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온성 공개처형 전말.. 집중 난사에 상반신..




북한은 지난 19일 제네바 인권위사회에서 공개처형은 92년 한 건만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98년 8월 탈북해 99년 12월 입국한 조영철(33·북한인민군 교관 출신)씨의 증언은

북한당국의 주장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8년 7월1일 함경북도 온성군 남산다리 밑에서 나의 형 조성철을 비롯한 6명이 공개

처형 당했다.
이 사건은 ‘안기부간첩단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공개처형은 대개 경제범에 국한되고 정치범은 비밀처형하는 것이 관례인데 보위부에서

직접 공개처형을 집행하기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나도 함께 체포됐으나 극적으로 처형을 면했다.



현장목격자들에 의하면 나의 형은 ‘악질 두목’ 으로 간주돼 무차별 사격을 받아 상체가

거의 없어질 정도로 잔인하게 공개처형 됐다고 한다.


함께 공개처형 당한 사람들은 형의 친구들인 림춘삼(43) 천익선(33) 윤창만(35)

김용수(33) 와, 가족들과 함께 탈북하려다 실패한 정광(33)이다.


이들의 죄목은 “남조선 안기부와 손 잡고 탈북자를 남조선으로 넘기고 밀수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도와준 탈북자중에는 주체사상탑 설계에 참여했던 장인숙(60)씨 가족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 가족 탈출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둘째 아들 정광씨의 가족까지 탈출을 시키려다

정광씨가 보위부에 체포되는 바람에 우리도 모두 붙잡히게 됐다.


정광씨는 아내에게 탈북을 설득하다가 아내의 신고로 보위부에 체포됐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우리와 함께 밀수를 했던 먼친척벌 되는 조선족인 조원철은

도문시에서 보위원들에게 납치돼 북한 보위부로 끌려와서는 어디론가 행방불명 됐다.



형과 나는 저녁 9시쯤 온성군 남양노동자구의 집에 있다가 보위부 요원들에게 붙잡혀

온성군 보위부 감방에 끌려갔다. 997년 9월 30일이었다.


온성군 보위부건물은 ㄷ 자형에 10여개의 감방과 취조실 등이 있었다. 독방은 1평 남짓

이고, 일반 감방은 5~6평정도 됐다. 예심실(취조실)에는 형틀과 각목, 쇠갈구리, 가죽채

찍, 쇠줄, 바께즈 등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벽에는 피가 묻어 있어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름이 끼쳤다.



나와 형은 감옥에 들어온 첫날부터 무차별적인 고문을 받았다.


특히 형은 ‘두목’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가혹했다. 뱃심 좋고 입 무겁기로 소문난 형이

라 모든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형의 두 팔 두 다리가 각목에 낀 채 관절이 뽑혀나갔고 총 개머리판에 맞아 앞 이빨이

모두 부러졌다. 형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 졌다.


나에게도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옷을 모두 벗기고 의자에 앉혔다.
두 팔과 다리를 꽁꽁 묶힌 채 전기고문이 가해졌다. 몇 차례 전기투입으로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이어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일주일간 잠을 못잔 채 각목으로 맞았다. 거꾸로 매달린 채 매를 맞으며 고문을 당하기

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안기부 돈은 얼마나 받았는지 무슨 간첩임무를 받았는지 대라고 매일 고

문을 가했다.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할수록 고문은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화장실 변기에 코를 박고 밤을 지새는 고문까지 받고 나니 거의 죽기 직전까

지 됐다.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보위원이 내리치는 쇠 갈구리에 머리를 맞고 즉사하는 모습과 팔다리 관절을 꺾는 모습

등이었다. 고문 받다 죽으면 그날로 끌어내다 어딘가에 묻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내가 기억하기로도 수십 명은 족히 된다.

나를 제외한 6명은 감옥에서 끌려나갔다. 이때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을 봤다.


입 부분이 완전히 만신창이 돼 있었다. 이빨은 다 부러졌고 척추가 부러지고 팔다리가

너덜거리는 채로 양옆에는 보위원이 떠받들고 있었다. “너만은 꼭 살아서 부모님을 모

셔라”는 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형은 나에 대한 혐의까지 모두 뒤집어 썼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공개처형 당했다.



그후 나는 함경북도에 있는 정거리 제12교화소로 이송됐다.


나에게도 이미 내부적으로는 총살 승인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총살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위부 10개월 간의 고문과 교화소의 강제노동으로 몸무게가 87kg에서 46kg이

됐다. 그나마 몸에 붙은 살은 퉁퉁 부어있었다.


교화소에서 예비 사망판정을 받았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정이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들것을 가지고 나를 실으러 왔다. 일어서지도 못한 채 달구지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3개월 간 대소변을 받아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결국 나를 걷게 만들었다.
형의 복수를 위해 보위부감방을 날려버리겠다고 친구에게 한마디 한 것이 또 보위부에

보고돼 다시 체포되기 직전에 두만강을 넘었다.


중국 왕청 연길 등에서 4차례나 보위부추적조와 맞닥뜨렸다. 다행히 특수부대에서 배운

무술이 나를 구해주었다. 중국과 동남아국가를 거쳐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보위부 감옥과 취조실에서 자행되는 천인공노할 고문과 살인행위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견딜 수 없다. 또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무참하게 죽은 형과 그의 친구들을 생각하

면 지금도 잠을 이룰 수 없다.






출처 : 북한민주화운동본부



  [황장엽강좌]김정일 제거가 최우선 과제
written by. 황장엽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야 되겠지만 결론만 오늘 얘

기하게 되면 북한을 우선 중국식으로 개혁개방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중국

식이라는 것을 자꾸 얘기하는가 하면 중국식으로 개혁 개방한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봐도 그것이 결국 수령제도를 철폐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한다는 말입니다. 그것

이 하나이고, 또 중국이 이렇게 하게 되면 반대할 구실이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

꾸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김정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김정일을 제거

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된 다음에는 어떤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

은가 하면 남북 연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 김정일을 제거하지 않고 시장경제를 도입

하지도 않고 연방제를 실시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여기를 적

화시키고 김정일에 의해서 통일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절대 반대합니

다.

그러나 김정일을 제거하고 수령제도를 철폐하고 그렇게 하고서 시장경제를 도입한 조

건에서는 그것을 어느 정도 공고화된 것을 봐서 남북 간의 연방제를 어떤 형식으로든

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자꾸 중국이 여기서 혼자서 다 차지하지 않을까 자

꾸 이런 걱정을 합니다. 그렇게 안 됩니다.

연방제를 실시하게 되면 미국과 한국이 힘을 합해서 북한을 자꾸 민주화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되면 중국과 미국이 완전히 동맹관계로 결합되지 않은 조건에서도 우리

측이 유리합니다. 아직은 중국이 미국에 대항 못합니다. 중국이 계속 차지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은 영토적인 야심은 없습니다. 중국식으로 개혁

개방하는 조건에서는 아무 문제도 될 것 없습니다.

설사 중국편으로 북한이 기울어진다고 하더라도 중국식으로 개혁개방만 하게되면 우

리에게 유리합니다. 우선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수령제도를 없애고 시장경제만

도입하면 우리가 연방제를 실시하는데 대해서 중국이 반대할 명분이 없어집니다. 그렇

기 때문에 한번 양보해서 완전히 중국 편으로 가라, 그저 국가적인 관계없이, 중국편이

든 아니든 관계없습니다. 어쨌든 수령제도를 없애고 시장경제만 도입하면 됩니다.

이렇게 돼서 실시된다면 봐서 연방제를 실시한다, 그때 정말 6자회담이 필요합니다.

다 모아놓고, ‘우리 연방제 실시하려 한다’고 하면 중국이 왜 반대하겠습니까. 반대할

리도 없지만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그 반대를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

에서든 우리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식으로 개혁개방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가 강조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이 실현되게 되면 봐서 연방제를 우리가 실시하고 연방제

가 실시된 다음에는 미국과 한국이 단결해서 북한을 더욱 민주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 남북의 통일을 민주주의적인 원칙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있는 좌파 정권을 교체해서 자유 민주주의적인 정권

으로 우리가 개편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것입니다. 한미

동맹을 강화하자면 지금 좌파정권으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정권을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적인, 보수적인, 민주주의적인 정권으로 교체하고 그 전과 같이 한미 간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첫째적인 과업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두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한미동맹이 강화되는 조건에서

한국과 미국이 단결해서 북한의 군사적인 도발을 절대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핵무기를 쓰는 한이 있더라

도 절대로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내정간섭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가는데 또 붙들어 옵니다. 중국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내정간섭이기 때

문에 못합니다. 그냥 둬야 합니다. 그것을 얘기하는 것은 우리 정부나 미국 정부가 할

것이 아니라 NGO나 종교단체나 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 측에서는 내부

에서 탈북자들을 못나가게 하는 것은 간섭 안합니다. 그러나 한발자국이라도 국경을 넘

어가는 것은 붙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용서 못한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권 밖

의 행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적인 질서입니다. 폭력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예를 들어서 쿠웨이트

를 이라크가 침략했을 때 그때 때려야 합니다. 그때 그것은 침략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

니다. 그때에야 이라크까지 들어가서 그 정권을 뒤집어엎고 민주화를 해야 합니다. 그

러나 그것은 안하고서 무슨 대량살상무기 만든 흔적이 있다, 이런 얼떨떨한 소리를 해

서 군대를 내 보내면 됩니까. 명분이 잘 안 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정간섭은 절대 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코소보 사태라든가 이렇게 돼서 전 세계적으로 그것을 반대하는 동맹이 형

성됐을 때는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는 주권을 그냥 존중히 여

기는 데에 대한 원칙이 있는데, 내정간섭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북한은 중국과 연계

돼 있기 때문에 중국과 떨어져서 북한을 생각한다는 것은 안 됩니다. 중국과 떨어져서

북한과 싸운다는 것은 그림자하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의 명맥은 사실상

종국적으로는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데 중국을 대상으로 안하고 자꾸 김정일 정권을 대

상으로 한다는 것은 그림자와 싸우는 것입니다. 헛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첫째로 세워야 될 것은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되는 것이고 한미

동맹을 강화하자면 우리 정권을 민주주의적인 정권으로써 교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정간섭을 반대하고 철저하게 군사적 도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 다음

에 무엇을 해야 하겟습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가 사상전과 고립 와해 전략을 실시해야 합니다. 저놈들은 여기 에 대

해서 사상전의 대상을 무엇으로 거론합니까. 여기서 사상전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사상

적인 신념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인민의 사상적 신념이 무엇입니까. 민주

주의 때문에 이런 기적적인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다음에는 한미동맹 때문에 달성했습

니다. 이 두 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신성불가침성에 대한 확신, 한미동

맹의 신성불가침성에 대한 확신.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국민의 정신이 돼야 합니다. 이

것이 우리 사상적인 기둥이 돼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김정일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없애기 위해 계속 한미 간을 이간시키고 여

기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자꾸 터무니없이 주장하고, 군사파쇼 독재라고 주장합

니다. 그리고 미국은 제국주의고 한국은 식민지이고.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데 계속 거짓말을 하니까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히틀러의 선전 상을 했던

괴벨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을 계속 세 번만 하게 되면 믿는다”고 말입니다.

자꾸 새로운 것을 얘기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원칙적인 것, 제일 허

물어야 하는 것을 계속 얘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수령절대주의입니다. 수령을 절대적으로 옹

호하고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입니다. 이것을 허물어뜨려야 한

다는 말입니다. 거기서 가장 아파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아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습적으로 물려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자꾸 공격해야

합니다. 이제 여기 사람들이 자꾸 하는 것처럼 공개총살을 반대한다, 인권유린이다. 이

러는데 거기서는 공개총살을 인권유린이라 생각 안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서 군대생활을 10년 13년 이렇게 하고서도 그 끝난 다음에도 탄광

에 내보내서 훈련을 시키면서 계속 한다, 이것은 말은 못하지만 그들의 원한이 뼈에 사

무쳐 있습니다. 자꾸 얘기를 해야 합니다. 또 300만의 사람을 굶어죽였다 자꾸 이런 얘

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중요한 문제들을 자꾸 얘기해서 우리가 사상전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 힘입니다. 정신적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자꾸 애써야 하고 그 다음에 집단적으로 협조하는 힘이 기본이

고 그 다음에 물질적인 힘입니다. 이 협조하는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첫째는 중국과의 연계를 끊어놔야 합니다. 중국과 이간시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러시

아와 이간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중국 인민의, 중국 사람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이것

을 자꾸 중국 사람들한테 얘기해야 합니다. 중국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러시아 사람

들이 모욕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다른 나라에 가서 하는 것도 다 말해야

합니다. 일본의 고이즈미도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김정일을 자꾸 도와주는 것입

니다. 이것은 몇 억 달러 주는 것보다 더 큰 원조입니다. 독재국가에서 자꾸 수령의 권

위를 높여준다는 것이, 그것이 다입니다. 미국의 민주당의 올브라이트도 찾아가고. 쓸

데없는 일이라는 것인데 뭣 때문에 찾아갑니까.

여기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찾아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소. 중국이 없이는 견디지 못

하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협력을 못하도록 자꾸 끊어야 합니다. 돈 얼마 들지 않습니다.

전쟁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필요 없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 내부를 사상적으로

와해시키는 데에 우리 탈북자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탈북자들 이용하기 위한 대책을 세

운 게 있습니까. 6자회담을 그런 방향에서 다루어야 하겠는데 김정일을 세계적?막? 고

립시키는 방향에서 하고 있습니까. 국제적으로 이놈들이 자꾸 거짓말 하면서 돌아다닙

니다. 마약 거래하죠, 위조지폐 제조하지, 많은데 이런 것들을 자꾸 폭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하기 위해서 출신성분을 보는 것, 김정일의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과

접촉도 못하게 하고 외국가서 공부시키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시신 궁전을 건축하기

위해 몇억달러를 쓰고. 이러한 것들을 자꾸 폭로해서 내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

이 다 김정일 때문이다 이것을 강조해야돼. 이런 방향에서 우리가 대북전략을 세워서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 탈북자들이 앞장서서 그런 방향으로 끌고 나가야

합니다.(konas)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前 북한노동당 비서
출처: 자유북한방송 http://www.freenk.net/



지난 8일 서해상에서 고무보트를 탄 채 표류해 남쪽으로 왔다가 본인들 의사에 따라 북

송된 북한 주민 22명 전원이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됐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어 관계기

관들이 진위 파악에 나섰습니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황해남도 보위부가 귀환한 주민 22명을 지난

주초 곧바로 비공개 처형했다는 소문이 황해남도 주민들 사이에 퍼졌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처형 여부는 모르나, 그 주민들이 북한 해상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어로에 나섰던 만큼 어떤 내용이든 처벌받았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지옥"-북한 탈북자의 수기  

2006/11/19 오후 5:57 | 국가 기도정보  

살아있는 지옥
서옥화(가명)


편집자가 독자에게

이 글은 현재 중국에 거주 중인 탈북자 서옥화(가명)씨가 2003년 12월 중국 공안에 체포

, 북한으로 송환되고 나서 7개월 동안 겪은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일부 우매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수십만 명이 해외에

불법 체류하고 있다면서, 나아가 전 세계에는 자기나라를 떠나 이국 땅에 불법 체류하

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탈북자들도 이러한 ‘중국내 불법체류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

니다. 옳습니다. 형식으로만 따지자면 탈북자들은 중국 내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사람

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글을 읽어본다면, 탈북자들이 다른 나라의 여느 불법체류

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송환된 불법체류자들을

이렇게 처벌하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송환된 탈북자들의 처벌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관대해졌다고 이야기합

니다. 옳습니다. 과거에 탈북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던 것과 달리 이

제는 탈북 횟수와 중국에서의 행적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고 그 기간도 많이 짧아졌습니

다. 너무 많은 탈북자가 양산된 탓도 있고, 북한인권·민주화운동 단체들과 국제사회의

끊임없는 제기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글을 읽어본다면

, ‘많이 나아졌다’는 지금이 이 정도인데 과거에는 얼마나 더 참혹했을지 상상도 못 할

것입니다.

서옥화씨는 다시 탈북에 성공하였으며 지금 구호단체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대학노트

서른 장 분량으로 빽빽이, 그녀는 7개월 동안 겪었던 일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보내왔습

니다. 자신이 수감되었던 구류소, 단련대 등의 구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벌의 방

식에 대해 그림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글과 그림을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그 지옥의

참상을 알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겪었던 고통의 깊이를 어찌 가늠조차 할 수 있겠습니

까?

지금 그녀는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딸을 중국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

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민주화되는데 자신의 힘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건투를 빌며 가슴 아픈 이 기록을 독자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먼 옛날

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10개월 전의 일입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웃 나라, 우리 민족의 땅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 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이글의 각종 지명은 모두 실제와 다르게 표기했음을 밝혀둡

니다.

강냉이밥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의 모국(母國)을 사랑할 것이다. 나 역시 조상의 넋이 묻히고

자기의 태를 묻은 내 고향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고향을 버리고 산 설고 물 선

중국 땅으로 오게 된 데에는 피눈물 나는 사연이 있다.
1998년 나는 5살 난 딸애를 데리고 중국 땅으로 왔다. 당시 나의 나이는 27살이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식량난은 우리 집에도 큰 재난을 가져왔다. 1994년에 딸애를 낳고

시름시름 않던 나는 림파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는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딸애와 함께 살았는데 우리 집은 나 하나 밖에 노력자1) 가 없다보니 나까지 병이 나자

큰 고난에 부닥치게 되었다. 약을 사대야지 몸도 추세워야지 집의 가산을 다 팔아 병구

완을 하였지만 병이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집갔던 언니가 남편이 사망한 후 자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식솔은 단번에 여섯 식솔로 되었다. 씀바퀴, 냉이, 능쟁이까지 다 뜯어 먹어보고

느릅나무 껍질까지 벗겨 식량으로 이용해 보았으나 여섯 식구가 살기엔 너무 힘이 들었

다.

그러던 중 199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우리가족들은 돌피가루2)에 풀을 섞어

연명하였는데 아버지가 영양실조에 걸렸다. 며칠째 아버지가 않아 누웠지만 우리 집 형

편에 쌀미음 한 숟가락도 대접시킬 수 없었다.
“강냉이 밥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때 나는 굶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부르며 목

터지게 울었지만 불쌍한 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그렇게 떠나가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언니는 “사랑하는 동생아, 안녕!”하고 쓴 짤막한 글쪽지를 남겨놓고 1997년에 두

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그까짓 쌀 한줌이 뭐기에 사랑하는 아버지도 빼앗

아가고 언니와도 이별해야하는가!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기근으로 하여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도 많았고 길을 가다가 굶어서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집은 며칠째 굶다 일

곱 식구가 집안으로 문을 걸고 쥐약을 먹고 몰살하였다. 한줌 쌀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생명들을 빼앗아 가는가!

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금방 병을 앓은 후였지만 부지런히 일했다. 어머니와

함께 산비탈도 뚜지고3) 풀도 뜯었다. 하지만 심어놓긴 해도 집에 지킬 사람이 없으므

로 다 도둑 맞히고 나면 빈 밭만 뎅그렇게 남는다. 도적 맞힌 곡식그루를 붙잡고 통곡한

적은 또 얼마 였으랴. 그러던 중 나는 언니가 중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 길은 조국을 등지는 것뿐

1998년에 나는 중국으로 오려고 작심하였다. 1월의 맵짠 눈보라가 기승 치던 어느 날이

었다. 쌔근쌔근 잠든 귀여운 5살짜리 딸애를 무작정 등에 업고 길을 떠났다. 숨이 꺽꺽

막히게 사납게 불어치는 눈보라 속으로 허둥지둥 어머니와 함께 내처 걸었다. 사방이

눈에 덮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밭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눈이 무릎까지 오는데다 바

람이 부니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고 강냉이 그루터기에 찔려서 여간 발이 아프지 않았

다. 편리화4)를 신은 발은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가야한다, 죽어도 가야한다는 결사의 각오를 하니 겁도 나지 않았고 십리길도 멀지 않

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드디어 두만강 뚝이 바라보이는 큰 밭에 도착하자 마음이

긴장해졌다. 뚝 위로 왔다갔다 전지(電池) 불을 비추며 순찰하는 경비대 군인들의 모습

이 보였다. 1시 경이 되자 뚝 위가 조용해졌다.

어머니와 나는 조심조심 뚝을 기어올랐다. 뚝은 2.8m 가량높이로 쌓았다. 재빨리 뚝을

넘어서 내려서니 숲 속이었는데 5m가량 숲 속을 통과하니 괴물 같은 것이 여기 저기 우

뚝우뚝 솟아있었다. 긴장하여 머리카락이 쭈뼛이 일어났지만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군

대들의 보초막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한창서서 동정을 살피노라니 초막 안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손에 땀을 쥐고 초막사이로 빠져나와 20m가량 걸었는데

“누구얏!”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지불이 번뜩 비쳤다. 순간 큰 나무 뒤에 숨어서 꼼짝

않고 있다가 조용해진 후에 다시 냅다 달렸다. 검은 마수가 당장 뒷덜미를 움켜쥐는 듯

했다. 몇 분 후에 두만강 얼음 위에 들어서게 되었다.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 온통 물바

다가 되였다. 얼음을 다 지나고 중국쪽 기슭에 도착하니 안도의 숨이 나왔다.

훈춘에서 언니의 소식을 듣고 우리는 연길로 들어갔다. 언니는 연길시 모 식당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둘이 붙잡고 울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설움

다음날 언니와 함께 여기 저기 다니며 월세집을 구했는데 한달에 70원씩(한국돈 1만원

정도) 내는 집이였다. 말이 집이지 창고와 같았다. 규격이 맞지 않는 문틈으로 푸른 하

늘이 내다 보였고 눈보라가 칠 때마다 눈가루가 신발 벗는 곳에 날리어 들어와 쌓였다.

여섯 식구가 살기엔 너무나 비좁았다. 차례로 눕고 나면 발 디딜 자리도 남지 않는 10평

짜리 작은 집이였다. 이불도 없어서 6명이 담요 한 장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상반신은

동복을 덮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잤다. 아침에 자고 깨어나면 물이 다 얼고 손발이 까들

어 온몸이 쓰시고 아팠다. 아침을 먹으면 나무 주우러 가고 피발시장5)에 가서 시래기

도 주어왔고 언감자며 언귤도 주어왔다. 언감자와 시래기는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언귤은 녹으면 써서 먹기 힘들었다.

하지만 조선에 비하면 그것은 꽃이었다. 나도 한 달 후에 양고기 뀀6)집에 취직하였는

데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무척 애를 먹었었다. 어느 날 한족(漢族) 손님이 나를 보고

소금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그만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그 뀀점에서 쫓겨났다. 거기서 10일간 일했지만 5일분의 공자(급여)를 타가지고 나왔다.

이렇게 쫓겨나기를 몇 번, 피타는 노력 끝에 뀀점에서 쓰는 말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

다. 1년간 뀀점에서 일하면서 한족말(중국어)을 많이 익힌 후에는 그런대로 벌어먹을 수

있었지만 옷 한 견지(벌) 사입기도 바빴다. 3년간 이런 생활을 지속하였지만 고달픔보다

도 아이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2002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중 나는 뒤에서 오는 택시 차에 치

어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골도 조금씩 아파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 운명은 이리 지지리도 궂은가 하고 팔자타령만 하였다. 조선

사람이라는 단하나의 이유로 차 사고를 당하고도 경찰에 신고 할 수 없는 처지, 언제 붙

잡힐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사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당시 어머니가 한 성도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로 나가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나를 달래

시며 어머니가 나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었다. 이때부터 나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마음속으로 늘 감사했고 평안했으며 안정된 생활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하

나님 없으면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행복한 생활을 맛볼 수 있었다.

도문변방구류소

그러던 중 2003년 12월에 뜻밖에도 중국 공안에 온 가족이 체포당하게 되었다. 누군가

가 우리 식구를 고발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중국으로 온지 5년 만에, 꿈에서 조차 돌아

가기 무서웠던 나의 모국 조선으로 다시 나가게 되였다.
우리 가족을 연행하여 싣고 간 곳은 3층으로 된 변방대 사무실 이였다. 변방호텔 2층으

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생각했지만 냉정한 현실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지? 조선으로 말하면 보위부라는 곳이다.”
40대를 갓 넘은 듯한 경찰 하나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너 조선여자지? 이름은 000, 일 한 곳은 연길시 xx시장. 그리고 이 사진을 좀 봐, 네가

맞지?”
“맞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나는 더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7∼8명의 경찰들이 번갈아 가며

질문을 들이댔다. 거기서 문건작성이 끝나자 도문(圖們)변방대에 우리를 넘겼다. 연길

에서 40분간 차를 타고 도문에 도착하니 3m 높이의 어마어마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

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시커먼 색깔의 육중한 철대문이 꽉 닫혀져 있었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신호 장치

를 누르자 대문이 열렸다. 우리를 넘겨받으려고 두 사람이 나왔는데 우리를 데리고 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우성소리……. 2층으로 된 변방감옥은 원형이었는데 아래 위

에 사람들이 꽉 차있는 듯싶었다. 붙잡혀 온 조선 사람들이 아마 350명 가량 있는 것 같

았다.
“옷 벗어라!”
안경 낀 여자가 다가와서 한족말로 소리쳤다. 못 알아들은 척하며 벗지 않고 서있자 서

투른 조선말로 옷 벗으라고 또 소리쳤다. 우리와 함께 변방대로 이송된 세여자도(어머

니, 두 딸) 함께 있었는데 가족이듯 싶었다. 주변에 가득히 서있는 20세 좌우 남자 변방

대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처녀애들은 겉옷만 벗은 채 속옷은 벗지 않고 있었다.

속옷도 벗으라고 안경낀 여자가 말하자 “속옷은 못 벗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요.

”하고 항거했다. “션머(뭐라고)? 초우니마?7)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대답질이냐?”
안경 낀 여자가 발로 힘껏 그의 배를 걷어차자 그 처녀애가 “아이고” 하며 나뒹굴었다.

다시 밟으려고 또 처녀애에게로 다가드는 순간 그 애의 어머니가 막아서며 “너희들 나

를 때려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남자 변방대원 한명이 다가와서 그 처녀애의 귀박

을 후려치고 그 어머니도 후려졌다.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한참 분풀이를 한 후에 속

옷만 입히고 우리를 4호 감방(2층)에 끌어다 넣었다. 검사기로 우리 몸을 검사하고 몸에

지닌 돈과 사품(私品)들을 전부 회수하였다. 4호 감방에 들어가니 30여명의 여자들이 중

국각지에서 붙잡혀왔다.

조선에 가면 이것도 없어

비록 감방 안이었지만 난방시설도 괜찮았고 담요도 한 장씩 주었다. 저녁이 되자 살창

문 틈으로 “밥 주겠다, 줄 서!” 하며 변방대원들이 소리쳤다. 한사람씩 차례로 서서 밥

과 국을 받았다. 밥은 이밥이었는데 약간 뜬 냄새가 났고 국은 시래깃국 이였는데 잘 익

히지 않아 꼭 배추를 씻어낸 후 부스러기들이 물 위에 뜨는 듯했다. 간은 전혀 넣지 않

은 듯 슴슴한8) 국이었다.

“소금 달라!”
우리전체 감방은 밥을 먹지 않고 소금을 줄 때까지 단식했다. 어떤 날은 너무 짜서 국을

먹을 수 없었다. 나는 감방에 들어간 며칠간 밥을 먹지 않고 계속 남들에게 주었다.
“지금 여기 있을 때 부지런히 먹어둬. 조선에 가면 이것도 없어.”
우리 곁에 있는 한 언니가 귀띔해 주었다.
변방구류소는 6시에 기상하였는데 6시가 되면 “도문 변방구류소 규정”하고 쨍쨍한 여

자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울려나오면 일어나서 자리 정돈하고 세수를 한다. 그다음 아침

밥 타먹고 취급(조사)받으러 나간다. 취급을 다 받으면 빨간 도장을 다섯손가락에 다 찍

고 사진을 찍으면 끝난다. 애들이 다섯 명 가량 4호감방에 있었는데 철부지들이 좋아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아도 가만 뒀다.

변방구류소에서 11일간 구류되었다. 12일째 되는 날 우리는 온성보위부로 이관되었다.

소형뻐스에 앉아서 10분가량 달리다가 창밖을 내다보니 낯선 조선의 건물들이 눈앞에

안겨왔다. 이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5∼6년간 정든 모든 사람들,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이 가슴을 저몄다.
우리는 중국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꼭 다시 중국에로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중국에 와서 영원한 생명

- 천국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 축복

, 이 행복을 안고 살아가는 내가 무슨 고난인들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

언 29:25)
나는 하나님께서 꼭 우리가족을 지켜주심을 굳게 믿었다.

지옥문에 들어서다

온성보위부에 도착하니 5∼6명가량의 보위부 사람들이 우리를 인계받았다.
“개 간나새끼들, 빨리 빨리 걸어!”
5∼6년간 들어보지 못한 쌍스러운 욕지거리 소리를 들으니 진정 조선으로 왔다는 실감

이 새삼스럽게 났다. 저녁 6시쯤 되었다. 한손을 다른 사람과 같이 묶어왔는데 차에서

뛰어내리자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을은 듯한 낮은 단층건물이 우리를 반

겼다. 전기불도 없는 까만 나라였다. 나는 복잡한 속에서도 딸애의 손목을 꼭 잡았다.
“힘내야해, 떨지 말아. 그리고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생각만 해라.”
이렇게 말하며 딸애를 애무하는데 뒤에서 “야-야, 쌍 개간나새끼, 무슨 말이야. 아가리

못다 물개?”하고 나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너네 가족이지? 너는 3호 감방, 너는 복도로 가!”
이리하여 딸은 3호 감방에 들어가고 나는 복도에 구류되었다. 구류장은 1호, 2호, 3호

감방이 세 개였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터질 지경이었고 그 안에 앉은 사람들은 너무

더워서 증기욕을 하는 것처럼 땀을 흘렸다. 복도에까지 사람이 빼곡히 앉았는데 마치

콩나물시루와 같았다.

안에 들어가니 모두 번호를 불렀다. 나에게 98번이라는 번호가 차례졌다. 1, 2호 감방은

남자 감방이었는데 매질소리가 그칠 새 없었다. 구류장에 들어가면 간수들과 취급원들

에게 지켜야 할 보고법과 예모, 감방안의 규율부터 배워준다. “선생님 x번 소변 볼 수

있습니까?” “선생님 X감방 Y번 소변보고 돌아왔습니다.” “선생님 C번 취급받으러 나왔

습니다.”하는 따위였다. 만약 말을 잘못하면 쌍욕을 먹고 얻어맞아야 한다. 남자감방에

서는 만일 누가 보고법을 틀리게 하면 감방의 죄수조장이 잘못한 죄수를 죽도록 때린다

.

온성보위부에 들어간 첫날이었다. 내가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98번 나와!”

하고 소리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간수가 도끼눈을 하고 나를 쏘아봤다. 나는 뒤

로 걸어 나가 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징을 박은 구둣발로 나의 뒤통수를 찼

다. 다시 구둣발로 정수리를 내려 찼다.
“대가리는 왜 숙이고 있어! 너 졸았지? 내 정신 들게 해주마.”
그리고 귀뺨을 5∼6번 후려 갈겼다.
“정신 들지? 자리로 가봐.”
나의 두 눈에서는 불이 이는 것 같았다. 매를 맞은 아픔보다도 격분해서 울었다. 우리

딸애도 함께 울었단다.
그 다음날 이였다. 온성보위부에서는 밥을 주지 않고 국수 죽을 두어 숟가락 훌 마시면

없는 정도로 주었다. 그런데 들어온 지 5일 된다는, 은덕군에 살았다는 여자가 자기가

가져온 고추장을 죽에다 놓아먹다가 여러 사람들이 달라는 바람에 주위가 집중되었다.
“뭐야? 너 여기로 나오라. 왜 그래?”

간수가 은덕 여자보고 나오라고 했다. 그 여자가 주춤거리자 “빨리!”하고 소리쳤다. 그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자 “너 고추장 가져와. 입 벌려!”하고는 그 고추장을 그의 입에

마구 짜 넣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나눠먹은 세 여자도 나오라고 하였다. 세 여자도

나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나무곤봉으로 마구 내리쳤다. 한 여자는 입을 맞았는데

입술이 훌떡 뒤집어져서 돼지 입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한 여자는 이마를 정통으

로 얻어맞았는데 피가 터져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되였다. 딱- 딱-. 곤봉에 얻어맞

는 소리가 골수를 찌르는 것처럼 들려왔다. 네 명 다 죽도록 얻어맞고 울며 용서를 빌었

다.
“가서 세수해.”
피 터진 여자더러 간수가 소리쳤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주여, 보고 계시나이까?

며칠 후 조금 급(級)이 높은 듯한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손에 가위를 들고 들어왔다.
“노랑대가리들9) 몽땅 일어섯.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 대가리를 빡빡 깎아 놓겠다.”
7∼8명의 여자들이 일어섰는데 그중에 도문변방소에서 안경쟁이에게 얻어맞던 처녀애

도 있었다. 그 애의 머리칼이 특별히 노랗게 보였다.
“황색바람이 든 년들! 너, 나와.”
그 애가 무릎을 꿇고 앉자 머리채를 손으로 거머쥐고 머리칼을 싹둑 잘랐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그 애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었다.
“잘못? 네 에미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해. 이런 간나들은 못 고쳐!”하며 머리채를 휘둘

러 벽에다 짓찍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은 그 애의 무릎을 구두 발로 사정없이 짓

밟았다. 어린 것의 비명소리에 우리는 치를 떨었다.
‘짐승같은 악마들…….’
감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분개했다.
그날 오후였다. 점검을 하겠다며 갑자기 온 감방안의 사람들을 다 밖에 내보내는 것이

었다. 그날은 소한(小寒) 날이어서 맵짜기 그지 없었다. 홑옷바람에 2시간가량 밖에 세

워 놓았는데 우리 딸애랑은 너무 추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2시간 후 5명씩 들어가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한줄배기10) 20살도 되나마나한 처녀애가 검사를 하였는데 지독스러웠다. 나도 다른 네

명과 함께 검사받으러 들어갔는데 15살짜리 소녀도 있었다. 옷을 다 벗긴 후 한줄배기

여자가 와서 15살짜리더러 “너 시집갔어? 너 젖가슴 좀 봐. 더러운 간나새끼!”하고 그

애 귀뺨을 쳤다.
“아니요, 시집 안 갔어요.”
“안 갔어? 너무 주물러서 축 처졌는데 안가긴 뭐 안가?” 하며 허리에 찼던 가죽 띠로 그

애의 젖가슴이며 홀딱 벗은 몸을 굴뱀이 가게 때렸다. 앗 앗 소리치는 그 애의 비명소리

에 가슴이 찔렸다. 그 애더러 한참 욕질하고 때리던 그녀가 이번에는 40대를 넘은 한 아

주머니를 몰아세웠다.
“나잇살이나 건사했다고 그리 뻣뻣해? 건방진 간나새끼, 너 이 간나 맛 좀 봐라!”
“…….”
“다리 벌려. 이제부터 앉았다 일어섰다 500번 해.”
그 여자가 앉았다 일어섰다 100개를 좀 더 하고 비틀거렸다.
“개간나. 네 간나 새끼도 사람이니?”
그녀가 마구 욕질했다. 제 자식보다도 더 어린 것한테 체조를 받는 그 아주머니의 눈에

서 눈물이 흘렀다.
‘아, 불쌍한 조선 여성들! 주여, 보고 계시나이까? 구원 하시옵소서. 이 불쌍한 조선 여

자들을 구원해주시옵소서.’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가기만 하면 다시 중국으로 갈 테다

온성보위부에서 8일째 되는 날이었다. 한 남자가 보고를 잘못하였는데 간수가 그 남자

더러 나오라고 하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 남자의 정수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는데 머

리가 터져 피가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때리는데 그 남자가 기절해 쓰러졌다. 바

빠맞은11) 간수가 “야, 이 새끼를 데려다 세수시켜라” 하고 소리쳤다. 두 남자가 나와서

2호 감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10분 후에 정신을 차렸다. 맞은 사람이 2시간 후에 또

기절했는데 잠시 후 정신을 차렸다.

그 다음날 그 사람이 숨졌다. 바빠맞은 간수들이 우리들더러 “저 사람이 본래 병이 있

어서 죽었다. 너희들도 증명할 수 있지? 선생들이 저 사람을 때리지 않았지?” 하고 변

명했다. 결국 그 사람은 맞아죽고도 저절로 죽었다고 판명되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

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여. 이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생각해보면 감방 안에 있은 전 기간처럼 열심히 기도해본 적이 종래로 없었다.
죄수들은 감방 안에서 교양을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중국에 또 가겠다고 다짐들을 했다.

어떤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흥 나가만 봐라. 그날로 또 (중국으로) 갈 테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이렇게 지긋지긋한 열흘이 지나갔다. 그때 온성보위부에 적리12) 가 돌았는데 나도 앓

아 눕게 되었다.
11일째 되는 날 은덕군 보위부에서 화물자동차(목탄차) 한대를 가지고 데리러 왔다. 20

명가량 되는 여자들을 태우고 저녁 5시 반 만에 출발하였는데 도중에 힘이 딸려 자동차

가 다섯 번이나 멎어섰다. 그리하여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은덕군 보위부에 도착하였

다.

은덕보위부는 큰 청사와 작은 청사가 있는데 큰 청사는 사무실이고 작은 청사는 감방이

었다. 감방은 4개로 되어있었다. 나는 4호 감방에 갇혔었다. 딸은 2호 감방에 갇혔다.은

덕군보위부에 들어서는 첫 순간부터 어마어마했다. 온성보위부는 복잡하고 무질서했지

만 은덕군보위부는 규율이 엄했다. 다리를 방자 틀어 앉은 자세에서 골은 곧게 앞만 봐

야하고 까딱 움직여도 안 되었다. 손은 무릎 위에 주먹을 올린 자세에서 휴식 시간까지

유지해야만 하였다. 이 자세로 2시간가량씩 앉아있어야 하였는데 만일 조금 움직이는

것이 간수한테 발견되면 된벌을 받는다. 변소도 2시간에 한 번씩 휴식시간 외에는 갈

수 없다. 기침도 보고를 하고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욕이 차례지거나 벌이 차례진다.

“선생님 C감방 X번 기침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말하는 새 기침이 먼저 터져 나오지만

억지로 참아야 한다. 밤에 잘 때 코를 고는 사람이 있으면 온 감방이 기상하여 밤을 새

워야 한다. 벌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앉았다 섰다 100번∼200번, 엄중한 경우 500번

이상 다리를 우로 쳐들고 견지하기, 발끝을 세우고 꿇어앉은 자세에서 손을 뒷골에 붙

이기……. 가장 힘든 벌이 발끝을 세우고 앉기였다. 낮 시간은 줄곧 벌을 받으며 지나갔

고 밤 시간은 추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적리에 걸려 탈수가 심하다 보니 몸이 몹시

축 쳐졌다.

은덕군보위부에서는 국수를 150g 정도 주었는데 온성보위부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 말을 안 듣거나 규율을 위반하면 때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온성보위부보다는 점잖은

편이었다. 대신 온 하루 고정자세로 있는 것이 더욱 숨 가쁘고 온 육신이 다 쑤시고 아

팠다. 오히려 온성보위부보다 더 견디기 힘들고 갑절로 고독했다. 은덕군보위부에서 10

일간 구류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은덕군보안서 구류장으로 이관되었다. 나는 은덕군

보위부에서 발이 다 얼어 발가락의 발톱이 빠졌다. 은덕군보안서 구류장은 5개의 감방

이 있었다. 낡은 사무실 청사 앞에 새로 2층짜리 사무실을 짓고 있었고 뒤에는 낡은 감

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안서 구류장에서는 보위부에서 넘어온 문건에 따라 법적 제재를 준다. 비법월경(非法

越境) 횟수에 따라 로동교화소와 로동교양단련대로 나누어 처벌한다. 1차는 단련대 1∼

3달, 2차는 단련대 4∼6달, 3차 이상은 로동교화소에 보낸다고 한다. 보안서 구류장에

들어가면 감방규정부터 배운다.

첫째, 감방 안에서 절대로 말할 수 없다.
둘째, 감방과 감방 사이에 통방할 수 없다.
셋째, 감방 안의 벽과 바닥에서 낙서를 할 수 없다.
넷째, 감방 안에서 움직이려 할 때에는 근무 서는 선생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다섯째, 감방 안에 있은 사실은 절대로 밖에 나가 말할 수 없다.

창궐하는 전염병

은덕보안서 구류장에 들어가니 약 100명가량의 죄수들이 있었는데 거의 다 비법월경자

였다. 5개의 감방이 있었는데 2, 3, 4호가 여자 감방이고 1, 5호가 남자 감방이었다. 우

리 가족은 4호 감방에 들어갔다. 비법월경자들 중에 적리성 설사로 전염병을 앓는 사람

들이 많아졌다. 보안서 구류장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변소가 감방 안에 함께 있는데

다가 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변기 냄새가 나서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진드기가 너무 많아서 온몸이 물려 두드러기가 돋았다. 옴을 비롯한 피부전염병

과 대장염에 걸리는 사람도 늘었다. 비법월경으로 로동교화소 형기를 먹은 장기죄범들

도 많았다. 그때 우리 감방에 45살 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아들도 함께 구류되었다. 그

들은 비법월경 12회로 7년 형을 받고 엄마와 아들이 다 로동교화소로 갔다. 그리고 27

살 난 새각시가 있었는데 그는 남편과 가족이 한국으로 가려다가 체포되어 남편은 종신

감옥에 갔고 그녀도 3년 형을 받았다. 또 39살의 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는 핸드폰

을 가지고 밀수를 하던 도중 3년 형기를 받고 체포되었다. 감옥 안은 온통 중국과 관련

된 죄범투성이였다. 우스갯소리로 조선에서 도적질하고 강도질 하는 죄범들은 무사하

고 중국으로 왔다간 죄범들은 경을 쳤다.

보안서 구류장은 아침 6시에 기상하는데 기상 구령이 나면 절도 있게 일어나서 간수 선

생님을 향하여 경례를 한다. “앉으라!”하고 소리치면 올방자를 튼 자세로 손을 무릎 위

에 올려놓고 머리는 숙이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하루에 서너 번씩 휴식은 주지만 대소변

은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대변은 꼭 아침 기상해서 첫 시간에 봐야 하고 그외 시간에

는 온 하루 종일 볼 수 없다.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6시 밥은 하루 세끼를 주었는데 강낭쌀밥 150g정도를 주었다

. 그만하면 온성보위부 감방, 새별보위부 감방과 비교할 때 제일 양이 많고 식사질이 괜

찮은 편이다. 비록 기름 한 방울도 뜨지 않고 장 한 숟갈 넣지 않은 염장 소금국이지만

국도 주어서 좋았다. 나는 적리에 걸리다 보니 원래는 구류소 규정이 열흘인데 닷새 만

에 단련대에 이관되게 되었다.

노동단련대 생활

보안서구류장에서 5일째 되는 날, 나는 은덕군 로동교양단련대로 이관되어갔다. 은덕군

단련대 건물은 ㄱ(기역)자로 생긴 건물인데 사방은 널판자로 막고 3m되는 콩대를 울타

리 주변에 빼곡히 세웠다.

1월 27일경에 단련대로 들어가니 그 며칠동안 눈이 많이 와서 산에 길이 막혀 갈 수 없

었으므로 새끼 꼬기를 하고 있었다. 오전 한겻에 200m를 꼬아야 한 사람의 과제가 끝난

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은 아침 6시에 기상해서 마당을 쓸었다. 마당쓸기는 매일 아

침 일과이다. 마당을 쓸고 눈을 치고 7시가 되자 밥을 먹었다. 단련대의 밥은 100g가량

되었는데 염장국도 내어주었다. 8시가 되자 다시 마당에 모여서 인원점검을 하고 작업

지령을 주었다.
작업지령은 매 사람이 과제가 있었는데 직경 200cm이상 길이짜리 통나무 2대를 해 와

야 하였다. 왕복 50리 길이 잘 되였는데 올라갈 때는 내내 올리막이었고 내려올 때는 내

내 내리막이었다. 45°의 눈 덮인 산경사면을 올려다보면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빈 몸으

로 산길을 오르기가 더 힘든 것 같았다. 나는 앓는 몸으로 산에 따라갔는데 나무 한 대

를 메고도 내내 자빠지며 간신히 갔다 왔다. 5일간은 환자라고 약간 봐주더니 그 이후

로는 꼭 같이 두 대를 해오라고 하였다.

나무 2대를 메고 내려올 때는 눈 앞에서 별지가 튀고 사방이 노랗게 되다가 나중엔 새

까맣게 되며 쓰러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맥이 없어 대열을 잘 따라서지 못한다고

발길로 차서 빨리 걸으라며 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어버

렸으면 싶었다. 매일 산에 오를 때면 속으로 “주여 내게 힘을 주시옵소서.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기도를 했고, 산마루에 올라서면 “주여 감사합니다. 이기게 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 라고 기도했다. 아마 내가 하나님을 믿은 후 종래로 이때처럼 많은 기도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던 같다. 무거운 통나무를 끌고 지칠 때면 늘 찬송가를 속으로 불렀

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작업과제도 점점 어려워졌다. 콩대 직경 10cm이상 길이 3m이상짜리 10대씩 맡겨졌는

데 나는 8대를 지고도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아픈 몸으로 이악스레 일을 하니 사람

들이 누구나 다 나를 동정해주었고 도와주었다. 단련대 관리 성원들도 나에 대해 좋은

평판을 내렸다. 허리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는데 눈 우로 나무 짐을 끌고 내려올 때는 마

치 소가 멍에를 진 것 같았다.

나는 어렵고 힘들때마다 항상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지신 것을 생각했고 나를 사랑

해주시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며 힘을 얻고 이를 악물고 극복해 나갔다. 못 견디

게 그분들이 그리웠고 마음 속에 늘 그분들과 함께 있었다. 장출혈로 보름동안 못 먹고

허약 상태에 든 나로서는 실로 초인간적인 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한 달 반을 열

심히 한 결과 대(隊)에서 신용을 얻게 되었다. 짠 눈물은 얼마나 흘리고 지쳐서 쓰러진

적 또 몇 번이었으랴. 주님께서 날 사랑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준다고 생각

하니 저절로 울음이 났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짐을 품었네!”
늘 이 찬송을 부르며 고난도 웃음으로 이겼다.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 때 단련대에서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달아

나 성공도 하였지만 운이 나쁜 사람들은 다시 잡히기도 하였다. 만약 다시 잡혀오면 큰

경을 친다. 단련대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려고 앞에 세워놓고 마치 태권도 타격 대

상자처럼 때렸다.

한 여자도 일에 견디지 못하여 도망을 쳤는데 인차 뒤를 밟아 잡아왔다. 그때 콩대를 가

지고 관리원이 나오더니 그 여자를 사정없이 때렸다. 코피가 쏟아지고 입에서도 피가

나왔다. 그 다음날 그 여자가 산으로 올라가던 도중 도끼로 자기 머리를 내려쳤는데 다

행히 옆에서 인츰(인차) 말리다 보니 생명은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사상투쟁회

의가 벌어지고 매 사람들이 다 그녀를 비판하라고 하였다. 새벽 2시까지 비판회의를 하

고 벌을 받았다. 단련대에 들어오면 며칠 있다가 ‘공판’을 받는데, 공판이란 군중들을

많이 모집해놓고 보안서 사람들이 와서 비법월경자들의 비법월경 행위를 폭로하면서

본인이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투쟁회의였다. 나도 공판에 참가하여 공판 받았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남자 하나가 도주했다가 잡혀왔는데 몽둥이로 그 사람을

때려서 피가 터지게 했고 나중엔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져 병보석으로 내보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두 번이나 발생하였다. 단련대에 42살짜리 여자가 있었는데 작업조장을

맡았었다. 그 여자도 너무 힘이 들어서 도주했다가 그 다음날 잡혀왔는데 관리원과 남

자 조장이 그를 세워놓고 너무 때려서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부어서 형체를 가려볼 수

없었고 피를 한 소래 흘렸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2달 후 나는 신임을 얻고 독립임무를 맡았는데 30리길 되는 곳에 가서 매일 식량을

10kg정도씩 날아가고 밥을 해 먹이는 일이었다. 인원이 10명가량 되었다. 산에 나무하

러 가기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이것도 헐치 않은 일이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고 거두고 하면 또 점심밥을 해야 하고 점심 먹은 후 15리 되는 곳에 가서 식량을 매

와야 한다. 식량을 매 온 후에는 또 저녁을 지어야했다. 왕복 30리 길인데 2시간 반 정

도 걸렸다.

나는 독립임무를 맡고 매일 왔다갔다할 때면 불쑥불쑥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많았지만

어린 딸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단련대에서는 모범퇴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일을 잘하고 과오가 없고 생활을 잘하면 퇴소시켰다.

5월 말이 되자 단련대에서는 나에게 퇴소를 하라고 하였다. 나는 5월 말에 퇴소된 후 집

에서 병 치료를 하였다. 6월 10일경에 몸이 회복되어 건강히 많이 좋아졌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산에 나무하려도 가고 풀도

뜯었다. 매일 들에 가서 미나리를 뜯어다가 팔았다. 아무리 부지런히 뜯어야 하루에

4kg 뜯기가 바빴는데 1kg에 35원씩 주었다. 하루에 140원 정도 벌어서 300원씩 하는 강

냉이 반 킬로그램도 살 수 없었다. 오직 감자 2kg 정도 사면 고작이었다. 미나리도 원천

이 점점 줄어들어서 나중에 그것도 벌이가 안 되었다. 생각하던 끝에 나는 다시 세 식구

를 데리고 중국에 가려고 결심했다.

내 나라가 제일로 좋다고?

6월 16일, 나는 두만강 경비대에 있는 군대에게 도강비(渡江費)를 한 사람이 3만 5천 원

씩 주기로 하고 먼저 5만원을 주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우리를 두만강 연선으로 데리

고 나간 군인이 경비대 매복초소 있는 곳으로 고의적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서 자기는

도망치고 우리를 붙잡히게 하였다. 공도 세우고 돈도 벌고……. 그리고는 돈 5만원을 가

지고 달아나버렸다.

우리는 이렇게 되어 세 식구가 다시 구류되었다. 두만강 둑에서 붙잡히자 우리를 부대

본부로 후송하였는데 부대에서 창고에 가두었다. 창고란 1.6㎡이 되나마나한데 거기에

이미 3명이 구류되어 있었다. 6명이 창고에 갇혀 있었는데 창고 안은 침침하고 새까만

까막나라였다.

경비대 군관들이 나를 심문하면서 누가 데려다 주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만약 이름을 대면 나도 그 사람도 다 경치기 때문이다. 먼저 들어간 사람

세 명이 바닥을 차지하였으므로 우리는 좁은 뻬찌까13) 위에 앉아서 5일을 견디어야 하

였다. 뻬찌까 위는 세 명이 앉으면 바늘이 들어갈 틈도 없었다. 게다가 물 한 모금도 안

주고 밥도 주려하지 않았다. 소변을 보겠다고 하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남자들은

문을 힘껏 내밀고 조그만 연필이 드나들 수 있는 틈으로 소변을 보았다. 말이 틈이지 오

줌을 누면 잘 빠지지 못하여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른들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아이는 배고프고 목이 말라 울다 못해 지쳐버렸다. 눈도 뜨기 싫어서 축 늘어진 채 나른

해서 누워있었다. 10살짜리 딸애와 늙은 어머니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나는 가슴이 아파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는 주먹으로 쾅쾅 문을 두드렸다.

“아이에게 물 좀 주세요, 아이에게 밥 좀 주세요.”
“뭐야?”
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한줄배기 전사(일반 병사)가 문을 열고 소리 질렀다.
“삼춘……. 제발 이 애를 불쌍히 여겨 물 한 모금만이라도 주세요.”
“흥, 반역자인 주제에 물 달라고 다시 소리치면 죽여 버리겠다.”
그러고는 또 문을 쾅 닫아버렸다. 반역자! 그렇다. 우린 반역자이다. 그러면 너흰 뭐냐.

너희는 살인 악마고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이다.

‘개 같은 놈들…….’
나는 속으로 치를 떨었다. 잠시 후에 또 두드렸다. 온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두드렸다

.
“어느 새끼야? 개간나야?”
악에 받쳐 밖에서 문을 급히 열더니 그 한줄배기 전사가 들어왔다.
“너야? 싸가지 없는 년!”
“너네도 사람이야? 이 애한테 물 한 모금만 달라.”
나도 격분해서 항의했다. 내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상급인 듯한 군인이 또 한명 왔는데

그 사람이 아이에게 물을 갖다 주라고 명령했다. 정말 기막힌 세상이다. 물을 먹고 싶어

도 참아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아야 하고, 기침도 재채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 마음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세상이다.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란 근본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단련대에 있을 때 ‘내 나

라가 제일로 좋아’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밤에 노래학습시간에 제일먼저 부르는 것

이 이 노래다. 한 번은 단련대에 있을 때 노래시간에 한 여자가 졸아서 처벌을 받았는데

눈보라치는 바깥에 1시간동안 서서 이 노래를 부르며 떨었다. 또 한번은 단련대에서 김

치 도난 사건이 났는데 창고에 2kg가량 들어가는 통에서 김치를 도적질해 먹었다는 것

이었다. 그래서 도적을 사출해 내느라고 2시간동안 역전에서 단련대까지 <내 나라 제일

로 좋아>노래를 부르며 정보행진을 하였다. 지나가고 오는 사람들이 서서 구경하기도

하고 조무래기 애들은 대오의 뒤에서 웃으며 따라다녔다. ‘제일로 좋다’를 거꾸로 들으

면 좋겠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우리가족은 5일 만에 다시 보위부로 이관되었다. 보위부 감방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했

다. 누가 조금만 움직여도 전체 감방이 집체처벌을 받았는데 앉았다 서기 500번, 발끝

세우고 끓어 앉기를 2시간 이상씩 당해야 하였다.
나는 그때 3호 감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나더러 감방장을 하라고 하였다. 한번 들어왔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감방장이란 감방안의 사람들에게 규정을 알려주고 감방 안의

일체 행동을 보고하는 일이였다 감방장은 조금 움직이거나 말을 해도 괜찮았다. 통제한

다는 명목 하에.

그때 우리 감방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밥 먹고 식기가신 후 바칠 때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원래 보고 법은 “선생님 X호 감방 Y번 식기 몇 개 숟가락 몇 개 바칠 수 있습니

까?”인데 익숙되지 않아 자꾸 실수를 하였다. 그래서 전체감방이 일어나서 2시간동안

소리를 치며 복창하였다. 그 후로는 각성이 되여 보고법을 익히기 위해 누구나 애썼다.

나는 이때처럼 기도를 열심히 해본 적이 없다. 두 번째 가족이 잡혔으므로 벌이 엄중할

것이라고 누구나 말했다. 나는 무섭지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꼭 구원해 주

실 것을 믿었다. 또 사실 이 때처럼 마음이 편안한 적이 없었다. 지금 중국에서 나와서

생각해보니 조선에 있는 전 기간 당한 것은 내가 더 강한 사람으로 연단(단련)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열흘이 되자 보위부에서 나를 또 보안서에 넘겼다. 낯이 익은 보안서 구류장으로 또 들

어왔다. 간수들이 나를 보자 마치 구면처럼 “오, 너 또 왔구나 반갑다”며 농담을 했다.

나도 웃으며 “반갑습니다”라고 농담을 받아 넘겼다.
그때 보안서 구류장에 간수가 4명 있었는데 소위 1명과 나머지는 연장(계급장)에 3줄, 2

줄, 1줄짜리 전사들이었다. 소위와 3줄 배기는 그래도 괜찮았다. 앓는 사람이 있으면 약

도 사다주고 우리와 농담을 하면서 편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어쨌든 감옥이니까 움직이

거나 규율을 안 지키면 엄하게 욕을 하였지만……. 헌데 두 햇내기 전사들은 악착하기

그지없었다.

2줄 배기 간수의 특징은 밥그릇을 발로 차는 것이었다. 밥시간이 되면 두 줄로 맞추어

서서 밥그릇을 받을 준비를 한다. 구멍이 맨 밑에 있는데 선생들이 차판을 들고 오면 살

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밥그릇을 받은 후 또 다른 사람이 교대로 밥그릇을 이어 받아야

한다. 만일 밥 받을 때 자기 눈에 거슬리게 행동하면 금식처벌을 받거나 또는 국그릇을

차서 국벼락을 들씌웠다.

내가 첫날 보안서 구류장에 들어갔을 때였다. 두줄배기 전사가 거만하게 들어오더니 “

오늘 처음 들어온 간나들 다 일어나라.”고 하였다. 나와 함께 온 여자들 4명이 일어서자

“내 너네한테 감방 맛을 좀 보여주마. 앞으로 나와!”하고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앞

에 앉은 한 여자가 옆 사람과 말하다가 눈길이 간수와 마주쳤던 것이다. 5명이 살창 앞

으로 다가가자 손을 살창 밖으로 내밀라고 하였다.

꾸밋거리며 손을 내밀자 가죽혁대로 사정없이 때렸다.
손이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어졌다. 다섯 명이 연신 비명을 질렀다.
“개간나들, 다시 떠들어봐. 그땐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이러고는 횡-하고 나가버렸다. 맞은 손은 퉁퉁 부어올라 손가락도 움직이기 힘들었고

시퍼렇게 피멍이 졌다. 나는 사흘을 세수를 못했다. 손이 너무 저려서. 가면 갈수록 가

관이었다.

악착스러운 놈들

그날 저녁 우리 어머니가 들어간 감방에서는 더욱 장관인 일이 펼쳐졌다. 한줄배기 전

사가 교대하여 들어왔는데 한 여자가 옆의 사람과 말하려다 들켰다.
“4호 감방, 일어섯. 앉았다 서기 500번!”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100번 하고는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자 다시 무릎 끓어 앉히기

벌을 적용했다.
임신부도 있었는데 그도 함께 벌을 적용했다. 그 임신부가 못하겠다고 하자 “개간나,

거기 가서 살 땐 맛이 좋았겠지? 개 같은 종자를 받아가지고 와선 무슨 개소리야. 너 때

문에 너희 감방 혼 좀 나봐라” 그러더니 다시 앉았다 서기를 300번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고도 시원찮아서 감방 전체를 차렷 자세로 세운 다음 세숫대야 2개로 물을 날아왔

다. 쫙쫙 물을 그들의 머리위로 끼얹었다. 아마 10대야 남짓 들이치더니 거기 누우라고

하였다. 그들이 눕지 앉자 또 물을 쳤다. 그 감방 사람들은 물이 질벅한 바닥 위에 누워

그날 밤을 잠들었다.
내가 글재간이 없어서 그때의 광경을 묘사하기 바쁘다. 온몸이 젖은 사람들이 물이 질

벅한 바닥에 누워 잘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내가 쓴 이것은 간단한 사실을

나열한데 불과하다. 이보다 더 처참하고 비참한 일들이 수없이 많다.

구류기간이 끝나자 나는 놓여나게 되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내가 출옥하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혹시 많이 고이고(뇌물을 주고) 나오지 않았는가 하고 묻는 사람도 다 있었

다. 나는 고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감옥 생활 전 기간 오직 하

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간구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구원하였다.
후에 누군가가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빨리 피신하라고 일러주었다. 지금 임시로 내놓았

지만 또 언제 가둘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감방보안원이 나더러 사

진을 가지러 오라고 하였다. 예감이 불안했다. 분명 무슨 문건을 작성하는 것이 틀림없

었다. 나는 어머니와 딸애가 걱정스러워 그냥 집에 있겠다고 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우

시면서 “네가 살아있어야 우리 가족이 다 살 수 있다. 우리 걱정은 말고 빨리 피해라.”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딸애의 권고에 따라 내가 먼저 중국에 오기로 결심하였다. 일곱 달간의

옥중살이를 했지만 다시 잡히면 어쩌랴 하는 의구심도 들지 않았다. 잡히면 잡히고 죽

으면 죽고, 나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다시 중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생각해보면

반년동안 내 나라에서의 기간은 일장 악몽과도 같았다.

불쌍한 조선 사람들을 구원해주시옵소서

지금 거기(북한) 사람들은 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간다. 우리 동네에서는 죽을 먹는 집이

대다수인데 죽이라야 강냉이 가루 몇 술 넣은 시라지 감자죽이다. 하루하루 목숨을 연

명해가는 것이 너무 지겹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나도 어머니와 함께 감자이삭도

줍고 미나리도 캐왔으나 밀건 죽밖에 먹을 수 없었다. 지금 어머니와 딸이 어떻게 사는

지……. 나는 여기(중국)로 와서 앉으나 서나 줄곧 그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저리고

잠이 안 온다.

“주여, 나의 어머니와 딸을 잘 지켜 주시옵소서. 다시 만날 날 앞당겨 주시옵소서.”
이것이 매일 나의 첫 기도 제목이다. 그리고 불쌍하게 사는 조선 사람들의 처지가 너무

가슴 아프다. 전기불도 없는 까막나라에서 아무 희망도 기쁨도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사

람들. 선군정치랍시고 군대를 제일이라 하니 군인들이 마치 깡패와 같다. 대낮에 개인

집 돼지를 훔치고 감자며 돈을 협잡하고 무슨 일이든지 군대가 나서면 다 해결된다.

안전원들은 어쩌면 백성들을 긁어서 먹겠는가 하는 연구뿐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동정이 함정이다. 외상은 무상이다.”
이는 조선의 ‘명언’이다. 말 한마디를 해도 정치적으로 분석하여 죄를 만들고, 남을 동

정하면 자기가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현실이다.

꺼멓게 그을은 집안에서 천정이 다 떨어져 내리고 구들이 폭격 맞은 듯한 집에서 매일

을 힘겹게 사는 모습들……. 그들은 조선이 못사는 것이 미국놈 탓이라고 말한다. 세계

가 인류문명을 떠들며 인터넷화로 변화된 오늘. 이것을 아직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정치문맹으로 사는 이들. 하나님 아버지, 구원해주시옵소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주

시옵소서.

내 어머니 내 딸이 못 견디게 보고 싶다.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딸, 다시 만날 날

까지 안녕히……. 어머니는 꼭 너를 다시 데려오마.
생각해보면 난 산지옥에 갔다 온 듯한 감이 든다. 너무도 치 떨리고 격분한다. 나는 보

위부에서 나올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146조’에 손도장을 찍었다. 감옥에서

있은 일을 밖에 나가 절대로 누설하지 않는다. 만일 누설하는 경우에는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조선에 갔다 온 사람들 치고 그 모진 광경을 어찌 마음속에 묻어둘 수

있겠는가. 나는 조선이 하루빨리 통일 되어서 북조선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그날이 왔으

면 좋겠다. 나는 적은 힘이나마 그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힘을 보탤 것이다

나는 7월 22일, 꼭 일곱 달 만에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한 오빠의

도움으로 구명대를 끼고 강을 건넜다. 여기로 오는 경비는 한 고마운 분이 500원(한국

돈으로 8만원)을 대주어서 연길까지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내가 북조선에서 어려운 고난을 이길 수 있은 것도 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게

해주신 분, 늘 사랑하고 가르쳐주시던 분,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시던 많은 고마운 분들

이 나의 마음속에 늘 함께 있으며 힘과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도 모르는 분

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소중히 자리 잡은 분들이다.

나는 지금 궁전 같은 집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고 있다. 많은 고마운 분들이 나를

도와주셔서 늘 평안히 살고 있다. 나는 귀한 만남을 주신 하나님아버지께 진심으로 감

사드리고 이 귀한 만남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겠다. 끝으로 우리 난민들을 위하여 늘

위험도 고난도 달게 받아들이고 후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과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와 앞으로도 더 많이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린다.


| 단련대 생활규칙 |

1. 노동교양자들은 강한 노동과 육체적 단련 속에서 낡은 사상과 악습을 뿌리 빼고 사

회주의 새 근로자로 준비하여야 한다.
2. 노동교양자들은 하루정량 기준을 150%이상 무조건 수행하고 수행하지 못하였을 때

에는 연장 작업을 하여서라도 수행하여야 한다.
3. 노동교양자들은 작업장을 비롯한 출퇴근 규정을 자각적으로 지키며 집체 생활에 빠

짐없이 참가하여야 한다. 집체적으로 규율 있게 움직여야 한다.
4. 노동교양자들은 단련기간 학습과 조직생활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집체 생활에 빠짐없

이 참가하여야 한다.
5. 노동교양자들은 교양기간 고상한 공산주의적 도덕 기풍을 세워야 하며 서로 돕고 이

끌면서 생활해나가야 한다.
6. 노동교양자들은 교양기간 술 맥주를 먹을 수 없으며 장기와 주패를 비롯한 일체 오

락은 대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7. 노동교양자들은 단련기간 남녀간의 불필요한 접촉을 금지하여야 한다.
8. 노동교양자들은 단련자 면회는 노동시간외에 하여야 한다.
9. 노동교양자들은 설비와 자재, 기대를 아끼고 사랑하며 노동시간에 무책임하여 기대

설비에 사고 냈을 때에는 파괴손상 엄중성 정도에 따라 법적으로 엄중히 처벌하여 연장

처벌 또는 법에 넘겨 처벌한다.
10. 노동교양자들은 교양기간 도주하거나 사결승인을 받은 경우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

지 않으면 법에 넘겨 엄중히 처벌하며 인민보안성 교양대에 보낸다.
11. 노동교양자들은 노동교양기간 생활을 잘하는 경우 노동교양 기일을 축감 받아 돌아

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 교양 기일을 연장하거나 또는 인민보안성 교양대에 보

낸다.
12. 노동교양자들은 이 규칙을 꼭꼭 지키고 생활해나가야 한다.