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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경제전략 (Yudaya Keizai Senryaku)
우노 마사미 (Masami Uno)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세력
IMF사태 이후 한국의 증권시장에도 외국인의 바람이 거세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항상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은 외국인의 매입은 언젠가는 반드시 갑자기 철수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정점에 이를 때 사들인 주를 급히 팔아버린다. 그때 주가의 대 폭락이 일어나며 소액투자자인 전국민은 영문도 모른 채 알거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십년전만 해도 서울근교의 땅값이 마구 올랐다. 지금까지 비닐하우스를 하던 땅도 이른바 토지 시세대로 평가하면 몇십 배, 몇백 배나 상승했다. 우리는 땅값이 올라가면 큰돈을 번 것같이 착각을 하게된다. 그렇지만 그 땅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한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땅이다. 이와 같이 금이 뒷받침되지 않는 달러는 단순한 종이조각이지만 한국에 인위적인 이변(IMF)이 일어나자 이 종이조각이 한국의 알짜기업을 매수하고 한국을 억지춘향이로 돈의 노예가 되도록 하고있다.
1997년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동남아와 한국의 외환 난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유태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였다. 즉, 마하티르 수상은 말레이시아의 화폐인 링깃의 급격한 가치 하락은 국제 유태자본의 숨은 음모라고 주장하고, 국제 환 기업인 소로스가 미국 및 국제통화기금(IMF)과 짜고 개혁에 미온적인 태국 경제에 대한 악성루머를 유포시켜 바트화의 가치를 폭락시켰다고 폭로하였다.
유태민족은 기원 후 70년에 나라를 잃은 이래 1948년 이스라엘의 재건까지 1,900년간 박해와 추방의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 고난 속에서 신과 구약성서에 대한 신앙, 자기 민족 재건에 대한 확신 위에 서서, 예술, 문화,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세계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
예를 들면 종교-사상계에는 모세로부터 예수-그리스도, 스피노자, 칼-마르크스, 베르그송, 국부론의 아담-스미스를 들 수 있고 예술계에는 음악가 바그너, 작곡가 멘델스죤, 쇼팡, 화가인 샤갈, 영화배우인 찰리-채플린이 있으며 학계에는 아인슈타인, 독가스 발명자 하버, 법의학자 롬브로조, 정신분석학의 프로이드 등이 있다.
재계에는 영국의 로스차일드, 프랑스의 로칠드, 오스트리아의 호프만슈탈, 미국의 록펠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세계적인 대기업인 록펠러, 모건, 듀폰, 로열더치, GE, GM, ATT, IBM, 보잉, US스틸, 제록스 등도 유태인 자본가들이 이룬 대기업이다.
이와 같이 미국은 1차 산업에서부터 제조, 서비스업까지 유태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으며, 유럽의 로스차일드, 해운왕 오나시스 등 각국에 퍼져 있는 자본력까지 감안하면 세계 경제는 뉴욕의 월가에서 홍콩자본까지 그물 같은 유태 자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북미대륙의 자유경제 블록과 유럽의 경제통합, 아시아의 경제몰락 등은 모두 유태재벌의 입김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미국의 정치에서 유태 커넥션의 영향은 경제, 방위, 문화면에서 더욱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후 미국의 대통령은 유태계 시오니스트나 이스라엘 압력단체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도 이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언제든지 케네디나 닉슨처럼 말로가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루즈벨트정권 이래로 미국의 정책 결정에 크게 관여해 오고 있는 것이다.
전직 배우출신의 대통령 레이건은 1985년 12월 2일 미국 하원의원 연설회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물원에 취직한 사나이가 죽은 고릴라의 후임자가 올 때까지 봉제 옷을 입고 고릴라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누워있는 것도 대단히 지루하므로 구경꾼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늘어져 있는 로프에 매달려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너무 심하게 흔들자 옆에 있는 사자의 울에 떨어져 버렸다. 사자는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겁이 난 가짜 고릴라는 '여기서 내보내 줘요.'하고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하자 사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조용히 해. 떠들면 우리 둘 다 실직하게 될 것이 아닌가.' 종이 고릴라가 되어있는 자신의 울분을 익살스럽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과 유태자본
한반도는 1945년까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철저히 착취당하여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일본문화를 강요당하였다. 게다가 관동(간토오)대지진 때에는 무고하게 대량으로 학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 중에는 50만이 넘은 한국인이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되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인은 식민지 시대에 당했던 이러한 온갖 고통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패전 후 일본이 크게 번영하는데 반하여 한국은 국토가 분단되고 서방측의 군사요충지 역할을 떠 안게 되어 경제발전이 현저히 뒤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전후에도 일본의 번영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듯 외부의 압력으로 계속 짓눌렸던 한국의 내부에는 불을 당기기만 하면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 경제성장에 대한 폭발적인 에너지가 축적되어 갔다. 유태자본은 한국이 일본에 대한 잠재적인 에너지를 끌어내 이를 뒷받침해 줌으로서 뒤늦게나마 한국은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유태자본의 격려를 받은 한국정부가 일본에 대해 기술이전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일본은 기를 쓰고 이를 거부하고 유태자본과 대립하며 타협하여 경제적인 부를 일부 희생하면서 한국에 금융공황을 일으켰다. 이렇듯 한국의 경제발전도 유태인의 경제전략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며 어느 순간 제동을 걸어버리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로서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부터 미국의 전초기지로 미국의 사정에 따라 뒤늦게나마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다가 IMF라는 세계화의 파도에 휩쓸려 경제주권이 국제 투기자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유태인은 2000여 년간 유랑생활을 통하여 싫든 좋든 국제적인 감각과 적응력을 터득한 반면 우리는 오랜 기간 외세와 담을 쌓고 폐쇄적으로 지냈으므로 국제사회에 대한 감각이나 적응 속도가 매우 떨어진다. 또 유태교는 유일신 신앙 아래에서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개념으로 교육시켜 실질적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반면 우리의 오랜 유교전통은 인위적인 위계질서와 형식에 치우쳐 국가나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였다.
가짜 유태인
유태인은 혈통적으로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 아들 야곱의 자손이 진짜 유태인이다. 기원 70년 로마군에 의해 에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그곳에 있었던 유태교 신전은 완전 파괴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버리고 떠났다. 기원 135년에는 발-코호바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유태의 제2전쟁이라고 일컬어진다.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한 전쟁이었지만 도리어 로마군으로부터 가차없는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남아 있었던 소수의 유태인들도 모두 다른 나라로 흩어져갔다. 물론 그들은 로마에 가는 것을 피하고 주로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시대는 흘러 622년, 사라센 제국을 수립한 아랍인들은 유태민족에 대하여 매우 관대했고, 심지어 존경까지도 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평온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많은 유태인들은 점차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그 후 스페인은 유태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스파라디는 이산한 유태인 중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말한다.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한 스파라디는 중세에 세계 유태인의 약 절반을 점했고 라디노어를 사용하며 이슬람 문화와도 동화하는 등 활동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 스페인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던 스파라디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1492년 바로 그 스페인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그 때 이미 강력한 카톨릭국가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서 떠나라 명령하였다. 이때 약 25만 명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다.
이에 반하여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북동 유럽계 유태인으로 옛날 카자르 왕국을 세웠던 터키계 카자르인의 자손이다. 카자르 지방은 남러시아의 평원을 말한다. 8세기 경 이 광대한 초원에서 터키계의 사람들, 즉 카자르족이 상인, 직인, 무사로서 살았다. 이 무렵 카자르 왕국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보통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면 어느 강한 쪽의 세력을 선택하지만 카자르 왕은 용케도 양쪽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유태교로 개종하였다.
만약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교가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며, 반대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면 이슬람교도가 불쾌해 할 것이다. 그러나 양파가 다같이 예언자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인종적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유태인이 된다면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 양파로부터의 증오를 잘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전 국민들이 개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태교를 국교로 삼은 결과, 수십 년 내에 민족 전체가 유태교도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자기들은 혈통적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유태의 가면을 쓴 셈이다.
카자르 왕국은 9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965년 우크라이나 스비아토스라브 왕의 침략을 받고 몰락했다. 그후 아시아로부터 온 몽골군이 유럽으로 원정을 하자 그들은 몽골의 대군을 피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 등의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구성하여 카자르 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서 생활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유태교를 믿는 종교집단이지 유태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아리안족의 발상지인 코카서스로부터 왔던 것이다. 유전학적으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 아니고 백인계로서 셈족계열이 아니다. 셈족 계열은 스파라디나 아랍인 등이다. 그렇지만 이들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을 우리는 진짜 유태인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 전 유태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대 박해(포그롬)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을 전환점으로 하여 유태인들의 국제주의 추세는 강렬한 기세로 유럽 전토를 휩쓸었다. 각지에서 그들과 민족이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충돌이 이어졌다. 19세기초에는 유럽전역에 약 330만 명의 유태인구가 있었다. 이들의 중심무대는 오늘날처럼 미국이 아니라 동구, 그 중에서도 폴란드였다. 그리고 러시아에도 많은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대 박해(포그롬)가 있을 당시 중-동부 유럽 아슈케나지는 650만 명에 육박하였으며 홀로코스트(대학살) 바로 직전인 1939년 유럽의 유태인구는 약 850만 명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러시아의 유태인들은 심한 학대를 받고 있었다. 공직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이동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짜르 압제하의 밑바닥에서 억눌려 살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 군비부족에 허덕이던 일본의 국채를 인수하여 당시의 돈으로 2억 달러를 빌려준 사람은 아슈케나지 유태인 시프였다. 그는 돈으로 일본 군인들의 피와 목숨을 사서, 일본을 러시아와 충돌시킴으로서 러시아 정부를 손상시켜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도록 도와주려 하였다. 그 혁명은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해방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 망명중인 트로츠키에게 혁명자금을 주고 노르웨이 배로 그를 뉴욕에서 핀란드로 보냈다. 또한 미국의 참전을 늦추어 러시아 혁명을 돕고 연합국 측에 대량의 탄약과 무기, 식량 등을 매각하여 거액의 부까지 얻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에게도 너무나도 거대한 적이었다. 그래서 독일 황제 카이제르는 함부르그의 유태계 재벌과 결탁하여 러시아 볼쉐비키 지도자 레닌을 봉인열차로 페테스부르그에 보냈다. 이와같이 러시아혁명은 그 배후에서 짜르의 탄압하에 있는 동포를 구하려는 유태세력에 의해 크게 지원 받았다. 러시아 혁명의 중추세력은 모두 유태인으로 혁명의 중심인물 50명중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해 44명이 유태인이었다. 노동자의 단결, 피지배 계급의 타도, 그리고 노동자 독재국가의 수립, 러시아에 있어서의 유태인은 바로 마르크스가 그려낸 그 노동자요, 피지배 계급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계급투쟁 이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착취당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착취하고 있는 부르주아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착취의 정황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으며, 그리하여 러시아를 비롯해서 온 세계에 마르크스의 이론이 실행되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 세계가 공산화되면 누가 다스릴 것인가? 결국 새로운 계급이 나오게 될 것이다. 공산혁명의 실상은 계급투쟁이론을 실천함으로서 세계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그 위에 유태인들이 세계정부를 세워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다.
아슈케나지 유태인 블루멘솔은 1929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주 최근에 우리 유태민족은 새로운 예언자를 세계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두 개의 얼굴과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로스차일드이며, 그는 전세계 자본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칼-마르크스이다. 그는 자본가들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이다." 이 둘은 어느 쪽도 다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같다. 한쪽은 부를 지배함으로서 위로부터, 다른 한쪽은 혁명에 의해 밑으로부터 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결국 그 둘은 똑같은 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 경제, 정보 등에 있어 세계가 하나가 되었을 때 누가 그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레닌이나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시스템은 한 국가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규모로 달성된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이다. 그러나 그루지아 출신의 스탈린은 그 생각에 맞서 국가 사회주의를 제창하였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유태인의 일부는 타협하고 일부는 학살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인질과 다름없는 상태로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국내에 억류되었다.
홀로코스트(대학살)
세계 제1차대전 후의 독일은 초 인플레, 막대한 배상금, 대공황의 모진 비바람, 방대한 차관의 일시불, 550만 명으로 급증한 실업자, 그 한편에서 나라의 경제를 지배 조작하는 것으로 부를 늘려오기만 했던 유태계 자본가들... 더 이상의 방법이 없을 것 같던 비참한 상황에서 독일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1933년 히틀러는 독일인의 피와 땀의 결정은 독일인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실업자의 해소였다. 지난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게르만의 왕국, 거기다 비스마르크가 통일한 독일, 그처럼 뛰어난 독일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히틀러는 국가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독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때 독일의 민족 이익을 지키려는 독일의 국가주의 세력과 유태인과의 사이에 큰 충돌이 생겼다. 금세기에 있은 인류의 3대 학살사건이라면 1915년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75-80년간 있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그리고 2차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들 수 있다. 이때 나치에게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들은 거의 아슈케나지였다. 희생된 사람들은 아슈케나지 뿐만 아니라 집시와 아시아계의 러시아인이 많았다. 유럽의 유태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대과제로 생각한 히틀러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히틀러는 공산체제의 구 소련, 이 공산체제를 주도적으로 세운 유태인 그리고 슬라브족, 이 세 가지 요소를 없애려 유럽 각국에서 잡아온 유태인, 집시, 공산주의자 및 노약자(비유태인) 등을 대량 학살하였다. 중세기부터 시작된 기독교사회의 유태인 박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이번의 홀로코스트(대학살)만큼 그 규모나 잔혹성이 두드러진 적은 없었다.
이러한 행태는 독일에서 만의 일이 아니었다. 세계 제1의 인권국가라고 자처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위시한 모든 유럽 국가들도 그들을 박해하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자이고 금권정치의 대가인 로스차일드도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살 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독일인 어린이를 만나면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유대인들이 유럽 각지에서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박해 당하였다.
그러면 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독일이나 러시아, 동유럽에서 그 땅의 주민들과 충돌했는가? 그것은 그들 종교의 근본이 되는 탈무드가 원인이다. 유태교는 구약성서를 토대로 그 성서를 알기 쉽게 풀이했는데, 그것을 탈무드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탈무드를 실제로 읽어보면 구약성서와 탈무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충돌은 탈무드에 있었다. 탈무드에 따른 유태인의 우위의식이 생활이나 상업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일에서 그처럼 박해를 받은 것은 성공한 일에 너무 신바람이 나서 유태인이 독일의 일에 지나치게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너무 기분을 내다보면 주변이 보이지 않고 다른 민족이 유태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며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는 것이다.
유태인을 탈무드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탈무드적인 인간이었기에 유태인은 성공할 수 있었다. 키신저는 탈무드적인 인간이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도 역시 그랬다. 탈무드적 인간이었다는 데 성공의 비밀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올 21세기에도 탈무드적인 인간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유태인임을 포기한 아슈케나지 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이스라엘의 적으로 간주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으므로 그들이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렵게 되어 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스파라디 유태인은 친척관계이다. 왜냐하면 다같이 조상 아브라함이 직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8년의 6일전쟁의 결과 그 스파라디들도 아랍세계에 있을 수 없어 부득이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았던 그 정든 땅과 이별하고 이스라엘로 향했던 것이다. 스파라디가 유태인들을 주도한다면 그들은 혈통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공존 공영하여 왔으므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스파라디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도 가난하여 아슈케나지의 하층을 이루고 있어 영향력이 크게 떨어진다.
제2의 가나안 땅 미국
유럽은 현대 문화, 문명의 발상지이며 역사도 오래된 말하자면 거인의 나라들이다. 미국은 유럽에서 가난에 시달리던 이들이 몰려가서 자리잡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의 유태인의 역사는 지금부터 320년 전에 시작되지만 이주자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태인이 많은 나라이다. 1890년부터 1924년까지 불과 35년 동안 러시아와 동구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슈케나지 유태인은 약 2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민 초기에는 게딱지같은 집에 두 세 가족이 빼곡하게 몰려 살며 한 개뿐인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에 유대인들이 크게 몰리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제2차 대전 직후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폴란드와 구 소련 땅에 무려 6백여만 명이 밀집돼 있어 전 유럽에 60% 정도가 살았다. 이른바 쉰들러-리스트가 횡행했던 시절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태인들은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여 대부분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3D업종에 종사했다. 유태인 봉급자의 3분의2가 봉제업에 종사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주일간 뼈빠지게 일해봤자 손에 쥐는 돈은 남자는 6달러, 여자는 3-5달러였다. 장사도 저가품 위주였다. 이들 유태인들은 미국 시장에 잡화, 인조보석 등 값싼 물건을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탈무드는 구약성서보다 유태인이 더욱 중요시하는 경전이다. 특히 오늘날 전 세계 유태인의 70%를 차지하는 아슈케나지에게 탈무드는 거의 독보적인 교육, 신앙서로 인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즉 지력과 재력을 간직하는 것만이 유태인이 생존해갈 수 있는 절대조건이었다. 국가, 민족, 계급, 지위 등 인간의 개별적 속성을 넘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치 그것이 지식과 돈이었던 것이다.
만일 유태인들이 유럽과 미국에 분산 이주하지 않았다면, 근대 자본주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비즈니스 재능이 십이분 발휘할 시기가 찾아온 것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20세기의 미국에서였다. 여기에서는 돈벌이 자체가 선이다. 유태민족이 자본주의 챔피언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00만 유태인들 중, 약 600만 명이 세계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 살고 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거대한 독점자본가들의 그룹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의 거대한 독점자본가 그룹의 상위 5개 기업이 유태계 자본이다.
유태인의 세계적인 영향력은 인구와는 전혀 비례하지 않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초대국 미국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세계도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 그들은 오늘날 온 세계에 흩어져 정치, 경제, 금융, 학술, 문화예술, 영상산업, 정보산업, 유통 등에 커다란 힘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 이 종교집단의 향방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 또한 모든 나라에 돈을 대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들의 뜻대로 국가를 손에 넣을 수가 있다. 이미 중요한 은행, 전세계의 어음, 모든 정부의 신용은 우리의 수중에 있다.' 유태인 랍비 레이콘의 말이다.
로스차일드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났다. 제1대의 마이야-암세르-로스차일드는 아들이 5형제가 있었다. 그는 아들들을 모두 어릴적부터 상인으로 철저하게 훈련시킨 다음, 당시의 유럽 5대 도시에 배치했다. 5대 도시는 프라크푸르트, 비엔나, 나폴리, 파리, 그리고 런던이었다. 5형제는 모두 각 도시에서 금융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로스차일드가는 돈을 꿔주는 입장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더욱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되었고, 강력한 세력으로 중앙은행을 지배했다. 로스차일드가의 금융 지배력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FRB(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통해서였다.
연방 준비은행은 상업어음의 재할인이나 공개시장의 조작으로 각 지구의 금융통제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 전체의 금융통제이다. 따라서 백악관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언제나 사립은행의 집합체인 FRB로부터 돈을 빌려 썼고 그 결과 FRB에 의해 컨트롤되는 오늘의 상태가 빚어지게 되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오늘날 FRB가 공정수수료를 얼마만큼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일희일비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FRB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금융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FRB는 지금 직접적으로 록펠러가 지배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는 창설자 로스차일드가 있다.
매스컴이라고 말하면 흔히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일을 공평하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려우나 미국의 신문, 잡지, TV의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 또는 유태인 문제가 미국의 국내문제와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미국 전 국민의 정서와 합치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최소한 정치권이나 언론은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다. 또한 선거에서 필요한 공통적 요소는 후원금과 언론의 지원이다. 많은 미국 시민은 국내, 외 정치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성향을 보이고 있음으로 유태로비로서는 주요 언론을 통해 일단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면 대다수 미국 국민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고 이는 또한 유태로비의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된다.
닉슨, 카터, 부시, 클린턴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선될 때 유태계의 적극적 또는 부분적 지지를 받았거나 아니면 취임 초기에 유태계와의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미국 대통령, 나아가서는 세계의 대통령이란 위치를 인식하여 계속 충실한 이스라엘의 일방적 후원자가 되는 대신 세계의 대통령다운 명분있는 역사적 업적을 이루려 하였다. 명분있는 업적을 이루려면 사고나 정책의 편향성은 배제되어야 하므로 자연 친유태 일변도의 성향은 지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 내 강력한 유태로비의 반감을 샀으며 우연하게도 모두 정치적으로 불운한 결과를 맞았다. 이들은 재선 문턱에서 좌절(카터, 부시)하거나 또는 재선된 임기중 시련(닉슨, 클린턴)을 겪었다.
유태문제는 민감한 것이라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터부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이 터부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단지 무지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유태인이 미국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고만 말해도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그룹은 그 사람을 바로 재판소에 고소할 수 있다. 세계화시대에 한국이 이 세계의 터부를 알지 못한다면 국제사회라는 깊은 물 속에 빠져 익사할 것이다. 하지만 터부를 터부로 알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는 있다.
이스라엘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그 공로자는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이었다. 그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개간을 위해 옮겨 온 사람들도 아슈케나지 유태인이었다. 당시 러시아로부터 왔던 사람들 중에는 데이비드-벤구리온과 골다-메이어도 있었다. 이들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이상을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에서 옷이나 음식물은 아주 값싸고 사회보장제도도 잘 되어있다. 그 유명한 키부츠라는 공동 집단농장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재건은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다. 거기에 로스차일드 등 미국이나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이 돈을 투자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4백60여만 명의 유태인이 살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이 두 나라는 유태인 생활의 양대 축인 셈이다. 본토 이스라엘이 전통을 보존하는 일을 맡는다면 미국은 본토 밖에서 전세계 유태인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워싱턴이 아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다. 미국은 세계인구의 1/1000밖에 안되는 이스라엘에 미국 대외원조의 1/5을 할애한다. 경제, 군사적 지원과 아울러 외교적 지원은 거의 절대적이다.
유태인들은 자기의 생존과 민족의 존속을 그들의 가치추구의 2대 명제로 삼아왔고, 경제활동의 기본으로 추구해 왔다. 즉, 비즈니스란 절대로 돈벌이만이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다. 그들은 중세 그리스도교도가 절대로 금기시하였던 돈놀이, 징세인, 국왕, 귀족의 재산관리인, 유통업 등의 직업으로 사람들의 반감과 원망을 한 몸에 받아왔다. 특권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최대의 특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비밀리에 돈을 움직이는 기술, 국왕이나 귀족의 개인적, 가정적 비밀을 장악함으로서 배후에서 국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유태인 부자가 병에 걸렸다.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가장 충직한 한 노예에게 유언을 구술하여 유언장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나는 이 유언장을 내 자식에게 전해줄 충직한 노예에게 전 재산을 준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는 나의 재산 중에서 한가지만 자기가 선택한 것을 주기로 한다." 부자가 죽자 노예는 유언장을 랍비에게 보였다. 랍비는 노예와 함께 아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언장에는 모든 재산을 이 노예에게 준다고 했고, 당신에게는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한 것을 주겠다고 되어 있어요. 당신은 무엇을 고르시겠소?" 그러자 그 아들이 말했다. "저는 이 노예를 선택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들은 노예를 상속받고 그 노예가 상속한 전 재산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째서 이와같은 번거로운 수속을 통해서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시켰을까? 일부러 이와같은 유언장을 남긴 것은 아버지가 이 이방인 노예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가 죽으면 노예는 재산을 자기 멋대로 처분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세계 경제지배
냉전시대 미국과 구소련의 지도자들에 속해있던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서로 혈통의 고리가 맺어져 항상 열린 터널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미국에서 원폭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 기술은 곧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의 터널을 통해 비밀리에 소련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소련도 원폭개발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수폭, 운반수단, 미사일, 끝내는 우주경쟁 등, 이렇게 하여 유태인의 연출로 공포심이 일어나고 미-소는 방대한 자금을 무기개발에 아낌없이 소비하고 끝없는 군비확대경쟁에 제정신을 잃어갔다. 이렇게 터널을 통해 교환되는 정보로 양 초강대국은 서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세계 정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다음의 5가지이다. 즉, (1) 세계 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지배, (2) 세계의 에너지 석유시장 지배, (3) 세계 식량시장의 지배, (4) 세계 금융시장의 지배, (5) 세계의 정보 통신의 발신원과 정보 통신망의 지배이다. 이미 금융, 정보통신, 석유, 곡물, 그리고 미국 정부등 이 5가지를 지배하고 있는 국제 유태자본은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막강한 이면국가로서 있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시온주의자 유태인의 세계 지배의 연출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환란이다. 미국의 은행들은 국제 네트워크 체제, 순이익, 유로시장에의 점유율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은행의 최대 5개 은행가운데 체이스맨하탄과 J..P. 모건의 유태재벌이 직영하고 있고 뱅커 아메리카는 영국의 최대 유태재벌인 로스차일드와 제휴하여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또 월 스트리트에 본거지를 둔 투자은행도 최대의 돈줄인 메린-린치를 비롯 솔로몬-브러더스, 모건-스탄제이, 파스트-보스톤 등이 모두 유태자본 경영이다. 한마디로 유태인은 세계 최대의 자금조달과 운용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금융시장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태자본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은행이 지배하고 있다. 현재 아시아의 민족국가에 대하여 이러 저러한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둘째는 에너지의 위기이다. 세계의 에너지원의 중심인 석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오일 메이저이다. 이들 각사는 옛날부터 유태재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엑슨, 모빌, 스탠다드는 록펠러가가 지배하고 걸프는 메론가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록펠러가의 소카르에게 매수되었다. 로열-더치-쉘은 로스차일드가와 그리고 텍사코는 노리스가가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영국의 브리티시-페트로리엄은 국책회사인데 역시 유태자본의 큰 영향하에 있다. 한 나라의 혁명이나 내란에 미 CIA가 개입해 온 것처럼 유가변동에도 그런 공작이 있었다. 미국의 정치, 경제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유태자본이라면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유위기의 연출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셋째는 곡물기근이다. 세계에서 일기예보가 가장 정확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많은 기상관측 위성을 띄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곡물메이저가 1년 앞의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은 확실한 정보를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입수하는 까닭에 그들은 기근에 대하여 미리 무슨 수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기근이 세계를 휩쓸었을 때 사람들은 공평한 분배를 부르짖으며 세계적인 힘을 가진 어떤 기관이 설립될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곡물을 정기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4나라 즉,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그리고 호주이다. 이들 나라의 곡물을 5개의 메이저가 지배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의 수중에 있다. 이중 확실히 유태계로 알려진 것이 콘티넨탈-그레인, 카길, 루이-드레픽스 등의 3개다. 특히 콘티넨탈-그레인과 카길사는 미국 곡물수출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그 긴 고난의 역사를 거치면서 곡물, 식료를 쥐는 자가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아니라 식량을 충분히 주지 않고 항상 배고픈 상태로 놔두는 것이다. 입에 넣을 음식이 없다는 상황만큼 사람들을 착란상태로 빠뜨리게 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과도 타협할 수 있다. 지구는 이상기후가 계속되고 있다. 아마 연출되는 지도 모른다. 곡물메이저 및 그 배후에 있는 세계지배의 몽상가들은 물론 이것을 잘 알 것이다.
출처 - http://jsyang2.com.ne.kr/
우노 마사미 (Masami Uno)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세력
IMF사태 이후 한국의 증권시장에도 외국인의 바람이 거세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항상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은 외국인의 매입은 언젠가는 반드시 갑자기 철수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정점에 이를 때 사들인 주를 급히 팔아버린다. 그때 주가의 대 폭락이 일어나며 소액투자자인 전국민은 영문도 모른 채 알거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십년전만 해도 서울근교의 땅값이 마구 올랐다. 지금까지 비닐하우스를 하던 땅도 이른바 토지 시세대로 평가하면 몇십 배, 몇백 배나 상승했다. 우리는 땅값이 올라가면 큰돈을 번 것같이 착각을 하게된다. 그렇지만 그 땅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한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땅이다. 이와 같이 금이 뒷받침되지 않는 달러는 단순한 종이조각이지만 한국에 인위적인 이변(IMF)이 일어나자 이 종이조각이 한국의 알짜기업을 매수하고 한국을 억지춘향이로 돈의 노예가 되도록 하고있다.
1997년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동남아와 한국의 외환 난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유태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였다. 즉, 마하티르 수상은 말레이시아의 화폐인 링깃의 급격한 가치 하락은 국제 유태자본의 숨은 음모라고 주장하고, 국제 환 기업인 소로스가 미국 및 국제통화기금(IMF)과 짜고 개혁에 미온적인 태국 경제에 대한 악성루머를 유포시켜 바트화의 가치를 폭락시켰다고 폭로하였다.
유태민족은 기원 후 70년에 나라를 잃은 이래 1948년 이스라엘의 재건까지 1,900년간 박해와 추방의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 고난 속에서 신과 구약성서에 대한 신앙, 자기 민족 재건에 대한 확신 위에 서서, 예술, 문화, 경제, 정치 등 각 분야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세계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
예를 들면 종교-사상계에는 모세로부터 예수-그리스도, 스피노자, 칼-마르크스, 베르그송, 국부론의 아담-스미스를 들 수 있고 예술계에는 음악가 바그너, 작곡가 멘델스죤, 쇼팡, 화가인 샤갈, 영화배우인 찰리-채플린이 있으며 학계에는 아인슈타인, 독가스 발명자 하버, 법의학자 롬브로조, 정신분석학의 프로이드 등이 있다.
재계에는 영국의 로스차일드, 프랑스의 로칠드, 오스트리아의 호프만슈탈, 미국의 록펠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세계적인 대기업인 록펠러, 모건, 듀폰, 로열더치, GE, GM, ATT, IBM, 보잉, US스틸, 제록스 등도 유태인 자본가들이 이룬 대기업이다.
이와 같이 미국은 1차 산업에서부터 제조, 서비스업까지 유태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으며, 유럽의 로스차일드, 해운왕 오나시스 등 각국에 퍼져 있는 자본력까지 감안하면 세계 경제는 뉴욕의 월가에서 홍콩자본까지 그물 같은 유태 자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북미대륙의 자유경제 블록과 유럽의 경제통합, 아시아의 경제몰락 등은 모두 유태재벌의 입김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미국의 정치에서 유태 커넥션의 영향은 경제, 방위, 문화면에서 더욱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전후 미국의 대통령은 유태계 시오니스트나 이스라엘 압력단체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들도 이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언제든지 케네디나 닉슨처럼 말로가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루즈벨트정권 이래로 미국의 정책 결정에 크게 관여해 오고 있는 것이다.
전직 배우출신의 대통령 레이건은 1985년 12월 2일 미국 하원의원 연설회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물원에 취직한 사나이가 죽은 고릴라의 후임자가 올 때까지 봉제 옷을 입고 고릴라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누워있는 것도 대단히 지루하므로 구경꾼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늘어져 있는 로프에 매달려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너무 심하게 흔들자 옆에 있는 사자의 울에 떨어져 버렸다. 사자는 침입자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겁이 난 가짜 고릴라는 '여기서 내보내 줘요.'하고 큰소리로 구원을 요청하자 사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조용히 해. 떠들면 우리 둘 다 실직하게 될 것이 아닌가.' 종이 고릴라가 되어있는 자신의 울분을 익살스럽게 말하려 했던 것이다.
한국과 유태자본
한반도는 1945년까지 36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철저히 착취당하여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일본문화를 강요당하였다. 게다가 관동(간토오)대지진 때에는 무고하게 대량으로 학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 중에는 50만이 넘은 한국인이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되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인은 식민지 시대에 당했던 이러한 온갖 고통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패전 후 일본이 크게 번영하는데 반하여 한국은 국토가 분단되고 서방측의 군사요충지 역할을 떠 안게 되어 경제발전이 현저히 뒤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전후에도 일본의 번영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듯 외부의 압력으로 계속 짓눌렸던 한국의 내부에는 불을 당기기만 하면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 경제성장에 대한 폭발적인 에너지가 축적되어 갔다. 유태자본은 한국이 일본에 대한 잠재적인 에너지를 끌어내 이를 뒷받침해 줌으로서 뒤늦게나마 한국은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유태자본의 격려를 받은 한국정부가 일본에 대해 기술이전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일본은 기를 쓰고 이를 거부하고 유태자본과 대립하며 타협하여 경제적인 부를 일부 희생하면서 한국에 금융공황을 일으켰다. 이렇듯 한국의 경제발전도 유태인의 경제전략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며 어느 순간 제동을 걸어버리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로서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부터 미국의 전초기지로 미국의 사정에 따라 뒤늦게나마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다가 IMF라는 세계화의 파도에 휩쓸려 경제주권이 국제 투기자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유태인은 2000여 년간 유랑생활을 통하여 싫든 좋든 국제적인 감각과 적응력을 터득한 반면 우리는 오랜 기간 외세와 담을 쌓고 폐쇄적으로 지냈으므로 국제사회에 대한 감각이나 적응 속도가 매우 떨어진다. 또 유태교는 유일신 신앙 아래에서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개념으로 교육시켜 실질적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반면 우리의 오랜 유교전통은 인위적인 위계질서와 형식에 치우쳐 국가나 민족의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였다.
가짜 유태인
유태인은 혈통적으로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 아들 야곱의 자손이 진짜 유태인이다. 기원 70년 로마군에 의해 에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그곳에 있었던 유태교 신전은 완전 파괴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버리고 떠났다. 기원 135년에는 발-코호바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유태의 제2전쟁이라고 일컬어진다.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한 전쟁이었지만 도리어 로마군으로부터 가차없는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남아 있었던 소수의 유태인들도 모두 다른 나라로 흩어져갔다. 물론 그들은 로마에 가는 것을 피하고 주로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시대는 흘러 622년, 사라센 제국을 수립한 아랍인들은 유태민족에 대하여 매우 관대했고, 심지어 존경까지도 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평온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많은 유태인들은 점차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그 후 스페인은 유태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스파라디는 이산한 유태인 중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말한다.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한 스파라디는 중세에 세계 유태인의 약 절반을 점했고 라디노어를 사용하며 이슬람 문화와도 동화하는 등 활동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 스페인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던 스파라디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1492년 바로 그 스페인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그 때 이미 강력한 카톨릭국가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서 떠나라 명령하였다. 이때 약 25만 명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다.
이에 반하여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북동 유럽계 유태인으로 옛날 카자르 왕국을 세웠던 터키계 카자르인의 자손이다. 카자르 지방은 남러시아의 평원을 말한다. 8세기 경 이 광대한 초원에서 터키계의 사람들, 즉 카자르족이 상인, 직인, 무사로서 살았다. 이 무렵 카자르 왕국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보통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면 어느 강한 쪽의 세력을 선택하지만 카자르 왕은 용케도 양쪽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유태교로 개종하였다.
만약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교가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며, 반대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면 이슬람교도가 불쾌해 할 것이다. 그러나 양파가 다같이 예언자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인종적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유태인이 된다면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 양파로부터의 증오를 잘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전 국민들이 개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태교를 국교로 삼은 결과, 수십 년 내에 민족 전체가 유태교도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자기들은 혈통적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유태의 가면을 쓴 셈이다.
카자르 왕국은 9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965년 우크라이나 스비아토스라브 왕의 침략을 받고 몰락했다. 그후 아시아로부터 온 몽골군이 유럽으로 원정을 하자 그들은 몽골의 대군을 피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 등의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구성하여 카자르 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서 생활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유태교를 믿는 종교집단이지 유태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아리안족의 발상지인 코카서스로부터 왔던 것이다. 유전학적으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 아니고 백인계로서 셈족계열이 아니다. 셈족 계열은 스파라디나 아랍인 등이다. 그렇지만 이들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을 우리는 진짜 유태인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 전 유태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대 박해(포그롬)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을 전환점으로 하여 유태인들의 국제주의 추세는 강렬한 기세로 유럽 전토를 휩쓸었다. 각지에서 그들과 민족이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충돌이 이어졌다. 19세기초에는 유럽전역에 약 330만 명의 유태인구가 있었다. 이들의 중심무대는 오늘날처럼 미국이 아니라 동구, 그 중에서도 폴란드였다. 그리고 러시아에도 많은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대 박해(포그롬)가 있을 당시 중-동부 유럽 아슈케나지는 650만 명에 육박하였으며 홀로코스트(대학살) 바로 직전인 1939년 유럽의 유태인구는 약 850만 명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러시아의 유태인들은 심한 학대를 받고 있었다. 공직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이동조차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짜르 압제하의 밑바닥에서 억눌려 살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 군비부족에 허덕이던 일본의 국채를 인수하여 당시의 돈으로 2억 달러를 빌려준 사람은 아슈케나지 유태인 시프였다. 그는 돈으로 일본 군인들의 피와 목숨을 사서, 일본을 러시아와 충돌시킴으로서 러시아 정부를 손상시켜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도록 도와주려 하였다. 그 혁명은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해방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 망명중인 트로츠키에게 혁명자금을 주고 노르웨이 배로 그를 뉴욕에서 핀란드로 보냈다. 또한 미국의 참전을 늦추어 러시아 혁명을 돕고 연합국 측에 대량의 탄약과 무기, 식량 등을 매각하여 거액의 부까지 얻었다.
당시 러시아는 독일에게도 너무나도 거대한 적이었다. 그래서 독일 황제 카이제르는 함부르그의 유태계 재벌과 결탁하여 러시아 볼쉐비키 지도자 레닌을 봉인열차로 페테스부르그에 보냈다. 이와같이 러시아혁명은 그 배후에서 짜르의 탄압하에 있는 동포를 구하려는 유태세력에 의해 크게 지원 받았다. 러시아 혁명의 중추세력은 모두 유태인으로 혁명의 중심인물 50명중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해 44명이 유태인이었다. 노동자의 단결, 피지배 계급의 타도, 그리고 노동자 독재국가의 수립, 러시아에 있어서의 유태인은 바로 마르크스가 그려낸 그 노동자요, 피지배 계급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계급투쟁 이론으로부터 시작한다. 착취당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는 착취하고 있는 부르주아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착취의 정황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으며, 그리하여 러시아를 비롯해서 온 세계에 마르크스의 이론이 실행되어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 세계가 공산화되면 누가 다스릴 것인가? 결국 새로운 계급이 나오게 될 것이다. 공산혁명의 실상은 계급투쟁이론을 실천함으로서 세계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그 위에 유태인들이 세계정부를 세워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이다.
아슈케나지 유태인 블루멘솔은 1929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주 최근에 우리 유태민족은 새로운 예언자를 세계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두 개의 얼굴과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로스차일드이며, 그는 전세계 자본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칼-마르크스이다. 그는 자본가들이 파괴하고 싶어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창자이다." 이 둘은 어느 쪽도 다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같다. 한쪽은 부를 지배함으로서 위로부터, 다른 한쪽은 혁명에 의해 밑으로부터 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결국 그 둘은 똑같은 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 경제, 정보 등에 있어 세계가 하나가 되었을 때 누가 그 세계를 통치할 것인가?
레닌이나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시스템은 한 국가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주의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규모로 달성된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사상이다. 그러나 그루지아 출신의 스탈린은 그 생각에 맞서 국가 사회주의를 제창하였다.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유태인의 일부는 타협하고 일부는 학살되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인질과 다름없는 상태로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국내에 억류되었다.
홀로코스트(대학살)
세계 제1차대전 후의 독일은 초 인플레, 막대한 배상금, 대공황의 모진 비바람, 방대한 차관의 일시불, 550만 명으로 급증한 실업자, 그 한편에서 나라의 경제를 지배 조작하는 것으로 부를 늘려오기만 했던 유태계 자본가들... 더 이상의 방법이 없을 것 같던 비참한 상황에서 독일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1933년 히틀러는 독일인의 피와 땀의 결정은 독일인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실업자의 해소였다. 지난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게르만의 왕국, 거기다 비스마르크가 통일한 독일, 그처럼 뛰어난 독일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히틀러는 국가 사회주의를 제창하고 독일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때 독일의 민족 이익을 지키려는 독일의 국가주의 세력과 유태인과의 사이에 큰 충돌이 생겼다. 금세기에 있은 인류의 3대 학살사건이라면 1915년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75-80년간 있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그리고 2차대전 중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을 들 수 있다. 이때 나치에게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들은 거의 아슈케나지였다. 희생된 사람들은 아슈케나지 뿐만 아니라 집시와 아시아계의 러시아인이 많았다. 유럽의 유태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기 위한 최대과제로 생각한 히틀러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히틀러는 공산체제의 구 소련, 이 공산체제를 주도적으로 세운 유태인 그리고 슬라브족, 이 세 가지 요소를 없애려 유럽 각국에서 잡아온 유태인, 집시, 공산주의자 및 노약자(비유태인) 등을 대량 학살하였다. 중세기부터 시작된 기독교사회의 유태인 박해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이번의 홀로코스트(대학살)만큼 그 규모나 잔혹성이 두드러진 적은 없었다.
이러한 행태는 독일에서 만의 일이 아니었다. 세계 제1의 인권국가라고 자처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위시한 모든 유럽 국가들도 그들을 박해하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자이고 금권정치의 대가인 로스차일드도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에서 살 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독일인 어린이를 만나면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유대인들이 유럽 각지에서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박해 당하였다.
그러면 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독일이나 러시아, 동유럽에서 그 땅의 주민들과 충돌했는가? 그것은 그들 종교의 근본이 되는 탈무드가 원인이다. 유태교는 구약성서를 토대로 그 성서를 알기 쉽게 풀이했는데, 그것을 탈무드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탈무드를 실제로 읽어보면 구약성서와 탈무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충돌은 탈무드에 있었다. 탈무드에 따른 유태인의 우위의식이 생활이나 상업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일에서 그처럼 박해를 받은 것은 성공한 일에 너무 신바람이 나서 유태인이 독일의 일에 지나치게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너무 기분을 내다보면 주변이 보이지 않고 다른 민족이 유태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지도 못하며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는 것이다.
유태인을 탈무드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탈무드적인 인간이었기에 유태인은 성공할 수 있었다. 키신저는 탈무드적인 인간이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도 역시 그랬다. 탈무드적 인간이었다는 데 성공의 비밀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올 21세기에도 탈무드적인 인간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유태인임을 포기한 아슈케나지 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이스라엘의 적으로 간주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으므로 그들이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어렵게 되어 가는 이유는 바로 이런 까닭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스파라디 유태인은 친척관계이다. 왜냐하면 다같이 조상 아브라함이 직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8년의 6일전쟁의 결과 그 스파라디들도 아랍세계에 있을 수 없어 부득이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았던 그 정든 땅과 이별하고 이스라엘로 향했던 것이다. 스파라디가 유태인들을 주도한다면 그들은 혈통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공존 공영하여 왔으므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스파라디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도 가난하여 아슈케나지의 하층을 이루고 있어 영향력이 크게 떨어진다.
제2의 가나안 땅 미국
유럽은 현대 문화, 문명의 발상지이며 역사도 오래된 말하자면 거인의 나라들이다. 미국은 유럽에서 가난에 시달리던 이들이 몰려가서 자리잡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의 유태인의 역사는 지금부터 320년 전에 시작되지만 이주자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이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태인이 많은 나라이다. 1890년부터 1924년까지 불과 35년 동안 러시아와 동구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슈케나지 유태인은 약 2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민 초기에는 게딱지같은 집에 두 세 가족이 빼곡하게 몰려 살며 한 개뿐인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에 유대인들이 크게 몰리기 시작한 것은 세계 제2차 대전 직후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폴란드와 구 소련 땅에 무려 6백여만 명이 밀집돼 있어 전 유럽에 60% 정도가 살았다. 이른바 쉰들러-리스트가 횡행했던 시절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태인들은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여 대부분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3D업종에 종사했다. 유태인 봉급자의 3분의2가 봉제업에 종사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1주일간 뼈빠지게 일해봤자 손에 쥐는 돈은 남자는 6달러, 여자는 3-5달러였다. 장사도 저가품 위주였다. 이들 유태인들은 미국 시장에 잡화, 인조보석 등 값싼 물건을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탈무드는 구약성서보다 유태인이 더욱 중요시하는 경전이다. 특히 오늘날 전 세계 유태인의 70%를 차지하는 아슈케나지에게 탈무드는 거의 독보적인 교육, 신앙서로 인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즉 지력과 재력을 간직하는 것만이 유태인이 생존해갈 수 있는 절대조건이었다. 국가, 민족, 계급, 지위 등 인간의 개별적 속성을 넘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치 그것이 지식과 돈이었던 것이다.
만일 유태인들이 유럽과 미국에 분산 이주하지 않았다면, 근대 자본주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비즈니스 재능이 십이분 발휘할 시기가 찾아온 것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20세기의 미국에서였다. 여기에서는 돈벌이 자체가 선이다. 유태민족이 자본주의 챔피언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00만 유태인들 중, 약 600만 명이 세계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 살고 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거대한 독점자본가들의 그룹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의 거대한 독점자본가 그룹의 상위 5개 기업이 유태계 자본이다.
유태인의 세계적인 영향력은 인구와는 전혀 비례하지 않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초대국 미국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세계도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 그들은 오늘날 온 세계에 흩어져 정치, 경제, 금융, 학술, 문화예술, 영상산업, 정보산업, 유통 등에 커다란 힘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 이 종교집단의 향방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 또한 모든 나라에 돈을 대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들의 뜻대로 국가를 손에 넣을 수가 있다. 이미 중요한 은행, 전세계의 어음, 모든 정부의 신용은 우리의 수중에 있다.' 유태인 랍비 레이콘의 말이다.
로스차일드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났다. 제1대의 마이야-암세르-로스차일드는 아들이 5형제가 있었다. 그는 아들들을 모두 어릴적부터 상인으로 철저하게 훈련시킨 다음, 당시의 유럽 5대 도시에 배치했다. 5대 도시는 프라크푸르트, 비엔나, 나폴리, 파리, 그리고 런던이었다. 5형제는 모두 각 도시에서 금융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로스차일드가는 돈을 꿔주는 입장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더욱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되었고, 강력한 세력으로 중앙은행을 지배했다. 로스차일드가의 금융 지배력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FRB(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통해서였다.
연방 준비은행은 상업어음의 재할인이나 공개시장의 조작으로 각 지구의 금융통제를 맡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 전체의 금융통제이다. 따라서 백악관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언제나 사립은행의 집합체인 FRB로부터 돈을 빌려 썼고 그 결과 FRB에 의해 컨트롤되는 오늘의 상태가 빚어지게 되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오늘날 FRB가 공정수수료를 얼마만큼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일희일비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FRB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금융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FRB는 지금 직접적으로 록펠러가 지배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는 창설자 로스차일드가 있다.
매스컴이라고 말하면 흔히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일을 공평하게 전달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말하기 어려우나 미국의 신문, 잡지, TV의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 또는 유태인 문제가 미국의 국내문제와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미국 전 국민의 정서와 합치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최소한 정치권이나 언론은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다. 또한 선거에서 필요한 공통적 요소는 후원금과 언론의 지원이다. 많은 미국 시민은 국내, 외 정치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성향을 보이고 있음으로 유태로비로서는 주요 언론을 통해 일단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면 대다수 미국 국민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고 이는 또한 유태로비의 성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된다.
닉슨, 카터, 부시, 클린턴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당선될 때 유태계의 적극적 또는 부분적 지지를 받았거나 아니면 취임 초기에 유태계와의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미국 대통령, 나아가서는 세계의 대통령이란 위치를 인식하여 계속 충실한 이스라엘의 일방적 후원자가 되는 대신 세계의 대통령다운 명분있는 역사적 업적을 이루려 하였다. 명분있는 업적을 이루려면 사고나 정책의 편향성은 배제되어야 하므로 자연 친유태 일변도의 성향은 지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 내 강력한 유태로비의 반감을 샀으며 우연하게도 모두 정치적으로 불운한 결과를 맞았다. 이들은 재선 문턱에서 좌절(카터, 부시)하거나 또는 재선된 임기중 시련(닉슨, 클린턴)을 겪었다.
유태문제는 민감한 것이라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터부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이 터부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단지 무지일 뿐이다. 미국에서는 유태인이 미국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고만 말해도 아슈케나지 유태인의 그룹은 그 사람을 바로 재판소에 고소할 수 있다. 세계화시대에 한국이 이 세계의 터부를 알지 못한다면 국제사회라는 깊은 물 속에 빠져 익사할 것이다. 하지만 터부를 터부로 알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는 있다.
이스라엘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그 공로자는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이었다. 그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개간을 위해 옮겨 온 사람들도 아슈케나지 유태인이었다. 당시 러시아로부터 왔던 사람들 중에는 데이비드-벤구리온과 골다-메이어도 있었다. 이들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이상을 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에서 옷이나 음식물은 아주 값싸고 사회보장제도도 잘 되어있다. 그 유명한 키부츠라는 공동 집단농장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재건은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의 땀과 노력의 결과다. 거기에 로스차일드 등 미국이나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이 돈을 투자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4백60여만 명의 유태인이 살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이 두 나라는 유태인 생활의 양대 축인 셈이다. 본토 이스라엘이 전통을 보존하는 일을 맡는다면 미국은 본토 밖에서 전세계 유태인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워싱턴이 아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다. 미국은 세계인구의 1/1000밖에 안되는 이스라엘에 미국 대외원조의 1/5을 할애한다. 경제, 군사적 지원과 아울러 외교적 지원은 거의 절대적이다.
유태인들은 자기의 생존과 민족의 존속을 그들의 가치추구의 2대 명제로 삼아왔고, 경제활동의 기본으로 추구해 왔다. 즉, 비즈니스란 절대로 돈벌이만이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다. 그들은 중세 그리스도교도가 절대로 금기시하였던 돈놀이, 징세인, 국왕, 귀족의 재산관리인, 유통업 등의 직업으로 사람들의 반감과 원망을 한 몸에 받아왔다. 특권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최대의 특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비밀리에 돈을 움직이는 기술, 국왕이나 귀족의 개인적, 가정적 비밀을 장악함으로서 배후에서 국가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떤 유태인 부자가 병에 걸렸다. 그는 죽을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가장 충직한 한 노예에게 유언을 구술하여 유언장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나는 이 유언장을 내 자식에게 전해줄 충직한 노예에게 전 재산을 준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는 나의 재산 중에서 한가지만 자기가 선택한 것을 주기로 한다." 부자가 죽자 노예는 유언장을 랍비에게 보였다. 랍비는 노예와 함께 아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언장에는 모든 재산을 이 노예에게 준다고 했고, 당신에게는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한 것을 주겠다고 되어 있어요. 당신은 무엇을 고르시겠소?" 그러자 그 아들이 말했다. "저는 이 노예를 선택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들은 노예를 상속받고 그 노예가 상속한 전 재산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째서 이와같은 번거로운 수속을 통해서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시켰을까? 일부러 이와같은 유언장을 남긴 것은 아버지가 이 이방인 노예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가 죽으면 노예는 재산을 자기 멋대로 처분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세계 경제지배
냉전시대 미국과 구소련의 지도자들에 속해있던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서로 혈통의 고리가 맺어져 항상 열린 터널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미국에서 원폭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 기술은 곧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의 터널을 통해 비밀리에 소련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소련도 원폭개발에 성공하였다. 이어서 수폭, 운반수단, 미사일, 끝내는 우주경쟁 등, 이렇게 하여 유태인의 연출로 공포심이 일어나고 미-소는 방대한 자금을 무기개발에 아낌없이 소비하고 끝없는 군비확대경쟁에 제정신을 잃어갔다. 이렇게 터널을 통해 교환되는 정보로 양 초강대국은 서로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세계 정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다음의 5가지이다. 즉, (1) 세계 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지배, (2) 세계의 에너지 석유시장 지배, (3) 세계 식량시장의 지배, (4) 세계 금융시장의 지배, (5) 세계의 정보 통신의 발신원과 정보 통신망의 지배이다. 이미 금융, 정보통신, 석유, 곡물, 그리고 미국 정부등 이 5가지를 지배하고 있는 국제 유태자본은 세계 정치와 경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막강한 이면국가로서 있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 시온주의자 유태인의 세계 지배의 연출은 3가지가 있다. 첫째는 환란이다. 미국의 은행들은 국제 네트워크 체제, 순이익, 유로시장에의 점유율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은행의 최대 5개 은행가운데 체이스맨하탄과 J..P. 모건의 유태재벌이 직영하고 있고 뱅커 아메리카는 영국의 최대 유태재벌인 로스차일드와 제휴하여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또 월 스트리트에 본거지를 둔 투자은행도 최대의 돈줄인 메린-린치를 비롯 솔로몬-브러더스, 모건-스탄제이, 파스트-보스톤 등이 모두 유태자본 경영이다. 한마디로 유태인은 세계 최대의 자금조달과 운용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금융시장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태자본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은행이 지배하고 있다. 현재 아시아의 민족국가에 대하여 이러 저러한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둘째는 에너지의 위기이다. 세계의 에너지원의 중심인 석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오일 메이저이다. 이들 각사는 옛날부터 유태재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엑슨, 모빌, 스탠다드는 록펠러가가 지배하고 걸프는 메론가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록펠러가의 소카르에게 매수되었다. 로열-더치-쉘은 로스차일드가와 그리고 텍사코는 노리스가가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영국의 브리티시-페트로리엄은 국책회사인데 역시 유태자본의 큰 영향하에 있다. 한 나라의 혁명이나 내란에 미 CIA가 개입해 온 것처럼 유가변동에도 그런 공작이 있었다. 미국의 정치, 경제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유태자본이라면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유위기의 연출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셋째는 곡물기근이다. 세계에서 일기예보가 가장 정확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많은 기상관측 위성을 띄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곡물메이저가 1년 앞의 날씨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은 확실한 정보를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입수하는 까닭에 그들은 기근에 대하여 미리 무슨 수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기근이 세계를 휩쓸었을 때 사람들은 공평한 분배를 부르짖으며 세계적인 힘을 가진 어떤 기관이 설립될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곡물을 정기적으로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4나라 즉,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그리고 호주이다. 이들 나라의 곡물을 5개의 메이저가 지배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의 수중에 있다. 이중 확실히 유태계로 알려진 것이 콘티넨탈-그레인, 카길, 루이-드레픽스 등의 3개다. 특히 콘티넨탈-그레인과 카길사는 미국 곡물수출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그 긴 고난의 역사를 거치면서 곡물, 식료를 쥐는 자가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아니라 식량을 충분히 주지 않고 항상 배고픈 상태로 놔두는 것이다. 입에 넣을 음식이 없다는 상황만큼 사람들을 착란상태로 빠뜨리게 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과도 타협할 수 있다. 지구는 이상기후가 계속되고 있다. 아마 연출되는 지도 모른다. 곡물메이저 및 그 배후에 있는 세계지배의 몽상가들은 물론 이것을 잘 알 것이다.
출처 - http://jsyang2.com.ne.kr/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지구상에서 통용되는 미화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 중앙은행의 공식 명칭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FRB: Board of Governors of Federal Reserve System)’이다. 우리나라가 조폐창을 통해 원화 지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FRB의 존재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면 미국 정부에 예속된 공기관 성격의 은행이 아닌 개인 사설 은행이다. 제3세계의 약소국의 중앙은행도 아니고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FRB. 세계의 경찰이라 불리는 초유일 강대국 미국은 아이러니 하게도 FRB로부터 돈을 빌려쓰고 있는 채무국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FRB는 국제금융재벌이 운영하는 개인 소유 은행이지만 형식적으로 FRB 의장을 지명하는 권한은 미국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FRB가 사유 재산임을 직시하면 미국 정부가 그 경영인을 임의로 바꿀 권한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 대통령이 FRB 의장을 지명하는 것은 겉치레일뿐 실상 신임 FRB 의장의 선임 권한은 FRB 내부 이사회를 통해 결정된다. 미국 대통령은 거저 짜여져 있는 절차에 따라 공식적인 발표를 대신해주는 대변인, 즉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FRB 설립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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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미국 정부가 FRB 설립을 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용인하기까지는 설립을 막기 위한 역대 정치인들의 노력과 설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은행가들의 암투로 얼룩져 있다. FRB를 설립한 금융자본은 겉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인 J.P모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유럽의 금융재벌들이 80%에 가까운 지분을 나눠 독점하고 있다. FRB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럽의 금융재벌들은 영국은행, 프랑스은행을 통합한 유럽연합(EU)의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소유주이기도 하다. FRB는 바로 유럽의 거대한 국제금융재벌이 장악한 사설 금융기업이다.
미국이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막대한 유럽의 사설 금융자본재벌은 미국 경제권을 사유화하기 위해 부단한 로비와 정치인들을 매수하는 금권 조직을 총동원해왔다. 경제의 중점이라 할 수 있는 은행은 선(先)침투 대상이었다.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정부의 권한에 맞먹는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시도했다.
그 연대기를 살펴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다분히 음모적이고, 처절할 정도로 집요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일부는 유럽의 거대 금융자본조직의 유혹을 뿌리치고, 개인이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끈질기게 싸웠다.
최초의 미국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킨 미국 독립의 선각자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4대), 앤드류 잭슨(7대), 아브라함 링컨(16대), 존.F.케네디(35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총알 한방 쏘지 않고 사설 중앙은행을 설립해 미국을 송두리째 삼키려 하는 거대 금융자본조직의 모든 불합리한 수단과 방법을 물거품으로 만들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앞장섰다. 따라서 이 문제에 개입한 미국 대통령들은 항상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고, 대부분 비극적인 종말을 맞아야 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음에도 이들 미국 대통령들이 개인 소유의 사설 중앙은행이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갖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는 동일했다.
1832년 제7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당시 미국의 통화발행권을 관장했던 사설 중앙은행이었던 ‘미국 제2은행’에 대해 “우리 정부의 이익금이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8백만 이상의 은행 주식을 외국인(유럽 금융자본조직)이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것이어야 할 은행의 구조가 오히려 우리의 자유와 독립성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회의 돈을 관리하면서 우리 국민의 자주성을 ‘외국인이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적에게 막강한 군사력이 있는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일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골고루 적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부자나 가난한자를 공평하게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런 자격이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미국 경제와 국권이 달린 화폐 발행처인 중앙은행이 개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노력은 막강한 부를 이용해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총동원한 국제금융재벌조직에 의해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금융자본을 원천적으로 소유하려 했던 국제금융재벌조직은 독립전쟁 중 군수물자로 거부(巨富)가 된 R. 모리스(현 J.P모건의 창업자)를 내세워 1781년 ‘북미은행(The Bank of North America)’을 설립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북미은행이 무너지자 재차 제1미국은행(1790년)-제2미국은행(1816년)을 다시 설립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벌였다.
이러한 미국 정부와의 반대에 부딪히는 과정을 거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한 결과, 1913년에 연방준비지급법안이 의회를 통과되면서 마침내 미국 화폐를 발행하는 사설 중앙은행인 FRB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는 곧 미국 정부와 화폐발행권을 둘러싸고 벌인 팽팽한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도 했다.
FRB는 금권 통치를 기나긴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듯 사설 중앙은행 설립을 반대했던 프랭클린, 제퍼슨, 매디슨, 잭슨, 링컨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을 전리품처럼 미국 달러 지폐에 새겨 넣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통화발행권을 쥔 FRB에게 돈을 빌어다 쓰고 갚아야 하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1981년에 1조 달러였던 미국의 빚은 18년만인 1998년 말경 6조 달러로 늘어났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천문학적 빚을 갚기 위해 FRB의 눈치를 살피며 오히려 지배당하고 있는 처지다.
1907년 대공황과 FRB 탄생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5년 10월 24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올해 1월 말로 임기를 마감한 앨런 그린스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왼쪽)이 참석한 가운데 새 FRB의장에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의 지명을 발표하고 있다. www.whitehouse.gov
190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890년에 제정된 ‘셔먼독점금지법’을 부활시켰다. 셔먼독점금지법은 뉴욕을 중심으로 전미지역에 경제독점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J.P모건을 견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법은 1890년 7월에 제정된 미국 최초의 독점금지법으로 미국 내 주 단위 및 외국과의 금융거래와 상업의 독점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시 루즈벨트는 이 법으로 유럽에서 J.P모건으로 유입되는 M.A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의 자본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국 내 금융자본이 유럽의 거대금융자본조직과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을 상대로 반격에 나선 J.P모건은 미국 정부를 속이고 고의적으로 대공황을 유도했고, J.P모건과 M.A 로스차일드 그룹은 이 사건을 발단으로 미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다시금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밑 작업을 암암리에 벌여 나갔다.
당시 미국의 소규모 은행들은 과다한 대출로 지급준비금의 1%도 안 되는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고객이 1백 달러를 은행에 맡겼을 때 1달러 정도만 되돌려 줄 능력이 없었다. 이같은 상황을 악용해 거대 은행 J.P모건은 미국 내 대부분의 은행들이 파산직전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여론은 J.P모건의 생각대로 적중해 은행에 돈을 맡긴 민간이 자금을 회수하려는 시도가 빗발쳤고 결국 시중의 일반은행들은 일제히 도산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때 J.P모건이 나서 금융권의 안정화를 위한 중앙은행 설립을 주창했다. 정치권과 학계, 언론을 매수해 동조하는 여론을 형성했다. 그 결과 1907년 미 의회는 경제 공황의 원인 조사를 위해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ly Commission)’라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 위원회는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2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앙은행 등을 대상으로 운영방식과 소유 지분에 대한 벤치마킹에 들어갔다. 이들 유럽의 중앙은행들은 이미 M.A로스차일드 금융재벌이 몇몇 개인 금융재벌과 손잡고 소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올드리치 의원은 이를 본뜬 사설 중앙은행 설립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M.A로스차일드 금융조직의 지시를 받던 J.P모건이 이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FRB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올드리치’ 법안은 사설 중앙은행에 대해 최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연방정부의 직속 기관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명칭이 ‘연방지급준비금법안’으로 변경돼 의회에 상정됐다.
FRB 조직은 미전역을 보스턴, 필라델피아, 뉴욕, 클리블랜드, 리치먼드, 애틀랜타,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미니애폴리스, 캔자스시티, 댈러스, 샌프란시스코 등 12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FRB 본점에는 이를 대표할 7명의 이사진을 선출해 여기서 추대된 대표 회장 1명에게 관리책임을 맡겼다.
FRB 본점에 있는 7명의 이사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하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14년이고, 일단 임명된 이사와 대표회장은 어느 누구도 해고할 수 없다. 새 이사의 임명 터울은 2년이다.
연방 정부의 감사도 받지 않는 FRB
FRB의 위력을 전 세계적으로 실감하게 만들었던 전임 FRB의장 앨런 그린스펀.
세상은 한때 그를 ‘세계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렀다. 그의 말 한마디에 뉴욕 월스트리트는 물론 전 세계 증권가가 요동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 달러의 통화량을 마음대로 조절할 권한을 가진 그는 그야말로 세계 금융시장의 황제였으며, 세계의 초유일 강대국 미국 대통령도 간섭할 수 없는 전 세계의 경제대통령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FRB 의장의 힘이 이 정도로 비대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1920~1931년까지 미 하원 금융통화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한 루이스 맥파든 의원은 “국제 금융가와 국제 산업가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세계를 노예화시키는 ‘초(超)국가가 바로 FRB”라며 맹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다. 그는 FRB의 소유주가 ‘국제 금융가’라는 점을 주지시키며 그들이 미국인이 아닌 유럽인이라고 폭로했다.
또 1960년대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의원장을 지낸 라이트 패트먼 의원 역시 “오늘날 미국에는 사실상 2대의 정부가 존재한다. 하나는 헌법상 정식으로 만들어진 정부이고, 또 하나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누구와도 협조하지 않는 독립적인 정부이다. 그 정부는 바로 의회가 헌법에 따라 관리해야 할 미국의 화폐를 가지고 마음먹은 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연방지급준비제도이사회(FRB)”라고 말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정부는 지금도 FRB를 감사할 권한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FRB가 한해 소모하는 예산과 지출이 얼마이며, 어디에 사용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미 의회에서 끊임없이 감사의 칼을 들이대려 할 때마다 FRB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한 로비와 법적 수단을 동원해 이를 막아왔다.
이 같이 막대한 금권을 이용해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그 중심에 FRB가 있다. 오랜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금융자본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FRB 지하금고에는 막대한 량의 금괴들이 쌓여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국의 달러를 금덩어리와 동일한 가치라고 신봉하게 만들어 놓고 유통시키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미국의 지폐는 자신들이 찍어내는 것이기에 쌓아둘 공간조차 아까운 한낱 종이에 불과한 것이다.
FRB뿐만 아니라 EU의 유럽중앙은행(ECB)를 소유하고 세계를 움직이는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하는 국제금융자본조직. 그 정체를 파헤친 수십, 수백 권에 달하는 역사서와 기록들 속에는 그들의 출발이 환전꾼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 미루어 FRB의 실제 주인은 미국 태생의 3대 금융가(家)인 록펠러, 골드만삭스, 레먼을 포함해 유럽의 국제금융그룹인 M.A 로스차일드, 와벅, 라자드, 쿤룹, 시프 등으로 알려져 있다.
고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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