쇄에 들어갔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대사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질타와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묵묵히 감내하며 학문적 홀로 서기에 매진해온 한 노학자의 삶이 담겨 있다. 책에서 윤교수는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주장을 한 학자는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윤교수의 홀로 서기는 길었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다.
그의 견해에 동조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실에서 윤내현 교수와 마주했다. 요즘 그가 무엇보다 비중을 두는 일이 북한 역사학계와의 교류다. 지난 10월 개천절을 맞아 평양에서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윤교수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한의 ‘단군학회’와 북한의 ‘조선력사학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1년 전 제1회 행사 때는 “평양에서 남북한이 공동 개최한 최초의 학술대회”라며 언론의 반응이 야단스러웠던 것에 비해 2회는 소문 없이 지나갔다. 윤교수는 첫 행사가 물꼬를 튼 수준이라면 이제야 남북한이 서로 말문을 텄는데 막상 관심 갖는 이가 별로 없다며 아쉬운 기색이다.
남북한 공동발굴 기대
“각자 준비해간 논문을 발표하고 끝난 1회 때와 달리 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남측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1993년 발굴한 단군릉이죠. 알다시피 단군릉의 발굴로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서 평양으로 수정됐고, 고조선 건국 시기도 기원전 3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또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들의 연대가 기원전 3000~2800년이라고 발표됐는데 우리 쪽에서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연대를 올린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해요. 실제 이번 학술대회에서 남측 학자들이 ‘당신들이 제시한 연대에 의문을 갖고 있다,
방사선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시 조사할 생각은 없느냐, 객관성을 위해 외국기관에 의뢰하는 것은 어떠냐’ 등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우리는 방사성탄소 측정시설이 없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료 채취과정에서 뼈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지 않느냐, 대신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2개 기관에서 각각 24번, 30번씩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은 확보됐다고 본다’고 답했죠. 이번 학술대회의 수확은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북측에 의문이 있으면 함께 풀어보자, 어렵더라도 발굴현장을 직접 답사할 기회와 발굴보고서를 제공해달라고 했습니다.”
윤교수는 또 북한측 학자들이 예상외로 남한의 연구 동향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전한다. “김일성대학의 한 젊은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내용 중에 ‘천문학을 이용해 ‘환단고기’ 기록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지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9월1일부터 고등과학원 물리학부로 옮김)가 쓴 책의 내용이거든요. 아, 저 사람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천문학자의 연구까지 벌써 읽었구나 하고 감탄했죠. 북한 학자들은 남한 학자들의 연구방향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어 만나면 금방 알아봅니다. 처음 만난 북한 학자가 내 책을 읽었다기에 어떻게 보았느냐고 했더니 강인숙, 손영종 교수 등 선생님의 책을 빌려보았다는 거예요.
예전에 그분들을 만났을 때 직접 책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사실 북측은 연구비에 관심이 많아요. 재정 지원만 약속하면 공동 발굴도 가능하다고 봐요.” 윤교수는 단군릉 발굴과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설령 체제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어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무조건 의심하기보다 남북한 공동연구를 통해 상고사 연구의 과학성과 실증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로 인해 한때 윤교수에게는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을 말하면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윤교수는 자신의 고대사 연구 30년을 이렇게 자평한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우리 고대사’에서)
갑골문 연구에서 한국고대사로
원래 그의 전공은 동양사, 그 중에서도 중국고대사였다. 1960년대에 동양 고대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귀해서 그는 일본, 홍콩, 방콕을 드나들며 자료를 긁어모아 논문을 썼다. 석사논문 제목은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고 박사논문은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다. “당시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하셨는데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이 분야가 얼마나 생소했는지 알 수 있죠.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는 미진해서 다시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을 보는데 한국 관련 부분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겁니다.
특히 기자(箕子)에서 눈을 뗄 수 없더군요. 조선시대까지는 기자조선을 인정했어요. 오히려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의 기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자동래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가운데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됐죠. 곧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꾸며낸 이야기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갑골문에 엄연히 기후(箕侯)라 해서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윤교수는 ‘중국의 원시시대’와 ‘상주사’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자’와 한국 고대사 문제에 파고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중국 ‘사기’의 ‘송미자세가’를 보면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고 되어 있다. 그동안 이 문구는 기자가 제후에 봉해져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됐다. 그러나 윤교수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국경이 요동지역까지라고 기술된 부분을 떠올렸다. 당시 요동의 경계는 북경 바로 옆 갈석산이었다. 만약 그곳이 국경이었다면 갈석산 동쪽지역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조선의 강역(疆域·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을 설정해놓고 보니 다음 이야기들이 딱딱 아귀가 맞았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은 중심지인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이었다.
기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주 무왕의 동생 소공이 다스리는 연나라(제후국)와 접해 있던 고조선의 변방을 망명지로 택한 것이다. 물론 여차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기자는 ‘고조선 변방의 제후’가 됐던 것이다. 윤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학설을 정리해 1982년 ‘기자신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사 전공자의 외도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후 학계의 역풍이 몰아쳤다. “제 학설이 자꾸 문제가 되니까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현종 선생께서 ‘내친김에 중국 고대문헌에 고조선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게 됐죠. 그런데 대선배 교수 한 분이 ‘오늘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농담인 줄 알고 그냥 쓴 대로 읽었어요. 토론시간이 되자 그 분이 책상을 마구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北 추종자라는 비난
▲ 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대한 글을 발표하는 윤내현 교수(오른쪽).
이때 윤교수는 결심했다. ‘기자만 연구하고 한국사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나머지 문제까지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여기서 그냥 물러서면 내 주장이 잘못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겠는가.’ 그 뒤로 중국사를 제쳐두고 한국 고대사를 집중 연구했다. 물론 중국사 전공을 십분 이용해 중국 고대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국경 기록을 샅샅이 조사했고 이어 고조선의 사회구조, 통치조직 등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학계에서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인데, 해방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죠. 물론 그분들의 연구에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에는 ‘고조선의 국경은 고려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헌에는 도대체 ‘고려하’란 지명이 나오질 않아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고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이라고 하는데 헌우락이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아예 무시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 문헌을 찾다 보니 ‘요사(遼史)’에 헌우락이 나오더군요. 또 옌칭에서 중국 고지도를 뒤지다가 ‘고려하’라는 강명을 발견했습니다. 대능하에서 북경으로 조금 가면 ‘고려하’가 있고 상류에 고려성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만주에 살던 분들께 물어보니 고려성터가 있고 일본이 세운 팻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채호, 정인보 선생은 현지답사도 하고 문헌도 보았던 겁니다.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는 동안 북한이 그 학설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무렵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하는 ‘한국사휘보’에 그를 비방하는 글이 실렸다. ‘북한의 어용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자’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 정보기관에 “고대사 분야에서 북한학설을 유포하는 자가 있다”고 고하는 바람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까지 생겼다.
이처럼 윤교수는 동양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지만 한국사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동양사로 가면 강단사학자, 한국사로 가면 재야사학자가 되는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역사학의 역사’(지식산업사)에서 1980년대 윤내현 교수의 활동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고대사의 첫 장에 해당하는 고조선 연구는 1980년대에도 부진했다. 문헌이 빈약하고 고고학적 성과도 북한이나 중국과 관련되어 있어서 현장감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학설을 내세운 것은 윤내현 교수다.
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거하여 고조선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23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그 도읍은 지금의 평양에서 시작해서 중국 난하 유역으로 팽창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한 뒤 한나라 무제에 의하여 망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의 고조선 연구는 1994년 ‘고조선연구’로 정리되어 출간되었다.” 한교수는 덧붙여 “윤내현의 연구는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으로 학계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고 적었다.
고조선 재평가 열풍
그러나 학계의 반발이 크면 클수록 고조선에 대한 일반 국민의 관심은 고조됐다. 이 무렵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 윤교수의 특강에 1500여 명의 일반관중이 몰려들 만큼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불었다. 1986년 3월 윤교수는 ‘사학지’를 통해 ‘위만조선’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종래 사학계의 통설은 한반도 북부 평양지역에서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대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윤교수는 위만조선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위치하고 고조선과 병존했던 정치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즉 기원전 195년 서한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자의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 세운 나라가 위만조선이며, 훗날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서쪽 변경까지 침략해 지금의 요서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 학설대로라면 고조선-준왕(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여러 나라 시대(열국시대)-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되어 있던 고대사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정권교체는 맞지만 이는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와는 별도로 고조선-열국시대(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삼한 등)-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남북국시대(신라, 발해)의 체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1986년 11월 당시 문교부는 국사교육심의회(위원장 변태섭)를 발족하면서 단군조선을 비롯, 일제의 의해 조작·왜곡된 한국사를 복원해 새 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윤교수는 30여 명의 심의위원 가운데 가장 젊은 40대 위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대동강 유역으로 제한된 고조선의 강역만큼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생님뻘 되는 다른 심의위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고칠 필요가 있더라도 천천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교수는 마음이 바빴다. 고조선 땅의 넓고 좁고의 문제를 떠나 고조선 역사를 바로 세워야 다음 시기의 혼란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후 흑룡강성 지역에는 부여, 연해주에 읍루,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남쪽에는 삼한 등이 있었습니다. 기존 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그 중 하나이고 다만 조금 먼저 세워진 나라일 뿐이죠. 그러나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고 하면 고조선 붕괴 후 지방세력이 독립해 여러 나라로 갈라서는, 역사체계 자체가 달라집니다. ‘삼국사기’에는 경주에 신라를 세운 사람들이 조선의 유민(遺民)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유민(流民)이 아니라 유민(遺民)인지도 주목해야 합니다. 흘러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잔류한 백성이라는 것은 고조선이 한반도 남쪽까지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죠.” 하지만 심의위원 가운데 윤교수의 주장에 동의한 사람은 단 두 명(손보기, 박성수)뿐이었다.
윤교수는 그날로 심의위원직을 사퇴하고 학생들과 강원도로 답사를 떠났다. 그런데 언론이 윤교수의 사퇴 이유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야단이 났다. 결국 변태섭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개편되는 중·고교 국사교과서(중학교는 1989년, 고등학교는 1990년)에 고조선 초기의 정치·문화적 중심이 요령지역이었음을 명기하겠다고 밝히며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 고대사에서 ‘학문의 국수주의화’냐 ‘식민사관의 청산이냐’는 논쟁은 계속됐다. 윤교수는 그때 국사교과서에서 고조선의 영토는 넓게 그려졌지만 여전히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서술된 점에 대해 불만이 많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나 교과서에는 위만이 준왕에게서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해 고조선의 뒤를 이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사료의 비판적 해석 필요
“이 서술대로라면 우리 민족은 기자가 망명한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낙랑군이 축출된 기원 313~315년 무렵까지 무려 14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돼요. 일제 35년은 대단한 치욕으로 생각하면서 1400년 중국의 지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되는 해인 기묘년에 서주 무왕이 즉위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해석해야 해요. 지금까지는 단군조선이 건국 후 1500년 되던 해에 끝이 나고 통치자가 기자로 바뀌었다고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시기에 고조선은 도읍을 아사달에서 장당경으로 옮겨 그대로 존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이런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이 망한 뒤 기자가 조선에 와서 통치자가 됐다고 기록한다. “이승휴 선생은 유학자로서 중국을 숭상한 분입니다. ‘제왕운기’가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권이 중국역사고 하권만이 한국사입니다. 즉 중국사를 죽 서술하고 그 밑에 한국사를 붙인 것인데 이는 유가의 기본사상인 천하사상-중국 천자가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죠. 이승휴 선생의 학설이 광복 후까지 비판 없이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민족사의 출발점에 서서
“길을 잃었을 때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방향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윤교수가 30년 가까이 고조선에 몰두한 이유도 그것이 우리 민족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가 대부분 분열의 시대인 삼국시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한 나라입니다. 2000년이면 신라가 건국한 이래 오늘날까지를 합친 만큼 오랜 시간이에요. 고대사회라 지금처럼 조직적인 중앙통치가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한 나라를 이루고 그만큼 오랜 세월을 존속했다면 민족공동체의식이 형성되지 않았겠습니까. 그후 사국(윤교수는 가야를 합쳐 사국시대를 주장한다)으로 갈라졌다 해도 끊임없이 공동체 복원을 바라고 통일은 당연한 과업이었을 겁니다.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한 국가였다면 자연스럽게 부여나 고구려, 발해가 우리 역사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국가였다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역사에 편입된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슬쩍 윤교수에게 “그동안 역사가 정치에 이용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의미심장한 답이 돌아왔다. “정치하는 분들이 필요에 따라 역사를 이용했지요. 사실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 했다면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한심스러운 것은 아예 역사에 관심이 없거나 이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죠.” 정년을 앞두고 윤교수는 칭찬보다는 매가, 격려보다는 비난이 돌아오기 일쑤인 고대사 분야에 관심을 갖는 후학이 드물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나마 고고학을 빼면 문헌사 분야에서 삼국시대 이전 상고사를 전공하는 박사급 연구자가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
“논문을 썼을 때 칭찬받으면 좋겠지만,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성공한 것이죠. 반론도 칭찬도 없는 논문이 제일 가치가 없어요. 저는 제자들에게 제 학설을 따라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자는 내 것을 뛰어넘어야지, 이미 내가 다 해놓은 것을 따라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학문은 스스로 틀을 깨는 작업입니다. 내가 쓴 논문이라도 세월이 지나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남이 지적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고치는 것이 학자의 도리입니다.” (끝)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khmzip@donga.com
발행일: 2003 년 12 월 01 일 (통권 531 호)
쪽수: 414 ~ 422 쪽
▲민족사왜곡의 주범 식민사관의 거두-이병도
▲ 단군의 실존을 인정한 이병도의 양심고백
'
신념의 길
꿈은 현실이 됩니다
편집부
나는 신념있는 사람입니다.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아니라 해도 나는 이길을 갑니다.내가 선택한 이길이 하늘이 이끌어 주시는 길임을 나의 혼이 알기 때문입니다.가다보면 도와주어도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하지만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그 사람의 분별심이 관념의 한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언젠가 진리의 빛을 보고 찾아 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나는 무정한 사람입니다.어떤 집착도 찰나에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큰사랑의 빛이 있기에 한 영혼이라도 밝히고깨우쳐 주기위해 오늘도 이 순간도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늘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 하나 집착을 던지고 놓았을때 자유와 평화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물질세계 이전에 정신세계 밝혀야 혼이 주인이 될 수있음을 알리고자 합니다.한민족에게 내려온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인천지인 정신을 전하고, 천부경의 천지기운으로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루고자 합니다.소명의식의 간절함이 쌓이고 쌓여사명이 되고, 비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천지기운이 되어, 민족과 인류와 지구를 구하고자 합니다.모두 세상을 밝히는 하늘의 씨앗이 되어이 땅에 온 사명을 다 합시다.
[배경음악:Sky Walker - Isao Sa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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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사관과 30년간 싸워 승리한 민족사학자 윤내현교수 ©
홀로 서기, 그러나 외롭지 않다
윤내현 교수의 글을 옮깁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정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자는 홀로 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학자들의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 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학자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논문이나 연구 저서를 출간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전해왔던 것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바로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연구결과 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발표자가 그러한 결과를 내놓기까지는 깊고 오랜 연구를 거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동의하려면 그 발표자 정도의 이해 수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새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 뒤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연구를 많이 하는 학자일수록 홀로 서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학자는 외롭다. 심오한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학자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를 안아주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라도 그것을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협력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난의 성격을 지녀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역사 연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풍토가 아쉽다.
새로운 주장을 받아주는 아량이 부족하다.
학문을 벗어난 공격, 심지어는 인신공격 까지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 가운데 하나겠지만 이래가지고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
“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그날 발표 내용은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학교 입장이 난처하다면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총장은 새로운 학설을 내놓는 것이 학자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면서 오히려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다 기억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는 그러한 곳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시대였다. 확인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만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곤란하다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본 것은 신채호, 장도빈, 정인보 선생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제기한 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필자가 제기한 견해는 중국 고대 문헌을 검토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서 고조선의 영토를 넓게 본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역사 연구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므로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과 일치한 연구결과는 모두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필자가 우리 고대사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나 북한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중국의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대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러한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우리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면서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북한 학자들이 부분적으로 나와 비슷한 견해를 이미 발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펴낸 《고조선 연구》와 《한국 열국사 연구》를 비롯한 여러 권의 단행본과 60편이 넘는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들은 필자의 독자적인 연구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한 연구자를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음해한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필자를 비정통 역사학자인 것처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을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로 분류하고 필자를 재야사학자에 포함시켰다.
그 기준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주장은 비정통 역사학자의 주장 이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뜻을 담은 것 같다.
학문 연구를 하는 데 강단과 재야라는 분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러한 구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공부도 했으며 현직이 대학교수인데 필자를 강단사학자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 필자가 일부 사학자들을 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라고 비난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글을 쓴 적이 없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남을 칭찬은 하지만, 비방이나 비난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 쓰는 것도 삼간다.
올바른 서평을 쓰려면 비판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직 필자가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심지어는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의 가치관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모두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것처럼 매도하기도 한다.
독재정권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정권유지에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리 역사의 중요성을 말하면 모두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인가. 역사 연구는 계속 되어야 하고 그 중요성은 정권과 상관없이 강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모함을 하는 것은 필자를 포함한 고대사 학자들을 민주화에 역행한 사람들인 것처럼 매도하여 새로운 고대사 연구나 그 결과에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으로 말하면 역대 어느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집단에서 연구비나 행정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정부나 정권 또는 기관이나 단체한테서 연구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즈음은 우리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 또는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을 말하면 세계화의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남북통일을 위한 민족 동질성 회복의 차원에서나, 우리 문화와 외래 문화가 접촉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가 심화될수록 우리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우리 가치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도 말이다.
필자는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 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매도에 필자는 한번도 변명을 하거나 반박을 해본 적이 없다.
묵묵히 연구생활에만 정진 하면서 논문과 저서를 통해 필자의 주장을 계속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그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첫째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내 자신이 남을 모함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필자를 비방하거나 공격한 학자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필자가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내놓기까지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우리 고대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지난날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침묵만을 지켜왔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서 필자가 새로운 주장을 한 뒤에야 그대들도 기존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바로 기존의 고대사 내용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 필자는 외롭지 않다. 그 동안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필자를 매도했던 학자들까지도 요즘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로 넓게 보고 있으며 그 문화 수준도 지난날 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필자는 매우 기쁘다.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는 데 조금은 이바지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필자가 이렇게 그 동안의 사정을 밝히는 것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필자의 체험으로 알림으로써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외롭지 않게 해주자는 뜻에서이다.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에서이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겠는가!
윤내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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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최초로 배아줄기세포원천기술을 개발한 황우석 박사
세상의 모든 위대한 발견은
뜻하지 않게 우연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 우연한 발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운 좋게 단 몇 번의 실험만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똑같은 실험을 하루에 몇 번씩, 몇 년에 걸쳐 수 백,
수 천번 반복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발견할 확률과 끊임없이 싸워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실험은
바닷가 넓은 백사장의 모래를 한 번에 한 줌씩 집어내는,
그리하여 그 속에 묻힌 반지를 찾겠다는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전 팀원이 슬럼프에 빠진 채 혹은 몇 달이 흘러간다.
그러다 또 뭔가 될 듯한 조짐이 보이면
팀원들 모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말 못할 기대감에 부푼다.
그러나 실패는 순식간에 또다시 찾아온다.
반복되는 절망과 계속되는 실험...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여러 연구원들이 우리팀을 떠났다.
우리팀은 마침내 누구나 만류했던 실험에 뛰어들어
세계 최초로 인간 복제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추출에 성공했다.
팀원들의 가슴속에는 가장 큰 선물인 자신감이 자리 잡았으리라.
실패를 딛고 기적을 이뤄본 우리들은
이제 더 힘차게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 '황우석박사 일기' 중에서 -
▲ 일제에 나라을 침탈당하자 자결한 민영환 선생과 피어난 혈죽-피흘린 자리에서 갑자기 45개잎(민영환의 당시 나이)이 달린 혈죽이 뿌리도 없이 피어 민영환의 나라사랑과 절개를 하늘이 인정해주시다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민영환 유서)
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무릇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謝)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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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년(철종 12)∼1905년(광무 9).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여흥(驪興), 병조판서 민겸호의 아들.
1878년 고종 15년 문과에 급제.
미국 공사로 있다가 1896년 고종 33년 2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례.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신문명에 밝았으며,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의 변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귀국 후 참정(參政)에 올랐고 훈장조례를 처음으로 공포하였으며
사신으로 해외에 여러차례 나가서 공을 세워 훈 1등에 이르렀다.
외부·학부·탁지부 대신을 역임하여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 분투하였으나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왕의 시종무관장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는 형세에 이르니,
우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살하였다.
뒤에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받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위 유품 혈죽(血竹)은 충정공이
자결을 한 자리에서 피어난 대나무의 잎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자 일제가 베어내려 했으나 부인이 따로 보존하여 오다,
충정공의 종손인 민병기씨가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유품들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 일제에 뽑힌 혈죽-가족이 보관해오다가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민영환이 자결하고 8개월이 지나자,
피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라 인심이 술렁이자 일제 날조.
민영환 어른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김은호 화백, 김우현 목사 등 청죽을 목격한 분들이 많았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신문 보도대로 민영환이 순국한 지 8개월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방에서 청죽이 솟아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마루를 뜯어 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가 확인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는
"일제는 혈죽의 조작 증거를 잡지 못하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쑥 뽑혔다고 한다.
만약 뿌리를 통해 번식했다면 대나무가 뽑혀 나올 리 없다"
고 말했다.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것은 광복 이후,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씨에 의해서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옮겨지게 됐다.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자료 제공자 : 김성호 sindo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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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시인-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몇가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할수있도록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오면
나는 나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말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위해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 나가겠습니다
-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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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심즉 태양(천부경)-양심은 어둠과 혼란과 무질서을 비추고 정화시킨다
양심은 생명과일이요,
비양심은 선악과다.
양심속에 바로 극락이 있고 천당이 있고
양심속에 행복과 영원이 있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양심은 하느님이요,비양심은 마귀며,
양심적이면 의학적으로도
피가 맑아지고 자신과 남을 속이면
피가 탁해져 병의 근원이 되며
그 만큼 사망을 앞당기게 된다.
양심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항상 희생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웃집에 쌀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되면
몰래 부엌에 쌀을 갔다놓고 나오는,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살면 양심이 점점 강해지고
밤잠을 자지못하게하는
비양심은 양심에게 결국 지게 되는 것이다.
양심이 이기게 되니까 거짓과 뒤틀림의 비양심은
설 자리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속이기을 좋아하는 오만하고 교만한 자들은
순간은 속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드러나고마니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요,
결국은 패망이며 사망이며,
인간사의 고통과 혼란과 무질서와
불행의 문제가 다 거기에 있다.
- 윤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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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생각을 살펴보라!
그 생각이 당신의 말을 만든다.
당신의 말을 살펴보라!
그 말이 당신의 행동을 만든다.
당신의 행동을 살펴보라!
그 행동이 당신의 습관을 만든다.
당신의 습관을 살펴보라!
그 습관이 당신의 인격을 만든다.
당신의 인격을 살펴보라!
그 인격이 당신의 운명을 만든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혼자의
시간과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
침묵은 마음에 휴식을 주고
마음의 휴식은 몸에 휴식을 준다.
휴식은 내 생각을 돌아보게 하고
내 마음과 내 영혼을 살펴보게 한다.
생각의 힘을 기른다는 것은
곧 내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요,
내 영혼의 힘을 기르는 것이요,
나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최상의 열매가 맺히도록 순수하고
좋은 씨앗만 심는 것,
이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이다.
- 작자 미상 -
▲ 사랑의 시인-용혜원 ©
우리들이 나눈 대화 중에
몇 마디 때문에
고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을
한순간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이루어야 한다면
항상 기쁨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웃기만 하며
말도 별로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그대이지만
잔뜩 화가난 얼굴로
나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올 때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바다는 살아 있기에
성난 듯 파도도 치지만
많은 날들은
잔잔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봄바람은
꽃을 피우고
가을 바람은
열매를 맺게 하듯이
살아감 속에 아픔은
그만큼씩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 용혜원 -
천국이 여기있다 저기있다못하리니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양심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인류는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는데 양심은 인간의
본심본 태양이요 본심은 하나님이다.
우리 인간의 본심이 양심인고로 양심적으로만
살면 마음이 편안하고 태평한 것이다.
본심에 의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하면
거리낌이 없는고로 불안감이 없고
불편함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만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마음이 불안하고 부끄러운데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속에 계시고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여지없이 용납을 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한다.
양심에 따라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속의 양심은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양심이 강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내속에서 강해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 나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양심대로 살면
'나'라는 것을 기어이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양심대로 사는 것이 악령을 이기는
비결이요, 영원한 생명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양심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 간사한'나'라는 것을
짓뭉개버릴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아니하는고로
'나'라고 하는 마귀영이 점점 약화되어 비로소
양심의 영인 하나님의 영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양심에 따라 움직이면 자신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요,
주위 사람들도 구원을 얻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서
피가 점점 맑아진다.
피가 점점 맑아지는고로 병이 날수가 없는
몸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참신앙이란 하나님의 영, 즉 양심이 기뻐하는대로
마음먹고 행동하는 것이다.
양심이 기뻐한다는 것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내속의 양심이 기쁜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협력하면 양심이 기뻐하는 것이다.
그 기쁜 마음은 하루만이 아니요,
계속해서 기쁜 마음이다.
양심속에 천당이 있고 행복이 있다.
사람마다 행복을 추구하고 동경을 하지만
그 행복을 쟁취해보지 못하고 다 땅에 묻히고
마는 것이다.욕망과 욕심은 악령인고로
악령을 따라 움직이면 악령이 점점 강하여
병들어 고통으로 신음하다 죽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죽음 속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신앙이 따로 있고 양심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음이 아니요, 하나님 자체가
양심이요, 양심 자체가 믿음이요, 믿음 자체가
곧 신앙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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