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천유전에서 밝아오는 석유부국의 여명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08년 3월 22일

<차례>
1. 동아시아 최대의 원유저장지
2. 산유국의 꿈을 실현한 숙천유전
3. 누가 유전개발사업을 가로막았는가?
4. 유전개발전망이 아직 불투명한 까닭
5. 통일된 나라는 석유부국이다

1. 동아시아 최대의 원유저장지

1998년 10월 27일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방북길에 오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기자들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가고 있었다.

기자 - "김정일 총비서를 언제 만나 무슨 얘기를 할 예정인가?"

정 회장 -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 남북경제협력에 도움이 될 여러 가지를 의논할 생각이다.

특히 북한연안에서 석유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석유를 남북이 협력하여 개발해 모두 풍요롭고 유복한 시대를 맞기 바란다."

당시 여든 세 살이었던 노자본의 머리 속에서는 유전개발의 꿈이 맴돌고 있었다. 정주영이 머리 속에 그렸던 유전개발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가 북측의 유전을 개발하는 사업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까닭은, 한 해 전인 1997년 10월 북(조선)이 일본 도쿄에서 개최한 '조선유전 공식설명회'를 통하여 깜짝 놀랄만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설명회에는 현대그룹은 물론 한국석유개발공사와 엘쥐(LG)그룹도 관계자를 파견한 바 있었다.

북측이 그 설명회에서 공개한 것은 1996년 여름에 작성한 유전개발에 관한 영문보고서이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현재 1만3천 평방km에 이르는 서조선만 분지에 원유시추공 13개를 뚫었고, 2천 평방km에 이르는 안주 분지에는 원유시추공 세 개를 뚫었으며, 3천500 평방km에 이르는 동조선만 분지에는 원유시추공 두 개를 뚫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북측이 원유매장량을 최소 588억2천400만 배럴에서 최대 735억3천만 배럴로 추정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1997년 1월 2일) 1997년 9월 캐나다 캔텍(Kantech)사는 서조선만 분지에 400억-500억 배럴의 원유가 묻혀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북(조선)에 관해서 편파적 보도에 익숙한 남측언론들은 북측의 원유매장량을 12억 배럴이니 50억 배럴이니 하면서 터무니없이 축소하여 보도한 바 있다.

동남아시아 최대 산유국인 인도네시아의 원유매장량이 50억 배럴이고, 중국이 자랑하는 발해만 유전의 매장량이 150억 배럴인데, 북측의 원유매장량이 최소 500억 배럴 이상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세계 석유공급망을 쥐락펴락하는 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는 6개 산유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릿연합,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오만인데, 그 나라들의 원유매장량을 보면 이렇다.

세계에서 원유매장량이 가장 많은 사우디아라비아는 2천643억 배럴이고, 쿠웨이트가 990억 배럴, 아랍에미릿연합이 970억 배럴이다.

중동 산유국이라 해도 카타르의 원유매장량은 150억 배럴, 오만은 50억 배럴밖에 되지 않는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내놓은 2006년도 세계 산유국 순위에서 9위에 오른, 라틴아메리카의 최대 산유국 베네주엘라의 원유매장량은 800억 배럴이다.

북(조선)의 원유매장량이 북(조선)이 발표한 최대 추정치인 735억 배럴에 이른다면, 북(조선)은 베네주엘라에 이어서 세계 10위의 산유국이 될 것이다.

2006년도 세계 산유국 순위에서 13위에 오른 브라질의 유전현황을 살펴보아도, 북(조선)의 유전개발이 얼마나 큰 정세변화를 일으킬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2007년 11월 9일 브라질은 자국 영해에서 원유저장지(oil reservoir)를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는데, 추정 매장량은 300억 배럴이다.

북(조선)의 원유저장지와 비교해서 절반 정도의 매장량밖에 되지 않는 원유저장지를 찾아냈고, 그것도 북(조선)에 있는 것과 같은 대륙붕 원유저장지가 아니라 심해 원유저장지인지라 개발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터인데도,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베네주엘라에 이어 두 번째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하려고 한다.

유전개발이 국제적 위상을 바꿔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10월 유전개발을 꿈꾸며 방북길에 오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북측이 1998년 5월부터 안주 분지에서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안주 분지에 관한 정보는 '한겨레'가 1999년 1월 7일에 보도한 바 있다.

북측이 안주 분지에서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던 무렵인 1998년 5월 7일, 충청남도 서산시에 자리잡은 대산석유화학단지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최홍건 산업자원부 장관(당시)을 비롯한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대석유화학 제2유화단지 준공식을 거행한 것이다. 현대석유화학은 연산 100만 톤 체제를 갖춘 남(한국) 최대 석유화학업체로 부상하였다. (문화일보 1998년 5월 8일)

그 무렵 남(한국) 최대 석유화학업체를 건설한 정주영에게 북(조선) 유전개발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1998년 1월 7일 재일조선인총련합회(총련)가 공개한 현장사진에 나오는 북측의 원유시추선은, 서조선만 분지에서 해저유전이 개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유매장량을 비교하면, 아래에서 자세히 논할 안주 분지의 지상 원유저장지보다 서조선만 분지에 있는 해저 원유저장지가 훨씬 더 크다. 서조선만 분지에 있는 해저 원유저장지에 관한 정보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실상이 드러난다.

2004년 2월 중국 국무원은 발해 분지를 '해양공능구획'으로 지정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10월 중국 해양석유총공사(CNOOC)는 텐진 앞바다 발해 분지에서 새로운 해저 원유저장지를 발견하였다.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오늘, 중국 해양석유총공사는 발해만 유전에서 하루에 130만 배럴씩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발해만 유전을 발견한 중국 해양석유총공사는 해저 원유층(oil bed)을 따라서 발해만 입구에서 한(조선)반도 쪽으로 북황해 분지에서 계속 원유탐사를 진행해 나가던 중 마침내 거대한 원유저장지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원유저장지는 동경 124도의 동쪽 해역, 다시 말해서 북(조선)의 남포항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북(조선) 영해인 서조선만 분지에 있었다.

서해는 좁고 얕은 바다이다. 평균수심은 44m이고 최저수심은 103m이며, 동서 최장거리가 약 700km이므로, 북(조선)과 중국이 서해에서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서로 그으면 그 경계선이 서로 겹치게 되어 배타적 경제수역을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북(조선)의 서조선만 분지와 중국의 북황해 분지는 잇닿아있으며, 중국의 해저원유층과 북(조선)의 해저원유층은 바다밑 땅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2005년 10월 중국 해양석유총공사는 660억 배럴의 원유가 묻혀있는 거대한 원유저장지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중국 정부당국의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조중 두 나라가 30년 동안 쓸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원유가 묻혀있는 동아시아 최대 원유저장지이다.

그 원유저장지의 존재는 중국이 "2004년 말 이미 90%에 가까운 확증을 얻은 이래 2005년 1년 동안 다각적인 조사를 거듭해온 결과 내린 결론"인 것이다. (시사저널 2006년 1월 5일)

중국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2005년 12월 24일 북(조선)의 로두철 부총리와 중국 국무원 에너지담당 쩡페이옌 부총리가 '해상에서의 원유공동개발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고 한다.

그 협정내용은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중 두 나라가 동아시아 최대 해저유전을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조중 두 나라가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해저유전이 어느 광구에 속한 것인지는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북(조선)이 서조선만의 드넓은 광구 전역을 중국과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영해에 잇닿은 접경해역의 광구를 공동으로 개발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중국 정부와 중국 언론은 북황해 분지에서 원유저장지를 발견하였다고 세상에 알렸지만, 사실 북(조선)은 이미 1970년대에 서조선만 분지에서 원유저장지를 발견하였다. 그 실상은 아래와 같다.

북(조선)이 동유럽 최대 산유국인 루마니아에서 원유시추기를 수입한 해는 1970년이다. 북측은 미사일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마니아제 원유시추기를 분해하고 역설계하여 자체 기술로 원유탐사선 '유성호'를 만들었다.

1975년에 '유성호'는 안주 분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제303호 광구를 비롯한 세 개 광구에서 땅밑 2천500m까지 파 내려가 원유를 찾아냈고 하루 70배럴씩 시험생산에 성공한 바 있다. 유황성분이 적은 질 좋은 원유였다.

원유탐사에 성공한 북측은 장차 자국산 원유를 정제한 휘발유로 달릴 자동차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승용차 시제품이다. 그 시제품은 독일제 승용차 벤츠 200과 외형이 비슷하게 생겼다. (일요서울 1998년 11월 12일)

1998년 5월 영국의 석유기업 소코 인터내셔널(Soco International)은 북(조선)과 유전탐사계약을 맺고 북(조선)이 보유한 원유시추기 성능을 개량하기 위하여 기술을 지원하고 부품을 공급하였다.

2003년 12월 31일 북측은 1998년 9월에 설치하였던 원유공업총국을 원유공업성으로 승격하면서 유전개발사업을 본격화하였다.

그런데 북측의 해저 원유층은 서조선만 분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조선만 분지에도 있다. 서조선만 분지는 북(조선)과 중국이 공동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동조선만 분지는 북(조선)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

2000년 7월 19일 러시아연방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채택, 발표한 조러공동선언에는 "대규모 협조계획의 작성사업을 적극화할 데 대하여 정부 사이의 무역, 경제 및 과학기술협조위원회 조선측과 로씨야측 위원장들에게 위임하였다"고 하면서 지목한 일곱 개 분야 가운데 원유분야를 포함시켰다.


2. 산유국의 꿈을 실현한 숙천유전


그 동안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서 남측언론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지만, 북(조선)은 자체로 원유를 생산하는 명실상부한 산유국이다. 평범한 산유국이 아니라, 동아시아 최대의 원유가 매장되어있는 산유국이다.

서조선만 분지와 동조선만 분지에 묻혀있는 막대한 원유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경우, 북(조선)은 동아시아 최대의 산유국으로 등장할 것이다.

북(조선)은 안주 분지에서 유전을 개발함으로써 산유국의 꿈을 실현하였다. 안주 분지에 있는 유전의 위치를 좀 더 정확하게 짚으면, 평안남도 숙천군이다. 지도를 보면, 평양 서북쪽으로 평원군이 인접해 있고, 평원군 북쪽에 숙천군이 있다.

숙천군 서해연안지대에 남양이라는 지명이 눈에 띄는데, 이 글에서 숙천유전이라고 부르는 지상유전은 바로 그 남양 일대에 있다. 남측언론에서는 숙천군과 덕천군을 혼동하기도 하고, 숙천유전을 지상유전이 아니라 숙천군 앞바다에 있는 해저유전으로 혼동하기도 한다.

1990년대에 북측을 오가며 경제협력사업에 손을 댔던 재미동포 사업가 김찬구가 2005년에 서울에서 출판한 책에 실려있는 한 장의 사진은 숙천유전에서 가동되는 유정양유기(oil well pumping unit)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

벼가 푸르싱싱하게 자란 넓은 논 건너편에 있는 유정양유기를 촬영한 현장사진이다. 그 사진에 나온 유정양유기는 대영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ica) 인터넷판에 실린, 마치 커다란 메뚜기처럼 생긴 유정양유기와 닮은꼴이다. 그 현장사진은 숙천유전의 존재를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준 사진자료일 것이다.

남측언론에 따르면, 1999년을 기준으로 숙천유전에서는 연간 220만 배럴(약 30만 톤)의 원유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시사저널 2006년 1월 5일) 숙천유전에서 1999년에 생산한 연간 220만 배럴의 원유는,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석유를 아껴 써야 하였던 북측에서 소비한 연간 석유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양이었다.

남측언론에 따르면, 숙천군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덕천군에서도 유전개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2001년 5월 28일) 이것은 북측이 2000년대 들어오면서 숙천군과 덕천군을 포함하는 안주 분지 곳곳에서 지상유전을 개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북(조선)의 원유수입량 변화추이를 밝혀주는 남(한국) 통계청의 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측의 원유수입량은 1980년에 1천539만3천 배럴이었고, 1990년에 1천847만2천 배럴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원유수입량이 급감하였다. 원유수입량은 1997년에 370만9천 배럴, 1998년에 369만4천 배럴, 1999년에 232만5천 배럴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가, 경제회복기에 들어선 2000년대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2000년대의 원유수입량은 2001년 424만4천 배럴, 2005년 408만6천 배럴, 2006년 384만1천 배럴이었다. (연합뉴스 2008년 1월 13일) 이러한 변화추이는 2001년 이후 원유수입량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음을 말해준다.

북측이 경제회복기를 지나 공업생산량을 늘이고 있으므로 석유소비량도 해마다 늘어나는 것이 정상인데, 2001년 이후 원유수입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2006년을 기준으로 북측의 공업화수준에 상응하는 원유수입량은 1990년대의 평균수입량인 1천800만 배럴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2006년의 원유수입량은 고작 384만 배럴밖에 되지 않는다.

그 동안 북측이 수력발전소와 석탄화력발전소를 많이 건설하여 에너지소비에서 석유비중을 줄였다고 해도, 원유수입량과 원유수요량의 엄청난 차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2006년에 다른 나라에서 사들인 원유 384만 배럴을 가지고서는 북측이 도저히 경제를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384만 배럴밖에 되지 않는 원유를 사들이고서도 경제를 움직이는 '비결'은, 자국산 원유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숙천유전에서 연간 22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9년이나 지난 오늘, 북측의 원유생산량은 이전보다 크게 늘었음이 분명하다. 놀라운 것은, 북(조선)이 다른 나라에 석유를 수출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1년 현재, 북(조선)은 중국, 일본, 태국, 프랑스에 연간 1천만 달러 이상의 석유를 수출하였다. (조선일보 2002년 1월 26일)

북측의 원유생산량이 늘어나 유류사정이 크게 좋아졌다는 사실은 2008년 1월에 실시한 조선인민군 동계훈련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남측의 군소식통은 2008년 1월 중순에 실시한 조선인민군 공군 동계훈련에서 하루에 170여 회나 출격하는 등 1995년 이후 13년만에 전투기 일일 출격횟수가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연합뉴스 2008년 2월 21일)

또한 한미 군정보당국은 국제유가가 폭등하였는데도 조선인민군 기갑사단의 기동훈련이 늘어난 까닭이 군부대의 유류사정이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연합뉴스 2008년 2월 10일)

그와 다르게, 한국군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로 오를 것에 대비해 2007년 1월에 4단계 유류통제계획을 세웠고, 군부대 훈련을 통합하고 공군 비행훈련시간을 단계적으로 단축해왔는데, 국방부 당국자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서면 군의 임무수행은 불가능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2007년 11월 9일)


3. 누가 유전개발사업을 가로막았는가?


1998년 10월 30일 밤 10시 25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둠이 내린 평양의 백화원초대소를 찾았다. 그곳에는 정주영 명예회장과 일행이 머물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45분 동안 정주영 명예회장과 일행을 접견하였다. 남측언론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오갔다고 전하였다. 접견자리에서 오간 대화내용 가운데 아래와 같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정 회장 - "북한에는 석유가 난다지요?"

김 위원장 - "납니다."

정 회장 - "북한 기름을 남한에 꼭 보내주십시오. 파이프라인만 서해안을 통해 남한으로 오면 그것이 통일의 길입니다."

김 위원장 - "그렇습니다. 다른데 하고 할 것 있습니까. 현대하고 하면 되지요.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밤 11시 10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백화원초대소를 떠나면서 "언제 또 오실 것인지. 길이 터졌으니 자주 오십시오"라고 인사말을 건넸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름만 보내주신다면 언제든지 오겠습니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고 말하였다. (조선일보 1998년 11월 3일)

1997년 11월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남측경제와 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움을 겪은 북측경제가 민족공동번영의 길로 성큼 들어설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은, 1998년 10월 30일 밤늦은 시각에 그렇게 감격스러운 첫 걸음을 떼고 있었다.

만일 백화원초대소의 약조가 그대로 실행되었다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동아시아 최대 유전에서 퍼올리는 원유는 남측 경제와 북측 경제에 힘찬 성장동력을 공급하면서 통일경제기반을 마련하였지 모른다.

그러나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이 감격스러운 첫 걸음을 떼었던 바로 그 날, 뜻밖에도 서울에서는 그 걸음을 가로막으려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1998년 10월 30일 오후, 그러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을 접견하면서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을 협의하기 불과 몇 시간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조지 테닛(George J. Tenet)이 부국장을 비롯한 일행 다섯 명과 함께 청와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김대중 대통령과 비밀회담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한겨레 1998년 10월 30일) 미국 중앙정보국 국장이 부국장까지 대동하고 다른 나라를 찾아가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 중대한 사안이 제기되었을 때 벌이는 비밀행각이어서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겨레'의 사진기자가 승용차에서 내리는 테닛의 모습을 우연히 촬영하는 바람에 그의 비밀행각이 드러나고 말았다. 당황망조한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은 '한겨레'에게 테닛을 찍은 필름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며 소동을 벌였다.

김대중과 테닛의 청와대 비밀회담에서 논의된 여러 현안들 가운데는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에 관한 현안도 들어있었을 것이다. 테닛은 북측의 유전개발에 참여하려는 정주영을 저지하도록 김대중 대통령에게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막연한 추정이 아니라, 김대중과 테닛의 청와대 비밀회담이 있은 때로부터 사흘 뒤에 청와대를 찾아간 정주영 일행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취한 태도, 그리고 그 직후에 남측정부당국이 북측 유전개발문제에 대해서 취한 방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김대중과 테닛이 청와대에서 비밀회담을 가졌음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정주영과 일행은 1998년 10월 31일 평양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판문점에 이르러 오후 4시에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정주영은 유전개발의 꿈을 눈에 그리며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평양이 기름더미에 올라 앉아있다. 나는 기름을 남한에 보내달라고 했고, 장군은 그렇게 명령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어떻게 기름이 많이 나는지 모르겠다. 북한 기름을 들여오기 위한 파이프라인 가설작업을 곧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그 자리에 배석한 김윤규 현대그룹 대북사업단장(당시)은 "북한 조사로는 매장량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유전개발을 정식 제안하고 매장량 등을 다시 조사해 본 뒤 파이프라인 건설에 착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일보 1998년 11월 2일)

북측 유전개발에 관한 정주영의 기자회견 발언이 전파를 타고 남측 전역에 전해졌을 때, 그 낭보는 석유부국을 향한 세간의 기대와 희망을 불러일으키기에 넉넉하였다.

그러나 1998년 11월 2일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날 청와대 접견실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을 접견하였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대화는 이렇다.

김 대통령 -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 회장 - "평양에서 기름이 나오는데 파이프를 연결해 석유를 공급하겠다고 북측이 약속했습니다."

김 대통령 - "기름 가능성이 있는 겁니까?"

정몽헌 (현대아산그룹 회장) - "가능성은 잘 모르지만 아태평화위원회측이 개발참여를 요구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기름이 생산되면 남쪽에 우선 공급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정 명예회장께서 남한신문에 공개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습니다."

김 대통령 - "미국 탐사회사들이 탐사를 하고 있습니까?"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 "아태평화위 책임자들은 기름이 나온다고 확신했습니다. 중국 발해만에서 기름이 많이 나오는데 지층구조가 평양까지 연결돼 상당량이 매장된 것으로 확신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김 국방위원장도 미국에서 탐사제의가 많다고 했고, 사진을 보니 기름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김 대통령 - "그런 것은 장차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다녀온 얘기를 해 보십시오."

정몽헌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으니 모든 게 잘됐거니 생각했는데, 아태평화위에서 만나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정 명예회장께서 연세도 드시고 몸이 불편하시니 초대소에 들렀다고 하면서 주로 기름 얘기를 했습니다."

정주영 일행으로부터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의 길이 열렸다는 보고를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그 사업이 성사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대통령의 반응은 너무도 싸늘하였다.

'세계일보' 1998년 11월 4일자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주의를 받은" 정주영은 마음이 상하여 접견시간 35분 동안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이자 현대아산그룹 회장인 정몽헌이 설명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싸늘한 반응이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에 대한 저지방침으로 굳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통일부장관은 반북성향을 지닌 강인덕이었다. 강인덕은 정주영이 두 번째로 소떼를 몰고 방북길에 올랐던 1998년 10월 29일 기자들에게 "북한 석유개발 문제는 현대로부터 듣지 못한 얘기다.

북한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해도 상업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하면서 거부의사를 드러냈다. 그러다가 11월 2일에 와서 강인덕은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현대가 (통일부와) 모든 것을 상의했다"고 말을 바꿨다. 남측 언론은 "정부가 현대의 합의를 마지못해 추인하는 인상을 풍겼다"고 지적하였다. (세계일보 1998년 11월 3일)

정주영 일행이 방북하기 직전에 통일부가 마지못해 추인해 준 현대그룹의 북측 원유개발 참여문제는, 김대중과 테닛이 청와대에서 비밀회담을 가진 직후 김대중 대통령의 직접지시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북남) 공동원유개발사업을 가로막는 저지방침을 지시하였다는 사실은 1998년 11월 4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국무회의에서 확인되었다. 그 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에서) 석유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확실하지도 않으며 나오더라도 경제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북한도 석유가 부족한데 우리에게 공급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내용이 지나치게 부풀려서 알려져 있다. 어제 주의를 주었다"고 말했다.

남측 언론은 1998년 11월 3일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통일부가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이 언급한 유전개발사업은 실현 가능성이 작아 승인해주지 않을 방침"을 정하였음을 보도하였다. (중앙일보 1998년 11월 4일) 통일부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유전개발참여를 가로막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저지방침에 가로막혀 유전개발사업에 나설 수 없게 되자, 현대그룹은 금강산관광사업만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승객 826명을 태운 금강호가 역사상 처음으로 방북출항의 뱃고동을 울리며 동해항에서 장전항으로 떠난 날은 1998년 11월 18일이었다.

원유개발사업에 참여하기를 바랐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21일 여든 여섯 살을 일기로 별세하였고, 현대아산그룹 회장 정몽헌은 대북송금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압박강도를 높인 검찰과 언론의 집중공세를 견디지 못하여 2003년 8월 4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천유전은 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남측 정부당국이 북측 유전개발에 관한 정보공개를 금지하는 방침을 지속함에 따라 언론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져갔다.


4. 유전개발전망이 아직 불투명한 까닭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사업을 저지하였던 때로부터 어느덧 아홉 해가 흘렀다. 그 사이에 6.15 공동선언이 채택되었고, 노무현정권이 등장하는 정세변화가 있었다.

9년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일행을 접견하고 유전개발사업을 협의하였던 백화원초대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마주 앉았다. 2007년 10월 3일의 일이었다. 그날 오후 2시 45분부터 속개된 최고위급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은 유전개발문제를 거론하였다.

김 위원장 - "남측 지역 내에서는 어떻게 유전과 가스를 개발하고 있습니까? 탐사기술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노 대통령 - "마찬가지입니다. 북측 내 유전개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서한만 유전과 단천 지하자원 개발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 위원장 - "개성공단도 아직 다 안 됐는데 북쪽 땅을 다 차지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두 수뇌의 회담내용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남측언론이 보도한 위의 회담내용은 그 자리에 배석한 남측 정부관리의 입을 통해서 크게 축약된 형태로 전해진 것이다. 남측 언론이 짤막하게 보도한 위의 회담내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최고위급회담에서 유전개발문제를 논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유전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남측의 자본과 기술이 어느 수준인지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물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서한만 유전'을 지적하면서 북측의 유전개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유전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자본과 기술에 관한 회담자료를 미처 준비해오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였을 수도 있다. 그가 '서한만 유전'이라고 말한 것은 서조선만 유전을 뜻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관심을 보인 단천의 지하자원이란 단천에 있는 세계 최대 매장량을 자랑하는 마그네사이트를 뜻하는데, 이 글에서는 유전개발문제만 논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조선만 유전과 단천 마그네사이트광산을 동시에 개발할 수 있다는 관심을 보였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개성공업단지 건설사업부터 제대로 진척시키자는 제안으로 답변을 대신하였다.

위의 회담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서조선만 유전개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에 관하여 협의한 회담내용을 공개하기를 거부하였다. (월간중앙 2007년 12월 호)

2007년 10월 4일 오전 8시 50분 노무현 대통령은 서조선만 수평선 너머에 있은 거대한 원유저장지까지 바닷길로 통하는 항구도시 남포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평화자동자 남포공장과 서해갑문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오후 1시에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북남)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으로 떠나기에 앞서 남측 정부 고위당국자는 "정부는 서해안 남포 앞의 서한만 등에서 북한과 함께 유전을 개발하는 계획을 남북정상회담에서 논의하기 위해 북측과 협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청와대는 한국석유공사가 기초자료를 제공하고 산업자원부가 작성한 의제를 토대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의제인 '북 유전 공동개발'안을 마련해 논의안건으로 제안했다." (월간중앙 2007년 12월 호)

그러나 9년 전에 김대중 정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노무현 정부도 남북(북남) 공동유전개발에 커다란 관심을 두면서도 정작 유전개발사업을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그 까닭은, 미국이 대북경제제재조치를 쥐고 있는 한, 유전개발사업이 불가능함을 노무현 정부의 당국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남측의 정부당국과 관련기업들에는 북측의 유전개발사업에 관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남측정부는 북측의 유전개발문제에 관한 자료를 다루는 정부관료와 민간전문가들에게 관련정보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북측의 유전개발문제에 관한 정보가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지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 2006년 1월 5일 관련기사 참조)

이것은 미국의 경제제재조치에 순응하는 남측 정부당국이 유전개발사업을 매개로 남북(북남)경제협력을 결정적으로 진전시키고 통일경제기반을 축성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북(조선)은 미국이 경제제재조치를 계속 유지하는 동안 유전을 개발하지 못하여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 숙천유전에서 원유를 생산하기 시작한 무렵 북(조선) 경제대표단은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하였다.

1998년 11월 23일의 일이었다. 헤이그 방문은 네덜란드 석유기업과 영국 석유기업이 합작한 다국적기업으로서 세계 6대 석유기업 가운데 하나인 로열덧취쉘(Royal Dutch Shell) 헤이그 본사를 찾아가 북(조선)의 유전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중앙일보 1998년 11월 24일), 북(조선) 경제대표단은 미국의 경제제재조치에 가로막혀 빈손으로 돌아갔다.

북(조선)을 집요한 경제제재조치로 고립, 압살하려는 미국은 서조선만 유전에서 원유가 쏟아져 나와 자기들의 경제제재조치가 무력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시기 북(조선)에서 원유탐사활동을 벌인 외국기업들은 스웨덴의 타우르스 에너지(Taurus Energy), 호주의 비치 페트롤리엄(Beach Petroleum), 영국의 소코 인터내셔널(Soco International)이다. 흔히 '수퍼메이저(Supermajor)'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세계 6대 석유기업이 아니라 중간급 석유기업들이, 그것도 북(조선)의 원유개발사업이 아니라 원유탐사활동에 잠시동안 관여하였던 까닭은, 미국의 경제제재조치가 북(조선)의 유전개발사업에 대한 외국기업의 투자를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미국의 에너지개발회사 스탠튼그룹(Stanton Group)이 북(조선) 유전개발사업에 투자하려고 하였으나 경제제재조치에 걸려 중단한 적도 있다.

원유시추공 한 개를 뚫는데 700만 달러에서 1천만 달러가 들어간다. 원유를 퍼올리는 거대한 해상구조물(oil rig)을 건설하려면 1억-2억 달러가 들어가고, 남포에서 서울까지 200km 길이의 송유관을 설치하려면 최소 1천억 원 이상의 건설비가 들어간다.

이처럼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유전개발사업을 추진하려면, 무엇보다도 미국이 북(조선)에게 가해오는 경제제재조치를 영구히 중지해야 한다.

그런데 그처럼 탄탄하게 보였던 경제제재조치는 지금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비핵화가 진전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비핵화 2단계에 들어서면, 미국은 북(조선)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여야 하는데,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는 경제제재조치가 중지되는 것을 뜻한다. 비핵화가 실현되어 가는 정세변화를 가늠해보면, '테러지원국' 지정해제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만일 미국이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중지하면, 동아시아 최대의 유전을 개발하는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까? 경제제재조치의 영구중지는 명백하게도 북측의 유전개발사업을 추진하는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남북(북남)이 유전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10.4 선언을 성실히 이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10.4 선언을 외면하면서 '비핵개방 3000 구상'에 집착하고 있다. '비핵개방 3000 구상'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배치되는 대북정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북측이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외면하는 이명박 정권과 유전개발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미국의 경제제재조치가 중지된다 해도, 이명박 정권이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유전개발사업의 전망은 불투명할 것이다.


5. 통일된 나라는 석유부국이다


지난 20세기에 미국은 석유자원을 선점, 장악함으로써 세계경제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제국주의석유자본들인 엑슨모빌(Exxon Mobil), 걸프(Gulf), 텍사코(Texaco), 쉐브런(Chevron), 로열덧취쉘(Royal Dutch Shell), 비피(BP)가 1920년대 말부터 전세계 석유자원을 사실상 지배해오고 있다. 세계적 범위에서 석유의 개발, 정유, 판매는 6대 석유기업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그들의 독점과 패권에 도전하는 기업가는 이탈리아 국영에너지회사 총재였던 엔리꼬 마떼이(Engico Mattei, 1906-1962)처럼 의문의 비행기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고, 그들의 독점과 패권에 도전하는 정권은 후세인 정권처럼 무력침공으로 전복된다.

석유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성장동력이자, 제국주의독점자본이 움켜쥔 가장 중요한 상품이라는 점에서, 다른 지하자원과 구분되는 매우 특별한 동력자원이다. 석유자원을 손에 넣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남(한국)의 석유수급상황은 어떠할까?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남(한국)의 에너지 총수요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45%이며, 2007년 연간 석유소비량은 7억8천930만 배럴이다. (연합뉴스 2007년 12월 16일) 관세청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연간 원유수입액은 603억2천400만 달러이다. (연합뉴스 2008년 2월 2일) 2006년을 기준으로 남(한국)의 1인당 석유소비량은 세계 5위이며, 비산유국 가운데서 세계 2위이며, 아시아에서는 1위이다. (월스트릿저널 2008년 1월 3일)

그런데 녹색연합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국)의 석유취약지수(Oil Vulnerability Index)는 필리핀에 이어 세계 2위이다. 석유소비량은 세계 5위인데, 석유취약지수가 세계 2위라는 사실은, 제3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경우 남(한국) 경제가 무너질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뜻한다.

국제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는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미국의 금융시장이 과잉신용 파탄으로 흔들리자, 석유취약성과 금융취약성에 발이 묶인 남(한국) 경제는 즉각적으로 고물가와 저성장의 합병위기인 스택플레이션(stagflation)의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특히 국제유가상승은 남(한국)의 서민경제를 짓누르는 물가폭등의 최대요인으로 되었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국)의 전체수입물가 상승률 1.7%에서 6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상승요인은 국제유가상승이다. (연합뉴스 2007년 11월 14일)

남(한국)의 경제가 고물가와 저성장의 합병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대운하를 파는 헛수고를 할 것이 아니라 남북(북남) 공동원유개발을 추진하여야 한다. 남북(북남)을 포괄하는 한(조선)반도 전체 범위에서 일어날 21세기 경제부흥의 여명은 이미 숙천유전에서 밝았다. 북측의 본격적인 유전개발은 한(조선)반도 정세를 바꾸는 대사변이 될 것이다.

북(조선)이 동아시아 최대의 원유저장지를 오래 전에 발견하고, 1998년 5월부터 숙천유전에서 원유를 생산해오고 있으면서도 그에 관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까닭은, 그 석유자원이 통일된 나라의 자립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참으로 소중한 전략자원이기 때문이다. 북측에서 개발될 동아시아 최대 유전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한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갈 한(조선)민족이 21세기 통일경제발전을 위해 저장해둔 소중한 미래자원이다.

머지 않아 이 땅에 통일정부가 세워지면,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가 부러워할 만큼 풍요로운 석유부국이 될 것이다. 참고로 살펴보면, 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는 6개 산유국은 석유를 수출하여 매주 50억 달러씩 벌어들이고 있으며, 2007년 한 해 동안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수익은 자그마치 6천880억 달러나 된다. (연합뉴스 2007년 11월 29일)

미국의 대북경제제재조치가 영구히 중지된 이후 장차 제3차 최고위급회담이 열리는 날, 원유를 공동개발하여 나라의 통일경제를 일으키자고 남북(북남) 수뇌가 합의할 때, 그때 비로소 석유부국을 향한 한(조선)민족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다. (2008년 3월 22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