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6광선의 초한인, 나다입니다. 제6광선이 지닌 여러 속성들 중의 하나가 실제로 평화입니다. 환경 논쟁에서 혹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다른 모든 논쟁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어떤 형태의 공개 토론회에 참석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연상해보세요. 그 논쟁에는 몇 개의 정당들 혹은 여러 그룹들을 대표하는 조직들 혹은 대표자들이 참석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대개 이러한 상황에서는 논쟁에 참여하는 다양한 그룹들은 각자가 자신들만의 안건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특정한 안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회의에 참석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나요? 따라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대개 끝없는 토의가 이어지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 않나요?
오로지 특정한 관심사만 관철시키려고 하게 되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보다 자신들의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성향이 대다수의 인간들 간에 실제로 갈등을 조장하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나요? 이것은 분명히 정치권을 지배해온 이원성적인 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투쟁은 갖가지 형태의 폭력으로, 심지어 전쟁으로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변화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더 이상의 폭력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진일보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수의 흩어져 있는 관심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여러 정당들 간에 여전히 이와 같은 형태의 끝없는 토의와 투쟁의 덫에 갇혀 있는 현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이 여러 개의 특정한 부분 혹은 그룹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환상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민주주의 원리들 중의 하나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또한 이들이 기본적으로 고차원적인 존재로부터 동일한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이 아닌가요?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또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어떻게 불가능할 수가 있나요? 사람들이 겉모습에만, 즉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이해를 지닌 독립된 여러 그룹과 부분들로 사람들이 나누어진 것처럼 보이는, 실체가 없는 문제와 부분에 관심을 집중할 때에만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이 무엇인가요? 삶, 자유 그리고 행복에 대한 추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할 수가 있나요? 그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이원성이라는 환상에 -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상반되는 극성과 부분들로 나뉘게 되는 - 눈이 멀게 될 때에만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말한 것처럼, 의식의 48단계 아래로 내려가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분리로 인해 눈이 멀게 됩니다. 지구에서 가능한 의식의 144단계들을 살펴보면,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갈수록, 사람들이 분리로 인해 점점 더 눈이 멀게 되어, 실제로 분리가 존재한다고 점점 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특정한 그룹이 다른 모든 그룹들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의식 단계에 있던 사람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최측근 보좌관들조차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을 적대시했던 존재는 바로 그였던 것입니다.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그 밖의 많은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야말로 이것은 최고 형태의 분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 방향으로 올라가, 의식의 144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初臨)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따라서 여기 아래에서도 모든 생명과 하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수직적으로 여러분의 현존과 하나가 되고, 그다음 수평적으로 모든 생명과 하나라는 것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144번째의 의식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현존과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열린 문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존은 하나님의 표현이며, 그 밖의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 혹은 이보다 더 높은 각성의 단계에 도달하면,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더 큰 대의(大義), 즉 비-이원성적인 대의를 홍보하고, 촉진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봉사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대의를 어떻게 촉진시킬 수가 있을까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것은 어떠한 명분도 지니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떤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제나 기대감 그리고 어떠한 체계(structure)도 마음속에 전혀 지니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최고의 봉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열린 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어감에 따라, 여러분의 내면의 어디에선가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옳을 리가 없어.”라고 외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외치는 존재는 바로 여러분의 에고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여러분이 열린 문이 되면, 에고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이며, 여러분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에고도 자신이 죽고 싶어 하지 않으며, 생존본능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고는 여러분을 속여, 여러분이 개인적인 견해도 가져야 하며, 사적인 이익도, 사적인 기대감도, 삶의 목표도 그리고 삶에 대한 사명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삶의 의미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환경을 구하기 위해, 고래류를 구하기 위해, 개구리를 구하기 위해 - 인간이 그것들을 어떻게 정의하든 그것들을 구해내기 위해 - 여기에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비-이원성적인 대의(大義)입니다. 이러한 대의를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덜 중요한 모든 목적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몇몇 종(種)들을 구하려고 하는 목표도 가치 있는 일이며, 이를 위해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 투쟁을 벌이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을 촉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원성적인 투쟁만을 조장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논쟁에서 빠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제6광선에서 최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봉사하고자 한다면, 실제로 마음이 자유로워지게 되고, 또한 삶의 어느 시점에서 신봉하게 된 이러한 이원성적인 명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광야를 걸으면서, 그곳에서 40일 밤낮을 머물면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일정한 기간 동안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징으로, 예수님께서 이전에 가졌던 삶에 대한 사명과 개념들, 기대/바램, 봉사 그리고 삶의 목적에 대한 집착 등 이전에 지녔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깊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가지셨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셨습니다. 그 후 40일 밤낮으로 자신이 지닌 동기(動機)와 바램(expectation)에 대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포기하셨으며, 단념하고,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공(空)의 의식 상태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떠한 의제(agenda)나 바램과 기대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린 문이 됨에 따라,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보셨습니다.
공개적인 논쟁에 뛰어들어, 특정한 목적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최고 형태의 봉사는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각각의 그룹들은 특정한 이익만을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공개 토론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이제 이러한 토론의 장에 여러분이 참가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특정한 목적을 위해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여러분은 궁극의 목적,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이며, 인간과 지구 어머니가 하나라는 궁극의 목적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서, 공개 토론회를 활용하려고 할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각각의 그룹들이 지니고 있는 편협한 관심사의 너머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고, 또한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되, 논쟁의 이면에는 더 깊은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대화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비전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여러분은 열린 문이 되어, 편협된 관심사에만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가 없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만 너무 몰입되어 있어, 결코 열린 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닫힌 문이 되거나, 고작해야 반쯤 열린 문이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문 앞에는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자신들의 선입견적인 체계에 기초하여,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은 걸러내기 때문입니다.
열린 문이 되어, 어떠한 개념을 제시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개념을 보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열린 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은 논쟁에서 그러한 개념을 제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개념들을 제시하기 위한 열린 문이 되는 것 이상으로, 그 외의 어떤 것, 즉 높은 주파수의 영적 에너지의 흐름, 다시 말해 졸졸거리며(bubbling stream) 세차게 흐르는 평화의 에너지를 가져올 수 있는 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목소리를 듣고, 진동을 느낄 수 있다면, 졸졸거리며 세차게 흐르는 평화의 진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평화가 어떤 것(what)”이라고 생각하도록 속아 왔기 때문입니다. "평화스럽다."라는 말의 의미는 수동적이며, 부드럽고, 온화하며, 불안하지 않은 것(non disturbing)을 뜻합니다. 하지만 평화에도 알파와 오메가의 측면이 있습니다. 오메가의 측면은 실제로 부드럽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지만, 알파의 측면은 강하고, 활동적이며, 흐르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평화의 알파 측면은 이원성에 눈이 먼 사람들을 평화 속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절대로 참된 평화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를 덮고,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평화의 알파 측면이 실제로 논쟁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원성이 지닌 궁극적인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하기 위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문제들을 자극할 목적으로, 평화의 적극적인 측면이 공개적으로 논쟁에 뛰어들어, 갈등과 대조(constrast)를 촉발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설명한 것처럼, 악(惡)이라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하나의 극성(極性)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선(善) 하다고 주장하는, 즉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선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선이라고 주장하는 교활한 존재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 형태의 평화의 하인(ultimate servants)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숨거나, 인자하게 보이려고 하는 뱀 같은 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곳으로 뛰어들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례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을 - 실제로는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이 - 보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scribes and Pharisees)을 직접 대면하시고자 했다고 생각하나요?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위선이나 모순을 지적하면서, 심지어 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까지 부르면서, 도발했다고 생각하나요?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평화를 상징하는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평화의 알파 측면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오메가의 측면도 통달하셨다는 것도 아실 것이며, 이 오메가의 측면을 이용하여, 예수님께서는 위안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달래주셨으며, 심지어 분노의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를 가라앉힘으로써, 사람들의 사나운 감정을 곧바로 가라앉힐 수 있는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셨습니다.
[출처] 하나가 되어 평화를 위한 열린 문이되자 (1/3)|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