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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란시아서.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 제 132편. 로마에서 머무를 때
7. 로마 근처에서 한 여행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는 로마를 벗어나, 근처의 지역에서 흥미 있는 장소들로 다섯 번 여행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호수들을 찾아보는 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을 가르치기 불가능하다고, 예수는 가니드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수로 여행하는 길에 지각(知覺)없는 한 이방인을 어쩌다가 만났고, 예수가 영적 질문을 토론하도록 자연히 이끄는 대화로 사람을 끌어 내는 평상시의 버릇을 따르지 않아서 가니드는 놀랐다. 어째서 선생이 이 이방인에게 조금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가니드가 물었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 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에 갈급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없었느니라. 도움을 요청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지성의 눈은 혼을 위하여 빛을 받으려고 열려 있지 않았느니라. 그 사람은 구원의 수확을 거두기 위하여 준비가 되지 않았느니라. 생활의 시련(試鍊)과 곤경이 그가 지혜와 상급의 배움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려면 시간을 더 주어야 하느니라. 아니면, 우리와 함께 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에게 보여 줄까 싶고,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우리의 삶에 무척 이끌려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아버지에 대하여 묻게 되리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느니라.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혼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이끌 수 없느니라. 사는 체험을 겪은 결과로서 사람은 진리에 갈급해야 하느니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러한 동료 필사자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신성한 아버지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생활을 봄으로써, 그가 하나님을 알고 싶은 소망을 가져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땅에서 우리의 진정한 할 일은 생활 속에서 아버지가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아버지를 보고서, 우리 생활 속에서 이 방법으로 표현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려고 우리에게 도움을 부탁하리라."
스위스를 방문하는 길에, 산 속에서, 예수는 하루 종일 불교(佛敎)에 대하여 그 부자(父子)와 함께 이야기했다. 여러 번 가니드는 예수에게 붓다에 대하여 직접 물었지만, 언제나 다소 회피하는 대답을 받았다. 이제,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붓다에 관하여 직접 물었고, 솔직한 대답을 얻었다. 고노드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붓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소."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붓다는 불교보다 훨씬 나았소. 붓다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 민족에게 선지자이기까지 했지만, 고아(孤兒) 선지자였소. 그 말은 정말로,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일찍부터 보지 못하였다는 뜻이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 하나님의 사자로서 살고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이 없이 그렇게 했소. 붓다는 안전한 항구 바로 앞까지, 사람의 구원이 있는 피난처의 입구(入口) 바로 앞까지 구원의 배를 안내하였고, 거기서 잘못된 해도(海圖) 때문에, 좋은 배가 땅으로 올라가 버렸소. 거기서 배는 이 여러 세대 동안, 움직이지 않고, 거의 희망 없이 버려졌소. 배 위에 당신 민족의 많은 사람이 여태까지 남아 있었소. 휴식이 있는 안전한 바다에서 소리칠 만큼 가까이 살지만, 선한 붓다의 고귀한 배가 항구(港口) 바로 바깥에서 좌초(坐礁)하는 불행을 만났기 때문에 저희는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이오. 불교를 믿는 민족들은 그 선지자가 만든 철학의 배를 버리고 그의 고귀한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이 항구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이다. 당신의 민족이 붓다의 정신에 충실한 채로 있었다면, 당신은 영적 고요함, 혼의 휴식, 구원의 확신이 있는 피난처로 들어간 지 오래 되었으리이다.
" 보시오, 고노드씨, 붓다는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알았지만, 머리로는 하나님을 뚜렷하게 발견하지 못했소. 유대인들은 머리로 하나님을 발견했지만, 정신적으로 대체로 알지 못했소. 오늘날, 불교도는 하나님 없이 철학 속에서 발버둥치고, 한편 내 민족은 생명과 해방의 철학, 유익한 철학(哲學)이 없이, 불쌍하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노예가 되었소. 당신들은 하나님이 없는 철학을 가졌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졌지만, 대체로 관계된 생활 철학이 없소. 하나님이 영이고 아버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가 한 민족을 변화시키고 한 나라를 높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도덕적 에너지와 영적 추진력(推進力)을 붓다는 가르침 속에서 마련해 주지 못했소."
그리고 나서 가니드가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과 내가 새 종교를, 인도(印度)를 위해서 충분히 좋고, 로마를 위해서 충분히 큰 종교를 만듭시다. 아마도 우리가 그 종교를 야웨 대신에 유대인들에게 팔 수 있겠지요."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의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장하고, 한편 하나님을 동료에게 드러내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땅에 번쩍 나타나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하는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날 밤, 그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뒤에,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마침내 말했다. " 아세요, 아버지, 나는 때때로 요수아가 선지자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아들아, 다른 이도 있단다-"
이 날부터, 나머지 수명(壽命)이 다하기까지, 가니드는 자신의 종교를 계속 발전시켰다. 머리 속에서 그는 예수의 넓은 마음, 공평함과 관대함에 힘차게 감동을 받았다. 철학과 종교에 관하여 가졌던 모든 토론에서, 이 소년은 결코 분개하는 느낌이나 적대하는 반응을 체험하지 않았다.
천상(天上)의 지성 존재들이 얼마나 큰 장면을 바라보는가. 인도인 소년이 한 우주의 창조자에게, 새 종교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이 광경을! 비록 그 젊은이는 알지 못했어도, 바로 그 때 거기서 새롭고 영구한 종교-구원의 길,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는 이 새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소년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실제로 하고 있었다. 지난날에 늘 이와 같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은 상상력, 깨우치고 반성하는 인간의 상상력이 진심으로, 사심 없이,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은 측량할 수 있게 창조성을 가지게 되며,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신성하게 행하려는 필사자의 헌신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큰 일이 일어날까 싶고, 또 일어난다.
7. 로마 근처에서 한 여행
예수와 고노드와 가니드는 로마를 벗어나, 근처의 지역에서 흥미 있는 장소들로 다섯 번 여행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호수들을 찾아보는 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을 가르치기 불가능하다고, 예수는 가니드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수로 여행하는 길에 지각(知覺)없는 한 이방인을 어쩌다가 만났고, 예수가 영적 질문을 토론하도록 자연히 이끄는 대화로 사람을 끌어 내는 평상시의 버릇을 따르지 않아서 가니드는 놀랐다. 어째서 선생이 이 이방인에게 조금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가 가니드가 물었을 때, 예수는 대답했다:
" 가니드야, 그 사람은 진리에 갈급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없었느니라. 도움을 요청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지성의 눈은 혼을 위하여 빛을 받으려고 열려 있지 않았느니라. 그 사람은 구원의 수확을 거두기 위하여 준비가 되지 않았느니라. 생활의 시련(試鍊)과 곤경이 그가 지혜와 상급의 배움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려면 시간을 더 주어야 하느니라. 아니면, 우리와 함께 살도록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생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그에게 보여 줄까 싶고,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우리의 삶에 무척 이끌려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아버지에 대하여 묻게 되리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느니라.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혼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이끌 수 없느니라. 사는 체험을 겪은 결과로서 사람은 진리에 갈급해야 하느니라. 아니면 다른 사람이 그러한 동료 필사자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신성한 아버지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생활을 봄으로써, 그가 하나님을 알고 싶은 소망을 가져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땅에서 우리의 진정한 할 일은 생활 속에서 아버지가 드러나도록 사는 것이라.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아버지를 보고서, 우리 생활 속에서 이 방법으로 표현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려고 우리에게 도움을 부탁하리라."
스위스를 방문하는 길에, 산 속에서, 예수는 하루 종일 불교(佛敎)에 대하여 그 부자(父子)와 함께 이야기했다. 여러 번 가니드는 예수에게 붓다에 대하여 직접 물었지만, 언제나 다소 회피하는 대답을 받았다. 이제,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붓다에 관하여 직접 물었고, 솔직한 대답을 얻었다. 고노드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붓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소."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붓다는 불교보다 훨씬 나았소. 붓다는 위대한 사람이었고, 그 민족에게 선지자이기까지 했지만, 고아(孤兒) 선지자였소. 그 말은 정말로, 영적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일찍부터 보지 못하였다는 뜻이오. 그의 체험은 비극이었소. 하나님의 사자로서 살고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이 없이 그렇게 했소. 붓다는 안전한 항구 바로 앞까지, 사람의 구원이 있는 피난처의 입구(入口) 바로 앞까지 구원의 배를 안내하였고, 거기서 잘못된 해도(海圖) 때문에, 좋은 배가 땅으로 올라가 버렸소. 거기서 배는 이 여러 세대 동안, 움직이지 않고, 거의 희망 없이 버려졌소. 배 위에 당신 민족의 많은 사람이 여태까지 남아 있었소. 휴식이 있는 안전한 바다에서 소리칠 만큼 가까이 살지만, 선한 붓다의 고귀한 배가 항구(港口) 바로 바깥에서 좌초(坐礁)하는 불행을 만났기 때문에 저희는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이오. 불교를 믿는 민족들은 그 선지자가 만든 철학의 배를 버리고 그의 고귀한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이 항구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이다. 당신의 민족이 붓다의 정신에 충실한 채로 있었다면, 당신은 영적 고요함, 혼의 휴식, 구원의 확신이 있는 피난처로 들어간 지 오래 되었으리이다.
" 보시오, 고노드씨, 붓다는 정신적으로 하나님을 알았지만, 머리로는 하나님을 뚜렷하게 발견하지 못했소. 유대인들은 머리로 하나님을 발견했지만, 정신적으로 대체로 알지 못했소. 오늘날, 불교도는 하나님 없이 철학 속에서 발버둥치고, 한편 내 민족은 생명과 해방의 철학, 유익한 철학(哲學)이 없이, 불쌍하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노예가 되었소. 당신들은 하나님이 없는 철학을 가졌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가졌지만, 대체로 관계된 생활 철학이 없소. 하나님이 영이고 아버지인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가 한 민족을 변화시키고 한 나라를 높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도덕적 에너지와 영적 추진력(推進力)을 붓다는 가르침 속에서 마련해 주지 못했소."
그리고 나서 가니드가 외쳤다: "선생이여, 당신과 내가 새 종교를, 인도(印度)를 위해서 충분히 좋고, 로마를 위해서 충분히 큰 종교를 만듭시다. 아마도 우리가 그 종교를 야웨 대신에 유대인들에게 팔 수 있겠지요." 예수는 대답했다.
"가니드야, 종교는 만들어지지 않느니라. 사람의 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성장하고, 한편 하나님을 동료에게 드러내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땅에 번쩍 나타나느니라." 그러나 그들은 이 예언하는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날 밤, 그들이 잠자리에 들어간 뒤에, 가니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했고, 마침내 말했다. " 아세요, 아버지, 나는 때때로 요수아가 선지자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아들아, 다른 이도 있단다-"
이 날부터, 나머지 수명(壽命)이 다하기까지, 가니드는 자신의 종교를 계속 발전시켰다. 머리 속에서 그는 예수의 넓은 마음, 공평함과 관대함에 힘차게 감동을 받았다. 철학과 종교에 관하여 가졌던 모든 토론에서, 이 소년은 결코 분개하는 느낌이나 적대하는 반응을 체험하지 않았다.
천상(天上)의 지성 존재들이 얼마나 큰 장면을 바라보는가. 인도인 소년이 한 우주의 창조자에게, 새 종교를 만들자고 제안하는 이 광경을! 비록 그 젊은이는 알지 못했어도, 바로 그 때 거기서 새롭고 영구한 종교-구원의 길,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드러내는 이 새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소년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실제로 하고 있었다. 지난날에 늘 이와 같았고, 지금도 그렇다. 영적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은 상상력, 깨우치고 반성하는 인간의 상상력이 진심으로, 사심 없이,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은 측량할 수 있게 창조성을 가지게 되며,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신성하게 행하려는 필사자의 헌신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큰 일이 일어날까 싶고, 또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