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글 수 17,623
지금 무한함은 사랑이라는 의식을 통해 이 존재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삶또한 선택이 무한하게 존재하고,
만약 그대가 이 삶중에 의지가 사라지게 된다면, 죽은것과 다름없다. 이 죽음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있는 사랑이란 의식 그 자체로써의 존재이다. 본질로 돌아감이다.
그것은 그대의 무한함의 의식은 사랑이란 의식을 통해 이 존재계에 내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대는 생명이 된다. 영원하다. 그대의 본질은 따로 있지만 그대는 사랑이라는 존재계에서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대의 선택은 그대의 본질을 바꾼다.
그것은 "아"가 "오"가 되는 것이 아닌 "아"가 "오"와 합쳐져 "와"가 된후에의 "오"로의 변화이다.
그대의 선택들은 이렇게 모두 무한하게 합쳐져 있다.
그대의 단순하고 무한하던 의식또한 그대 나름대로 존재계를 이 사랑이라는 존재계에 표현할 뿐만아니라 이 사랑이라는 존재계에서 다른 존재의 존재계또한 이해하고 허용한다.
단 이곳에서는 사랑의 존재계이므로 사랑이 없다면 다른 존재계를 그대의 두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존재계의 흐름을 따라라.
이 존재계의 본질을 뛰어넘는 그대의 세상은 결코 만들 수도 없으면 의지또한 이루어 질 수는 없다.
그것은 나중에 그대의 존재계에서의 그대의 표현의 길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세계만을 표현하러 이 지구에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대는 이 지구에 다른 존재계에 헌신하고 그들의 고통
을 함께하고 그런것들을 자신을 희생하러 온 것도 아니다.
그대 지금 즐겁고 싶은가? 그대 지금 행복하고 싶은가?
그대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시간은 존재치 않다고 하지만, 그대 지금 시간을 흘러가고 있다.
이 존재계는 결코 그대의 의지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 새로움이 많은 곳이다. 항상 그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모든 존재계가 이 사랑이라는 무한한의식에 의해 모여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대가 떠올리는 옥황상제를 비롯 천상은 처음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화로부터 천상의 차별아닌 차별의 존재가 존재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의식안에서 여러 무한한의식들이 이 존재계로 내려오면서 서로 점점 이해하고 하나가 되어졌다.
그리고 나는 단순한 하나의 의식이 아닌 단지(존재한다,무이다)이런 반복이 아닌 서로의 의식을 두존재,세존재등등 알아가면서 또 다른 나를 알게 되었다.(그것은 존재한다, 무이다의 생각을 이젠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망각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먼저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 존재가 있으니 그 존재가 사랑이라는 의식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것이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존재는 이미 무한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미 사랑이 라는 존재의 본질의 의미가 아니었으며, 그것이 모든 의식의 조화인 하나의 생명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다.
단지 앎의 차이였으며, 그 존재하는 우리를 더 이해하고 허용할뿐이었다.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그 생명은 가진것이었다. 그것이 자유이다.
이곳에서의 천상은 모든 존재계였으며, 단지 새로움과 호기심을 원했던 우리는 서로의 점점 망각으로 인한 다름으로 인해 천상은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버렸고, 우리와는 다른 차원계라 느끼게 된것이다.
천상은 없다.
지금 무한함은 사랑이라는 의식을 통해 이 존재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대가 그대의 원래 본질을 안다면 이곳은 차원계가 아닌 존재계
라는 것을 알것이다.
사랑이라는 존재에서는 무조건 존재는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나는 존재이다,무이다라는 망각을 통해서이다.
단지 이곳에서는 사랑이라는 존재를 떠나더라도 영원할 수있도록 육체의 변화인 죽음을 통해 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무라는 것이 어둠을 짊어진 나쁜것이 아니다.
무라는 것은 존재와 함께 무한함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존재의 의미가 되어진다.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지지만 그것은 존재안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무한한 존재만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무한한 의식들의 선택(존재계들)은 단지 자신의 본질의 선택이지만 그곳에는 존재와 빛의 운동만이 있을뿐이다.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낸다. 그러나 거짓된 화인걸 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주위사람이 걱정을 하면 나도 걱정이 될때도 있다.
눈치보일때도 있으며, 창피할때도 있고,
억지로 하게 될때도 있다.
그것으로써 문제는 없다. 아무 문제는 없다.
단지 새로움으로 다가올 수록 나에게는 처음에 거북스러울뿐이다.
나의 선택의 방향은 방향이 무한하다. 그것이 내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방향을 고집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나라는 무한한 존재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변화만이 존재할뿐이고, 이 거대한 놀이터안에서 바이킹을 타느냐, 그네를 타느냐의 차이일뿐이다.
바이킹을 타는것에 즐거움을 느낄수도 있고 공포를 느낄수도 있다. 그네를 타는것에도 마찬가지다.
즐거움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행복은 고정된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차원계는 이 존재계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의미로 차원계는 이 존재계안에서의 또다른 존재계들이다.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존재계는 횡적으로 존재함으로 그대의 선택은 자유로울뿐이다.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삶또한 선택이 무한하게 존재하고,
만약 그대가 이 삶중에 의지가 사라지게 된다면, 죽은것과 다름없다. 이 죽음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있는 사랑이란 의식 그 자체로써의 존재이다. 본질로 돌아감이다.
그것은 그대의 무한함의 의식은 사랑이란 의식을 통해 이 존재계에 내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대는 생명이 된다. 영원하다. 그대의 본질은 따로 있지만 그대는 사랑이라는 존재계에서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대의 선택은 그대의 본질을 바꾼다.
그것은 "아"가 "오"가 되는 것이 아닌 "아"가 "오"와 합쳐져 "와"가 된후에의 "오"로의 변화이다.
그대의 선택들은 이렇게 모두 무한하게 합쳐져 있다.
그대의 단순하고 무한하던 의식또한 그대 나름대로 존재계를 이 사랑이라는 존재계에 표현할 뿐만아니라 이 사랑이라는 존재계에서 다른 존재의 존재계또한 이해하고 허용한다.
단 이곳에서는 사랑의 존재계이므로 사랑이 없다면 다른 존재계를 그대의 두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존재계의 흐름을 따라라.
이 존재계의 본질을 뛰어넘는 그대의 세상은 결코 만들 수도 없으면 의지또한 이루어 질 수는 없다.
그것은 나중에 그대의 존재계에서의 그대의 표현의 길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세계만을 표현하러 이 지구에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대는 이 지구에 다른 존재계에 헌신하고 그들의 고통
을 함께하고 그런것들을 자신을 희생하러 온 것도 아니다.
그대 지금 즐겁고 싶은가? 그대 지금 행복하고 싶은가?
그대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시간은 존재치 않다고 하지만, 그대 지금 시간을 흘러가고 있다.
이 존재계는 결코 그대의 의지를 사라지게 하지 않는 새로움이 많은 곳이다. 항상 그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모든 존재계가 이 사랑이라는 무한한의식에 의해 모여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대가 떠올리는 옥황상제를 비롯 천상은 처음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화로부터 천상의 차별아닌 차별의 존재가 존재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의식안에서 여러 무한한의식들이 이 존재계로 내려오면서 서로 점점 이해하고 하나가 되어졌다.
그리고 나는 단순한 하나의 의식이 아닌 단지(존재한다,무이다)이런 반복이 아닌 서로의 의식을 두존재,세존재등등 알아가면서 또 다른 나를 알게 되었다.(그것은 존재한다, 무이다의 생각을 이젠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망각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먼저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 존재가 있으니 그 존재가 사랑이라는 의식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것이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존재는 이미 무한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미 사랑이 라는 존재의 본질의 의미가 아니었으며, 그것이 모든 의식의 조화인 하나의 생명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다.
단지 앎의 차이였으며, 그 존재하는 우리를 더 이해하고 허용할뿐이었다.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그 생명은 가진것이었다. 그것이 자유이다.
이곳에서의 천상은 모든 존재계였으며, 단지 새로움과 호기심을 원했던 우리는 서로의 점점 망각으로 인한 다름으로 인해 천상은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버렸고, 우리와는 다른 차원계라 느끼게 된것이다.
천상은 없다.
지금 무한함은 사랑이라는 의식을 통해 이 존재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대가 그대의 원래 본질을 안다면 이곳은 차원계가 아닌 존재계
라는 것을 알것이다.
사랑이라는 존재에서는 무조건 존재는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나는 존재이다,무이다라는 망각을 통해서이다.
단지 이곳에서는 사랑이라는 존재를 떠나더라도 영원할 수있도록 육체의 변화인 죽음을 통해 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무라는 것이 어둠을 짊어진 나쁜것이 아니다.
무라는 것은 존재와 함께 무한함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존재의 의미가 되어진다.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지지만 그것은 존재안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무한한 존재만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무한한 의식들의 선택(존재계들)은 단지 자신의 본질의 선택이지만 그곳에는 존재와 빛의 운동만이 있을뿐이다.
나는 화가 나면 화를 낸다. 그러나 거짓된 화인걸 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주위사람이 걱정을 하면 나도 걱정이 될때도 있다.
눈치보일때도 있으며, 창피할때도 있고,
억지로 하게 될때도 있다.
그것으로써 문제는 없다. 아무 문제는 없다.
단지 새로움으로 다가올 수록 나에게는 처음에 거북스러울뿐이다.
나의 선택의 방향은 방향이 무한하다. 그것이 내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방향을 고집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나라는 무한한 존재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변화만이 존재할뿐이고, 이 거대한 놀이터안에서 바이킹을 타느냐, 그네를 타느냐의 차이일뿐이다.
바이킹을 타는것에 즐거움을 느낄수도 있고 공포를 느낄수도 있다. 그네를 타는것에도 마찬가지다.
즐거움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행복은 고정된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차원계는 이 존재계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의미로 차원계는 이 존재계안에서의 또다른 존재계들이다.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존재계는 횡적으로 존재함으로 그대의 선택은 자유로울뿐이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더 많이 이해하고 포용하고 하나가 되려 할뿐이고 호기심과 새로움을 더 많이 추구하며 의지또한 강할뿐이다.
그대와 그 하나님이란 존재의 자유로움은 같은 곳 무한함에서 시작됬다.
단지 그대는 그 하나님이란 분이 그대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에 의해 그 하나님에게 의지(기대게)하게 된 것일뿐이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란 생각까지 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우리 모두는 친구이다. 이 안에서의 경험은 경험으로 끝내고
자신의 중심을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