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1 (2007-11-24)  hit : 155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나도 이젠 40대 중반기를 벗어난 녀인이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은 것이란 없고 오직 추억과 가슴속의 아픈 상처뿐이다.
정작 펜을 들고 보니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순서와 방향이 생각나지 않지만, 하나하나 더듬으며 나의 짧은 인생에서 멀고도 멀게 돌고 돌아 여기 대한민국까지 오게 된 사연을 간단히 적으려 한다.

우선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를 새 생명이 탄생한 나의 제2의 고향 대한민국까지 인솔한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중국에서 만나 우리 가족과 함께 여러 나라 국경을 함께 넘으며 고생을 하신 신사장님께 더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저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입니다.


< 고난 행군의 시작 >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딸 두 명에 아들 하나를 낳아 더없이 행복한 가정에 건강한 우리 부부의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동내에서 제일은 못 꼽혀도 어느 정도 부러움을 사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나의 남편은 직장에서 행정 사업을 맡아보는 일꾼으로서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듣지 않으며 노력하여 항상 혁신자 명단에 손꼽혔고, 나 역시 꼬리 없는 황소로 불리 우며 가정에서 손 두부ㆍ술ㆍ엿 등을 직접 만들었고 돼지ㆍ개ㆍ염소ㆍ닭ㆍ토끼를 키우며 아이 셋과 함께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0년서부터 우리들의 인생에 첫 시련이 부닥치기 시작한 것 같다. 국가에서 배급을 주다 말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니, 집안의 가정 집물과 재산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인민들의 한숨소리 구석구석 잦아만 갔다. 한해만 고생하면 끝나려니, 또 한해만 가면 끝나려니 하고 기다리고 기다려도 고난의 행군은 끝이 없었고, 백성들의 신음소리만 점점 높아만 가던 1997년. 그 때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고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이곳 대한민국까지 와서 가끔 드문드문 옛 일을 추억하여 옛 말을 할 때는 한국 사람들 일부는 정말 그럴 수가 없다고 믿지 않는 이가 많다.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 사람들도 거짓말이라고 한다. 하긴 실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믿기 힘든 현실들이었으니까 제일 힘겨웠던 시기가 94~2000년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사람들의 머리 속 사상이란 당에서 죽으라면 죽어야 되는 그 시기였으니 정말 어리석은 백성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이 시기 한창 자라나는 세 자녀를 죽이지 않고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힘이 어디에서 생겨 그렇게 극성을 떨며 살았는지 나도 신기할 정도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마 속에 들어갈 낟알이 없어서 빈 가마에 불만 때고 아이들은 학교는 생각도 안하고 모두 산과 들로 뿔뿔이 흩어져 산나물과 미나리, 심지어 돼지들만 먹던 비듬 풀과 능쟁이 풀을 뜯어온다. 그것을 들고 내가 온 하루(하루 종일)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해야 강냉이 1kg 값도 못 벌면, 두부하고 찌꺼기 비지를 한 덩이 사서 밑에 풀을 깔고 위에 비지를 올려놓고 끓여 먹는다. 소금이나 맛내기 같은 것이 들어가야 별 맛이 나지만 소금과 맛내기 살 돈이면 낟알을 500g이라도 더 샀기에 맛내기 맛을 본 지는 까마득하고 소금도 알을 혀서(세어서) 먹다시피 하니 메스껍지 않을 정도로 약간만 넣어 먹곤 하였다. 아이들도 산과 들에 나가 풀을 뜯자고 해도 가까운 근처에는 미처 풀이 돋아날 새가 없어 시내에서 10리 정도 까지 가야 먹을 만한 풀을 한 배낭씩 뜯어오곤 한다. 심지어 봄철이 되서 농사꾼들이 악전고투하여 심어놓은 콩밭에 콩이 싹터 올라오면, 나오는 대로 도둑놈들이 뜯어가서 농사꾼들도 낟알을 땅에 심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이 시기는 너나 할 것 없이 도둑질을 안 하면 굶어죽어야 하니,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가는 세월이었다.

어느 집에 중국에서 친척이 왔다면 손락이(힘이) 센 사람을 싹을 주어 경비를 세워야 했고, 경비를 세워도 도둑에 윗도둑이 있다고, 그들은 대문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 벽에 구멍을 내고 물건을 훔쳐가는 기술 또한 특출한 솜씨들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집들에는 아파트 옥상으로 해서 천반에(천장에) 구멍을 내고 물건을 들어 올리는 방법도 있었고, 밖의 창고를 털 때에는 집안 열쇠를 밖으로 걸어놓고 집주인이 나오지 못하게 하고는 창고를 털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어쨌든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판이니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결사전 이였다.

이때부터 집짐승을 키우는 집에서는 돼지ㆍ개ㆍ닭 할 것 없이 사람과 함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집안 부엌에다 돼지를 키웠고 윗방에 비닐 막으로 칸을 막고 닭을 키워야 했다. 집안사람들 생활이 돼지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으니, 냄새 따위는 신경도 쓸 형편이 아니었다. 강냉이 이삭이 생기고 아삭 마다 알이 들었나 보면서 이삭을 찧어 본 때가 언제인지... 언제면 이삭이 여물어 이 주린(굶주린) 배를 한번만이라도 실컷 채워볼 것인가. 우리 아이들도 제일 작은애가 8살, 둘째딸이 10살, 큰딸이 12살이었을 때 이 애들은 강냉이 밭에 가서 점심 한 끼는 해결했다. 강냉이를 뜯어오다 잡히면 매를 맞으니 뜯어오지는 않고 빈 몸으로 강냉이 밭으로 오줌 누러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가서 강냉이 이삭이 돌기 시작한 이삭을 골라 송치까지 뜯어먹는데, 그때 그 맛을 지금 와서 찾아보라면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한참 먹을 나이인지라 죽으로 끼니를 때우니 배만 점점 커져서 엄마, 아버지보다 더 먹으려 하는데 식구마다 죽도 한 사발씩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이이들이 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기 힘들어 먼저 죽을 먹고 엄마가 들어오면 엄마 먹는 죽이 먹고 싶어 죽 그릇 앞에 우두커니 앉아 엄마 먹는 것을 숟갈 가는대로 따라가며 본다. 딸애들이 너는 먹었는데 왜 또 그러느냐고 꾸중을 해도 들은 척 만 척하고 엄마가 남겨주길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그때는 나도 배가 너무 고프니 자식에게 양보를 못하였다. 겨우 생각해주는 것이 한두 수저 입에 넣어주면 두 누나들한테 한대씩 쥐어 맞으면서도 받아먹는 재미에 죽사발이 빌 때까지 앉아 있는다.


< 도적질, 먹고 살기위한 최후의 선택 >

낮에는 장마당에 나가 팔리지도 않는 장사를 하고, 저녁이 되면 아낙네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농장 밭으로 남새도적질을 하러 간다. 고추면 고추, 호박이면 호박, 파, 무우, 배추 할 것 없이 도적질을 해오는데, 밭마다 경비원들이 득실거려 빈탕 칠 때가 수두룩하였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뜯어오는 날이면 큰 성과였다. 한번은 고추밭에서 고추를 훔치러 갔는데, 한사람이 두 고랑씩 타고 세 명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버스럭하는 소리가 나서 고추밭에 납작 엎드렸더니, 그 쪽 역시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쪽도 고추 도둑질을 하러 와서 고추를 뜯으며 마주 오다가 인기척을 듣고 조용히 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서로 다시 고추를 뜯어가지고 제 집으로 간일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본심이 나빠서 이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지 마시요. 그렇게라도 안하면 굶어죽었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ꡐ앉아 죽으면 어떻고, 서서 죽으면 어떠랴. 죽기야 매한가지인데...ꡑ 하는 생각으로 너나없이 해먹는 일이었다. 하루 자고나면 누구네 온 집 식구가 자살해 죽었다. 또 누구네 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소리도 파다하였고, 장에 가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뚜지고(밀치고) 들어가 보면 사람 죽은 시체가 누워있었다.

나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시체를 등지고 내 볼일을 보러 떠나 버린다. 장에 나가 음식을 사먹으려면 전투를 겪는 격이다. 돈만 보면 꽃제비 아이들이(소매치기) 덮쳐가고 갸날픈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이 음식을 먹는 기회만 나면 두세 명이 달라붙어 뺐지 않으면 덮쳐서 가지고 달아난다. 덮친 아이들은 갖고 뛰고 뺏긴 사람은 붙잡아 때리고, 아이들은 맞으면서도 음식을 입으로 웅켜(삼켜) 넣는다. 음식 파는 아낙네들은 광주리마다 그물을 씌어가지고 팔아야 했고 저녁 늦게까지 있으면 광주리채로 덮쳐 가지고 달아난다. 먹을 것이 없고 땔 것도 없어, 산에 가서 한 번에 삭정이나 생나무를 해 와야 불이라도 피우며 살겠기에 나와 처지가 똑같은 나의 제일 친한 동무와 나무하러 산(두만강이 옆으로 흐르고 중국이 마주보이는 산)에 밧줄을 가지고 가는데, 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려니 산중턱에 피아노 건반처럼 차례차례 땅을 파놓은 것이 보였다. 왜 땅을 이렇게 순서대로 많이 파놓았을까 생각하면서 산에 올라 나무를 한 짐씩 해가지고 저녁에 내려오는데, 꽃제비 상무와 꽃제비 우두머리 세 명이 아이 하나를 관도 없이 맨땅에 파묻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 때문에 이렇게 땅을 많이 파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좋은 철이 가을철이었다. 열 명의 순사가 한 명의 도적을 못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곳곳에 인민군대가 총을 메고 경비를 선다고 해도 굶주린 사람들의 갈취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강냉이를 도적질하다 매를 맞을 땐 맞더라도, 세 번 중 한 번만 성공해도 큰 성과였다. 남녀노소 아이들까지 아침에 눈을 뜨면 배낭을 메고 들로 나가 이삭을 주워오는데 말이 이삭이지 절반은 도적질이다. 그들의 행열 속에는 우리 식구도 물론 끼어있었다. 가을은 왜 그리 빨리 지나 가는지 세월이 얄밉기만 하더니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아우성치는 소리에 도시 분위기가 수산해졌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남의 소를 몰래 훔쳐서 잡아먹은 큰 도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소 한 마리만 잡아먹다 걸리면 무조건 총살되었다. 왜냐하면 소를 잡음으로서 협동조합을 파괴하려는 책동이었으므로 그런 처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겁내지 않고 나중에 갑산 가더라도 한 끼라도 실컷 먹고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소 한 마리 잡아먹고 아버지 아들이 총에 맞아 죽고 가시아버지(장인어른)와 사위가 처형당하거나 형제끼리 해먹고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소와 개에는 대비도 안 되었다. 개가 죽으면 임자가 서로 싸움질한다. 서로 자기가 임자라고 하지만 사람이 죽은 시체는 아침에 발견되면 저녁에 가야 없어진다. 우스운 소리지만 저의 남편이 아침 일찍 내 동생과 일보러 같다 오더니 오봉 다리 밑에 웬 개하나 죽은 것이 있다고 하길래 나는 임자가 있더냐고 물었다. ꡒ임자가 없으니 아직까지 있지ꡓ라고 하길래 내가 재빨리 ꡒ그럼 가져올 것이지, 참 아쉽다.ꡓ했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ꡒ누나, 개가 왜 아직까지 있겠소. 사람이 죽었습데(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아직 남아있겠느냐)ꡓ라고 하여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다.


< 지옥 같았던 나날들 >

96~99년 때에는 아마 보름이, 일주일이 멀다하게 공개처형을 한 것 같다. 소 잡아먹은 것, 인신매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총에 맞아 죽는 일도 바로 내가 살던 회령에서 있었던 일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스산한 세월이었다. 95년 8월로 생각되는데, 장마당에 장보러 가는 중 방송 차에서 공개처형한다는 방송이 나와 구경하러 갔었는데 사람 5명을 세워놓고 먼저 범죄자들의 죄행을 폭로시키고 마지막으로 판결문 <조선민주주의 헌법 제xx조항에 의하여 사형에 처한다>하고 재판소 판결문이 떨어지자 특사 받은 안전원들이 죄인 한 사람당 3명씩 앞에 서서 총을 쏘는데 거리는 20m 안팎의 거리였다. 나는 그때 먼데서 설치게(어설프게)보면 꿈에 나타난다는 누군가의 말에 제일 앞에서 그 장면을 보았는데, 소를 잡아먹은 사위와 가시아버지도 있고 처녀들을 중국에 팔아먹은 40대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도 있었다. 지휘자의 ꡒ쏴!!ꡓ소리와 함께 죄인들의 얼굴이 먼저 총알에 맞았는데, 한 사람 얼굴의 한 쪽 면이 떨어지면서 속안의 뇌수가 땅바닥에 몽땅 쏟아지더니 얼굴 면이 다시 제자리에 올라가 붙는 것이었다. 8월의 더운 날씨에도 그 뇌수 떨어진 데서는 김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사격은 10분도 안 걸린 듯 싶더니, 금방까지 앞에 말뚝에 매달려서 행여나 아는 사람이 나와 있는지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꼬꾸라져 있고 특사 받은 안전원들이 옛날 농촌에서 쌀을 담던 볏집 가마니를 들고 나와 죽은 시체를 거꾸로 집어넣어 서너 번 들었다 놨다 하니 시체가 가마니 안에 쏙 들어갔다. 새끼줄로 가마니 윗부분을 매서는 트럭 차에 하나 둘 셋 하면서 올리뿌리고(올려던지고) 싣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공개재판, 공개처형을 해도 이런 일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다. 3일 굶은 범이 원님을 못 알아본다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먹고 죽자하는 판이다. 집 재산을 통 털어서 돼지고기, 이밥에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실컷 먹고 마지막에 음식에 아이들 모르게 쥐약을 넣어 다 같이 먹고 자살하는 집도 있었다.

여기서 내가 잊혀 지지 않는 이야기를 한 가지 하련다. 계속 죽물로 생계를 유지하던 우리 집에 어쩌다 사람다운 음식을 먹어보려고 통 강냉이 죽을 쑤어 먹게 되었는데, 통 강냉이 껍질을 기계로 발글(바를) 수 있으나 기계로 발그면 낭비가 되므로 손절구로 껍질을 대충 발그고 열 콩을 조금 넣고 끓이는데 누군가 통 강냉이 삶을 때 석회석 1덩어리를 넣으면 빨리 끓고 남은 껍데기가 홀랑 벗겨진다고 하여 나도 석회석 1덩이 아이 주먹만한 것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을 큰 딸애와 작은딸애가 보았다. 이 애들은 이미 다른 집에서도 독약을 먹고 죽을 때 음식을 한 끼 잘해먹고 죽는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기에 이 애들도 어린 나이지만 이것을 그런 일로 인식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엄마 아빠가 무서워 말도 못하고 후에야 이야기 하여서 알았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끝이 나는 줄 알고 부모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옛이야기를 추억하면 눈물이 나오지만 그때는 어른이나 아이나 항상 조이며 살다보니 하루하루 사는 게 정말 생지옥이었다.

96~97년도에는 전염병, 파라티푸스, 장티푸스라는 병이 도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저 세상으로 갔는지 모른다. 이 병에 걸리면 무조건 죽어야 하는 병으로 알았었으니 말이다. 우리 식구도 5명 중에 큰 딸애만 하나 이 병을 안 앓고, 남편으로부터 시작된 병이 차례차례 나까지 몽땅 앓았다. 약도 없는 병원에 격리당한 환자들이 병실마다 넘쳐나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줄을 지어 누워있었고 시체실의 시체는 미처 임자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그들을 넘기지 않고 집체로 싣고 어디론가 가서 묻어버리든지 그냥 버리든지 해서 처리해 버린다. 나도 한 달간 병원에 누워있었는데, 그때 사과가 몹시 먹고 싶었던 것이 지금도 사과만 보면 생각이 난다. 한 알에 30원씩 하는 사과 한 알만 먹으면 정신이 들겠건만 남편에게 말해도 한 알도 해결 못해오는 처지였다. 내 옆의 환자는 그래도 사과를 사먹는데 그 먹는 소리에 너무도 먹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이불속에서 눈물만 흘렸다. 다 지난일이여서 글로 쓰기는 참 어렵지 않으나 40도의 고열로 입술이 초들초들(바짝바짝) 마르고 골이 빠개지는 듯 아픔을 당하며 주사 한 대 맞지 못하고 강알음을 앓을 때 같아서는 빨리 숨이 꿀꺽하고 넘어가길 얼마나 바랬었는지 모른다. 이 천한 목숨이 질기기도 질겨 사과 한 알 못 먹어도 살아났고 열이 떨어져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고, 아이들은 장마당으로 돌아다니며 여자애들을 덮치거나, 도적질은 못하고 남들이 흘린 것, 낟알이라고 생긴 것은 다 주워 먹고 있었다. 작은 딸애는 음식 대에서 국수를 말아 파는 것이 있었는데 손님이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다가 ꡒ국물을 버리지 말고 나를 주세요ꡓ하며 빌어먹고 살았다. 언젠가는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3일 동안 배추 속은 뽑아 군부대에 실어가고 껍질을 주워 삶아서 끼니를 메우며 산적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광경을 보는 듯 하다. 엄마 없는 아이들이 다들 살고 있었고 엄마가 없는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간고한 나날을 겪으며 살았었다. 나는 여기서 나의 책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부모들이 역할을 잘못하여 아이들의 어린 가슴에 이런 쓰라린 상처를 남겨 놓았다고.

99년 가을에 산에 도토리가 많이 열렸었는데 나는 그때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비닐 장막으로 막을 쳐놓고 도토리 줍기를 하였다. 그때 남편도 있었건만 돈은 없고 활력이 없으니 보탬이 되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개인들이 산에 심어놓은 강냉이를 훔쳐 먹으면서 도토리를 주웠는데 산속엔 뱀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 생활이 어렵다보니 신을 제대로 신은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큰 딸도, 작은 딸도 신이 찢어진 것을 천을 대서 기워 신으면 하루 산에 갔다 오면 또 찢어지고 저녁이 되면 딸애의 신을 깁는 것이 나의 일과이기도 했다. 아들은 천막을 지키고 딸애와 내가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는데 배가 고프니 산을 타는 일이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글로 쓰자니 참 간단히 헐하게 적게 되니 못내 아쉽다. 비가 오면 천막이 새서 눕지를 못하고 입은 채로 밤을 밝혀야 했고 나무가 젖어 불을 피우기 힘들어 애먹던 일, 아이들 신발이 찢어져 발을 찔려 도 엄마가 속상해한다고 천 오라기로 신발 위를 동여매고 날 따라 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우리 작은 딸애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기워 신고 기워 신고 하다가 결국은 더는 기울 형편이 안 되어 신을 버리고 맨발로 걸어 다녔다. 그때 나이 12살인지 13살인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어느 해 봄인데 그 해에는 중국에서 약초를 많이 실어갔는데 삼주뿌리 4kg에 밀가루 1kg씩 바꾸어주어서 온 회령시 백성이 산이란 산을 벌 둥지로 만들어 놓았던 일도 있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죽을 한 사발 먹고 도시락으로 비닐봉지에 죽을 싸가지고 떠나면 20리를 걸어 11시가 되어서야 산에 도착한다. 산에 오르고 나면 죽이 다 소화되어 배가 고픈데 꽉지질을(나물을 케는 모습) 1시간 정도 하고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점심 죽을 먹고 나면 또 꽉지질을 해야 하는데 2시간만 하면 두 무릎이 자연이 땅에 떨어진다. 그러면 두 무르팍을 땅에 붙이고 꽉지로 삼주뿌리를 캐어 집에 와서 저울로 뜨면 4~5kg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렇게라도 계속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참 다행이었다.(계속)  




[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2 (2007-11-24)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월 >

이 시기에 나와 짝꿍이 되어 같이 다니던 동무가 있었는데 그의 친척뻘 사람이 유선에서 살았는데 사람을 잡아먹다가 걸려서 붙잡혀갔다고 하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리흥섬이라는 자가 꽃제비 아이 3명을 잡아먹고 네 번째에는 잡아서 팔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네 번째 잡힌 아이의 부모는 내 남편의 동무인데 유선 내화물 공장 한개 작업반 세포비서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내철이라고 하였는데 술을 몹시 좋아 하였다. 나의 남편과 한 작업반에 있으면서 나의 남편은 행정일꾼, 그는 세포비서로서 친했었는데 아주머니는 량강도 내기로서(출신으로) 살기가 힘들어 딸애와 아들, 남편을 버리고 본가 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후 살기가 정말로 힘이 드니 나의 남편 동무 내철이가 아주머니를 찾으러 량강도로 간다고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얻어먹고 떠난 것이 그와 마지막이었다. 후에 직장에 통지가 온 것이, 량강도로 가던 중 이전에 간이 나빴었는데 그 병 때문인지 아니면 굶어죽었는지 그가 죽었다고 통지가 와서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후에 딸이 외갓집을 찾아간다고 떠났는데 그도 무소식이었다. 아들이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집을 몇 번 이사하다 보니 그들과의 관계도 끝이 났었는데 후에 범죄자 흥섭이의 자백에서 내철이 아들을 잡았다고 하였다고 하여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빵을 주겠다고 얼려서(꼬셔서) 집으로 데려와 빵을 한 개 주어 아이들이 먹을 때 벽장보를 씌운 곳에서 도끼로 머리를 까서 죽였다고 한다. 죽은 아이들 발목 손목을 떼어 내포들을 끓여서 집에서 소비하고 가죽을 벗기여서 각을 뜯어 염소고기라고 장마당에 팔았단다. 뇌수는 간질병화자, 결핵환자들에게 강냉이 4kg과 바꾸어 먹었다고 한다. 밸(창자)을 가지고는 순대를 해서 팔았는데 그 집 순대가 제일 맛있다고 하여, 나오기만 하면 제일 먼저 팔렸단다. 옆의 장사꾼들도 많이 사먹었지만 후에 조사가 들어가니 그 누구도 무서워서 사먹었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흥섭이네 가족 딸, 13살 아들, 15살인지 하는 애와 아주머니를 비롯해서 뇌수를 알면서 팔아먹은 사람, 알면서 산 사람 모두 11명을 공개처형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월, 정말 말을 듣고는 믿기 힘든 현실이다. 그 시기에만도 정 배고프면 중국으로 갈 생각은 못하고, 중국으로 가면 나라를 배반하는 반역자로만 생각하였기에 이런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 첫 번째 탈북 >

그래도 백성들의 입에서는 장군님께서 언제면 먹을 것을 주시려나 하고 믿고 기다리며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나도 어리석게 한 해만 지나면 일 없겠지(괜찮겠지) 하며 또 한해 기다리다가 더는 도저히 배고품을 타협할 수가 없어 97년 봄에 장맛비로 두만강이 불어난 물도 마다하지 않고 중국으로 도주하였다. 그때 집에는 강냉이 4kg정도만을 남겨놓고 생명을 계약할 수 없는 초행길을 떠났었다. 물이 불어 선키에 목까지 오는 물을 죽기 살기로 건너 중국에 간 후 '세상에 이렇게 좋은 세상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내가 사는 내 나라가 제일로 좋은 줄 알았었는데, 분명 꿈은 아니었다. 중국에 와서 처음 한번은 중국에 있는 친척들의 방조(지원)로 굶어가는 집에 지원을 보낼 수 있었고 그 후부터는 나도 장사를 하고 식당에서 일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몇 번을 붙잡혀 곤경도 치르고 죽을 뻔한 고비도 몇 번을 넘겼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일까지 겪으면서 천한 목숨 길기도 길어 결국은 하늘의 도움으로 여기 대한민국 땅에 들어섰고 지금처럼 글도 쓰게 되었다.


<타향살이>

1999년도부터 나는 정식으로 중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식당일을 시작하였다. 집에 두고 온 세 자식 생각으로 시집을 가라는 중국 조선족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신분을 숨겨가며 객지 생활을 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어느 식당이나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무서워서 쓰려고 하지 않았고, 정작 쓴다고 해도 월급도 낮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였다.

제일 바쁠 때가(힘들 때가) 호구 조사와 신분증 검사를 할 때인데 그때마다 사람 운명이 10년씩 감소되는 것 같았다. 멀리서 공안차만 보아도 가슴이 방망질을 하고 공안복 입은 사람만 보아도 괜히 눈을 굴리면서 피해 달아났었다.

내가 제일 처음 취직했던 식당이 한족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인데 손님이 많았었다. 한족말은 니디워디도(아무것도) 모르니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대뜸 알고 일만 잘하면 보호해준다는 식당 주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오전만 해도 20L가 들어가는 물통째로 5~6개 허귀가마를(전골냄비) 회사주(쇠줄로 엉켜 만든 수세미)로 가시는데 손이다 비어지고 힘을 너무 줘서 씻다보니 어깨가 쓰셔났다. 내 일을 다 하고도 한족 아이들의 일을 두어 주고,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식당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하려니 여섯 달을 하고나니 더는 팔의 뼈가 쓰려서 지탱하기 힘들었었다. 그래도 월 말이 되면 나오는 월급 때가 제일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이 돈이 빨리 북한에 있는 내 가족들의 손에 넘어가야 할텐데. 장에 나가 남이 먹고 남은 국물을 얻어먹던 둘째 딸 생각과 집을 팔면 속도전떡(강냉이를 가공해서 만든 가루떡) 한번만 실컷 먹어 보게 해달라던 막내아들 생각으로 밤마다 눈물로 세월 보낸 날은 또 얼마였던지. 제일 눈물 날 때가 식당에서 명절이 되면 복무원들은 자기 집으로 가면서 부모들의 선물을 산다고 야단법석인데 오갈 데 없이 식당에 처박혀 피주(맥주)와 싸움질 할 때와 손님들이 먹고 남은 음식 중에 먹을 만한 것이 많은데, 그 음식을 뜨물동에 버릴 때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이라도 가져다 먹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곤 하였다.

하루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복무원이 와서 “아주마이 김일성 마크를 단 양복쟁이 조선사람 3명과 중국사람 4명이 우리 식당에 왔습니다.”하고 알려주었다. 나는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36개 줄행랑을 쳐서 음패 하였다가 30분이 지난 다음 살금살금 기미를 보려 다시 식당으로 와보니 그들은 우리 식당에 음식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노루 제 방귀에 놀라 뛴 격 이였다. 꽤 오래 앉아 먹고 나갔는데 중국 사람이 결산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이 결산하였다. 그들이 이날 먹은 돈이 중국 돈으로 1500원어치를 먹고 갔다. 1500원이면 내가 이집에서 3달을 죽게 일해야 가질 수 있는 월급의 숫자이다. 분명 김일성 마크를 단 사람이 결산하였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저렇게 돈을 잘 쓰는지 부럽기만 했었다. 나는 그 식당을 그만두고 그 후로는 한국음식을 배우기 시작하여 한식스프(한국음식요리사)로 일을 하기 시작하여 2001~2003년까지 연길에서 800원의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수모를 얼마나 당하고 눈물은 얼마를 흘렸으며 싸움은 또 얼마를 했었는가. 지렁이도 밝으면 꿈틀한다고, 참는 것도 정도인 것이었다. 신분이 없으므로 참고 또 참다가도 너무해도 정말 너무 할 때에는 싸움질도 한 적이 있었다. 붙잡혀 나올 때 조선으로 이동하는 동안 보면 그래도 시집을 가서 중국 조선족 남자를 얻어 살던 여자들은 얼굴에 살도 보기 좋게 있었고 편안하게 살고 있었고, 한족 남자들한테 팔려가서 살던 여자애들은 고생 고생하여 손이 썩고 발이 밴 아이도 있었었다. 중국에서 사는 동안은 마음고생은 많이 하였어도 배고픈 고생은 하지 않아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내가 식당일을 하던 2000년도에 나의 남편이 나를 만나러 연길에 몰래 들어와 내가 모아놓은 돈을 가져가서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그도 고생을 많이 했었다. 한번은 돈을 가지고 가다가 택시 운전수의 밀고로 룡정 공안에 붙잡혀 돈과 가져갔던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조선으로 북송되어 곤경을 치렀다고 한다.

밖에 눈이 내려 온 산과 들이 하얗게 덮히면 ꡐ회령의 처마 낮은 내 집 지붕과 마당에도 눈이 저렇게 덮혔겠지ꡑ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고, 비가 오면 ꡐ집이 낡은 집이여서 비가 새겠구나ꡑ하는 생각으로 눈물이 나오고 일할 때 밖에서 아이들이 엄마 찾는 소리가 나면 내 아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아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면 빌어먹던 새끼들 생각이 나 저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저렇게 자유로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가족과 헤어져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보고 싶어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지, 밤마다 꿈에서 아이들이 배고파 떠돌거나 아이를 잃어버려 헤매다 울며 깨어나는 날은 얼마나 많았던지... 어느 날엔가는 꿈에 아들이 나타나 ꡐ어머니 배고픕니다ꡑ라고 하여 깨어난 것이, 온 밤동안 잠이 오지 않고 눈물로 날을 밝힌 적도 있었다. 글재주가 있고 말재주가 있으면 더 자세히 감정 가게 쓰면 좋으련만 재주가 없다보니 간단한 줄거리로 쓰려니 좀 아쉬운 점이 많다.


< 비인간적인 조선족 인신매매꾼들 >

나는 생각 끝에 2002년도에 나의 큰딸을(그때 나이 18세) 중국으로 데려 왔다. 조선에서 배고프게 고생을 하며 살기보다는 입 하나라도 덜면 남편도 수월할 것 같고 나도 혼자 벌기보다는 같이 벌면 좋을 것 같아서 옆에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따끈한 친척이 없고 나도 숨어사는 신세에 딸의 신변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이러다 잡히면 혼자인 몸이니 크게 근심할 일은 없었건만 딸애 걱정으로 더욱 발편잠을 못 잤다.

내가 일하던 대동강 식당 로반 주인과 잘 말해서 월급을 받지 않고 일을 시켰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한 달 가량 일을 하였는데 대동강 로반이 자기 시누이가 북경에서 식당을 경영하는데 연변은 무서우니 북경 식당에 가서 일을 시키자고 하였다. 연변보다 검사도 덜하고 젊은 아이들은 한족굴에 가서 한족말을 빨리 배워야 한다는 말에 또 대동강 식당 로반의 사람 됨됨을 보니 별로 의심이 가지 않아서 승낙을 하였는데, 딸아이가 북경으로 이동한지 일곱 달 만에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알고 보니 대동강 로반의 시누이라는 년이 내 딸애를 중국 돈 만원에 목단강으로 팔아먹고는 나한테는 딸애가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하였다.

거짓이란 시간이 지나면 꼭 들창(들통) 나기 마련인데,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할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혹시 거짓 신분을 말한 적은 있지만, 이런 경우에 거짓말을 하면 무사히 넘어간다고 믿는 비인간적인 중국 조선족 사람들...
배고파 먹고 살기 위해 중국으로 온 수많은 조선 여성들을 팔아서 자기 리속(실속)을 채우는 양심 없는 인간들이 많았다. 단편적인 한 가지 실례로 나의 딸이 직접 목격한 사실인데 중국 길림성 설한 안에 있는 중국 조선족은 하반신 불구이지만 큰 양어장을 경영하는 자였다고 한다. 집도 크고 좋은데 그 집은 큰 지하실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 집 주인은 중국의 전국 각지에 줄을 놓아 조선의 불쌍한 여자들을 팔았고, 눅게(싸게) 사서는 비싸게 파는 무서운 인신매매꾼 이였다.

내 딸도 이 집에 끌려갔었는데 처음에는 잘 먹이고 옷도 고운 것을 사 입혀서 얼린단다(어르다). 그러다 남자를 정해주는 것이 병신이든 늙은이든 관계없이 돈만 많이 주면 팔아넘긴단다. 팔려가는 아이를 보며 말하는 소리가 갔다가 싫으면 도망쳐 자기 집으로 다시 오면 돈 2000원을 주겠다고 한단다. 도망만 쳐서 전화만 하면 자기들이 찾으러 가겠다고 전화번호까지 대준다고 한다. 우리 딸애가 그 집으로 목단강의 한 장사꾼한테 넘겨 끌려갔을 때에 그 집에는 이미 한 여자아이가 와있었는데, 시집을 안가고 일을 하겠다고 하니 그를 남자 둘을 시켜 죽도록 때려서 지하실에 처넣더라고 한다. 우리 딸애가 보고는 너도 시집을 안가겠다고 하면 저렇게 된다고 하였단다. 그 집에는 그 집일을 해주면서 주인의 일을 거들어주는 남자애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주인이 남자애들보고 하는 소리가, 매 맞은 계집애가 저녁까지 정신이 들지 않으면 밤에 양어장에 처넣으라고 말하는 소리를 우리 딸애가 엿들었다고 한다. 겁에 질린 딸애는 시집을 안가겠다고 말했다가 더는 그런 말을 못하고 장사꾼들의 손에 끌려 화북성으로 팔려가서 집에 계속 가두어 놓고 전화도 못 치게 하여 나와의 연계를 못가지게 하였다.
한 달 만에 겨우 몰래 전화를 걸어와서 딸애의 소식을 알았고 그나마 엄마가 있으니 딸애는 찾아왔으나 조선의 수많은 여자애들이 이런 억울한 곤경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설한에 있는 조선족 하반신 마비 장사꾼의 손에서 놀아난 여자애들은 얼마이며, 또 누가 알랴. 그렇게 매를 맞아 깨어나지 못해 양어장에 처박힌 아이들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배가 고프니 일시 주린 배를 채우려고 부모 모르게 두만강을 건너 와서는 나쁜 사람을 만나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조선에 있는 부모들이야 좋은 신랑 만나 잘 살기만을 기대할 뿐 그들의 행처를 알 리가 없었다.

여기 대한민국에 온 북한인들 가운데 중국에 들어온 딸애들의 행처를 알지도 못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도 딸애를 찾을 때 곡절도 많이 겪고 애간장도 많이 태웠으나 그래도 부모가 곁에 있으니 그나마 찾을 수가 있었지만, 엄마 따로 자식 따로 있으면서 소식도 모르고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조선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도 엄마가 먼저 중국에 들어온 다음 딸애가 엄마 찾아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만 듣고 한국으로 오다보니 딸애의 행처를 몰라 좋은 일,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딸애를 그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엄마도 있다. 그들을 볼 때면 나의 지난 일이 다시 생각나고 남의 일 같지 않아, 같이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누구나 남의 말 하기는 쉽지만, 정작 그들과 같은 일을 겪어본 사람들은 이들의 아픈 가슴을 이해한다. 물론 나도 중국에서나 남한에서 우리 북한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안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중국이나 한국에 와서 다는 아니더라도 몇몇 사람들이 누구나 아픈 상처 없이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하나도 없으련만 정신 차리고 사는 대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날라리로 살 궁리를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으므로 후배들인 우리들에게도 영향이 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