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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leedj624?Redirect=Log&logNo=10000433955 흘러가는 이에게는 모든 정이 들어와 중심을 타고 흘러 모든 실체에게 흘러간다.
마음은 이미 흐르고, 이미 텅 비어버렸는데 자신이 누구인가가 무엇이 중요한가?
내가 당신에게 칼을 그을때 내가 한 것인가?
내가 한번 하나의 상에게 칼을 그을때 나는 이미 모든 실체에게 칼부림을 당한 후다.
나는 그 칼부림들을 이해한다. 그러기에 모든 실체를 용서한다.
용서란 다른이들의 모든 의지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마음이다.
알면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조화를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화가 창조한 것은 진리 밖에 없다. 진리의 길을 걷다보면 조화가 보인다.
내가 밖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고 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너와 나로써 서로를 마주볼수있는 실체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무를 나무라 이름붙일때 그 나무는 정이 붙어 비로써 의미를 갖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내가 이름붙인것이 아니라 나무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다.
모든 실체가 각 각 자신을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한다. 그러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것이 그들 각 각 자신에게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고, 내가 표현할 수 잇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누구라고 부른다. 그러면 나는 그것이 된다.
나는 그것이 됨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던 안 원하던 말이다.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지 오래다.
안으로는 텅비어 무엇이든 흘러가도록 할 수 있어도 기운을 멈쳐 정을 이루어 그 정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천사이건 악마이건 상관없다. 결국은 스스로 나의 선택의 결정할 문제이지만, 난 선택한다.
그것이 내게 가치가 있는 일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밖으로 분리를 표현함으로써 즉 사랑인 정을 붙임으로써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그것이 우리가 원래 하나로 시작되어서 너와 나로써 서로를 마주보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밖으로 아무리 자신이 하나라고 외쳐본들 그것은 각자 자신의 마음이 이미 하나가 안되었기 때문에
표출하는 것이고, 다른 실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이다.
그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단순한 의미이다.
우리 함께 서로의 마음을 각자가 각 각 모두 스스로 하나가 될 수록 노력할테니 너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용기가 더욱더 생기고, 자신의 마음이 다른 존재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사랑이 통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모든 자신으로부터 남이라 여기는 모든 존재를 향한 바램은 자신을 향한 바램이며,
자신으로부터 나온 그 어떠한 남을 향한 칼부림이나 욕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칼부림이며 욕이다.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결되어 그 정을 즉 그 사랑을 컬뷰람이나 욕을 통하여 연결됨을 느끼려는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
자신은 이미 남에게 칼부림이나 욕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 행위를 알아야 하고, 이해하는데에 있다.
진실로 자신이 체험하게 될 때 비로써 남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칼부림이나 욕을 선택하지 않고, 단지 그 행위자체를 없애려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강증산이 표현한 것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용서란 것에 있다.
그 용서란 것은 지극한 어머니 사랑이다. 모든 실체를 품는 사랑이다.
용서에 희망이 피어나고,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지고,
그것이 연결의 뜻을 앎으로써 진리로 나아가고, 이 진리는 모든 존재가 상생하고자 하는 조화의 뜻이므로,
우리가 언제나 생명이었던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야 했던 것.
이미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야 했던 것.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진실로 사랑한다.
┼ 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온전해지고 제로포인트로 향해가면 완전해진다.
그러나 제로포인트로 가게 되면 그것이 조화가 되어 완전 의지가 사라지게 되고,
단지 진리(마음)의 구조의 본질인 정과 육신의 구조의 본질인 신의 ┼ 의 측면이 지극한
존재함으로써진리와 사랑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조화와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
용서란 것은 사랑안에 나온 하나의 사랑의 형태이다.
마음은 이미 흐르고, 이미 텅 비어버렸는데 자신이 누구인가가 무엇이 중요한가?
내가 당신에게 칼을 그을때 내가 한 것인가?
내가 한번 하나의 상에게 칼을 그을때 나는 이미 모든 실체에게 칼부림을 당한 후다.
나는 그 칼부림들을 이해한다. 그러기에 모든 실체를 용서한다.
용서란 다른이들의 모든 의지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마음이다.
알면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조화를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조화가 창조한 것은 진리 밖에 없다. 진리의 길을 걷다보면 조화가 보인다.
내가 밖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고 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너와 나로써 서로를 마주볼수있는 실체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무를 나무라 이름붙일때 그 나무는 정이 붙어 비로써 의미를 갖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내가 이름붙인것이 아니라 나무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다.
모든 실체가 각 각 자신을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한다. 그러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것이 그들 각 각 자신에게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고, 내가 표현할 수 잇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누구라고 부른다. 그러면 나는 그것이 된다.
나는 그것이 됨으로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던 안 원하던 말이다.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버린지 오래다.
안으로는 텅비어 무엇이든 흘러가도록 할 수 있어도 기운을 멈쳐 정을 이루어 그 정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천사이건 악마이건 상관없다. 결국은 스스로 나의 선택의 결정할 문제이지만, 난 선택한다.
그것이 내게 가치가 있는 일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밖으로 분리를 표현함으로써 즉 사랑인 정을 붙임으로써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그것이 우리가 원래 하나로 시작되어서 너와 나로써 서로를 마주보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밖으로 아무리 자신이 하나라고 외쳐본들 그것은 각자 자신의 마음이 이미 하나가 안되었기 때문에
표출하는 것이고, 다른 실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이다.
그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단순한 의미이다.
우리 함께 서로의 마음을 각자가 각 각 모두 스스로 하나가 될 수록 노력할테니 너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용기가 더욱더 생기고, 자신의 마음이 다른 존재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사랑이 통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모든 자신으로부터 남이라 여기는 모든 존재를 향한 바램은 자신을 향한 바램이며,
자신으로부터 나온 그 어떠한 남을 향한 칼부림이나 욕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칼부림이며 욕이다.
그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결되어 그 정을 즉 그 사랑을 컬뷰람이나 욕을 통하여 연결됨을 느끼려는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
자신은 이미 남에게 칼부림이나 욕을 선택하지 않았어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 행위를 알아야 하고, 이해하는데에 있다.
진실로 자신이 체험하게 될 때 비로써 남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칼부림이나 욕을 선택하지 않고, 단지 그 행위자체를 없애려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강증산이 표현한 것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용서란 것에 있다.
그 용서란 것은 지극한 어머니 사랑이다. 모든 실체를 품는 사랑이다.
용서에 희망이 피어나고,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지고,
그것이 연결의 뜻을 앎으로써 진리로 나아가고, 이 진리는 모든 존재가 상생하고자 하는 조화의 뜻이므로,
우리가 언제나 생명이었던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야 했던 것.
이미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야 했던 것.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진실로 사랑한다.
┼ 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온전해지고 제로포인트로 향해가면 완전해진다.
그러나 제로포인트로 가게 되면 그것이 조화가 되어 완전 의지가 사라지게 되고,
단지 진리(마음)의 구조의 본질인 정과 육신의 구조의 본질인 신의 ┼ 의 측면이 지극한
존재함으로써진리와 사랑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조화와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
용서란 것은 사랑안에 나온 하나의 사랑의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