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깨우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 축복이며 이를 가르치는 일이 사랑이다.
위의 말은 이삼한성자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할까요?
사랑도 천차만별이지만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면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 하는 사랑과,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이 하는 사랑으로 나눌수 있겠습니다.
나를 알고 상대를 제대로 보면서 하는 사랑이 전자에 속한다면
세속적인 사랑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진리와 인연을 맺고 진리를 알아차린다음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나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양심과 정의가 없는 사회가 어찌 사랑이 넘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개개인이 양심을 깨우고 정의를 실천해서 바른길을 가는 일이 널리 인류를 사랑하고
지구어머니의 고통을 함깨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는 곧 가이아킹덤이 펼지는 양주기능천 운동입니다.
양주기능천 운동을 바로알고 내 안에 깃들어있는 신성을 깨워서 하느님의식으로 거듭난다면
그것이 곧 사랑이 충만한 사회이자 지구어머니가 바라는 환경이며
조가람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의 의식과 하나되는 일입니다.
제가 이삼일전에 본 천상의 나무는 지금 생각해보니 몹시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던것 같습니다.
다섯기사단도 힘들어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천상의 나무를 제대로 지킬 수 없는 환경이 마침내 지구에 도래한다면
가이아킹덤의 견해로는 다섯기사단이 움직일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들은 아직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번기회에 나루와 캄보에 대한 경고도 다시한번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가 캄보가 되지말고 나루로 거듭나시기를 바라면서
진리에 눈을 뜨기를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가이아킹덤
- 2013.11.12
- 16:18:21
- (*.60.247.28)
네네... 많이 웃으세요.
그 옛날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하였을때도 사람들은 많이 웃었다고 합니다.
그뒤 마젤란이 항해를 통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였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전제로 지구의 길이를 처음으로 측정했다고 합니다.
병슨님.
걷기와 달리기의 가장 큰 구별점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속도?. 몸동작?. 근육의 움직임?
물론 위 말도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핵심을 말씀드리자면, 걷기는 동시에 두발이 땅에 닿아있는 때가 많은 반면에
달리기는 언제나 한쪽발만이 땅에 닿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경보는 두 발의 뒷꿈치가 동시에 땅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진리란 이런 것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시인이 친구를 배웅하고나서 돌아서는데 발목이 시러옴을 알아차리고는
'그리움은 발목에서부터 온다'
라고 말하였는데,
이건 맞는 말입니까?
맞지 않은 말입니까?
오래만에 집을 방문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일어설때
아마도 급히 양말을 줏어신을 겨를도 없이 따라나선 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그때야 발목이 시러옴을 알았다.
그래서 시인은 그리움은 발목으로 부터 오는가? 하는 싯귀를 남긴 것입니다.
위의 말도 우스우신가요?
감사합니다.
「책탐」본문 中 나무처럼 살고 싶다 - 34페이지 [인문] 김경집 저 나무수 2009.12.21 김경집[[[sh_passage]]]나무수 살 수없고, 대지에 박힌 나무의 뿌리가 원초적인 힘들을 빨아올려서 스스로를 정성스럽게 가꾸는 것이야말로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이라고 설정했다. 그래서 루소는 “ 인간은 천상의 나무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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