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이 흑룡의 해였다.
'흑룡(黑龍)'이란 임진년(壬辰年)의 '임(壬)'이 오행(五行)에서 '수(水)'에 해당하며 북방을 상징하므로 북방색인 '흑(黑)'을 대입하여 칭하는 말인데, 어느 역술가는 이를 근래의 상술이 만들어낸 용어일뿐 예전에는 없었던 말이라고도 주장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용(龍)' 이란 동물 자체가 가상의 존재가 아닌가.. 또한 누가 큰 덕을 본다고 굳이 상술을 동원한다는 말인지..
용(龍)이 정말 가상의 동물일까.. 하는 명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계속되고 있으나, 지금부터 그와는 상관없는 옛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흔히 말하는 비전되어 오는 얘기.. 구전설화 한토막이다.
지금부터 600여년전 고려말 한반도 중북부지역의 어느 곳.. 준수하고 장대하며 용맹하게 생긴 한 청년이 열심히 무예에 정진하고 있었다. 깊은 산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심신을 연마하며 어찌보면 기약없는 하루하루를 오직 수련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었는데, 이 청년은 특히 활쏘기에 특출나다못해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지닌 이른바 '신궁(神弓)'이었다. 흔히 말하는 활을 잘쏘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백발이백중의 화살 한 발로 두 개의 목표를 꿰뚫는 신비의 능력을 보유한, 가히 이 세상에서 따를자 없는 활쏘기 능력을 갖춘 나라의 큰 재목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가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배경에는 당시 고려왕조 말기 즈음의 혼탁한 세상에 염증을 느껴 언젠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때가 오면 큰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온 사연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은 가슴속에 품은 '언젠가 세상을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다'는 큰 뜻을 사명으로 삼아 깊은 산속 고독한 생활을 착실하게 이겨나가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 날따라 유난히도 천둥번개가 많이 치고 거센 비가 내려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일찍 잠에 들게 되었다. 평소에는 피곤하기도 하여 꿈이란 것을 잘 꾸지 않고 지냈는데 이 날만은 특이하게도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서 캄캄한 어둠속에 애써 두려운 마음을 떨쳐내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찬란한 빛을 내며 무엇인가가 청년에게로 다가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밝게 빛나는 물체는 바로 '용(龍)'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 '백룡(白龍)'이었다. 평소 사람들이 접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용을 만나는 장면이어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하였다. '용(龍)'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영물(靈物)이었기 때문에 용을 본다는 것은 대단한 광명이며 자신의 운수에 큰 길운(吉運)을 가져다주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용이 어둠속을 날아서 청년에게 다가와 내려다보며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찬란한 밝은 빛을 내는 백룡이.. 백룡은 청년에게 무시무시한 쇳소리같으면서 동굴속을 울려퍼지는 듯한 소리로 말을 하였다. 아니 실제로는 말을 귀로 들은게 아니라 머리속으로 울려퍼지듯이 들려왔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백룡이 건넨 말은 정말 기상천외한 내용이었는데..
"그대가 활을 매우 잘 쏜다고 하니, 내가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노라.
아무날 아무장소에 가면 내가 다른 흑룡과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라.
그 때 나를 도와 흑룡을 활로 쏘아 맞혀준다면 나도 그대에게 큰 보답을 해 주겠노라."
말을 전하자 마자 백룡은 번개보다 빠르게 저멀리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청년은 벌떡 꿈에서 깨어났는데, 꿈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머리속에는 아직도 쇳소리 같은 무시무시한 백룡의 말소리가 울리는듯 정신이 없어서 얼른 자리를 털고 움막 밖으로 뛰쳐 나왔다. 움막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천둥번개가 그쳤고 고요한 달빛이 검은구름 사이사이로 비치는듯 주변이 어렴풋이 밝아져 있었다. 청년은 놀랍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마음으로 더 이상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꿈속에서나 현실세계에서 용과의 대면은 잠시 바라보거나 스쳐보는 수준이었을뿐 말소리를 듣거나 하는 직접 접촉의 얘기는 전혀 없었는데, 자신은 생생하게 용이 하는 말소리를 직접 들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는 경험인 것이다. 이런 경험을 아니 꿈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것도 용이 자신의 활쏘는 능력을 빌리는 부탁을 해온 터가 아닌가?
청년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날부터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더더욱 활쏘기에 전념하였고 백룡이 부탁한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과연.. 그날이 올 것인가? 용들이 싸운다는 그 날이 말이다. 비록 꿈이지만 몇일이 지난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니 속는셈 치고라도 한번 아무날 아무장소로 가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잘 되면 큰 보답을 내려준다고 했으니 용이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며 보냈다.
드디어 백룡이 얘기한 아무날이 왔는데, 칠흙같이 어두운 한밤중이었다. 그 날도 역시 먹구름과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괴이한 날씨였다. 청년은 단단히 마음먹고 아무장소로 찾아갔는데.. 그 곳은 깊은 숲속에 들어온 이후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한번도 가보지 못한 정말 깊은 산속의 음산한 기운이 감돌며 안개가 어렴풋하게 시야를 가리는 그런 장소였다. 천둥번개에다가 비바람과 안개까지.. 활쏘기에는 최악의 조건인 셈이었지만 청년의 활쏘기는 이미 신궁의 경지였기에 그런 여건에 기죽을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개를 뚫듯이 좌우를 살피며 비바람사이로 전방을 주시하던 중, 아... 과연 용처럼 보이는 두 물체가 서로 엉겨 싸우고 있었다. 싸운다는 것도 그렇게 들었기에 생각한 것이지만, 어쨋든 계속 관찰하니 두마리의 용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는게 분명해 보였다. 꿈에서 백룡에게 들은 싸움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분명 한 마리는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그 찬란한 빛을 내는 백룡이었고 또 한마리는 그 반대로 현현한 빛을 내는 검다기 보나는 검푸른듯한 흑룡(黑龍)이 분명하였다. 백룡도 꿈에서 처음 보았는데 흑룡은 더더욱 처음 보는 용이었으며, 지금은 아예 자신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나타난 수준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 기막힌 장면에 보통사람 같았으면 혼줄을 놓을 수 밖에 없었겠지만 워낙이 담대하고 수련에 익숙한 청년인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천둥번개와 비바람이 아니었으면 두마리의 용이 싸울때 나는 소리가 온 천지에 퍼져나갔을 정도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굉장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두마리의 용들의 싸움은 그야말로 서로간에 편차가 나지않는 백중지세.. 결코 판가름날 수 없을 대등한 싸움이었다. 원래 이런 백중지세에 약간의 도움이 가해지면 그 판은 바로 결판나 버리는 그러한 대등한 싸움이었다.
청년은 바로 활을 잡고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백룡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이미 마음속으로는 정하였던 터라 망설임없이 시위를 당길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워낙 두 용들이 뒤엉켜 있고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기가 어렵기에 활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백룡을 맞힐 우려도 있으므로 이는 단순조준 차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감각적인 활쏘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인 것이다. 바로 육감 같은 신기(神氣)에 맡겨 평소 몸의 일부분처럼 익숙한 활쏘기에 맡기는 수밖에..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귀를 닫고 고요한 마음에 집중하여 감은 눈으로 번쩍번쩍 들어오는 빛을 가늠하여 역시 감각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그 화살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혼란한 틈바구니에서도 정확하게 흑룡의 머리로 향하였고 전혀 예상밖의 장소에서 날아오는 섬뜩한 살기(殺氣)에 놀란 흑룡이 멈칫하는 사이 백룡이 때를 놓치지 않고 흑룡의 목을 겨냥하여 결정적인 한방을 날릴수 있었고 이는 싸움의 승패로 판가름나게 되었다. 작은 화살 하나가 엄청난 싸움의 승부를 가르는 형국이 연출된 셈이었다. 마침내 싸움은 백룡이 흑룡을 제압하여 승리하게 되었는데, 흑룡은 화살을 날린 어느 한 인간에게 원한이 서린 눈빛을 보내고 사라졌다.
청년은 이 모든 일들이 꿈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실에서 이루어낸게 정말 꿈만 같았다. 백룡은 청년에게 다가와 꿈에서와 같이 쇳소리 같은 머리속을 울리는 말소리를 건넸다.
"그대가 내 부탁을 들어주어 내가 흑룡을 이길 수 있었다. 약속대로 그대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는데,
그대와 그대의 후손이 몇백년을 부귀영화를 누릴수 있도록 해주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백룡은 자신의 비늘 하나를 청년에게 건네 주었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백룡의 비늘은 둥글며 한쪽 꿑부분이 뾰족한 모습인데 손바닥보다는 작았다. 그 비늘을 받아들자 청년은 손을 통해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속으로 확 밀려듦을 느꼈다.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며 태산의 기운을 받은듯 날아갈듯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 만큼 비늘의 기운이 대단한 것이리라. 이것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고 백룡의 말처럼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짬도 없이 청년을 바라보던 백룡은 역시 번개같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역시나 날씨는 맑게 개었다. 아직 밤이지만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듯 했다. 용은 날씨가 험해야 나타난다는게 사실인 모양이다. 아니 용이 날씨를 변화시킨 것이겠지만.. 청년은 백룡이 보답으로 준 비늘을 가지고 움막으로 돌아왔으며, 다음날 세상으로 나왔다. 백룡의 비늘이 청년에게 앞으로 어떤 운수를 정해줄지가 궁금하였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고 이 세상에서 두려울게 없었다. 다만.. 백룡을 돕는다는 생각만 하였었는데 흑룡의 존재에 대한 반대급부는 생각못한 점이 다소 찜찜하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스런 흑룡의 눈빛.. 이것이 원대하고 잘 나갈 청년과 청년의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줄 지는 헤아릴수 없을 뿐더러 부귀영화가 따른다는데야..
청년은 후에 고려(高麗)를 파하고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는 이성계의 조부 도조(度祖) 이춘(李瑃)이라는 사람이다. 도조의 용으로부터 받은 비늘 한 개는 손자인 이성계의 대에서 한 나라를 세우고 왕가를 이루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 셈이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에 간략한 내용이 실려 있다.
도조(度祖)의 꿈에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백룡(白龍)입니다. 지금 모처(某處)에 있는데, 흑룡(黑龍)이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하니, 공(公)은 구원해 주십시오.” 하였다. 도조가 꿈을 깨고 난 후에 보통으로 여기고 이상히 생각하지 않았더니, 또 꿈에 백룡이 다시 나타나서 간절히 청하기를, “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또한 날짜까지 말하였다. 도조는 그제야 이를 이상히 여기고 기일이 되어 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보니, 구름과 안개가 어두컴컴한데, 백룡과 흑룡이 한창 못 가운데서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흑룡을 쏘니, 화살 한 개에 맞아 죽어 못에 잠기었다. 뒤에 꿈을 꾸니, 백룡이 와서 사례하기를, “공의 큰 경사(慶事)는 장차 자손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 연유로 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로부터 그의 고조대까지 5대에 걸친 조상들을 용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왕조 성립의 정당성과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설화에서는 용이란 존재의 대단한 위력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비늘 하나의 기운이 500년 왕조를 세울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이성계의 조선은 후에 임진년(1492년)에 나라의 최대위기인 왜란을 맞이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과연 흑룡의 원한이었을까..
이성계 역시 렙틸리언이었습니다... 근세 고종황제때는 고종황제가 이성계의 직계 후손이 아니여서 그걸 지금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