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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Keats(1795-1821)
BRIGHT STARS! WOULD I WERE STEADEFAST AS THOU ART (1819)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
Not in lone splendor hung aloft the night,
And watching, with eternal lids apart,
Like nature's patient, sleepless Eremite
The moving waters at their priest-like task
Of pure abultion round earth's human shores,
Or gazing on the new soft-fallen mask
Of snow upon the mountains and the moors -
No - yet still steadfast, still unchangeable,
Pillowed upon my fair love's ripening breast,
To feel for ever its soft fall and swell,
Awake for ever in a sweet unrest,
Still, still to hear her tender-taken breath,
And so live ever - or else swoon to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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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795년 존 키츠 출생
[속보, 사회] 2003년 10월 30일 (목) 18:03
[동아일보]
바이런과 셸리, 그리고 키츠.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이들 시인은 모두 요절한 천재의 운명을 타고났다.
바이런과 셸리가 낭만주의의 시발점이 된 ‘슈트롬 운트 드랑(질풍과 노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키츠의 삶은 좀 더 은밀하고 영적(靈的)인 향기로 채워졌다.
바이런이 ‘시단(詩壇)의 나폴레옹’이었다면,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던 셸리가 사회개혁과 인류개조의 이상을 꿈꾸었다면,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후계자였던 키츠는 고전에 뿌리를 두고 지극히 미학적인 예술세계를 지향했다.
바이런의 뜨거운 정열이나 셸리의 웅변에 비해 키츠의 정서는 섬세하면서도 단아했다. 그의 내면은 ‘희랍의 옛 항아리’에서 읊은 것처럼 ‘들리는 멜로디는 달콤하다/그러나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달콤하다’고나 할까.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키츠.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그의 생전은 불우했다.
키츠가 폐결핵으로 숨지기 이태 전에 만난 생애 유일한 사랑 패니 브라운조차 ‘시인의 진정한 뮤즈’는 아니었다.
바람을 맞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에올리언 하프처럼 섬세한 감정을 지닌 시인에게 ‘방종(放縱)에 들뜬’ 연인은 지옥이었다. 그는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패니 때문에 괴로워했다. “사랑의 촉감(觸感)은 기억을 품고 있네/오! 사랑이여/그것을 죽여버리고 자유를 되찾으려면/어떻게 해야 하느냐.”
패니는 생기발랄했다. 진지한 대화를 싫어했으나 재기 넘친 수다와 요염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熱情)은 치명적이었다.
마침내 ‘당신의 아름다움과 나의 죽음의 시간/아, 그 둘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다면…’이라고 노래하는 시인. 그는 1821년 이국땅에서 그녀가 선물로 준 흰색 조약돌을 손에 꼭 쥔 채 쓸쓸히 숨을 거둔다.
키츠의 묘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이렇게 씌어졌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 잠들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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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10월31일)] 키츠
[속보, 생활/문화, 연예] 2003년 10월 30일 (목) 17:45
1795년 10월31일 영국 시인 존 키츠가 런던에서 태어났다. 1821년 로마에서 몰(沒). 키츠의 생애에는 ‘낭만주의 시인’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온갖 상투적 이미지들이 버무려져 있다. 키츠는 우선 가난하게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런던의 마부였다. 키츠는 열네 살에 고아가 되었다.
뒷날 그의 추억을 ‘애도네이스’라는 작품에 담은 퍼시 비슈 셸리를 비롯해 윌리엄 해즐릿, 윌리엄 워즈워스 등 당대 영국의 대표적 문인들과 교분이 있었지만, 키츠는 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한 자신의 출신 성분을 평생괴로워했다. 그는 유일한 사랑이었던 약혼녀 패니 브론과 결국 결혼하지못하고, 25세를 막 넘긴 뒤 이국 땅에서 요절했다.
요컨대 키츠의 생애는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는 19세기 영국 시문학의 순금 부분을 대표한다. 키츠의 생애와 작품들은, 일찍 절필해버린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경우와 더불어, 예술적 역량이 나이와 함께 무르익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예일 것이다. 키츠가 유언으로 남긴 자신의 묘비명은 “여기, 이름을 물위에 새긴 사람이 잠들다”였다.
영국 낭만주의 시의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오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자태여!/ 대리석의 남자와 여자를 섞어 조각한/ 숲의 나뭇가지들과 짓밟힌 잡초로 장식한/ 말 없는 형상이여, 너는 영원이 그런 것처럼/ 우리를생각이 미칠 수 없게 괴롭히는구나, 차가운 목가여/ 노년이 이 세대를 황폐케 할 때/ 너는 우리의 고통과는 다른 괴로움의 한 가운데/ 인간의 친구로 남아 인간에게 말하리/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가 아름다움’이라고, 이것이/ 너희들이 세상에서 아는 전부고 알아야 할 전부니라.” 고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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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키츠의 하얀색 돌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BRIGHT STARS! WOULD I WERE STEADEFAST AS THOU ART (1819)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 -
Not in lone splendor hung aloft the night,
And watching, with eternal lids apart,
Like nature's patient, sleepless Eremite
The moving waters at their priest-like task
Of pure abultion round earth's human shores,
Or gazing on the new soft-fallen mask
Of snow upon the mountains and the moors -
No - yet still steadfast, still unchangeable,
Pillowed upon my fair love's ripening breast,
To feel for ever its soft fall and swell,
Awake for ever in a sweet unrest,
Still, still to hear her tender-taken breath,
And so live ever - or else swoon to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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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795년 존 키츠 출생
[속보, 사회] 2003년 10월 30일 (목) 18:03
[동아일보]
바이런과 셸리, 그리고 키츠.
19세기 초반 낭만주의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이들 시인은 모두 요절한 천재의 운명을 타고났다.
바이런과 셸리가 낭만주의의 시발점이 된 ‘슈트롬 운트 드랑(질풍과 노도)’의 세월을 살았다면 키츠의 삶은 좀 더 은밀하고 영적(靈的)인 향기로 채워졌다.
바이런이 ‘시단(詩壇)의 나폴레옹’이었다면,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던 셸리가 사회개혁과 인류개조의 이상을 꿈꾸었다면,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후계자였던 키츠는 고전에 뿌리를 두고 지극히 미학적인 예술세계를 지향했다.
바이런의 뜨거운 정열이나 셸리의 웅변에 비해 키츠의 정서는 섬세하면서도 단아했다. 그의 내면은 ‘희랍의 옛 항아리’에서 읊은 것처럼 ‘들리는 멜로디는 달콤하다/그러나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 달콤하다’고나 할까.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키츠.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그의 생전은 불우했다.
키츠가 폐결핵으로 숨지기 이태 전에 만난 생애 유일한 사랑 패니 브라운조차 ‘시인의 진정한 뮤즈’는 아니었다.
바람을 맞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에올리언 하프처럼 섬세한 감정을 지닌 시인에게 ‘방종(放縱)에 들뜬’ 연인은 지옥이었다. 그는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패니 때문에 괴로워했다. “사랑의 촉감(觸感)은 기억을 품고 있네/오! 사랑이여/그것을 죽여버리고 자유를 되찾으려면/어떻게 해야 하느냐.”
패니는 생기발랄했다. 진지한 대화를 싫어했으나 재기 넘친 수다와 요염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는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과도한 열정(熱情)은 치명적이었다.
마침내 ‘당신의 아름다움과 나의 죽음의 시간/아, 그 둘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다면…’이라고 노래하는 시인. 그는 1821년 이국땅에서 그녀가 선물로 준 흰색 조약돌을 손에 꼭 쥔 채 쓸쓸히 숨을 거둔다.
키츠의 묘비는 그의 유언에 따라 이렇게 씌어졌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쓴 자 잠들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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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10월31일)] 키츠
[속보, 생활/문화, 연예] 2003년 10월 30일 (목) 17:45
1795년 10월31일 영국 시인 존 키츠가 런던에서 태어났다. 1821년 로마에서 몰(沒). 키츠의 생애에는 ‘낭만주의 시인’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온갖 상투적 이미지들이 버무려져 있다. 키츠는 우선 가난하게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런던의 마부였다. 키츠는 열네 살에 고아가 되었다.
뒷날 그의 추억을 ‘애도네이스’라는 작품에 담은 퍼시 비슈 셸리를 비롯해 윌리엄 해즐릿, 윌리엄 워즈워스 등 당대 영국의 대표적 문인들과 교분이 있었지만, 키츠는 그들에 비해 너무 초라한 자신의 출신 성분을 평생괴로워했다. 그는 유일한 사랑이었던 약혼녀 패니 브론과 결국 결혼하지못하고, 25세를 막 넘긴 뒤 이국 땅에서 요절했다.
요컨대 키츠의 생애는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는 19세기 영국 시문학의 순금 부분을 대표한다. 키츠의 생애와 작품들은, 일찍 절필해버린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경우와 더불어, 예술적 역량이 나이와 함께 무르익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여주는예일 것이다. 키츠가 유언으로 남긴 자신의 묘비명은 “여기, 이름을 물위에 새긴 사람이 잠들다”였다.
영국 낭만주의 시의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오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자태여!/ 대리석의 남자와 여자를 섞어 조각한/ 숲의 나뭇가지들과 짓밟힌 잡초로 장식한/ 말 없는 형상이여, 너는 영원이 그런 것처럼/ 우리를생각이 미칠 수 없게 괴롭히는구나, 차가운 목가여/ 노년이 이 세대를 황폐케 할 때/ 너는 우리의 고통과는 다른 괴로움의 한 가운데/ 인간의 친구로 남아 인간에게 말하리/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가 아름다움’이라고, 이것이/ 너희들이 세상에서 아는 전부고 알아야 할 전부니라.” 고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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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키츠의 하얀색 돌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