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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산방 다실에 앉아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추적추적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홀로 차 한 잔 마시는 즐거움은 산사에 사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이럴 때는 홀로 이 대자연의 연주를 감상하며 차향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요즘처럼 이런 비가 며칠이고 내내 쏟아지는 날은 이따금 맑은 차 한 잔 함께 나눌 도반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런 날, 도반이 그리운 바로 이런 날, 어떻게 알았는지, 마음이 통했는지 먼 곳에 있던 그리운 벗이 찾아올 때면 그 반가움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그저 서로 마주보며 눈길로 웃어줄 뿐, 말로써 반가움을 표현해 버리면 그 짠한 느낌이 도리어 반감이 되기 쉽다. ‘잘 지냈냐’는 그 말 한 마디와 따뜻한 눈빛을 들을 때 ‘뭐 그냥 저냥 살고 있다’는 답과 함께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려 내 주면 그것으로 이 진한 감동과 너울은 차향이 되어 피어오른다.
얼마 전에 바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수녀님이셨는데 먼 길 마다않고 불쑥 찾아 와 오래도록 차 향기에 취하게 해 주셨다. 퍽이나 발랄하고 허물이 없어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전혀 부담 없이 이런 저런 넉두리를 늘어 놓아도 흠 잡히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가는 그런 분이셨다. 수녀복을 정갈하게 입고 계시면서도 수녀님 같다기 보다는 그냥 편한 누이 같기도 하고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이웃 같기도 한 그런 모습이 더욱 내 마음에 벽을 없애 주었다.
일반적으로 스님이든 수녀님이든 승복이나 수녀복을 입고 있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행실이 달라지곤 한다. 물론 그런 것은 불교에서도 위의威儀라고 하여 스님다운 여법한 행실로써 강조되기도 하지만, 때로 그런 데 갇히게 되면 자기만의 자신다운 빛을 잃고 자칫 ‘스님다운’ 모습에 자신을 맞춰가는 딱딱한 모습이 되기 쉽다. 내 생각에 참된 스님은 ‘스님다운’ 사람이라거나, ‘부처님 같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에서도 벗어나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맑은 수행자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그러나 그 향기는 '수행자'나 ‘구도자’라는 거창한 이름에서 오는 향기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써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모습에서 온다.
제 스스로 수행자라고 티를 내거나, 스님의 상에 갇혀 거만하고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한정도 짓지 않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 만족하는 자유로운 사람, 그런 수더분한 사람에게서 되려 참 수행자의 향기는 풍겨 나오는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이면 되지 거기에 무슨 무슨 상을 덮씌울 것도 없고, '수행자'라느니, '스님'이라느니, '선생님'이라느니, ‘사장’이라느니 하고 이름 붙여 놓고 거기에 제 스스로 갇혀 살 필요는 없지 않겠나.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부모님도 부모로써의 권위를 너무 앞세워 ‘어떻게 하면 부모답게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다운 순수한 삶의 철학과 나다운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설 때 참된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부모라는 권위를 앞세워 자식 앞에 군림하려 하거나, 부모니까 ‘내 자식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권위적인 사회에서 나온 발상일 뿐, 거기에 끌려 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좋고 어떤 부모는 나쁘다거나, 어떤 부모님은 100점인데 우리 부모님은 50점도 안 된다거나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어떤 정형화 된 부모로써의 ‘틀’을 세워 놓으니까 그 틀에 맞춰 더 좋거나 더 나쁜, 그리고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생겨나지 그 모든 틀을 던져 버리고 오직 ‘나답게’ 자식을 기르고 가르칠 수 있다면 저마다 온전한 100점짜리 부모가 되는 것이다.
사장도 회장도 부장도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라도 그 지위의 틀 속에만 갇혀서 ‘내가 사장인데’ ‘내가 지휘관인데’ ‘내가 선생님인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얽매여 있다 보면 오히려 그로인해 강박증을 일으키기 쉽다. 나는 나다운 길을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어떤 틀에 갇혀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는 길 보다 나다운 모습으로 나답게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도 더 조화롭고 진리에도 더 합일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에서야 어디 더 놓고 나쁜 것이 있는가. 소나무가 더 좋고 참나무가 더 나쁘다거나, 바다는 좋고 산은 나쁘다거나, 겨울은 좋고 여름은 나쁘다거나 하는 분별이 없다. 소나무가 참나무처럼 넓은 잎을 피우려고 애쓴다거나, 바다가 산처럼 되려고 애쓰거나, 겨울이 여름처럼 따뜻해지려고 한다면 그건 자연의 조화를 깨는 일이고 자기 자신다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떤것이 좋고 나쁜다고 나누는 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생각에서, 분별에서 나온 것일 뿐이지, 본래는 모든 것이 저마다의 모습으로써 완전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으로써 드러난 진리를 꽃피워내는 일이다. 나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겨울이 여름처럼 되고자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런데 요즈음 이따금씩 '수행자' 병에 걸리고, '성직자' 병에, 또 ‘신앙인’ 병에 걸려 있는 어리석은 이들을 본다. 불쑥 불쑥 찾아와서는 자신이 얼마나 수행을 잘 하고 있는지, 절을 참선을 또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자기 자랑삼아 늘어놓거나, 혹은 '수행자처럼' '성직자처럼' 또 '기도 잘 하는 신도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때때로 보게 된다.
때때로 자신 입장에서 보면 수행 안 하는 사람이 참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면서, 혹은 타종교를 믿는 사람이 참 안돼 보인다고 하면서 제 수행과 공부 편력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서 참 수행자는 어떠해야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참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또한 참된 종교인은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이다. 어떤 틀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다. 진리는 일정한 틀을 정해 놓지 않는다. 어떤 틀을 정해 놓고 이대로만 행한다면 진리인데 이 틀을 한 치라도 벗어나면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억압이지 진리의 자유성이 아니다.
수행하면서도 '내가 수행한다'는 그 생각조차 놓고 비우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집착을 버리는 방하착의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스스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한 생각에 걸려 있으면 그 사람은 놓음을 되려 잡고 가는 사람이고,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집착을 가져온다. 놓고 가면서 그 놓는다는 한생각도 다 놓고 가야하고, 수행하면서 수행한다는 그 생각도 다 놓고 가야 한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 안 하는 사람을 볼 때 우쭐한 마음이 생긴다거나 나 잘난 마음이 올라온다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 스스로 수행자라는 틀에 얽매여 있는 어리석고도 위험한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학벌이나 직장 좋은 사람이, 혹은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 스스로 우월감을 가진다거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향해 비웃거나 얕잡아 본다면 그건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상을 내는 것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한다. 수행자라는 것도 하나의 분별심일 뿐, 수행자라는 분별이 있으니 수행자 아닌 사람을 얕보는 마음도 생기고, 나는 수행 안 하는 사람하고는 다르다는 차별의 마음도 생기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수행자다운, 성직자다운, 종교인다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 그저 평범한 내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는 틀이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자답게' 살려고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 때 우린 참 수행자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구도자답게 사는 것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구처럼도 아니고, 깨달은 사람처럼도 아니며,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고, 어떤 관념의 틀에 사로잡힐 것도 없이 그저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다운 삶일 것이다.
- 법상스님의 글 -
이럴 때는 홀로 이 대자연의 연주를 감상하며 차향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요즘처럼 이런 비가 며칠이고 내내 쏟아지는 날은 이따금 맑은 차 한 잔 함께 나눌 도반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런 날, 도반이 그리운 바로 이런 날, 어떻게 알았는지, 마음이 통했는지 먼 곳에 있던 그리운 벗이 찾아올 때면 그 반가움은 무엇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그저 서로 마주보며 눈길로 웃어줄 뿐, 말로써 반가움을 표현해 버리면 그 짠한 느낌이 도리어 반감이 되기 쉽다. ‘잘 지냈냐’는 그 말 한 마디와 따뜻한 눈빛을 들을 때 ‘뭐 그냥 저냥 살고 있다’는 답과 함께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려 내 주면 그것으로 이 진한 감동과 너울은 차향이 되어 피어오른다.
얼마 전에 바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수녀님이셨는데 먼 길 마다않고 불쑥 찾아 와 오래도록 차 향기에 취하게 해 주셨다. 퍽이나 발랄하고 허물이 없어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전혀 부담 없이 이런 저런 넉두리를 늘어 놓아도 흠 잡히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가는 그런 분이셨다. 수녀복을 정갈하게 입고 계시면서도 수녀님 같다기 보다는 그냥 편한 누이 같기도 하고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이웃 같기도 한 그런 모습이 더욱 내 마음에 벽을 없애 주었다.
일반적으로 스님이든 수녀님이든 승복이나 수녀복을 입고 있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행실이 달라지곤 한다. 물론 그런 것은 불교에서도 위의威儀라고 하여 스님다운 여법한 행실로써 강조되기도 하지만, 때로 그런 데 갇히게 되면 자기만의 자신다운 빛을 잃고 자칫 ‘스님다운’ 모습에 자신을 맞춰가는 딱딱한 모습이 되기 쉽다. 내 생각에 참된 스님은 ‘스님다운’ 사람이라거나, ‘부처님 같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에서도 벗어나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맑은 수행자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그러나 그 향기는 '수행자'나 ‘구도자’라는 거창한 이름에서 오는 향기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써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모습에서 온다.
제 스스로 수행자라고 티를 내거나, 스님의 상에 갇혀 거만하고 우쭐거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아무런 한정도 짓지 않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 만족하는 자유로운 사람, 그런 수더분한 사람에게서 되려 참 수행자의 향기는 풍겨 나오는 것이다.
그저 자기 자신이면 되지 거기에 무슨 무슨 상을 덮씌울 것도 없고, '수행자'라느니, '스님'이라느니, '선생님'이라느니, ‘사장’이라느니 하고 이름 붙여 놓고 거기에 제 스스로 갇혀 살 필요는 없지 않겠나.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부모님도 부모로써의 권위를 너무 앞세워 ‘어떻게 하면 부모답게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다운 순수한 삶의 철학과 나다운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설 때 참된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부모라는 권위를 앞세워 자식 앞에 군림하려 하거나, 부모니까 ‘내 자식 내 뜻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권위적인 사회에서 나온 발상일 뿐, 거기에 끌려 갈 필요는 없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좋고 어떤 부모는 나쁘다거나, 어떤 부모님은 100점인데 우리 부모님은 50점도 안 된다거나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어떤 정형화 된 부모로써의 ‘틀’을 세워 놓으니까 그 틀에 맞춰 더 좋거나 더 나쁜, 그리고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생겨나지 그 모든 틀을 던져 버리고 오직 ‘나답게’ 자식을 기르고 가르칠 수 있다면 저마다 온전한 100점짜리 부모가 되는 것이다.
사장도 회장도 부장도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라도 그 지위의 틀 속에만 갇혀서 ‘내가 사장인데’ ‘내가 지휘관인데’ ‘내가 선생님인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얽매여 있다 보면 오히려 그로인해 강박증을 일으키기 쉽다. 나는 나다운 길을 걸을 수 있으면 된다. 어떤 틀에 갇혀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는 길 보다 나다운 모습으로 나답게 일을 해 나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도 더 조화롭고 진리에도 더 합일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에서야 어디 더 놓고 나쁜 것이 있는가. 소나무가 더 좋고 참나무가 더 나쁘다거나, 바다는 좋고 산은 나쁘다거나, 겨울은 좋고 여름은 나쁘다거나 하는 분별이 없다. 소나무가 참나무처럼 넓은 잎을 피우려고 애쓴다거나, 바다가 산처럼 되려고 애쓰거나, 겨울이 여름처럼 따뜻해지려고 한다면 그건 자연의 조화를 깨는 일이고 자기 자신다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떤것이 좋고 나쁜다고 나누는 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생각에서, 분별에서 나온 것일 뿐이지, 본래는 모든 것이 저마다의 모습으로써 완전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으로써 드러난 진리를 꽃피워내는 일이다. 나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겨울이 여름처럼 되고자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런데 요즈음 이따금씩 '수행자' 병에 걸리고, '성직자' 병에, 또 ‘신앙인’ 병에 걸려 있는 어리석은 이들을 본다. 불쑥 불쑥 찾아와서는 자신이 얼마나 수행을 잘 하고 있는지, 절을 참선을 또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자기 자랑삼아 늘어놓거나, 혹은 '수행자처럼' '성직자처럼' 또 '기도 잘 하는 신도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때때로 보게 된다.
때때로 자신 입장에서 보면 수행 안 하는 사람이 참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면서, 혹은 타종교를 믿는 사람이 참 안돼 보인다고 하면서 제 수행과 공부 편력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서 참 수행자는 어떠해야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참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또한 참된 종교인은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이다. 어떤 틀에 갇히지 않은 사람이다. 진리는 일정한 틀을 정해 놓지 않는다. 어떤 틀을 정해 놓고 이대로만 행한다면 진리인데 이 틀을 한 치라도 벗어나면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억압이지 진리의 자유성이 아니다.
수행하면서도 '내가 수행한다'는 그 생각조차 놓고 비우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집착을 버리는 방하착의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스스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한 생각에 걸려 있으면 그 사람은 놓음을 되려 잡고 가는 사람이고, 그것이 오히려 더욱 큰 집착을 가져온다. 놓고 가면서 그 놓는다는 한생각도 다 놓고 가야하고, 수행하면서 수행한다는 그 생각도 다 놓고 가야 한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 안 하는 사람을 볼 때 우쭐한 마음이 생긴다거나 나 잘난 마음이 올라온다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 스스로 수행자라는 틀에 얽매여 있는 어리석고도 위험한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학벌이나 직장 좋은 사람이, 혹은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 스스로 우월감을 가진다거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향해 비웃거나 얕잡아 본다면 그건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상을 내는 것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한다. 수행자라는 것도 하나의 분별심일 뿐, 수행자라는 분별이 있으니 수행자 아닌 사람을 얕보는 마음도 생기고, 나는 수행 안 하는 사람하고는 다르다는 차별의 마음도 생기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수행자다운, 성직자다운, 종교인다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 그저 평범한 내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는 틀이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자답게' 살려고 애쓰고 노력한다면 그 때 우린 참 수행자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구도자답게 사는 것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구처럼도 아니고, 깨달은 사람처럼도 아니며,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고, 어떤 관념의 틀에 사로잡힐 것도 없이 그저 온전한 나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다운 삶일 것이다.
- 법상스님의 글 -
정채호
- 2006.07.05
- 22:40:46
- (*.101.104.184)
책- 부자보다는 잘사는 사람이되라의 저자이며 buda1109@hanmail.net 에 문의를 해보세요....
참자아와 대화를 하면서 차 한잔은 보다 행복이 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