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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것이 아닌 것들...
교회의 신도가 지하철에서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를 하며 선교를 합니다.
그는 담배도 하지 않고 술도 먹지 않고 바람도 피우지 않고 모범적인 가장인 동시에
사회의 윤리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보면 지극히 아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절의 스님이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하는 말마다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법화경, 금강경 등등의 불교 경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어느 경전 이야기이거든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숨습니다.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이고 예수님 말씀이라 하면 대개가 수긍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고 자신의 경직된 사고의 틀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각의 내용으로 생각의 틀에 안주합니다. 그 모습이 너의 생각은 내가 아는 진리와 위배되니 너의 모습은 틀렸다는 분별심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종교인의 모습과 같이 성경이나 불경의 진리와 같이 어떤 진리를 상정해 놓고 그것에 위배되는 것은 잘못된 길이라 말하는 것이니 생각의 내용을 철썩같이 믿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다르게 표현하면 말하는 것이 고급스러우면 행동은 천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형식이 고급스러우면 내용도 고급스러울 것이라는 믿음이죠.
다생소활의 김인자님이 빛세상을 말하고 에고를 깨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에너지장에 의존하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김인자님이 단체의 수장이라는 것과 능력자라는 것과 연장자라는 것에 일단 환상을 갖고 대합니다.
시타나님은 제가 알기로는 김인자님을 쫒아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외계인 23님이라 여깁니다.
과거 자유게시판에 황금빛 광채라는 분이 나와 또 한분의 외계인님이 나오셨다는 반응도 얻었지요...그러나 강인한님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 오해는 '명상했다.' '채널했다.' '스승에 대한 헌신' 등등으로 말에 파뭍히기 때문입니다.
채널 자체도 채널러의 분별심과 인지체계의 범주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채널'이라는 영적 기대심리 때문에 일단 진리의 범주로 간주됩니다.
형식이 고급스러우면 행동은 천박해도 된다는 것은 타인의 에고를 찾아내어 지적하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지요. 자신이 그림자가 생기더라도 그림자를 탓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해지겠지요.
카르마는 늘 생기고 있습니다. 죽은 생명의 일부를 섭취하고 있음은 곧 살생방조죄에 해당하는 카르마인데도 굳이 어느 한 개인의 카르마를 지적함은 일단 마음에 안들기 때문이겠죠.
그림자나 카르마는 별다른 죄가 없는 것인데도 누가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 그림자에 어둠이라는 가치 지향을 집어넣어 죄를 만들고 카르마를 죄를 집어넣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안든다는 것을 아주 고급스럽게 어둠이다..카르마가 많다고...위장하는 것입니다.
생각 역시 그러합니다.
석가모니께서 방대한 경전을 설하실 때 생각을 하시고 설하셨겠지요. 생각은 그 자체로 죄가 없지만 생각으로 판단할 때 그것이 규정되어 고착화됩니다.
가령 불교 경전에 흔히 말해지는 청정함은 범부는 맑음이라 이해하나 유마경에서는 맑음과 더러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설합니다.
같은 단어라도 청정함을 맑음으로 바로 연상하는 것은 범부의 인지가 언어에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유는 자재함에 있으며 열려져 있지만 그것이 닫혀져 있을 때 사유 자체가 진리임을 믿게 되어 개인의 협소한 자의식으로 너의 자의식을 비판하게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음과 분별심을 기본으로 하여 석가모니와 여러 성자들의 인용으로 상대를 논박하는 것...
그리고 '누가'말했음에 주목하여 누구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대로 그것을 해석해 버리는 것..
황금빛 광채...김인자님....의 사례에서 누구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를 확인할 것입니다.
형식이 고급스러우면 내용이 고급스럽다는 명제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의 체계'에 부합되는 것이 자신에게 고급스러움이고 그 부합되는 내용이 곧 진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명철한 언어와 언어의 공성에 기반한 사유 없는 명상에서 충실하지 못한 명상에 혹하고
자신의 인지체계를 정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채널했다는 형식에 혹하고
빛세상과 같은 좋은 이야기를 말하면 내면의 본성은 외면하고 덕명 만트라를 외우고
모두 자신의 체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나 안으로 들어가되 나의 무엇이 있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내가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2500년 전에 열반하신 석가모니의 말씀을 빌어 내 분별심이 말하는 것인지...주체부터 분명히 하고 말하십시오. 주체를 혼미하게 하는 것이 에고의 특기입니다.
나 안으로 들어가 고요히 생각이 끊긴 경지에서 분별(分別)을 분별(糞別)로 바라보는 것은 미세생각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매에 안주하는 것도 또하나의 마장인 것이라 말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신도가 지하철에서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를 하며 선교를 합니다.
그는 담배도 하지 않고 술도 먹지 않고 바람도 피우지 않고 모범적인 가장인 동시에
사회의 윤리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성적으로 보면 지극히 아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절의 스님이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하는 말마다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법화경, 금강경 등등의 불교 경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어느 경전 이야기이거든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숨습니다.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이고 예수님 말씀이라 하면 대개가 수긍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고 자신의 경직된 사고의 틀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각의 내용으로 생각의 틀에 안주합니다. 그 모습이 너의 생각은 내가 아는 진리와 위배되니 너의 모습은 틀렸다는 분별심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종교인의 모습과 같이 성경이나 불경의 진리와 같이 어떤 진리를 상정해 놓고 그것에 위배되는 것은 잘못된 길이라 말하는 것이니 생각의 내용을 철썩같이 믿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다르게 표현하면 말하는 것이 고급스러우면 행동은 천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형식이 고급스러우면 내용도 고급스러울 것이라는 믿음이죠.
다생소활의 김인자님이 빛세상을 말하고 에고를 깨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에너지장에 의존하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김인자님이 단체의 수장이라는 것과 능력자라는 것과 연장자라는 것에 일단 환상을 갖고 대합니다.
시타나님은 제가 알기로는 김인자님을 쫒아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외계인 23님이라 여깁니다.
과거 자유게시판에 황금빛 광채라는 분이 나와 또 한분의 외계인님이 나오셨다는 반응도 얻었지요...그러나 강인한님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 오해는 '명상했다.' '채널했다.' '스승에 대한 헌신' 등등으로 말에 파뭍히기 때문입니다.
채널 자체도 채널러의 분별심과 인지체계의 범주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채널'이라는 영적 기대심리 때문에 일단 진리의 범주로 간주됩니다.
형식이 고급스러우면 행동은 천박해도 된다는 것은 타인의 에고를 찾아내어 지적하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지요. 자신이 그림자가 생기더라도 그림자를 탓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이 이상하다고 말해지겠지요.
카르마는 늘 생기고 있습니다. 죽은 생명의 일부를 섭취하고 있음은 곧 살생방조죄에 해당하는 카르마인데도 굳이 어느 한 개인의 카르마를 지적함은 일단 마음에 안들기 때문이겠죠.
그림자나 카르마는 별다른 죄가 없는 것인데도 누가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 그림자에 어둠이라는 가치 지향을 집어넣어 죄를 만들고 카르마를 죄를 집어넣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안든다는 것을 아주 고급스럽게 어둠이다..카르마가 많다고...위장하는 것입니다.
생각 역시 그러합니다.
석가모니께서 방대한 경전을 설하실 때 생각을 하시고 설하셨겠지요. 생각은 그 자체로 죄가 없지만 생각으로 판단할 때 그것이 규정되어 고착화됩니다.
가령 불교 경전에 흔히 말해지는 청정함은 범부는 맑음이라 이해하나 유마경에서는 맑음과 더러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설합니다.
같은 단어라도 청정함을 맑음으로 바로 연상하는 것은 범부의 인지가 언어에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유는 자재함에 있으며 열려져 있지만 그것이 닫혀져 있을 때 사유 자체가 진리임을 믿게 되어 개인의 협소한 자의식으로 너의 자의식을 비판하게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음과 분별심을 기본으로 하여 석가모니와 여러 성자들의 인용으로 상대를 논박하는 것...
그리고 '누가'말했음에 주목하여 누구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대로 그것을 해석해 버리는 것..
황금빛 광채...김인자님....의 사례에서 누구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를 확인할 것입니다.
형식이 고급스러우면 내용이 고급스럽다는 명제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의 체계'에 부합되는 것이 자신에게 고급스러움이고 그 부합되는 내용이 곧 진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명철한 언어와 언어의 공성에 기반한 사유 없는 명상에서 충실하지 못한 명상에 혹하고
자신의 인지체계를 정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채널했다는 형식에 혹하고
빛세상과 같은 좋은 이야기를 말하면 내면의 본성은 외면하고 덕명 만트라를 외우고
모두 자신의 체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나 안으로 들어가되 나의 무엇이 있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내가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2500년 전에 열반하신 석가모니의 말씀을 빌어 내 분별심이 말하는 것인지...주체부터 분명히 하고 말하십시오. 주체를 혼미하게 하는 것이 에고의 특기입니다.
나 안으로 들어가 고요히 생각이 끊긴 경지에서 분별(分別)을 분별(糞別)로 바라보는 것은 미세생각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매에 안주하는 것도 또하나의 마장인 것이라 말해지는 것입니다.
아스태
- 2007.11.07
- 11:18:13
- (*.134.104.40)
예를 들자면 채널링은 무조건 옳다 신뢰할 만한 정보다???
ㅋㅋ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인간의 인지능력을 벗어난 능력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이기 때문에 무조건 옳더 그것이 진리다?? 만약 그것이 외부로 부터 어떤 특정한 의도하에서 들어온 정보라면 꼭두각시가 될 소지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채널이라는 것이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없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내면적인 자아와의 연결이 확립 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해악이 된다고 봅니다
ㅋㅋ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인간의 인지능력을 벗어난 능력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이기 때문에 무조건 옳더 그것이 진리다?? 만약 그것이 외부로 부터 어떤 특정한 의도하에서 들어온 정보라면 꼭두각시가 될 소지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채널이라는 것이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없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것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내면적인 자아와의 연결이 확립 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해악이 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