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문화가 어떤 원리에 놓여있는지는 자연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 걸쳐서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공통분모 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느림]입니다.
   [느림]이라는 것은 [부드러움]을 동반합니다.

   부드럽지 못한 혁명은 당시만을 놓고 볼 때,
   확연해 보이고, 힘차 보여서, [혁명답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화]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의식입니다.
   혁명이란, 뭔가 거세게 단번에 일어나리라는 느낌,
   여기에는 [폭동]으로 상징될 수 있는 거친 이미지가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인내의 과정]과 [점진적이며 부드러운 창조]는
   우리가 지금 우리의 시공에 설계해 놓은 것들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입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이해한 안목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초월은 이 세상의 시공계를 떠나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닌,
   시간을 따라가는 자신을 떠나
   시간을 따라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이 되는 것이죠.

   지금 이 화면에 직선 하나를 그려보세요.
   직선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그린 당신이 이미 초월 상태일 것입니다.
   아니 그래도, 초월의 상태인데, 초월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 반대의 것에 자신을 가두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린 직선계에서 살고 있으나,
   이제는 그것이 환상이며, 우리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쉽게 지구 밖을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지혜는,
   모든 벌어지는 일들은, 다양한 결과를 위해
   돌진하는 과정으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차원]이라는 대상을 의식함에 있어,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관념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이것이 마치 끝도 없는, 엄청나게 넓은 세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념은 다차원 세계 중 한 차원의 조그마한 구석에 놓인
   자신을 영혼과 동일시하게 만듭니다.
   혼란과 답답함은 여기서 시작되지요.
  
   멀리가지 마세요.
   지금 바로 앞에서 날아다니는 티끌의 움직임도
   [다차원]이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냥 [다차원]입니다.
   삶은 다차원의 설계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이미 모든 차원계에, 모든 시간대에 존재하는 존재들의
   통합된 존재임을 인정하세요.

   벌어진다는 것은 항상 시간문제입니다.
   문제는 어떤 이해에 자신을 맡기는냐이죠.
   더 이상 불분명한 결과에 따라가는 과정이 되지 마세요.
   그냥 결과가 되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처리해야하는 숙제일 수도 있습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닌,
   믿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이해가 중요함을 명심할 때입니다.
  
   Nesara  발표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Nesara를 발표하세요.
   자신의 세계에 그것을 발표하세요.
   그것을 확신하며 그것이 옳다고 느껴지면,
   불분명한 결과를 향해 있는 과정에 놓인 자신을 지우고
   확실한 결과가 지금 되세요.
   그러면, 그것에 맞는 과정을 끌어올 것입니다.

   이 발표가 늦어짐을, 또한 약속 위반(꼭 벌어지는 일들은 약속되지
   않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약속하는 것입니다.)이라고 하여,
   답답해 하며, 안타까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Nesara를 인정하지 않으며, 요구하지도 않으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진술과 다름 없습니다.
   또한, 책임을 특정인물들에게 떠 넘기는 것과 다름 없지요.
   아니면, 그것이 될지 안될지, 장난스럽게 관찰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되세요. 그것이 발표된 세상에 자신을 옮겨놓으세요.
   의식적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사람 있습니까?
   하지만 시도하기를 꺼릴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발견됩니다. 우리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시간관념이 말입니다.
  
   느리고 부드러운 시간의 변화원리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혐오하고 부정하는 것들은 되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이미 우리임을 압니다.
   이것이 망각되기 쉬운 지금의 우리 장소에서는
   그것이 되기에도 바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버릇처럼 기다린다는 것이죠.
   기다린다는 것은 오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의 가능성까지 허락한다는 진술입니다.

   Nesara는 이미 발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발표되지 않음이나 이루어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발표된 결과만이 있지요.
  
   문제는 이러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결과의 과정에 우리가 있느냐입니다.

   사랑스런 기쁨으로 가득찬 우리 시대의 의식혁명은
   혁명의 진실한 미학에 자리잡을 것이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느리고 부드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보다 느리지는 않지요.

   누군가 우리가 공동창조자임을 증명해 보라고 했습니다.
   만약 질문자를 10달의 과정 속에서 창조하고 낳은 질문자의 부모가
   질문자의 [우리] 밖에 있는 존재들이라면
   이것은 거짓이겠지요.

   우리는 달리 말해서 시간입니다. 제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누군가에게 손을 뻗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떨어져 있음이 필요하고 시간은 그것을 벌려놓습니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 마세요.
   시간은 이미 사랑의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보다 [호흡]이라는 말이
   앞으로 더욱 친근해질 것입니다.
   [시간의 맥박]이라는 말처럼
   시간의 창조력을 멋지게 표현한 말도 없는 듯 합니다.
  
   자, 우리의 기쁨에 찬 맥박을 느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