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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에 대한 고찰 - 3
無 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물이 없다라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역할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상황을 말할 수도 있다.
無 라는 글자는 무척 단순하지만,
그것의 사용에 있어서 완벽히 無가 되기는 무척 어렵다..
반드시 [어떤 것] 이라는 [어떤]이라는 관념이 우선시 되고,
이 관념은 기존의 사물로서의 지위나 역할,기능에 종속된다.
따라서 순수한 無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無라는 말은
정신의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서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다.
특히 명상이라던가 하는 분야에서는 거의
최고의 일초식이 바로 無이다.
누가 無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상황에 적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그 정확성과 접근성이 無의 순수성을 말해주며,
이 순수성이 서로 교환되는 경지가
禪家에서 뜻하는 깨달음의 경지일런지 모르겠다.
이렇듯 無라는 하나의 단어는
가장 적합한 상황에서 가장 그 어의에 맞게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에게 각고의 수행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단어가 단순하다고 그 의미를 체득하는 것까지 쉬운게 아니다.
無, 無, 無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有를 말하고 있고...
有 중에서 아주 극소수만이 無에 도달한다.
이처럼 관념과 그 실천의 간극이 가장 커다랗게 벌어지는 현상을
無와 관련한 담론에서 읽을 수 있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관념과 실천의 간극을 간과하고..
아주 무작정 사태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들은 음모론의 바다로 뛰어들기도 하는데..
음모론의 주장들은 무척..
'심플'하다.. 마치 無라는 단어가 단순하듯이..
세상은 그저 惡과 이들이 숨긴 음모로 구성된다.
거기에서는 복잡한 인과관계라던가, 상황설정..
그리고 필연적인 요소나 우연적인 요소의 개입
역사적 배경이라던가 개인별 집단별 업장이라는 요소들은 무시된다.
가장 강력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서
그 약점을 '음모'로 환원시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 환원주의'는
-마치 모든 사태에 대해 그저 無로 일관하면서
가짜 깨달음의 교사역할을 자처하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그 어느 것이라도 오로지 '음모' 하나만 있으면
다 알수 있다고 유혹한다..
단순히 말로서만 無라고 하는 것과
실천으로 無를 아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음모로 재구성되는 사건과
사건이 실제로 구성되고 벌어지기 까지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그리고 현실과 머리속의 사실의 엄청난 격차는
[관념의 과잉상황]을 지나면서 쉽사리 극복된다..
예를 들어 無를 말하는 가짜 깨달음의 교사가
자신을 미륵의 재생이라고 말하는 식의 [자아과잉]과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지지로서 '관념의 과잉상황'에 처해있듯이,
음모론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신을 모종의 '피해자 집단'혹은 '진실추구자'라는 식의 [자아과잉]
상태에 처해져 있고..
이런 관념은 아주 조그만한 단서만으로도
쉽사리 현상을 일반화시켜
자아과잉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일반화 작용..
그것이 바로 無 혹은 [음모]이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 소모되지 않은 인간이 無를 추구하면
반드시 번뇌가 생긴다..
실현되지 못한 소망에 대한 회한과 갈증이다.
실현되지 못한 소망이라는 어둠을 풀기 위해
無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겠는가..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소망을 하나 하나 풀어..
자기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겠는가..
현실적 욕구의 좌절을
지난한 과정을 거쳐 현실을 변화시킴으로써 실현하는 게 옳은가..
아니면 단지 '음모'로 치부하고 그 음모를 분쇄하는 방법으로
욕구좌절을 보상하는 방법이 옳은가..
물론 선택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無를 설파하셨던 부처님은
'중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중도'는 無를 추구하지 않고 有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無를 추구하면 관념과잉이요,
有를 추구하면 욕망과잉이다.
無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균형점을 뜻하지,
결코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추구하는 無는 가짜이듯,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자연의 산물일 뿐이다.
음모론 역시..
어떤 특정상황하에서 음모가 조성될 수는 있겠지만,
역사의 전체상황이 음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자체에 대한 모독이고, 역사에 대한 모독이며,
자연에 대한 오해이다..
자연은 항상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바꾸어가지만,
스스로 바뀌려들지 않으려는 인간은,
세상이 항상 음모로 인해 자신을 음해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갖가지 주장들이
무명과 업장에서 비롯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업장을 나는 '관념과잉'이라고 이해한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惡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하나의 의문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음모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누군가를 나쁘게 생각하여 그 사람을 둘러싼
음모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음모이기 이전에,
대상이 되는 집단에 대한 불만이 왜곡된 형태로 분출되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물론 대상집단은 본래 자신이 불만인 집단과 달리 에고의 의해 왜곡되어 있다)
살다보면 그렇듯이
오늘 옳았던 나의 생각은 내일 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해에 불과했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오해는 권력이 개입될수록 더 불식되기 어렵다..
즉, 음모론은 틀릴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것이다.
자비라는 광선을 비추면 대부분의 음모들은 사라지고 만다.
어둠이 빛에 의해 사라지듯이..
無 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물이 없다라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역할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상황을 말할 수도 있다.
無 라는 글자는 무척 단순하지만,
그것의 사용에 있어서 완벽히 無가 되기는 무척 어렵다..
반드시 [어떤 것] 이라는 [어떤]이라는 관념이 우선시 되고,
이 관념은 기존의 사물로서의 지위나 역할,기능에 종속된다.
따라서 순수한 無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無라는 말은
정신의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서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다.
특히 명상이라던가 하는 분야에서는 거의
최고의 일초식이 바로 無이다.
누가 無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상황에 적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그 정확성과 접근성이 無의 순수성을 말해주며,
이 순수성이 서로 교환되는 경지가
禪家에서 뜻하는 깨달음의 경지일런지 모르겠다.
이렇듯 無라는 하나의 단어는
가장 적합한 상황에서 가장 그 어의에 맞게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에게 각고의 수행이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단어가 단순하다고 그 의미를 체득하는 것까지 쉬운게 아니다.
無, 無, 無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有를 말하고 있고...
有 중에서 아주 극소수만이 無에 도달한다.
이처럼 관념과 그 실천의 간극이 가장 커다랗게 벌어지는 현상을
無와 관련한 담론에서 읽을 수 있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관념과 실천의 간극을 간과하고..
아주 무작정 사태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들은 음모론의 바다로 뛰어들기도 하는데..
음모론의 주장들은 무척..
'심플'하다.. 마치 無라는 단어가 단순하듯이..
세상은 그저 惡과 이들이 숨긴 음모로 구성된다.
거기에서는 복잡한 인과관계라던가, 상황설정..
그리고 필연적인 요소나 우연적인 요소의 개입
역사적 배경이라던가 개인별 집단별 업장이라는 요소들은 무시된다.
가장 강력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서
그 약점을 '음모'로 환원시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음모 환원주의'는
-마치 모든 사태에 대해 그저 無로 일관하면서
가짜 깨달음의 교사역할을 자처하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그 어느 것이라도 오로지 '음모' 하나만 있으면
다 알수 있다고 유혹한다..
단순히 말로서만 無라고 하는 것과
실천으로 無를 아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음모로 재구성되는 사건과
사건이 실제로 구성되고 벌어지기 까지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그리고 현실과 머리속의 사실의 엄청난 격차는
[관념의 과잉상황]을 지나면서 쉽사리 극복된다..
예를 들어 無를 말하는 가짜 깨달음의 교사가
자신을 미륵의 재생이라고 말하는 식의 [자아과잉]과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지지로서 '관념의 과잉상황'에 처해있듯이,
음모론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신을 모종의 '피해자 집단'혹은 '진실추구자'라는 식의 [자아과잉]
상태에 처해져 있고..
이런 관념은 아주 조그만한 단서만으로도
쉽사리 현상을 일반화시켜
자아과잉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일반화 작용..
그것이 바로 無 혹은 [음모]이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 소모되지 않은 인간이 無를 추구하면
반드시 번뇌가 생긴다..
실현되지 못한 소망에 대한 회한과 갈증이다.
실현되지 못한 소망이라는 어둠을 풀기 위해
無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겠는가..
아니면 실현되지 못한 소망을 하나 하나 풀어..
자기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겠는가..
현실적 욕구의 좌절을
지난한 과정을 거쳐 현실을 변화시킴으로써 실현하는 게 옳은가..
아니면 단지 '음모'로 치부하고 그 음모를 분쇄하는 방법으로
욕구좌절을 보상하는 방법이 옳은가..
물론 선택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無를 설파하셨던 부처님은
'중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중도'는 無를 추구하지 않고 有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無를 추구하면 관념과잉이요,
有를 추구하면 욕망과잉이다.
無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균형점을 뜻하지,
결코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추구하는 無는 가짜이듯,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자연의 산물일 뿐이다.
음모론 역시..
어떤 특정상황하에서 음모가 조성될 수는 있겠지만,
역사의 전체상황이 음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자체에 대한 모독이고, 역사에 대한 모독이며,
자연에 대한 오해이다..
자연은 항상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바꾸어가지만,
스스로 바뀌려들지 않으려는 인간은,
세상이 항상 음모로 인해 자신을 음해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갖가지 주장들이
무명과 업장에서 비롯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업장을 나는 '관념과잉'이라고 이해한다.
세상의 어떤 누구도 惡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하나의 의문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음모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누군가를 나쁘게 생각하여 그 사람을 둘러싼
음모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음모이기 이전에,
대상이 되는 집단에 대한 불만이 왜곡된 형태로 분출되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물론 대상집단은 본래 자신이 불만인 집단과 달리 에고의 의해 왜곡되어 있다)
살다보면 그렇듯이
오늘 옳았던 나의 생각은 내일 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해에 불과했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오해는 권력이 개입될수록 더 불식되기 어렵다..
즉, 음모론은 틀릴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것이다.
자비라는 광선을 비추면 대부분의 음모들은 사라지고 만다.
어둠이 빛에 의해 사라지듯이..
청학
- 2006.09.18
- 16:18:29
- (*.112.57.226)
無와 有의 관점은 디지탈 1과 0으로 그 세계가 더더욱 현실적이며 물리적으로 입증 될 것이며, 더더욱 관념적으로도 승화 될 것입니다.
공즉색
음중양
무즉유
천즉지 등의 상호관계는 공과 허, 무와 유의 4박자로 설명이 되어집니다.
무와 유는 본질의 공과 허에서 비롯된 개념이기에 먼저 공허(or 허공)을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 부시와 우익파들은 자신들이 생존하고자하는 有를 강조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게 無를 창조(有)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실함(무의 한계)을 그런 식(테러)으로 해소하는 방식을 쓴 것 뿐입니다.
테러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두는 절대권력의 쑈맨쉽이기도 합니다. 메시지에 나온대로 선의 세력이라고 하는 우주인들까지도 방관한 테러입니다. 테러가 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저들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중도!
지구가 바로 중도입니다.
하나의 테러에 이렇게 각자의 먹이(유무, 공허)로 삼을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중도이며 지구입니다. 각자의 에너지(음양, 선악, 유무)로 각각 포식한 테러였습니다. 한쪽은 살만 파먹고, 한쪽은 뼈만 추려가는 ㅋㅋㅋ,
추릴 뼈가 있었기에 테러를 방관했던 저들 역시 지구의 중도(태극)앞에는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공즉색
음중양
무즉유
천즉지 등의 상호관계는 공과 허, 무와 유의 4박자로 설명이 되어집니다.
무와 유는 본질의 공과 허에서 비롯된 개념이기에 먼저 공허(or 허공)을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 부시와 우익파들은 자신들이 생존하고자하는 有를 강조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게 無를 창조(有)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실함(무의 한계)을 그런 식(테러)으로 해소하는 방식을 쓴 것 뿐입니다.
테러는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두는 절대권력의 쑈맨쉽이기도 합니다. 메시지에 나온대로 선의 세력이라고 하는 우주인들까지도 방관한 테러입니다. 테러가 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저들도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죠!
중도!
지구가 바로 중도입니다.
하나의 테러에 이렇게 각자의 먹이(유무, 공허)로 삼을 수 있는 상태가 바로 중도이며 지구입니다. 각자의 에너지(음양, 선악, 유무)로 각각 포식한 테러였습니다. 한쪽은 살만 파먹고, 한쪽은 뼈만 추려가는 ㅋㅋㅋ,
추릴 뼈가 있었기에 테러를 방관했던 저들 역시 지구의 중도(태극)앞에는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