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회원님들에게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편안히 살고, 열심히 살고,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지, 고파동 에너지라든가 차크라 막 열리고, 쿤달리니 열려지고, 고차원 에너지에 접속되고 그런 것은 바라지 않고 금강연화원의 지향점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소박하고 작고 소소한 삶의 일상이 좋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요...
여러 회원님들이 깨달음에 대해서 물어보곤 합니다. 어떤 분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그러는데, 이것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는 것이 깨달음의 의식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공(空)'에 대한 체험을 말하시는 분 같았어요.
그런데 말이죠....이것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그렇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리고 지금 당장! 여러분들에게 이것이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 묘한 자각 상태에 도달한다고 해도...
정말로 내가 고민도 없고 갈증도 없고, 반응도 없는 것으로 변할까요?
한국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선불교에서 주장되는 변성의식(變性意識)으로 오도송을 남긴 스님들이 티베트 밀교로 유학 가시고, 남방 불교의 위빠사나를 배우러 동남아로 가시는 것은 한국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변성의식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여래장과 하나이기에 진아와 에고는 불이(不二)입니다.
그렇기에 에고의 속성에 이미 진아가 반영되었기에
중생의 번뇌는 보살이 중생을 이해하는 사량심으로
중생의 탐심은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중생의 진심 즉 분노는 보살이 중생을 방해하는 사마를 격퇴하고자 하는 강한 분노로 드러나는 것입니다....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중생의 번뇌는 보살의 끝없는 지혜로...이것은 여래장이 끝없는 지혜와 관찰지로 펼쳐져 있기에..
중생의 탐심은 보살의 다하지 않는 중생 구제의 의지로...이것은 여래장이 끝없는 생명력으로 펼쳐져 있기에....
중생의 분노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여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의지로 보살의 분노로 표현되며...이것은 여래장이 무궁한 자비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중생과 부처님은 하나로 계합되었기에
보살은 중생의 개체성...즉 에고로 부처님의 광명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불지(佛智)를 성취한다...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과 같은 마하보디샤트바(대보살)들이 깨닫지 못하여
그 분들의 복과 지혜와 방편이 조사님들의 지혜와 복에 미치지 못할까요?
죄송합니다만, 깨달음을 열렬히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복이 없고, 지혜가 부족하여 만족함을 모르기에 그러한 갈증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이라는 바다로 가기 위해 시장도 지나치고 들판의 꽃도 지나치고 정작 도착했으나
다시 돌아옵니다. 시장과 들판의 꽃도 구경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고 무엇을 구족해야 모르기에 이상을 높게 설정하고 그 이상을 성취하면 나머지는 다 해결될 것 같은 믿음.
무엇도 구족되지 않고, 무엇도 승화되지 않은 채, 깨달음의 경지만 도달하면
구족되지 않은 복과 지혜는 자연스럽게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
그렇기에 오도송도 남기시고 견성했다고 하는 스님들이 속세의 욕망에 물들어 불교권 내에서
권위의식, 정치의식, 물욕의식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부터 복과 지혜를 구족하여 아래의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처럼 중생의 모든 소원에 응할 수 있는 방편의 힘과 중생의 모든 소리를 분별하여 들을 수 있는 분별지를 갖춘다면 그 피상적인 깨달음 타령을 안해도 이 윤회의 바퀴는 보살의 수행처...법륜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 의식이라는 것이 에너지의 반영이라면 시장을 지나가고 들판의 꽃도 구경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증득하는 것이 수행의 열매이자 깨달음의 과실입니다.
증득함, 구족함이 없이 깨달음 자체만...가령 이것이 있기도 하고...없기도 한...그 상태만 얻어진다면
박복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불만족, 여기저기 다니면서 갈증을 표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나
실제로 그러하지 못합니다.
깨달으면 자신의 박복함과 어리석음과 인연들이 정리된다....어떻게 보면 달콤한 말이고 이 말로 인해 수행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박복함과 어리석음과 인연에 대한 정리 없이 깨달으면 뭐든지 해결된다는 것은 부처님의 인과법에 어긋납니다. 박복함과 어리석음과 인연에 대한 정리 이후에 그것에 대한 마침표를 찍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수많은 인(因)이 모여 연(緣)을 만나 깨달음이라는 과(果)를 얻게 됩니다.
석가모니 역시 전생부터 수없이 많은 보살행과 석가모니 출가 이전의 체험들을 통해
사마타 수련 이후, 위빠사나라는 연을 만나 깨달음이라는 과를 얻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위빠사나는 석가께서 깨달았던 방식...연(緣)을 구족하는 것이지
그것이 불지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因)이 없는데, 어떻게 불지를 성취하겠는지요?
많은 이들이 연..즉 깨닫기 위한 방식에만 매달려 깨달음이라는 것을 증득하려 하나
실제로는 인을 누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이 누적되는 양상에 따라 선사의 깨달음, 보살의 깨달음, 부처의 깨달음이 나누어집니다. 인이 어느 정도 임계치를 넘어서 연을 만나게 되면 과가 이루어집니다.
포도씨(인)가 물(연)을 만나 포도(과)를 맺는 것(선사의 깨달음이라 하자)
참외씨(인)가 물(연)을 만나 싹이 터서 참외(과)가 되는 것(보살로서의 각성, 깨달음이라 하자..)
수박씨(인)가 물(연)을 만나 싹이 터서 수박(과)가 되는 것(아미타불의 깨달음...)
이렇게 불지를 성취함은 억겁의 윤회를 통해 인을 누적하고 수많은 연을 통해 깨달음을 피워내는 과정 이후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십시오.
윤회가 고통스러운 것은 중생이 욕망으로 윤회하기에 고통스러운 것이지
보살은 육도 윤회 자체가 복을 쌓고, 지혜를 닦으며, 방편을 구사하는 수행의 자리...
곧 법륜입니다.
좌공부는 본연의 흐름에 의해 충당하고, 해소하고, 리모델링하고, 스스로의 에너지를 모좌에 맞게 재구성합니다. 그것은 보살의 흐름과도 닿아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이 원하면 손에서 재보와 공양구와 음식이 쏟아지고 보살은 중생의 열뇌를 식힐 수 있는 보병, 중생의 소원에 응하는 보주 등을 이미 몸에 구족되었습니다.
좌공부의 비품 운영을 통해 에너지체에 비품이 새겨지고, 좌공부의 동작과 회로를 통해 에너지체를 모델링하여 세상 속의 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나를 재설계합니다. 좌공부 자체가 '정명' 개념과 '모좌' 개념이 있는 것은 이 공부 자체가 세상에 나는 어느 자리(座)에 있음인가...에 대한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이 보살의 수행처, 곧 법륜인 것입니다
좌공부 회원님들은 이 공부가 수승한 공부임을 아셨음하고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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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연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