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정부 대북지원을 확약받기 위한 포석인 듯… 미국도 정권교체 대비 서울·평양서 분주한 행보
지난달 29일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갑작스럽게’ 남한을 방문하는 날 베이징의 정통한 북한 소식통은 국내 관계자들에게 ‘생뚱맞은’ 연락을 해왔다.
“김양건 부장이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해보라”는 것. 특히 대선주자, 그 중에서도 이명박 후보 쪽을 주시하라는 귀띔까지 했다.
김 부장이 방남한 시점은 여야 대선주자들이 후보등록을 마친 직후이고 대선의 마지막 뇌관이라는 BBK 사건을 놓고 후보 간 대립이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김 부장의 방남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정상회담과 총리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합의한 경협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고, 김 부장 역시 “남북간 경제협력이 한반도 평화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며 ‘경협’에 방점을 두었다. 김 부장의 방남에 ‘정치적 배경’은 전혀 없다는 풀이였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정통한 복수의 전문가들은 “김 부장이 경협 문제로 방남했다는 해석은 남북간에 총리급ㆍ장관급 회담, 실무회담이 계속 이어진 데 비춰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2000년 9월 김용순 통일전선부장의 방문 때는 7개항의 합의서가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합의서 발표가 없는 점도 그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김 부장이 2박3일 남한에 머문 동안의 동선은 그가 일정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간 뒤 국내외 정보통들을 통해 윤곽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우선 김 부장은 이명박 후보를 비롯해 다른 후보와도 접촉했다는 전언이다.
그 자리에는 청와대 최고위 인사와 미국측 고위 관계자가 동석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 부장과 동행한 북측 인사가 이명박 후보쪽 사람을 따로 만났다는 소식도 덧붙여졌다.
■ 힐 차관보 '부시 친서' 들고 평양으로
김 부장은 남북 당사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에도 지난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은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대선후보 모두 그에 동의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전언이다.
김 부장 일행이 1일 북한으로 돌아간 뒤 남-북-미 간에 묘한 동선이 이어졌다. 같은 날 3일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평양으로, 백종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워싱턴으로 각각 떠났다. 힐 차관보는 “핵시설 불능화를 점검하고 핵 프로그램 신고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백 실장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식통들은 그와는 다른 해석을 전했다. 백 실장의 워싱턴행은 유력 대선주자의 확고한 ‘약속’을 미국에 전하고 미국으로부터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케 한 대북지원 프로젝트, 즉 ‘한반도 마셜플랜’‘의 이행을 뒷받침 받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힐의 방북은 차기정부의 대북지원 약속을 분명히 전달하고, 북으로부터는 핵프로그램의 이행을 담보 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힐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낸 것은 미국이 그만큼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어서 남한의 대선결과와 상관없이 남북관계는 획기적인 변화가 전망된다.
■ 김영남 상임위원장 서울 방문 유력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내년 1월 서울 방문설은 그러한 남북관계 변화에 마침표적 성격을 띤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내년 1~2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할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선을 그었지만 북한 소식통들은 김 상임위원장이 내년 초 방남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편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남북경협, 대북지원 합의를 확실하게 이행 받으려면 대선 이후 대통령당선자와 결국 공조를 해야 하면 그럴 시기는 내년 1~2월 뿐이라는 계산에서다.
김 국정원장이 “북측에서 만나자고 제의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새 정부에 북한을 연결시켜주는 일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한 것은 북측의 방남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대선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그림자로 불리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한을 방문하고 대선주자들과의 면담설 등에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그러한 ‘힘’의 배경을 놓고 해석이 구구하다.
부시 정부의 한반도에서의 1차 관심사는 북핵이고, 북한이 미국의 핵프로그램을 순수히 받아들인 직접적인 배경은 ‘경제지원’이다. 미국은 북한의 자금줄인 마카오 BDA에 대한 압박을 풀면서 경제 제재를 완화하고, 남한은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마셜플랜으로 불리는 대북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김양건 통전부장의 방남은 한반도 마셜플랜의 이행 가능성과 이것을 뒷받침할 ?玲阪??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북측에 ‘재원’의 안전성을 확인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차기 주자들에게도 재원의 이행에 대한 약속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실력자가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명박 후보와 접촉했다는 소문의 배경에는 미국의 역할론도 제기된다. 미국이 이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북측 관계자를 연결했다는 추정이다. 일부에선 북한이 미국의 북핵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이 후보에게 대북지원 약속을 확약 받았다는 애기도 들린다.
북미 관계가 순항 중이고 차기 정부의 대북 지원이 절실한 지금의 복합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과거 대선판을 뒤흔들던 북풍 같은 것은 이번 대선에서는 물러나 있을 듯하다. 내년 초에야 북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남 가능성과 함께 과거와는 다른 각도에서 북풍이 거세게 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대선 지형에서 북풍은 미풍(美風, 미국 영향력))에 가려 맥을 못 추는 형국이다. 북미 관계가 어긋나 광풍으로 돌변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동력을 갖출 시간이 부족하고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의 방남이 말해주듯 북한은 대선 후의 훈훈한 남풍(南風)을 기대하고 있다. 대선판을 휘돌고 있는 미풍의 위력을 통제하고 북풍을 맞을 차기주자는 1주일 후에 가려진다.
■ BBK카드, 아직도 미국이 쥐고 있나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였던 BBK사건의 뇌관이 사실상 제거되면서 이명박 대세론이 탄력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5~6일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40.7%로 정동영ㆍ이회창 후보와 20%포인트 이상의 지지율 격차를 보였다. 앞으로 남은 대선 1주일 동안 이변이 없는 한 이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BBK사건 수사 종결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 셈이다.
그렇다고 BBK사건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BBK 사건의 실질적인 뇌관을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다는 얘기도 현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김경준 BBK 전 대표를 조기에 한국에 송환한 것이나 김씨의 누나 에리카 김의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이 갑자기 취소된 배후에 미국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김경준씨와 에리카 김 모두 미국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미국에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3월 BBK사건에 대한 미국 내 재판과는 별개로 연방수사국(FBI)을 통해 김경준씨를 극비리에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국내 검찰이 밝힌 것과 다른 이명박 후보의 아킬레스건을 확보했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BBK 자금과 관련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얘기도 나돌았다.
김경준 씨를 조기에 송환한 것은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 후보를 컨트롤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즉 대권에 근접한 이 후보에게 슬쩍 위협적인 카드를 보여주어 대선 후 한미, 남ㆍ북ㆍ미 관계에서 유효한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미국이 이 후보 측과의 연결을 주선하고 BBK 카드를 앞세워 집권 후 대북지원 등 관계 설정의 가이드라인을 선보였다는 소문도 있다.
반면, 미국이 BBK 사건과 관련해 별개의 카드를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는 반론도 있다. 설령 그런 카드가 있더라도 이 후보가 집권할 경우엔 별 효력이 없다는 추론이 상당하다. 더구나 BBK 문제가 한미 관계 자체를 흔들 만큼 파괴력이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1.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대통령당선자
2. 그가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3.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
4. 고위관리로 변신한 공작원과 그의 협조자들
5. 대선국면에 파고든 비밀공작
1.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대통령당선자
2003년 1월 15일 검은색 고급승용차 한 대가 서울 용산에 있는 미국군기지 영내로 들어갔다. 그 승용차 뒷좌석에는 제16대 대통령당선자 노무현이 앉아있었다. 그는 1월 13일 서울 세종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별관 6층에 자리잡은 대통령당선자 집무실에서 미국정부특사로 서울에 들어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당시)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를 만난 지 이틀 뒤에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부쉬가 차관(undersecretary)보다 급이 낮은 차관보(assistant undersecretary)를 특사로 지명하여 대통령당선자에게 보냈다는 점이다. 국무부차관보가 평양에 갈 때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북(조선)의 외무성부상이므로, 부쉬정부는 남(한국)의 대통령당선자를 차관급 정도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노무현이 자기의 집무실을 찾아온 켈리와 마주앉아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만남은 이틀 뒤에 있었던 노무현의 주한미국군사령부 방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2007년 11월 11일 한국정책방송(KTV)이 방영한 대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4년 전에 당선자 신분으로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갔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주한미군사령부에 가서 서로 악수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줄임) 대한민국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주둔군사령부에 먼저 방문해 가지고 악수하고 사진 찍어야 되는 것이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줄임) 좀 서글프긴 하지마는 그렇게 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당시 우리 한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위의 회고담에서 그는 4년 전에 자신이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것이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서글픈 경험이었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자신은 그처럼 비정상적인 행동을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남(한국)과 마찬가지로, 터키도 미국과 방위 및 경제협력협정(U.S.-Turkey Defense and Economic Cooperation Agreement)을 맺고 그에 따라 미국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터키의 대통령당선자가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가는 비정상적인 행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과 하위동맹관계를 맺은 터키의 현실과는 완연히 다르게, 남(한국)의 지배계급이 기생하는 이른바 '한미동맹체제'라는 것은 제국주의세계체제의 반동적인 지배와 신식민주의체제의 굴욕적인 예속이 뒤엉켜 고착된 현실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고담에서 자신이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갔었다고 말하면서도 사령부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났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가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갔을 때 그를 상대한 사람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아니었는데, 차마 그 사실마저 언론에 드러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육군대장 리언 라포트(Leon J. LaPorte)는 2003년 1월 6일부터 17일까지 워싱턴의 국방부 본부에 들른 뒤에 괌과 오키나와에 있는 미국군기지를 차례로 방문하는 중이었다.
대통령당선자가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것도 있을 수 없는 굴종행위이었거니와, 미국군사령관이 해외출장 중에 있음을 알면서도 사령부를 찾아간 것은 신식민주의적 대미굴종의 극치였다.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치욕적인 노무현의 굴종행위는, 1961년 11월 11일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틀어쥔 때로부터 여섯 달 뒤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도쿄를 찾아간 박정희가 보여주었던 치욕적인 굴종행위를 빼다 박은 닮은꼴이다.
그날 저녁 일본수상의 관저에서는 박정희를 환영하는 만찬이 있었다. 환영축배를 들자마자 박정희는 술병을 들고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맨 끝에 앉은 일본노인에게 걸어가더니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유창한 일본말로 정중하게 인사하고 술잔을 올렸다. 박정희가 도쿄로 떠나기 전에 일본정부당국에 미리 연락해서 환영만찬에 모셔달라고 요청했던 그 노인은, 박정희가 1942년 3월 22일에 졸업한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교장으로 있었던 나구모 신이찌로(南雲親一郞)이다. '만주제국'의 수도 신경에서 군관학교 교장을 지내던 시절에 '선계생도(鮮系生徒)' 박정희를 "천황폐하께 바치는 충성심에서 보통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답다"고 칭찬하였던 일본육군 중장 나구모, 그리고 그 학교 제2회 졸업식에서 '만주제국'의 허수아비 황제 부의(溥儀)가 하사한 금시계를 받고 졸업생을 대표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 바쳐 벚꽃처럼 멋진 최후를 맞겠노라"고 선서하였던 오까모도 미노루(高木正雄, 박정희의 일본이름)가 19년만에 도쿄의 수상관저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묘한 표정을 짓던 일본수상 이께다 하야또(池田勇人)는 "사은(스승의 은혜라는 뜻-옮긴이)을 아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입니다. 박정희 선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미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노무현은 대통령선거운동기간에 자기는 "별 볼 일없이 사진이나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겠다"며 "반미면 어떠냐"고 큰 소리를 친 적이 있으나,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 주한미국군사령부에 들어가서 굴욕의 사진을 찍는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과 박정희가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이 취했던 신식민주의적 굴종행위는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버린 정치인의 치욕적 경험이 아니라, 남(한국)의 신식민주의체제가 제국주의지배력 밑에서 짓밟히는 능멸의 현장이었다. 신식민주의체제는 남(한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지배계급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얽어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올가미 같은 것이다.
워싱턴의 국무부와 국방부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대통령취임식을 2002년 2월 25일에 거행하고 청와대에 들어간 때를 전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로 그를 얽어매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2003년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담당 차관보 칼 포드(Carl Ford)가 서울에 비공개로 파견되어 대통령당선자의 핵심인사들을 만났으며, 2003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나중에 부차관으로 승진) 리처드 롤리스(Richard P. Lawless Jr.)가 서울에 나타났다. 포드와 롤리스의 서울방문은 새로 등장한 노무현정부를 올가미로 얽어매기 위한 것이었다.
2007년 12월 19일에 당선될 대통령당선자도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신식민주의체제의 올가미에 얽어 매여 대미굴종의 길로 향할 것이다.
2. 그가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주목하는 것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대통령당선자 노무현에게 굴욕적인 행동을 요구한 까닭, 그리고 대통령당선자가 그 요구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 까닭을 밝히려면, 우선 아래와 같은 배경설명이 요구된다.
노무현이 자신의 지지율을 앞서 가던 이회창을 대선 막판에 따돌리고 극적으로 당선되었던 2002년 말부터 2003년 초에 이르는 시기의 남(한국) 내외정세는 너무도 복잡하였다.
1-1) 제국주의반동세력 가운데서도 악명 높은 이른바 '신보수주의세력(네오컨)'에게 등을 떠밀려 간신히 대권을 거머쥔 부쉬는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앉자마자 이라크 침략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포진한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병력 22만5천명, 군용기 700대, 항공모함 전투단 5개로 구성된 방대한 무력을 이라크전선에 내몰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대규모 선제공습을 명령하여 이른바 '이라크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라는 무력침략을 도발한 때는 2003년 3월 20일 새벽 5시 30분이었다. 이라크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제국주의점령군이 '안정화작전'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파괴와 살육을 저지르는 중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이라크침략전쟁을 도발한 것도 모자라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미 정치회담마저 중단하는 실로 엄중한 사태를 일으켰다. 조미 정치회담의 중단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경비정 684호와 한국해군 고속정 357호가 교전을 벌여 고속정 357호가 격침되고 정장을 비롯한 6명이 목숨을 잃고 18명이 부상을 당한 해상무력충돌사건으로 이미 정치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어 있었던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전면대결구도로 몰아간 위험천만한 시나리오는, 경기도 오산의 미국 공군기지를 떠난 특별군용기 한 대가 서해직항로를 타고 평양 순안 비행기장에 내린 2002년 10월 3일, 그러니까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두 달 반전에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그날 특별군용기를 타고 평양에 내린 미국측 협상대표 제임스 켈리는 부쉬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으로 진행된 조미 정치회담에서 느닷없이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걸고들었다.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걸고든 것은 켈리의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검토하고 승인한 치밀한 사전각본에 따른 도발공세였다. 2003년 2월 12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나간 국방정보국장 로월 재커비(Lowell E. Jacoby)는 "북(조선)이 공개적으로 핵무기 추가확보에 나선 것은 30년이래 미국의 지역이익에 반하는 가장 심각한 도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켈리의 평양방문으로부터 두 달 뒤인 2002년 12월 10일, 남(한국)에서 대선이 실시되기 불과 아흐레 전에,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하위동맹국인 스페인의 해군에게 연락하여 아라바아해를 항해하던 북(조선) 화물선 서산호를 공해에서 불법적으로 수색, 억류하였다가 이틀 뒤에 풀어주는 전무후무한 해상도발을 자행하였다.
1994년에 체결된 뒤로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조미 정치회담의 기조를 유지시켜주었던 조미기본합의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의 파기음모와 해상도발에 의해서 휴지조각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전쟁중독증에 걸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연속적으로 취한 협정파기와 도발공세로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2003년 1월 10일 북(조선)은 정부성명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초강경한 반격공세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북(조선)은 2003년 2월 14일 동해에서 최신형 순항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을 실시하였고, 2003년 2월 17일 북(조선)의 외무성 관리는 평양을 찾아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특파원에게 북(조선)이 정전협정을 준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협정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무력도발에 무력보복으로 응전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극우논객 니컬러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는 언론을 통해 미국이 북(조선)의 영변 핵시설을 외과수술식 정밀타격으로 파괴하고, 견고한 지하시설들을 전술핵무기로 파괴하는 전술을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New York Times, 2003년 2월 28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한(조선)반도 정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조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 전쟁공포를 느끼는 것 이외에는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어야 하였던 노무현은, 사령관마저 자리를 비운 미국군사령부에 찾아가서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신식민주의체제의 평화와 안정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1-2) 2002년 6월 13일 주한미국군 장갑차가 굉음을 내지르며 국도 53호선을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뒤, 그 장갑차는 또래의 생일모임에 가려고 발길을 재촉하던 10대 소녀 심미순, 신현순 양을 등뒤에서 덮쳤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도 참혹하고 원통하였으나, 2002년 11월 22일 주한미국군 군사법원 배심원단은 두 여중생을 죽인 미국군 병사 두 명에게 무죄평결을 내리고 그들을 미국으로 빼돌렸다. 남(한국)의 대중은 주한미국군사령부의 만행에 격분하였다. 부쉬에게 미국군 범인을 남(한국)의 사법기관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면서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외치는 광화문 촛불시위가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촛불을 든 시위대오는 날이 갈수록 불어나더니, 2002년 12월 6일 광화문 일대에 모여든 3만 명의 시위대는 98개 중대 1만2천명의 경찰병력이 막아선 저지선을 뚫고 마침내 주한미국대사관 정문 앞까지 밀고 나갔다.
2003년 2월 9일 미국 씨비에스(CBS)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 '60분(60 Minutes)'이 '미국놈 돌아가라(Yankee Go Home)'는 제목으로 방영한 현장기록영상물은 분노한 시위군중이 서울시청 앞에서 미국기를 불태우는 장면을 보여주었고, 반미주의 무풍지대라고 믿었던 남(한국)에서 반미감정이 폭발하여 심리적 충격을 받은 주한미국군사령관 리언 라포트의 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충격적인 상황에 대해서 훗날 롤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2002년 한국 대통령선거를 앞둔 6개월, 즉 2002년 7월부터 12월까지였다. 그 기간에 한미동맹은 정치적으로 공격되고 이용됐다. 6월 13일 58번 국도에서 발생한 두 소녀의 비극적 죽음 이후 미국은 그 사건이 미칠 파장을 줄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김대중정부는 동맹을 지키기 위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나선 이회창마저도 광화문 촛불시위현장에 고개를 내밀 만큼 분노한 대중의 반미감정이 들끓고 있었으니, 대선후보로 뛰어다니던 노무현이 그 분위기에 재빨리 올라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선후보 노무현이 한미관계의 평등한 개선을 희망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2002년 9월 12일 대선후보 노무현은 아시아-유럽 프레스포럼에서 연설하면서, "전환기 시대의 한미관계는 성숙한 동반자 관계, 수평적 동맹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0월 7일 남(한국)의 언론과 대담하는 자리에서도 "한미동맹관계는 우리의 민주화와 정치, 경제발전에 걸맞게 수평적이고 상호협력적인 관계로 발전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한미관계의 수평적 관계개선을 말하고 다니는 노무현을 길들일 필요를 느꼈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신식민주의정권을 정치적으로 길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통령선거가 끝나자마자 당선자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대통령당선자가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제국주의반동정권에 굴복한 노무현은 워싱턴을 향해서 굴종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 2월 20일 대통령 취임식 직전, 워싱턴에서 손꼽히는 수구반동성향의 연구기관인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이 서울에서 개최한 토론회에 모습을 드러낸 노무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이 주한미군 주둔을 원치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우리 국민은 한국전쟁 당시 피로써 나라를 지켜준 미국에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최근의 주한미군지위협정 개정요구도 주한미군의 주둔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집권의 시작이 그러했으므로, 노무현정부의 집권기간 다섯 해는 이 글에서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되풀이된 신식민주의적 대미굴종의 연속이었다.
3.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
경인티뷔(TV) 대표이사(당시) 신현덕이 기독교방송(CBS) 사장 이정식에게 폭로하고, 2006년 10월 31일 방송위원회에 대한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미국간첩의혹사건은 남(한국)에서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비밀공작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엿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그 사건을 보도한 남(한국)의 언론은 이렇게 적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찍이 남한에서 통용되지 않았던 '미국간첩'이란 말이 등장한 것이다. 해방 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미제간첩'으로 숙청된 적은 있었지만, 북한에서의 일이다. 분단된 남한에서 간첩은 북한간첩밖에 없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동맹 이상이었기에, 미국을 위한 우리나라의 정보제공은 간첩행위로 인식되지 않아 왔던 한반도의 모순을 이번 사건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21 제636호, 2006년 11월 23일)
미국간첩의혹사건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건의 중심인물은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던 2006년 10월 당시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부차관이었던 리처드 롤리스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미국간첩의혹사건에 연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신동아 2007년 8월 호), 그 동안 언론보도를 통해서 드러난 일련의 사실들은 그의 주장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작원은 중앙정보국을 떠나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뒤에도, 공작원 활동경력을 밝히지 않는 규율을 지킨다. 중앙정보국 공작원으로 암약하였던 롤리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임명된 뒤에도 이전의 공작원 활동경력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국과 남(한국)의 몇몇 언론들이 간략하게 보도한 내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밑그림이 드러난다.
롤리스가 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때는 1972년이다. 그가 1946년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에 중앙정보국 공작원이 된 것이다. 중앙정보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는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남(한국)에 들어가, 전라도에서 약 2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때 배우기 시작한 한국(조선)말이 10년 뒤에 그가 남(한국)에서 비밀공작을 벌일 때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게 된다. 1972년에 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롤리스는 곧바로 주한미국대사관 상무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비밀공작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직후인 1973년 3월부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정부기관의 감시를 피해 핵무기개발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계획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서 비밀공작활동을 벌인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공작원 롤리스의 손에서 파탄되고 말았다. 롤리스가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계획에 관한 극비자료를 빼내어 중앙정보국 본부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자기들이 지배하는 신식민주의체제가 핵무장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핵무기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박정희를 짓눌렀고, 그 정권의 압력에 무릎을 꿇은 박정희는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사들이려던 계획을 1976년 1월 23일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계획에 관한 극비자료를 워싱턴 근교 랭리에 있는 중앙정보국 본부로 빼돌려 그 계획을 파탄시킨 롤리스는, '신동아' 2007년 11월 호의 관련기사가 지적한 것처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으로 인정받았다. 미국언론에 따르면, 2004년 11월 중앙정보국 비밀공작담당 총책인 스티븐 캡스(Stephen R. Kappes)가 사임하였을 때, 롤리스는 그 후임 물망에 오른 후보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Washington Post, 2004년 11월 14일)
롤리스보다 조금 뒤늦게 1973년에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또 다른 비밀공작원은, 1951년에 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도널드 그렉(Donald Gregg)이다. 박정희가 재처리시설 수입사업을 중지하자, 롤리스는 일본으로, 그렉은 중남미로 각각 공작거점을 옮겼다.
주목하는 것은, 롤리스가 남(한국)에서 비밀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던 1972년에 현지협조자(field collaborator)를 얻었는데, 그가 미국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과에서 유학하고 남광토건에서 일하고 있었던 배영준이다. 배영준의 말에 따르면, 1972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서울에서 열었던 중장비전시회에서 롤리스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신동아'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대담기사에서 롤리스와 배영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1972년의 중장비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 '30년 지기의 깊은 인연'을 맺은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중앙정보국 비밀공작원과 현지인의 관계가 개인적 친분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1972년에 신입공작원 롤리스는 미국에 유학하여 영어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현지협조자를 얻었던 것이다.
1975년에 남(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공작거점을 옮기기 전에 롤리스는 현지협조자 또 한 사람을 얻었는데, 그가 기독교방송의 폭로기사에서 '애덤스' 또는 '빅맨'이라는 공작명으로 나오는 백성학이다. 신현덕이 2006년 10월에 백성학과 대화한 것을 녹음한 녹취록에 따르면, 백성학은 자기가 배영준을 1970년대 중반에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기독교방송 특별취재반 2007년 3월 14일)
그때로부터 30여 년 뒤 신현덕이 미국간첩의혹사건을 폭로하자 배영준과 백성학은 자기들과 롤리스의 관계를 사업관계 또는 친분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혐의를 부인하였는데, 미국과 남(한국)의 언론보도에서 드러난 일련의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부인발언이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남부지검은 백성학을 수사하는 시늉만 하다가 2007년 4월 30일 그에게 혐의가 없다는 처분을 내렸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보자가 2007년 5월초에 '신동아'에 검찰수사기록 일부를 넘겨주면서 "검찰은 백 회장의 스파이 혐의에 대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 회장은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동아 2007년 6월 호) 남(한국) 검찰이 그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려면 우선 롤리스부터 소환하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국방정보국 한국지부를 조사해야 하는데, 그러한 소환과 조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1975년부터 여섯 해 동안 일본에서 암약한 롤리스는 1981년에 남(한국)에 재배치되어 1987년까지 비밀공작을 벌였다. 롤리스가 남(한국)에서 두 번째로 공작활동을 벌인 1980년대의 한(조선)반도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는데, 그러한 시기에 중앙정보국은 유능한 공작원을 공작현지에 침투시킬 요구를 느꼈을 것이고, 롤리스가 그 요구를 충족하는 공작원이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레이건정부 안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던 중앙정보국장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략정보국(OSS)에서부터 해외비밀공작경력을 쌓은 노회한 공작전문가 윌리엄 케이시(William J. Casey)였다. 케이시는 비밀공작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 롤리스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비밀공작에 배치하였다. 케이시의 비밀공작에 차출된 공작원들은 롤리스의 이름을 본떠서 '롤리스 그룹'으로 불렸다. (Sidney Blumenthal, 2007년 11월 1일)
케이시가 한(조선)반도에서 벌인 비밀공작은 윌리엄 자일커(William Zylka)와 이어리 콕(Erie Cocke)을 비밀특사로 여러 차례 북(조선)에 파견한 것이다. (U.S. News & World Report, 1999년 8월 9일) 북(조선)은 케이시의 비밀공작을 역이용하여 레이건정부에게 조미상호교류와 남북(북남)미 3자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는데, 자신이 개입한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지면서 궁지에 몰린 케이시가 1987년에 뇌암으로 죽는 바람에 그 공작은 중단되었다.
4. 고위관리로 변신한 공작원과 그의 협조자들
케이시가 죽은 1987년에 롤리스는 중앙정보국의 상관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5년 동안 몸담았던 중앙정보국을 떠났다. 비밀공작원에서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주식회사(USAsia Commercial Development Corp.)를 세우고 대표이사가 되었다.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은 남(한국)과 대만에 들어가는 미국계 자본의 투자활동을 조절해주는 투자자문회사이다. 내가 쓰는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그 회사는 신식민주의시장경제를 장악, 지배하기 위하여 침투하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척후병이다. 롤리스는 중앙정보국 공작원으로 암약하던 시기에 연계된 인맥을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에 끌어들였다. (신동아 2007년 1월 호)
2006년 9월 9일 배영준이 신현덕에게 한(조선)반도 정세동향을 해설해준 장소는 서울 중구 소공동 70번지 삼구빌딩 15층에 있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한국지사 사무실이며, 같은 건물 10층에는 백성학의 집무실이 있다.
대만언론에 따르면, 롤리스는 중앙정보국에서 나온 뒤에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을 세우면서 플로리다 주정부 상무장관을 접촉했는데, 그가 바로 미국 대통령 부쉬의 친동생이며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젭 부쉬(Jeb Bush)이다. 롤리스와 젭 부쉬는 오랜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Taipei Times, 2002년 8월 5일) 롤리스가 중앙정보국 출신으로 국무부 부장관이 된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의 도움을 받아서 따낸 14억 달러 규모의 대형사업은, 미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해저통신망 설치사업이다.
롤리스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을 세운 이듬해인 1988년에 젭 부쉬의 서울방문을 주선하였다. 서울에 들어간 젭 부쉬는 백성학을 만났고, 그 만남을 계기로 하여 백성학이 경영하는 모자생산기업 '영안모자'는 플로리다에 해외지사를 내올 수 있었다.
부쉬가문과 백성학의 관계는 젭 부쉬와 백성학이 서울에서 만나기 이태 전인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백성학은 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자신이 어린 나이에 주한미국군 부대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었던 6.25 전쟁시기 어느 날 포탄파편에 중상을 입었을 때 빌리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군 병사가 자신을 헬기에 싣고 미국군 야전병원으로 실어가서 목숨을 살려냈다는 회고담을 실었다. 그 회고담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는 6.25전쟁 시기 백성학과 함께 미국군 부대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였던 김병기가 있었다. 김병기는 오래 전에 미국군 장교의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서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 부쉬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부쉬의 운전기사 겸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학은 김병기를 통해서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쉬를 만날 수 있었다.
부쉬가문과 백성학의 특별한 관계는, 두 차례 있었던 부쉬의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백성학이 초청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취임식에 참석한 남(한국)의 정계, 재계인사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상석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2006년 11월 1일 남(한국)의 언론은 "워싱턴에서 그의 영향력은 한국정부 관계자 모두를 합친 것보다 크다고 봐도 된다"고 보도하였다.
외교통상부장관(당시) 반기문은 2006년에 유엔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그 선거를 좌우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환심을 사려고 선거막판에 백성학에게 긴급히 도움을 간청하였다. 2006년 10월 2일 반기문이 백성학에게 자신이 직접 두 차례, 그리고 자기 비서를 시켜서 두 차례나 전화연락을 하였는데도 백성학은 응답전화조차 주지 않다가, 퇴근길에 외교통상부장관 공관에 들러 30분 동안 만나주었다. (신동아 2007년 5월 호) 반기문의 간청을 들은 백성학은 워싱턴의 고위관리에게 연락하였고, 반기문은 유엔사무총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언론은 반기문의 유엔사무총장 선출이 "실적경쟁이라기보다는 뒷거래의 결과"였다고 비판하였다. (Newsweek, 2007년 3월 5일)
백성학의 육성녹음이 담긴 녹취록에서 그가 "미국이 1991년부터 우리 두 사람(백성학과 배영준을 뜻함-옮긴이)에게 중요한 일을 시켰다"고 말한 것을 보면, 롤리스는 중앙정보국에서 나와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주식회사를 경영하였던 1987년 이후에도 여전히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의 언론은 그가 "최근까지도 개인적인 채널을 통해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취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하였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롤리스는 1999년 어느날 배영준에게 부쉬가 대통령이 되어 자기를 부르면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한국지사를 맡아달라고 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부쉬는 백악관에 들어간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롤리스를 워싱턴으로 불렀고, 2002년 10월 롤리스는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백악관이 전설적인 공작원 출신 롤리스에게 중앙정보국 요직이 아니라 국방부 요직을 주었던 까닭은, 주한미국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라는 간판을 내걸고 실제로는 제국주의군사전략을 한층 강화하는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용산 미국군기지 이전협상, 전시작전지휘권 이양협상, 주한미국군 병력감축, 한국군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변화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결정사항을 집행할 유능한 인물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고위관리로 변신한 롤리스는 제국주의군사전략 강화사업을 지휘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당시 국방장관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는 워싱턴의 국방부 본부를 찾아간 남(한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에게 "한국문제에 있어서는 롤리스가 사실상 책임자다. 이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나하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동아 2007년 1월 호) 럼스펠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다시피 한 롤리스는, 2003년 2월부터 청와대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으로 일하던 이종석이 자기가 지휘하는 제국주의군사전략 강화사업을 순순히 따르지 않자,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당시 청와대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압박하여 이종석을 청와대에서 퇴출시켰다. 전권을 휘두르는 그의 행동이 오죽 거칠었으면, 그를 가리켜 '이름처럼 강압적이고 난폭한 무법자(lawless)'라고 부르는 남(한국)의 고위관리들(신동아 2007년 1월 호)이 생겨나기까지 하였을까.
롤리스가 제국주의군사전략 강화사업을 지휘하는 것과 발맞춰 그의 현지협조자들도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남(한국)의 기독교방송이 2007년 3월 6일에 공개한 백성학의 육성녹음 녹취록에서, 백성학은 자기가 "배영준과 함께 다섯 개 라인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정리한 뒤에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보고한다"고 말하였다. 그 육성녹음에 "우리 디씨(DC)의 조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배영준과 백성학이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는 대상은 '디씨에 있는 조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미국에서는 워싱턴이라 부르지 않고 워싱턴 디씨(District of Columbia)의 줄임말인 디씨로 부르고 있으므로, 백성학은 자신과 배영준이 워싱턴에 있는 어떤 조직에 속해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2006년 10월 21일 베이징 방문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날아가던 전용기 안에서 미국 국무장관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직전에 중국정부특사로 평양을 찾아갔던 국무위원 탕자쉬안(唐家璇)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핵실험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듣지 않았고,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는 발언을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백성학은 자기의 대화내용이 담긴 육성녹음 녹취록에서, "우리 조직에서 (라이스를) 야단쳤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웬만하면 떠들어대지 않는" 라이스가 그렇게 발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방송 특별취재반 2007년 3월 26일)
국무장관의 발언을 제어할 수 있는 워싱턴의 조직이란 국무부와 경쟁관계에 있는 국방부밖에 없으므로, 배영준과 백성학이 속해 있는 조직은 미국 국방부 산하의 국방정보국(DIA)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성학은 정보문서를 자신이 직접 들고 용산의 미국군기지에 들어가서 상대에게 전달하는데, 전달된 정보문서는 곧 미국 부통령 체니(Dick Cheney)의 책상에 올라간다고 말하였다. 또한 남(한국) 검찰은 배영준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용산 미국군기지 헌병사령관에게 조회하였더니 그가 2001년, 2006년, 2007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용산 미국군기지 출입증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배영준은 검찰심문에서 용산 미국군기지에 들어가 미국군 소령 비(B)를 만난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신동아 2007년 6월 호) 배영준은 검찰심문에서 미국군 소령 비(B)가 롤리스의 보좌관이라고 지목하였지만, 용산 미국군기지를 거점으로 첩보활동을 벌이는 현역 군인은 국방정보국 공작원들밖에 없으므로 비(B)는 국방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공작원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롤리스가 국방부 고위관리에 임명되면서 체니-럼스펠드-롤리스-국방정보국 한국지부-현지협조자들로 이어지는 공작체계가 가동하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국)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롤리스는 '코리아팀'을 가동하였던 것이다.
5. 대선국면에 파고든 비밀공작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은 10만 명의 인원을 움직이고 440억 달러의 예산을 쓴다. (연합뉴스 2006년 4월 22일)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반테러공작과 해외비밀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는 공작국(Directorate of Operations)인데, 그 부서의 인원은 약 5천 명이며, 그 가운데 약 1천 명은 여러 나라들에 잠입하여 암약하는 비밀공작원들이다. (Washington Post, 2004년 11월 14일)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좌우하는 제국주의세계체제가 그처럼 방대한 공작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반동정권의 해외비밀공작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작에는 자기의 악명을 무색하게 만드는 허점이 있다. 이를테면, 중앙정보국 국장 마이클 헤이든(Michael V. Hayden)은 아시아와 중동에 침투시킬 공작원이 얼마 되지 않아서 고민에 빠졌고, 현재 국방장관으로 있는 로버트 게이츠(Robert M. Gates)는 중앙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북(조선)에 침투시킬 아시아계 공작원들 가운데서 미국인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탄식하였다. (Foreign Policy, 2007년 9/10월 호)
이처럼 중앙정보국이 아시아와 중동에서 벌이는 비밀공작에 공작원을 대주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아주 예외적인 지역이 있다. 중앙정보국이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해외비밀공작의 '천국'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남(한국)이다. 남(한국)은 중앙정보국이 비밀공작을 마음놓고 벌이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이다.
2007년 대선과 관련하여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 두 사람이 전한 말을 보도한 남(한국) 일간지는, "국무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유력후보들의 미국관, 북한관, 안보관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입장 등 정견과 성향을 분석하는 일을 진행해왔다. 주한미대사관 관계자들과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한국의 언론과 학자 등과 빈번히 접촉하면서 정보를 얻고 있고, 지역민심을 살피기 위해 직접 지방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CIA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요원을 보강했다는 소문도 있다"고 적었다. (중앙일보 2007년 11월 13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의 비밀공작은 언론에 전혀 드러나지 않으므로 세상에 알려진 바 없으나, 중앙정보국 공작원이었던 이용수가 1996년에 펴낸 책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에서 그 비밀공작의 분위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고, 미국으로 건너와 제럴드 리라는 미국이름을 가진 시민권자가 된 그는 중앙정보국에 20여 년 동안 몸을 담았던 공작원 출신이다. 그의 책을 보도한 '내일신문' 2006년 11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청와대 수석보좌관, 장관, 장성, 국회의원, 대기업 최고경영자에 이르기까지 남(한국)의 '지도층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중앙정보국의 현지협조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공작원들과 만나는 것을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청와대의 대통령 책상에 올라가는 비공개보고서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공작원에게 통째로 갖다 바치면서 자기의 정보가치를 입증하려는 충격적인 사례도 있다는 것이다.
남(한국)에서 비밀공작을 벌이는 미국의 국가정보기관은 국무부와 직통하는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 '지역조사과(ORS)'라는 위장간판을 내건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그리고 국방부 산하의 국방정보국(DIA) 한국지부이다. 법무부 산하의 연방수사국(FBI)도 남(한국)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사법기관의 배후에서 움직이지만, 지부를 두지는 않았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자리잡고 있고, 국방정보국 한국지부는 용산 미국군기지에 자리잡고 있다. 세 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은 금요일마다 용산의 미국군기지 영내에서 연석회의를 갖는다. (신동아 2001년 9월 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는 평시에 46명의 인원이 배치되는데, 대선국면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인원이 보강된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에는 정치참사 한 명, 1등 서기관 세 명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밑에 실무진을 두고 있다.
주한미국대사, 부대사, 정치참사는 서울 정동에 있는 대사관저로 남(한국)의 각계인사들을 불러들여 오찬이나 만찬을 베풀거나, 서울 시내에 있는 호텔식당에서 만나거나, 주말에 용산 미국군기지 영내에 있는 골프장에 불러들여 골프모임을 갖는다. 주한미국대사 벌쉬바우(Alexander Vershbow)는 2007년 대선후보들 가운데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만 빼놓고 주요한 대선후보들을 직접 만났다. 그는 접촉대상자와 면담을 마치고 대화보고(Memorandum of Conversation)를 작성하여 워싱턴의 상부기관에 보고하곤 한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2007년 11월 2일 벌쉬바우는 민주당 대선후보 이인제를 대사관저에 불러 오찬을 베풀면서 "미국 대선과 달리 한국 대선은 콤팩트하게 진행돼 매우 흥미롭다"는 말을 던졌다. 벌쉬바우는 그 자리에서 남(한국)의 대선이 흥미롭다는 말을 두 차례나 하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신중하게" 남(한국)의 대선을 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7년 11월 2일) 지난 시기의 대선공작보다 더 맹렬하게 대선공작을 벌이고 있음을 암시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남(한국) 언론은 "미국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태도로 정보수집에 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보도하였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주한미국대사는 남(한국)의 정계, 관계, 재계, 군부,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지도급 인사'들을 감시하는 이른바 '잠재적 지도자 신상정보보고공작(PLBRP, 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Program)'을 벌이는데, 1년에 네 차례씩 수정, 보완하여 국무부에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이흥환 편저,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151쪽) 비밀해제된 1970년대의 잠재적 지도자 신상정보보고자료 중 극히 일부내용이 남(한국) 언론(신동아 2000년 1월 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 서기관을 직접 대담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의미 깊게 지켜보고" 있으며, 민주노총의 시위현장에 자주 나가 보거나 노동문제의 현안을 살펴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월간 말, 2004년 6월 16일) 해마다 하와이에서는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국군사령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연례행사가 벌어지는데, 그 행사에 불려 가는 사람들은 남(한국)의 언론인들이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그리고 국방정보국 한국지부가 언론공작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섯 해마다 남(한국)에 '대선바람'이 불면 대선후보들 만큼 분주한 미국인 세 사람이 있는데, 주한미국대사,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국방정보국 한국지부장이 그들이다. 그들은 남(한국)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면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명백하게 대선개입 비밀공작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유럽연합이나 일본 같은 하위동맹국들에서 실시되는 대통령선거나 총리(수상)선거에 개입하는 노골적인 비밀공작을 벌이지 못한다. 만일 선거개입공작이 드러날 경우 하위동맹국의 반미감정을 자극하여 동맹관계가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국)의 대선에는 마음대로 개입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한국)에는 미국 공작원을 간첩죄로 처벌할 형법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국정원, 경찰, 검찰 상층부에도 저들의 공작망이 침투해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러한 변태적 현실은 제국주의반동정권의 지배를 받는 신식민주의체제에서 생겨난 것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남(한국)의 2007년 대선에 개입하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물증은, 2006년 8월 29일자로 작성된 '디(D)-47 정국동향'이라는 제목의 정보문서이다. 2007년 3월 30일 방송위원회 비공개회의에 출석한 신현덕은 그 문서를 보고 백성학이 미국 스파이라는 의혹을 느끼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신동아 2007년 5월 호) 2007년 1월 12일 남(한국) 검찰이 배영준이 경영하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한국지부 사무실을 수색하여 압수한 문서들 가운데는 '디(D)-47 정국동향'의 영어번역본이 있다.
백성학은 자기의 대화가 담긴 육성녹음 녹취록에서 "나 지금 자료가 한 댓 군데서 수집이 돼. 이걸 최종정리를 하는 게....영어번역하는 거는 우리 저 15층(배영준의 유에스아시아 한국지부 사무실을 뜻함-옮긴이)에서 다 정리를 해 가지고...(줄임) 배 사장이 두 군데 받는데 있고 내가 세 군데 받는 데...해 가지고 분석을 해. 우리가 일단 리스크린(rescreen, 검토라는 뜻-옮긴이)을 해서 정리가 돼서 올라간다고. (줄임) 상당히 지금 반응이 크지"라고 말하였다. (기독교방송 특별취재반 2007년 3월 26일)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롤리스의 현지협조자들이 정보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국방정보국 한국지부에 넘기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정보문서는 '차기 정권 창출 관련'이라는 소제목 아래 '여권 대선후보 무력화'와 '야권 대선후보 약점 확보'에 관한 정보가 있다. 그 문서는 "2007년 대선에서 중도성향의 변화와 개혁,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가장 본선경쟁력이 있다"고 지적하고, 당시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나선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세 사람 가운데서 이명박이 "중도세력의 표를 결집시킬 인물로 가장 적합하다. 반노 반좌파 구국연합 성격의 정치운동조직 탄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Ohmynews, 2007년 7월 24일) 롤리스의 현지협조자들이 2007년 남(한국) 대선에서 수구반동세력의 승리를 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롤리스의 현지협조자들이 위의 정보문서를 작성한 때로부터 한 해가 지난 뒤에 대선국면은 매우 달라졌다. 주목하는 것은, 그 문서를 받아보는 상부에서 일어난 내부변화이다. 럼스펠드는 2006년 11월 8일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롤리스는 2007년 7월 6일 부차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체니는 부통령 자리를 지키긴 하였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이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데 요즈음은 심장병이 도지는 바람에 병원을 들락날락한다. 이처럼 딕 체니(부통령)-도널드 럼스펠드(장관)-로월 재커비(국방정보국장)-리처드 롤리스(부차관)로 이어지는 국방부 공작체계가 교체되는 기회를 틈타서 콘돌리자 라이스(장관)-크리스토퍼 힐(차관보)-토머스 핑거(정보조사국장)-알렉산더 벌쉬바우(주한미국대사)로 이어지는 국무부 공작체계가 한(조선)반도 정책의 집행권을 틀어쥐었다.
2007년 대선에서 국방부 공작체계는 수구반동정당이 내세운 대선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와 달리 국무부 공작체계는 중도개혁정당이 내세운 대선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양측은 자기들끼리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두 공작체계는 진보정당이 내세운 대선후보의 지지율 상승을 저지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갈래의 공작체계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였으므로, 2007년의 대선국면에서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돌발변수들이 튀어나와 판세를 바꾸는 현상들이 속출하였다. 물론 수구반동정당의 대선후보와 중도개혁정당의 대선후보 가운데서 차기 대통령을 선택하는 2007년 대선구도의 최종결정은 부쉬가 주재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양측의 논란 끝에 내려졌을 것이다. (2007년 12월 8일 작성)
대선판에 드리운 北·美의 그림자
주간한국|기사입력 2007-12-11 12:36
방남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대선주자들과 물밑 접촉설
차기정부 대북지원을 확약받기 위한 포석인 듯… 미국도 정권교체 대비 서울·평양서 분주한 행보
지난달 29일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갑작스럽게’ 남한을 방문하는 날 베이징의 정통한 북한 소식통은 국내 관계자들에게 ‘생뚱맞은’ 연락을 해왔다.
“김양건 부장이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해보라”는 것. 특히 대선주자, 그 중에서도 이명박 후보 쪽을 주시하라는 귀띔까지 했다.
김 부장이 방남한 시점은 여야 대선주자들이 후보등록을 마친 직후이고 대선의 마지막 뇌관이라는 BBK 사건을 놓고 후보 간 대립이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김 부장의 방남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정상회담과 총리회담을 통해 남북한이 합의한 경협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고, 김 부장 역시 “남북간 경제협력이 한반도 평화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며 ‘경협’에 방점을 두었다. 김 부장의 방남에 ‘정치적 배경’은 전혀 없다는 풀이였다.
그러나 남북관계에 정통한 복수의 전문가들은 “김 부장이 경협 문제로 방남했다는 해석은 남북간에 총리급ㆍ장관급 회담, 실무회담이 계속 이어진 데 비춰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2000년 9월 김용순 통일전선부장의 방문 때는 7개항의 합의서가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합의서 발표가 없는 점도 그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김 부장이 2박3일 남한에 머문 동안의 동선은 그가 일정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간 뒤 국내외 정보통들을 통해 윤곽이 어렴풋이 전해졌다. 우선 김 부장은 이명박 후보를 비롯해 다른 후보와도 접촉했다는 전언이다.
그 자리에는 청와대 최고위 인사와 미국측 고위 관계자가 동석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 부장과 동행한 북측 인사가 이명박 후보쪽 사람을 따로 만났다는 소식도 덧붙여졌다.
■ 힐 차관보 '부시 친서' 들고 평양으로
김 부장은 남북 당사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에도 지난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은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대선후보 모두 그에 동의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전언이다.
김 부장 일행이 1일 북한으로 돌아간 뒤 남-북-미 간에 묘한 동선이 이어졌다. 같은 날 3일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평양으로, 백종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워싱턴으로 각각 떠났다. 힐 차관보는 “핵시설 불능화를 점검하고 핵 프로그램 신고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했고, 백 실장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식통들은 그와는 다른 해석을 전했다. 백 실장의 워싱턴행은 유력 대선주자의 확고한 ‘약속’을 미국에 전하고 미국으로부터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케 한 대북지원 프로젝트, 즉 ‘한반도 마셜플랜’‘의 이행을 뒷받침 받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힐의 방북은 차기정부의 대북지원 약속을 분명히 전달하고, 북으로부터는 핵프로그램의 이행을 담보 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힐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낸 것은 미국이 그만큼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어서 남한의 대선결과와 상관없이 남북관계는 획기적인 변화가 전망된다.
■ 김영남 상임위원장 서울 방문 유력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내년 1월 서울 방문설은 그러한 남북관계 변화에 마침표적 성격을 띤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내년 1~2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할 계획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선을 그었지만 북한 소식통들은 김 상임위원장이 내년 초 방남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편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남북경협, 대북지원 합의를 확실하게 이행 받으려면 대선 이후 대통령당선자와 결국 공조를 해야 하면 그럴 시기는 내년 1~2월 뿐이라는 계산에서다.
김 국정원장이 “북측에서 만나자고 제의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새 정부에 북한을 연결시켜주는 일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한 것은 북측의 방남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대선을 앞두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그림자로 불리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남한을 방문하고 대선주자들과의 면담설 등에 미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그러한 ‘힘’의 배경을 놓고 해석이 구구하다.
부시 정부의 한반도에서의 1차 관심사는 북핵이고, 북한이 미국의 핵프로그램을 순수히 받아들인 직접적인 배경은 ‘경제지원’이다. 미국은 북한의 자금줄인 마카오 BDA에 대한 압박을 풀면서 경제 제재를 완화하고, 남한은 노무현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 마셜플랜으로 불리는 대북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김양건 통전부장의 방남은 한반도 마셜플랜의 이행 가능성과 이것을 뒷받침할 ?玲阪??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북측에 ‘재원’의 안전성을 확인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차기 주자들에게도 재원의 이행에 대한 약속을 받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실력자가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명박 후보와 접촉했다는 소문의 배경에는 미국의 역할론도 제기된다. 미국이 이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북측 관계자를 연결했다는 추정이다. 일부에선 북한이 미국의 북핵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미국은 이 후보에게 대북지원 약속을 확약 받았다는 애기도 들린다.
북미 관계가 순항 중이고 차기 정부의 대북 지원이 절실한 지금의 복합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과거 대선판을 뒤흔들던 북풍 같은 것은 이번 대선에서는 물러나 있을 듯하다. 내년 초에야 북한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방남 가능성과 함께 과거와는 다른 각도에서 북풍이 거세게 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대선 지형에서 북풍은 미풍(美風, 미국 영향력))에 가려 맥을 못 추는 형국이다. 북미 관계가 어긋나 광풍으로 돌변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동력을 갖출 시간이 부족하고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의 방남이 말해주듯 북한은 대선 후의 훈훈한 남풍(南風)을 기대하고 있다. 대선판을 휘돌고 있는 미풍의 위력을 통제하고 북풍을 맞을 차기주자는 1주일 후에 가려진다.
■ BBK카드, 아직도 미국이 쥐고 있나
이번 대선의 최대 변수였던 BBK사건의 뇌관이 사실상 제거되면서 이명박 대세론이 탄력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의 5~6일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40.7%로 정동영ㆍ이회창 후보와 20%포인트 이상의 지지율 격차를 보였다. 앞으로 남은 대선 1주일 동안 이변이 없는 한 이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다. BBK사건 수사 종결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 셈이다.
그렇다고 BBK사건의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BBK 사건의 실질적인 뇌관을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다는 얘기도 현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김경준 BBK 전 대표를 조기에 한국에 송환한 것이나 김씨의 누나 에리카 김의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이 갑자기 취소된 배후에 미국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김경준씨와 에리카 김 모두 미국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미국에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3월 BBK사건에 대한 미국 내 재판과는 별개로 연방수사국(FBI)을 통해 김경준씨를 극비리에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국내 검찰이 밝힌 것과 다른 이명박 후보의 아킬레스건을 확보했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BBK 자금과 관련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얘기도 나돌았다.
김경준 씨를 조기에 송환한 것은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 후보를 컨트롤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즉 대권에 근접한 이 후보에게 슬쩍 위협적인 카드를 보여주어 대선 후 한미, 남ㆍ북ㆍ미 관계에서 유효한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 부장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미국이 이 후보 측과의 연결을 주선하고 BBK 카드를 앞세워 집권 후 대북지원 등 관계 설정의 가이드라인을 선보였다는 소문도 있다.
반면, 미국이 BBK 사건과 관련해 별개의 카드를 확보하고 있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는 반론도 있다. 설령 그런 카드가 있더라도 이 후보가 집권할 경우엔 별 효력이 없다는 추론이 상당하다. 더구나 BBK 문제가 한미 관계 자체를 흔들 만큼 파괴력이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
신식민주의체제의 대선, 대미굴종과 비밀공작은 계속된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차례>
1.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대통령당선자
2. 그가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3.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
4. 고위관리로 변신한 공작원과 그의 협조자들
5. 대선국면에 파고든 비밀공작
1.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대통령당선자
2003년 1월 15일 검은색 고급승용차 한 대가 서울 용산에 있는 미국군기지 영내로 들어갔다. 그 승용차 뒷좌석에는 제16대 대통령당선자 노무현이 앉아있었다. 그는 1월 13일 서울 세종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 별관 6층에 자리잡은 대통령당선자 집무실에서 미국정부특사로 서울에 들어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당시) 제임스 켈리(James A. Kelly)를 만난 지 이틀 뒤에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부쉬가 차관(undersecretary)보다 급이 낮은 차관보(assistant undersecretary)를 특사로 지명하여 대통령당선자에게 보냈다는 점이다. 국무부차관보가 평양에 갈 때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북(조선)의 외무성부상이므로, 부쉬정부는 남(한국)의 대통령당선자를 차관급 정도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난다. 노무현이 자기의 집무실을 찾아온 켈리와 마주앉아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만남은 이틀 뒤에 있었던 노무현의 주한미국군사령부 방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2007년 11월 11일 한국정책방송(KTV)이 방영한 대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4년 전에 당선자 신분으로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갔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주한미군사령부에 가서 서로 악수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줄임) 대한민국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으로 주둔군사령부에 먼저 방문해 가지고 악수하고 사진 찍어야 되는 것이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줄임) 좀 서글프긴 하지마는 그렇게 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당시 우리 한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위의 회고담에서 그는 4년 전에 자신이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것이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서글픈 경험이었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자신은 그처럼 비정상적인 행동을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남(한국)과 마찬가지로, 터키도 미국과 방위 및 경제협력협정(U.S.-Turkey Defense and Economic Cooperation Agreement)을 맺고 그에 따라 미국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터키의 대통령당선자가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가는 비정상적인 행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과 하위동맹관계를 맺은 터키의 현실과는 완연히 다르게, 남(한국)의 지배계급이 기생하는 이른바 '한미동맹체제'라는 것은 제국주의세계체제의 반동적인 지배와 신식민주의체제의 굴욕적인 예속이 뒤엉켜 고착된 현실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회고담에서 자신이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갔었다고 말하면서도 사령부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났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가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갔을 때 그를 상대한 사람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아니었는데, 차마 그 사실마저 언론에 드러내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육군대장 리언 라포트(Leon J. LaPorte)는 2003년 1월 6일부터 17일까지 워싱턴의 국방부 본부에 들른 뒤에 괌과 오키나와에 있는 미국군기지를 차례로 방문하는 중이었다.
대통령당선자가 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것도 있을 수 없는 굴종행위이었거니와, 미국군사령관이 해외출장 중에 있음을 알면서도 사령부를 찾아간 것은 신식민주의적 대미굴종의 극치였다.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치욕적인 노무현의 굴종행위는, 1961년 11월 11일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틀어쥔 때로부터 여섯 달 뒤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도쿄를 찾아간 박정희가 보여주었던 치욕적인 굴종행위를 빼다 박은 닮은꼴이다.
그날 저녁 일본수상의 관저에서는 박정희를 환영하는 만찬이 있었다. 환영축배를 들자마자 박정희는 술병을 들고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맨 끝에 앉은 일본노인에게 걸어가더니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유창한 일본말로 정중하게 인사하고 술잔을 올렸다. 박정희가 도쿄로 떠나기 전에 일본정부당국에 미리 연락해서 환영만찬에 모셔달라고 요청했던 그 노인은, 박정희가 1942년 3월 22일에 졸업한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교장으로 있었던 나구모 신이찌로(南雲親一郞)이다. '만주제국'의 수도 신경에서 군관학교 교장을 지내던 시절에 '선계생도(鮮系生徒)' 박정희를 "천황폐하께 바치는 충성심에서 보통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답다"고 칭찬하였던 일본육군 중장 나구모, 그리고 그 학교 제2회 졸업식에서 '만주제국'의 허수아비 황제 부의(溥儀)가 하사한 금시계를 받고 졸업생을 대표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 바쳐 벚꽃처럼 멋진 최후를 맞겠노라"고 선서하였던 오까모도 미노루(高木正雄, 박정희의 일본이름)가 19년만에 도쿄의 수상관저에서 재회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묘한 표정을 짓던 일본수상 이께다 하야또(池田勇人)는 "사은(스승의 은혜라는 뜻-옮긴이)을 아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입니다. 박정희 선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미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노무현은 대통령선거운동기간에 자기는 "별 볼 일없이 사진이나 찍으러 미국에 가진 않겠다"며 "반미면 어떠냐"고 큰 소리를 친 적이 있으나,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사령관이 자리를 비운 주한미국군사령부에 들어가서 굴욕의 사진을 찍는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과 박정희가 약 40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이 취했던 신식민주의적 굴종행위는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자존심을 내버린 정치인의 치욕적 경험이 아니라, 남(한국)의 신식민주의체제가 제국주의지배력 밑에서 짓밟히는 능멸의 현장이었다. 신식민주의체제는 남(한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지배계급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얽어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올가미 같은 것이다.
워싱턴의 국무부와 국방부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대통령취임식을 2002년 2월 25일에 거행하고 청와대에 들어간 때를 전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로 그를 얽어매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2003년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담당 차관보 칼 포드(Carl Ford)가 서울에 비공개로 파견되어 대통령당선자의 핵심인사들을 만났으며, 2003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나중에 부차관으로 승진) 리처드 롤리스(Richard P. Lawless Jr.)가 서울에 나타났다. 포드와 롤리스의 서울방문은 새로 등장한 노무현정부를 올가미로 얽어매기 위한 것이었다.
2007년 12월 19일에 당선될 대통령당선자도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신식민주의체제의 올가미에 얽어 매여 대미굴종의 길로 향할 것이다.
2. 그가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주목하는 것은,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대통령당선자 노무현에게 굴욕적인 행동을 요구한 까닭, 그리고 대통령당선자가 그 요구에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 까닭을 밝히려면, 우선 아래와 같은 배경설명이 요구된다.
노무현이 자신의 지지율을 앞서 가던 이회창을 대선 막판에 따돌리고 극적으로 당선되었던 2002년 말부터 2003년 초에 이르는 시기의 남(한국) 내외정세는 너무도 복잡하였다.
1-1) 제국주의반동세력 가운데서도 악명 높은 이른바 '신보수주의세력(네오컨)'에게 등을 떠밀려 간신히 대권을 거머쥔 부쉬는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앉자마자 이라크 침략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포진한 제국주의전쟁광들은 병력 22만5천명, 군용기 700대, 항공모함 전투단 5개로 구성된 방대한 무력을 이라크전선에 내몰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전쟁광들이 대규모 선제공습을 명령하여 이른바 '이라크자유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라는 무력침략을 도발한 때는 2003년 3월 20일 새벽 5시 30분이었다. 이라크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제국주의점령군이 '안정화작전'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파괴와 살육을 저지르는 중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이라크침략전쟁을 도발한 것도 모자라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미 정치회담마저 중단하는 실로 엄중한 사태를 일으켰다. 조미 정치회담의 중단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경비정 684호와 한국해군 고속정 357호가 교전을 벌여 고속정 357호가 격침되고 정장을 비롯한 6명이 목숨을 잃고 18명이 부상을 당한 해상무력충돌사건으로 이미 정치군사적 긴장이 조성되어 있었던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이 한(조선)반도의 정세를 전면대결구도로 몰아간 위험천만한 시나리오는, 경기도 오산의 미국 공군기지를 떠난 특별군용기 한 대가 서해직항로를 타고 평양 순안 비행기장에 내린 2002년 10월 3일, 그러니까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두 달 반전에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그날 특별군용기를 타고 평양에 내린 미국측 협상대표 제임스 켈리는 부쉬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으로 진행된 조미 정치회담에서 느닷없이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걸고들었다.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걸고든 것은 켈리의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검토하고 승인한 치밀한 사전각본에 따른 도발공세였다. 2003년 2월 12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나간 국방정보국장 로월 재커비(Lowell E. Jacoby)는 "북(조선)이 공개적으로 핵무기 추가확보에 나선 것은 30년이래 미국의 지역이익에 반하는 가장 심각한 도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켈리의 평양방문으로부터 두 달 뒤인 2002년 12월 10일, 남(한국)에서 대선이 실시되기 불과 아흐레 전에,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은 하위동맹국인 스페인의 해군에게 연락하여 아라바아해를 항해하던 북(조선) 화물선 서산호를 공해에서 불법적으로 수색, 억류하였다가 이틀 뒤에 풀어주는 전무후무한 해상도발을 자행하였다.
1994년에 체결된 뒤로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조미 정치회담의 기조를 유지시켜주었던 조미기본합의는 제국주의전쟁광들의 파기음모와 해상도발에 의해서 휴지조각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전쟁중독증에 걸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연속적으로 취한 협정파기와 도발공세로 한(조선)반도의 정세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2003년 1월 10일 북(조선)은 정부성명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마침내 워싱턴의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초강경한 반격공세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북(조선)은 2003년 2월 14일 동해에서 최신형 순항미사일을 발사하는 훈련을 실시하였고, 2003년 2월 17일 북(조선)의 외무성 관리는 평양을 찾아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특파원에게 북(조선)이 정전협정을 준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협정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무력도발에 무력보복으로 응전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극우논객 니컬러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는 언론을 통해 미국이 북(조선)의 영변 핵시설을 외과수술식 정밀타격으로 파괴하고, 견고한 지하시설들을 전술핵무기로 파괴하는 전술을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New York Times, 2003년 2월 28일)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한(조선)반도 정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조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 전쟁공포를 느끼는 것 이외에는 속수무책으로 앉아있어야 하였던 노무현은, 사령관마저 자리를 비운 미국군사령부에 찾아가서 제국주의전쟁광들에게 신식민주의체제의 평화와 안정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1-2) 2002년 6월 13일 주한미국군 장갑차가 굉음을 내지르며 국도 53호선을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뒤, 그 장갑차는 또래의 생일모임에 가려고 발길을 재촉하던 10대 소녀 심미순, 신현순 양을 등뒤에서 덮쳤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도 참혹하고 원통하였으나, 2002년 11월 22일 주한미국군 군사법원 배심원단은 두 여중생을 죽인 미국군 병사 두 명에게 무죄평결을 내리고 그들을 미국으로 빼돌렸다. 남(한국)의 대중은 주한미국군사령부의 만행에 격분하였다. 부쉬에게 미국군 범인을 남(한국)의 사법기관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면서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외치는 광화문 촛불시위가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촛불을 든 시위대오는 날이 갈수록 불어나더니, 2002년 12월 6일 광화문 일대에 모여든 3만 명의 시위대는 98개 중대 1만2천명의 경찰병력이 막아선 저지선을 뚫고 마침내 주한미국대사관 정문 앞까지 밀고 나갔다.
2003년 2월 9일 미국 씨비에스(CBS) 텔레비전 방송프로그램 '60분(60 Minutes)'이 '미국놈 돌아가라(Yankee Go Home)'는 제목으로 방영한 현장기록영상물은 분노한 시위군중이 서울시청 앞에서 미국기를 불태우는 장면을 보여주었고, 반미주의 무풍지대라고 믿었던 남(한국)에서 반미감정이 폭발하여 심리적 충격을 받은 주한미국군사령관 리언 라포트의 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충격적인 상황에 대해서 훗날 롤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2002년 한국 대통령선거를 앞둔 6개월, 즉 2002년 7월부터 12월까지였다. 그 기간에 한미동맹은 정치적으로 공격되고 이용됐다. 6월 13일 58번 국도에서 발생한 두 소녀의 비극적 죽음 이후 미국은 그 사건이 미칠 파장을 줄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김대중정부는 동맹을 지키기 위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나선 이회창마저도 광화문 촛불시위현장에 고개를 내밀 만큼 분노한 대중의 반미감정이 들끓고 있었으니, 대선후보로 뛰어다니던 노무현이 그 분위기에 재빨리 올라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선후보 노무현이 한미관계의 평등한 개선을 희망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2002년 9월 12일 대선후보 노무현은 아시아-유럽 프레스포럼에서 연설하면서, "전환기 시대의 한미관계는 성숙한 동반자 관계, 수평적 동맹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0월 7일 남(한국)의 언론과 대담하는 자리에서도 "한미동맹관계는 우리의 민주화와 정치, 경제발전에 걸맞게 수평적이고 상호협력적인 관계로 발전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한미관계의 수평적 관계개선을 말하고 다니는 노무현을 길들일 필요를 느꼈다.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신식민주의정권을 정치적으로 길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통령선거가 끝나자마자 당선자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대통령당선자가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제국주의반동정권에 굴복한 노무현은 워싱턴을 향해서 굴종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2003년 2월 20일 대통령 취임식 직전, 워싱턴에서 손꼽히는 수구반동성향의 연구기관인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이 서울에서 개최한 토론회에 모습을 드러낸 노무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이 주한미군 주둔을 원치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일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우리 국민은 한국전쟁 당시 피로써 나라를 지켜준 미국에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최근의 주한미군지위협정 개정요구도 주한미군의 주둔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집권의 시작이 그러했으므로, 노무현정부의 집권기간 다섯 해는 이 글에서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되풀이된 신식민주의적 대미굴종의 연속이었다.
3.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
경인티뷔(TV) 대표이사(당시) 신현덕이 기독교방송(CBS) 사장 이정식에게 폭로하고, 2006년 10월 31일 방송위원회에 대한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의 국정감사에 출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미국간첩의혹사건은 남(한국)에서 미국 국가정보기관의 비밀공작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엿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그 사건을 보도한 남(한국)의 언론은 이렇게 적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찍이 남한에서 통용되지 않았던 '미국간첩'이란 말이 등장한 것이다. 해방 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미제간첩'으로 숙청된 적은 있었지만, 북한에서의 일이다. 분단된 남한에서 간첩은 북한간첩밖에 없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동맹 이상이었기에, 미국을 위한 우리나라의 정보제공은 간첩행위로 인식되지 않아 왔던 한반도의 모순을 이번 사건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21 제636호, 2006년 11월 23일)
미국간첩의혹사건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건의 중심인물은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던 2006년 10월 당시 미국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부차관이었던 리처드 롤리스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미국간첩의혹사건에 연관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신동아 2007년 8월 호), 그 동안 언론보도를 통해서 드러난 일련의 사실들은 그의 주장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작원은 중앙정보국을 떠나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뒤에도, 공작원 활동경력을 밝히지 않는 규율을 지킨다. 중앙정보국 공작원으로 암약하였던 롤리스도 예외가 아니어서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임명된 뒤에도 이전의 공작원 활동경력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국과 남(한국)의 몇몇 언론들이 간략하게 보도한 내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밑그림이 드러난다.
롤리스가 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때는 1972년이다. 그가 1946년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에 중앙정보국 공작원이 된 것이다. 중앙정보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그는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남(한국)에 들어가, 전라도에서 약 2년 동안 활동하였다. 그때 배우기 시작한 한국(조선)말이 10년 뒤에 그가 남(한국)에서 비밀공작을 벌일 때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게 된다. 1972년에 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롤리스는 곧바로 주한미국대사관 상무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비밀공작원으로 배치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직후인 1973년 3월부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정부기관의 감시를 피해 핵무기개발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계획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서 비밀공작활동을 벌인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공작원 롤리스의 손에서 파탄되고 말았다. 롤리스가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계획에 관한 극비자료를 빼내어 중앙정보국 본부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자기들이 지배하는 신식민주의체제가 핵무장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핵무기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박정희를 짓눌렀고, 그 정권의 압력에 무릎을 꿇은 박정희는 프랑스에서 재처리시설을 사들이려던 계획을 1976년 1월 23일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핵무기개발계획에 관한 극비자료를 워싱턴 근교 랭리에 있는 중앙정보국 본부로 빼돌려 그 계획을 파탄시킨 롤리스는, '신동아' 2007년 11월 호의 관련기사가 지적한 것처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으로 인정받았다. 미국언론에 따르면, 2004년 11월 중앙정보국 비밀공작담당 총책인 스티븐 캡스(Stephen R. Kappes)가 사임하였을 때, 롤리스는 그 후임 물망에 오른 후보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Washington Post, 2004년 11월 14일)
롤리스보다 조금 뒤늦게 1973년에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또 다른 비밀공작원은, 1951년에 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도널드 그렉(Donald Gregg)이다. 박정희가 재처리시설 수입사업을 중지하자, 롤리스는 일본으로, 그렉은 중남미로 각각 공작거점을 옮겼다.
주목하는 것은, 롤리스가 남(한국)에서 비밀공작을 벌이기 시작하였던 1972년에 현지협조자(field collaborator)를 얻었는데, 그가 미국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과에서 유학하고 남광토건에서 일하고 있었던 배영준이다. 배영준의 말에 따르면, 1972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서울에서 열었던 중장비전시회에서 롤리스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신동아'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대담기사에서 롤리스와 배영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1972년의 중장비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 '30년 지기의 깊은 인연'을 맺은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중앙정보국 비밀공작원과 현지인의 관계가 개인적 친분으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1972년에 신입공작원 롤리스는 미국에 유학하여 영어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현지협조자를 얻었던 것이다.
1975년에 남(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공작거점을 옮기기 전에 롤리스는 현지협조자 또 한 사람을 얻었는데, 그가 기독교방송의 폭로기사에서 '애덤스' 또는 '빅맨'이라는 공작명으로 나오는 백성학이다. 신현덕이 2006년 10월에 백성학과 대화한 것을 녹음한 녹취록에 따르면, 백성학은 자기가 배영준을 1970년대 중반에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기독교방송 특별취재반 2007년 3월 14일)
그때로부터 30여 년 뒤 신현덕이 미국간첩의혹사건을 폭로하자 배영준과 백성학은 자기들과 롤리스의 관계를 사업관계 또는 친분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혐의를 부인하였는데, 미국과 남(한국)의 언론보도에서 드러난 일련의 사실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부인발언이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울남부지검은 백성학을 수사하는 시늉만 하다가 2007년 4월 30일 그에게 혐의가 없다는 처분을 내렸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보자가 2007년 5월초에 '신동아'에 검찰수사기록 일부를 넘겨주면서 "검찰은 백 회장의 스파이 혐의에 대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 회장은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동아 2007년 6월 호) 남(한국) 검찰이 그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려면 우선 롤리스부터 소환하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와 국방정보국 한국지부를 조사해야 하는데, 그러한 소환과 조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1975년부터 여섯 해 동안 일본에서 암약한 롤리스는 1981년에 남(한국)에 재배치되어 1987년까지 비밀공작을 벌였다. 롤리스가 남(한국)에서 두 번째로 공작활동을 벌인 1980년대의 한(조선)반도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는데, 그러한 시기에 중앙정보국은 유능한 공작원을 공작현지에 침투시킬 요구를 느꼈을 것이고, 롤리스가 그 요구를 충족하는 공작원이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레이건정부 안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던 중앙정보국장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략정보국(OSS)에서부터 해외비밀공작경력을 쌓은 노회한 공작전문가 윌리엄 케이시(William J. Casey)였다. 케이시는 비밀공작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배출한 전설적인 공작원 롤리스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비밀공작에 배치하였다. 케이시의 비밀공작에 차출된 공작원들은 롤리스의 이름을 본떠서 '롤리스 그룹'으로 불렸다. (Sidney Blumenthal, 2007년 11월 1일)
케이시가 한(조선)반도에서 벌인 비밀공작은 윌리엄 자일커(William Zylka)와 이어리 콕(Erie Cocke)을 비밀특사로 여러 차례 북(조선)에 파견한 것이다. (U.S. News & World Report, 1999년 8월 9일) 북(조선)은 케이시의 비밀공작을 역이용하여 레이건정부에게 조미상호교류와 남북(북남)미 3자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였는데, 자신이 개입한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지면서 궁지에 몰린 케이시가 1987년에 뇌암으로 죽는 바람에 그 공작은 중단되었다.
4. 고위관리로 변신한 공작원과 그의 협조자들
케이시가 죽은 1987년에 롤리스는 중앙정보국의 상관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5년 동안 몸담았던 중앙정보국을 떠났다. 비밀공작원에서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주식회사(USAsia Commercial Development Corp.)를 세우고 대표이사가 되었다.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은 남(한국)과 대만에 들어가는 미국계 자본의 투자활동을 조절해주는 투자자문회사이다. 내가 쓰는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그 회사는 신식민주의시장경제를 장악, 지배하기 위하여 침투하는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척후병이다. 롤리스는 중앙정보국 공작원으로 암약하던 시기에 연계된 인맥을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에 끌어들였다. (신동아 2007년 1월 호)
2006년 9월 9일 배영준이 신현덕에게 한(조선)반도 정세동향을 해설해준 장소는 서울 중구 소공동 70번지 삼구빌딩 15층에 있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한국지사 사무실이며, 같은 건물 10층에는 백성학의 집무실이 있다.
대만언론에 따르면, 롤리스는 중앙정보국에서 나온 뒤에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을 세우면서 플로리다 주정부 상무장관을 접촉했는데, 그가 바로 미국 대통령 부쉬의 친동생이며 당시 플로리다 주지사였던 젭 부쉬(Jeb Bush)이다. 롤리스와 젭 부쉬는 오랜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Taipei Times, 2002년 8월 5일) 롤리스가 중앙정보국 출신으로 국무부 부장관이 된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의 도움을 받아서 따낸 14억 달러 규모의 대형사업은, 미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해저통신망 설치사업이다.
롤리스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을 세운 이듬해인 1988년에 젭 부쉬의 서울방문을 주선하였다. 서울에 들어간 젭 부쉬는 백성학을 만났고, 그 만남을 계기로 하여 백성학이 경영하는 모자생산기업 '영안모자'는 플로리다에 해외지사를 내올 수 있었다.
부쉬가문과 백성학의 관계는 젭 부쉬와 백성학이 서울에서 만나기 이태 전인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백성학은 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에 자신이 어린 나이에 주한미국군 부대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었던 6.25 전쟁시기 어느 날 포탄파편에 중상을 입었을 때 빌리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군 병사가 자신을 헬기에 싣고 미국군 야전병원으로 실어가서 목숨을 살려냈다는 회고담을 실었다. 그 회고담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는 6.25전쟁 시기 백성학과 함께 미국군 부대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였던 김병기가 있었다. 김병기는 오래 전에 미국군 장교의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서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 부쉬가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부쉬의 운전기사 겸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학은 김병기를 통해서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쉬를 만날 수 있었다.
부쉬가문과 백성학의 특별한 관계는, 두 차례 있었던 부쉬의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백성학이 초청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취임식에 참석한 남(한국)의 정계, 재계인사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상석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2006년 11월 1일 남(한국)의 언론은 "워싱턴에서 그의 영향력은 한국정부 관계자 모두를 합친 것보다 크다고 봐도 된다"고 보도하였다.
외교통상부장관(당시) 반기문은 2006년에 유엔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그 선거를 좌우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환심을 사려고 선거막판에 백성학에게 긴급히 도움을 간청하였다. 2006년 10월 2일 반기문이 백성학에게 자신이 직접 두 차례, 그리고 자기 비서를 시켜서 두 차례나 전화연락을 하였는데도 백성학은 응답전화조차 주지 않다가, 퇴근길에 외교통상부장관 공관에 들러 30분 동안 만나주었다. (신동아 2007년 5월 호) 반기문의 간청을 들은 백성학은 워싱턴의 고위관리에게 연락하였고, 반기문은 유엔사무총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언론은 반기문의 유엔사무총장 선출이 "실적경쟁이라기보다는 뒷거래의 결과"였다고 비판하였다. (Newsweek, 2007년 3월 5일)
백성학의 육성녹음이 담긴 녹취록에서 그가 "미국이 1991년부터 우리 두 사람(백성학과 배영준을 뜻함-옮긴이)에게 중요한 일을 시켰다"고 말한 것을 보면, 롤리스는 중앙정보국에서 나와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주식회사를 경영하였던 1987년 이후에도 여전히 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국)의 언론은 그가 "최근까지도 개인적인 채널을 통해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취합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하였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롤리스는 1999년 어느날 배영준에게 부쉬가 대통령이 되어 자기를 부르면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한국지사를 맡아달라고 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부쉬는 백악관에 들어간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롤리스를 워싱턴으로 불렀고, 2002년 10월 롤리스는 국방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백악관이 전설적인 공작원 출신 롤리스에게 중앙정보국 요직이 아니라 국방부 요직을 주었던 까닭은, 주한미국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라는 간판을 내걸고 실제로는 제국주의군사전략을 한층 강화하는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용산 미국군기지 이전협상, 전시작전지휘권 이양협상, 주한미국군 병력감축, 한국군 이라크 파병 등 중요한 변화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결정사항을 집행할 유능한 인물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국방부 고위관리로 변신한 롤리스는 제국주의군사전략 강화사업을 지휘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당시 국방장관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는 워싱턴의 국방부 본부를 찾아간 남(한국) 국방부 고위관리들에게 "한국문제에 있어서는 롤리스가 사실상 책임자다. 이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나하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동아 2007년 1월 호) 럼스펠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다시피 한 롤리스는, 2003년 2월부터 청와대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으로 일하던 이종석이 자기가 지휘하는 제국주의군사전략 강화사업을 순순히 따르지 않자,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당시 청와대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압박하여 이종석을 청와대에서 퇴출시켰다. 전권을 휘두르는 그의 행동이 오죽 거칠었으면, 그를 가리켜 '이름처럼 강압적이고 난폭한 무법자(lawless)'라고 부르는 남(한국)의 고위관리들(신동아 2007년 1월 호)이 생겨나기까지 하였을까.
롤리스가 제국주의군사전략 강화사업을 지휘하는 것과 발맞춰 그의 현지협조자들도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남(한국)의 기독교방송이 2007년 3월 6일에 공개한 백성학의 육성녹음 녹취록에서, 백성학은 자기가 "배영준과 함께 다섯 개 라인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정리한 뒤에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보고한다"고 말하였다. 그 육성녹음에 "우리 디씨(DC)의 조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배영준과 백성학이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는 대상은 '디씨에 있는 조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미국에서는 워싱턴이라 부르지 않고 워싱턴 디씨(District of Columbia)의 줄임말인 디씨로 부르고 있으므로, 백성학은 자신과 배영준이 워싱턴에 있는 어떤 조직에 속해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2006년 10월 21일 베이징 방문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날아가던 전용기 안에서 미국 국무장관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직전에 중국정부특사로 평양을 찾아갔던 국무위원 탕자쉬안(唐家璇)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핵실험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듣지 않았고,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듣지 않았다는 발언을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백성학은 자기의 대화내용이 담긴 육성녹음 녹취록에서, "우리 조직에서 (라이스를) 야단쳤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웬만하면 떠들어대지 않는" 라이스가 그렇게 발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방송 특별취재반 2007년 3월 26일)
국무장관의 발언을 제어할 수 있는 워싱턴의 조직이란 국무부와 경쟁관계에 있는 국방부밖에 없으므로, 배영준과 백성학이 속해 있는 조직은 미국 국방부 산하의 국방정보국(DIA)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백성학은 정보문서를 자신이 직접 들고 용산의 미국군기지에 들어가서 상대에게 전달하는데, 전달된 정보문서는 곧 미국 부통령 체니(Dick Cheney)의 책상에 올라간다고 말하였다. 또한 남(한국) 검찰은 배영준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용산 미국군기지 헌병사령관에게 조회하였더니 그가 2001년, 2006년, 2007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용산 미국군기지 출입증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배영준은 검찰심문에서 용산 미국군기지에 들어가 미국군 소령 비(B)를 만난 적이 있다고 진술하였다. (신동아 2007년 6월 호) 배영준은 검찰심문에서 미국군 소령 비(B)가 롤리스의 보좌관이라고 지목하였지만, 용산 미국군기지를 거점으로 첩보활동을 벌이는 현역 군인은 국방정보국 공작원들밖에 없으므로 비(B)는 국방정보국 한국지부에 배치된 공작원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롤리스가 국방부 고위관리에 임명되면서 체니-럼스펠드-롤리스-국방정보국 한국지부-현지협조자들로 이어지는 공작체계가 가동하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국)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롤리스는 '코리아팀'을 가동하였던 것이다.
5. 대선국면에 파고든 비밀공작
미국의 국가정보기관들은 10만 명의 인원을 움직이고 440억 달러의 예산을 쓴다. (연합뉴스 2006년 4월 22일)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반테러공작과 해외비밀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는 공작국(Directorate of Operations)인데, 그 부서의 인원은 약 5천 명이며, 그 가운데 약 1천 명은 여러 나라들에 잠입하여 암약하는 비밀공작원들이다. (Washington Post, 2004년 11월 14일)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좌우하는 제국주의세계체제가 그처럼 방대한 공작망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반동정권의 해외비밀공작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작에는 자기의 악명을 무색하게 만드는 허점이 있다. 이를테면, 중앙정보국 국장 마이클 헤이든(Michael V. Hayden)은 아시아와 중동에 침투시킬 공작원이 얼마 되지 않아서 고민에 빠졌고, 현재 국방장관으로 있는 로버트 게이츠(Robert M. Gates)는 중앙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북(조선)에 침투시킬 아시아계 공작원들 가운데서 미국인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탄식하였다. (Foreign Policy, 2007년 9/10월 호)
이처럼 중앙정보국이 아시아와 중동에서 벌이는 비밀공작에 공작원을 대주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아주 예외적인 지역이 있다. 중앙정보국이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해외비밀공작의 '천국'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남(한국)이다. 남(한국)은 중앙정보국이 비밀공작을 마음놓고 벌이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이다.
2007년 대선과 관련하여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 두 사람이 전한 말을 보도한 남(한국) 일간지는, "국무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유력후보들의 미국관, 북한관, 안보관과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입장 등 정견과 성향을 분석하는 일을 진행해왔다. 주한미대사관 관계자들과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한국의 언론과 학자 등과 빈번히 접촉하면서 정보를 얻고 있고, 지역민심을 살피기 위해 직접 지방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CIA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요원을 보강했다는 소문도 있다"고 적었다. (중앙일보 2007년 11월 13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의 비밀공작은 언론에 전혀 드러나지 않으므로 세상에 알려진 바 없으나, 중앙정보국 공작원이었던 이용수가 1996년에 펴낸 책 'No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에서 그 비밀공작의 분위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고, 미국으로 건너와 제럴드 리라는 미국이름을 가진 시민권자가 된 그는 중앙정보국에 20여 년 동안 몸을 담았던 공작원 출신이다. 그의 책을 보도한 '내일신문' 2006년 11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청와대 수석보좌관, 장관, 장성, 국회의원, 대기업 최고경영자에 이르기까지 남(한국)의 '지도층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중앙정보국의 현지협조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공작원들과 만나는 것을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청와대의 대통령 책상에 올라가는 비공개보고서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공작원에게 통째로 갖다 바치면서 자기의 정보가치를 입증하려는 충격적인 사례도 있다는 것이다.
남(한국)에서 비밀공작을 벌이는 미국의 국가정보기관은 국무부와 직통하는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 '지역조사과(ORS)'라는 위장간판을 내건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그리고 국방부 산하의 국방정보국(DIA) 한국지부이다. 법무부 산하의 연방수사국(FBI)도 남(한국)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사법기관의 배후에서 움직이지만, 지부를 두지는 않았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자리잡고 있고, 국방정보국 한국지부는 용산 미국군기지에 자리잡고 있다. 세 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은 금요일마다 용산의 미국군기지 영내에서 연석회의를 갖는다. (신동아 2001년 9월 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는 평시에 46명의 인원이 배치되는데, 대선국면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인원이 보강된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에는 정치참사 한 명, 1등 서기관 세 명이 배치되어 있고, 그 밑에 실무진을 두고 있다.
주한미국대사, 부대사, 정치참사는 서울 정동에 있는 대사관저로 남(한국)의 각계인사들을 불러들여 오찬이나 만찬을 베풀거나, 서울 시내에 있는 호텔식당에서 만나거나, 주말에 용산 미국군기지 영내에 있는 골프장에 불러들여 골프모임을 갖는다. 주한미국대사 벌쉬바우(Alexander Vershbow)는 2007년 대선후보들 가운데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만 빼놓고 주요한 대선후보들을 직접 만났다. 그는 접촉대상자와 면담을 마치고 대화보고(Memorandum of Conversation)를 작성하여 워싱턴의 상부기관에 보고하곤 한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2007년 11월 2일 벌쉬바우는 민주당 대선후보 이인제를 대사관저에 불러 오찬을 베풀면서 "미국 대선과 달리 한국 대선은 콤팩트하게 진행돼 매우 흥미롭다"는 말을 던졌다. 벌쉬바우는 그 자리에서 남(한국)의 대선이 흥미롭다는 말을 두 차례나 하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신중하게" 남(한국)의 대선을 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7년 11월 2일) 지난 시기의 대선공작보다 더 맹렬하게 대선공작을 벌이고 있음을 암시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남(한국) 언론은 "미국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태도로 정보수집에 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고 보도하였다. (신동아 2007년 8월 호)
주한미국대사는 남(한국)의 정계, 관계, 재계, 군부,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 '지도급 인사'들을 감시하는 이른바 '잠재적 지도자 신상정보보고공작(PLBRP, Potential Leader Biographic Reporting Program)'을 벌이는데, 1년에 네 차례씩 수정, 보완하여 국무부에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이흥환 편저,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151쪽) 비밀해제된 1970년대의 잠재적 지도자 신상정보보고자료 중 극히 일부내용이 남(한국) 언론(신동아 2000년 1월 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 서기관을 직접 대담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의미 깊게 지켜보고" 있으며, 민주노총의 시위현장에 자주 나가 보거나 노동문제의 현안을 살펴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월간 말, 2004년 6월 16일) 해마다 하와이에서는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국군사령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연례행사가 벌어지는데, 그 행사에 불려 가는 사람들은 남(한국)의 언론인들이다. 주한미국대사관 정치과,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그리고 국방정보국 한국지부가 언론공작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섯 해마다 남(한국)에 '대선바람'이 불면 대선후보들 만큼 분주한 미국인 세 사람이 있는데, 주한미국대사,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국방정보국 한국지부장이 그들이다. 그들은 남(한국)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차단하면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명백하게 대선개입 비밀공작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은 유럽연합이나 일본 같은 하위동맹국들에서 실시되는 대통령선거나 총리(수상)선거에 개입하는 노골적인 비밀공작을 벌이지 못한다. 만일 선거개입공작이 드러날 경우 하위동맹국의 반미감정을 자극하여 동맹관계가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국)의 대선에는 마음대로 개입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한국)에는 미국 공작원을 간첩죄로 처벌할 형법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국정원, 경찰, 검찰 상층부에도 저들의 공작망이 침투해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러한 변태적 현실은 제국주의반동정권의 지배를 받는 신식민주의체제에서 생겨난 것이다.
워싱턴의 제국주의반동정권이 남(한국)의 2007년 대선에 개입하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물증은, 2006년 8월 29일자로 작성된 '디(D)-47 정국동향'이라는 제목의 정보문서이다. 2007년 3월 30일 방송위원회 비공개회의에 출석한 신현덕은 그 문서를 보고 백성학이 미국 스파이라는 의혹을 느끼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신동아 2007년 5월 호) 2007년 1월 12일 남(한국) 검찰이 배영준이 경영하는 유에스아시아 상무개발 한국지부 사무실을 수색하여 압수한 문서들 가운데는 '디(D)-47 정국동향'의 영어번역본이 있다.
백성학은 자기의 대화가 담긴 육성녹음 녹취록에서 "나 지금 자료가 한 댓 군데서 수집이 돼. 이걸 최종정리를 하는 게....영어번역하는 거는 우리 저 15층(배영준의 유에스아시아 한국지부 사무실을 뜻함-옮긴이)에서 다 정리를 해 가지고...(줄임) 배 사장이 두 군데 받는데 있고 내가 세 군데 받는 데...해 가지고 분석을 해. 우리가 일단 리스크린(rescreen, 검토라는 뜻-옮긴이)을 해서 정리가 돼서 올라간다고. (줄임) 상당히 지금 반응이 크지"라고 말하였다. (기독교방송 특별취재반 2007년 3월 26일)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롤리스의 현지협조자들이 정보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국방정보국 한국지부에 넘기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정보문서는 '차기 정권 창출 관련'이라는 소제목 아래 '여권 대선후보 무력화'와 '야권 대선후보 약점 확보'에 관한 정보가 있다. 그 문서는 "2007년 대선에서 중도성향의 변화와 개혁, 추진력을 겸비한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가장 본선경쟁력이 있다"고 지적하고, 당시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나선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세 사람 가운데서 이명박이 "중도세력의 표를 결집시킬 인물로 가장 적합하다. 반노 반좌파 구국연합 성격의 정치운동조직 탄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Ohmynews, 2007년 7월 24일) 롤리스의 현지협조자들이 2007년 남(한국) 대선에서 수구반동세력의 승리를 논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롤리스의 현지협조자들이 위의 정보문서를 작성한 때로부터 한 해가 지난 뒤에 대선국면은 매우 달라졌다. 주목하는 것은, 그 문서를 받아보는 상부에서 일어난 내부변화이다. 럼스펠드는 2006년 11월 8일 국방장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롤리스는 2007년 7월 6일 부차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체니는 부통령 자리를 지키긴 하였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이전만큼 힘을 쓰지 못하는데 요즈음은 심장병이 도지는 바람에 병원을 들락날락한다. 이처럼 딕 체니(부통령)-도널드 럼스펠드(장관)-로월 재커비(국방정보국장)-리처드 롤리스(부차관)로 이어지는 국방부 공작체계가 교체되는 기회를 틈타서 콘돌리자 라이스(장관)-크리스토퍼 힐(차관보)-토머스 핑거(정보조사국장)-알렉산더 벌쉬바우(주한미국대사)로 이어지는 국무부 공작체계가 한(조선)반도 정책의 집행권을 틀어쥐었다.
2007년 대선에서 국방부 공작체계는 수구반동정당이 내세운 대선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와 달리 국무부 공작체계는 중도개혁정당이 내세운 대선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양측은 자기들끼리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두 공작체계는 진보정당이 내세운 대선후보의 지지율 상승을 저지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갈래의 공작체계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였으므로, 2007년의 대선국면에서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돌발변수들이 튀어나와 판세를 바꾸는 현상들이 속출하였다. 물론 수구반동정당의 대선후보와 중도개혁정당의 대선후보 가운데서 차기 대통령을 선택하는 2007년 대선구도의 최종결정은 부쉬가 주재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양측의 논란 끝에 내려졌을 것이다. (2007년 12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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